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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문화사) ◈
◇ 第一編 檀君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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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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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上古文化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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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 氏의 『朝鮮史』는 前後 百餘回에 거의 三國時代의 終結을 보고 新羅統一期로 넘으려 하였으나, 下編은 著者 原稿가 旅裝 속에서 銷亂되어 修整訂補하자면 多少의 時日이 걸리겠고, 『朝鮮上古文化史』는 역시 同氏의 著로 斯界 稱有의 名著인 바, 우선 『朝鮮史』를 대신하여 이를 逐號揭載키로 하오니, 讀者諸位는 諒存하심을 바랍니다.註1)이 글은 단재 신채호의 글이 아니라, 『조선일보』 담당 편집자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하게 된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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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編 檀君時代
 
 

1. 第一章 朝鮮이라 이름한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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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朝鮮文化史 開卷 第一章이라. 먼저 朝鮮이란 뜻을 말하고자 하노라. 그러나 朝鮮歷史는 매양 王室이 한 번 바뀌면 나라의 이름도 바뀌며, 全國이 分裂하여 몇몇 覇王이 나면 나라 이름도 그 覇王의 숫자대로 많아서, 朝鮮이란 이름밖에도 夫餘·辰韓·卞韓·馬韓·樂浪·帶方·眞番·臨屯·新羅·駕洛·高句麗·百濟·震·渤海·摩震·泰封·高麗 等의 이름들이 있었나니, 이제 모든 이름에 對하여 그 뜻을 말하고서 朝鮮을 말하고자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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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에 적은 바, 夫餘·馬韓 等 十餘國의 이름을 그 沿革을 찾으면 다 檀君 때부터 있던 稱號라. 後世에 國學이 끊어져 그 根源을 찾지 않고, 다만 그 자취를 따라 이 이름은 이때에 나고, 저 이름은 저때에 났다고 하여 왔다. 故로 이 十餘國이 後世에는 비록 나라의 이름이 되었으나, 檀君 때에 或은 部의 이름으로 되었던 것도 있으며, 或은 方候國의 이름으로 되었던 것도 있나니, 이제 이를 辨正하려면 部의 이름은 部로 돌리며, 方의 이름은 方으로 돌리고, 朝鮮의 뜻을 말하고자 하노라.
 
 

1.1. (一) 高句麗·高麗 等은 檀君朝鮮 中 部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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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라 하면 이를 王建(왕건) 太祖가 처음 지은 이름으로 아나, 그러나 輿地勝覽에 "王建(왕건)이 國號을 後高句麗라 하다" 하고, 高麗史 徐熙傳에 "我國이 高句麗 故地에서 일어난 고로 國號를 高麗"라 하다 하였으니, 그런즉 高麗는 곧 高句麗의 이름을 이르는 者요, 高句麗라 하면 이를 高朱蒙(고주몽) 聖帝가 創造한 이름으로 아나, 그러나 『三國遺事』에 보면 北扶餘王을 '槀離王'이라 하고, 三韓 七十餘國에 古離國이 있으니, 이는 다 高朱蒙(고주몽) 以前이요. 『三國史記』에 高句麗를 '句麗' 或은 '高麗'라 하였으니, 高麗·古離·槀離는 다 同音이니, 그런즉 高句麗는 또 古離·槀離의 이름을 이은 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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槀離·古離·高句麗 等의 이름이 무슨 뜻으로 지은 것이요? 扶餘나 高句麗나 渤海의 各史를 보면 모두 東·南·西·北·中 五部를 두고 그 中部는 「桂婁」라 하였나니(渤海傳에 武藝爲桂婁郡王이라 하였은즉 渤海 中京이 桂婁라 하였던 證據), 槀離·古離·高句麗 等이 다 桂婁와 音이 同一한즉 다 中部란 뜻이라. 高句麗가 中部로써 그 國號를 삼음은 곧 解慕漱(해모수)가 北京(北扶餘)으로써 國號를 삼으며, 百濟 武王이 南京(南扶餘)으로써 國號를 삼음과 同一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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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婁의 뜻이 어찌 하여 中部가 되느뇨? 대개 上古 吏讀文 쓰던 時代에는 무슨 名詞던지 字義로 그 뜻을 求할 것이 아니라 字音으로 求할지니, 무릇 한복판을 「가온대」라 하며, 八月 中旬을 「가우」라 하며, 城柵를 「울」이라 하며, 疆土恢復을 「담울」이라 함은 우리의 古語니, 中部는 곧 「가울」이라. 桂婁는 「가울」의 音으로 쓴 者요, 古離·高麗·高句麗 等도 「가울이」의 音을 쓴 者니라. 한 「가울이」를 漢字로 씀에 어찌 이렇게 異同이 많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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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은 三國 初葉까지 吏讀文이 아직 成熟지 못하여 神師를 慈充 或 次次雄이라 하며, 宰相을 舒發邯 或 舒發翰이라 하며, 扶餘가 「鳧叟」 或 「鳧釋」이 되며, 伽倻가 駕洛 或 安羅가 되어, 한 나라 안에서도 一名詞를 쓰자면 同異가 許多하던 때의 筆法인 까닭이며, (二) 各國이 分立하여 저의 名詞를 가져다가 다른 글자로 쓰는 이가 많아서, 高句麗의 「舍利」를 百濟에는 檐魯(舍利와 檐魯는 다 兩字合音 곧 「살」)이라 하고, 百濟의 夫里郡의 稱을 新羅는 啄(불이)이라 火(불)라 하여, 서로 區別을 세우던 때의 名詞인 까닭이며, (三) 이밖에 支那(중국)에서 音譯한 것을 金富軾(부식)이 그대로 三國史記에 謄載한 자도 있는 까닭이라. 如何間 桂婁·古離·槀離·高麗·高句麗 等은 다 - 「가울이」란 뜻이오, 가울이는 中部라. 中部는 곧 檀君朝鮮 三京·五部 가운데의 一部니, 고로 王建(왕건)의 高麗나 高朱蒙(고주몽)의 高句麗가 다 檀君朝鮮 中部의 이름으로 내려온 자라 하노라.
 
