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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충렬전 (劉忠烈傳) ◈
◇ 권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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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판본)
1
유충렬전 (劉忠烈傳) 권지상
 
 
2
각설(却說)이라 대명국 영종황제 즉위 초에 황실(皇室)이 미약하고 법령이 불행한 중에 남만 북적과 서역이 강성하여 모반할 뜻을 둠에, 이런고로 천자 남경에 있을 뜻이 없어 다른 데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시더니, 이때 마침 창혜국(고대,중국 동방에 있었던 나라이름) 사신이 왔음에 성은 임이오 명은 경천이라 하는 사람이 왔거늘 천자 반겨 인견(引見)하시고 접대한 후에 도읍 옮김을 의논하시니 임경천이 주왈,
 
3
"소신이 옥루에서 육대산천을 망기하오니 금황지지가 마땅하옵고 천하명산 오악지중에 남악 형산이 가장 신령한 산이요, 일국 주룡이 되었고 창오산 구리봉은 변화하여 외청룡되었고 소상강 동정호는 수세가 광활하여 내청룡되어 있어 내수구를 막았으니 제왕주가 장구 할 것이요, 또한 소신이 수 년 전에 본국에서 망기하온즉 북두칠성 정기가 남경에 하강하고 삼태성 채색이 황성에 비쳤으며 자미원 대장성이 남방에 떨어졌으며 미구에 신기한 영웅이 날 것 이니 황상은 어찌 조그마한 일로 이러한 금성지지를 놓으시며, 선황제 마마 구방지지를 어찌 일조에 놓으시리까."
 
4
천자 이 말을 들으시고 마음이 쇄락하여 도읍 옮기심을 파하시고 국사를 다스리니 시절이 태평하고 인심이 조안(큰 탈이 없이 편안함) 하더라.
 
5
이때 조정에 한 신하 있으되 성은 유요, 명은 심이니 전일 선조황제 개국공신 유기의 십 삼대 손이요 전병부상서 유현의 손자라, 세대명가 후예로 공후 작록(爵祿)이 떠나지 아니하더니 유심의 벼슬이 정언 주부에 있는지라, 위인이 정직하고 성정이 민첩하며 일심이 충성하여 국록(國祿)이 중중하니 가산이 요부하고 작법이 화평하니 세상 공명은 일대에 제일이요, 인간 부귀는 만민이 칭송하되 다만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어 매일로 한탄하여 일년 일도에 선영(先塋) 제사 당하면 홀로 앉아 우는 말이,
 
6
"슬프다! 나의 몸이 무슨 죄 있어 국록(國祿)을 먹거니와 자식이 없으니 세상이 좋다한들 좋은 줄 어찌 알며 부귀가 영화롭되 영화된 줄 어찌 알리. 나 죽어 청산에 묻힌 백골 뉘라서 거두오며, 선영향화(조상에 제사 지냄)를 뉘라서 주장하리."
 
7
하염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지라.
 
8
이렇듯 설워하니 부인 장씨는 이부상서 장윤의 장녀라. 주부 곁에 앉았다가 일심이 비감하여 왈,
 
9
"상공의 무후(자녀가 없음)함은 소첩의 박복함이라 첩의 죄를 논지컨데 벌써 버릴 것이로되 상공의 음덕으로 지금까지 부지하오니 부끄러운 말씀을 어찌 다 하오리까. 듣사오니 천하에 절승한 산이 남악 형산이라 하오니 수고를 생각지 말고 산신께 발원하여 정성이나 드려보사이다."
 
10
주부 이 말을 듣고 대왈,
 
11
"하늘이 점지하사 팔자에 없었으니, 빌어 자식을 낳을진대 세상에 무자한 사람이 있으리오."
 
12
장부인이 여쭈오되,
 
13
"대체를 생각하면 그 말씀도 당연하되 만고 성현 공부자도 이구산에 빌어 났고 정나라 정자산도 우성산에 빌어 보사이다."
 
14
주부 이 말을 듣고 삼칠일 재계를 정히 하고 소복을 정제하여 제물을 갖추고 축문을 별노이 지어 가지고 부인과 함께 남악산을 찾아가니, 산세 웅장하여 봉봉이 높은 곳에 청송은 울울하여 태고시를 띄고 있고, 강수는 잔잔하여 탄금성을 도도웠다. 칠천 십이 봉은 구름밖에 솟아 있고 층암 절벽 상에 각색 백화 다 피었고, 소상강 아침안개 동정호로 돌아가고 창오산 저문 구름 호산대로 돌아들며 강수성을 바라보며, 수양가지 부여잡고 육칠 리를 들어가니 연화봉이 중계로다. 상대에 올라서서 사방을 살펴보니, 옛날 하우씨가 구년지수 다스리고 층암절벽 파던 터가 어제 하듯 완연하고 산천이 심히 엄숙한 곳에 천제당을 높이 묻고 백마를 잡던 곳이 완연하였고, 추연(웅덩이)을 돌아보니, 옛날 위부인이 선동 오륙 인을 거느리고 도학 하던 일층 단이 무너졌다.
 
15
일층단 별로 모아 노구밥(산천의 신령에게 제사하기 위하여 노구솥에 지은 밥)을 정결히 담아 놓고 부인은 단하에 궤좌(跪坐 : 꿇어앉음)하고 주부는 단상에 궤좌(跪坐)하여 분향 후 축문을 내어 옥성으로 축수할 제, 그 축문(祝文)에 하였으되,
 
16
"유세차갑자년 갑자월 갑자일에 대명국 동성문 내에 거하는 유심은 형산 신령 전에 비나이다. 오호라 대명 태조 창국공신지손이라 선대의 공덕으로 부귀를 겸전하고 일신이 무양하나 연광(年光 : 나이)이 반이 넘도록 일점 혈육이 없었으니 사후 백골인들 뉘라서 엄토하며 선영 행화를 뉘라서 봉사하리오. 인간에 죄인이요, 지하에 악귀로다. 이러한 일을 생각하니 원한이 만심이라 이러한 고로 더러운 정성을 신령 전에 발원하오니 황천은 감동하와 자식 하나 점지하옵소서."
 
17
빌기를 다함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황천인들 무심할까. 단상의 오색 구름이 사면에 옹위하고 산중에 백발 신령이 일절히 하강하여 정결케 지은 제물 모두 다 흠향한다. 길조가 여차하니 귀자(貴子)가 없을쏘냐.
 
18
빌기를 다한 후에 만심 고대하던 차에 일일은 한 꿈을 얻으니, 천상으로서 오운이 영롱하고, 일원 선관이 청룡을 타고 내려와 말하되,
 
19
"나는 청룡을 차지한 선관(仙官)이더니 익성이 무도한 고로 상제께 아뢰되 익성을 치죄(治罪)하야 다른 방으로 귀양을 보냈더니 익성이 이 길로 합심하여 백옥루 잔치 시에 익성과 대전한 후로 상제 전에 득죄하여 인간에 내치심에 갈 바를 모르더니 남악산 신령들이 부인 댁으로 지시하기로 왔사오니 부인은 애휼(사랑하고 불쌍히 여김)하옵소서."
 
20
하고 타고 온 청룡을 오운간에 방송하며 왈,
 
21
"일후 풍진(전쟁) 중에 너를 다시 찾으리라."
 
22
하고 부인 품에 달려들거늘 놀라 깨달으니 일장춘몽(一場春夢) 황홀하다.
 
23
정신을 진정하여 주부를 청입하여 몽사를 설화하되 주부 즐거운 마음 비할 데 없어 부인을 위로하여 춘정을 부쳐두고 생남하기를 만심 고대하더니 과연 그 달부터 태기 있어 십삭이 찬 연후에 옥동자를 탄생할 제, 방안에 향취 있고 문밖에 서기가 뻗질러 생광은 만지하고 서채는 충천한 중에 일원 선녀 오운 중에 내려와 부인 앞에 궤좌하여 백옥 상에 놓인 과실을 부인께 주며 하는 말이,
 
24
"소녀는 천상 선녀옵더니 금일 상제 분부하시되 자미원 장성이 남경 유심의 집에 환생하였으니 네 바삐 내려가 산모를 구완하고 유아를 잘 거두라 하시기로 백옥병의 향탕수를 부어 동자를 씻기시면 백병이 소멸하고 유리대(유리로 만든 주머니)에 있는 과실 산모가 잡수시면 명이 장생불사(長生不死)하오리다."
 
25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유리대에 있는 과실 세 개를 모두 쥐니 선녀 여쭈오되.
 
26
" 이 과실 세 개 중에는 부인이 잡수시고 또 하나는 공자를 먹일 것이요, 또 한 개는 일후에 주부가 잡수실 것이니 다 각기 임자를 옥황께옵서 점지하신 과일을 다 어찌 잡수시리까?"
 
27
향탕수를 부어 한 개를 잡순 후에 옥동자를 채금 속에 뉘여 놓고 부인께 하직하고 오운 속에 싸여 가니 반공에 어렸던 서기(瑞氣) 떠나지 아니하더라.
 
28
부인이 선녀(仙女)를 보낸 후에 일어나 앉으니 정신이 상쾌하고 청수한 기운이 전일보다 배나 더하더라.
 
29
주부를 청입하여 아기를 보이며 선녀의 하던 말을 낱낱이 고하니 주부 공중을 향하여 옥황께 사례하고 아기를 살펴보니 웅장하고 기이하다. 천정(天庭 : 양미간)이 광활하고 지각(얼굴의 바탕)이 방원하여 초상(초생달)같은 두 눈썹은 강산 정기 쏘였고 명월 같은 앞가슴은 천지 조화 품었으며, 단산의 봉의 눈은 두 귀밑을 돌아보고 칠성에 쌓인 종학 용준용안(잘생긴 얼굴) 번듯하다. 북두칠성 맑은 별은 두 팔뚝에 박혀있고 뚜렷한 대장성이 앞가슴에 박혔으며, 삼태성 정신별이 배상에 떠 있는데, 주홍으로 새겼으되 '대명국 대사마 대원수'라 은은히 박혔으니 웅장하고 기이함은 만고에 제일이요, 천추에 하나로다.
 
30
주부 기운이 쇄락하여 부인을 돌아 보아 왈,
 
31
"이 아해 상을 보니 천인적강(천상의 사람이 인간계에 귀양옴) 적실하고 만고 영웅 분명하며 전일 황상께옵서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창해국 사신 임경천더러 물으시니 임경천이 아뢰기를 북두정기는 남경에 하강하고 자미원 대장성이 황성에 떨어졌으니 미구에 신기한 영웅이 나리라 하더니 이 아해가 적실하니 어찌 아니 즐거우리까 오래지 아니하여 대장 절월을 요하에 횡대하고 상장군 인수를 금낭에 넌짓 넣고 부귀영화는 선영에 빛내고 맹기영풍은 사해에 진동할 제 뉘 아니 칭찬하리오. 산신은 깊은 은덕 사후에도 난망이요 백골인들 잊을쏘냐."
 
32
이름은 충렬이라 하고 자는 성학이라 하다.
 
33
세월이 여류하여 칠 세에 당함에 골격은 청수하고 청명은 발췌하여 필법은 왕희지요, 문장은 이태백이며 무예장략은 손오에게 지내더라. 천문지리는 흉중에 갈마두고(모아 두다) 국가 흥망은 장중에 매였으니 말달리기와 용검지술은 천신도 당치 못할레라
 
34
오호라 시운이 불행하고 조물이 시기한지, 유주부 세대 부귀 지극하더니 사람이 흥진비래가 미쳤으니 어찌 피할 가망이 있을쏘냐.
 
 
35
유주부는 조참적소하고
36
장부인은 피화봉수적하다.
 
