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송(大宋) 신종(神宗) 연간(年間)에 이부시랑(吏部侍郎) 현택지는 태학사(太學士) 현광의 손(孫)이요, 우승상(右丞相) 현범의 아들이라. 그 부인 장씨(張氏)는 병마대도독(兵馬大都督) 장기의 여(女)이니, 공(公)의 위인(爲人)이 관후대덕(寬厚大德)하고, 부인이 또한 인자(仁慈)한 숙녀(淑女)로 부부가 화락(和樂)하며 가산(家産)은 유여(有餘)하되,
4
연기(年紀) 사십에 슬하(膝下)에 남녀간(男女間) 재미를 보지 못하여 만사에 뜻이 없고,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며, 명산(名山) 대찰(大刹)을 찾아 정성을 무수히 들이며, 혹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재물을 주어 구제(救濟)한 일이 많되, 마침내 효험(效驗)이 없음으로, 부부가 매양 슬퍼 탄(嘆)하며 이르기를,
5
「우리 무슨 죄악(罪惡)으로 일점(一點) 혈식(血息)을 두지 못하여, 후사(後嗣)를 끊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6
하며, 술을 내와 마시며 심사를 정(定)하지 못하더니,
7
홀연, 노승(老僧)이 문전(門前)에 이르러 시주(施主)하라 하거늘, 시랑(侍郞)이 본디 시주하기를 좋아하는 고로, 즉시 불러 보니, 그 중이 합장(合掌) 배례(拜禮)하며 이르기를,
8
「소승(小僧)은 천축국 대성사 화주(化主)이옵더니, 절을 중수(重修)하오매 재물이 부족하기로 상공(上公)께 적선(積善)하심을 바라오니, 천 리에 허행(虛行)을 면하게 하소서.」
10
「존사(尊師)가 부처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거늘, 내 어찌 마음에 감동치 아니하리오. 존사에 정성을 표하리라.」
11
하고 채단(綵緞) 백 필(疋)과 은자(銀子) 일천 냥을 권선문(勸善文)에 기록하고, 즉시 내어 주며 이르기를,
12
「이것이 비록 적으나 정성을 발원(發願)함이니 존사는 허물치 말라.」
13
그 중이 백배(百拜) 사례하며 이르기를,
14
「소승이 시주하심을 많이 보았으되, 상공 같으신 이를 보지 못하였거니와, 다 각기 소원을 기록하여 불전(佛殿)에 축원(祝願)하옵나니, 상공은 무슨 소원을 기록하여 주옵시면 그대로 하오리이다.」
16
「약간 재물을 시주하고 어찌 소원을 바라리오만은, 나의 팔자가 사나워 후사를 전할 곳이 없으니, 병신(病身) 자식이라도 있으면 막대한 죄명(罪名)을 면하고자 하나, 어찌 바라리오.」
19
하고 하직하고 가거늘, 시랑이 내당(內堂)에 들어가 노승의 수말(首末)을 이르고 서로 위로하더니, 차년(此年) 추(秋)에 부인이 태기(胎氣) 있으매 시랑이 대희(大喜)하여 십 삭(朔)을 기다리더니,
20
일일은 상서(祥瑞)의 구름이 집을 두르고 부인이 일개(一個) 옥동(玉童)을 생(生)하니, 시랑 부부가 불승(不勝) 환열(歡悅)하여 이름을 수문(壽文)이라 하고 장중보옥(掌中寶玉) 같이 사랑하니 친척(親戚)과 노복(奴僕)들이 즐겨 하더라.
21
수문이 점점 자라 오 세에 이르매, 총명(聰明) 영매(英邁)하여 모를 것이 없고 글을 읽으매 칠서(七書)를 능통(能通)하며 손오(孫吳) 병서(兵書)와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좋아하고, 혹 산에 올라 말 달리기와 활쏘기를 익히니, 부모가 좋아하지 아니하나, 더욱 기뻐함을 마지아니하니 수문이 비록 오 세 소아이나, 숙성(熟成)함이 큰 사람에 가깝더라.
22
차시 황숙(皇叔) 연평왕이 불의지심(不意之心)을 두어, 우사장군(右司將軍) 장흡 등으로 반역(叛逆)을 꾀하다가 발각함이 되매, 연평왕을 사사(賜死)하시고 기자(其子)를 원찬(遠竄)하시며, 여당(餘黨)을 잡아 처참(處斬)하실새, 이부시랑 현택지 또한 역률(逆律)의 연좌(連坐)를 면치 못하매 시랑을 나문(拿問)하실새, 시랑이 불의지화(不意之禍)를 당하여 고두(叩頭) 읍(泣)하며 이르기를,
23
「신(臣)의 집이 칠대(七代)로부터 국은(國恩)을 입사오매, 신 또한 벼슬이 이부시랑에 참여(參與)하오니 외람(猥濫)하옴이 있사오나, 동동촉촉(洞洞燭燭)하여 국은을 저버리지 아니하옵고, 신의 가산(家産)이 자연 도주(陶朱) 의돈(猗頓)의 재물만 못지아니하여, 일신의 너무 다복(多福)함을 조심하옵거늘, 어찌 역모(逆謀)에 투입(投入)하여 집을 보전(保全)치 아니하오리까. 복망(伏望) 성상(聖上)은 신의 사정을 살피사 칠대 군신지의(君臣之議)를 하념(下念)하옵소서.」
25
「경(卿)의 집일은 짐이 아는 바이라. 특별히 물시(勿施)하나니, 경은 안심하라.」
27
「현택지 비록 애매(曖昧)하오나 죄명(罪名)이 있사오니, 마땅히 관작(官爵)을 삭(削)하옵고, 원찬하옴이 좋을까 하나이다.」
28
상이 마지못하여 무량도로 정배(定配)하라 하시니, 차시(此時) 금오관(金吾官)이 급히 몰아 길을 떠날새, 집에 가지 못하고 바로 배소(配所)로 향하니 부인과 아자(兒子)를 보지 못하고 아득한 심사를 진정하지 못하여, 한 곳에 다다르니 층암절벽(層巖絶壁)은 하늘에 닿았고 풍랑(風浪)이 대작(大作)하여 서로 언어를 알지 못하더라.
29
시랑이 더욱 슬퍼하며 무량에 이르니 악풍(惡風) 토질(土疾)이 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견디기 어려우나, 소무(蘇武)의 절개(節槪)를 효칙(效則)하여 마음을 온전(穩全)하게 하니, 그 충의(忠義)를 가히 알리러라.
30
차시(此時) 장부인(張夫人)이 이 소식을 듣고 망극하여, 아자 수문을 데리고 주야로 슬퍼하니, 수문이 모친을 위로하여 이르기를,
31
「소자가 있사오니 너무 과도히 슬퍼 마소서.」
32
하며 궁마지재(弓馬之才)를 익히니, 부인이 그 재조를 일컬으며 날과 달을 보내나 시랑의 일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눈물이 나상(羅裳)의 이음차니 어찌 참연(慘然)치 아니하리오.
33
각설, 운남왕(雲南王)이 반(叛)하여 중원(中原)을 침범하니, 동군(東郡)태수(太守)가 급히 상달(上達)하온대, 상이 대경(大驚)하사 대사도(大司徒) 유원충으로 대원수(大元帥)를 내리시고, 표기장군(驃騎將軍) 이말로 선봉을 내리시며 영주(永州) 도독(都督) 한희로 운량관(運糧官)을 내리시고, 청주(靑州) 병마도위(兵馬都尉) 조광본으로 후군도총사(後軍都總司)를 삼아,
34
정병(精兵) 이십만, 철기(鐵騎) 십만을 조발(調發)하여 반적(叛賊)을 치라 하시니, 유원충이 대군(大軍)을 휘동(麾動)하여 금릉에 다다르매, 운남(雲南) 선봉장(先鋒將) 곽자희 십육 주(州)를 쳐 항복받고 금릉을 취하니,
35
차시(此時) 장부인이 시랑이 적소에 감으로 아자 수문을 데리고 금릉 땅에 내려와 살더니, 불의(不意)에 난을 당하매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수문을 데리고 황축산에 피난할새, 중로(中路)에서 도적을 만나매, 부인이 황황(遑遑) 망조(亡兆)하여 닫더니, 도적이 수문의 상모(相貌)가 비범(非凡)함을 보고 놀라 이르되,
36
「이 아이가 타일(他日)에 반드시 귀히 되리로다.」
37
하고 데리고 가니, 장부인이 대경(大驚) 망극하여 통곡하다가 혼절(昏絶)하니, 시비 채섬이 공자(公子)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통곡하다가 부인을 구호(救護)하여 향할 바를 알지 못하더니, 이윽고 도적이 물러가거늘, 부인이 채섬을 붙들고 집에 찾아오니라.
