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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끼전 (雄雉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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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전 (雄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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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이 비로소 열릴 때 만물이 번성하니, 그 가운데 귀한 것은 인생이며 천한 것은 짐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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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짐승도 삼백이고 길짐승도 삼백인데 꿩의 모습을 볼라치면 의관은 오색이오 별호는 화충이다. 산새와 들짐승의 천성으로 사람을 멀리하여 푸른 숲속 시냇가에 휘두러진 소나무를 정자 삼고, 상하로 펼쳐진 밭과 들 가운데 널려 있는 곡식을 주워 먹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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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임자 없이 생긴 몸이라 관포수(官砲手)와 사냥개에게 툭하면 잡혀가서 삼태육경 수령방백 새와 들짐승과 다방골 제갈동지들이 싫도록 장복(長服)하고 좋은 깃 골라내서 사령기(使令旗)에 살대 장식과 전방 먼지털이며 여러 가지에 두루 쓰여지니 그 공적이 적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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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두고 숨어 있는 자취와 좋은 경치를 보고자 하여, 구름 위로 우뚝 솟아오른 높은 봉에 허위허위 올라가니 몸 가벼운 보라매는 예서 떨렁 제서 떨렁하고, 몽치를 든 몰이꾼은 예서 '우여!' 제서 '우여!' 하며, 냄새 잘 맡는 사냥개는 이리 컹컹 저리 컹컹 속잎포기 떡갈잎을 뒤적뒤적 찾아 드니 살아날 길 바이 없구나 사잇길로 가려 하니 하도 많은 포수들이 총을 메고 들어섰으니 엄동설한 굶주린 몸이 이제 다시 어느 곳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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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푸른 산 더운 볕에 뉘 아래로 펼쳐진 밭이며 너른 들에 혹시라도 콩알이 있을 법하니 한 번 주우러 가 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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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장끼 한 마리 당홍대단 두루마기에 초록궁초 깃을 달아 흰 동정 씻어 입고 주먹 같은 옥관자에 꽁지 깃털 만신풍채 장부 기상이 역연하구나. 또 한 마리의 꿩 까투리의 치장을 볼라치면 잔 누비 속저고리 폭폭이 잘게 누벼 위 아래로 고루 갖추어 입고 아홉 아들과 열둘의 딸을 앞세우고 뒤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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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가자, 바삐 가자! 질펀한 너른 들에 줄줄이 퍼져서 너희는 저 골짜기 줍고 우리는 이 골짜기 줍자꾸나. 알알이 콩을 줍게 되면 사람의 공양을 부러워하여 무엇하랴 하늘이 낸 만물이 모두 저 나름의 녹이 있으니 한 끼의 포식도 제 재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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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장끼와 까투리가 들판에 떨어져 있는 콩알을 주으러 들어가다가, 불은 콩 한 알이 덩그렇게 놓여 있는 것을 장끼가 먼저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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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그 콩 먹음직스럽구나! 하늘이 주신 복을 내 어찌 마다 하랴? 내 복이니 어디 먹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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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이 모양을 지켜보고 있던 까투리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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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 콩 먹지 마오. 눈 위에 사람 자취가 수상하오. 자세히 살펴보니 입으로 훌훌 불고 비로 싹싹 쓴 흔적이 심히 괴이하니. 제발 덕분 그 콩일랑 먹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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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말은 미련하기 그지없네. 이 때를 말하자면 동지섣달 눈 덮인 겨울이라. 