 
37
각설 이때에 조정에 두 신하 있으되 하나는 도총대장 정한담이요, 또 하나는 병부상서 최일귀라. 본대 천상익성으로 자미원 대장성과 백옥루 잔치에서 대전한 죄로 상제께 득죄하여 인간에 적강하여 대명국 황제의 신하되었는지라. 본시 천상지인으로 지략이 유여하고 술법이 신묘한 중에 금산사 옥관도사를 데려다가 별당에 거처하고 술법을 배웠으니 만부부당지용이 있고 백만 군중 대장지재라, 벼슬이 일품이요 포악이 무쌍이라. 만민의 생사는 장중에 매여 있고, 일국의 권세는 손끝에 달려 있으니, 초회왕의 항적이요, 당명황의 안녹산이라. 일생 마음이 천자를 도모코자 하되 다만 정언 주부의 직간을 꺼려하고 또한 퇴재상 강희주의 상소를 꺼려 중지한지 오래더니 영종황제 즉위초에 열국제왕들이 각각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되 오직 토번과 가달(오랑캐족)이 강포만 믿고 천자를 능멸해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거늘 한담과 일귀 두 사람이 이 때를 타서 천자께 여쭈오되,
 
38
"폐하 즉위하신 후에 덕피만민하고 위진사해하며 열국제신이 다 조공을 바치되 오직 토번과 가달이 강포만 믿고 천명을 거슬리니 신 등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남적을 항복 받아 충신으로 돌아오면 폐하의 위엄에 남방에 가득하고 소신의 공명은 후세에 전하리니 복원 황상은 깊이 생각하옵소서."
 
39
천자 매일 남적이 강성함을 근심하더니 이 말을 듣고 대희 왈,
 
40
"경의 마음대로 기병하라."
 
41
하시니라.
 
42
이때 유주부 조회하고 나오다가 이 말을 듣고 탑전(임금의 자리 앞)에 들어가 복지 주 왈,
 
43
"듣사오니 폐하께옵서 남적을 치라 하시기로 기병하신단 말씀이 옳으니이까?"
 
44
천자 왈,
 
45
"한담의 말이 여차여차 하기로 그런 일이 있노라."
 
46
주부 여쭈오되,
 
47
"폐하 어찌 망령되게 허락하였습니까? 왕실은 미약하고 외적은 강성하니 이는 자는 범을 찌름과 같고 드는 토끼를 놓침이라. 한 낱 새알이 천근지중을 견디리까? 가련한 백성 목숨 백리사장 고혼되면 근들 아니 적악이오. 복원 황상은 기병치 마옵소서."
 
48
천자 그 말을 들으시고 호의만단하던 차에 한담과 일귀 일시에 합주하되,
 
49
"유심의 말을 듣사오니 살지무석이요, 오국 간신 동류로소이다. 대국을 저버리고 도적놈만 칭찬하여 개미 무리를 대국에 비하고 한 낱 새알을 폐하에게 비하니 일대에 간신이요, 만고에 역적이라. 신등은 저어하건대 유심의 말이 가달을 못 치게 하니 가달과 동심하여 내응이 된 듯 하니 유심을 선참하고 가달을 치사이다."
 
50
천자가 허락하니,
 
51
한림학사 왕공열이 유심 죽인단 말을 듣고 복지 주왈,
 
52
"주부 유심은 선황제 개국공신 유기의 손이라, 위인이 정직하고 일심이 충전하오니 남적을 치지 말자는 말이 사리 당연하옵거늘 그 말을 죄라 하와 충신을 죽이시면 태조 황제 사당 안에 유상 무슨 면목으로 뵈오며 유심을 죽이면 직간할 신하 없사올 것이니 황상은 생각하와 죄를 용서하옵소서."
 
53
천자 이 말 듣고 한담을 돌아보니 한담이 여쭈오되,
 
54
"유심을 죄하실진대 만사무석이오나 공신의 후예오니 죄목대로 다 못하오나 정배나 하사이다."
 
55
천자,
 
56
"옳다"
 
57
하시고
 
58
"황성 밖에 원찬하라"
 
59
하시니 한담이 청령하고 승상부 높이 앉아 유심을 잡아내어 수죄하는 말이,
 
60
"너의 죄를 논지컨대 선참후계 당연하나 국은이 망극하사 네 목숨을 살려주니 일후는 그런 말을 말라."
 
61
하고 연북으로 정배하여,
 
62
"어서 바삐 발행하라, 만일 잔말하다가는 능지처참하리라."
 
63
주부 이 말을 들음에 분심이 창천하여 양구(얼마 있다가 한참 후)에 하는 말이
 
64
"내 무슨 죄 있건대 연북으로 간단말인가. 왕망이 섭정함에 한실이 미약하고 동탁이 장난하니 충신이 다 죽것다. 나 죽은 후에 내 눈을 빼어 동문에 높이 달아 가달국 적장 손에 네 머리 떨어지는 줄 완연히 보리라, 지하에 돌아가되 오자서의 충혼이 부끄럽게 말라."
 
65
한담이 이 말을 듣고 분심이 창천하여 왈,
 
66
"어명이 이러하니 무슨 발명한다?"
 
67
하고 궐문에 들어가며 금부도사 재촉하여 유심을 채질하여 연북으로 가라 하는 소리 성화같이 재촉하니 유주부 하릴없어 적소(귀양가는 곳)로 가려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일가가 망극하여 곡성이 진동하더라.
 
68
주부 충렬의 손을 잡고 부인더러 하는 말이,
 
69
"우리 연광이 반이 넘도록 일개 잔 없었더니 황천이 감동하사 이 아들을 점지하여 봉황의 짝을 얻어 영화를 보고자 하였더니 가운이 소체(막힌다는 뜻)하고 조물이 시기하여 간신의 참소를 보아 만리 적소로 떠나가니 생사를 알지 못하니라. 어느 날 다시 볼까. 날 같은 인생은 조금도 생각말고 이 자식을 길러내어 후사를 받들게 하면 황천에 돌아가도 눈을 감고 갈 것이요, 부인의 깊은 은덕 후세에 갚으리다."
 
70
하고 충렬을 붙들고 슬피 울며 하는 말이.
 
71
"네 아비 무슨 죄로 만리 연경에 간단 말인가 너를 두고 가는 설움 단산에 나는 봉황 알을 두고 가는 듯, 북해 흑룡이 여의주를 버리고 가는 듯, 통박하고 섧은 원정 일구로 난설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혀 말할 길이 전혀 없고 일시나 잊자하니 가슴에 맺힌 한이 죽은들 잊을쏘냐, 너의 아비 생각말고 너의 모친을 모셔 무사히 지내며, 봄풀이 푸르거든 부자 상면한 줄 알고 있어라."
 
72
하며 방성통곡하며 죽도를 끌러 충렬을 채우면서,
 
73
"구천에 상봉한들 부자 신표 없을쏘냐. 이 칼을 잃지 말고 부디 간수하여 두라."
 
74
처자를 이별하고 행장을 바삐 차려 문 밖에 나오니 정신이 아득하고 한 번 걷고 두 번 걸어 열 걸음 백 결음에 구곡간장 다 녹으며, 일편단심 다 녹겠다. 성중에 보는 사람 뉘 아니 낙루하며 강산 초목이 다 슬퍼한다.
 
75
동성문 나서면서 연경을 바라보며 영거사를 따라 갈제, 삼일을 행한 후에 청송령을 지나 옥해관을 당도하니 이 때는 추팔월 망간이라 한풍을 소슬하고 낙목은 소소한데 정전에 국화꽃은 추구수심 띠여 있고 벽공에 걸린 달은 삼경야회 돋우는데 객창 한등 깊은 밤에 촛불로 벗을 삼아 책침 베고 누웠으니 타향의 가을소리 손의 수심 다 녹인다. 공산에 우는 두견성은 귀촉도 불여귀를 일삼고 청천에 뜬 기러기는 한창 밖에 슬피 울제, 행역이 곤한들 잠 잘 가망 전혀 없어 그 밤을 지낸 후에, 이튿날 길을 떠나 소상강을 바삐 건너 멱라수를 다다르니 이 땅은 초회황제 만고 충신 굴삼려 간신의 패를 보고 택반에 장사하니 후인이 비감하여 회사정을 높이 짓고 조문지어 쓰되.
 
76
"일월같이 빛난 충혼 만고에 빛나 있고 금석같이 굳은 절개 천추에 밝았으니 이 땅에 지나는 사람 뉘 아니 감심하리."
 
77
이렇듯이 슬픈 일을 현판에 붙였거늘 유주부 글을 보니 충심이 적발하여 행장에 필묵을 내여들고 회사정 독벽상에 대자로 쓰기를,
 
78
"대명국 유심은 간신 정한담과 최일귀 참소를 만나 연경으로 적거하더니 일월같이 밝은 마음 변백할 길 전혀 없고 빙설같이 맑은 절개 뵈일 곳이 바이없어 멱라수에 지내다가 굴삼려의 충혼 만나 물에 빠져 죽느니라."
 
79
쓰기를 다한 후에 물가에 내려가서 하늘께 축수하고, 일성통곡에 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 망경창파 깊은 물에 훨썩 뛰어드니, 이 때에 영거하던 사신이 이를 보고 전지도지 달려들어 손을 잡고 말려 왈,
 
80
"충성은 천신도 알 것이라. 그대의 죄안은 천자에게 매였으니, 명을 받아 적소로 가옵다가 이곳에 죽사오면 나도 또한 죽을 것이요, 그대 적소를 버리고 죽사오면 무죄함은 천하의 아는 바라, 천행으로 천자 감심하사 쉬이 방송할 줄 모르고 죽어서 충혼이 될지라도 삶만 같을 소냐."
 
81
한사하고 만류하여 백사장에 들어내니 유주부 하릴없이 회사정을 지나 황주를 다다르니 서호가 여기로다. 송나라 망국시에 일품 대신들이 국사를 돌보지 아니하고 풍악만 일삼아 일일장취하는 고로 서호의 고운 태도 서시에게 비하였으니 어찌 아니 망극하랴. 그 땅을 지나 이삼삭만에 연경에 당한지라. 유주부 자사에게 예사하되 자사 본후에 주부를 인도하여 객실로 전송하니 주부 물러 나와 적소로 들어가니, 이때는 동절이라 연경은 본디 극한지지라 삼장백설 쌓여 있고, 퇴락한 객실 방에 냉풍은 소슬하고 백설을 분분하여 인적이 끊어지니 불쌍하고 고상함을 측량치 못할레라.
 
82
각설이라, 이때에 정한담 최일귀가 유주부를 참소하여 적소로 보낸 후에 마음이 교만하여 별당으로 들어가 옥관도사를 보고 천자를 도보할 묘책을 물은대, 도사 문밖에 나와 천기를 자세히 보고 들어와 하는 말이,
 
83
"요사이 밤마다 살피온즉 두려운 일이 황성에 있나이다."
 
84
하되, 한 놈이 문왈,
 
85
"두려운 일이라 하오니 무슨 일이 있나이까?"
 
86
도사 왈,
 
87
"천상에 삼태성이 황성에 비웠으되 그 중에 유심의 집에 비췄으니, 유심은 비록 연경에 갔으나 신기한 영웅이 황성 내에 살았으니 그대 도모할 일이 어려울 듯 하노라."
 
88
한담이 이 말을 듣고 외당에 나와 도사 하던 말을 일귀더러 하니 일귀 대왈,
 
89
"도사의 신기함은 천신에게 지내나니 신기한 영웅이 황성내에 있다하니 진실로 마음에 황공하여이다."
 
90
한담이 왈,
 
91
"내 생각하니 유심이 연만하되 자식이 없는고로 수년전에 형산에 산제하여 자식을 얻었다 하더니, 도사의 말씀이 황성에 있다하니 의심하건데 유심의 아들인가 하노라."
 
92
일귀 왈,
 
93
"적실히 그리하면 유심의 집을 함몰하여 후환이 없게 함이 옳을까 하노라."
 
94
하되 한담이
 
95
"옳다"
 
96
하고 그 날 삼경에 가만히 승상부에 나와 나졸 십여명을 차출하여 유심의 집을 둘러싸고 화약 염초를 갖추어 그 집 사방에 묻어 놓고 화심에 불붙여 일시에 불을 놓으라고 약속을 정하니라.
 
97
이때에 장부인이 유주부를 이별하고 충렬을 데리고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더니 이날 밤 삼경에 홀연히 곤하여 침석에 졸더니 어떠한 노인이 홍선일병(붉은 부채 한 자루)을 가지고 와서 부인을 주며 왈,
 
98
"이날 밤 삼경에 대변이 있을 것이니 이 부채를 가졌다가 화광이 일어나거든 부채를 흔들면서 후원 담장 밑에 은신하였다가 충렬만 데리고 인적이 그친 후에 남천을 바라보고 가없이 도망하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옥황께서 주신 아들 화광 중에 고혼이 되리라."
 