38
차시 적장(敵將)이 금릉을 쳐 얻고 송진(宋陣)을 대하매, 벽하(碧河)를 사이의 두어 진(陣)치고 대질(大叱)하기를,
39
「우리 운남왕이 송황제(宋皇帝)와 더불어 골육지친(骨肉之親)이라. 연평왕을 죽이고, 그 세자(世子)를 안치(按治)하니 불인(不仁)함이 이러하고, 황친(皇親) 국족(國族)을 일률(一律)로 죽이니 어찌 차마 할 바이리오. 너의 천자가 만일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면 당당히 송국(宋國)을 무찔러, 무도(無道)한 송제(宋帝)를 없이 하고, 우리 대왕으로 천자를 삼고자 하나니, 너희들도 천시(天時)를 짐작하거든 빨리 항복하여 잔명(殘命)을 보존(保存)하라.」
41
「이 무지(無知)한 오랑캐. 감히 천위(天位)를 역(逆)하여 천하에 용납하지 못할 역적이 되매 천벌을 어찌 면하리오. 나의 칼이 사정(私情)이 없나니, 빨리 나와 칼을 받으라.」
42
하고 백설(白雪) 부운총(浮雲鏦)을 몰아 내달으니, 적진 중에서 한 장사가 맞아 나오매, 이는 운남왕의 제이자(第二子) 조승이라. 삼척(三尺) 양인도(兩刃刀)를 들고 대호(大呼)하기를,
43
「우리 구태여 천자를 범(犯)함이 아니라. 송제(宋帝) 전일 허물을 고치지 아니함은, 여등(汝等)이 간(諫)하지 아니함이요, 간신(奸臣)을 가까이 하고 현신(賢臣)을 멀리함은, 여등이 모역(謀逆)할 의사를 둠이니 부끄럽지 아니하여 어찌 나를 대적(對敵)하고자 하느뇨.」
44
송진 중에서 차언(此言)을 듣고 참색(慙色)이 만면(滿面)하여 싸울 마음이 없더니, 부장(副將) 적의 분기(憤氣)에 대발(大發)하여 바로 조승을 취하니, 조승이 대노하여 교봉(交鋒) 사십여 합(合)에 승부를 결(結)치 못하더니, 조승이 문득 말혁(革)을 잡고 이르기를,
45
「종시(終是)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니, 후일 뉘우침이 있으나, 믿지 못하리로다.」
46
하고 말을 돌리어 본진(本陣)으로 가거늘, 송진 장졸(將卒)이 대적하지 못하더니, 문득 적진 중에 일원(一員) 대장이 출마(出馬) 대호하기를,
47
「송장(宋將)은 닫지 말고 내 말을 들으라.」
48
모두 보니 이는 산양인(山陽人) 범영이라. 본디 적의로 더불어 동문(同門)수학(修學)한지라. 적의 경문(警問)하며 이르기를,
49
「현제(賢弟) 어찌 이곳에 참례(參禮)하였느뇨?」
51
「이제 송제 실덕(失德) 무도(無道)하여 제후(諸侯)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재물을 탐하여 선배(先輩)를 대접(待接)하지 아니하니, 어찌 임금의 정사(政事)라 하리오. 우리 운남왕은 송실지친(宋室之親)이라. 일찍 그른 일이 없고 인자(仁慈) 공검(恭儉)함으로 천자가 구하는 재보(財寶) 미녀(美女)를 보내지 않은 바가 없으며, 표(表)를 올려 간(諫)함이 한두 번이 아니로되, 심지어 사자(使者)를 참(斬)하고 듣지 아니하기로, 마지못하여 이신벌군(以臣伐君)하니 그대는 천자가 개과(改過)하심을 간(諫)하라.」
52
하고 소매로 부터 일봉(一封) 표(表)를 내어 주며 이르기를,
53
「이 표를 천자께 드려 허물을 아르시게 하라.」
54
하고 회군(回軍)하여 가거늘, 적의 본진에 돌아와 원수께 표를 들이고, 범영의 말을 이르니 유원충이 청파(聽罷)의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을 내지 아니하더니, 문득 군을 거두어 본국의 돌아와 천자께 표를 올렸더니, 상이 그릇하심을 깨달으사 제국(帝國)의 조서(詔書)를 내리 오시니 운남국이 안병(按兵) 부동(不動)하더라.
55
각설. 장부인이 수문을 잃고 집에 돌아오매, 도적이 와 세간을 노략(擄掠)하여 가고 집이 비었거늘, 부인이 더욱 망극하여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더니, 정신을 차려 채섬을 붙들고 이르기를,
56
「나의 팔자가 기구하여 상공께오서는 적소(謫所)에 계시고, 공자(公子)는 난중(亂中)에 잃고 집에 돌아오매, 가중지물(家中之物)이 없었으니 죽을 줄 알거니와 무량도를 찾아 상공을 만나보고 죽으리라.」
57
하고 채섬을 데리고 서천 무량으로 향하니라.
58
재설(再說), 수문이 도적에게 잡히어 진주(晉州)에 있더니, 그 도적이 회군(回軍)하여 본국으로 가매, 수문을 구계산 하(下)에 버리고 가며,
59
「나중에 너를 데려감이 좋으나 군중(軍中)에 무익(無益)하므로, 이곳에 두고 가느니 너는 무사히 있으라.」
61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모친의 종적을 찾되, 어찌 알리오?」
62
여러 날 먹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사면(四面)으로 다니다가, 날이 저물매 수풀 속에 들어 밤을 지내더니, 홀연 노인이 곁에서 불러 이르기를,
63
「너는 어린 아이로 어찌 이곳의 누워 슬피 우느냐? 나와 함께 있음이 어떠하뇨?」
64
하고 소매로부터 실과(實果)를 내어 주거늘, 수문이 받아먹으며 재배(再拜)하며 이르기를,
65
「대인(大人)은 뉘시기에 여러 날 주린 아이를 구제하시니, 은혜 망극하거니와 또한 양육(養育)하심을 이르시니, 난중에 잃은 모친을 맞는 듯 반갑기 측량(測量) 없도소이다.」
67
「네 모친이 무사히 있으니 너는 염려 말라.」
68
하고, 함께 돌아오니 수간(數間) 초옥(草屋)이 단정히 있고, 학의 소리가 들리더라. 노인이 수문을 데려온 이후로 심히 사랑하며 단저를 내어 곡조를 가르치니, 오래지 아니하여 온갖 곡조를 통하니 노인이 즐겨 이르기를,
69
「네 재조를 보니 족히 큰 사람에 이를지라. 매양 태평한 때가 없으리니, 네 이것을 숭상(崇尙)하라.」
70
하고 일권(一券) 책(冊)과 일척(一尺) 검(劍)을 주거늘, 수문이 받아 보니, 그 칼에 서기(瑞氣) 엉기었고, 그 책은 전에 보던 책 같으나 병서에 모를 대문(大文)이 있더라.
71
수문이 낮이면 병서를 공부하고, 밤이면 칼 쓰기를 좋아하니, 무정한 세월에 노인의 애휼(愛恤)함을 힘입어 일신(一身)은 안한(安閑)하나, 엄친(嚴親)은 적소(謫所)에 계심을 짐작하고, 모친은 난중에 실산(失散)하여 존망(存亡)을 알지 못하니, 설움을 견디지 못하여 눈물이 흐름을 억제(抑制)치 못하나, 마음이 강잉(强仍)하여 요행 만나뵈옴을 축원하더라.
