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방사겸 평생일기 ◈
◇ 방사겸 평생일기 (제6권) ◇
카탈로그   목차 (총 : 7권)   서문     이전 6권 다음
목   차
[숨기기]
1
제6권
 
2
(원자료 1면 누락)
 
 

1. 독약을 먹고 자살하려고 하던 결과

 
4
나의 불평한 동정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형편이 일도에 이같이 결단이 나는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고 하여 도무지 살 생각이 조금도 없고 이 악착한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순검이 엄밀히 지키는 틈에서 빠져나서 두 블럭 걸어가서 드럭 스토아에 가서 까볼닉끼스 두 아운쓰를 사가지고 찬관으로 들어왔다. 순검과 칸스테블은 내가 어디를 무엇하러 갔다 왔는지 모른다. 나는 멀치감치 서서 미스터 칸스테블이여 내가 지금 무엇을 손에 쥐었는지 아는가 하고 이 독재를 들어 마신다. 순검이 벼락같이 달려와서 마시는 그 병을 탁 쳐서 떨군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반 병 이상을 마셨으니 별 수가 없이 땅바닥에 고꾸라져서 정신을 모르고 누워 있다. 순검들이 우리 아이스박스로 달려가서 버터밀크를 한 병 갖다 먹여서 독재를 좀 순하게 하여 가지고 병원으로 실어다 창자 속에 들어간 양잿물을 펌프하여 내고 침상에 정신없이 누워서 한잠을 잤는지 눈을 떠 보니 옆에 아내 와서 있다. 어쩐지 나는 별로 고통스럽지 않고 아픈 데도 별로 없기로 벗었던 옷을 찾아 입고 간호부와 나는 내 집에 가서 치료하겠다고 집으로 왔다. 병원에 있을 때에는 아픈 데가 없더니 지금은 창자 속도 아프고 입은 타서 아파 견딜 수 없는 중에도 침을 넘길 수 없는 것이 그중 고통이다. 목젖과 혀와 입은 타서 음식도 먹을 수 없고 물도 마실 수 없어 고통을 하고 만 六삭 동안을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이 모진 생명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러나 수중에 있던 자본은 다 없어져서 아무 것 못하고 죽은 모양으로 집에 들어 있다가 하루는 돈 없이라도 무슨 기회가 있을까 하고 집에서 떠나 이리저리 다니다 한 곳에 이르러 조그마한 찬관에 들어가서 무엇을 좀 사 먹으며 주인과 이런 말 저런 말 하고 앉았는데 주인은 이탈리아 사람인데 찬관을 판다고 하며 나에게 사 보라고 한다. 그래서 값을 물어보니 一百五十元만 달라고 한다. 나는 마음에 있었으나 자본이 이것 사기에도 부족하여 一百元만 지금 받고 五十元은 두 달 후에 받기로 한다면 사 보겠다고 하니 허락을 한다. 나는 집에 와서 아내한테와 자식들한테 찬관을 사기로 하고 왔노라 하니 위치가 어딘가고 묻는다. 소도와 十二가 근방이라고 하니 아내도 대강 짐작하는 듯 석 냥짜리 말에 이도 들어 보지 말라는 격으로 찬관 전부의 값이 一百五十元이니 보기에 너절하고 모든 차려놓은 것이 불편리 또 불완전할 것은 다시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손으로 고쳐서 잘 만들어 놓을 예산도 있고 자처는 사업이 잘 될 희망이 많은 자리다.
 
5
나에게 이 찬관을 팔고 간 사람은 온갖 기계를 수선하는 기사인데 매일 十여 元씩 버는 사람이요 이 사람의 아내가 하던 것인데 다만 몇가지 샌드위치와 소다 이 몇가지 파는 것이 이 사람의 전문적 사업이었었다. 그러나 나는 이같이 하던 것을 나의 주견대로 다 개량을 하여 가지고 보통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런치를 만들어 팔기로 작정하고 집을 다 고치고 정결하게 식당과 주방을 만들어 놓고 사업을 시작하니 사업이 잘 된다. 다시 돈 잡을 기회가 왔다고 우리는 심중에 많은 희망을 가지고 한 일년 동안 장시간을 들이면서 붙들고 나가니 수중에 수천 원 다시 모인다.
 
6
지금은 미국서 제이세계대전에 들어간 지 수삼일 내의 기간이다. 미정부에서 전국적으로 발령하기를 축심국 나라 사람으로 이 나라에 와 있는 사람들의 재정을 프리싱 즉 봉쇄하고 모든 행동을 엄정히 감시하는 때에 우리 한인들도 이 감시를 당하는 때에 은행에 저금한 돈은 다 봉쇄하여 마음대로 쓸 수 없고 별순검은 두, 셋이 늘 사업하는데 와서 지키고 있다가 밤이 되면 열쇠를 앗고 우리는 나오고 이 별순검은 사업 처소에 혼자 있어서 시시콜콜 다 뒤져보고 어디서 우리말로나 영어로 온 편지나 무슨 문자가 있는 종이는 다 가져다 내용을 알아보고 다시 갖다 준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 주일 이상을 겪으면서 지내려니 죄가 없어도 죄가 있는 듯 견디기 참 어려웠다. 이것이 무슨 연고냐 하면 우리가 독일과 무슨 정탐 등의 연락을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 보려고 두 주일 동안을 와서 우리를 이같이 볶아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와 같이 두 주일 동안을 갇혔다가 시원섭섭히 가서는 다시 오지 않으니 우리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이 숨을 확 내어쉬게 되었다.
 
7
지금부터는 완전한 전쟁국이 되어 온갖 법령이 내려서 사업하기가 참 곤란하다. 온갖 식물제한, 가격제한과 물 사서 쓰는 표를 얻어야 고기와 모든 식물을 살 수 있고 신도 정부에서 만든 스탬프를 얻어 가지고 가 사 신을 수 있고 어떤 날은 고기를 못쓰게 어떤 날은 달걀을 못쓰게 하는 이것을 다 참고 견뎌야 사업을 하여 갈 수 있으니 얼마나 곤란을 당하였으며 또 의무적으로 공채 표를 사야 된다.
 
8
일인이 하와이 진주만을 암시적으로 습격한 원인으로 미일간 태평양전쟁이 발동된 기회를 이용하여 재미포 한인은 독립 회복할 기회가 온 줄 알고 우리는 적극적 활동을 하게 되는데 여러가지 모양으로 돈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회는 국민회원에 동지회는 동지회원에게 무제한하고 거둔다. 나는 일찍이 동지회 회원으로 북미동지총회 관할 밑에서 독립금 인구세 외교위원부 유지금 동지회 연례금 온갖 특별의연금 다섯 종류 우리 신문대금 세계평화회 상항 세계안전대회의 대표자 경비 캐나다의 세계구제회에 파송할 대표자 경비 이박사 생신 기념에 대한 특연 우리 신문사들이 유지할 특연 교회 보조비 북미시보 확장할 특연 이박사 귀국하시는 여비에 대한 특연 등등에 쓴 돈 수천 원이 잘 되었다. 전쟁 동안에 온갖 곤란을 겪으면서 수만 원 잡았으나 그러나 쓴 것이 많고 또 동포에게 취하여 준 것이 三千여 元인데 한 푼도 받지 못하였으니 차 소위 구슬이 서 말이라도 실에 꿰놓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이 내가 이 취하여 준 돈을 받지 못하면 내게 아무 소용 없는 돈의 명사뿐이다.
 