99
하고 문득 간데 없거늘 놀라 깨어보니 남가일몽이라. 충렬이 잠이 깊이 들어 있고 과연 혼선 한 자루 금침 위에 놓였거늘 부채를 손에 들고 충렬을 깨워 앉히고 경경불매(근심이 되어 잠을 자지 못함)하던 차에, 삼경이 당함에 일지광풍이 일어나며 난데없는 천불이 사면으로 일어나니 웅장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이 홍로점설(紅爐點雪)되어있고 전후에 쌓인 세간 추풍낙엽 되었도다.
 
100
부인이 창황 중에 충렬의 손을 잡고 홍선을 흔들면서 담장 밑에 은신하니 화광이 충천하고 회신만지하니 구산(丘山)같이 쌓인 기물 화광에 소멸하였으니 어찌 아니 망극하랴.
 
101
사경이 당함에 인적이 고요하고 다만 중문 밖에 두 군사 지키거늘 문으로 못 가고 담장 밑에 배회하더니, 창난(창연히 빛나는)한 달 빛속으로 두루 살펴보니 중중한 담장 안에 나갈 길이 없었으니, 다만 물 가는 수채 구멍이 보이거늘, 충렬의 옷을 잡고 구멍에다가 머리를 넣고 복지 하여 나올 제, 겹겹이 쌓인 담장 수채로 다 지내어 중문 밖에 나섰으니 충렬이며 부인의 몸이 모진 돌에 긁히어서 백옥 같은 몸에 유혈이 낭자하고 윌색같이 고운 얼굴 진흙 빛이 되었으니 불쌍하고 가련함은 천지도 슬퍼하고 강산도 비감한다.
 
102
충렬을 앞에 안고 사잇길로 나오며 남천을 바라고 가없이 도망할 제, 한 곳에 다다르니, 옆에 큰 뫼가 있으되 높기는 만장이나 하고 봉우리 오색 구름 사면에 어리었거늘 자세히 보니 이 뫼는 천제하던 남악 형산이라. 전일 보던 얼굴이 부인을 보고 반기듯, 뚜렷한 천제당이 완연히 뫼이거늘, 부인이 비회를 금치 못하여 충렬을 붙들고 방성통곡(放聲痛哭)하는 말이.
 
103
"너 이 뫼를 아느냐? 칠년 전에 이 산에 와서 산제하고 너를 낳았더니 이 지경이 되었으니 너의 부친은 어데 가고 이런 변을 모르는고. 이 산을 보니 네 부친 본 듯하다. 통곡하고 싶은 마음 어찌 다 측량하리."
 
104
충렬이 그 말 듣고 부인의 손을 잡고 울며 왈,
 
105
"이 산에 산제라고 나를 낳았단 말인가? 적실히 그러하면 산신은 이러한 연유를 알건마는 산신도 무정하네."
 
106
부인이 이 말을 듣고 목이 메여 말을 못하거늘 충렬이 위로하되 이윽고 진정하여 충렬을 앞세우고 변양수를 건너 회수가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서산에 걸려있고 원춘에 저녁내 나고 청강에 놀던 물새는 양유 속에 날아들고 청천에 뜬 까마귀 석운 간에 울어들 제, 해상을 바라보니 원포에 가는 돛대 저문 안개 끼어있고 강촌에 어적(漁笛) 소리 세우(細雨) 중에 흩날렸다.
 
107
슬픈 마음 진정하고 충렬의 손을 잡고 물가에 배회하되 건너갈 배 전혀없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마지아니하더라.
 
108
이 때에, 정한담 최일귀 유심의 집에다가 불을 놓고 사이로 엿보더니 일진광풍에 화광이 일어나며 웅장한 고루거각에 일편 재물 없었으니 그 안에 든 사람 씨도 없이 다 죽겠다 하고 별당에 들어가 도사를 보고 다시 물어 가로되,
 
109
"전일에 우리 등이 대사를 이루고자 하더니 선생의 말씀이 영웅이 있다 하고 근심하더니 이제도 그러한지 다시 망기하옵소서."
 
110
도사 밖에 나와 천기를 살펴보고 방으로 들어와 하는 말이.
 
111
"이제는 삼태성이 황성을 떠나 변양 회수에 비췄으니 그 일이 수상한지라 내 생각하니 유심의 가권(家眷)이 적소를 찾으랴 하고 회수가에 갔는가 싶으노라."
 
112
한담이 이 말 듣고 안마음에 생각하되 화광이 그렇게 엄장하니 일정 소명하여 죽었다 하였더니 일정 영웅이면 벗어남 괴이치 아니하다 하고 외당에 나와 날랜 군사 다섯명을 속출하여 분부하되,
 
113
"너희 등이 바삐 이 밤에 변양 회수가에 다달아 나의 전갈로 분부하되 금명일간 어떠한 여인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물을 건너랴 하거든 즉시 결박하여 물에 넣어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회수의 사공과 너희 등을 낱낱이 죽이리라."
 
114
하되 나졸이 대경하여 회수에 나는 듯이 달려오니 과연 물가에 인적이 있어 여인의 울음소리 들리거늘 사공을 불러내러 한담의 하던 말을 낱낱이 고하니 사공이 대경하여 대왈,
 
115
"감히 태감의 영을 죽사온들 피하오리까."
 
116
하고 소선 일척을 대이고 고대하더라
 
117
부인이 충렬을 데리고 건널 배 없이 물가에 주저하던 차에 난데없는 일척 소선이 떠오며 부인이 청하거늘 그 간계를 모르고 충렬을 이끌고 배에 올라 중류(中流)에 당함에 일진광풍이 일어나며 양돛대 선창에 자빠지고 난데없는 적선이 달려들어 부인을 잡아매고 무수한 적군들이 사면으로 달려들어 부인을 결박하여 직선에 추켜 달고 충렬을 물 가운데 내던지니, 가련하다 유주부 천금귀자 백사장 세우중에 무주고혼(無主孤魂) 되겠구나. 만경창파(萬頃蒼波) 깊은 물에 풍랑(風浪)이 일어나니 일점 혈육(血肉) 충렬의 백골인들 찾을쏘냐. 육신인들 건질쏘냐. 윌색은 창망하고 수운은 적막하여 명명한 구름 속에 강신이 우는 소리 강산도 슬퍼하고 천신도 비감커든 하물며 사람이야 일러 무엇하랴.
 
118
이때에 장부인이 도적에게 결박하여 배 안에 거꾸러져 충렬을 찾은들 수중에 빠졌거든 대답할 수 있을쏘냐. 한 번 불러 대답 않고 두 번 불러 소리 없으니 천만 번을 남 부른들 소리 점점 없어지고 사면에 있는 것이 흉악한 도적놈이 또한 노를 바삐 저어 부인을 재촉하여 소리말고 가자 하니 부인이 망극하여 물에 빠져 죽고만 한들 큼직한 배닻줄로 연약한 가는 몸을 사면으로 얽었으니 빠질 길이 전혀 없고 결항(結項)하여 죽자한들 섬섬한 수족을 빈틈없이 결박하였으니 결항할 길 전혀 없어 도적의 배에 실려 하릴없이 잡혀가니 동방이 밝아오며 또 한 곳에 배를 매고 부인을 잡아내어 마상(馬上)에 앉히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니 세상에 불쌍한들 이에서 더할쏘냐.
 
119
이 때 회수 사공 마용이라 하는 놈이 삼자를 두었으되 다 용맹이 과일하고 검술이 신묘한 지라. 장자 이름은 마철이요 일찍 상처하고 아직 취처(娶妻)지 못하였으니 마침 이 때를 당하여 장부인의 얼굴을 보고 월태(月態)는 감추었으나 화용(花容)은 늙지 않고 수색이 만면하여 골격이 수려하나 아직은 춘색이 그저 있는지라. 대체 장부인이 충렬을 낳을 때에 옥황이 선녀로 하여금 천도 한 개 먹였으니 연광(年光)은 반이나 춘색은 불변이라 그런고로 회수 사공 놈이 충렬을 물에 널고 부인은 데려다가 아내로 삼고자하여 이런 변을 짓더라.
 
120
이 때에, 장부인이 하릴없이 도적의 말에 실려 한 곳에 다다르니 태산준령 암석을 의지하여 수삼가(數三家)마을이 있는지라. 석경(石經) 아래 밝은 날에 초옥 속에 들어가니, 큰 굴방이 있으되 사면에 주석으로 싸고 출입하는 문은 철편으로 지어 달고 그 방에 부인을 가두오니 가련하다 장부인이여! 팔자도 무쌍(無雙)하고 신세도 망측하다. 수대장상서 규중 여자로 유씨에게 출가하여 연광이 반이 넘도록 무자녀하다가 천행으로 자식 하나 두었더니 만 리 연경에 가군 잃고 천리 해상에 자식을 잃었으되,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도적놈에게 잡혀와 이 지경이 되었도다. 분벽사창 어디 두고 도적놈의 토굴 방에 앉았으며, 천금같은 자식 잃고 만금 같은 가군 이별하고 나 혼자 살아나서 구천에 돌아간들 유부주부들 어찌 보며, 인간에 살아 있은들 도적놈을 어찌 볼고, 무수히 통곡하니 기운이 진하여 토굴 속에 누었더니, 비자 한 년이 석반을 차려 왔거늘 기진하여 먹지 못하고 도로 보내니 또한 미음을 가지고 와서 먹기를 권하니 부인 속마음에 생각하되, 내 아들 충렬은 천신이 감동하고 신령이 도운 바라, 일후에 응당 귀히 될 것이니 내 이제 연경으로 가서 주부를 데리고 충렬를 볼진대 인제 죽으면 후회가 있으리라 하고, 강작하여 일어나 앉아 미음을 마시니 비자 반겨 적장에게 고하되, 도적이 대희(大喜)하여 그날 밤에 토굴방에 들어가 예하고 앉으며 왈,  
 
121
"부인은 이러한 누지에 와 나같은 이를 섬기고자 하니 진실로 감격하오이다."
 
122
부인이 그 말을 들음에 분심히 탱천(분한 마음이 가슴속에 꽉참)하나 신세를 생각하니 연연 약질이 함정에 든 범같은 고로 하릴없어 거짓답 왈,
 
123
"팔자 기박하여 수중에 죽게 되었더니 그대 나 같은 잔명을 구완하여 백년 동거하고자 하니 감격하온 말씀 다 측량하리오마는 다만 미안한 일이 있으니 금월 초삼일은 나의 부친 기일이라 아무리 여자라도 부친의 제삿날 당하여 어찌 길례를 지내오며 또한 백년을 해로할진대 어찌 기일을 가리지 아니하리오."
 
124
도적이 그 말을 듣고 즐거운 마음 측량치 못하여 정답게 하는 말이,
 
125
"진실로 그러할진대 장인의 제삿날에 사윈들 어찌 아니 정성을 하리오."
 
126
하고,
 
127
"제물을 극진히 장만할 것이니 부디 염려말고 안심하옵소서."
 
128
부인이 치사하고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고 반겨하니 도적이 감사하여 단무타의(아무 다른 뜻이 없음) 하고 안으로 들어가며 비자를 보내어 부인을 모시라 하니, 비자 들어와 곁에 누워 잠이 깊이 들어 인적이 고요하거늘, 부인이 그 날 밤 삼경에 도망하여 나오더니 방에 자는 비자년이 문득 잠을 깨어 만져보니 부인이 간 데 없고 중문이 열렸거늘 부인을 부르며 쫓아오거늘 부인이 대경하여 거짓 앉아 뒤보는 체하고 비자를 꾸짖어 왈,
 
129
"연일 고생하여 목이 마르기로 냉수를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안하여 나와 뒤를 보거늘 네 이런 잔말을 하여 집안을 놀래느냐."
 
130
비자 무료하여 방으로 들어가고 부인도 속절없이 방으로 들어가 자더니, 그 밤을 지냄에 이튿날 적한이 부인의 말에 속아 노속을 데리고 제물을 장만하거늘 부인이 목욕하고 방으로 들어와 사면을 살펴보니 동벽상 위에 무엇이 놓였거늘 떼어보니 기묘한 것이로다. 비목비석이요, 비옥비금이라 광채 찬란하여 일광을 가리우고 운색이 휘황하여 안채에 쏘이는 중의 천지조화를 모모이 갈마있고 강산정기는 복판마다 새겼으니 고금에 못 보던 옥함이라 용궁 조화 아니면 천신의 수품이라 전면을 살펴보니 황금대자로 뚜렷이 새겼으되 대명국도원수 유충렬은 개탁이라 하였거늘 부인이 옥함보고 대경실색하여 마음에 생각하되,
 
131
"세상의 동성 동명이 또 있단 말인가. 진실로 내 아들 충렬의 기물일진대 어찌 이곳에 있는고?"
 