72
일일은 노옹(老翁)이 수문을 불러 이르기를,
73
「내 너를 데려온 지 어느덧 아홉 해라. 함께 있을 인연(因緣)이 진(盡)하였으니, 오늘 이별을 면치 못하려니와, 장부(丈夫)의 사업(事業)을 잃지 말라.」
74
수문이 이 말을 듣고 악연(愕然)하여 이르기를,
75
「대인이 소자를 사랑하심이 과도(過度)하사, 배운 일이 많사와 망극한 은혜를 잊지 못하더니, 이제 떠남을 이르시니 향할 바를 알지 못하오매, 어느 날 대인 은덕을 보은(報恩)하옴을 원하나이다.」
76
노인이 수문의 말을 듣고 자닝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르기를,
77
「나는 일광대사요, 이 산 이름은 남악(南岳) 화산(華山)이라. 벌써 너를 위하여 이곳에 있더니, 네 이제 재조가 비상함을 보매 실로 염려는 없는지라. 그러나 오는 액화(厄禍)를 피하지 못하리니, 만일 위태함이 있거든 이를 떼어 보라.」
78
하고, 즉시 세 봉(封) 글을 주거늘, 수문이 받아보니 그 속은 알지 못하나 겉봉에 제차(第次)를 썼더라. 드디어 하직할새 눈물을 흘리고 백배(百拜) 사례하며 모친의 말을 묻고자 하더니, 문득 간 곳이 없는지라. 수문이 크게 놀라 공중에 하직하고 길을 당하니, 그 향할 바를 알지 못하여 추창(惆愴)한 거동(擧動)이 비할 데 없더라.
79
각설(却說), 현시랑(玄侍郞)이 적소에 가 겨우 수간 초옥을 얻어 머물매, 수하(手下)에 아무 시자(侍者)도 없고 해중(海中)독기(毒氣)의 견디지 못함은 이르기도 말고, 적막한 산중에 한서(寒暑)를 견디며 부인과 아자 수문을 생각하고 주야로 통곡하더니, 일일은 무량도 지키는 군사가 고(告)하되,
80
「어떤 부인이 찾아와 시랑을 뵈와지라 하더이다.」
81
하거늘, 시랑이 경아(驚訝)하며 이르기를,
82
「나는 천자께 득죄(得罪)한 죄인이거늘, 수천 리 원로(遠路)에 어떤 부인이 와 찾으리오.」
83
하고 군사를 달래어 들여보냄을 이르니, 이윽고 왔거늘 보니 다른 이 아니요, 곧 장부인(張夫人)이라. 어린 듯 아무 말을 이르지 못하더니 서로 붙들고 통곡하며 인사를 차리지 못하더니, 부인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전후(前後) 수말(首末)을 이르니, 시랑이 앙천(仰天) 탄하며 이르기를,
84
「나의 팔자가 갈수록 사오나와 칠대(七代)까지 독자(獨子)로 내게 와 후사(後嗣)를 잇지 못하게 되었더니, 하늘이 불쌍히 여기사 늦게야 아들 수문을 얻으매 불효를 면할까 하였더니, 여앙(餘殃)을 면치 못하여 난중(亂中)의 잃으매, 그 생사를 알지 못하고 겸하여 나는 국가의 죄명으로 이처(異處)로 있어 천일(天日)을 보지 못하니, 어느 날 함께 모임을 바라리오.」
85
말을 마치며 혼절(昏絶)하니, 부인이 만단개유(萬端改諭)하여 시랑을 뫼시고 함께 머무니, 적막함이 대강 없으나 한갖 수문을 생각하고 요행 살았다가 서로 만나 봄을 하늘께 축수(祝手)하더라.
86
재설(再說), 수문이 대사와 이별하고 정처 없이 다니매, 행중(行中)에 반전(半錢이 없음으로 기갈(飢渴)이 자심(滋甚)하니, 몸이 곤비(困憊)하여 한 반석(盤石) 위에 누어 쉬더니, 문득 잠이 들매 일위 노인이 갈건(葛巾)도복(道服)으로 죽장(竹杖)을 끌고 수문을 깨어 이르기를,
87
「너는 어떤 아이기에 바위 위에서 잠을 자느냐?」
89
「소자는 난중에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다니므로 이곳에 왔나니, 성명은 현수문이로소이다.」
90
노인이 수문의 상모(相貌)가 비범함을 보고 이르기를,
91
「네 말을 들으니 심히 비감(悲感)한지라. 제처(諸處)로 다니지 말고 나와 함께 있음이 어떠하뇨?」
93
「소자는 친척도 없고 빌어먹는 아이라. 대인이 더럽다 아니 하시고 거두어 주시고자 하시니 은혜 망극하도소이다.」
94
노인이 인하여 수문을 데리고 집에 돌아오니, 원래 이 노인은 성명이 석광위라.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있더니 남의 시비를 피하여 고향에 돌아오매, 부인 조씨(趙氏) 일녀(一女)를 생(生)하니 이름은 운혜요 자는 월궁선이라.
95
덕행(德行)이 태임(太妊)을 효칙(效則)하여 아름다움이 있으나, 일찍 모친을 여의고 계모 방씨(方氏)를 섬기매 효행이 지극하므로, 석공(石公)이 매양 택서(擇壻)하기를 힘써하더니, 이날 우연히 물가에 노닐다가 수문의 영웅을 알고 데려옴이러라.
97
「내 우연히 아이를 얻으니 천하의 영웅이라. 운혜의 배필을 삼고자 하나니, 수이 택일(擇日)하여 성혼(成婚)하리니 부인은 그리 알으소서.」
99
‘운혜를 매양 시기하더니, 또 저와 같은 쌍을 얻을진대, 내 어찌 견디리오.’
100
하고 거짓 노색(怒色)을 띠어 이르기를,
101
「운혜는 여중(女中) 군자(君子)라. 이제 그런 아이를 얻어 사위를 삼으면, 남이 알아도 그 계모가 택서 않음이 나타나오리니, 원상공은 명가(名家) 군자를 가리어 사위를 삼음이 좋을까 하나이다.」
103
「이 아이 비록 혈혈(孑孑)무의(無依)하나 현시랑의 아자(兒子)이라. 후일 반드시 문호(門戶)를 빛내리니 부인은 다시 이르지 말라.」
104
하고 즉시 소저(小姐)를 불러 운환(雲鬟)을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105
「내 너를 위하여 호걸(豪傑)의 사람을 얻었으니 평생 한이 없도다.」
106
소저가 아미(蛾眉)를 숙이고 부답(不答)하더라.
107
석공이 방씨를 취(取)한 후, 이녀(二女) 일자(一子)를 생(生)하니, 장녀의 명은 휘혜요, 차녀의 명은 현혜요, 일자가 있으니 이름이 침이라.
108
공이 매양 치가(治家)함이 엄숙(嚴肅)하므로 가중 사람들이 범사(凡事)를 임의(任意)로 못하더니, 공이 수문을 데려옴으로부터 지극히 사랑하고 대접하며 별당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서책(書冊)을 주어 공부하라 하니, 수문의 문재(文才) 날로 빼어나매 석공이 더욱 사랑하나, 다만 방씨는 수문의 재조를 밉게 여겨 앙앙(怏怏)한 심사를 품었더라.
110
「네 어려서 부모를 실산(失散)하여 그 근본을 알지 못하거니와, 노부(老夫)가 초취(初娶) 조시(早時)에 일녀(一女)가 있으니 춘광(春光)이 삼오(三五)라. 비록 아름답지 못하나 군자의 배필됨이 욕되지 않으리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너와 성혼하고자 하나니 알지 못게라. 네 뜻이 어떠하뇨?」
111
수문이 청파(聽罷)에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두 번 절하여 이르기를,
112
「대인의 위자(慰藉)하심이 이같이 이르시니 황공무지(惶恐無地)하오나 일개(一介) 걸인(乞人)을 거두어 천금(千金) 귀소저(貴小姐)로 배우를 정하고자 하시니, 불감(不敢)함을 이기지 못하리로소이다.」
114
「이는 하늘이 주신 인연이라. 어찌 다행치 아니하리오.」
115
하고 즉시 택일(擇日) 성례(成禮)하니 신랑의 늠름(凜凜)한 풍채 사람의 눈을 놀래고, 신부의 요요(姚姚)한 태도가 만좌(滿座)의 황홀하니 짐짓 일쌍(一雙) 가위(可謂)라. 공이 기뻐함을 마지아니하여, 부인 방씨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116
「또 여아가 둘이 있으니, 저 현랑(玄郞)과 같은 사위를 얻으시면 좋으리로소이다.」
119
하고, 다만 점두(點頭) 부답(不答)하더라.