9
지난 전쟁 동안에 온갖 법령 밑에서 곤란을 무한히 겪은 육신도 좀 쉬어야 되겠기로 하던 사를 팔아치우고 한 일년 동안 쉬었다. 한 일년 쉬고 나니 또 무엇을 하여 가용이라도 써야 되겠으므로 막겟 스트리트에 있는 찬관 하나를 사서 한 三年간 하니 이젠 늙고 기력이 전만 못하여 힘든 일을 할 수 없어서 팔아치우고 다시는 무슨 사업이나 안 하고 지내보려고 하나 내가 지금 모아놓은 돈으로는 불가능이라고 하게 되니 이 찬관을 팔게 되면 무슨 힘들이지 않고 조금씩 버는 것을 지금 구하는 중이다. 지금 하는 찬관을 三年 前에 현금 五千元을 주고 사서 첫 일년 동안은 수천 원 잡았으나 사업 처소를 일신 개량하는데 수천 원이 들어가서 이 사업에 자본 들어간 것이 七千元이 잘 되었다. 그러나 삼년 후 오늘에 와서는 三千元을 받을 수 없이 시세 형편이 되어서 팔아치울 수도 없는 것은 근일에는 각양 물자는 전쟁동안 보다도 갑절이 올랐는데 음식값은 전쟁 때보다 반 값을 받게 되는 고로 사업이 아무리 흥왕하여도 이익이 없으므로 이 찬관을 一千九百四十九年 五月 十五日에 二千元에 팔아치우고 말았다.
 
10
一千九百四十五年 四月 二十日께 손이도라는 동포가 이곳 와서 어렵게 지내는 중에 一年 前에 대한남방 미국정부에 통역하는 일을 이곳 미정부에서 얻어놓고 나가기로 하고는 일년이 지나도록 나가지 않고 이리저리 피신하여 다니다 이곳 와 있는 줄 아는 미군부에서는 어서 나가라고 독촉을 하는 고로 이 손씨의 형편이 딱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는 이 미군정부 일을 얻어가지고 갈 형편이 못되는 것은 이곳서 화부를 가서 수주일 유하면서 다시 수속을 마쳐야 되겠는데 화부로 갈 차비도 없고 의복과 신발도 남루하여 갈 형편이 못된다고 수차 찾아와서 三百元 하나만 들려주면 미군정부 일을 얻어가지고 나가서 수삭 동안에 환보한다고 하기로 三百元을 주고 아무쪼록 이 좋은 기회를 잃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손씨에게 이 三百元 주기 전에는 생도가 곤란하다고 하면서 무슨 행상을 좀 하여서 기숙비라도 벌어먹어야 되겠다고 하기로 행상할 물건을 사라고 五十元을 대어주었고 또 매일 찾아오니 음식도 수십차 대접하였고 화부로 갈 때에는 특별 전별만찬까지 대접하는 중에서 아무쪼록 본국에 나가 귀히 되라고 축사까지 올렸었다.
 
11
이 손이도는 미군정부 일을 매월 미화로 四百여 원씩을 받기로 일년 계약을 하고 나가서는 수차 편지가 있고는 나에게 쓴 돈은 만 사년이 지나도 갚지 않고 지금은 통신도 끊는다. 이것이 이른바 배은망덕이라고 안 할 수 없고 이런 불신용과 비인정 도덕과 의리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 어떤 민족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데 오직 우리사람 가운데서만 불행이 만났다고 나는 자탄 낙심치 않을 수 없다. 손이도라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면 손정도 목사의 동생이요 자기의 조카딸은 윤치창씨의 아내라 한다.
 
 

2. 손이도 군정부 일을 얻어주고 환국할 노비 삼백원 준 사건

 
13
손씨는 미국 온 지 이십 년 동안에 하여 왔다는 사업은 세일즈맨으로 지내었고 우리 동포 사회나 독립운동에 일 푼 돕지 않고 허황방탕한 데 다 쓰고 또 동포 가운데 아주 신용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 사람을 도와서 군정부 일을 얻어 보낸다고 나를 다 미친놈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의 신용과 모든 형편을 몰라서 도와준 것이 아니고 이런 사람이라도 한번 붙들어 도와주어서 신용이 착실하고 진실한 사람이 된다면 이것이 자신에게 유익만 아니라 국가에도 행복이 될까 하고 자기 신분 이상을 도와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격언에 개구리 황모 되나 보자고 얼마 동안 땅에 파 묻었다 파 보니 개구리 황모 되지 않고 개구리 그냥 있다는 격으로 우리 동포사회에 불신용한 손씨를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한번 좋은 기회를 주었을지라도 조금도 변치 않고 이전 손이도로 그냥 있어서 순량한 동포를 속여서 저만 잘 살자는 것이 이 사람의 심장이라고 하겠으니 우리는 이런 사람을 매우 삼가야 되겠다. 이런 불신용 비인정과 의리가 없는 사람은 자기의 일상 전경을 자기가 스스로 막아 놓고 일상을 이 모양으로 지내다 종결하고 마는 것이 마치 자기가 자신을 가두어 거둘 옥을 자기의 손으로 짓는다고 안 할 수 없으니 나는 도리어 이런 동포를 위하여 불쌍히 생각함을 마지 않는다.
 
14
센트루이스에서 하던 사업을 팔아치우고 좀 수월한 사업을 하여 볼까 하고 생각하는 중에 본국으로 나오라고 이박사께서 수차 편지하시고 또 체신부장관으로 계신 장기영씨도 나오라고 사, 오차 편지와 전보까지 하신다. 나는 이때부터 마음을 정돈치 못하고 나는 나의 마음을 본국과 미국 두 곳에 나눠 두게 되었다. 나의 형편이 이쯤 되어서 찬관을 팔아치우고 본국에 한번 갔다 올 생각으로 찬관을 팔기로 주선하는 중이나 그런 무슨 사업을 물론하고 사기는 수월하여도 팔기는 힘드는 고로 이 찬관을 아주 헐가로 팔기로 주선하고 있는 중이다. 이 찬관을 이태 전에 현금 五千元을 주고 사 가지고 또 수千元 들여서 확장한 것인데 이미 들어간 본값을 받으려면 七千五百元을 받아야 되겠지마는 이만큼 값을 받으려면 장구한 세월을 가지고야 팔 기회가 있을 것을 이같이 오래 기다릴 수 없어서 二千元에 단기내에 팔아치우고 본국 갈 준비를 하는 중이다. 이러는 동안에 우리 정부에서 一千九百四十八年 十月 분에 불란서 파리에서 열리는 연합국총회에 우리 정부 대표자를 파송하였다. 파송한 대표자들은 단장에 장면 부단장에 장기영 양씨 외에 같이 간 분들은 조병옥 김활란 부인 이 분들인데 우리 정부에서 이 분들의 경비를 매명에 매일 미화 二十元씩을 지불하였으나 외교활동에 경비가 과다하여 매일 二十元이 부족하였을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동년 十二月 十八日 간에 부단장 장기영씨가 미화 一千元을 빨리 부쳐달라 하였기로 나는 즉일로 전보로 一千元을 부쳐주었다. 그러나 나는 정부의 무슨 책임자도 아니요 또 큰 자본이 많아서 정부 대표자를 도와준 것이 아니요 다만 내가 지난 四十여 년 동안이나 우리의 잃었던 자유를 다시 찾자는 온갖 운동에 전력하던 것을 생각하는 동시에 우리의 신정부 대표가 정부 승인을 얻어오려고 파리에 나가서 경비가 부족하여 곤란을 당하게 된다면 안 되었기로 나는 다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전보 받은 즉일로 一千元을 전보로 부쳐준 것이다.
 