첩첩이 쌓인 눈이 곳곳에 덮여 있어 천산에 나는 새 그쳐 있고, 만경에 사람의 발길이 끊겼는데 사람의 자취가 있을까 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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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투리도 지지 않고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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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는 그럴 듯 하오마는 지난 밤 꿈이 크게 불길하니 자량하여 처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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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장끼가 또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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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간밤에 한 꿈을 얻으니 황학(黃鶴)을 빗겨 타고,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께 문안드리니 상제께서 나를 보시고는 산림 처사를 봉하시고, 만석고(萬石庫)에서 콩 한 섬을 내주셨으니, 오늘 이 콩 하나 그 아니 반가운가? 옛 글에 이르기를 '주린 자 달게 먹고 목마른 자 쉬 마신다'하였으니, 어디 한 번 주린 배를 채워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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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지 않고 까투리 또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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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꿈은 그러하나 이내 꾼 꿈 해몽해 보면, 어젯밤 이경 초에 첫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북망산 음지 쪽에 궂은 비 홑뿌리면 맑은 하늘에 쌍무지개가 홀연히 칼이 되어 당신의 머리를 뎅겅 베어 내리쳤으니,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죽을 흉몽임에 틀림없으니 제발 그 콩일랑은 먹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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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 또한 그대로 있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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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 또한 염려 말게. 춘당대 알성과에 문관 장원으로 급제하여 어사화 두 가지를 머리 위에 숙여 꽂고 장안 큰 거리로 왔다갔다할 꿈이로세. 어디 과거에나 한 번 힘써 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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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투리가 다시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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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삼경에 또 한 번 꿈을 꾸니 천근들이 무쇠 가마를 그대 머리에 흠뻑 쓰고 만경창파 깊은 물에 아주 풍덩 빠졌기로, 나 홀로 그 물가에 앉아 대성통곡하였으니, 이거야말로 당신이 죽는 꿈이 아니겠소? 부디 그 콩일랑 먹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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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란 놈 또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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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은 더욱 좋을 시고! 명나라가 중흥할 때, 구원병을 청해 오면 이 몸이 대장이 되어 머리 위에 투구 쓰고 압록강 건너가서 중원을 평정하고 승전대장 될 꿈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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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까투리는 또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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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렇다 하고라도, 사경에 또 한 꿈을 꾸니 노인은 당상에 있고 소년이 잔치를 하는데, 스물두 폭 구름 장막을 받쳤던 서발 장대가 갑자기 우지끈 뚝딱 부러지며 우리들의 머리를 흠뻑 덮어 버렸으니 어찌 답답한 일을 볼 꿈이 아니리요? 오경 초에 또 한 꿈을 얻었는데 낙락장송이 뜰 앞에 가득한데 삼태성 태을성이 은하수를 둘렀는데, 그 가운데 별 하나가 뚝 떨어져 당신 앞에 걸려졌으니 당신 별이 그렇게 된 듯, 삼국 때의 제갈무후가 오장원에서 운명할 때도 긴 별이 떨어졌다 하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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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란 놈 더욱 신이나서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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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도 염려할 게 전혀 없네. 장막이 덮여 보인 것은, 푸른 산에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화초병풍 둘러치고, 잔디 장판에 등걸로 베개 삼아 칡잎으로 요를 깔고 갈잎으로 이불 삼아 자네와 나와 추켜 덮고 이리저리 뒹구를 꿈이오, 별이 길게 떨어져 보인 것은 옛날 중국 황제 헌원씨 대부인이 북두칠성 정기를 받아 제일 생남하였고, 견우직녀성은 칠월 칠석 상봉이라, 자네 몸에 태기 있어 귀한 아들 낳을 꿈이로세. 