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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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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리 영모재(永慕齋)
2024년 1월 1일
발간사
about 임실의 재실
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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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영모재
【향토】
(2024.01.02. 19:17) 
◈ 봉강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성수면 봉강리, 임실~남원간 도로에서 좌측으로 봉강리 덕치 마을로 가다가 다시 좌측으로 약 1㎞쯤 가면 옥녀봉 중턱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진주 강씨의 선조 강위황(姜渭璜)의 재실로 순조 19년(1819)에 건립되었고, 광무 3년(1899)에 중수된 재실이었으나 전주~순천 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현 위치로 옮겨졌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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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성수면 봉강리, 임실~남원간 도로에서 좌측으로 봉강리 덕치 마을로 가다가 다시 좌측으로 약 1㎞쯤 가면 옥녀봉 중턱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진주 강씨의 선조 강위황(姜渭璜)의 재실로 순조 19년(1819)에 건립되었고, 광무 3년(1899)에 중수된 재실이었으나 전주~순천 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현 위치로 옮겨졌다. 강위황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5살 때에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15세 때에 부모를 추모하여 묘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특히 그는 사화를 피해 함양에서 임실 성수 오류동으로 은거한 이 지역 진주 강씨(晋州 姜氏)의 입향조이다.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현대식 건물이며 현판이 7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1. 덕재 영모재에 관한 서술(永慕齋 敘事)

 
묘소에 재실을 짓는 것은 오랜 일 일지어다. 진(晉)나라 때에는 병사(丙舍121))를 지었고, 당(唐)나라 때에는 향정(享亭)을 지었는데, 왕 씨(王氏)의 춘양정(春兩亭)과, 전 씨(錢氏)의 명발당(明發堂)이 이미 그러한 형태였으니, 모두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과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을 기탁한 것일 따름이었으리라.
 
선조께서 여막을 짓는 아름다운 정성을 드러내 후대에 큰 덕을 이을 곳으로 삼았던 것은 우리 동방에서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리라. 세밑에 윤달이 든 봄에 운수(雲水)의 종인(宗人) 걸(傑)이 찾아와 5대조께서 마음의 재계(心齋)를 굳건히 지켜 오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공(公)은 효성이 지극하여,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을 적에는 마치 다 큰 어른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듯이 하였으며, 열다섯이 되어서는 묘소에 여막을 짓고 추복(追服)을 하였는데, 아무리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할지라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묘소를 살피고 그렇게 생을 마침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고 하였다.
 
4대조께서는 선인이 남긴 효(孝)를 따라 행함에, 여막이 있던 묘소의 옛터에 재실을 짓고, 편액에 ‘영모(永慕)’라 새겼으니, 선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후손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밝게 비춘 것이리라. 바라건대, 나는 앞서 언급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효(孝)"라 말하고자 하노라.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추급하여 상제(喪制)를 마치는 것은 옛 사람 또한 행하셨던 것이니, 이는 참으로 스스로 극진히 행한 부분122)이요, 길이 복(福)과 자손을 주어 선조의 훌륭함을 천명하는 것 또한 효자의 집안에서는 흔히 얻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심히 먼 데에 머무르고 있음에 이 재실에 오를 수는 없지마는, 남겨진 맑은 유풍(遺風)을 그리며, 글로써 아름다움을 찬송하고자 하노라. “나는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효성을 이어 조상의 유업을 빛내길 바라노니, 그렇게 된다면 재실을 변함없고 여유롭게 지켜낼 수 있으리니, 그것은 이 재실의 운이 아닐 것이다.” 재실은 기묘(己卯)년에 창건되고, 기해(己亥)년에 중수되었는데, 후손인 걸(傑)의 세대에 재실이 중수되었으니, 그 효성이 대대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7년 3월 종인(宗人)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시영(時永)이 삼가 적노라.
 
