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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義士)는 무엇을 위해 폭탄을 던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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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윤봉길 의사(義士)는 무엇을 위해 폭탄을 던졌나?
서울 둘레길 4-1구간에 걸으면서 서초구 양재동 윤봉길(1908~1932) 의사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타국에서 2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윤봉길 의사에 대해 알아봅니다. 지난 4월 29일은 상해의거 83주년으로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윤의사가 하려고 했고 원했던 조국의 해방과 독립은 이뤘지만, 몸을 던져 해방된 조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해방 70주년을 맞는 지금 스스로의 힘이 부족하여 자주국방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국강병없이 남에게 의존하여 국방을 유지한다면 어찌 자주독립국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나라 일본 아베정권은 과거를 부정하고 군사강국으로 달려가고, 중국의 파워는 엄청납니다. 앞으로 나갈 길은 무엇일까요?
서울 둘레길 4-1구간에 걸으면서 서초구 양재동 윤봉길(1908~1932) 의사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타국에서 2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윤봉길 의사에 대해 알아봅니다. 지난 4월 29일은 상해의거 83주년으로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윤의사가 하려고 했고 원했던 조국의 해방과 독립은 이뤘지만, 몸을 던져 해방된 조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해방 70주년을 맞는 지금 스스로의 힘이 부족하여 자주국방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국강병없이 남에게 의존하여 국방을 유지한다면 어찌 자주독립국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나라 일본 아베정권은 과거를 부정하고 군사강국으로 달려가고, 중국의 파워는 엄청납니다. 앞으로 나갈 길은 무엇일까요?
 
 
 
 
 
●탄생
 
매헌 윤봉길(尹奉吉,파평 윤 씨, 원래 이름 우의禹儀)은 1908년 6월 20일(음력 5.22) 충남 덕산군 현내면 시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9번지) 광현당(光顯堂)에서 5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려의 명장 윤관(尹瓘)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입니다.
 
도중도(島中島,반도안에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윤봉길 의사가 자신의 고향집 환경을 일컬어 사용하던 말)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抯韓堂, 한국을 건져 내는 집)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고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고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으먀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습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고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으며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치고 이때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습니다.
 
교육 계몽 활동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아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습니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고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 己巳年 日記>를 지었습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月進會),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습니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뤘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金九)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습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데 목적이 있었고 당시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자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으며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렸습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고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결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불발하였습니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하자 일본 헌병들이 윤봉길을 덮쳐 구타하였고 윤봉길은 구타를 당하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습니다.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형 순간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지만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는데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복수였습니다.
●사후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 발굴을 부탁하여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6년 3월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같은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 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비위를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하었고 2012년에는 그의 일본 순국 기념비에 말뚝 테러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효창공원의 묘
 
 
 
● 상해 의거 평가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에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국의 주석 장제스는 이후 윤봉길의 상해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독립운동가 겸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며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돕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 신문 사진 조작 여부
▶가짜다
2011년 3월 1일 SBS 스페셜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 방송에서 윤봉길의 사진은 조작으로 밝혀졌습니다. 상해 총영사관의 외무성 경찰사에서는 "윤봉길은 두들겨 맞고 기절해 군인과 헌병의 힘에 의해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사진 두 장또한 컴퓨터 그래픽 판독 결과 각각 동일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진짜다.
 
윤봉길 의사의 친조카 윤주 매헌기념관장(2015.04.26 연합뉴스)
 
"연행사진과 조사 후 보도된 인물 동일"
1932년 5월 1일 아사히 신문에 보도된 연행사진은 1976년 보물로 지정됐으나 체포된 사람이 윤봉길 의사와 닮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진위 논란이 일었고, 이런 와중에 2008년 4월 보물에서 해제됐습니다.
 
국가보훈처가 조사에 착수해 같은 해 10월 이 사진이 진짜가 맞다고 공식 결론을 내렸습니다.
 
2015.4.월 윤주 기념관장은 조만간 연행사진을 보물 재지정도 신청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 기념관
①1987년 윤봉길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은 국민의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고 매헌은 현재 양재시민의 숲역명의 부명副名이기도 합니다.
 
②1963년 윤봉길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고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으며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습니다.
 
충의사는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본전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고 성장기 지역은 윤봉길이 4세때부터 망명전 23세까지 살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윤봉길의 동상이 있으며 생가지역에는 도중도(島中島,반도안에 있는 섬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윤봉길 의사가 자신의 고향집 환경을 일컬어 사용하던 말), 광현당, 부흥원 등이 있습니다.
 
예산 충의사
 
 
 
③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이 있었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에 윤봉길기념관이2015.4월 재개장했습니다.
 
중국 상해 윤봉길 기념관
 
 
 
●유언
2005년 12월 18일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순국 73주기를 맞아 유언 친필 사본을 공개했습니다.
윤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을 답사한 직후 홍커우 숙소인 동방공우(東方公寓)에 돌아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했는데 이 자리에서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는데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na-;출처: 위키백과,유튜브, 윤봉길 기념 사업회,구글,네이버,ytn ,두산 동아백과
 

 
※ 원문보기
문화재·역사·전
• 윤봉길 의사義士 기념관 탐방기
• 윤봉길 의사(義士)는 무엇을 위해 폭탄을 던졌나?
• 고문헌 속의 누각과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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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