그런 꿈이라면 제발 좀 많이 꾸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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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투리는 또 다른 꿈 이야기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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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녘 닭이 울 때 또 꿈을 꾸니, 색저고리 색치마를 이내 몸에 단장하고 푸른 산 맑은 물가에 노니는데, 난데없는 청삽사리 입술을 앙다물고 와락 뛰어 달려들어 발톱으로 허위치니 경황실색 갈 데 없이 삼밭으로 달아나는데, 긴 삼대 쓰러지고 굵은 삼대 춤을 추며 잘룩 허리 가는 몸에 휘휘청청 감겼으니 이내 몸 과부되어 상복 입을 꿈이오라, 제발 덕분 먹지 마오. 부디 그 콩 먹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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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 들은 장끼란 놈 매우 노해서 까투리 멱살 잡고 이리 치고 저리 차며 소리질러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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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용월태 저 간나위년 기둥서방 마다하고, 다른 남자 즐기다가 참 바, 올 바, 주황사로 뒤쭉지 결박해서 이 거리 저 거리 종로 네거리를 북치며 조리 돌리고, 삼모장과 치도곤으로 난장 맞을 꿈이로세. 그 따위 꿈 얘기란 다시 말라! 앞 정강이 꺾어 놀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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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까투리는 장끼 아끼는 마음 풀풀 나는지라, 입을 다물지 않고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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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물 가를 울어 옐 제 갈대를 물고 날음은 장부의 조심이요, 봉황이 천 길을 날을 수 있으되 주려도 좁쌀을 쪼아먹지 아니함은 군자의 염치거늘, 당신이 비록 미물이라 하나 군자의 본을 받아 염치를 좀 알 것이며 닷소를 낙으로 삼고 백이숙제 주속을 아니 먹고, 장자방의 지혜 염치 사병벽곡하였으니 당신도 이런 것을 본을 받아 근신을 하시려거든 제발 그 콩 먹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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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 또한 그대로 있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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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말 참으로 무식하네. 예절을 모르는데 염치를 내 알손가? 안자님 도학염치로도 삼 십 밖엔 더 못 살고, 백이숙제의 충절염치로도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으며, 장자방의 사병벽곡으로도 적송자를 따라갔으니 염치도 부질없고 먹는 것이 으뜸이로세. 호타하 보리밥을 문숙이 달게 먹고 중흥 천자가 되었고, 표모의 식은 밥을 달게 먹은 한신도 한나라의 대장이 되었으니, 나도 이 콩 먹고 크게 될 줄 뉘 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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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투리는 그래도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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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콩 먹고 잘 된단 말은 내가 먼저 말하오리다. 잔디 찰방수망으로 황천부사 제수하여 푸른 산을 생이별할 것이오니 내 원망은 부디 마오. 옛 글을 보면 고집 너무 피우다가 패가망신한 자 그 몇이요. 천고의 진시황의 몹쓸 부소의 말을 듣지 않고 민심 소동 사십 년에 이세때 나라 잃고, 초패왕의 어리석은 고집 범증의 말듣지 않다가 팔천명 제자 다 죽이고 면목없어 자살하고 말았으며, 굴삼녀의 옳은 말도 고집불통 듣지 않다가 진문관에 굳게 갇혀 가련공산 삼혼되어 강 위에서 우는 새 어복충혼 부끄럽다오. 당신 고집 너무 피우다가 오신명 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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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장끼란 놈 그 고집 버릴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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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먹고 다 죽을까? 옛글 보면 콩탯자(犬)든 사람은 모두 귀하게 되었더라. 태고적의 천황씨는 일만팔천 살을 살았고,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는 풍성이 상승하여 십오 대를 전했으며, 한태조 당태종은 풍진 세상에서 창업 지주가 되었으니, 오곡 백곡 잡곡 가운데서 콩탯자가 제일일세. 강태공은 달팔십을 살았고, 시중천자(詩中天子) 이태백은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올랐고 북방의 태을성은 별 가운데 으뜸일세. 나도 이 콩 달게 먹고 태공같이 오래 살고 태백같이 하늘에 올라 태을선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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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 고집 끝끝내 굽히지 아니하니 까투리 할 수 없이 물러났다. 그러자 장끼란 놈 얼룩 장목 펼쳐 들고 꾸벅꾸벅 고개짓하며 조츰조츰 콩을 먹으러 들어가는구나. 반달 같은 혓부리로 콩을 꽉 찍으니 두 고패 둥그러지며 머리 위에 치는 소리 박랑사중에 저격시황하다가 버금수레 맞치는 듯 와지끈 뚝딱 푸드드득 푸드드득 변통 없이 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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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꼴을 본 까투리 기가 막히고 앞이 아득하여,
 
