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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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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리 이로재(履露齋)
2024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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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이로재
【향토】
(2024.01.02. 21:06) 
◈ 용정리 이로재(履露齋)
이 재실은 오수면 용정리 용정마을 제각골 안쪽에 있다. 이로재(履露齋)는 효령대군의 증손인 춘성정의 차손 이경윤(李慶胤)의 재실로, 팔작지붕 위에 기와를 얹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전주이씨 문중에서 1940년에 지었다. 현판은 11대손 윤의가 썼고 6개의 주련이 있으며 앞에는 대문이 있는데 대문은 5칸으로 가운데가 솟을대문이고 양쪽에 2칸씩의 공방이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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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리 이로재(履露齋)
 
이 재실은 오수면 용정리 용정마을 제각골 안쪽에 있다. 이로재(履露齋)는 효령대군의 증손인 춘성정의 차손 이경윤(李慶胤)의 재실로, 팔작지붕 위에 기와를 얹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전주이씨 문중에서 1940년에 지었다. 현판은 11대손 윤의가 썼고 6개의 주련이 있으며 앞에는 대문이 있는데 대문은 5칸으로 가운데가 솟을대문이고 양쪽에 2칸씩의 공방이 있다. 또한 동쪽과 서쪽에 각기 작은 문이 있어 편리함이 있고, 재실 앞 밭에는 연대 미상의 불상 1기가 있다.
 
 
 
 

1. 용정 이로재 중건기(履露齋重建記)

 
선영으로 가는 길에 나아가면, 곧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집이 있고, 제전(祭田)을 두어서 제수(祭需)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가난하고 쇠락한 가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드시 그 집안은 그 지역에서 행세하는 집안이고, 자식들이 부형에게 복종하고, 보본(報本)이란 것을 알아서, 가문의 마음을 한가지로 모아 수만 가지 일에 합당할 것이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남원의 용정 후록에 봉안되어 삼백년이 지나는 동안 묘소를 살피는 일이 바뀌지 않았다. 충의위어모장군(忠義衛禦侮將軍) 이경윤(李慶胤)과 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아들 충의위(忠義衛) 욱(昱)의 묘소이다.
 
이씨가문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자손들이 떨쳐 일어나 안으로는 집안에 효도하고 공경하면 밖으로는 나라에 충성하고 믿음직하며, 덕망과 학식으로 유명한 후손들이 울연히 일어나 사족의 의표가 된 것은 아마도 또한 공의 두 집안이 남긴 음덕 때문이니 이어가야 할 것이다.
 
좌측에 오래된 재실이 있는데, 늘상 집이 낮아서 몸도 들일 수 없다고 걱정하니, 11세손 성의(星儀)와 용의(龍儀), 안의(安儀) 등이 종종의 재물을 모아서, 여섯 칸의 재실을 세워서 넓히고, 구재실로 문을 삼아서 경진(庚辰)년 가을에 공사를 마쳤다.
 
장손 기마(起馬)와 유사 기종(起琮)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지만, 멀리 있는 사람이라 쉽게 잊었다. 세공으로서 이루어지고, 선조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에 슬퍼서 그런 것이다. 그 마음이 진실로 허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이 제사를 지냄에 반드시 공경하여 좌우에 있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대개 신을 구함에 황홀하여 있는 듯 없는 듯한 즈음에 신(神)을 구하고, 나의 정백(精白)하고 순일한 정성을 다하여 ‘넘실넘실 귀로는 그 소리를 듣는 듯이, 눈으로는 그 색을 보는 듯한다. 무릇 정성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고, 마음에 있는 것은 고금(古今)이나 피차(彼此)간에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 이 재실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재실에 들어가면 곧 엄숙히 제사에 임하고, 엄연히 반드시 보일 것이니, 그 재실을 지은 것이 진실로 이와 같지 않겠는가. 이 또한 정성이니, 이씨가문에서는 힘쓸지어다.
 
신축년 음력 11월 중순에
서흥(瑞興) 김규태(金奎泰) 쓰다.
 
 
即其邱墓之阡 而為齋所之室 因置祭田而具籩爵 此非單寒零替之族 所能為也 必其門戶稱於州里 子弟服於父兄 然後能知報本之義 能一闔門之心而萬事于當꓌ 何其懿哉
 
有封꓌南原之龍井後麓而歷三百載省掃不替在 故忠義衛禦侮將軍李公慶胤與其配全州崔氏子 忠義衛昱之藏也 李氏南之望也 而子孫兟振 內而孝弟于家 外而忠信于邦 德學名弟 蔚然為士族之儀表 蓋亦公兩世遺蔭 令其꓌述也 蓋左舊有齋 常患爲庳難容 十一世孫 星儀與龍儀安儀 鳩集宗財 刱建六檻 以恢之 用舊舍而為門 以庚辰秋訖功 使胄孫起馬 有司起琮 請有記於不佞 夫遠在人之所易忘也 惟以歲功234)之成而報饗于先人 霜露235)之履 而怵愴乎 其心非茍以備虛禮而已 故聖人之祭也 必敬如在如在236)云 故蓋求神求恍惚有無之際而致吾精白純一之誠 洋洋乎耳如聞其聲 目如見其色矣 夫誠則存乎心 存乎心 故無古今彼此殊也 抑未知齋於是꓌ ꓌能入室而僾然臨事 而肅然必見 其所為齋 故否苟能如是 此亦誠矣 許李氏勉哉
 