132
하며,
 
133
"충렬아 너의 옥함은 여기 있다마는 너는 어디 가고 너의 기물을 모르느냐?"
 
134
옥함을 고쳐 싸서 그 곳에 놓고 밤들기를 기다리더니, 밤에 당함에 적한이 제물을 많이 장만하여 부인의 방에 들려왔거늘 부인이 받아 차차로 진설하였다가 자야반을 지냄에 제사를 파하고 음복한 후에 각각 잠을 자므로, 적한이며 노속이며 종일토록 곤하기로 가권이 다 잠이 들었거늘 부인이 옥함을 내어 행장에 깊이 싸가지고 밖에 나와 북두칠성을 바라고 가없이 도망할 제, 한 곳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밝으며 큰 길이 내닫거늘 행인더러 물은즉 영롱관 대로라 하거늘 주점에 들어가 조반을 걸식하고 종일토록 가되 몇 리를 온지 모를러라.
 
135
한 곳에 당도하니 앞에 큰물이 있고 또한 풍랑은 도천하며 창파는 만경이라 사고무인적한데, 청산만 푸르러 있고 십리 장강 빈 물가에 궂은 비는 무슨 일이고, 무신한 저 백구는 사람보고 놀래는 듯 이리저리 날아 갈 제, 슬픈 마음 긴 한숨에 피같은 저 눈물 뚝뚝 떨어져 백사장에 나려지니 모래 위에 붉은 점이 만점도화 핀 듯하고 무정한 저 물새는 춘국이낙 날아들고 유의한 청강성은 속절없이 목이 맺히니 어찌 아니 한심하리.
 
136
부인이 종일토록 행역에 기운이 곤하여 인가를 찾아가 밤을 지내고자 하나 배 없어 물가에 주저하더니 이 때에 서산에 일모하고 한수에 명생하니 진퇴유곡이라 하릴없이 물가에 찾아가니 그 길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곡 사이로 연하여 있거늘 길을 잃지 아니하고 점점 들어가니 무인적막한데 다만 들리나니 두견 접동 울음소리와 슬픈 원숭이 소리뿐이로다. 청림을 더위 잡아 간수(골짜기에 흐르는 물)를 밟아 가니 창망한 달빛 속에 수간 초옥이 보이거늘 반겨 급히 들어가니 시문에 개 짖으며 한 노구 문 밖에 나오거늘, 노구보고 예를 하되, 노구 답례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하니 부인이 들어가 앉으며 살펴보니 사면에 여복이 없고 남복만 걸려있고 또한 곁에 방에서 남정소리 나거늘 심신이 불안하여 좌불안석이라. 석반을 먹은 후에 노구할미 문왈,
 
137
"그대는 뉘집 부인이관대 어찌 혼자 이곳에 왔나이까?"
 
138
부인이 대왈,
 
139
"나는 본디 황성 사람으로 친정에 갔다가 해상에서 수적을 만나 명을 도망하여 이곳에 왔나이다."
 
140
노구 이 말을 듣고 곁방으로 들어가 자식더러 일러 왈,
 
141
"저 여인의 말을 들으니 가이 고이하도다. 수 일 전에 들으니 석장동 당질놈이 회수 사공하다가 금월 초에 해상에서 한 부인을 얻어 백년 동거코자 한다더니 저 여인의 말을 들으니 수적을 만나 도망하여 왔다 하니 정녕코 당질놈이 얻은 계집이라, 바삐 이 밤 삼경에 석장동을 득달하여 마철을 보고 데려다가 이 계집 잃지 말라."
 
142
하되 노구 자식이 이 말을 듣고 급히 후원에 들어가 말 한 필 내어 타고 바삐 채찍질하여 나서니 본디 이 말은 천리마라 순식간에 석장동에 당도하였는지라.
 
143
이 때에, 장부인이 행역이 곤하여 노구 방에 잠이 깊이 들었더니 비몽간에 한 노옹이 언연(偃然)히 들어와 부인 곁에 앉으며 왈,
 
144
"금야에 대변(大變)이 날 것이니 부인은 무슨 잠을 자시나이까? 급히 일어나 동산에 올라가 은신하였다가 변이 일어나거든 바삐 물가에 내려가면 일엽표주(하나의 표주박으로 만든 작은 배) 물가에 있을 것이니 그 배를 타고 급히 환을 면하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천금귀체를 안보하기 어려울지라."
 
145
하고 간데 없거늘 놀라 깨달으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급히 일어나 보니 노구도 간데 없거늘 행장을 옆에 끼고 동산에 올라가 은신하고 동정을 살펴보니 과연 남으로서 일성방포 소리나며 화광이 충천한 중에 무수한 도적이 사면으로 에워싸고 한 도적이 함성 왈,
 
146
"그 계집이 여기 있느냐?"
 
147
하는 소리 산곡이 진동하니 부인이 대경하여 지척을 분별치 못하고 전지도지 동산을 넘어 물가에 다다르니 사고무인적이 적막한데 난데없는 일엽표주 물에 매였으며, 배 가운데 일개 선녀 선창밖에 나가며 부인을 재촉하여 배 안에 들라하니, 부인이 창황중에 올라 선녀를 보니, 머리 위에 옥련화를 꽂고 손에는 봉미선(鳳尾扇)을 들고 청의홍상(靑衣紅裳)에 백옥패(白玉佩)를 찼으니 짐짓 선녀요, 인간 사람 아니로다. 부인이 황송하여 국궁배례(鞠躬拜禮 : 존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혀 절함) 왈,
 
148
"박명한 천첩을 이다지 구완하니 선녀의 깊은 은덕 어찌 다 갚으리까?"
 
149
선녀 대왈,
 
150
"소녀는 남해 용왕(南海龍王) 장녀옵더니 금일에 부왕이 분부하시기를, 대명국 유충렬의 모(母) 장부인이 금야에 도적의 변을 볼 것이니 네 바삐가 구완하라 하시기로 왔사오니 부인의 명은 상제도 아는 바라 소녀같은 계집이야 무슨 은혜 있다 하리까."
 
151
부인이 상제께 치하할 제 마지못하여 도적이 벌써 물가에 다달아. 방포일성에 난데없는 화광은 강수가 끓는 듯 하고 일척 소선에 양 돛을 높이 달아 살같이 달려드니 부인이 탄 배에서 두어발 남은지라. 적선 중 일원(一員) 도적이 창검을 높이 들고 선창을 두드리며 함성하는 말이,
 
152
"네 이년 어디로 갈 것이냐? 천신이 아니거든 물 속으로 들어갈까. 가지말고 게 있거라. 나의 호통 한 소리에 나는 새라도 떨어지고 닫는 짐승도 못 가거든 요망한 계집이 어디로 가려 하는다?"
 
153
이렇듯이 소리하니 배 가운데 있는 부인의 혼백이 있을쏘냐. 창황 중에 돌아보니 도적의 배, 선창으로 달려드니 부인이 하릴없이 통곡하며 하는 말이,
 
154
"무지한 도적놈아. 나는 남경 유주부의 아내로 간신의 참소를 만나 이 지경이 되었은들 너의 아내 될 수 있느냐 차라리 물에 빠져 청백고혼 되리라."
 
155
도적이 이 말 듣고 분심이 탱천하여 창검으로 냅다 칠 제, 부인의 탄 배 거의 잡게 되었더니 난데없는 광풍이 동남으로 일어나며 백사장 쌓인 돌이 풍편(風便)에 흩날려 비 온 듯이 떨어지니,  만경창파 깊은 물이 풍랑이 도도(滔滔)하여 벽력같이 내려치니 강산이 두렵거든 도적놈의 일엽주가 제 어이 견딜쏘냐. 풍랑 소리 천지가 진동하며 적선의 양 돛 내가 부러져 물 가운데 내려지니 천하 항장사(項壯士)라도 해상에서 배를 타고 가자 한들 돛대가 없으니 어디로 가리오. 적선은 하릴없이 빈배만 둥둥 뜨고 부인의 일엽주는 용왕의 표주라 바람 분들 파선할쏘냐. 범범(汎汎) 중류(中流)에서 높이 떠 살같이 따라갈 제 그 배 앞은 고요하여 창파는 잔잔하고 월색은 은은한데 옥황이 분부하여 용왕이 주신 배거든 염려가 있을쏘냐
 
156
순식간에 배를 언덕에 대이고 부인을 인도하여 암상에 내린 후, 부인이 정신을 진정하여 무수히 치사하고 행장을 간수하여 물가로 올라갈 제 기운이 진하여 촌보(寸步)를 못 갈러라.
 
157
종일토록 가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산천은 수려하고 지형은 단정하니 이 땅은 천덕산 한림동이라. 그 곳을 당도함에 날이 또한 저물거늘 부인이 노곤하여 물가에 쉬어 앉아 잠깐 졸더니, 전일 현몽하던 노옹이 부인을 깨워 왈,
 
158
"부인은 악이 다 진(盡)하였으니 이 산곡으로 들어가면 자연 구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바삐 가라."
 
159
하거늘 놀라 깨어보니 청산은 울울하고 시내는 잔잔한지라. 일어나 차차 들어갈 제, 백옥 같은 고운 수족으로 악한 산곡 길을 발 벗고 들어가니 모진 돌에 채이며, 모진 나무에도 채이며 열 발가락이 하나도 성한데 없어 유혈이 낭자하고 일신이 흉측하니 세상이 귀찮은지라. 월태화용(月態花容) 고운 얼굴 수심이 만면하여 피골이 상련하여 살 마음이 전혀 없어 죽을 마음만 간절하다. 슬피 앉아 우는 말이,
 
160
"만리 연경을 가자하니 연경이 사만 오천 육백 리라. 여자의 일신이 천산만수를 어찌 가며, 몇 날이 못하여서 이러한 변을 당한데 연경으로 가다가는 내 절개 훼절하고 내 목숨 살 수 없겠다. 차라리 이곳에서 죽어 백골이나 고향으로 흘러갈거나, 남은 혼백이라도 황성을 다시 보리라."
 
161
행장을 끌러 옥함을 내어놓고 비단수건으로 주홍 글자를 새겨 쓰되,
 
162
"모년 모월 모일에 대명국 동성문 내에 사는 유충렬 모 장씨는 옥함을 내 아들 충렬에게 전하노라. 죽은 혼백이라도 받아보라."
 
163
자자(字字)이 새겨 수건으로 옥함을 매어 물 속에 넣고 대성통곡하며 치마를 무릅쓰고 물에 빠져 죽으려 할 제, 산곡 사이로 어떠한 여인이 동이를 곁에 끼고 금간수에서 물을 긷다가 부인을 보고 급히 내려와 만류하여 암상에 앉히고 문왈,
 
164
"부인은 무슨 일로 이러하신고? 내 집으로 가자."
 
165
하거늘 부인이 문득 노인이 현몽하던 말을 생각하고 따라가니 암상 석경 새에 수간모옥(數間茅屋)이 정묘한데 채운이 어리었으니 군자 사는데요, 신선 있는 곳이로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갈건야복(葛巾野服)은 벽상에 걸려있고 만 권 서책은 안상에 놓였으니, 부인의 마음이 반갑고 안정하여 고생하던 전후 말과 연경을 찾아 가다가 중로에서 봉변하던 말을 낱낱이 고하되, 주인도 낙루(落淚)하고 손도 슬피 우니 그 아니 가련한가.
 
166
원래 이 집은 대명국 성종황제 때에 벼슬하던 이인학의 아들 이처사의 집이니 인학의 모친은 유주부의 종숙모(從叔母)라. 이별한지 적년이라 처사는 마음이 청백하고 행실이 표치(標致)하여 벼슬로 있더니 하직하고 산중에 들어와 농업을 힘쓰며 학업을 일삼으니 심양강 오륜촌의 도처사의 행실이요, 부춘산(富春山) 칠리탄(七里灘)에 엄자릉(嚴子陵)의 절개로다. 세상 공명은 장자방(張子房)이 벽곡하고 인간 부귀는 소태부(疏太傅)가 산금(散金)하니 만고의 일인이요, 일대의 하나이라. 뜻밖에 부인의 말을 듣고 대경하여 중당에 마저 예필 후에 전후수말(前後首末)을 다 못하고 낙루(落淚)하여 왈,
 
167
"주부 처숙(妻叔)을 이별한지 적년(積年)이라, 그다지 인사 변하여 이 지경이 될 줄 어찌 알리오."
 