44
"저런 광경 당할 줄 몰랐던가, 남자라고 여자 말 잘 들어도 패가(敗家)하고 계집 말 안 들어도 망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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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위 아래 넓은 자갈밭에 자락 머리 풀어 헤치고 당글당글 뒹굴면서 가슴 치고 일어나 앉아 잔디풀을 쥐어뜯어 가며 애통해 하고 두 발을 땅땅 구르면서 성을 무너뜨릴 듯이 대단히 절통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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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아들 열두 딸과 친구 벗님네들이 불쌍하다 탄식하며 조문 애곡하니 가련공산 낙목천에 울음 소리뿐이었다. 까투리는 그 슬픈 가운데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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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야월 두견새 소리 슬픈 회포 더욱 섧구나. 통감에 이르기를 좋은 약이 입에 쓰니 병에는 이롭고, 옳은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롭다 하였으니 당신도 내 말 들었더면 이런 변 당할 리 없지, 애고 답답하고 불쌍하다. 우리 양주 좋은 금실 누구에게 말할 손가? 슬피 서서 통곡하니 눈물은 못이 되고 한숨은 비바람이 되는구나, 애고, 가슴에 불이 붙네. 이 내 평생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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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장끼는 그래도 덫 밑에 엎디어서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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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이년 요란하다! 호환을 미리 알면 산에 갈 사람 어디 있겠나? 미련은 먼저 오고 지혜는 누구나 그 뒤의 일이니라. 죽는 놈이 탈없이 죽을까? 그것은 그렇다 치고 사람도 죽고 삶을 맥으로 안다 하니 나도 죽지는 않겠나 어디 한 번 맥이나 짚어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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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투리는 장끼의 말을 듣고 그러려니 여겨 장끼의 맥을 짚어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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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맥은 끊어지고, 간맥은 서늘하고, 태충맥은 굳어져 가고 명맥은 떨어지오. 아이고 이게 웬일이오? 웬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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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란 놈 몸을 한 번 푸드득 떨고 나서 또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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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은 그러하나 눈청을 살펴보게. 동자 부처 온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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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투리는 장끼의 눈청을 살펴보고 나서는 한숨을 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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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속절없네. 저편 눈의 동자부처 첫새벽에 떠나가고, 이편 눈의 동자부처는 지금 막 떠나려고 파랑보에 봇짐싸고 곰방대 붙여 물고 길목버선 감발하네, 애고애고, 이내 팔자 이다지도 기박한가, 상부(喪夫)도 자주 하네, 첫째 낭군 얻었다가 보라매에 채여 가고, 둘째 낭군 얻었다가 사냥개에 물려 가고, 셋째 낭군 얻었다가 살림도 채 못 하고 포수에게 맞아 죽고, 이번 낭군 얻어서는 금실도 좋거니와 아홉 아들 열두 딸을 남겨 놓고 아들딸 혼사도 채 못해서 구복(口復)이 원수로 콩 하나 먹으려다 덫에 덜컥 치였으니 속절없이 영 이별하겠구나. 도화살을 가졌는가, 이 내 팔자 험악하네. 불쌍하다 우리 낭군, 나이 많아 죽었는가, 병이 들어 죽었는가? 망신살을 가졌는가, 고집살을 가졌는가? 어찌하면 살려 낼꼬? 앞뒤에 섰는 자녀 뉘가서 혼취(婚娶)하며 뱃속에 든 유복자 해산구완 누가 할꼬? 운림초당 넓은 들에 백년초를 심어 두고 백년 해로 하잤더니 단 삼 년이 못 지나서 영결종천 이별초가 되었구나. 저렇게도 좋은 풍신 언제 다시 만나 볼꼬?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한탄마라. 너는 명년 봄이 되면 또다시 피려니와 우리 낭군 이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미망일세, 미망일세, 이내 몸이 미망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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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통곡을 하니 장끼는 눈을 반쯤 뜨고,
 