120
날이 저물매 양인(兩人)이 신방에 나아가니 원앙(鴛鴦) 비취(翡翠) 길들임 같더라.
121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여러 춘광이 지내매, 방씨 소생 두 소저도 장성하여 성혼(成婚)하니 장(長)은 통판(通判) 이경의 며느리 되고, 차(次)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진관오의 며느리 되매, 두 서랑(壻郞)의 사람됨이 방탕하여 어진 이를 보면 좋아 아니하고, 아당(阿黨)하는 이를 보면 즐겨하니, 방씨 매양 좋아 아니하여 현생(玄生)의 일을 점점 밉게 여기고, 박대(薄待)할 마음이 날로 간절하나 석공의 치가함을 두려워 행치 못하더라.
122
석공이 나이 칠십에 이르매 하늘의 정한 수한(壽限)을 어찌 면하리오. 졸연(猝然) 득병(得病)하여 백약이 무효(無效)하니, 스스로 회춘(回春)하지 못할 줄 알고, 부인과 현생(玄生) 부부와 아자(兒子) 침을 불러 좌우에 앉히고, 유체(流涕)하며 이르기를,
123
「내 이제 죽으나 무슨 한이 있으리오마는, 다만 침아의 성혼함을 보지 못하니 이것이 유한(有恨)이나, 그러나 현서(賢壻) 현생(玄生)의 관후(寬厚) 대덕(大德)을 믿나니 돌아가는 마음이 염려 없거니와, 부인은 모름지기 가사(家事)를 전과 같이 하면 어찌 감격하지 아니 하리오.」
124
하고, 장녀 운혜를 가까이 앉히고 귀에 대고 이르기를,
125
「네 모친이 필경(畢竟) 불의지사(不義之事)를 행하리니, 시비(侍婢) 향랑의 말을 듣고 어려운 일을 생각지 말라.」
126
하고 현생을 돌아보아 소저의 일생을 당부하니, 현생이 눈물을 흘리고 이르기를,
127
「소서(小壻)가 악장(岳丈)을 뫼시고 길이 있을까 하였더니,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사오니 어찌 잊음이 있으리까마는, 대인(大人)의 은혜를 갚지 못하왔사오니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라 하리까.」
128
공이 오열(嗚咽) 장탄(長歎)하며 이르기를,
129
「그대는 영웅이라. 오래지 아니하여 이름이 사해(四海)에 진동하리니, 만일 여아의 용렬(庸劣)함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는 나를 잊지 않음이라. 그대는 길이 무양(無恙)하라.」
130
하고 상(床)에 누우며 명(命)이 진(盡)하니 향년(享年)이 칠십육 세라. 부인이 발상(發喪) 통곡하고 소저가 혼절하니 모든 자녀와 노복들이 망극 애통하고, 현생이 또한 애통함이 친상(親喪)에 다름이 없이 상수(喪需)를 극진히 하며 예(禮)로써 선산(先山)에 안장(安葬)하니 일가(一家) 친척(親戚)이 칭찬 아니하는 이 없더라.
131
차시, 방씨 현생의 지극히 보살핌을 도리어 싫게 여겨, 무슨 일에 기탄(忌憚)이 없으매 박대함이 자심(滋甚)하고, 심지여 노복(奴僕)의 소임(所任)을 시키니, 이때 아자 침의 나이 십 세라. 모친을 붙들고 간(諫)하기를,
132
「이제 매형(妹兄)이 우리 집의 있으매 무슨 일에 간험(艱險)하기는 소자보다 더하거늘, 태태(太太)는 천대(賤待)하심이 노복으로 같게 하시니, 어찌 부친 유교(遺敎)를 저버리시는고?」
134
「현가(玄家) 축생(畜生)이 본디 식량(食糧)이 많은 놈이라. 밥만 많이 먹고 공연히 집에 있어 무엇에 쓰리오. 그적 두기 볼 수 없기로 자연 일을 시킴이거늘, 너는 어미를 그르다 하고 그놈과 동심(同心)이 되니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라 하랴.」
136
방씨 갈수록 보챔이 심하매 혹 나무도 하여 오라하며, 거름도 치라 하니 현생이 사양하지 아니하고 공순히 하니 현생의 어짊이 이 같더라.
137
방씨 혹 이생(李生)과 진생(秦生)을 보면 크게 반기며 대접을 가장 후히 하되, 홀로 현생에 이르러는 구박함이 자심하더니, 일일은 노복이 산간(山間)에 가 밭을 갈다가 큰 범을 만나 죽을 뻔한 수말(首末)을 고하니, 방씨 이 말을 듣고 그윽이 기뻐 현생을 그곳에 보내면 반드시 범에게 죽으리라 하여, 즉시 현생을 불러 거짓 위로하고 이르되,
138
「상공(上公)이 기세(棄世)하신 후, 가사를 내 친집(親執)하매 현서(賢壻)를 자주 위로치 못하니 심히 저어하거니와, 요사이 춘경(春耕)을 다 못하여 아무 산하(山下)의 밭이 불농(不農)하기의 이르니, 현서는 그 밭을 갈아줌이 어떠하뇨?」
139
현생이 흔연(欣然) 허락하고, 쟁기를 지고 그곳의 이르러 밭을 갈새 문득 석함(石函)이 나타나거늘, 생(生)이 놀라 자세히 보니 글자로 새겼으되, ‘한림학사(翰林學士)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대원수(大元帥) 바리왕 현수문은 개탁(開坼)하라.’ 하였거늘,
140
현생이 경아하여 열어보니 그 속의 갑옷과 투구며 삼척 보검(寶劍)이 들었거늘, 그제야 남악(南岳) 노인의 말을 생각하고 크게 기뻐 가지고 집에 돌아와 깊이 간수(看守)하고 방중(房中)의 앉았더니, 방씨 날이 저물도록 현생이 돌아오지 않음을 기뻐 필연 호환(虎患)을 면치 못하리라 하였더니, 문득 제 있던 별당에서 글소리가 나거늘 의심하여 노복으로 하여금 그곳의 가보니 과연 그 밭을 다 갈고 왔는지라.
141
방씨 마음에 희한히 여기나 무슨 계교로 없이하고자 하더니, 문득 일계(一計)를 생각하고, 서종남(庶從南) 방덕을 불러 이르되,
142
「우리 상공이 생시에 망령된 일을 하여 괴이한 아이를 길에서 얻어, 장녀 운혜로 배우(配偶)를 삼으매 보기 싫음이 심하여 눈의 가시 되었으니, 일로 하여 내게 대환(大患)이 되거니와, 네 상처(喪妻)한 후로 이때까지 재취(再娶)치 못하였으니, 그 현가(玄家)를 없이하고 그 처를 취하면 어찌 좋지 아니하랴?」
143
방덕이 대열(大悅)하여 그 없이하는 계교(計巧)를 물으니 방씨 이르기를,
144
「네 독한 약을 얻어주면, 내 스스로 처치할 도리 있으니 너는 주선(周旋)하라.」
145
이튿날 덕이 과연 약을 얻어 왔거늘, 방씨 밥에 섞어 내어 보내느라.
146
차시, 현생이 방씨의 괴롭게 함을 견디지 못하여 탄식함을 마지 아니 하더니, 전일 사부(師父)가 주던 봉서(封書)를 생각하고, 일봉을 떼어 보니, 하였으되,
147
‘석공이 죽은 후 방씨의 심한 간계(奸計) 있으리니 밥 먹을 때에 저를 내어 불면 자연 좋으리라.’
148
하였거늘, 생이 밥상을 받아 곁에 놓고 저를 부니, 방안에 서기(瑞氣) 일어나고 그릇에 담은 밥이 사라지거늘, 현생이 크게 괴이 여겨 그 밥에 약을 섞었음을 짐작하고 태연히 상을 물리고 앉았으니, 방씨 일마다 이루지 못함을 분노하여 공연히 운혜 소저를 휘욕(揮辱)하더라.