 

1.2. (二) 眞蕃三韓 等은 다 檀君朝鮮의 三京이나 或 三京長官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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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番은 後人이 매양 漢主 徹(유철)의 一郡으로 아나, 그러나 『史記索隱』에 「眞番二國」이라 하니, 대개 眞番은 곧 辰·卞 兩韓의 聯合國이니, 支那(중국)史에 誤譯하여 眞番이 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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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子書』의 「秦夏」와 『東國通鑑』의 「秦韓」은 다 辰韓의 先代니, 辰韓은 兩國이 聯合하기 以前의 獨立한 이름이오. 『說文』의 樂浪潘國과 『漢誌』의 遼東番汗縣과 『渤海傳』의 海北卞韓은 다 卞韓의 遺基이니, 卞韓도 兩國이 聯合하기 以前에 獨立한 이름이라. 辰韓·卞韓이 다 數百年 强國으로 그 地位를 자랑하다가, 밋(이윽고) 內로는 箕子(기자)의 後孫이 勃興하며 外로는 支那(중국)와 凶奴가 迭侵하매, 이에 兩國國力이 減退하여 드디어 共同防守할 必要로써 聯合하여 辰卞國이라 함이니라. 그 位置는 「直隸省」(今 河北省)과 接近한 고로 『貨殖傳』에 燕 東賈眞番이라 하고, 『班固(반고)自叙』에 「眞番之利 與燕相接」이라 함이니, 辰·卞 兩韓을 「馬韓」을 並稱하여 前史에 三韓이라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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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의 位置를 先儒가 漢江 以南을 넘지 못한다 하였으나, 이는 南方의 三韓만 알고 北方의 三韓을 아지 못한 까닭이라. 北辰卞의 位置는 이미 陳述한 바거니와, 馬韓의 位置는 「崔致遠(최치원)」이 "馬韓이 高句麗가 되었다" 하고, 「渤海」의 「定安國王烏玄明」이 「馬韓遺黎」로 自稱하였으니, 高句麗와 渤海가 다 馬韓의 遺址요. 『北史』와 『晋書』에 揭載한 「挹婁」 西北의 寇漫汗이 곧 馬韓의 別名이 될지니, 그 統屬한 大莫盧는 『馬韓傳』의 莫盧요, 「庫婁」는 『馬韓傳』의 「古離」요, 「卑離」 十國은 馬韓傳의 卑離 諸國이니, 南三韓이 北三韓에서 移植한 자인즉, 그 郡國을 세울 때에 北三韓 諸國의 이름을 많이 取하였을 것은 自然의 理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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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南·北 兩三韓의 異點을 들어 말할진대, 北三韓은 元來 三國이러니, 辰·卞이 聯合하여 三國이 거의 一國 같이 되어 三韓이 兩韓이 되었다 하여도 可하나, 南三韓은 辰卞(駕洛의 先代)이 一國이 된 以外에, 또 辰韓(新羅의 先代)이 있어 馬韓을 아울러 三韓이 되니, 異點이 「一」이요, 北三韓은 辰卞이 强하고 馬韓이 弱하더니, 南三韓은 馬韓이 强하고 辰卞이 弱하니 異點이 「二」요. 南方의 辰卞은 後漢書에 卞辰이라 하고 辰卞이라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또한 異點인 듯하나, 『甄萱傳』의 「辰韓從之而興」이라 한 것으로 보면, 대개 辰卞·卞辰을 互用함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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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卞·馬 三韓의 位置는 이러하거니와, 三韓의 이름은 어느 때 어디서 비롯하였느뇨? 先儒들이 韓의 字義를 풀이하여 가로되, "우리말의 첫째를 「한아」라 하고 큰 것을 「한」이라 하니, 韓은 곧 이에서 뜻을 取함이라" 하였으나, 만일 「한」이라 「한아」이라 한 形容詞로써 韓이라 하였다 할진대, 한밧(太田)·한시울(大室)의 「한」과 같이 韓字가 위에 놓여 韓辰·韓卞·韓馬가 되었을지니, 어찌 辰韓·卞韓·馬韓이 되었으리오. 「乾隆皇帝」 가로되, "三韓은 三汗이오, 三韓 諸國의 卑離는 곧 貝勒(패리)이니, 汗이 패리를 統率함은 東方 諸國의 體例가 그러하다" 하였으니, 이 풀이가 가장 理勢에 合當하다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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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居西干」·「角」 等의 稱號가 있고, 高句麗와 百濟에 「可汗」 等 神에 對한 祭禮가 有하니, 우리 古代의 汗이란 官名이 있던 증거라. 高句麗 때는 全國을 三京에 나누고, 京마다 「汗」(丸都城 干朱理의 類)을 두었은즉, 檀君의 扶蘇樑·五德地·百牙岡의 三京에도 二汗이 있을지니, 그런즉 眞番은 곧 辰卞이요, 三韓은 곧 三汗이요, 三汗은 곧 三京長官의 이름이니, 元太祖 成吉思汗(성길사한, 칭기즈칸)의 分封한 四汗國의 四汗 같은 者일 것이라. 모두 後世에 創造한 國名 들이 아니라 하노라(三韓의 事實은 第二篇에 보일지며, 三韓의 位置는 第五篇에 보이리니, 이는 다만 三韓 名稱의 創始를 말할 뿐이다).
 