57
"자네 너무 서러워 말게. 상부 잦은 자네 가문에 장가간 게 내 실수라. 이말 저말 잔말 말게. 죽은 자는 불가부생(不可復生)이라, 다시 보기 어려울 테니 나를 굳이 보겠으면 내일 아침 일찍 먹고 덫 임자 따라가면 김천장에 걸렸거나 청주장에 걸렸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감령도나 병영도나 수령도나 관청고에 걸렸든지 봉물짐에 얹혔든지 사또 밥상에 오르든지, 그렇지도 아니하면 혼인 폐백건치 되리로다. 내 얼굴 못 보아 서러워 말고 자네 몸 수절하여 정렬부인 되어 주게. 불쌍하다 불쌍하다, 이내 신세 불쌍하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내 까투리 우지마라. 장부 간장 다 녹는구나. 자네가 아무리 슬퍼해도 죽는 나만 불쌍하네."
 
58
그러면서 장끼는 기를 벅벅 쓴다. 아래 고패 벋드리고 윗고패 당기면서 버럭버럭 기를 쓰나 살 길은 전혀 없고 털만 쑥쑥 다빠진다.
 
59
이때 덫 임자 탁 첨지가 망을 보고 있다가 만신드리 서피(鼠皮) 회양모자 우그려 쓰고 지팡이를 걷어 짚고 허위허위 달려들어, 장끼를 빼어 들고 희희낙락 춤을 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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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화자 좋을시고, 안 남산 벽계수에 물 마시러 네 왔더냐? 탐식몰신 모르고서 식욕이 과하기로 콩 하나 먹으려 들다가 녹수청산에 놀던 너를 내 손으로 잡았구나. 산신님께 치성 드려 네 구족을 다 잡으리라." 하면서 장끼의 빗겨 문 혀를 빼내어 바위 위에 얹어 놓고 두 손 합장하고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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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놓은 저 덫에 까투리마저 치이게 하옵소서. 나미아미타불 관세음보살."
 
62
꾸벅꾸벅 절을 하며 빌기를 마친 탁첨지는 어깨마저 들먹이며 내려간다. 까투리는 뒤미처 밟아 가서 바위에 얹힌 털을 울며불며 찾아다가 갈잎으로 소렴하고 댕댕이로 매장하고 원추리로 명정 써서 어린 소나무에 걸어 놓고 밭머리 사태난 데 금정 없이 산역하여 하관하고 산신제와 불신제(佛神祭)를 지내고 제물을 차린다.
 
63
가랑잎에 이슬을 받아 도토리 잔에 따루어 놓고, 속잎대로 수저를 삼아 친가유무 형세대로 그렁저렁 차려 놓고, 호상의 소임대로 집사를 나누어 정하니, 의관 좋은 두루미는 초헌관이 되었고, 몸 가벼운 제비는 접빈객이 되었으며, 말 잘하는 앵무새는 진설을 맡았구나. 따오기는 제상 앞에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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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미당 까투리 감소고우 현벽 장끼 학생부군 혼귀둔석 신반실당 신주기성 복유존령 사구종인 시빙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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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오기의 축문이 끝난 뒤 제물을 철상할까 말까 하는데 마침 소리개 한 마리 떠오다가 주린 배를 생각하고 내려다보며,
 
66
"어느 놈이 맏상제냐? 내 한 놈 데려 가리라."
 
67
하고 주루룩 달려들어 두 발로 꿩새끼 한 마리를 툭 차가지고 공중에 높이 떠서 층암절벽 상상봉에 덮석 올라앉아 이리저리 뒤적뒤적하면서,
 
68
"감기로 몸이 불편하여 십여 일 굶주려 입맛이 떨어졌더니 오늘에야 인간 제일미를 얻었구나. 문어 전복 해삼찜은 재상의 제일미요, 심년일경 해궁도(海宮桃)는 서왕모(西王母)의 제일미요, 일년장춘 약산주는 상산사호 제일미요, 저절로 죽은 강아지와 꽁지 안난 병아리는 연(鳶)장군의 제일미라. 굵으나 작으나 꿩새끼 하나 생겼으니 배고픈 김에 먹고 보자."
 
69
너울너울 춤을 추다가 아차하고 돌아보니 꿩새끼는 바위 아래 절벽으로 떨어져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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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개는 어안이 벙벙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탄식하여 가로되,
 
71
"삼국명장 관공님이 황용도 좁은 길에서 다 잡은 조조를 놓아주었음은 대의를 생각하심이라. 험악한 연(鳶)장군도 꿩새끼 놓아주었으니 이는 또한 적선(積善)이라, 자손 창성하리로다."
 
72
이때 태백산 갈가마귀 북악을 구경하고 도중에서 배가 고파 요기를 하고서 까투리에게 조문하고 과실을 나눠 먹고 나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73
"그 친구 풍신 좋고 심덕 좋아 장수할 줄 알았더니, 불은 콩 하나 잘못 먹고 어찌 비명횡사했단 말인가? 가련하고 불쌍하도다. 우리야 그런 콩 보기로 먹을쏘냐? 여보, 까투리 마누라님 들어보오. 오늘 이 말씀하는 것은 체면상 들린 일이나 옛날에 이르기를 장수 나면 용마가 나고, 문장이 나면 명필 난다 하였으니, 그대는 상부(喪夫)하고 나는 상처(喪妻)하여 오늘 여기 오게 되었으니 이는 곧 삼물조합이 맞음이라, 꽃 본 나비가 불을 망설이며 물 본 기러기 어옹(魚翁)을 두려워하랴? 그 성세와 그 가문 내가 알고, 내 형세와 내 가문 그대가 알 터인즉 우리 둘이 자수성가할셈 잡고 백년동락 같이함이 어떠하오?"
 