15
장기영씨는 내가 부친 一千元을 받았다고 전보로 회답하는 때 十二月 二十二, 三日에 화부로 돌아오니 나를 화부로 와서 만나서 나의 환국할 문제를 다시 말하자고 오라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十二月 十九日에 화차를 타고 화부로 가서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찾아가서 임병직씨와 김세선씨와 또 이박사의 친구 스티거씨를 다 반가이 만나보고 나는 펜실베니아 호텔에 방을 정하고 五日 동안을 유하게 되는데 방세만 매일 七元이요 또 식비 병하면 매일 十二元으로 十五元씩 쓰게 되었다.
 
16
十二月 二十三日에 구미위원부 사무실에 가서 있노라니 장기영씨가 장거리 전화로 임병직씨한테 방사겸이가 지금 화부에 왔나 묻는다고 나더러 전화를 받으라 하여 나는 반가이 장기영씨와 한참 말하고 나섰다. 이튿날 장기영씨와 화부에서 상봉하여서 본국 나갈 의논을 대강하고 피차에 헤어졌다. 이튿날은 구주 성탄일이다. 한미협회 서기관 김세선씨가 성탄 만찬을 자기 집에서 장기영씨와 나를 대접한다고 오라 하기로 장기영씨와 이 댁을 찾느라고 머나먼 화부성 밖에를 찾아가는 중도에서 성탄 예물을 좀 사 가지고 찾아갔다. 나는 김세선씨를 이왕에 만나 보지 못하여서 가정을 이루고 사시는지 몰랐다. 이러한 형편에서 마침 찾아가니 부인과 칠, 팔세쯤 된 자녀가 자라나는 아름답고 재미스러운 가정이었다. 구주 성탄일 저녁에 이 댁에서 만찬을 같이 나누면서 일야를 재미있게 지내고 장기영씨와 같이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장기영씨가 자기 집으로 와서 디너를 같이 나누자고 청하기로 가서 부인도 반가이 만나보고 저녁을 잘 얻어먹고 나서는 장형이 박은 온갖 활동사진을 잘 구경하고는 그 댁에서 일야를 편하게 잘 쉬고는 여관으로 돌아와서 구미위원부를 다시 갔었다. 위원부에서 서기로 시무하는 우루드 홍이라는 여자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 여자가 아주 정답고 또 친절히 군다. 나는 이 여자를 처음 만나지마는 이 여자는 임병직씨한테 내가 방사겸이라는 말을 많이 들은 모양이요 또 내가 방사겸이라 하니 더욱이 반가워 하였을 것은 사실일 것이다. 一千九百十六年에 이 여자의 부친 되는 홍재성씨라는 분도 나와 같이 본국서 사진결혼하여 들어오는 부인을 기다리느라고 나와 같이 오래 상항서 유한 이 분과 사진약혼한 여자와 또 나와 약혼한 여자가 상해서 한 배를 타고 같이 상항에 하륙하여 가지고 혼례도 한 날 한 시에 이대위 목사 앞에서 같이 혼례를 이뤄 홍씨는 아이다호로 가신 후에는 아직 다시 만나지 못하다 오늘 그의 따님 우루드 홍을 만나니 얼마나 반갑다고 안 할 수 없었도다.
 
17
또 임병직씨를 또다시 만나서 수일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고 한즉 자기 자동차에 같이 타고 화부에 유명한 것 몇가지 구경하고 가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나간다. 첫째로 미국 시조 워싱턴 기념비를 먼저 가 보았는데 이 기념비는 하늘을 찌를 만하게 높이 올려 쌓은 것 七百여 척이라 하니 이 지구상에 허다한 기념비가 많은 가운데 가장 높이 쌓아 올린 기념비라 할 수 있다. 이 기념비를 왜 이같이 높이 올려 쌓은 미국인의 그 근본의 뜻을 찾아볼 것 같으면 워싱턴의 건국사업에 공로가 이 높이 올려 쌓은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 것인 줄 알게 된다. 여기서 차를 돌려 링컨의 기념각을 찾아갔는데 이 기념각은 지대가 높은데 전부 백옥으로 건축한 집 속에 옥으로 웅장하게 만든 링컨의 석상이 있는데 이 석상을 한번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링컨씨의 그 인자하고 겸손한 것이 그 석상에도 나타날 뿐 아니라 흑노를 속량시켜 준 인도의 그 평등주의를 다시금 다시금 더 연상하게 된다. 여기서 눈을 옮겨 한 곳을 바라다보니 백설같이 흰 옥돌 벽에다 금자로 남북전쟁 때에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한 그 글을 쓴 것이다. 이 게티즈버그에서 한 연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하여 내외국의 유명한 인사들이 일부러 찾아와서 이 글을 한번씩 읽고 가는 사람 계속 부절이다. 우리는 여기서 나와서 중정과 상의원과 체신부 이 모든 중요기관을 차례로 다 구경하고는 우리나라 구 정부 때에 화부에 세웠던 대사관을 구경하고 또 이박사께서 구미위원장으로 계실 때에 장만한 구 주택도 구경하고는 임병직씨와 여자청년회관 킨피터리아에 가서 점심을 사 먹고 위원부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었다.
 
18
구미위원장 임병직씨가 말씀하기를 하와이 동지회 중앙부에서 동지회 발전책이라는 문제로 기서 한 장을 써 보내라는 부탁이 임병직씨에게 왔는데 자기는 시간이 없어서 이 부탁을 할 수 없으니 날더러 이 문제에 대하여 기서 한 장을 써 보내주면 좋겠다고 간청하신다. 그러나 나는 이 부탁을 거듭 사양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유식한 임형에게 청구한 이것을 어찌 무식한 내가 대신할 수 있습니까 하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임형의 말이 사겸씨의 글과 의견이 상당하여 동포사회에서 환영하니 사양치 말고 이 문제를 가지고 가서 글을 써 보내달라고 간곡히 청한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이 부탁을 맡아가지고 十二月 二十八日에 집으로 돌아와서 동지회 발전책이라는 문제로 글을 한 장 써서 하와이 동지회로 직접 부치지 않고 이 글을 임병직씨께로 부치었는데 임병직씨는 그때에 이박사께서 외무장관 임명케 하려고 불러 나가게 되는 때에 나의 글을 임형이 친히 하와이로 가지고 가서 태평양주보에 기재된 것을 나는 친히 받아 보았도다.
 
19
지금부터는 본국에 갔다 올 준비를 하는데 우선 네 가지 종류 주사침을 맞아야 된다고 하니 주사침 네 가지 맞는 동안이 근 세 주일 걸리고 또 이민국에 가서 재입국할 수속하기에 두어 주일 시간을 허비하였으나 재입국할 문빙은 얻지 못하고 다만 우리 대사 장면씨께서 여행권만 얻어놓은 고로 우리 정부에 급히 전보와 편지를 하였다. 이 편지 회답에 대통령과 외무대신 임병직씨 또 체신부대신 장기영씨 세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정부에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것은 아무 염려없이 담보할 터이니 어서 빨리 나오는 것만 수속하여 가지고 나오라 하였기로 아무 염려 않고 본국으로 나가기로 작정하고 우선 인디애나에 있는 딸 채숙을 찾아보고 또 시카고를 가서 옛 동지 장인명 남정현 이상진 정태은 몇 분을 찾아보고 수일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대강 나 본국간 뒤에 어찌어찌 집안 처리할 것을 아내한테 다 부탁하고는 二月 초十日에 상항으로 가는 화차를 타기로 하고 차표를 사다 놓았다. 이제는 정말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온 집안이 다 염려함을 마지 않는 중에도 아내 되는 사람은 내가 나이 많은데 먼 길을 떠난다고 여간 염려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작정한 본국에 갔다 오기로 한 이 일을 중지하는 수 없으므로 불가불 떠나야만 될 사정이다.
 