168
서로 울며 마음을 위로하여 음식 거처를 편히 고양하니 부인의 일신은 무양(無恙)하나 다만 흉중에 맺힌 한이 종시 떠나지 아니하여 세월을 보내더라.
 
 
169
회사정에 행봉대인(幸逢大人)하고
170
옥문관에 적거노재상(謫居老宰相)하다.
 
 
171
각설 이 때에 충렬은 모친을 잃고 물에 빠져 살길이 없었더니 문득 두 발이 닿거늘 자세히 보고 살피어 보니 물 속에 큰 바위라. 그 위에 올라앉아 하늘을 우러러 어미를 찾더니 간 데 없고 사면을 돌아보니 청산은 은은하고 다만 들리느니 물소리뿐이로다. 강천에 낭자한 원숭이 소리 삼경에 슬피 우니 충렬이 통곡하며 섰더니, 이 때에 남경 장사들이 재물을 많이 싣고 북경으로 떠나갈 제 회수에 배를 놓아 범범중류 내려가더니 처량한 울음소리 풍편에 들리거늘 선인 등이 괴이하여 배를 바삐 저어 우는 곳을 찾아가니 과연 일동자(一童子) 물에서 슬피 울거늘 급히 건져 주중(舟中)에 놓고 연고(然故)를 물은즉,
 
172
"해상에서 수적을 만나 어미를 잃고 우나이다."
 
173
선인 등이 비감하여 물가에 내려놓고 갈 데로 가라 하며 배를 띄워 북경으로 행하더라.
 
174
충렬이 선인을 이별하고 정처 없이 다니다가 촌촌이 걸식하며 곳곳에 차숙(借宿 : 잠자리를 빌음)할 제, 조동모서(朝東暮西)하니 추풍낙엽이요, 거래무종적(去來無蹤迹)하니 청천에 부운이라. 얼굴이 치폐하고 행색이 가련하다. 흉중에 대장성은 때 속에 묻혀있고, 배상에 삼태성(三太星)은 헌 옷 속에 묻혔으니 활달한 기남자(奇男子)가 도리어 걸인(乞人)이라. 다만 쌓던 부열(傅說)이도 무정(武丁)을 만나 있고, 밭만 갈던 이윤(伊尹)이도 은왕(殷王) 성탕(成湯) 만나 있고, 위수(渭水)에 여상이도 주문왕 만났건만 유수(流水)같이 가는 광음 훌훌히 흘러가니 충렬의 고운 연광십사 세에 당한지라. 천지로 집을 삼고 사해에 밥을 부쳐 도로에 개걸(丐乞)타가 한 곳에 다다르니 이 땅은 초국이라. 영릉을 지나다가 장사를 바라보고 한 물가에 다다르니 창망한 빈 물가에 슬픈 원숭이 소리로다. 백사장 세우중에 백구는 비거비래뿐이로다. 후면을 돌아보니 녹죽(綠竹) 창송(蒼松)우거지고 적막한 옛 정자 풍랑 속에 보이거늘 그 곳에 올라가니, 이 물은 멱라수요, 이 정자는 회사정이라 하는 정자라. 유주부가 글을 쓰고 물에 빠져 죽고자 하던 곳이라. 마음이 절로 비감하여 정자에 올라가 사면을 살펴보니, 제일은 굴삼려의 행장을 써 붙이고 노정기를 사면에 붙였더라.
 
175
동벽상에 새로 두 줄 글이 있거늘 그 글을 보니 모년 모월 모일에 삼경 유주부는 간신의 패를 보고 연경으로 적거하다가 멱라수에 빠져 죽노라 하였거늘 충렬이 그 글을 보고 정상에 거꾸러져 방성통곡 왈,
 
176
"우리 부친이 연경으로 갔는 줄만 알았더니 이 물에 빠졌도다. 나 혼자 살아나서 세상에 무엇하리. 회수에 모친 잃고 멱라수에 부친 잃었으니 하면목(何面目)으로 세상에 살아날고. 나도 함께 빠지리라."
 
177
하고 물가에 내려가니 충렬이 울음소리 용궁(龍宮)에 사무쳤는지라. 천신이 무심할까.
 
178
이 때에 영릉 땅에서 사는 강희주라 하는 재상이 있으되 소년 등과(登科)하여 승상 벼슬하더니 간신의 참소(讒訴)를 만나 퇴사(退仕)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일단 충심이 국가를 잊지 못하여 매양 천자 오결(誤決)하는 일이 있으면 상소하여 구완하니 조정이 그 직간(直諫)을 꺼려하되 그 중에 정한담과 최일귀가 가장 미워하더니 마침 본부에 갔다가 회로에 우편 주점(酒店)에서 자더니 비몽간에 오색 구름이 멱라수에 어리었는데 청룡이 물 속에 빠지려 하며, 하늘을 향하여 무수히 통곡하며. 백사장에 배회하거늘 내렴에 괴이하여 날 새기를 기다리더니 계명성(鷄鳴聲)이 나며 날이 장차 밝거늘 멱라수에 바삐 오니 과연 어떠한 동자 물가에 앉아 울거늘 급히 달려들어 그 아이 손을 잡고 회사정에 올라와 자세히 물어 왈,
 
179
"너는 어떠한 아이로서 어디로 가며 무슨 연고로 이곳에 와 우는가?"
 
180
충렬이 울음을 그치고 대왈,
 
181
"소자는 남경 동성문 내에 사는 정언 주부 유공의 아들이옵더니 부친께옵서 간신의 참소를 만나 연경으로 적거하시다가 이 물에 빠져 죽은 종적이 회사정에 있는고로 소자도 이 물에 빠져 죽고자 하옵니다."
 
182
강승상이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왈,
 
183
"이것이 웬말이냐 근년에 노병(老病)으로 황성을 못 갔더니 그다지 인사 변하여 이런 변이 있단 말인가. 유주부는 일국에 충신이라 동조에 벼슬하다가 나는 연만(年晩)하기로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유주부 이런 줄을 몽중에나 생각하였으랴. 의외(意外)라 왕사는 물론하고 나를 따라 가자."
 
184
하니 충렬이 왈.
 
185
"대인은 소자를 생각하와 가자 하옵시나 소자는 천지간 불효자라 살아서 무엇하며 또한 모친이 변양 회수 중에 죽삽고, 부친은 이 물가에 죽었사오니 소자 혼자 살 마음이 없나이다."
 
186
승상이 달래여 왈,
 
187
"부모가 구몰(함께 죽음)한데 너조차 죽는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이 자식 나 좋다하는 것이 후사를 끊지 아니함이라. 너조차 죽게 되면 유주부 사당에 일점향화 있을소냐. 잔말 말고 따라가자."
 
188
하시니 충렬이 하릴없어 강승상을 따라가니 영릉땅 월계촌이라, 인가가 즐비한데 벽제( 除) 소리 요란하고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반공에 솟았는데 수호 문창이 있고 주륜취개(지위가 높은 사람이 타는 고급 수레) 왕래하되 인물이 준수하더라. 승상이 충렬을 외당에 두고 안으로 들어가 부인 소씨 더러 충렬의 말을 낱낱이 하니 소씨 이 말을 듣고 충렬을 청하여 손을 잡고 낙루하며 왈,
 
189
"네가 동성문 내 사는 장부인의 아들이냐? 부인이 연만토록 자식이 없음에 날과 같이 매일 한탄하더니 장부인은 어찌하여 저러한 아들을 두었다가 영화를 다 못보고 황천객이 되었으니 세상사 허망하다. 간신의 해를 입어 충신이 다 죽으니 나라인들 무사하랴. 다른 데 가지 말고 내 집에 있으라."
 
190
하시니 충렬이 배사(拜謝)하고 외당으로 나오니라. 이때 강승상이 아들은 없고 다만 일녀를 두었는지라. 부인 소씨 여아를 낳을 적에 일원 선녀오운을 타고 내려와 소씨를 대하여 왈,
 
191
"소녀는 옥황 선녀옵더니 연분이 자미원 대장성과 한 가지로 있다가 소녀를 강문(講問)에 보냄에 왔사오니 부인은 애휼하옵소서."
 
192
하거늘 부인이 흔미중에 여아를 탄생하니 용모 비범하고 거동이 단정하여 시서 음률(音律)을 무불통지(無不通知)하니 여중군자요 총명 지혜 무쌍이라. 부모 사랑하여 택서하기를 염려하더니 천행으로 충렬을 데려다가 외당에 거처하고 자식같이 길러낼 제 충렬의 상을 보니, 구불가연이로다. 부귀 작녹은 인간에 무쌍이요, 영웅준걸은 만고 제일이라. 승상이 대희하여 내당에 들어가 부인더러 혼사를 의논하니 부인 대희하여 왈,
 
193
"내 마음도 충렬을 사랑하더니 승상의 말이 또한 그러할진대 불수다언하고 혼사를 지내옵소서."
 
194
승상이 밖에 나와 충렬의 손을 잡고,
 
195
"내게 대사를 진탁(眞託)할 말이 있다. 노부 말년에 무남독녀를 두었더니 금일로 볼진대 너와 천장(天定)이 적실하니 이제 백년고락을 네게 부치노라."
 
196
하신데 충렬이 궤좌하여 낙루하며 여쭈오되,
 
197
"소자같은 잔명을 구원하여 슬하에 두고자 하옵시니 감사무지(感謝無地)로되, 다만 통박(痛迫)하온 일이 흉즁에 사무쳤나이다. 소자 박복하와 양친이 죽은 줄도 모르고 취처(娶妻)하오면 인간에 죄인이라 글로 한이로소이다."
 
198
승상이 그 말 듣고 비감하여 충렬의 손을 잡고 왈,
 
199
"그도 일시권도라 너의 집 시조공도 조실부모하고 장문이 취처하였다가 성군을 만나 개국공신 되었으니 조금도 서러워 말라."
 
200
하시고 즉시 택일하여 길례를 행하니 신랑 신부의 아름다운 것이 선인 적강(謫降) 적실하다. 예를 파하고 방으로 들어가 사면을 살펴보니 빛나고 빛난 것이 일구난설이요, 일필난기로다. 동방 화촉 깊은 밤에 신랑 신부 평생 연분 맺었으니 그 사랑한 말을 어찌다 측량하며 어찌 다 기록하리. 밤을 지낸 후에 이튿날 승상 양주(兩主)께 뵈오되 승상 부부 즐거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도라. 이러구러 세월이 여류하여 유생의 나이 십오 세라, 이 때에 승상이 현서(賢壻)를 얻고 말년에 근심이 없으나 다만 유주부 간신의 해를 보아 멱라수에 죽음을 생각하니 분심이 직발하여 나라에 글을 올려 유주부를 설원코자 하여 즉시 황성을 가려 하거늘 유생이 만류하여 왈,
 
201
"대인의 말씀은 감격하오나 간신이 만조하와 국권을 앗었으니 천자상소를 듣지 아니할까 하나이다."
 
202
승상이 불청하고 급히 행장을 차려 황성에 올라가, 퇴재상 권공달의 집에 사처를 정하고 상소를 지어 승지를 불러 천자께 올리라 하더라. 그 상소에 하였으되,
 
203
"전승상 강희주는 근돈수백배 하옵고 상소우폐하전하나이다. 황송하오나 충신은 국가지본심이요, 간신을 물리치고 충신을 데려와 인정을 행하시고 덕을 베푸사 창생을 살피시면 소신같은 병골이라도 태고순풍 다시 만나 청산백골이나 좋은 땅에 묻힐까 하였더니 간신의 말을 듣삽고 주부유심을 연경으로 원찬하시니 선인의 하신 말씀 인군과 신하 보기를 초개같이 하여 밖으로 충신의 입을 막고 간신의 악을 받아 국권을 앗았으니 어찌 아니 한심 하오리까. 왕망이 섭정함에 왕실이 미약하고 희왕이 위태함에 항적이 죽었으니 복원 황상은 깊이 생각하옵서소. 신이 비록 죽는 날이라도 사은(임금의 은혜)(바다) 같사오니 복원황상은 충신 유심을 즉시 방송하와 폐하를 돕게 하옵소서. 주달하올 말씀 무궁하오나 황송하와 그치나이다."
 