149
차시, 현생이 방씨의 화를 면치 못할까 저어하여 소저를 보고 이르기를,
150
「이제 방씨의 흉계 심하니 내 스스로 피(避)하는만 같지 못하나, 그대의 일신도 무사치 못하리니 일로 근심하노라.」
152
「군자가 피하고자 하실진대 어찌 첩을 생각하시리오. 다만 거처하심을 알지 못하니 초창(怊悵)하심이 비할 대 없거니와, 길에 반전(半錢)이 없으리니 이를 팔아 가지고 행하소서.」
153
하며 향랑을 불러 옥지환(玉指環)과 금봉차(金鳳釵)를 팔아 은자 백 냥을 받아 현생을 주며 이르기를,
154
「이제 군자가 떠나시면 장차 어디로 향하오며, 돌아오실 기약은 어느 때로 하시리까?」
156
「나의 일신이 도로(道路)에 표박(漂迫)하니 정할 수 없거니와, 어느 날 만나기 묘연(渺然)하니 그대는 그 사이 보중(保重)하라.」
157
하고 눈물을 흘리거늘, 소저가 또한 심사를 정하지 못하여 눈물을 흘려 이르기를,
158
「이제 한번 이별하매 세상사를 알지 못하나니, 신물(信物)이 있음이 좋을까 하나이다.」
159
하고 봉차鳳釵)를 꺾어 반씩 가지고 애연(哀然)이 이별하니, 현생이 받아 가지고 시 일수(一首)를 지어 소저를 주니 그 글에 이르기를,
165
소저가 받아 간수하고, 양협(兩頰)의 옥루(玉淚)가 종횡(縱橫)하여 아무 말을 이루지 못하니, 현생이 다시 당부하며 이르기를,
166
「그대 방씨의 불측(不測)한 화를 당할지니, 삼가 조심하라.」
167
하고 침을 보아 이별하며, 내당에 들어가 방씨에게 배별(拜別)하며 이르기를,
168
「소서가 존문(尊門)에 있은 지, 여러 해에 은공(恩功)이 적지 아니하오나, 오늘날 귀택(貴宅)을 떠나오니 그리 알으소서.」
169
하고 조금도 불호(不好)한 빛이 없으니, 방씨 심중(心中)에 즐겨 이르기를,
170
「상공이 기세하심으로 자연 현랑을 대접하지 못하여 이제 떠나려 하니, 어찌 만류(挽留)하리오.」
171
하고 옥배(玉杯)에 술을 가득 부어 권하니, 현생이 받아 앞에 놓고 소매에서 옥저를 내어 이르기를,
172
「소생이 이별곡을 불어 하직하나이다.」
173
하고 한 곡조를 부니 소리가 심히 청아(淸雅)하더라. 문득 잔 가운데에서 푸른 기운이 일어나 독한 기운이 사람에게 쏘이니, 현생이 저를 그치고 소매를 떨쳐 표연(飄然)히 가니, 방씨 그 거동을 보고 십분 의아(疑訝)하여 분한 심사를 억제치 못하고 다만 다시 봄을 당부하더라.
174
현생이 다시 재성각에 들어가 소저를 위로하고 문을 나서니, 부운(浮雲) 같은 형용(形容)이 향할 바를 알지 못하여 서천(西天)을 바라고 가더니, 날이 저물매 구계촌 주점(酒店)의 이르니, 한 이고(尼姑)가 들어와 권선문(勸善文)을 펴 놓고 이르기를,
175
「빈승(貧僧)은 금산사 칠보암에 있더니, 시주하심을 바라나이다.」
177
「행인의 가진 것이 많지 아니하나, 어찌 그저 보내리오.」
178
하고, 가진 은봉(銀琒)을 내어 주며 이르기를,
181
「거주(居住)와 성명을 기록하여 주시면 발원(發願)하리로소이다.」
182
현생이 말을 듣고 즉시 권선문에 기록하되,
186
하였더라. 그 중이 백배 사례하고 가니, 현생이 본디 관후(寬厚)하므로 그 은자(銀子)를 다 주고 행중(行中)의 일 푼 반전(半錢)이 없는지라. 전전(轉轉)히 길을 떠나 행하니라.
187
재설(再說), 방씨 현생의 나간 후로, 방덕과 정한 언약이 뜻과 같이 될 줄 알고 크게 기뻐 시비 난향을 재성각에 보내어 소저를 위로하더니, 일일은 방씨 소저의 침소에 와 외로움을 위로하고 이르기를,
188
「사람의 팔자는 미리 알 길 없는지라. 너의 부친이 그릇 생각하시고 현가(玄家)로 배필을 정하시매, 실로 너의 전정(前程)을 작희(作戲)하심이라. 이러므로 너의 일생을 염려하더니, 과연 제 스스로 집을 버리고 나가시매 다시 만날 길 없으리니, 너의 청춘이 아까운지라. 어미 마음의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오. 나의 서종(庶從)이 있으니, 인물이 비범하고 재조가 과인하여, 향당인(鄕黨人)이 추앙(推仰)치 않은 이 없으나, 일찍 상처(喪妻)하고 재취(再娶)치 못하였으니, 널로 하여금 성친(成親)하고자 하나니, 네 내 말을 들을진대 화(禍)가 변하여 복(福)이 되리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189
소저가 청파(聽罷)에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벽력(霹靂)이 꼭두를 누른 듯하고, 더러운 말을 귀로 들었으매 영천수(潁川水)가 없음을 한(恨)하나, 본디 효성이 출천(出天)하므로, 계모(繼母)의 심사를 알고 변색하며 답하기를,
190
「모친이 소녀를 위하심이나 옳지 아닌 말씀으로 교훈(敎訓)하시니 어찌 봉행(奉行)하오리까?」
191
말을 마치며 일어서니, 방씨 대노하여 꾸짖기를,
192
「네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금야(今夜)에 겁칙할 도리 있을 것이니, 네 그를 장차 어찌 할 소냐.」
193
이처럼 이르며 무수히 구박하고 들어가니, 소저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계교(計巧)를 생각하더니, 이윽고 침이 들어와 불러 이르기를,
194
「금야에 방덕이 여차여차 하리니 저저(姐姐)는 바삐 피할 도리를 행하라.」
195
소저가 이 말을 듣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급히 유모를 불러 의논하더니, 문득 부친 유서를 생각하고 떼어보니, 하였으되,
196
‘만일 급한 일이 있거든 남복(男服)을 개착(改着)하고 도망하여, 금산사 칠보암으로 가면 자연 구할 사람이 있으리라.
197
하였거늘, 소저가 향랑을 불러 수말을 이르고, 급히 남복을 고쳐 입고 담을 넘어 달아 나니라.
198
차야(此夜)에 방덕이 방씨의 말을 듣고 밤들기를 기다려, 마음을 죄고 가만히 소저의 침소로 월장(月墻) 출입하여 동정을 살펴보니, 인적이 고요하고 사창(紗窓)의 등불이 희미하거늘, 방문을 열고 들어가매 종적이 없는지라.
199
대경실색하여 부득이 돌아오니, 방씨 또한 놀라고 어이없어 방덕을 도로 보내고 운혜 소저의 도망함을 괘씸히 여기더라.
200
차설 석소저(石小姐)가 향랑을 데리고 밤이 새도록 정처 없이 가더니, 여러 날 만에 한 곳에 다다르니 경개(景槪) 절승(絶勝)하여 기화(奇花)는 만산(滿山)한 가운데 수목(樹木)이 참천(參天)하거늘, 노주(奴主)가 서로 붙들고 들어가니, 향풍(香風)이 이는 곳에 풍경소리가 은은히 들리거늘,
202
하고, 점점 들어가니 일위 노승(老僧)이 합장(合掌) 배례하며 이르기를,
203
「공자는 어디로 좇아 이곳에 이르시니까?」
204
소저가 연민(憐憫)히 답례하고 이르기를,
205
「우리 우연히 지나더니 선경(仙境)을 범(犯)하오매 존사(尊師)는 허물치 말라.」
207
「이곳은 외객(外客)이 머물지 못하거니와, 들어와 머물러 가심이 어떠하시니까?」
208
소저가 십분 다행하여 함께 들어가니 심히 정결하더라. 노승이 처소(處所)를 정하여 주며 차를 내와 권하니, 은근한 정이 예보던 사람 같더라.