 

1.3. (三) 扶餘 樂浪 等도 다 檀君朝鮮의 三京 九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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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樂浪 等도 다 檀君朝鮮의 三京 九部 가운데의 城이나 或 (部)의 이름이니, 前史에 가로되, 檀君朝鮮이 衰하매 子孫이 北夫餘로 옮아왔다 하였으니, 夫餘의 이름이 있은 지 오래도다. 「韓致奫(한치윤)氏」가로되, "夫餘는 곧 「濊」니, 緩讀하면 夫餘가 되고 急讀하면 濊가 된다" 하였으나, 그러나 이는 다만 "夫餘가 濊의 舊地를 차지하였다"한 말로 因하여 억지로 이 같이 풀이함이라. 夫餘를 아무리 빨리 읽더라도 濊가 될 수 없으며, 아무리 緩讀하더라도 濊가 夫餘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 濊는 水名이니 夫餘가 어찌 水名이 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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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南京은 扶餘요, 南扶餘의 一名은 「所夫里」요, 所夫里는 곧 (솝울)이니, 「소」는 古語에 南을 가리키는 이름이요, 「솝울」은 古語에 京城을 가리키는 이름이니, 夫餘는 「ㅂ울」이라. 安鼎福(안정복)氏 가로되, 서울은 곧 新羅 때(徐羅伐)의 音이라 하나 이는 妄證이니라. 『新羅史』의 「斯盧」·「斯羅」·「徐羅」는 다 「새라」요, 伐·火·喙는 다 「불」이니, 새나 불이 어찌 서울이 되리오. 서울은 곧 「솝울」이니, 「돕아」가 도아가 되고, 「눕어」가 누어가 됨과 같이, 「솝」의 尾音 「ㅂ」이 消滅하여 서울이 되고, 「소」의 母音 「ㅗ」가 變遷하여 「서울」이 됨이라. 所夫里는 百濟의 南京이요 漢陽은 高麗의 南京이니, 漢陽을 서울이라 함은 「솝울」 곧 南京이란 뜻이니라. 그런즉 扶餘는 곧 京城의 稱號이다. 三京은 곧 三扶餘요, 三韓은 곧 三京의 長官이니, 한 곳에서 나온 이름으로 後世에 와서 分立한 나라의 이름이된 者이니라. 眞番·臨屯·樂浪·玄菟는 後人이 漢武의 四郡 이름으로 아나니, 四郡의 僞設은 下文에 別論할 바이며, 眞番은 이미 上述한 바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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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樂浪·臨屯·玄菟의 沿革을 상고하건대, 『東史綱目』 疆域考에 樂浪은 良夷요 玄菟는 玄夷라 하니, 靑(藍)·赤·白·玄·黃·畎·于·方·良은 檀君의 九部니, 良夷는 곧 良部를 가리킴이요, 玄夷는 곧 玄部를 가리킴이니, 玄部는 夫婁(부루)가 玄部王으로 滄海使者를 兼하고 辰韓이 盛時에 玄部로써 서울하고 玄帝라 稱하여 國光을 빛내던 部요, 良部 곧 樂浪은 처음에 箕氏가 이를 차지하고 다음에 崔氏가 이를 이어 國號를 삼던 者이니, 이는 玄菟·樂浪의 歷史의 대개라. 그 最初에는 九部 안의 部 이름이요 國名이 아니니라. 臨屯은 水名이니 帶方國의 別名이라. 臨津江의 古名은 帶水요, 帶水는 帶方의 앞에 가까운 시내니, 臨屯의 變音 臨津이 됨이거늘, 先儒 江陵을 臨屯이라 함은 너무 虛無하도다. 그러나 北帶方은 大梁河 附近이니, 北·南 兩帶方이다. 九部 안에 屬한 分國이니라.
 