204
하였거늘 천자 상소를 보시고 대노하여 조정에 내리여 보라 하신다. 이때 정한담 최일귀, 강희주의 상소를 보고 대분하여 즉시 궐내에 들어가 여쭈오되,
 
205
"퇴신 강희주의 상소를 보오니 대역부도라. 충신을 왕망에게 비하여 폐하를 죽인다 하오니 이 놈을 역률로 다스리어 능지처참 하옵고 일변 저의 삼족을 멸하여지이다."
 
206
천자 허락하되, 한담이 즉시 승상부에 나와 나졸을 재촉하여 강희주를 나입하라 하니 나졸이 청령하고 권공달의 집에 가 강희주를 철망으로 결박하여 잡아갈 제, 이 때 강희주 삼족을 멸하라 하는 말을 듣고 유생이 또한 연좌할까 하여 급히 편지를 만들어 집으로 보내고 철망에 쌓여 금부로 들어갈 제, 백발이 소소하니 피눈물이 반반하여,
 
207
"충신을 구완타가 장안 시상에 무주고혼 된단 말인가. 죽은 혼백이라도 용봉 비간을 벗하여 천추에 영화될 것이요, 간신 정한담은 찬역하려 하고 충신을 무함하여 원혼이 되게 하니 살아도 부끄럽지 아니하랴."
 
208
무수히 호원하고 금부로 돌아가니, 이 때 정한담이 승상부 높이 앉아 승상을 나입하여 계하에 꿇리고 수죄하는 말이,
 
209
"네 전일에 자칭 충신이라 하더니 충신도 역적이 된단 말인가?"
 
210
승상이 눈을 부릅뜨고 한담을 보며 왈,
 
211
"관숙 채숙이 주공더러 역적이라 아니 하였으냐. 한때 양화가 공자더러 소인이라 함이 어제 들은 듯 하노라."
 
212
하니, 한담이 대노하여 좌우 나졸을 재촉하여 수레 위에 높이 싣고 장안 시상에 나올 제, 이때에 천자 황태후는 강승상의 고모라, 승상 죽인단 말을 듣고 급히 천자께 들어가 낙루하여 왈,
 
213
"들으니 강희주 뿐이라 설사 죽일 죄가 있다 하여도 날로 보아 죽이지 말고 원방에 유찬하기를 바라노라."
 
214
천자 애연하여 즉시 한담을 불러,
 
215
"죽이지 말고 유심 일체로 옥문관에 원찬하라."
 
216
하시니 한담이 청명하고 마지못하여 옥문관에 원찬하고, 강희주의 일족을 다 잡아다가 궁노비를 공입하라 하고, 일변 나졸을 명초하여 영릉으로 간지라.
 
217
이 때 유생이 강희주 승상이 황성 가신 후로 주야 염려하더니 뜻밖에 강승상의 서간이 왔거늘 급히 개착하니 하였으되,
 
218
"오호라 노부는 전생에 죄 중하여 슬하에 자식 없고 다만 일녀를 두었더니 천행으로 그대를 만나 부귀영화를 보려 하고 여아의 평생을 그대에게 부쳤더니 가운이 그러한지 조물이 시기한지 충신을 구완타가 만리 변방에 생사를 모르나니 이러한 변이 또 있느냐. 노부는 연만하여 풀 끝에 짐나고 여년이 불원하여 이제 죽어도 섧지 아니하거니와 여아의 일생을 생각하니 가련하고 불쌍한지라. 천생연분으로 그대를 만나 신정이 미흡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형용이 어찌 될지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하나 노부는 역률로 잡히어 철망을 씌워 옥문관으로 원찬하고 나의 일족은 잡아다가 궁비 속공하라 하고 나졸이 내려가니 그대 급히 집을 떠나 환을 면하라. 만일 신정을 못 잊어 도망치 아니하면 우리 두 집의 일점 혈육이 청춘고혼이 될 것이니 부디 도망하였다가 일후에 귀히 되거든 내 자식을 찾아 버리지 말고 백년해로하여 나 죽은 날에 박주 일배라도 향화를 피운 후에 승상은 일생 기르던 충렬의 손에 많이 흠향하고 가라하면 구천의 여혼이라도 일배주를 만반주육으로 먹고 청산에 썩은 뼈도 춘풍을 다시 만나 그 은혜를 갚으리라."
 
219
하였거늘 충렬이 보기를 다함에 낭자 방에 들어가 편지를 뵈이며,
 
220
"전생에 명이 기박하여 조실부모하고 천지로 집을 삼고 사해로 밥을 부쳐 부은 같이 다니더니 천행으로 대인을 만나 낭자와 백년언약을 맺었더니 일년이 다 못하여 이런 변이 있으니 어찌 아니 망극하리오."
 
221
입었던 고의 한삼을 벗어 글 두 구를 써 주며,
 
222
"타일에 보사이다."
 
223
낭자 이 말을 듣고 대경질색하여 유생의 옷을 잡고 방성대곡하여 왈,
 
224
"노부 무슨 죄로 만리 호지에 간다 하며, 청춘 소첩 무슨 죄로 박명한고, 날 같은 여자는 생각 말고 급히 환을 면하소서."
 
225
홍상한 폭을 떼어 글 두 구를 지어주며,
 
226
"급히 나가소서"
 
227
하거늘 유생이 글을 받아 금낭속에 넌짓 넣고 곡성으로 해를 지내리라.
 
228
낭자 울며 왈.
 
229
"가군이 이제 가면 어느 날 다시 보며 어명이 지중하여 궁비 속공하게 되면 황천에 가 다시 볼까 하나이다."
 
230
충렬이 슬피 울며 하직하고 가는 정이 해하성 추야월에 우미인을 이별한 듯 하더라.
 
231
행장을 급히 차려 서천을 바라고 정처 없이 가더니 신세를 생각함에 속절없는 눈물이 비 오는 듯이 떨어지며 장장천지 길고 긴 길에 앞이 막혀 못 가겠다. 서천 구름을 바라보고 한없이 가더라.
 
 
232
소부인은 청수에 투사하고
233
강낭자는 창가에 수절하다.
 
 
234
각설 이때, 부인과 낭자는 유생을 이별하고 일가가 망극하여 울음소리 떠나지 아니하더라. 부로가 사오일내에 금부도사 내려와 월계촌에 달려들어 소부인과 낭자를 잡아내어 수레 위에 싣고 군사를 재촉하여 황성으로 올라가며 일변 집을 헐어 못을 파고 가니, 가련하다 강승상이 세대로 있던 집을 일조에 못을 파니 집오리만 둥둥 떴다.
 
235
소씨와 낭자 속절없이 잡혀 올라갈 제 청수에 다다르니 일모서산이라. 객실에 들어 갈 제, 이때 금부 나졸 중에 장한이라 하는 군사 전일 강승상 벼슬할 때에 장산의 부친이 승상부 서리로서 득죄하여 거의 죽게 되었더니 강승상이 구하여 살린고로 장한의 부자 그 은혜를 주야 생각하더니 이 때를 당함에 불쌍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른 군사 모르게 슬피 울더니, 그날 밤 삼경에 다른 군사 다 잠이 깊이 들었거늘 가만히 부인 자는 방문 앞에 기침하고 부인을 부르되,  부인이 놀래어 문을 열고 보니 장한이 복지하여 가만히 여쭈오되,
 
236
"소인은 금부 나장이옵더니 전일 대감 벼슬할 때에 소인의 아비 나라에 득죄하여 죽게 되었삽더니 대감이 살리시기로 그 은혜 골수에 사무치어 갚기를 바라더니 이 때를 당하여 소인이 어찌 무심 하오리까. 바라옵건데 부인은 너무 염려 마옵소서, 이날 밤에 명을 도망하오시면 그 뒤는 소인이 당할 것이니 조금도 염려 마옵시고 도망하여 살기를 바라소서."
 
237
부인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풀리어 낭자를 데리고 장한을 따라 주점 밖에 나서니 밤이 이미 삼경이라 인적이 고요하거늘 동산을 넘어 십 리를 가지 청수에 다다라 장한이 하직하고 왈,
 
238
"부인과 낭자는 이 물가에 빠져 죽은 표를 하고 가옵시면 후환이 없을 것이니 부디 살아나 후사를 보사이다."
 
239
하고 가거늘 이 때 부인이 낭자의 신세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하여 이제 비록 도망하여 왔으나 청춘 여자를 데리고 어디로 가 살며 혹 살아난들 승상과 현서를 이별하고 살아서 무엇하리 차라리 이 물에 빠져 죽으리라 하고, 낭자를 속여 뒤보는 체하고 급히 청수에 가 신을 벗어 물가에 놓고 청강록수 깊은 물에 뛰어드니 가련하다 강승상의 부인 백옥같은 고운 몸이 어복 중에 장사하니 어찌 아니 가련하랴. 이때 낭자 모친을 기다리더니 종시 오지 아니 하거늘 급히 나서 살펴보니 사면에 인적이 없는지라 마음이 답답하여 모친을 부르며 청수가에 나와보니 모친이 신을 벗어 물가에 놓고 간데 없거늘 발을 구르며 또한 신을 벗어 물가에 놓고 빠져 죽으려 하더니 이 때는 밤 오경이라 동방이 차차 밝아오며 마침 영릉골 관비 한 년이 외촌에 가다가 회로에 청수가에 다다르니 어떠한 여자 물가에서 통곡하며 물에 빠져 죽고자 하거늘 급히 쫓아와 낭자를 붙들어 물가에 앉히고 연고를 물은 후에 제집으로 가자 하니 낭자 한사하고 죽으려 하거늘 관비 만단개유(여러 가지로 타이름)하여 데리고 와서 수양딸을 정한 후에 자색과 태도를 살펴보니 천상선녀 같은지라. 이 고을 동리마다 수청을 드렸으면 천금재산을 부러워하며 안량태수를 원할쏘냐, 만 가지로 달래어 다른 데로 못 가게 하더라.
 
240
각설이라 이 때에 유생이 강승상의 집을 떠나서 서천을 바라보고 정처 없이 가면 신세를 생각하니 속절없고 하릴없다. 이제는 무가내하(어떻게 할 수 없다)로다. 산중에 들어가 삭발위승하여 훗길이나 닦으리라하고 청산을 바라고 종일토록 가더니 한곳에 다다르니 앞에 큰산이 있으되 청봉만학이 중천한 중에 오색 구름이 구리봉에 떠있고 각색 화초 만발한 지라 장차 신령한 산이라 하고 찾아 들어가니 경개 절승하고 풍경이 쇄락하다. 산행 육칠 리에 들리나니 물소리 잔잔하고 보이나니 청산만 울울한데 청림을 더우잡고 석양에 올라가니 수양천만사는 춘풍을 못 이기어 동구에 흐늘거려 늘어지며 녹죽, 청송은 우거진 가지에 백조 춘정 다투었다. 층층한 화계 상에는 앵무 공작 넘노는데 창천에 걸린 폭포 층암절벽 치는 소리 한산사 쇠북 소리 객선에 이르는 듯 반공에 솟은 암석 청송 속에 있는 거동산수 그림 팔간병풍 둘렀는듯 산중에 있는 경개 어찌 다 기록하리.
 
241
춘풍이 언 듯하며 경쇠(작은 종) 소리 들리거늘 차츰차츰 들어가니 오색 구름 속에 단청하고 휘황한 고루 거각이 즐비하여 일주문을 바라보니 황금대자로 '서해 광덕산 백용사'라 뚜렷이 붙혔거늘 산문으로 들어가니 일원 대승이 나오거늘 그 중의 거동을 보니 소소한 두 눈썹을 두 눈을 덮여있고 백변같이 뚜렷한 귀는 두 어깨에 늘어졌으니 청수한 골격과 은은한 정신은 범승이 아닐러라.
 
242
백팔염주 육환장을 짚고 흑포장삼의 떨어진 송낙 쓰고 나오며 유생을 보고 왈
 
243
"소승이 연마하기로 유상공 오시는 행차에 동구 밖에 나가 맞지 못하니 소승의 무례함을 용사하옵소서"
 
244
유생이 대경 왈.
 
245
"천생에 팔자 기박하여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정처 없이 다니다가 우연히 이곳에 와 대사를 만나오니 그다지 관대하시며 소생의 성을 어찌 아나이까?"
 