20
내가 지금 본국을 갔다 오기로 작정한 것은 다른 아무 계획이 없고 오직 이 나라를 위하여 사십여 년 동안 독립운동에 활동하여 오던 이 나라가 지금 자유를 회복하고 우리의 정부가 열강의 승인을 받아 수립된 이 때요 또 이 정부 대통령과 모모 장관이 다 독립운동 때에 같이 고락을 겪어가면서 활동하던 동지들이 이 정부를 운용하는 이 분들을 한번 다시 만나 볼 생각이 누구나 다 있을 것이요 또 일제 때부터 고통생활 가운데서 근근히 오늘까지 살아나온 친척들도 한번 만나볼 생각과 또 나는 상업가인 만큼 한·미간에 무슨 상업을 통상할 길을 하나 열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본국으로 지금 나가기로 작정을 정한 것이다. 나는 지금 상항으로 가는 화차를 타려고 연합정거장 대합실에 헨리와 아내와 같이 앉아서 화차 떠날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 나의 마음과 생각은 본국에 가서 이것저것 경영을 하게 되는 때에 떠날 화차 시간은 벌써 당도하여 화차로 들어가게 되어서 헨리는 나의 행장을 다 들고 화차 속으로 들어다 놓는데 아내 되는 사람은 눈물이 앞을 가리고 억한 심정은 속에서 북받쳐 올려 미는 고로 잘 가라는 말을 못하고 있는 순간에 차는 떠나려고 움직이는 때에 부득이 아내는 헨리를 데리고 화차에서 내려가 버리고 마는 것을 내려다 볼 때에 내가 무슨 큰 소망을 가지었기로 이와 같이 나의 집에 이와 같은 정세를 만드는가 하였다. 그러나 이미 다 작정하고 떠나기로 발길을 돌려놓았으니 이젠 안 갈 수 없다 하고 심중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모든 감상을 다 억제하고는 한 화차가 굴러가는대로 나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이 되어서 二日 반만에 상항에 도착하였다. 나는 지금 도착한 상항이 그리 서투르지 않다. 四十七年 前에 하와이서 미국을 올 때에 이곳 와서 하륙하였고 또 그 후에 대동보국회에 순찰원의 사명을 띠고 이곳 와서 회원을 많이 얻어가지고 대동보국회 첫 지방회를 조직하여 가지고 오래 지내던 관계도 있고 또 一千九百十六年 문에 이살로매와 사진혼인하고 들어오는 아내 되는 사람을 이곳서 만나서 이곳서 혼례를 이루고 한동안 살던 곳이 되어 어디가 어딘지 잘 알게 된 고로 화차에서 내리자 택시를 잡아타고 중국인 거주지에 와서 삼번 여관에 들어가서 방을 잡고 청인 거주지 근방에 한인들이 여기저기 끼어서 찬관과 여관 이발소 등 사업하는 동포가 여러분이 있다. 그러나 밤 열시 가량에 왔었기 때문에 동포 한 분을 찾아보지 못하고 여관에서 밤을 자고는 이튿날 일어나서 청인의 시가로 나가 조반을 먹고 이러저러 한인을 만나서 이곳 동포의 소식을 좀 알려고 한인을 찾으나 어디들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청인들한테 물어보니 커니가에서 찬관하는 양주은씨 댁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찾아들어갔다. 이 양주은씨는 어떤 인가 하면 사십여 년 전에 대동보국회의 한 회원으로 삭도 지방회관에서 같이 동정식하면서 대동보국회의 유력한 회원이요 극진한 동지로 지내던 분이다. 그러나 피차에 갈라져서 동서로 나눠 있게 된 동안은 삼십여 년이다. 그래 서로 외딴 데서 만나면 알지 못하게 변하여졌다. 나는 이 분의 찬관을 아무 통기도 않고 졸지에 찾아 들어가니 주인공 되는 양씨는 나를 멀거니 바라다 보면서 이것이 누군가 얼른 생각이 안 난다고 하면서 아주 나를 친절히 또 정답게 바라본다. 나도 반갑게 바라보면서 나를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하면서 일부러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손을 내밀면서 방사겸을 모르겠어요 하면서 손을 잡으려 하니 이 분이 너무나 기뻐서 이거 방사겸이야 하면서 달려들며 나의 목을 꼭 부다 안으며 참 몰라보게 되었구나 한다. 나도 반가워서 그 분을 꼭 부다 안았다. 밥 먹던 수다한 손님들은 다 이상하게 바라들 본다. 늙은 사람 둘이 만나 가지고 서로 부다 안고 이같이 반가워하는 그 내용과 우리의 정세를 모르고 이상히들 생각하였을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21
양씨와 한참 앉아 오랫동안 피차에 떠나 지내던 과거지사를 재미나게 말을 하는 동시에 양부인이 들어오신다. 나는 인사를 하면서 방사겸이라고 자칭 소개를 하니 양부인도 퍽 반가워하시면서 다정다애 하신다. 이러는 중에서 양부인께서 저를 위하여 먹을 것을 장만하여 놓고 먹으라 하시기에 잘 얻어먹고 담화하다 양주은씨 내외분께서 분주하신 것을 보고 더 있는 것이 미안하여 다시 또 온다고 하며 나왔다.
 
22
여기서 떠나서는 주영한 영사를 찾아가서 반가이 만나보고 본국 나갈 의논을 하고 두어 시 있는 동안에 점심 때가 되어 주영사가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한다. 또 홍재성 따님 우루드 여사를 작년에 화부에 있는 구미위원부 서기로 있을 때에 만나보고 왔었는데 오늘 이곳 영사관에서 또 만나게 되니 반갑기 한량 없다. 이 여사는 이곳 영사관 서기로 지금 시무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 이 여사와 같이 우리 셋이서 캐피타리아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영사관으로 와서 본국 나갈 의논을 다시 말하였는데 주영사가 우리의 정부에 전보하여 나의 나갈 것을 잘 주선한다 하여 나는 마음 놓고 상항서 두어 주일 유하게 되는 동안에 옛날 알던 친구를 매일 찾아보는 중에 염만석 전득부 김동우 우병욱 김석은 황사정(선?-필자주) 정덕근 황성택 김창수 주영한씨 부인 이 분들을 만나게 되는 동시에 성대한 만찬 오찬을 대접을 받는 가운데 유병욱씨 내외분은 극진히 사랑하므로 갓을 하나 머리에 꼭 맞게 만들어 주면서 기념으로 쓰고 본국으로 가라 하신다. 나는 상게 그 갓을 쓰고 다니면서 그 분들을 기억함을 마지 않는다. 주영사 댁에서 저를 위하여 두 번이나 만찬으로 대접한 것과 또 김창수씨가 저를 오클랜드로 데리고 가서 서양인 칵테일 찬관에 가서 저를 위하여 만찬을 대접한 것과 양주은씨께서 저를 데리고 청인 찬관에 가서 청찬을 대접한 것과 정덕근씨의 여러차 만찬과 오찬 또 염만석씨 내외분께서 저를 위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을 받고 황성택씨 댁에서 맛있는 한찬으로 대접을 받은 이 모든 친구에게서 사랑으로써 이같이 대접하신 여러분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기억하게 됩니다. 나는 이곳서 여러 동포의 사랑을 받는 중에 근 일삭을 유하게 되었다.
 