 

1.4. (四) 新羅·百濟·駕洛·渤海·泰封 等도 모두 檀君 때부터 있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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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史』에 「德業日新 網羅四方」으로 智證王 때에 新羅의 이름을 定하였다 하며, 『百濟史』에 「百家濟海」로 溫祚王 때에 百濟의 이름을 定함은 다 後人의 臆說이다. 新羅는 三韓 諸國 가운데 있던 「斯羅」요, 百濟는 三韓 諸國 가운데 있던 「伯濟」이니, 斯羅와 百濟는 다 「智證·溫祚」 兩王 以前에 이름이 있었나니 어찌 兩王이 지었으리오. 智證의 「新」德과 溫祚의 「百」家로써 지은 이름이라 함은 實로 虛妄이다. 고로 新羅·百濟는 다 三京 곧 三韓의 屬國이니, 古代부터 固有하던 者요, 後世에 지은 者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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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는 太祖 大祚榮(대조영) 以前에 史冊에 보인 데가 없으니, 그러나 夫婁(부루)가 檀君 때에 蒼水使者가 되었는데, 蒼水는 곧 滄海요, 使者는 扶餘史 高句麗史 가운데 「大使者·小使者」 等의 使者니, 滄海로 領海를 삼아 使者를 둠이러니, 檀君朝 末葉에 따로 一國이 되었으니, 滄海力士는 滄海國의 力士요, 滄海王 南閭(남려)는 滄海國의 帝王이라. 東의 滄海에 使者를 두는 때에 西의 渤海에도 그 例와 같이 使者가 있을지며, 또한 使者의 住在한 곳이 있을지니, 樂浪의 海冥이 곧 그 遺址인가 하노라. 龍飛御天歌에 바다를 「발알」이라 하였으니, 渤海는 곧 「발알」이라. 이는 音譯이 偶然히 漢文의 字義에 맞음이니, 當時에 義譯함은 아니오. 발알은 西海의 이름이니, 東海 곧 滄海의 이름은 이제 상고할 수 없도다. 如何間 滄海·渤海의 이름도 「南閭(남려)」나 「大祚榮(대조영)」 以前에 이름이요, 또 渤海는 一名 「震國」이니, 震은 곧 辰韓의 「辰」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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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駕洛」은 「首露(수로)」가 세운 나라이나, 그러나 이도 그 이름은 三韓 諸國 가운데 狗耶를 이은지라. 韓致奫(한치윤)氏 가로되, 「狗耶」는 一名 伽倻니 伽倻는 곧 「개」의 音이오, 「狗耶」는 곧 「개」의 義라 하니, 이 풀이가 明白하다 할지며, 「駕洛」의 洛은 「라」니, 吏讀文에 매양 尾音을 버리고 頭音만 쓰나니, 迦瑟羅를 河西良이라 함은 良의 音도 「라」요, 平那를 平壤이라 함은 壤의 音도 「라」니, 「라」는 나라의 뜻이라. 朴趾源(박지원)·韓致奫(한치윤) 諸氏가 다 나라를 「라라」라 하니, 今音에는 첫소리(初發聲)에 「라」가 없으나, 『三國史記』에 「耨薩」·「魯婁」 等이 다 - 첫소리의 「라」요, 滿洲語에 地方을 「라이」라 함도 첫소리의 「라」니, 語音이 반드시 古今의 變遷도 있을지며, 或 南北의 異同도 있을지니, 數千年 以前 四方 萬餘里를 차지하였던 때에 어찌 「라」의 첫소리가 없었다 斷定하리오. 良·羅·浪·壤 等 字는 다 그 音이 「라」요, 駕洛의 洛도 「라」니, 駕洛도 三韓 諸國의 屬國으로 「首露王」 때에 自立한 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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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摩震」과 「泰封」은 다 弓裔(궁예)의 國名이나, 摩震은 「馬辰」이니 馬韓·後百濟·辰韓·新羅의 統一을 意味함이오. 泰封은 帶方이니 弓裔(궁예)의 서울 鐵圓이 곧 帶水의 上流요, 帶方의 遺址라. 고로 泰封이라 함이니, 이도 古代의 이름이요, 弓裔(궁예)가 지은 자 아니니라.
 
 