74
이 말을 들은 까투리는 한 마디로 한심하여 툭 쏘아붙이는데,
 
75
"아무리 미물인들 삼년상도 못 마치고 개가하는 법을 누구의 예문에서 보았소? 옛말에 용(龍)은 구름을 따르고 범(虎)은 바람을 따른다 하였고, 계집은 필히 그 지아비를 따르라 하였는데 임마다 따라가겠소?"
 
76
까투리의 말을 들은 까마귀 자기의 경솔함은 생각지 않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77
"그대 말은 가소롭다! 시전개풍장에 이르기를 유자칠인(有子七人)하되 막위모심(莫違母心)이라 하였으니 이는 사람도 일곱 아들을 두고 개가해 갈 때 탄식한 말이라.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대 같은 미물에게 수절이 맞는 말인가? 자고로 까투리의 열녀 족문을 내 일찍이 본 일이 없도다."
 
78
이때 부엉이가 들어와 조문을 끝내고 까마귀를 돌아보며 책망한다.
 
79
"몸뚱이도 검거니와 주둥이도 고약하구나. 어른이 오시면 몸을 벌떡 일으켜서 인사를 할 일이지, 기거도 아니하고 그대로 앉았느냐?"
 
80
이말 듣고 까마귀 그대로 있을 손가?
 
81
"완만한 부엉아! 눈이 우묵하고 귀만 쫑긋하면 다 어른이냐? 내 몸 검다고 웃지 말라. 거죽이 검다한들 속까지 검을쏘냐? 우연비과(偶然飛過) 산음(山陰)하다가 이내 몸 검어진 것이니라. 내 부리 또한 비웃지 말라. 남월왕 구천이도 내 입과 흡사하나 삼시로 장복하고 십 년을 돌아들어 제후왕이 되었느니라. 옛글도 모르면서 어찌 진정 어른을 학대하느냐? 내일 식후에 통문을 놓아 대동회를 방붙이고 양안에서 제명하리라."
 
82
이렇듯, 까마귀와 부엉이가 서로 다투고 있을 때에 푸른 하늘 외기러기 구름 사이에 떠 올라가 우연히 내려와서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좌우를 크게 꾸짖어 가로되,
 
83
"너희들이 무슨 어른이냐? 한나라 소자경이 북해상에 십구 년을 갇혀 있을 때 고국 소식 몰라 하기로 한 장 서간 맡아다가 한나라 천자에게 바쳤으니, 이런 일을 보더라도 내가 먼저 어른이지 너희들이 무슨 어른이냐?"
 
84
이때 앞 연못 물오리가 일곱 번 상처하고 남녀간 혈육이 없어 후처를 구하고 있는데, 까투리가 상부(喪夫)했다는 소식 듣고 통혼도 아니한 채 혼인 잔치 하겠다고, 옹옹 명안 기러기로 안부장이를 삼고 관관저구(鳩) 진경으로 함진 아비를 하고 쾌활 좋은 황새는 후행을 삼았으며, 소리 큰 왜가리로는 길방이로 삼았고 맵시 있는 호반새는 전감 하인을 삼았구나.
 
85
이날 전감 하인 호반새가 들어와 말하기를,
 
86
"까투리 신부 계신가? 우리 신랑 들어가네."
 
87
느닷없이 이 모양 당하게 된 까투리는 울던 울음 뚝 그치고,
 
88
"아무리 과부가 만만키로 궁합도 아니 보고 이런 억지 혼인하자는 법 어디 있느뇨?"
 