210
「공자의 행색을 보니 여화위남(女化爲男)하심이니, 이곳 승당(僧堂)은 외인의 출입이 없으매 공자는 염려치 마소서.」
212
「나는 석상서의 아자(兒子)이라. 존사(尊師)가 이르는 말을 알지 못함이로다.」
213
하고 서로 말하더니, 이날 모든 승이 불전에 공양(供養)할새 축원하는 소리를 들으니, 소흥현 벽계촌의 사는 현수문과 부인 석씨(石氏)를 일컫거늘, 소저가 크게 의심하여 이고(尼姑)에게 묻기를,
214
「어찌 남의 성명을 알고 축원하느뇨?」
215
제승(諸僧)이 권선문을 뵈며 이르기를,
216
「이처럼 기록하였기로 자연 앎이로소이다.」
217
하거늘, 소저가 자세히 보니 과연 현생의 성명이 있거늘, 그 연고를 물으니 이고가 답하기를,
218
「빈승(貧僧)이 불상(佛像)을 위하여 권선(勸善)을 가지고 두루 다니다가 구계촌의 이르러, 한 상공(上公)은 만나니 다만 행중(行中)의 은자 백 냥만 있으되, 정성이 거룩하여 모두 주옵시니, 절을 중수(重修)한 후로도 그 상공의 수복(壽福)을 축원하거니와, 공자가 어찌 자세히 묻나이까?」
220
「이 사람이 과연 나의 지친(至親)이러니, 성명을 보매 자연 반가워 물음이로다.」
221
이고가 이 말을 듣고 더욱 공경하더라. 소저가 차후(此後)로 법당에 들어가 그윽이 축원하며, 혹 심심하면 매화를 그려 족자(簇子)를 만들어 파니, 일신의 괴로움이 반점(半點)도 없으나 주야(晝夜)로 현생을 생각하고 슬퍼하더라.
222
각설, 현수문이 은자를 모두 시주하고, 행중에 일 푼 반전(半錢)이 없으나 동서로 방황하여 지향(志向)할 바를 알지 못하고, 전전(輾轉)이 기식(寄食)하니 그 초창(怊悵)한 모양이 비할 데 없더라.
223
차시, 천자가 운남왕의 표(表)를 보시고 허물을 고치시며, 어진 이를 대접하사 천하의 호걸을 뽑으실새 문무과(文武科)를 뵈시니, 황성으로 올라가는 선비가 무수한지라. 그 중 한 선비가 현생을 보고 묻기를,
224
「그대 과행(科行)인가 싶으니, 나와 함께 감이 어떠하뇨?」
225
현생이 과행이란 말을 듣고 심중(心中)의 기뻐하며 허락하고, 여러 날 만에 황성에 이르매, 문득 한 사람이 내달아 현생을 붙들고 이르기를,
226
「내 집이 비록 누추하나 주인(主人)을 정하시면, 음식지절(飮食之節)이라도 값을 받지 아니하오리니, 그리 아옵소서.」
227
하고 청하거늘, 현생이 남의 은혜 끼침이 불가하나, 이때를 당하여 도리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여 주인을 정하고, 있으니 장중(場中) 제구(諸具)를 낱낱이 차려 주거늘, 현생이 도리어 불안하여 주인의 은혜를 못내 일컫더라.
228
과일이 다다르니 천자가 황극전(皇極殿)의 어좌(御座)하시고 문과(文科)를 뵈시며, 연무대(硏武臺)에 무과(武科)를 배설(排設)하사 명관(名官)으로 뵈게 하시니,
229
현생이 과장에 나아가 글제를 보고 심중의 대희하여 순식(瞬息)에 글을 지어 바치고, 주인의 집에 찾아오더니 연무대에 무소(武所)를 보고 마음의 쾌활하여 구경하다가, 남의 궁시(弓矢)를 빌어 들고 과거 보기를 원하니,
230
차시, 명관 유기 좌우를 호령하여 내치라 하니, 사예교위(司隸校尉) 만류하며 이르기를,
231
「방금 천하인심이 황황(遑遑)하매 황상이 근심하사, 문무 인재를 뽑으시거늘 일찍 단자(單子)를 못하여 호명(呼名)함이 없거니와, 제 재조를 봄이 좋을까 하나이다.」
232
명관이 옳이 여겨 불러 뵈니, 살 다섯이 한 구멍에 박힘 같이 과녁을 맞히니 만장중(滿場衆)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고 명관이 그 재조를 칭찬하며 장원에 정하니라.
233
차시, 상이 수만 장 글을 고르시다가 현생의 글에 이르러는, 상이 대열(大悅)하사 자자(字字)이 주점(朱點)을 내리시고 피봉(皮封)을 떼어 신래(新來)를 재촉하시니, 차시 수문이 미처 주인에 가지 못하고 호명을 들어 계하(階下)에 이르니, 상이 수문의 상모(相貌)를 보시고 더욱 대열하사 신래를 진퇴(進退)하시더니,
234
무소(武所)의 방(榜)을 주달하였거늘, 상이 보시니 장원은 소흥 현수문이라 하였거늘, 성심(聖心)이 대열하사 그 희한함을 이르시고 좌우를 돌아보사 이르기를,
235
「짐이 만고(萬古) 역대(歷代)를 많이 보았으되, 한 사람이 과거를 보매 문무과에 참방(參榜)함을 보지 못하였나니, 어찌 장구지술(長久之術)에 기특하지 아니하리오.」
236
하시고 인하여 계화(桂花) 청삼(靑衫)을 주시며 벼슬을 내리사 춘방학사(春坊學士) 겸 사의교위(司儀校尉)를 내리시니, 수문이 복지(伏地) 주(奏)하기를,
237
「신(臣)이 하방(下方) 미천한 사람으로 우연히 문무방(文武榜)의 참여하오매 황공(惶恐) 송률(悚慄)하옵거늘, 더구나 중한 벼슬을 주옵시니 무슨 복록(福祿)으로 감당하오리까. 복원(伏願) 성상은 신의 작직(爵職)을 거두사 세상에 용납(容納)하게 하소서.」
238
상이 수문의 주사(奏辭)를 들으시고 더욱 기특히 여기사 묻기를,
239
「경(卿)의 선조(先朝)는 입조(入朝)한 이 있느뇨?」
241
「신이 오 세에 난(亂)을 만나 부모를 실산(失散)하였사오니, 선세(先世)의 입조함을 기록하지 못하오며, 신의 아비는 난시전(亂時前)에 실리(失離)하오매 알지 못함이로소이다.」
243
「경이 부모를 실리하매 능히 취처(娶妻)함이 없으리로다.」
245
「혈혈단신(孑孑單身)이 도로에 분주(奔走)하여 의탁하올 곳이 없더니, 참지정사 석광위가 무휼(撫恤)하므로 그 여식(女息)을 취(娶)하니이다.」
247
「석광위는 충효가 겸전(兼全)한 재상이라. 벌써 고인(故人)이 되었으나, 경을 얻어 사위를 삼음은 범연(泛然)치 아니하도다.」
248
하시고 쌍기(雙旗)와 이원풍악(梨園風樂)을 사급(賜給)하시니 한림이 마지 못하여 사은(謝恩) 퇴조(退朝)하고 주인의 집으로 올새, 도로에 관광자(觀光者)가 희한한 과거(科擧)도 있다 하며 책책(嘖嘖)이 칭찬하더라.
249
한림이 몸이 영귀함이 있으나 부모를 생각하매, 자연 눈물이 이음 차(次) 청삼(靑衫)에 떨어지니 주인이 위로하고 이르기를,
250
「상공(上公)이 소복(小僕)을 알지 못하시리니, 소복은 대상공(大上公) 노자(奴子) 차복이옵더니, 대상공이 적소(謫所)에 가실 제 이 집을 맡겼더니 수일 전에 일몽(一夢)을 얻사오니, 주인댁 공자(公子)라 하여 문 앞 돌 위에 앉아 쉬더니 이윽고 황룡을 타고 공중에 오르거늘, 놀라 깨어 날이 밝은 후 저 돌에 앉아 쉬는 사람을 기다리더니, 과연 상공이 그 돌의 앉아 쉼을 보고 반겨 뫼심이러니, 이제 상공이 문무(文武) 양과(兩科)를 하시사 문호(門戶)를 다시 회복하시리니, 소복도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까.」
251
한림이 홀연 이 말을 들으매 크게 반가워 묻기를,
252
「그대 대상공의 휘자(諱字)를 알 것이오. 무슨 일로 적소에 가셨느뇨?」
254
「그 휘자는 택지요, 벼슬이 이부시랑이러니, 뜻밖에 황숙(皇叔) 연왕이 모역(謀逆)할새, 상공 이름이 역초(逆招)에 있으므로 무량도에 정배하시니, 기후(其後)는 소식을 알지 못하나이다.」
256
‘부친이 적거하셨단 말을 들음이 희미하더니, 과연 이 말을 들으니 옳도다.’