 
 

1.1. 永慕齋敘事

 
墓之舍古矣, 在晉為丙舍, 在唐為享亭, 若王氏之春兩亭, 錢氏之明發堂, 是已然, 是皆寓履露123)之感, 攀柏124)之思而已.
 
若其表先人廬墓之懿, 為後承景德之所, 則吾東之多聞. 歲卒無閏春, 雲水宗人胤傑來言, 其五世祖守心齋125), 公篤於孝, 五歲喪怙, 情哀慕如成人, 及年十五, 追服126)廬于墓, 雖甚風雨, 未嘗一日不展省以終身, 祁人到今稱之.
 
四世祖克追先孝, 就廬墓舊址, 建齋扁以永慕, 所以表彰先美而昭後觀也. 願發之一言, 余作而曰孝矣哉. 夫廬墓追制, 古人亦嘗行之, 此固自盡處, 而若其錫類祚胤, 用闡先休, 是又孝子家之所未嘗多得者, 顧不盛歟.
 
余居甚遠, 無以登是齋, 而想遺風清, 以文字用替嘉頌曰: "我願君家子孫, 世趾厥孝, 毋忝堂構, 則是壽其齋於無斁又豐, 非此齋之幸也." 齋始建於己卯, 重修於己亥, 重修在杰之世, 可見其世於孝也.
 
 
七年三月 宗人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時永 謹書
 
 
 

2. 덕재 영모재 “장산서사(壯山書舍)를 읊노라”에 차운하여 -시축(詩軸) 속의 운(韻)

 
雲水東南占地澗,  운수(雲水) 동남쪽에 대지와 개울을 보듬은 그 곳엔
名亭表出士林間  이름 난 정자가 사림들 사이에 우뚝이 아름다운 이름을 드러내고 있도다
誰知望考黃陵宅,  그 누가 알았겠는가, 멀리 황릉(黃陵127))의 묘가 바라다 보일 줄을,
因作藏書白石山  이러한 까닭에 백석산(白石山)에 서사(書舍)를 한 채 짓노라.
詩禮百年宜美趾,  백 년 토록 전해온 시와 예(詩禮)에 조화로이 담겨진 아름다운 자취,
谿巒八景且開顔  시내와 봉우리가 만들어 낸 팔경(八景)이 얼굴을 활짝 펴누나.
藍翁文脈今湖左,  남옹(藍翁)의 문맥(文脈)은 지금 호남 땅에 자자하니,
負笈諸生幾往還  책을 챙겨들고 찾아오는 이들의 오가는 발걸음이 몇인지 모르겠구나.
 
용집(龍集 세차(歲次)) 신축(辛丑)년 황양용인(黃楊容人) 진사(進士) 희영(羲永)이 쓰다.
 
 
 

3. 덕재 영모재 삼가 차운하다(敬次)

 
表築享亭屆六旬,  재실이 이곳에 세워지고, 육십 회갑의 세월이 흐른 지금,
族親周合敘情新,  친족들 함께 모여, 풀어놓은 애잔한 정 새록새록 하여라.
靈先十代山藏壽,  열 대를 이어온 신령한 선조는 긴 세월 산 속에서 살아가고
裔后百年里處仁,  후손들은 백 년 세월을 어진 마을에 살아왔구나.
墻下隱巖眠佛老,  담장 아래 가리워진 바위엔 불노(佛老)가 잠들어 있고,
簷前列嶂舞仙人,  처마 앞에 늘어선 봉우리엔 선인들 춤추니.
令朝視願求何事,  이 좋은 날 아침, 무엇을 빌어야 할꼬.
長使來孫福錄均  길이 자손들에게 복록이 고루 닿기를 빌어 보리라.
 
후손(後孫) 승희(昇熙)가 삼가 짓노라.
 