1.5. (五) 朝鮮이라 이름한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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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陳述함과 같이 歷代 王朝가 쓰던 나라 이름들은 다 檀君 때에 部名이나 官名이나 地名이라. 國名으로 定한 자 아니요, 오직 「朝鮮」이 檀君이 定한 國名이다. 고로 古記에도 檀君이 國號를 朝鮮이라 하다 하며, 『三國遺事』에도 檀君이 國號를 朝鮮이라 하다하며, 곧 外人이 記錄한 魏書에도 二千載 以前에 檀君王儉이 國號를 朝鮮이라 하다 함이라. 그러나 朝鮮이란 뜻을 어디서 取함이냐? 이제 各 史家들의 解釋을 討論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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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輿地勝覽』에는 「東表日出」의 義를 取하여 「朝鮮」이라 하였다 하고, 金鶴峰(학봉 김성일)은 「朝日鮮明」의 義를 가져 朝鮮이라 이름하였다 하여, 두 말이 거의 같으나, 그러나 이는 「百家濟海德業日新」 等으로 百濟와 新羅를 解釋함과 같은 臆說이다. 朝鮮을 海東이라 東國이라 함은 新羅 末世부터 난 말이라. 檀君 때에 三危太伯을 世界의 中心으로 잡고 「가울」 곧 中部를 全國의 中心으로 잡던 때에, 어찌 「東表鮮日」의 뜻으로 國名을 지었으리요. 그 後人의 妄證됨이 明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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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安順庵(순암 안정복)은 가로되, 朝는 東이요 鮮은 西로 鮮卑니, 鮮卑山東에 나라를 세운 고로 朝鮮이라 하였다 하니, 鮮卑는 곧 檀君 때부터 高句麗 때까지 朝鮮의 屬國이니, 屬國인 鮮卑가 朝鮮에서 가져다가 鮮卑라는 이름을 지었다 함은 可하거니와, 宗國인 朝鮮이 鮮卑에서 가져다가 朝鮮이라 하였음은 萬萬不可할 뿐더러, 하물며 朝鮮의 朝는 東의 義라 하고, 게다가 鮮卑山東 四字를 加減하며 顚倒하여 朝鮮의 義를 붙이려 함은 너무 苟且하여, 取할 價値가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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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史記索隱』에 "潮水·汕水·洌水, 三水가 合하여 列水가 되니, 「朝鮮」의 義를 이에서 取함이라" 하니, 무릇 朝鮮 太古의 文明은 水濱에서 일어나, 「濊」 水邊에 濊國이 있고, 帶水가에 帶方國이 있고, 「浿水」가에 浿水國이 있고, 「河南慰禮」가 溫祚(온조)의 서울이 되고, 卒本川上이 「高朱蒙(고주몽)」의 나라가 되어, 數千年 名都大邑이 거의 江河를 끼지 아니한 者 없나니, 潮·汕 二水의 가에 朝鮮이 나다는 一理가 있는 말이나, 그러나 五部의 이름은 모두 靑·赤·白·玄·黃 等의 形容詞인데, 이제 五部를 管轄하는 宗主國이 홀로 濊·梁 等 小國과 같이 水名에서 가져온 이름이라 함이 너무도 異常하며, 또 濊·梁 等 名은 다 一水의 水名을 取하였거늘, 이제 朝鮮은 二個의 小水를 아울러 그 이름을 지었다 함이 奇怪하니, 遽然히 遵守키 不能한 解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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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儒- 潮·汕 二水를 淮陽·報恩의 漢江 別源이라 하고, 朝鮮의 이름이 이에서 낳다 함은 더욱 虛無한 말이라. 三京이 平壤·遼東 等地에 있는데, 어찌 三京 以外 몇 百里되는 곳의 小水로써 國名을 삼았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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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史에 상고하건대, 朝鮮과 「肅愼」은 대개 한 나라이다. 『吳越春秋』에 「內美釜山 州愼之功」이라 한 「州愼」을 註家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였으나, 그 上下文義로 보건대, 釜山은 「覆釜山」 곧 「塗山」이오 「州愼」은 곧 朝鮮이니, 「州愼之功」이라 함은 「蒼水使者 夫婁(부루)」의 功을 가리킴이라. 夫婁(부루)는 朝鮮 太子요, 塗山 夫婁(부루)가 治水法을 傳한 곳인 고로, 夏禹가 그 功을 잊지 못하여 이 같이 嘆慕함이니, 朝鮮은 州愼이라 하였은즉 州愼의 同音되는 肅愼도 「朝鮮」이 되니, 이는 事實이 朝鮮 肅愼의 一國이었음을 說明함이며, 『左傳』 肅愼燕毫는 周北土라 하고 『史記』에 「燕 北隣夫餘(檀君朝鮮 遷都한 뒤)」라 하였으며, 『山海經』에 「不咸山 有肅愼國」이라 하고 『匈奴傳』에 「匈奴左方王居上谷」(保定府)者 「東接濊朝鮮」이라 하였으니, 當時에 東北에서 支那(중국)와 交通하는 大國이 朝鮮 하나였나니, 어디에 따로 肅愼이 있으리오. 이는 位置가 朝鮮 肅愼의 一國이었음을 證明함이며, 滿洲源流에 淸初에 그 管境을 珠申이라 하였다 하고, 珠申은 곧 肅愼의 同音이라 하니, 대개 滿洲族은 古代朝鮮의 一部로 森林 속에서 生活하여, 文化는 비록 本朝鮮에 못 미치나, 古語 古典을 그대로 傳한 것은 많아서 三韓의 卑離로 官名(貝勒)을 삼으며, 新羅의 「弗矩內」로 稱尊(勃極烈)을 삼으며, 高句麗의 朱蒙(주몽)으로 善射者를 일컬으며, 百濟에 贊首流로 珊瑚를 일컬으며, 數千年 以前의 名稱을 많이 가져왔나니, 珠申이 곧 肅愼이요, 肅愼이 곧 朝鮮임은 疑心할 바 아니니, 이는 史冊이 朝鮮 肅愼의 一國이었음을 保證함이라. 支那(중국)의 漢·唐 請諸에 매양 朝鮮 肅愼 以外에 肅愼을 찾음은 한갓 虛妄한 區別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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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金國史』에 金의 本姓은 朱里眞이요, 朱里眞은 愼의 轉音이요 金의 義라 하니, 「朝鮮」이란 뜻도 或 이와 같은 것인가 하노라. 「韻玉」에 가로되, 神誌(신지)가 震檀九變局圖를 지어 後世의 일을 豫言하였다 하니, 「神誌(신지)」는 檀君 때의 史官이니, 이로써 보면 朝鮮이라 한 以外에, 또 震檀의 「震」은 音이 辰韓의 「辰」과 같이 音이 「신」이니, 古代에 무릇 莊嚴한 자리나 神聖한 땅이면 반드시 「신」이라 하여, 「蘇塗」는 祭天하는 땅인 고로 臣蘇塗國(三韓傳에 보인 나라)이라 하고, 宰相은 百官의 머리인 고로 臣智(同 三韓傳)라 하고, 三京의 大汗을 辰韓이라 하고, 列國의 覇王을 「辰王」이라 하며, 이밖에도 「臣釁國」 「臣雲新國」 「臣濆活國」 等이 있었고, 檀의 音은 「단」이니 단은 사람이나 물건이나 한 單位를 가리키는 이름이니, 震檀은 대개 神國·聖國의 義니, 나라의 徽號요 이름이 아니니, 나라의 이름은 오직 「朝鮮」 하나뿐이니라.
 