89
뒤따라오던 오리가 불쑥 나서서 하는 말이,
 
90
"과부 홀아비 만나는데 예절보고 사주 보랴? 신부 신랑 둘이 만나면 자연 궁합 되느니라. 그럴 것 없이 택일이나 한 번 하여 보세. 일상생기, 이중천의, 삼하절체, 사중유혼, 오상화해, 육중복덕일이요 천덕일덕이 합하였으니 오늘 밤이 으뜸이라, 이성지합(異性之合)은 백복(百福)의 근원이거늘 잔말 말고 조금 자세."
 
91
슬피 울던 까투리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92
"자네도 남아라고 음흉한 말 제법 하네."
 
93
오리가 또 입을 열어 이르기를,
 
94
"잔말 말고 이내 호강 한 번 들어보오. 영주 봉래 청강수에 모든 신선 배를 타고 완월장취하는 모습을 역력히 구경하고 소상동성 넓은 물에 홍요백민 집을 삼아 오락가락 노닐면서 은린옥척 좋은 생선 식량대로 장복하니, 천지간에 좋은 생에 물 밖에 또 있는가?"
 
95
물에서 사는 오리의 자랑을 듣고, 까투리가 잠자코 있을쏘냐?
 
96
"물 생애가 좋다 한들 육지 생애 같을 손가? 육지 생애 이를 테니 우리 생애 들어보오. 평원광야 넓은 들에 오락가락 노닐다가 층암절벽 높은 봉에 허위허위 올라가서 사해팔방 구경하고 춘삼월 꽃시절에 객사청청(客舍靑靑) 버들잎 새로울 때 황금 같은 꾀꼬리는 양류간에 오락가락 춘풍도리 꽃핀 밤에 초혼조 슬피 울어 불여귀 하는 소리 초목과 금수라도 심화가 산란하니 그도 또한 경이로다. 추구월 누런 국화 피었을 때 만산에 널린 실과 주워다가 앞뒤로 쌓아 놓고 치(雉)장군의 좋은 옷과 춘치자명(春雉自鳴) 우는 소리 고금에 비길 데 없네. 물 생애가 좋다한들 육지 생애 당할 손가?"
 
97
말이 막힌 오리가 할말없어 잠자코 있는데 그 옆에 조문 왔던 장끼란 놈이 썩 나서서 하는 말이,
 
98
"이내 몸 환거한 지 삼 년이 지났으되, 마땅한 혼처 없어 외롭더니 오늘 그대 과부되자 내가 조문하러 왔음은 천정배필을 하늘이 도우심이라, 우리 둘이 작을 지어 아들딸 낳고 장가 시집보내 백년 해로 함이 어떠한가?"
 
99
이 말 들은 까투리 얼굴 살짝 붉히며 하는 말이,
 
100
"죽은 낭군 생각하면 개가하기 야박하나, 내 나이 꼽아 보면 늙도 젊도 아니한 중늙은이라, 숫맛 알고 살림할 나이로다. 오늘 그대 풍신 보니 수절할 맘 전혀 없고 음란지심(淫亂之心) 불붙었네. 허다한 홀아비가 예서 제서 통한하나 끼리끼리 논다 하였으니 까투리가 장끼 신랑 따라감이 실로 마땅한 일이로다. 아무렴 살아보세."
 
101
장끼의 통혼을 쾌히 승낙하는 까투리였다. 까투리의 허락을 얻어 낸 장끼란 놈은 껄껄 푸드득하더니 벌써 이성지합이 되었다.
 
102
이 모양을 멀건히 구경하던 까마귀, 부엉이, 물오리들은 가차없이 통혼 거절당하고 무안해서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 뒤를 따라 각색 손님들도 모두 다 날아갔다. 깜장새 호루룩, 방울새 딸랑, 앵무, 공작, 기러기, 왜가리, 황새 모두들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까투리는 새 낭군 앞세우고, 아홉 아들 열두 딸을 뒤세우고 눈보라 무릅쓰고, 운림벽계로 돌아갔다.
 
103
다음 해 삼월 봄이 되니 남혼여가, 아들딸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자웅이 쌍을 지어 명산대천으로 노닐다가 시월이라 십오 일에 양주부처 내외 자웅과 함께 큰 물 속으로 들어가 조개가 되었다.
 
104
세상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치입대수위합이라 하였으니 치위합(雉爲蛤)이 바로 그것이다.
【원문】장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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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