 
 

4. 덕재 영모재 회갑(永慕齋 回甲)

 
六已既回又日旬  일 주갑(周甲)이 지나고, 한 해가 더 지난 지금,
惟新如舊舊如新  새롭고도 옛 모습인 듯, 옛 모습이고도 새로운 듯 하구나.
諸生員受詩書禮  생원들은 시(詩)·서(書)·예(禮)를 전수 받아
永世有光孝友仁  기나긴 세월 그 빛을 머금고서, 孝와 仁이 벗이 되었구나.
明址拱環青玉嶂  밝게 빛나는 터는 푸른 옥과 같은 봉우리 에워싸고,
同年記得白頭人  동년(同年)들은 백발의 노인 기억하고 있는지라,
秋霜春露進思地  가을 서리와 봄 이슬은 그리운 땅으로 나아가
翠栢森松影鎖均  비취빛 측백나무와 솔숲 그림자 고루 드리우네.
 
후손 휘영(彙永)이 삼가 짓노라.
 
 
 

5. 덕재 영모재일 주갑을 맞이하여(永慕齋 回甲)

 
一齋創建六回旬  한 채의 재실 세운 지 육십 해가 되었거늘,
武棧同春舊益新  굳건한 건축물엔 봄기운 가득하여 오랠수록 새롭구나.
森松園大壠垂蔭  솔숲이 이룬 커다란 동산은 언덕에 녹음 드리우고,
古柞村深居擇仁  깊이 자리한 옛 촌락은 어진 곳을 택하여 살고 있음이라128).
苾芬百代靈先祖  기나긴 세월 짙은 향기 발하는 신령스러운 선조여,
嗣葺千秋祝後人  천추에 길이 이어받아, 후손들에게 복을 베푸소서.
履最霜雪追思遠  그 어느 때보다 서리와 눈 밟을 적에 그리운 마음 더한 법이니,
一服兒孫誠學均  우리 자손들 끊임없이 성실한 배움 변치 않으리라.
 
후손 옥형(玉馨)이 삼가 짓노라.
 
 

 
각주
121) 병사(丙舍) : 묘지 근처에 있는 방으로, 여막(廬幕)을 가리킴.
122) 자진(自盡)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상》의 “어버이의 상은 참으로 스스로 극진히 해야 할 일이다(親喪固所自盡也)”에 보임.
123) 이로(履露) : 선조를 사모함. 《예기(禮記)·제의(祭義)》의 “봄에 이슬이 내려 젖어들면, 군자는 이슬을 밟으며 성묘하고, 반드시 슬픈 마음을 갖는다(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에 보임.
124) 반백(攀柏) : 어버이를 잃은 슬픔을 말함. 《晉書 · 王裒列傳》의 “진(晉)나라의 왕부(王裒)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신의 부친이 사마소(司馬昭)에게 죽임을 당하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그 옆의 측백나무를 붙들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나무에 흘린 눈물로 인해 나무가 말라 죽었다”에 보임.
125) 심재(心齋) : 마음속의 재계라는 의미임. 즉 마음을 텅 비워 순일하게 하는 것을 말함.《장자(莊子)·인간세(人間世)》의 “오직 道는 텅 빈 곳에 모이니, 텅 비워진 것이 심재이다(唯道集虛 虛者心齋)”에 보임.
126) 추복(追服) : 어버이의 상을 당했을 때, 사정 상 상주 노릇을 하지 못한 경우, 후에 追及하여 복(服)을 입는 것을 말함.
127) 황릉(黃陵) : 황릉묘(黃陵廟)는 순(舜)의 두 비(妃)의 사당인데, 순이 남순(南巡)하다가 창오산(蒼梧山)에서 죽자, 두 비(妃)는 소상 강가에서 슬피 울다가 죽게 된 것에서 그 뜻이 보임.
128) 택인(擇仁) : 인후한 풍속을 지닌 마을을 가리어 거한다는 의미임.《論語(논어)·里仁(이인)》의 “공자(孔子)가, ‘마을에 어질고 후덕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다우니, 그러한 마을을 가려서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에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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