246
노승이 답왈
 
247
"어제 남악 형산 화선관이 소승의 절에 왔삽다가 소승더러 부탁하기를 '명일 오시에 남경 동성문 내에 사는 유심의 아들 충렬이가 올 것이니 축객 말고 대접하라'하시기로 소승이 찾아 나옵더니 상공의 복색을 보오니 남경 사람인고로 알았나이다."
 
248
유생이 그 말을 듣고 일희일비하여 노승을 따라 들어가니 제승들이 합장배례하며 반겨하는 지라. 노승의 방에 들어가 석반을 먹은 후에 그 밤을 편히 쉬니 이 곳은 선경이라 세상을 모두 잊고 일신이 무양한지라. 이후로는 노승과 한 가지로 병서도 잠심하고 불경도 학논하니라. 이때에 대명천지무가객이요 과덕산중유발승이라, 본신이 천상 사람으로 생불을 만났으니 기이한 술법을 가르치고 천지 일월성신이며 천하 명산 신령들이 모두 다 협력하니 그 재주와 영민함을 뉘라서 당하리오. 주야로 공부하더라.
 
 
249
천자는 기병쌍궐하하고
250
간신을 투창적진중하다.
 
 
251
각설 이때에 남경조신 중에 도총대장 정한담과 병부상서 최일귀, 일상 꺼리던 유심과 강희주를 만 리 밖에 원찬하고, 조정 백관을 처결하여 천자를 도모코자 하여 신기한 병법과 둔갑장신지술과 승천입지지책과 변화위신지법이며 악화두수지술을 통달하게 배웠으니, 이놈도 본신이 천상 익성으로 인간 사람은 당할 이 없더라.
 
252
일국 만민지상이라, 소장지변이 있었으니 나라가 어찌 무사하랴.
 
253
이 때는 영종황제 즉위 삼년 춘정월이라. 국운이 불행하며 남흉노 선우며 북적과 도심하여 천자를 도모하려 하고 서천 삼십육도 군장과 남만 가달이며, 토번 오국이 합세하여 장사 팔천여원과 정병 오백만으로 주야 행군하여 진남관에 웅거한지라.
 
254
이 때에 백성들이 난리를 보지 못하였다가 뜻밖에 난을 만나니 농상낙약하여 산지사방  피란하니 적연도 탕진하고 창곡도 진갈한지라, 하늘이 정한 운수 그리 않고 어이하리.
 
255
이 때 천자 정월 망일에 호산대에 올라 망월하고 환궁하여 대연을 배설하고 상하동락 즐기더니, 뜻밖에 진남과 수문장이 장개를 올렸거늘 급히 개탁하니 하였으되,
 
256
"남적이 강성하여 오국과 합력하여 진남관 평사뜰 백리 내에 가득하옵고 백성을 노략하며 황성을 치려하오니 바삐 군병을 보내어 도적을 막으소서."
 
257
하였거늘 천자 대경하사 제신을 모아 의논한 새 정한담과 최일귀 이 말을 듣고 대희하여 급히 별당에 들어가 도사를 보고 밖에 도적이 일어났단 말을 하고 대사를 부르니, 도사 문에 나서 천기를 살핀 후에,
 
258
"시재시재로다. 신기한 영웅이 황성에 있는가 하였더니 이제 죽었으며, 때 맞춰 도적이 일어났으니 이는 그대 천자할 수라, 급격물실하라."
 
259
하니 한담이 대희하여 일귀와 더불어 갑주를 갖추고 궐문으로 들어가는지라.
 
260
이 때 천자 제신과 방적 할 꾀를 의논하더니 장안에 바람이 일어나며 일원대장이 계하에 복지 주왈,
 
261
"소장 등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한번 나가 남적을 함몰하여 황상의 근심을 덜고 소장의 공을 세워지이다."
 
262
하거늘 모두 보니 신장이 십여척이요 면목이 웅장한데, 황금투구에 녹운포를 입은 것은 도총대장 정한담이요, 면상이 숯먹 같고 안채가 황홀하며 백금투구에 홍운포를 입은 것은 병부상서 최일귀라.
 
263
천자 대희하사 양장의 손을 잡고 왈,
 
264
"경 등의 충성 지략은 짐이 이미 아는지라 남적을 함몰하여 짐의 근심을 덜게 하라."
 
265
양장이 청영하고 각각 물러나와 정병 오천씩 거느려 행군하여 진남관에 유진하고 그날 밤에 군사 한 명만 잠을 깨워 가만히 항서(降書)를 써 주며 또한  편지를 써서 적진 중에 보내고 회답을 기다리는지라
 
266
그 군사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보고 항서를 올린 후에, 또 편지를 드리거늘 적장이 대희하여 즉시 개탁하니 하였으되,
 
267
"남경 장사 정한담 최일귀는 일장서간을 남진 대장소에 올리나이다. 우리 양인 등이 갈충 진심하여 천자를 도와 국가에 유공하고 백성에게 덕이 있어 지성으로 봉공하되 지기하는 인군을 못만나 항시 앙앙한 마음이 있는지라 대장부 세상에 나서 어찌 남의 신하 오래 되리오. 남아유방백세할진대 역당유취만년이라 하였으니 이 때를 당하여 어찌 묘계 없으리오. 우리 양인을 선봉을 삼으시면 항복할 것이니 그대 뜻이 어떠하뇨? 회답을 보내라."
 
268
하였거늘 적장이 그 글을 보고 대희하여 왈,
 
269
"우리 등이 남경으로 나올 때 도사 근시하기를 정한담 최일귀를 염려하더니 이제 저희 등이 먼저 항복코자 하니 이는 천우신조함이라."
 
270
하고 즉시 회답을 써주되, 군사 급히 본진으로 돌아와 답서를 올리거늘 떼어 보니 하였으되,
 
271
"그대의 마음이 우리 마음 같은지라 선봉을 원대로 맡길 것이니 금야에 반가히 보사이다."
 
272
하였거늘, 정, 최 양장이 갑주를 갖추고 적진에 들어가는지라.
 
273
이적에 중군장이 급히 황성에 올라가 전후수말을 천자에게 고하되, 천자 이 말을 듣고 용상밑에 떨어져 발을 구르며 정한담 최일귀 적장에게 항복하였으니 적진은 범이 날개를 얻은 듯 하고 짐은 용이 물을 잃었으니 이제는 할 일 없다. 성중에 있는 군사 낱낱이 총독하고 각도 각읍에 행관하여 군사와 군량을 준비하고 우승상 조정만으로 도성을 지키고 태자로 중군을 정하시고 상이 친히 후군이 되어 행군을 재촉하니 군사 십여만이요 장수 백여원이라.
 
274
행군고를 재촉할 제, 전일 길주자사 갔던 이행이 원문밖에 복지 주왈,
 
275
"소신이 재주 없사오나 이 때를 당하여 신자 도리에 어찌 사직을 돕지 아니 하오리까? 소신으로 선봉을 정하옵소서."
 
276
천자 대희하사 즉시 이행으로 선봉을 삼아 도적을 막을 새, 이 때 정한담 최일귀 적진에 항복하여 한담이 선봉이 되고 일귀는 중군대장이 되어 급히 황성을 거쳐 들어오며 의기양양하고 호령이 엄숙한데 기치창검은 팔공산 나무같이 벌려있고, 투구 갑옷은 한천에 일광같이 안채가 쐬이는 듯, 금고함성은 천지 진동하고 목탁 나팔은 강산이 뒤눕는 듯, 순식간에 들어와 금산성 백리 뜰에 빈틈없이 벌려 서서 내외음양진을 치고 도사 진중에 망기하며 싸움을 재촉하니, 적진 중에서 방포일성에 한 장수 내달아 외며 왈,
 
277
"명진 중에 천극한 적수 있거든 바삐 나와 대적하라."
 
278
하니 명진중에서 응포하고 좌익장 주선우 응성하고 달려들어 싸울 새, 양진 군사 처음으로 구경하니 항오를 차리지 못하여 승부를 구경하더니 수합이 못하여 극한의 칼이 번듯하며 주선우 머리 마하(말아래)에 떨어지니, 명진중으로 좌익장 죽음을 보고 또 한 장수 내달아 원문 밖에 고성 왈,  
 
279
"극한은 가지 말고 최상정의 칼을 받으라."
 
280
하니 극한이 달려들어 함성이 그치고 그 칼이 번듯하며 최상정의 머리 떨어지니 명진중에서 우익장 죽음을 보고 왕공열이 응성하고 달려들어 극한과 싸울 새 일합이 못하여 거의 죽게 되었더니 명진중에서 팔대장군이 일시에 달려들어 나옴을 보고 한진이 극한과 합력하여 팔장으로 더불어 싸우더니, 한진은 서편을 치고 극한은 동을 치니 촉처(접촉하는 곳)에 죽는 군사 그 수를 모를네라. 사합이 못하여 극한의 창검 끝에 팔장이 다 죽으니, 이 때 태자 중군에 있다가 팔장 죽음을 보고 불승분심하여 말을 타고 진문 밖에 나서며 외워 왈,
 
281
"무도한 남적놈아. 천명을 거역하니 죄사무석이로다. 너의 진중에 정한담 최일귀 머리를 버혀 명진중에 보내는자 있으면 옥새를 전하리라."
 
282
하고 극한을 맞아 싸우더니, 선봉장 이행이 이 말을 듣고 달려오며,
 
283
"태자는 아직 분을 참으소서. 소장이 잡으리다."
 
284
하고 나는 듯이 들어가 좌수에 칼을 들고 극한의 머리를 베이고, 장창을 들고 한진의 머리를 베어, 두 손에 갈라들고 좌우로 충돌하여 본진으로 돌아오니 적진 중에서 한담이 장막 밖에 나서며 청사마를 채쳐 구척장검 높이 들고 바로 명진을 대칼에 함몰코져하니, 이때에 먼저 만적 선봉으로 왔던 정문걸이 내달아 한담을 불러 왈,
 
285
"대장은 분을 참으소서, 소장이 이행을 잡으리다."
 
286
하고 번창출마하여 싸우더니 일합이 못하여 문걸의 칼이 진중에 빛나며 이행의 머리 마하에 내려지는 지라. 문걸이 칼 끝에 꿰어 들고 본진으로 행하다가 다시 명진 선봉을 지쳐 들어오며,
 
287
"명진은 불쌍한 인생을 죽이지 말고 바삐 항복하라."
 
288
하며 순식간에 선봉을 다 베이고 달려들어 중군으로 들어오거늘, 태자 중군을 지키다가 당치 못할 중 알고 후군과 천자를 모시고 금산성으로 도망한지라.
 
289
이 때에 문걸이 명진 장사를 씨도 없이 다 죽이고 명제를 찾은즉 도망하고 없는지라. 군장 복색을 모두 다 탈취하고 본진으로 돌아오며, 정한담이 바로 달려들어가니 천자 망극하여 옥새를 땅에 놓고 앙천 통곡 왈,
 
290
"짐이 불명하여 선황제 사백 년 왕업을 일조에 정한담에게 잃게되니 이는 양호유환이다. 뉘를 원망하리오. 모두 다 짐의 불찰이라 황천에 돌아간들 선황제를 어찌 보며 인간에 살았은들 되놈에게 무릎을 어찌 꿇겠는가."
 
291
하며 금산성이 떠나가게 통곡이 진동하더라.
 
292
수문장이 보하되,
 
293
"해남 정도사 군병을 거느려 왔나이다."
 
294
천자 대희하여 바삐 입시하라 하되, 정도사 군사 십만 병을 거느려 성중에 들어가 천자께 뵈이거늘,
 
295
"즉시 정도사로 선봉을 삼아 도적을 막으라."
 
296
하니 절도사 청령하고 성하에 유진하였더니, 이 때 한담이 도성으로 들어가 용상에 높이 앉아 백관을 호령하니 만조백관이 일조에 항복하더라, 만성인민이 도적에 밤이 되어 물끓듯 하더라.
 
297
이 날 한담이 삼군을 재촉하여 금산성을 쳐 파하고 옥새를 앗고자 하여 성하에 다다르니 명진 군사 길을 막거늘 정문걸이 필마단창으로 명진을 지쳐 좌우로 충돌하니 일신이 검광되어 닫는 앞에 장졸의 머리 추풍낙엽이요, 호전주퇴(병을 기울임에 술이 쏟아지는 듯이)같더라. 순식간에 죽이고 산성 문밖에 달려들어 성문을 두드리며,
 
298
"명제야 옥새를 드리라!"
 