23
나는 이번 상항으로 나온 것은 배를 타고 가려고 작정한 것은 체신부장관 장기영씨가 화부에 계신 자기 부인과 같이 四月 二十五日 상항서 떠나는 제너럴 꼬돈 호를 같이 타고 일본까지 나오면 자기가 공기선으로 우리를 서울까지 가게 한다기로 장부인과 이 사건으로 수차 편지하니 장부인도 나와 같이 이 배로 나간다고 하기로 나는 꼭 같이 갈 줄로 믿고 이 배를 기다리고 있는 중 장부인은 갑자기 돌변하여 자기는 뉴욕서 배를 타고 나가기로 작정을 하였다 하기로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공기선으로 나가기로 작정을 정하였다. 배로 가면 한 四百元 가랑이요 또 공기선은 이곳서 서울까지 七百五十元 배보다 갑절이다. 그러나 편리하고 시간 경제가 여간이 아니다. 상항서 배로 가면 두 주일이 잘 걸리는 것을 三일 반도 채 못되는 五十四, 五時 동안이면 나갈 수 있다. 나는 六月 十五日에 서북비행회사에 김창수 의사와 같이 가 비행 표를 사다 놓고 이튿날 오후 한 시 가량에 떠나는 비행선을 타기로 다 준비하여 놓고 모모 친구를 찾아가서 이별을 고하는 때에 정덕근 의사를 찾아간즉 자기 아내 되는 이가 일년 전부터 도미하여 남편을 만나 보려고 우리 정부 외무에서 여행권을 절대로 내주지 않으므로 미국을 오지 못하여 무한히 애를 쓰고 있으니 본국 나가면 자기 아내를 위하여 외무에 가서 여행권을 주선하여 도미하도록 하여 주면 만만 감사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정부에 아무 권리가 없고 일개 평민으로서 어떻게 외무에서 내주지 않는 것을 내가 주선할 수 있소마는 내가 외무장관 임병직씨와 친절하니 할 수 있는 데까지 말은 하여 보리다 하였다.
 
24
우리 외무에서 정덕근씨 부인 도미하고자 하는데 왜 여행권을 내주지 않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로 말하면 작은 이유가 아니고 커다란 이유가 있다. 이박사와 우리 민주파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느라고 독립금 외교활동비 위원부 유지금 여러 가지에 독립운동자 우리들은 거액의 재정을 한두번이 아니고 쉬지 않고 수십 년을 두고 우리는 돈을 이같이 내어 활동하는 여기 대하여 돈 한 푼 내지 않고도 우리의 독립운동을 백가지 천가지로 방해하기 위하여 내외국 신문과 외국인 사회단체로 쫓아다니면서 방해와 저해를 무쌍히 한 한길수와 같이 어깨를 엮고 다니면서 방해하다 못하여 해방될 임하여는 이곳에 소수 분자가 조직한 공산당으로 들어가서는 우리 남방정부를 방해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하던 이런 사람의 아내가 여행권 청구하는 것을 우리 정부에서 안 줄 것은 사실이다. 또 시카고 있는 남정현씨의 부탁이다. 이 분의 손자가 서울서 무슨 사업을 한다는데 나더러 찾아가서 하는 사업을 바로 인도하여 주고 오라고 하신다. 또 상항서 의사 노릇하는 김창수씨의 부탁은 자기 질녀가 미국으로 유학하러 오고자 하나 우리 외무에서 여행권을 안 주어 못오니 나더러 주선하여 보내 달라는 부탁을 맡았다. 또 나성에 계신 동지 조종익씨께서 내가 상항에 와서 본국 가는 줄 알고 찾아 오셨다. 이 분의 부탁은 자기의 자제분을 찾아보고 우리 정부 체신부에 일자리를 하나 얻어주고 오라 하신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다고 응낙하였다. 체신장관 장기영씨를 잘 알 뿐더러 지금 내가 귀국하는 것은 이 분이 나를 나오라고 편지와 전보를 하여서 나가는 것이니 응당 자기 관할 부분에 이런 일자리를 내가 청구한다면 될 줄로 믿고 되리라고 장담한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온갖 부탁을 받아 가지고 나는 예정한 六月 十五日에 상항비행장으로 나갔다. 비행장에서 생명보험표를 五萬元 어치를 사서 보험표는 즉시 집으로 부쳤다. 내가 왜 생명보험표를 많이 산 것은 두 가지 유익 되는 이유를 가지고 산 것인데 첫째는 불행하여 타고 가는 공기선이 중도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된다면 남아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안전하게 지내게 하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요 둘째는 내가 처음으로 공기선을 타게 되는 때에 공기선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속이 울렁울렁하여 마음을 안돈할 수 없는지라. 이와 같은 중에서라도 五萬元의 보험금을 여차한 지경이면 나의 가족이 찾아서 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 이 울렁거리던 속이 좀 안정만 될 뿐 아니라 겁이 도무지 나지 않는도다.
 