辛丑 陽復月 中浣 瑞興 金奎泰記
 
 
 

2. 용정 이로재 충경공 신도비 창건 포미기(忠景公神道碑刱建褒美記)

 
천하에 오륜이 기울어지면서 친족들이 거처하는 곳에 구경(九經)이 먼저라고 세간(世間)에 퍼지게 되었다. 정이 두텁고 화목한 것[敦睦]을 으뜸 된 자리에 두는 것[居首]은 하늘이 엮어놓은[天屬] 사랑이며 종족들의 친밀함이다. 옛 성인들이 귀중하게 여기고, 세상 사람들이 흠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근원이 없는 강물이 없는데, 하물며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선조 없이 태어나는 이치가 있겠는가. 우리 선조이신 충경공의 묘가 운암면 종산리에 있는데, 신도비를 아직 세우지 못하여 한스러움을 가진 것이 오래되었다.
 
신해년 가을 9월에 유사인 갑의(甲儀)와 영재(永宰) 두 사람이 신도비 건립을 주창하니, 모든 종친들이 다 좋다하였다. (신도비건립)을 추진하고 찬조금을 모은 지 3년이 지난 갑인년 3월에 마침내 묘 아래에 위안이 되는 신도비를 세우니, 자손들의 정성을 가히 볼 수 있었다. 이에 각각 정성스레 힘을 보태고 쌀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현판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는 증표로 삼고자 한다
 
갑인년 삼월
 
* 명단은 생략
 
 
自五典斜於天下 而親族所在 先九經 行於世間 敦睦居首 天屬之愛 宗之親 古聖之所貴重而世人之所欽慕者也 故天下未有無根之木 無源之水 況人於其間 豈有無先祖而能生之理哉 惟吾先祖忠景公墓 在雲岩面 鐘山 而神道碑 未成 齊恨者久矣 辛亥秋九月 有司甲儀永宰兩人 神道碑建立主唱 諸宗咸可 推進讚助 越三年甲寅三月 遂竪于墓下慰安神道 子孫之誠於斯可見 而各盡誠力出米者 記名於板上 永久不忘之標
 
甲寅三月 日
 
 
 

3. 용정 이로재 승유재 중건 의연 방명록(承裕齋 重建 義捐 芳名錄)

 
임실 운암면 운종리 종산 묘좌원은 우리 선조이신 시호 충경공 호 천묵재와 정부인 선산임씨께서 영원히 묻힌 곳이다. 재각과 고사 등이 경인년(1950) 전란 때 화재로 완전히 훼손된 이래로 십여 년간을 무덤을 살피고 제사지내면서 제관들이 잘만한 곳이 없었다.
 
기해년(1959) 겨울에 종손들이 재실을 중건하자는 의견을 모으고, 경자년(1960) 봄에 먼저 여섯 지파에서 28가마의 쌀을 모아서, 재각의 토지 대금으로 38가마를 주고, 또 둥근 소나무를 잘라서 목재로 가공하고, 또 나머지 재목들을 모으는데 140만원을 썼다. 돈을 경영하여 가을에 낙성을 고하니, 60여 만원이 부족하였다. 이에 부득이 각 집마다 의연금을 구하여 전후의 경비 일체를 청산하고, 이후 추모하는 귀감으로 삼고자, 하나하나 이름을 기록하여 명시하고자 한다. 이 이로재(履露齋)는 원근의 친족들이 빈번하게 모이에 회합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현판에 새기에 걸어둔다.
 
신축년(1961) 11월
 
 
任寶之雲岩面 雲鐘里 鐘山 卯坐之原 惟我先祖謚忠景 號天默齋 與貞夫人 善山林氏 萬年藏也而齋閣及雇舍 全燬 於庚寅兵燹 伊來十年間 省掃 齋宿無所依
 
己亥冬 僉宗齊發重建之議 庚子春 先聚六派二十叭米 以齋閣基地代價三叭除 給 且伐環松為材 又放餘材集 百四十萬園 金經之營之 秋而告成 不足六十餘萬園 故不得已 逐戶義捐 前後經費一端 清算後 欲為來後追慕之鑑 一一記名 以明僉示 此履露齋 遠近宗族 頻繁會合之所 故登板以揚之
 
辛丑至月 日
 
 

 
각주
234) 세공(歲功) : 일 년 중 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의 절기의 순환, 또는 일 년 농사의 수확을 뜻한다.
235) 상로(霜露) : 부모와 선조에 대한 애틋한 생각. <예기(禮記)> 제의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거든, 군자가 그것을 가면 반드시 처창한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이는 결코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註)에 “이는 계절의 변화에 어버이 생각이 나서 그런 것이다.”라고 하여, 가을이 되면 돌아간 부모를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는 의미를 말하였다. 상로지사(霜露之思). 상로비(霜露悲), 상로감(霜露感)
236) 여재여재(如在如在) : <예기> <중용>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재계하여 깨끗이 하고 성장(盛裝)하여 제사를 받드니, 넘실넘실 그 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니라(使天下之人으로 齊明盛服 以承祭祀하니 洋洋乎如在其上하며 如在其左右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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