299
하는 소리 금산성이 무너지며 강산이 뒤넘는 듯 하니 성중에 있는 군사 혼백이 없었으니 그 아니 가련한가.
 
300
천자와 조정만이 황황급급하여 북문을 열고 도망하여 암석간에 은신하였더니, 이 때, 태자 황후와 태후를 모시고 도망하랴 하더니 문걸이 성중에 들어와 천자를 찾다가 도망하고 없음에 황후 태자를 잡아 본진으로 보내고 돌아오니, 정한담이 황후를 결박하여 진앞에 꿇리고 천자간 곳을 가르치라 하되, 황후 망극하여 대답지 아니 하거늘, 좌우군사 창검을 갈라들고 옥체를 겨누면서 바른대로 가르치라 하니 황후 황망중에 대답하되,
 
301
"이 몸은 계집이라 성중에 묻혀 있다가 불의에 난을 당하여 천자는 밖에 있는 고로 생사존망을 모르노라."
 
302
한담이 분노하여 황후 태자를 진중에 두어 주려 죽게 하고 용상에 높이 앉아 천자의 일을 행하며 군사를 호령하되,
 
303
"명제를 사로잡는 자 있으면 천금 상에 만호후를 봉하리라."
 
304
하니 군사 청령하고 각진으로 돌아오니라.
 
305
이 때 천자 금산성에서 도망하여 조정만으로 더불어 산곡 사이에 은신하고 있더니 황태후 적진에 잡혀가 죽이려 하는 말을 듣고 통곡하여 암하에 떨어져 죽고자 하거늘 조정만이 붙들어 구완하여 천자를 업고 명성원으로 도망하여 갈 제, 천자께 여쭈오되,
 
306
"남경이 진탕하였으니 도적 정한담 잡기는 새로이 정문걸 잡을 장수 없으니 이제 상동 육국에 청병하여 싸우다가 사불여의(일이 뜻과 같지 않음)하거든 옥새를 가지고 소신과 함께 용동수에 빠져 죽사이다."
 
307
천자 옳게 여겨 조서를 써 산동 육군에 주야로 가 구원병을 청하니, 이때 육군 왕이 이 말을 듣고 각각 군사 십만 병과 장수 천여원을 조발하여 급히 남경 명성원으로 보내니라.
 
308
이 때 육국이 합세하여 호산대 넓은 뜰에 빈틈없이 행군하여 들어오니 천자 대희하여 군중에 들어가 위로하고 적진 형세와 수차 패함을 낱낱이 말하고 적응으로 선봉을 삼고 조정만으로 중군을 삼아 황성으로 들어올 제 그 웅장한 거동은 추상같은지라. 백사장 백 리에 군사 늘어서서 들어오니 남경이 비록 진탕하였으나 무서운 것이 천자의 기굴(살림살이가 갖추어져 있던 터진)러라. 금산성 하에 유진하고 싸움을 도도니 이때 정문걸이 선봉에 있다가 청병이 옴을 보고 필마단창으로 나오거늘 한담이 문걸을 불러 왈,
 
309
"적병이 저다지 엄장한데 장군은 어찌 경솔히 가려하오."
 
310
문걸이 답왈,
 
311
"폐하 어찌 소장의 재주를 수히 알으시나이까? 장편(많은 군사) 군졸 사십 만과 백기(말탄 군사)를 한 칼에 다 죽였으니 남경이 비록 육군에 청병하여 억만 병이 왔거니와 소장의 한 칼 끝에 죽는 구경 앉아서 보옵소서."
 
312
한담이 대희하여 장대에 높이 앉아 싸움을 구경할 새, 문걸이 창검을 좌우에 갈라 잡고 마상에 높이 앉아 나는 듯이 들어가며 호통일성에,
 
313
"명제야 옥새를 가져 왔느냐? 너를 잡으려 하였더니 이제 왔음에 진소위 춘치자명이라. 바삐 항복하여 잔명을 보존하라."
 
314
하고 억만 군중에 무인지경같이 횡행하여 동장을 치는 듯 남장을 베이고, 북장을 베이는 듯 서장이 쓰러지니, 죽는 군사 여산하고 유혈이 성천되었도다. 서초패왕이 강동 건너 함곡관을 부수는 듯, 상산 조자룡이 산양수 건너 삼국 청병 지치는 듯, 문걸이 닫는 곳마다 싸울 군사 없었으니 그 아니 망극할까. 이때 천자 고정만과 옥새를 갖고 용동수에 빠지고자 하나
 
315
또한 도망할 길이 없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마지 아니 하더라.
 
 
316
백용사에 득갑주청검하고
317
송림촌에 득천사마하다.
 
 
318
각설이라 이 때 유충렬이 서해 광덕산 배용사에 있어 노승과 한 가지로 지음(知音)이 되어 세월을 보내더니, 이 때는 부흥 십삼년 추칠월 망간이라 한풍은 소소하고 낙목은 분분한데 고향을 생각하며 신세를 생각할 제 월경야삼경에 홀로 앉아 비감하더니, 노승이 일어나 밖에 갔다 들어오며 충렬을 불러 왈,
 
319
"상공이 금일 천문을 보았나이까?"
 
320
충렬이 놀래어 급히 나와 보니 천자의 자미성이 떨어져 명성원에 잠겨 있고, 남경에 살기 가득하였거늘 방으로 들어와 한숨짓고 낙루 하니 노승이 왈,
 
321
"남경에 병난은 났거니와 산중에 피난하는 사람이 무슨 근심이 있으리까?"
 
322
충렬이 울며 왈,
 
323
"소생은 남경 세록지신이라 국변이 이러하니 어찌 근심이 없으리오마는 적수단신이 만 리 밖에 있사오니 한탄한들 어찌하리오."
 
324
노승이 웃고 벽장을 열고 옥함을 내어놓으며 왈,
 
325
"옥함은 용궁조화거니와 옥함 짬맨(잡아 맨) 수건은 어떠한 사람의 수건인지 자세히 보라."
 
326
유생이 의심하여 옥함을 살펴보니, '남경 도원수 유충렬은 개탁이라.' 금자로 새겨있고 짬맨 수건을 끌러보니,
 
327
"모년 모월 모일에 남경 동성문 내에 사는 충렬의 모친 장부인은 내 아들 충렬에게 부치노라."
 
328
하였거늘 충렬이 수건과 옥함을 붙들고 방성통곡(放聲痛哭)하거늘, 소승이 위로 왈,
 
329
"소승이 수년 전에 절 중창 하로 변양 회수에 다다르니 기이한 오색 구름이 수건에 덮였거늘 바삐 가서 보니 옥함이 물가에 놓였거늘 임자를 주려 하고 갖다가 간수하였더니 금일로 볼진대 상공의 전쟁 기계가 옥함 속에 있는가 하나이다."
 
330
대체 이 옥함은 회수 사공 마철이가 물 속에 잠수질하다가 큰 거북이 옥함을 지고 나오거늘 마철이 거북을 죽이고 옥함을 가져다가 제 집에 두었더니 전일 장부인이 도적에게 잡히어 석장동 마철의 집에 가서 옥함을 갖다가 수건에 글을 쓰고 회수에 넣었더니 백용사 부처중이 가져다가 이 날 충렬을 주었는지라.
 
331
이 때 충렬이 옥함을 안고 왈,
 
332
"이것이 일정 충렬의 기물일진대 옥함이 열릴지라."
 
333
하고 위짝을 열어 놓으니 빈틈없이 들었거늘 보니, 갑주 한 벌과 장검 하나, 책 한 권이 들었거늘, 투구를 보니 비금비옥이라 광채 찬란하여 안채를 쏘이는 중에 속을 살펴보니 금자로 '일광주'라 새겨 있고, 갑옷을 보니 용궁조화 적실하다. 무엇으로 만든 줄 모를러라. 옷깃 밑에 금자로 새겨 있고, 장검은 놓였으되 두미가 없는지라 신화경을 펴놓고 칼 쓰는 법을 보니 갑주를 입은 후에 신화경(술법에 사용되는 경문)일 편을 보고 천상 대장성을 세 번 보게 되면 사린 칼이 절로 펴져 변화무궁 할지라 하였거늘 즉시 시험하니 십척 장검이 번듯하며 사람을 놀래거늘, 한가운데 대장성이 샛별같이 박혀 있고 금자로 새기기를 '장성검'이라 하였거늘, 모두 다 행장에 간수하고 노승더라 왈,
 
334
"옥황께옵서 장군을 대명국에 보낼 제, 사해용왕이 모를 손가. 수년 전에 소승이 서역에 갈 제, 백용암에 다다르니 어미 잃은 망아지 누웠거늘 그 말을 데려왔으나, 상승에게 부당이라 송임촌동 장자(마을에서 덕망이 있는 유지)에게 맡기고 왔으니 그 곳에 찾아가 그 말을 얻은 후에 중로에 지체말고 급히 황성에 득달하와 지금 천자의 목숨이 경각에 있사오니 급히 가서 구원하라."
 
335
유생이 이 말을 듣고 송임촌을 바삐 찾아가 동장자를 만난 후에 말을 구경하자 하니, 이 때 천사마 제 임자를 만났으니 벽력같은 소리하며 백여장 토굴을 넘어 뛰어나서 충렬에게 달려들어 옷도 물며 몸도 대어보니 웅장한 거동은 일필로 난기로다. 심산 맹호 냅다 선 듯, 북해 흑룡이 벽공에 오르는 듯, 강산정기는 안채에 갈마있고 비룡조화는 네 굽에 번듯한데, 턱 밑에 일점 용인이 새겼으되 '사송 천사마'라 하였거늘 유생이 대희하여 장자더러 말을 사자 하니 장자 웃어 왈,
 
336
"수년 전에 백용사 부처중이 이 말을 맡기며 왈 '이 말을 길러내어 임자를 찾아 주라'하기로 맡아 길렀더니 이 말이 장성함에 잡을 길이 없어 토굴에 가두었으나 천만인이 구경하되 하나도 가까이 못 가더니 오늘날 그대를 보고 제 스스로 찾아오니 부처중이 이르던 임자 그대가 적실하니 하늘이 주신 보배니 어찌 판단 말인가, 물각유주 오니 가져가옵소서."
 
337
유생이 대희하여 안장을 갖추어 동장자를 하직하고 송임촌을 지나 광덕산을 행하여 노승에게 치하하고 적년 정희를 하직할 제 제사중의 제승들의 별회지담을 어찌 다 설화하고 기록하리.
 
338
하직하고 그 말 위에 높이 앉아 남경을 바라보며 구름을 가르쳐 말더러 경계왈,
 
339
"하늘은 나를 내시고 용왕은 너를 낼 제 그 뜻이 모두 다 남경을 돕게 함이라 이제 남적이 황성에 강성하여 천자의 목숨이 경각에 있다 하니 대장부 급한 마음 일각이 여삼추라 너는 힘을 다하여 남경을 순식에 득달하라."
 
340
그 말이 그 말을 듣고 청천을 바라보며 벽력같은 소리하고 백운을 헤쳐 나는 듯이 들어가니, 사람은 천신이요, 말은 비룡이라. 남경을 바람같이 달려오니 금산성 넓은 뜰에 살기가 충천하고 황성 문안에 곡성이 진동하더라.
 
341
이 때 천자 중군 조정만으로 더불어 옥새를 가지고 도망하여 용동수에 빠져죽고자 하되 적진을 벗어날 길이 없어 황황망극 하던 차에 문득 북편으로 천병만마 들어오며 천자를 부르거늘 천자 대명 군사 오는가 반겨 바래더니, 남적과 동심하여 마룡이 진공이라 하는 도사를 데리고 천자를 치려하여 억만 군병을 총독하여 일시에 들어오니 이 때에 정한담이 천자되어 백관을 거느리고 최일귀는 대장되어 삼군을 경계할 제, 또한 북적이 합세하여 그 형세 웅장함이 만고에 으뜸이라.
 
342
선봉장 정무걸이 의기양양하여
 
343
"명진 육국 청병 다 죽어있고 또한 북적이 합세하였으니 네 어이 당할소냐. 바삐 나와 항복하여 너의 모자를 찾아가라."
 
344
하고 지쳐 들어오니 이제 천자 하릴없이 옥새를 목에 걸고 항서를 손에 들고 항복하여 하고 나올 적에 중군 조정만과 명진에 남은 군사어찌 아니 한심하고 슬프리오. 천자의 울음소리 명성원이 떠나가게 방성통곡하며 항복하려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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