25
지금 나 탄 비행선은 떠나려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발동하기 시작한다. 땅에서 한참 굴러가기를 한 五分 동안 하여 기계를 훨씬 달게 하여 가지고는 공중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여 한 五百 척으로 一千 척을 나가서는 순순히 날아나는데 어지럽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다. 그러나 이따금 공기선이 높이 오르고 내릴 때에 어질어질할 때에는 떨어지는 듯하여 겁도 좀 나고 어질어질한 때도 있다. 그러나 편리하기 짝이 없다. 한 두어시 동안 날아오다 삭스터 산상에 올라 와서는 그 무엇을 적은 종이 한 장씩을 스튜어디스가 갖다 주는 것을 읽어보니 삭스터 산상의 댐을 구경하라 하였고 여기서 높이 뜨기는 三千五百五 척 가량이요 또 가는 속력은 매시에 三百六十六 마일을 간다 하였다. 한참 있다 점심 겸 저녁을 네 시 가량하여 갖다 주는데 이 음식은 미국의 유명한 상등호텔 음식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겠다. 텐더로인스테이크와 푸렌치포테이토 썩커피쉬콤비네이션셀러드와 쁠넌스프와 애풀카불냇 아이스크림 디저트와 파커쓰우톨 버터와 잴리 커피 이와 같이 많이 주어 아무리 식량이 큰 사람이라도 다 먹을 수 없더라. 이와 같이 잘 먹이고 두어시 후에는 칵테일을 갖다 준다.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시애틀 비행장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큰 호텔에서 그날 밤을 자고 이튿날 사시에 일어나서 비행장으로 나가 서북 공기선을 바꿔 타고 떠나서 十五시 동안만 알래스카 앤코레지에 도착하여 한시 동안 있다가 다시 떠나 스미야라는 조그마한 섬에 도달하였는데 十七시 가량만에 왔었다. 이 섬은 앤코레지와 동경 두 사이에 있는 지극히 적은 섬이나 그러나 군략상의 중요한 지대인 고로 비행 승객 누구를 물론하고 하륙하여 그 섬을 관찰하는 것을 원치 않는 고로 비행선이 이곳에 도착하자 버스가 비행선 문 옆에 등대하였다가 승객들을 담아 싣고 산속으로 데려가서 비행선 떠날 때까지 가둬 두는 응접실같이 차려 놓은 곳에 우리를 위하여 커피와 샌드위치와 과자를 다 예비하였다 우리를 대접한다. 이곳서 한 반시 있는 동안에 버스는 벌써 와서 가자고 오라고 하여서 올라앉으니 비행장으로 돌아와서 비행선 문턱에다 갖다대고 들어가라 하여 비행선으로 다 들어앉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스미야 섬이 어떻게 생겼고 모든 군략상 설비가 어떻게 하여 놓은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왔다 갈 것뿐이다. 여기서 떠나 十五, 六時만에 동경에 도착하여 한시 좀 지체하여 가지고 떠나서 우리나라 경성 향하여 날아간다. 나는 여기서부터는 그립고 그립던 본국을 오래지 않아서 五十年 만에 다시 보게 되는 것을 생각하고 마음이 기쁘고 반가워서 앞만 내다보고 있다. 일본 동경에서 우리나라가 머지 않으니 오래지 않아서 눈앞에 보이겠거니 하고 앞만 내다보게 된다. 대개 동경서 다섯시 가량이면 서울에 당도하는데 벌써 세 시간은 잘 왔으니 지금은 우리나라 해협이 보이리라 하고 내다보아도 아직 알 수 없다. 우리 탄 공기선은 수천 척 공중에 떠서 해협을 내려다보는 그 중간에 운무가 자욱하여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일 줄 믿고 앞만 내다보는 동시에 장차 우리가 가져야 될 쓰시마 섬이 차차 나타나 보이고 과히 크지 않은 이 섬을 순식간에 지나서 운무가 자욱한 사이로 우리의 해협이 조금씩 나타났다가는 다시 운무에 싸여 없어지곤 한다. 이러는 동안에 해협을 지나 대륙에 다다르니 운무는 거의 다 개어버리고 아름다운 산과 들이 완연히 보이니 마치 흑운에 가리어 있던 만월이 흑운을 지나서 맑은 천공에 나타나는 거와 흡사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때에 연방 앞과 아래를 내려다보니 벌판의 논밭에는 오곡이 자라나고 종종 인가를 내려다보면 우리의 시골집들은 게딱지만큼씩이 보여 앞뒤의 산세는 울울창창한 곳도 있고 일제 때에 벌목하여 중대가리 된 산이 많이 보인다. 서울에 거즌 와서 유명한 삼각산과 서울 성시를 굽어볼 때에 무량한 감상도 일어나서 견딜 수 없는 것은 내가 이 나라에서 나서 외국에 망명하였다 五十年 후 오늘에 다시 돌아오더라도 이 七十이 다 된 몸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동시에 오래 사모하던 일가친척들을 반가이 만나볼 생각을 하니 급급한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는 중 김포비행장에 하륙하니 처음으로 내지 동포의 면목과 음성을 친히 대하게 되는 때에 아무리 생소한 동포라도 다 나의 친척들을 대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26
나는 별로 유공한 사람도 아니요 또 자격도 상당하지 못한 위인이다. 그러나 이런 불완전한 자격일지라도 과거 사십칠 년 동안을 사회 방면에서와 독립운동을 이 정부가 수립되는 날까지 나의 재력과 정신을 다 아울러 바친 것을 현 정부의 당국자들이 알기 때문에 체신 장관이 친히 자동차를 가지고 비행장에 나오셨다. 나는 장기영 장관을 한 三年만에 반가이 만나보고 같이 장장관 댁으로 와서 이 댁에 기숙을 하고 있게 하고 나는 즉시 조카 되는 방창덕을 찾아갔다. 나는 어느날 온다는 통기도 아니 하고 척 들어가니 조카의 전 식구가 놀라면서 반가워한다. 창덕이 모가 양동에 계신 누님께 나 왔다는 통기를 하니 즉시 오신다. 근 五十年만에 처음으로 보시는 누님께서는 저를 만날 때에 썩 반가워 하시면서도 슬퍼하시는 표정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에 나의 마음도 슬픈 지경으로 기울어진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누님이나 내가 우리가 피차에 일찍이 만나지 못하고 거의 다 죽을 나이 되어서 피차에 만나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어서 반가이 만나는 중에서라도 슬픈 표정을 피차간에 숨길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누님은 나보다 六年이 많으시요 지금 연세는 七十五세시나 아직도 강장하시고 식사도 잘 하시며 진실한 신도가 되어 매일 아침 사, 오시에 일찍 일어나서 수십 블록 상거되는 예배당에 가서 아침기도를 드리고 돌아오셔서 한잠 더 자시고 조반을 잡수시고 하신다. 이런 분이 도리어 자기보다 오륙년 아래 되는 나를 위하여 염려하시고 나를 위하여 주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주신다. 누님 아들 차순영은 한 三十五세 가량인데 아름다운 아내와 또 자식 형제를 낳아 기르고 누님 딸 순자는 한 十年 前에 스포츠 기자 이유형이라는 사람한테 시집을 가서 지금 잘 살고 순영은 아버지와 같이 한문과 일어 영어 잘 배운 청년인데 지금 우리 정 퓌턴 국장으로 있는데 월급은 매월 一萬元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지낼 수 없어서 경성대학에 영어로 미국 헌법을 교수하는데 매월 한 五十元 받고 또 크리스찬 쳐어치에의 총무를 겸하였으므로 매월 얼마씩 생기는 이것을 가지고 성도를 하는데 그리 유족치는 못하다. 그러나 지내갈 수는 있다 한다. 또 조카 창덕이는 모친이 있고 아내와 자식 칠남매가 자라나니 지내는 형편이 좀 어려운 모양으로 보인다. 창덕이는 평양 서양식 약국을 하여 돈도 잘 벌어서 평양성의에 통장도 상당히 장만하여 놓고 유족하게 잘 살다가 공산당이 三八선 이북으로 들어온 다음에 견딜 수 없어서 사업이고 집이고 전장이고 할 것 없이 다 내던지고 식구를 데리고 미군정 때에 서울에 와서 I.C.I 일을 얻어 하여 지금까지 지내오는데 맏아들 하나는 서울대학 음악과에서 선생으로 있으니 매월 돈 만원씩 버는 모양이고 이외에 여러 친척들을 만나보았는데 중 백씨 딸 둘을 만나 보았고 맏형님의 오누이도 만나 보았고 중 백씨의 사위 박경석을 만나 보았는데 이 박경석은 평양서 제일 가는 부자로 호의호식 또 평양 대동군수로 지내던 분이 공산당을 피하기 위하여 다 내버리고 지금 서울에 와서 남의 셋집을 얻어가지고 곤란히 지내는 것을 볼 때에 나의 마음도 불안하였다.
 
27
나는 여러 친척들을 다 반가이 만나 보고는 장장관 장기영씨 댁에서 유숙을 하고 있다. 장 장관은 홀로 된 모친을 모시고 아래로 한 二十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일제 때에 반양제로 지은 집에 가구를 상당히 차려놓은 것이 관사와 같이 화려하게 차려놓은 이층집인데 문간에는 주야로 파수 보는 순경이 둘씩 있고 하인 여자 둘이 있어서 하나는 음식하고 하나는 집 건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하층에 방을 잡고 있는 동안에 하인들과 순경들이 나에게 상당히 구느라고 한다. 밤 순경 하나는 나의 방에 찾아와서 미국의 형편을 종종 물어보는 것을 나는 아는 데까지 잘 말하여 주었다.
 