257
하고 전후수말을 자세히 물어 알고, 차복의 유공(有功)함을 일컬으며 삼일(三一) 유가(遊街) 후 표를 올려 부모 찾기를 주달(奏達)하오니, 상이 가로되,
258
「경의 효성이 지극하여 실산(失散)한 부모를 찾고자 하나, 아직 국사를 보살피고 후일 말미를 얻어 천륜(天倫)의 온전함을 잃지 말라.」
259
하시니 한림이 마지못하여 다시 주달치 못하고 직임(職任)에 나아가나 매양 부모를 생각하며 석소저를 잊지 못하여 석부(石府)에 찾아감을 원하더라.
260
차시 남만왕(南蠻王)이 반(叛)할 뜻이 있음을 상이 근심하사, 만조(滿朝)를 모으시고 위유사(慰諭使)를 정하고자 하실새 대신(大臣)이 주하기를,
261
「남만(南蠻)은 강국이오니 달래기 어려울지라. 이제 현수문 곧 아니오면 그 소임을 당하지 못하오리니, 이를 보내심이 좋을까 하나이다.」
262
상이 옳이 여기사 현수문으로 남만위유사를 배(拜)하시니, 한림(翰林)이 즉시 사은하고 길을 차릴새, 상이 당부하여 가로되,
263
「짐이 경의 충성을 아느니 삼촌(三寸) 혀로 남만을 달래어 반함이 없을진대 경의 공을 잊지 아니하려니와, 이름이 육국(六國)에 진동하던 소진(蘇秦)의 공명을 압두(壓頭)하리니, 어찌 만대(萬代)에 허루(虛漏)한 공이리오.」
264
한림이 성교(聖敎)를 받자와 사은하고 발행하여, 수삭(數朔) 만에 남만국(南蠻國)에 이르니, 왕이 제신을 모으고 의논하기를,
265
「송천자(宋天子)가 외유사를 보내었으니, 좌우에 도부수(刀斧手)를 매복하였다가 만일 뜻과 같지 못하거든 당당이 죽이리라.」
266
하고 천사(天使)를 볼새, 어사(御使)가 들어가니 왕이 교(轎) 위에 걸터앉아 천사를 맞거늘, 어사가 대노하여 꾸짖기를,
267
「족하(足下)는 일방(一方)의 작은 왕(王)이요, 나는 천자의 사신이라. 조서를 뫼시고 왔거늘, 당돌히 걸터앉아 천사를 보니, 그 예법(禮法)이 없음을 알거니와, 그윽이 족하를 위하여 취(取)치 아니하노라.」
268
왕이 노기(怒氣) 대발하여 빨리 내어 베라 하니, 어사가 안색을 불변하고 꾸짖기를 마지아니하니, 왕이 천사의 위인을 취맥(取脈)하고자 하다가 점점 실체(失體)함을 깨달아, 그제야 뜰에 내려 사죄하며 이르기를,
269
「과인(寡人)의 무례(無禮)함을 용서하소서.」
270
어사가 비로소 알고 공경하며 이르기를,
271
「복(僕)이 대왕의 성심을 아나니 무슨 허물이 있으리오. 이제 우리 황상이 성신문무(聖神文武)하사 덕택(德澤)이 제국(諸國)에 미쳤거늘, 왕은 어찌 그를 알지 못하고 공순하심이 적으시뇨?」
273
「과인이 군신지례(君臣之禮)를 모름이 아니로되, 황상이 과인국(寡人國)을 아끼지 않으시매 자연 불공(不恭)한 의사를 두었으나 이제 성지(聖旨) 여차하심을 받자오니, 어찌 감히 태만(怠慢)함이 있으리오.」
274
하고 황금 일천 냥과 채단(綵緞) 일천 필을 주니, 어사가 받아 가지고 길을 떠나니 왕이 멀리 나와 전송하더라.
275
어사가 본국으로 돌아올새 길에서 먼저 무사히 돌아오는 표(表)를 상달(上達)하였더니, 상이 보시고 대열하사 또 교지를 내리어, 돌아오는 길에 각처 민심을 진정하되 혹 주리는 백성이 있거든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하라 하시니, 어사가 교지를 받자와 북향(北向)사은(謝恩)하고 각 읍을 순수(巡狩)할새, 위의(威儀)를 물리치고 암행(暗行)으로 다니니, 각 읍 진현(陣縣)을 선치(善治)하지 않을 리 없고, 백성들이 어사를 위하여 송덕(頌德) 않을 리 없더라.
276
두루 다니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이곳은 금산사 칠보암이라. 제승(諸僧)이 관행(官行)이 이름을 알고 황황하여 피하고자 하더니, 어사가 당상(堂上)에 좌정(坐定)하고 제승을 불러 묻기를,
277
「이 절을 중수(重修)할 때에 권선문을 가지고 다니던 승이 그저 있느냐?」
279
「소승이 과연 그이거니와 노야(老爺)가 어찌 하문(下問)하시니까?」
280
하며 어사를 자세히 보니, 삼사 년 전에 구계촌에서 은자 일백 냥 시주하시던 현상공(玄上公)이라. 대경(大驚) 대희(大喜)하여 다시 합장 사배(四拜) 이르기를,
281
「소승이 천(賤)한 나이 만사와 눈이 어둡기로 미처 알지 못하였거니와 은자 일백 냥 시주하시던 현상공이니잇가?」
282
어사가 노승의 말을 듣고 깨달아 그 사이 무고(無故)히 있음을 기뻐하며 묻기를,
283
「아까 법당에 한 소년 선비가 나를 보고 피하니 그 어떤 사람인고?」
285
「그 사람이 이 절의 머무른 지 오래되어 거주(居住) 성명을 알지 못하옵고, 혹 불전(佛前)에 축원할 때, 상공 성씨(姓氏)와 명자(名字)를 듣고 가장 반겨하더이다.」
286
어사가 이 말을 듣고 문득 놀라 헤아리되,
287
‘내 잠깐 볼 때에 얼굴이 심히 익기로 괴이 여겼더니 무슨 곡절이 있도다.’
288
하고 그 소년 보기를 권하니, 노승이 즉시 어사를 인도하여 그 소년의 처소로 오니, 이때 석소저가 어사의 행차를 구경하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매 낯이 심히 익으므로 가군(家君)을 생각하고 침석의 누었더니, 문득 이고가 급히 들어와 고하기를,
289
「전일(前日) 일가(一家)라 하고 반겨하던 현상공이 어사로 마침 와 계시매 공자를 위하여 뫼시고 왔나이다.」
290
소저가 미급답(未及答)에 어사가 들어 보니, 비록 복색(服色)을 고쳤으나 어찌 주야 사모(思慕)하던 석소저를 몰라보리오.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반향(半晌)이나 말을 이루지 못하더니, 오랜 후 정신을 차려 소저를 대하여 이르기를,
291
「그대 모양을 보니 방씨의 화를 보고 피하였음을 짐작하거니와, 이곳에서 만날 줄 어찌 뜻하였으리오.」
292
소저가 그제야 현생인 줄 알고 누수(淚水)가 여우(如雨)하여 진진(津津)히 느끼며 이르기를,
293
「첩의 팔자가 기구함이오니 어찌 하오리까마는, 그 사이 군자는 무슨 벼슬로 이곳에 지나시니까?」
294
어사가 탄식하고 전후수말을 자세히 이르기를,
295
「천은이 망극하여 문무에 함께 참방하였더니, 외람(猥濫)히 중작(重爵)을 당하여 위유(慰諭) 순무도어사(巡撫都御史)를 내리시매, 마침 이곳의 이르러 그대를 만나니, 이는 하늘이 지시(指示)함이라. 어찌 만행(萬幸)이 않으리오.」
296
소저가 내심에 기뻐 전후 사단(事端)을 이르기를,
297
「첩이 이곳에 은신하였다가 천우신조하여 군자를 만났으니, 이제 죽으나 무슨 한이 있으리오까?」
298
하고 옥루(玉淚)가 종행하여 옷깃을 적시는지라. 어사가 즉시 본부에 전령(傳令)하여 위의(威儀)를 갖추어 오라 하고, 제승을 불러 그 은공을 이르며 금은을 내어 주니, 제승이 백배 사례하고,
300
하며 여러 해 깊은 정이 일조(一朝)에 이별함을 애연(哀然)하여 눈물을 흘리더라.