 

2. 第二章 朝鮮 歷史 文獻의 禍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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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이란 이름이 나온 지 오늘까지 四千二百六十餘年 거의 萬年의 折半이나 되는 悠久한 歲月이라. 이 긴- 歲月 동안의 文化나 政治에 적을 歷史가 적지 않을 것이나, 그러나 다만 울안의 싸움이나 外敵의 덤빔 같은 無妄의 災와 暴君의 불끌음이나 愚夫의 장난 같은 不時의 厄에 들어가, 우리 눈에 비치는 歷史의 材料는 거의 새벽별을 셈과 한 가지가 되고 말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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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獻備考』에 가로되, 新羅의 故籍은 甄萱(견훤)의 亂에 없어지고 高句麗의 文獻은 李勣(이적)의 亂에 없어졌다는 傳說이 있다. 그러나 어찌 이뿐이리오. 三韓이나 列國이나 三國이나 南北國의 사이에, 울안에 싸움을 千이나 萬으로 셀지니, 이때에 없어진 것도 적지 않을지며, 秦開(진개)나 冒頓(모돈)이나 衛滿(위만)나 劉徹(유철, 漢武帝)이나 薛仁貴(설인귀)나 蘇定方(소정방) 같은 凶賊의 덤빔이 한두 번 만 아니니, 이때에 없어진 文獻도 많을 지라 하노라. 『輿地勝覽』에 가로되, 襄陽에 四仙碑가 있더니, 胡宗旦(호종단)이 부순 바가 되어 오직 그 龜趺만 남았다 하고, 『海上雜錄』에 가로되, "先春嶺下에 高句麗의 遺碑가 있는데 胡宗旦(호종단)이 부수고 오직 「皇帝相加」 等 十餘字가 남았으니, 皇帝는 高句麗王의 自稱이오, 相加는 高句麗 大臣의 일컬음이더라" 하였으니, 胡宗旦(호종단)의 없앤 古蹟도 대개 이뿐 아닐지니라.
 
39
무릇 四仙은 數千年 國粹의 精神中心이오, 武士의 魂이라 할만한 新羅 仙郞인 南郞(남랑)·述郞(술랑)·永郞(영랑)·安詳郞(안상랑) 四人이니, 『高麗史』에 睿宗의 詔에 「四聖之跡 所宜加榮」이라 한 말로 보면, 歷代의 四聖에 對한 尊仰이 至極하였음을 볼지어늘, 『三國史記』를 보면 四聖의 이름도 쓰지 않음도 奇怪하거니와, 胡宗旦(호종단)의 四仙郞의 遺蹟을 撲滅함은 二千年來의 가장 큰 事變이어늘, 『高麗史』에 이런 이야기가 없음은 碑 부순 일보다 더욱 駭異하도다. 겨우 『輿地勝覽』에 州郡古蹟誌와 海上雜錄 같은 等閑文字로 말미암아 우리가 胡宗旦(호종단) 같은 妖物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나니, 이밖에 적발되지 아니한 宗旦(호종단)의 罪惡이 얼마나 많았을 것을 알 것이다. 檀君 三京의 남은 터이며 辰國九韓의 끼친 물건이며 二百花郞의 지난 자취며 三萬皂衣의 던진 흔적이, 거의 胡宗旦(호종단) 等의 睿宗·仁宗을 흘려 山川 壓勝하던 길에 抹殺한 바라 하노라.
 