28
나는 경성에 도착한 지 二日 후에 조카 창덕을 데리고 대통령에게 제일차로 알선하러 들어가기로 하고 경무대에 계신 대통령께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받는데 대통령께 통기하여 알게 하여 준다 하기로 조금 기다리고 있노라니 오후 두 시쯤 하여 경무대로 들어오라고 하신다. 그래서 장장관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말하여 놓고 면회할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거진 되어 창덕이를 데리고 장장관의 운전수를 따라갔다. 경무대는 어디인고 하니 이왕 경복궁 바로 뒤 바로 삼각산 밑이다. 이리로 자동차를 몰아 들어가는 첫 동구에 들어갈 때에 순경이 달려와서 성명과 누구를 보려고 오는 것을 묻는다. 그래 나는 명함지를 내어 보이면서 대통령을 보러 들어간다 하니 순경이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책을 꺼내보더니 들어가라고 허락을 한다. 지금 들어온 곳은 경무대 동구를 들어오는 첫 문을 들어와서 동구를 들어가는 중간에 순경막이 있고 순경막 앞에는 순경이 총을 메고 사방에 늘어선 곳에 우리가 탄 차가 다다르니 순경이 내달아 누군가 성명을 묻는다. 그래 나는 미주서 온 방사겸이요 지금 대통령을 보려고 이곳에 왔다 한즉 또 책을 꺼내어 보더니 여기서 내려서 순경막 사무실로 들어오라 하기로 들어가 앉으니 총순같은 사람이 또 성명을 물어보고 책을 뒤져보더니 옳다 한다. 순경의 책에 누가 어느 날 어느 시에 대통령을 심방하러 오니 들여보내라는 분명한 증거를 적어둔 것이다. 지금은 우리 몸을 시시콜콜히 만져본다. 이것은 무슨 총이나 칼을 장착하였나 검사하여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검사를 다 치루고 한 반 블록 밖에 있는 대통령 사무실로 자유스럽게 걸어들어 갔었는데 이 집은 보기에 과히 웅장치는 않으나 미국의 백궁 같이 아름답게 지은 집인데 집 속에 응접실이 세 곳이 있는데 차려놓은 것이 미국의 큰 호텔 응접실만 못하지 않게 차려 놓았으며 이 집은 일제 때에 마지막 총독으로 있던 남차랑이 세력과 호강하던 집인데 해방 후에 이박사께서 대통령이 되신 후에 사무실로 쓰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집에 들어가니 비서가 마중 나오면서 우리를 응접실로 인도하여 앉히고 대통령께 통기하러 들어갔다 나와서 나를 데리고 이박사 계신 곳으로 인도하여 준다. 이박사께서는 뒤 포취에 자그마한 테이블 하나 놓고 교자 베개 좀 놓고 이곳서 찾아오는 객들을 맞아서 담화하시는 곳인데 종일 태양이 내려쏘이는 곳에 앉아 계신다. 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 일어나셔서 몇 보 나와 나를 맞는 동시에 피차에 손을 잡고 흔들 때에 무량한 감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해방 전까지도 이 분이 미주 동포한테서 지독한 반대와 공격을 당하시던 이 분이 대통령이 되어서 여기 계시게 된 고로 같이 독립운동자들 가운데서 저 같은 동지도 이 분을 찾아보려고 찾아왔구나 하는 때 나의 가슴 속에 쌓여 있는 감상은 여기 다 기록할 수 없다. 하여간 이 분을 만나보니 반갑기 한량없는 것은 이 분이 건강하시어 보기에 한 六十세 된 이와 같이 보이는 것을 다행으로 알게 되었다.
 
29
이 분 계신 태양 밑에 차려 놓은 사무실에 나의 조카와 셋이 앉아서 한 반시 동안 국내 국외 형편을 가지고 담화를 하다 나온 것이 첫번 방문한 것인데 나는 나의 자신을 위하여 청구한 것은 하나도 없고 미주 동지총회에서 발행하는 북미시보 확장할 경영에 대하여 대통령께 한 二, 三萬元 도와주셔야 되겠다고 하니 대통령 말씀이 자기도 도와주려고 마음 가운데 늘 생각하고 있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는 일차 방문을 마치고는 나왔었다.
 
30
나는 지금 장장관 댁에 유하는 동안에 서울 신문사에서 미주에서 나온 방사겸을 찾아와서 시국에 대한 감상도 묻고 또 미주 동포사회에서들 어떻게 지내는 형편도 묻는 것을 나 아는 데까지는 다 대답하였다. 신문사에서 사진사를 대동하고 와서는 나의 사진과 그 담화한 시국평론한 말을 서울신문에 기재하여서 서울에 상류 계급의 인사들이 방사겸을 대강 알게 되는 동시에 찾아오는 동포가 연락부절이다. 그래서 조반을 먹고는 응접실에서 찾아오는 이 분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31
지금 서울 인사들이 저를 이같이 많이 찾아오는 그 이유를 말할 것 같으면 물론 미주에서 나온 방사겸이가 어떠한 자격을 가진 사람인가 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에 요구되는 일을 나를 이용하여 성공하여 보자는 분이 많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이라고 안 할 수 없다. 지금 찾아오는 이 분들 가운데 자기의 자식이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려고 하나 여행권을 얻을 수 없다고 어떤 분은 미국에 있는 남편을 찾아간다고 어떤 분은 자기의 아버지를 찾아간다고 외부에 가서 여행권을 좀 주선하여 달라고 하고 또 어떤 분은 실업상 경영으로 상공부에 허가를 얻지 못하는 것 어떤 분은 적산 가운데서 집을 하나 얻으려 하나 적산 처리부에서 허락지 않으니 가서 말 좀 하여 달라는 분 어떤 이는 실업기관을 정부에서 하나 얻어내면 자본은 자기가 내 가지고 같이 하자는 분 또 정부에 무슨 소임을 하나 소개하여 달라는 분도 있었다. 이와 같이 나에게 여러가지 모양의 부탁이 들어오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내가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박사와 오랫동안 같이 하였다는 서울신문에 난 것과 또 라디오 방송한 것과 또 외무장관 체신장관 이 분들과 다 친절한 동지라는 기사가 서울신문에 난 것을 보고 이 방사겸이라는 사람이 우리 정부에 세력이 당당한 줄 알고 나를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하게 되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부탁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도와 달라는 것은 섭섭한 말이나 이 분들의 생각이 잘못이다. 나는 미국서 나온 일개 평민으로서 정부에서 법률로 행정하는 것을 나의 부탁이나 권고로는 되지 않을 것은 사실인 줄 아는 고로 이상에 부탁하는 것들을 다 응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능력이 미치는 데까지 주선하여 도와준 일도 여러 가지가 있는 가운데 가장 일반 민족 전체에 이익될 일 하나를 내가 주선하여 주고 왔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서울서 국도극장에서 영화사업을 하는 김동렬이라는 분을 나는 알지도 못하는 분이었는데 하루는 이 분이 저를 오라고 사람을 보내었다. 나는 이 분의 국도극장을 찾아갔다. 이분이 어떻게 나를 알고 나를 오라고 사람을 보내었는가 하면 근일 서울신문에 나의 말과 사진 난 것을 보고 나를 어떠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되는 동시에 나의 조카 방창덕을 만나서 나를 좀 보게 하여 달라고 부탁한 것을 조카가 나한테 와서 말하였기 때문에 나를 한번 만나게 될 줄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카 방창덕이와 같이 데리러 온 사람의 자동차를 타고 찾아갔다. 이 국도극장은 돌로 삼층을 지었는데 미국 도시에서 이같이 큰 연극장은 흔히 보기 드물다 하게 지었는데 二, 三千명 용납할 만하게 지었으며 이 연극장이 서울에 둘째간다 한다. 이 연극장 주인 김동렬씨가 극장 삼층 사무실에다 여러가지 과자와 커피를 준비하여 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때에 우리가 들어가니 영접하는 것이 이왕 알던 사람과 같이 아주 친절히 대접한다. 오늘 나를 이와 같이 청한 것은 내가 미국서 나온 사람이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경영하는 사업을 좀 도와달라고 청한 것이다. 이 분의 경영하는 사업은 무엇이기로 나의 도움을 요구하려 하는가? 이 분이 경영하는 사업은 한두 사람에게만 관계되지 않고 국가 전체에 유익이 될만한 크다만한 사업이다. 이 김동렬씨는 어떤 외국대학 출신이 무슨 정치나 사회에 이름난 사람은 아니다. 한 상업가로 눈이 밝은 사람인 것을 내가 잘 알게 되었다. 해방될 임시하여 일본사람들이 다 소유한 재산과 하던 사업과 부동산을 내치고 갈 것을 알고 일인들을 교섭하여 사업자리와 부동산을 헐가로 많이 사둔 가운데 국도극장도 이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 김동렬씨는 지금 영화 사업을 잘하면서 우리 남한에 석탄 부족한 것을 한번 해결하여 보려고 일본서 광산학을 마친 한인 몇 사람을 이용하여 가지고 우리나라에 화력이 없어 쓰지 못하고 버려두는 무연탄을 변작하여 쓸 만한 코라이트라는 기름을 발명하였다. 이 새로 발명한 코라이트 기름을 무연탄에다 섞어 쓰면 화력이 굉장하여 능히 강철이라도 녹일 수 있고 전기 기계도 용이하게 돌려서 지금 남선에 부족한 전기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이 코라이트을 발명한 김동렬씨는 자기가 발명한 이 코라이트 만든 서류와 견본을 우리 대통령께 상정만 시키면 무한한 칭찬과 또 대환영할 줄 알고 이 서류와 견본을 가지고 상공부 철도부 내무부 이 여러 부에 가서 주선하여 보았어도 아직 대통령께 이것이 상정되지 않고 중간에서 깔고 있다. 무한이 애를 쓰던 중이었는데 근일 미주서 나온 방사겸이란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나 서울신문에 대통령과 수십 년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동지요 또 외무장관 임병직 체신장관 장기영씨와도 절친한 친구라는 서울신문을 보고 알게 되는 가운데 또 내가 라디오 방송한 것도 친히 듣고 나서 나를 한번 만나서 자기가 발명한 코라이트 견본을 대통령에게 상정시켜 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동시에 이상하게도 이 사람과 나의 조카 방창덕과 무슨 혼란이 일어났었는데 이 사건은 무엇인가 하면 지금 방창덕이 살고 있는 주택이 해방될 임시에 김동렬이가 산 집인데 이 집에 있으려면 집세를 내고야 있는다는 혼란이 일어나는데 방창덕의 대답은 친구 황통운이라는 사람한테 이 집을 얻어가지고 오늘까지 왔었는데 하고 집세를 안 주고 있으려 하니 자연 시비가 될 것은 사실이었다. 이러다가 김동렬씨 신문에 난 미주서 온 方四兼과 자기와 집 사건으로 지금 시비 중에 있는 方昌德과 친척이나 안 되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하루는 창덕이를 찾아와서 미주서 나온 방사겸과 친척이 아닌가 물었다. 방창덕은 방사겸씨는 바로 나의 숙부님이라고 대답하니 김동렬씨 나를 한번 만나게 하여 달라고 하고는 가서는 나를 이같이 데려다 지금 대접을 하는 것이다.
 