301
이윽고 본부에 위의 왔거늘, 석소저와 향랑이 불전에 하직하고 제승에게 이별하며, 교자(轎子)를 타고 금산사를 떠나니 행차의 거룩함이 일경(一境)에 들리더라.
302
여러 날 만에 황성의 이르러 석부인(石夫人)은 차복의 집으로 행하게 하고, 어사가 바로 궐하(闕下)에 봉명(奉命)하오니, 상이 인견(引見)하시고 남만왕을 위유(慰諭)함과 각 읍에 순무하던 일을 물으시고 대열하사 가로되,
303
「만일 경(卿)이 곧 아니런들 어찌 이 일을 당할까?」
304
하시고 즉시 벼슬을 돋우어 문현각(文顯閣) 태학사(太學士)를 내리시니, 학사가 여러 번 사양하되, 상이 불윤(不允)하시매 마지못하여 사은하고, 처 석씨(石氏) 만난 일을 주달(奏達)하오니 상이 들으시고 더욱 희한히 여기사, 부인 직첩(職牒)을 내리오시니, 학사(學士)의 은총이 조정의 진동하더라.
305
각설(却說), 북토왕(北吐王, 吐蕃)이 반(叛)하여 철기(鐵騎) 십 만을 거느리고 북방을 침노(侵擄)하니, 여러 군현(郡縣)이 도적에게 앗긴 바가 되니, 인주(麟州) 자사(刺史) 왕평이 급히 계문(戒文)하였거늘, 상이 보시고 대경하사 토적(討賊)할 일을 의논하실새, 반부(班府) 중에 일인이 출반주(出班奏)하기를,
306
「신이 비록 재조가 없사오나 도적을 파(破)하오리니, 복원(伏願) 성상은 일지군(一枝軍)을 주시면 폐하의 근심을 덜 리이다.」
307
모두 보니 문현각 태학사 현수문이라. 상이 기특히 여기사 이르기를,
308
「짐이 박덕(薄德)하므로 도적이 침노하매 경의 연소(年少)함을 꺼렸더니, 이제 경이 출전함을 자원하니 짐 심히 환열(歡悅)하도다.」
309
하시고 대원수를 내리시며, 정동장군 양기로 부원수를 내리사, 정병 팔십만을 조발하여 주시며 이르기를,
310
「짐이 경의 충성을 아느니 수이 도적을 파하고 돌아오면 강산(江山)을 반분(半分)하리라.」
311
원수(元帥)가 돈수(敦壽) 사은하고 대군을 휘동(麾動)하여 여러 날 만에 감몽관의 이르러 결진(結陣)하니 적진이 벌써 진을 굳게 쳤는지라. 원수가 대호(大呼)하기를,
313
하고 황금 투구에 쇄자갑(鎖子甲)을 입고, 손에 삼척 장검(長劍)을 쥐었으니 위풍이 맹호(猛虎)같고 군제(軍制) 엄숙(嚴肅)하더라.
314
북토왕이 바라보매 비록 소년대장이나 의기(意氣) 등등(騰騰)하여 천신이 하강(下降)한 듯한지라. 아무리 여러 고을을 얻어 승승장구(乘勝長驅)하였으나, 마음이 최절(摧折)하여 싸울 뜻이 없더니, 선봉장 약대 정창(挺槍) 출마(出馬)하여 대호하기를,
315
「송장(宋將) 현수문은 빨리 나와 자웅(雌雄)을 결(結)하자.」
316
하며 내닫거늘, 원수가 대노하여 맞아 싸울새, 수합(數合)이 못하여 적장이 저당(抵當)치 못할 줄 알고 달아나거늘, 원수가 따라 충돌하니 칼이 다다른 곳에 적장의 머리 추풍낙엽 같고, 호통이 이는 곳에 북토왕이 사로잡힌 바가 된지라. 원수가 본진에 돌아와 승전한 잔치를 파하고 상기(上記) 표(表)를 올리니라.
317
차시 또 석상왕(石上王, 西蕃)이 반하여, 정병 십만을 거느리고 대국(大國)을 침노할새, 강병 맹장이 무수하므로 지나는 바 망풍귀순(望風歸順)하니 상이 들으시고 대경하사 가로되,
318
「도적이 처처(處處)에 분기(奮起)하니 이를 장차 어찌 하리오.」
320
「이제 미처 초적(草賊)을 파하지 못하옵고, 또 북적(北狄)이 침노하니 조정의 당할 장수가 없사오매, 현수문이 돌아옴을 기다려 파함이 좋을까 하나이다.」
322
「현수문이 비록 용맹하나 남만(南蠻)국에 다녀와 즉시 전장의 나갔으니 무슨 힘으로 또 이 도적을 파하리오. 짐이 친정(親征)하고자 하나니 경등은 다시 이르지 말라.」
323
하시고 먼저 현원수(玄元帥)에게 사(使)를 보내어 이 일을 알게 하고, 상이 친히 대장이 되사 경필로 부원수(副元帥)를 삼고, 표기장군(驃騎將軍) 두원길로 중군장(中軍將)을 내리시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조경으로 도성을 지키오고 택일(擇日) 출정(出征)하실새 정기(旌旗)는 폐일(閉日)하고 고각(鼓角)은 훤천(喧天)하더라.
324
여러 날 만에 양해관에 이르니, 적장 왕가가 송천자가 친정하심을 듣고 의논하기를,
325
「우리 진중(陣中)에 용맹한 장수가 무수하거늘, 천자가 아무리 친히 와 싸우고자 하나 우리를 어찌 당하리오.」
326
하고 방포일성(放砲一聲)에 진문(陣門)을 크게 열고 한 장수가 내달아 싸움을 돋우니 이는 양평공이라. 상이 보시고 부장 경필로 하여금 나아가 싸우라 하시니, 두원길이 내달아 이르기를,
327
「폐하는 근심 마옵소서. 신이 먼저 싸워 적장의 머리를 베어오리이다.」
328
하고 말에 올라 칼을 춤추이며 내달아 대호하기를,
329
「적장은 나의 말을 들어라. 우리 천자가 성신문무(聖神文武)하시고 덕택이 아니 미친 나라가 없거늘, 너 같이 무도한 오랑캐가 그 덕택을 알지 못하고 감히 군을 발하여 일경(一境)을 요란케 하니, 내 너를 베어 국가의 근심을 없이 하리라.」
330
하고 말을 마치며 바로 양평공을 취하니, 양평공이 맞아 싸워 오십여 합에 승부를 결치 못하더니, 적진 중에서 또한 장수가 내달아 양평공을 도우니 두원길이 좌충우돌(左衝右突)하여 싸우매 수합이 못하여 죽은 바가 되니, 상이 근심하사 진동장군(鎭東將軍) 하세청으로 나아가 싸우라 하시니, 하세청이 두원길의 죽는 양을 보고 분기 대발하여 말에 올라 내달으며 대호하기를,
331
「어제 싸움은 우리 장수를 죽였거니와 오늘은 너를 죽여 두원길의 원수를 갚으리라.」
332
하고 맞아 싸워 사십여 합에 이르매, 상이 장대(將臺)에서 양진(兩陣) 싸움을 보시더니 날이 늦으매 하세청이 행여 상할까 하여 쟁(錚)을 쳐 군을 거두고, 날이 밝으매 하세청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내달아 싸움을 돋우며 웨기를,
333
「적장 양평공은 어제 미결(未決)한 싸움을 결(結)하자.」
334
하고 싸우더니 수합이 못하여 양평공의 칼이 번듯하며 하세청의 머리 마하(馬下)에 내려지는지라. 상이 이를 보시고 대경하사, 제장을 돌아보아 이르기를,
335
「뉘 능히 적장의 머리를 베어 양장(兩將)의 원수를 갚을꼬.」
336
좌우가 묵묵하고 나와 싸울 장수가 없는지라. 상이 탄식할 즈음의 적진이 사면을 에워싸고 대호하기를,
337
「송제(宋帝)는 빨리 나와 항복하라.」
338
하니 어찌 되고 하회(下回)를 분석(分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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