40
金富軾(김부식)의 『三國史記』를 보는 자― 매양 三國 文獻이 富軾(김부식)의 때에는 傳한 것이 없는 고로, 『三國史記』가 考據할 材料가 없어 이같이 踈略함이라 하였으나, 實은 그것도 아니라. 『三國史記』는 元來 支那人이 부르는 海東三國이 羅·麗·濟(신라·고구려·백제) 三國이란 말에 標準하여 지은 고로, 「駕洛國」도 또 新羅와 對峙하던 盛國이오, 山間 僧侶가 지은 『三國遺事』에도 「駕洛國記」를 실었은즉, 朝廷의 文衡이 되어 天下의 遺文을 搜集할 能力이 있는 「金富軾(김부식)」이 어찌 「駕洛國記」를 모르리오. 고로 三國이란 이름을 맞추기 위하여 「駕洛國」을 빼며, 「夫餘」는 檀君의 宗派요 高句麗 百濟의 父國일 뿐더러, 數百年 以後 權擥(권람)의 『應制詩註』에도 오히려 「夫餘」의 畧史를 말하고, 外國의 「陳壽(진수)」·「范曄(범엽)」 等도 오히려 夫餘傳을 지었거늘, 어찌 當時의 人이오, 本國人인 富軾(김부식)이 夫餘를 몰랐으리요. 이도 三國이란 이름을 맞추기 爲하여 夫餘를 빼어 없앴음이며, 또 富軾(김부식)이 渤海 事實을 몰라서 渤海史를 빼었다 함도 妄說이며 妖說이라, 唐人으로도 『渤海行年記』 十卷과 『渤海國記』 三卷을 지어 宋人의 「宋祁(송기)」도 이를 依恃하여 『渤海傳』을 지었거늘, 本國에 비록 渤海史가 絶種되었다 하더라도 富軾(김부식)이 出使하는 길에 購集하기도 可能할지며, 하물며 渤海가 亡한 뒤에 그 貴族과 儒生들이 高麗에 歸化한 때니, 그 때가 곧 金富軾(김부식)의 前 百數十年이 될 뿐이며, 「大廷琳(대정림)」이 渤海를 中興하여 使命이 高麗와 頻煩하던 때니, 곧 富軾(김부식)의 七八十年 前이 될 뿐이며, 「高永昌(고영창)」이 渤海를 三興하던 때는 곧 富軾(김부식)의 同時라. 渤海의 일을 많이 듣고 많이 볼 때니 어찌 全然 不知하였으리오. 고로 渤海史를 뺌은 東鴨綠 以東에 偏安한 小國을 만들 작정이며, 花郞의 遺蹟은 李朝 初葉까지도 民間에 遺傳하였으므로, 『東方說苑』에 「瞿旵(구참)」의 犯戒며, 『畢齋集』의 「黃昌(황창)」의 舞劍이며, 『大東韻玉』의 「南石行(남석행)」의 血書며, 『輿地勝覽』에 「四聖」의 모든 故蹟이 있거늘, 그 數百年 前에는 金富軾(김부식)이 어찌 이를 全然히 몰랐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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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間의 傳說은 金富軾(김부식)이 이를 搜集하여 眞正한 朝鮮史를 만들려 한 本意가 아닌 즉, 이는 그만 두고라도 곧 『三國史記』 가운데도 明白히 仙史와 花郞世紀가 많다 하며, "모든 花郞의 芳名美事는 다― 傳記에 보이다"라 하고, 이를 登載치 아니함은 무슨 일이며, 이미 本國人이 지어 二百 花郞의 事實이 具備한 『花郞世紀』를 버리고, 매양 花郞을 이야기할 때마다 唐人의 지은 『大中遺事』를 引證함은 무슨 일이며, 「花郞」의 別名은 「國仙」이라 하며 仙郞이라 하고, 「高句麗皂衣」의 別名은 「仙人」이라 하며, 『三國遺事』의 花郞을 「神仙之事」라 하였은즉, 新羅의 花郞은 곧 高句麗의 皂衣에서 나온 者요, 『高句麗史』의 「平壤者 仙人王儉之宅」은 곧 仙史의 本文이니, 檀君이 곧 仙人의 始祖라. 仙人은 곧 우리의 國敎이며 우리의 武士道며 우리 民族의 넋이며 精神이며 우리 國史의 「꽃」이거늘, 그 源流를 말하지 않고 다만 唐人의 『新羅國記』나 『大中遺事』의 本文을 引用하여 「眞興大王」이 花郞 세우던 말만 함은 무슨 일이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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嗟呼라, 金富軾(김부식)도 胡宗旦(호종단)의 心理를 받아 外國文化로써 本國을 征服하여 儒敎로써 國敎를 代신하려 하여 그 지은바, 所謂 『三國史記』가 이 꼴이 되었도다. 金富軾(김부식)의 古記를 刪削한 心理는 곧 胡宗旦(호종단)의 古蹟 없앤 心術을 가졌음이요, 花郞傳記를 減損함은 胡宗旦(호종단)이 四聖碑 부수던 버릇보다 더 甚하다 할지로다. 「左君」이 가로되, "漢唐 諸國의 三國이란 말이 없었다면 金富軾(김부식)이 곧 『三國史記』도 짓지 아니하였을지며, 만일 『大中遺事』의 花郞의 일을 記錄한 것이 없었다면 金富軾(김부식)이 반드시 新羅史 가운데 花郞 二字를 쓰지도 아니하였으리라" 하였으니, 이 말이 너무 過激한 듯하나, 그러나 『三國史記』를 지을 때의 金(김부식)氏의 마음에, 이를 獨立의 朝鮮史로 지은 것이 아니라 支那(중국) 歷代史 가운데 『東夷列傳』의 註釋으로 自處함은 明白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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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 남아있는 바가 곧 『三國史記』뿐이로다. 우리의 考據의 큰 材料가 『三國史記』뿐이로다. 『高麗史』에 이르러서는, 當初에 그 材料가 自由로 採擇하여 著作한 것이 아니라 蒙古(몽골)의 壓迫 받던 때에 蒙古主가 매양 高麗 太祖 以下의 記錄을 가져다가 본 일이 많았나니, 그 때에 어느 句 무슨 字를 고쳤다는 말은 없고, 그러나 『高麗史』 八關會에 蒙古主의 말로써, 一人이라 海東天子라 하는 이름을 廢止하였다 하니, 그밖에 일도 알 수 있도다. 고로 『高麗史』를 보면 盛時의 事蹟은 얼마가 안 되고 衰時의 일만 많이 記하였으며, 國內의 政事에 對한 文字보다 國外에 遼·金·元의 交通한 文字가 많음이로다. 「鄭麟趾(정인지)」가 그 記錄을 編次할 뿐이요 特別한 史識이 있어서 加減한 자― 아니니 史라 하기 어렵고, 本朝文獻은 그 金匱石室에 감추어 우리가 아주 못 보는 者 外에 朝鮮의 記錄이 적지 아니하며, 前朝의 記錄보다 具備하다 할지나, 그러나 그 百年 동안에는 奇惡한 風習이 있어서, 太祖가 北伐論者 崔瑩(최영)을 죽이고 高麗 王統을 빼앗아 創業이 됨으로 後世子孫이 事大主義로 國是를 삼으며, 「太宗」이 儒敎로써 立國의 精神을 삼으려 하여 『海東秘錄』을 불사르며, 「梁大司馬」는 國俗保全을 부르다가 排斥을 받으며, 「鄭竹島(죽도 정여립) 先生」은 「民重君輕」을 主張하다가 死刑을 입으며, 「西山大師(서산대사 휴정)」와 「四溟堂(사명당 유정)」을 禪科에 뽑아 佛敎의 中興을 經營하던 「普雨(보우)」는 妖僧으로 베며, 古人의 成規를 지키지 않고 門路를 따로 세우려하던 尹白湖(백호 윤휴)는 斯文亂賊으로 몰며, 古風을 찾으면 郞·佛 兩敎 섞어 만든 高麗의 八關會 같은 雜祭도 없으며, 巨人을 찾으면 「天降彌勒」으로 自處한 弓裔(궁예) 같은 狂夫도 없으며, 周禮와 唐制는 千番이 되풀이 하였지만 三京 五部는 어떤 것이었든가 하는 생각은 꿈꾸어 본 일도 없었으며, 周公이나 孔子(공자)는 아이들도 외우지만 三郞이나 四聖은 그 이름이 무엇인가를 알려고도 아니하였으니, 嗟乎라, 千百卷 先賢의 文集이 많다하나 『朱子大全』의 註解며, 五百年 文明의 典型은 全部가 支那(중국) 思想의 飜譯이라 朝鮮史의 쓸 만한 價値가 무엇이뇨? 고로 本朝의 文獻은 比較的 넉넉하다 하나 人力으로 進化의 順路를 막으며 異敎로 本然의 面目을 가린 것이다. 비록 그 사이에는 몇 가지의 新發明으로 朝鮮人의 天才를 發揮한 일이 없지 아니하나, 그 大勢는 邪說로 들어가는 때라. 이때의 文獻이 얼마나 朝鮮史 곧 精神的 朝鮮史에 補助가 되리오.
 