32
나를 청하여 놓고 이 분이 나에게 부탁하는 것은 자기가 쓰지 못할 무연탄에 가입하여 쓸 코라이트 기름과 여기에 대한 서류를 가지고 가서 이대통령에게 상정을 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수일 후에 대통령을 제二차 심방하러 들어갈 때에 신신이 상정하여 주마 하니 이 분이 매우 기뻐하는 흥분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얼마 후에 만날 사람이 있어서 가야 되겠다고 나의 숙소로 돌아왔었다.
 
33
이튿날 창덕이가 나를 찾아들어오는데 희색이 만면하여 앉으면서 숙부님께서 김동렬씨의 일을 보아주시기 때문에 지금 식구 사는 그 집을 세 한푼 내지 않고 있으라고 김동렬씨가 말한 고로 매우 기뻐하는 것을 볼 때에 나의 마음도 기뻤다. 나는 이튿날 김동렬씨가 준 견본을 가지고 대통령에게 갖다 상정하고 이것을 내 가지고 와서 드리는 이유를 설명한 것은 김씨가 이 견본을 각하에게 상정시켜 보려고 상공부 철도부에 교섭을 한 지가 六삭 동안이었어도 아무 소식이 없다고 하면서 이것을 저더러 친히 각하에게 상정시켜 달라 하기로 제가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니 이 분이 깜짝 놀라시면서 나는 이런 일을 전수이 몰랐다고 하시면서 수일 후에 각부 장관을 모아 가지고 이 문제를 의논하신다 하기로 나는 이 이만큼 알고 나와서 김동렬씨를 찾아가서 내가 이만큼 주선하고 왔으니 이만큼 알고 정부에서 어떻게 결정되는 것을 기다릴 것뿐이라 하였다.
 
 

3. 정덕근씨 부인 여행권 얻던 일

 
35
며칠 서울신문을 본즉 대통령께서 국무회의에 각부 장관을 모아 가지고 이 콜라이트 발명한 것을 중요시하게 보고 상론한 결과는 몇몇 장관을 이것을 만드는 강원도 삼척에 파송하여 친히 조사하여 보기로 작정을 정하여 가지고 삼척에 나가 실지 조사한 결과가 양호하다고 하는 소식을 듣는 나와 김동렬씨는 매우 반가워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다량으로 제조하자면 기계창과 제조하는 큰 기계도 외국에서 사와야 되겠으니 여러 백만 원 자본을 가지고야 할 것을 지금 우리 정부 형편으로는 이 일을 곧 착수하는 수 없어서 E.C.A.를 교섭하여 본다는 소식까지 듣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오고 만 몇 달 후에 남북전쟁이 발동되었다.
 
36
지금 미국 상항에 있는 정덕근씨의 부탁인 자기 부인 柳信德 여사 도미하게 주선하여 달라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주선하여 보려고 외무장관 임병직씨를 찾아가서 반가이 만나보고 유신덕 여사에게 도미할 여행권을 내어주라고 간하였다. 그러나 이 여자가 공산당의 지목을 받는 분의 아내니 우리 정부에서도 더 이 여행권●●●●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나 나는 이 분이 거절한 ●●●● 너나 오지 않고 나는 박애주의로 이불리해를 설명●●●●였다. 성경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것과 같이 우리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의 아내를 도와준다면 이런 사람도 자연 감화되어 정부를 봉대할 수 있을 것이요 나를 해하려는 원수를 같이 해하려는 대신에 한번 인정을 보여준다면 원수라도 감복지인이 되어 국가건설에 유조할 줄 믿고 다시 임장관한테 우리 정부 반대하는 자의 아내에게 여행권을 주어서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라고 하는 동시에 우리가 柳信德 여사의 애타는 그 정경을 한번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여자가 이팔청춘에 정씨하고 혼례하고 일년 동안 살다가 남편이 미국으로 가 지금 십칠 년 동안이나 나오지 않아서 남편이 간절히 보고 싶어서 지금 찾아가기로 작정하고 우리 정부 외부 즉 당신한테 여행권 청구하는 이것을 거절한다면 이것은 인류 정의상에 차마 못할 일인 줄 알고 저는 임장관한테 이같이 간청하오니 한 번 원수를 사랑하시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신국가 건설하는 때에 바른 정책이라고 저는 믿습니다고 하니 이 분도 어쩔 수 없이 유신덕 여사에게 여행권 준다는 허락을 하신다.
【원문】방사겸 평생일기 (제6권)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미분류〕
▪ 분류 : 개인기록물
▪ 최근 3개월 조회수 : 97
- 전체 순위 : 702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16 위 / 105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포플라
• (1) 사친곡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방사겸 평생일기 [제목]
 
  방사겸(方四兼) [저자]
 
  일기(日記)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기록물 > 개인기록물 카탈로그   목차 (총 : 7권)   서문     이전 6권 다음 한글 
◈ 방사겸 평생일기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0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