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25] 평북 의주 출신 일제 밀정이다.
대한제국 외아문(통리아문) 주사 출신으로 1906년 관서지방 출신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서우(西友)학회가 조직되자 참여했다.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 총무를 지냈는데, 안창호, 이갑, 박은식, 이동휘 등이 주도한 서북학회는 기존의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해 창설했다. 회원은 서북 사람으로 국권 회복을 원하는 2300~2500명이 참여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1913년 조선총독부 밀정이 돼 북경에서 일제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는 초기 중화민국 총리를 지내기도 한 북양군벌의 거두 단기서의 비서로 있으면서 또 다른 고급 밀정
정운복(초대 서북학회 회장)과 연계해 10여년간 암약하면서 많은 청년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그는 만주와 중국에 일제 밀정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와 독립단체에 접근하여 정보를 캐내어 일제에 알려주거나 밀고하고, 이들을 회유하는 반민족 행위를 했다. 김달하는 북경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접근하여 수많은 정보를 빼돌려 동지와 민족을 팔아먹고 혁명운동을 파괴하던 인물이다. 심산
김창숙과 우당
이회영 등에 접근하려다 밀정임이 드러났다. 1925년 3월30일 박용만의 귀순공작을 시도한 혐의로 독립운동 단체인
다물단과
의열단 단원들에 의해 처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