44
以上은 朝鮮의 故績과 記錄의 消滅 或 變改한 대개라. 消滅한 者는 이미 消滅하여 자취가 없거니와 어디서 生機의 考證을 찾아내리오. 그러나 아주 찾지 못하면 참 朝鮮은 조금도 알 수 없을지며, 變改한 자는 이미 變改하여 딴 판의 말이 되었거니와 어디서 바로 잡으리오. 그러나 아주 바로 잡아놓지 못하면 元朝鮮은 길이 없을지니, 어찌하면 可할까. 이제 이를 찾고 이를 바로잡는데 不完全하나마 몇 가지의 方法이 있으니,
 
45
(一)은 類證이니, 이를테면 「檀君」의 三五의 數로 새로 萬般의 規則을 定하였은즉, 夫餘의 「五加」와 「高句麗」의 「五部」와 「百濟」의 「五方」과 「渤海」·「高麗」 乃至 「契丹(거란)」(遼)·女眞(金)의 「五京」은 「檀君」의 治制에서 나온 자이며, 「新羅」의 「五戒」(事君以忠·事父以孝·交友以信·臨戰無退·殺生有擇)는 「檀君」의 倫理를 傳한 者이며, 「箕子(기자)」의 「五紀」(歲·月·日·時·曆)는 檀君의 曆法을 傳한 자라 하여, 이와 같이 類를 따라 證據함이 可하며,
 
46
(二)는 互證이니, 箕子(기자)의 「洪範」은 『尙書』에 『夏禹氏의 傳한 바라』 하였으며, 『吳越春秋』에 "夏禹가 治水할 때에 塗山에서 「玄菟使者」에게 中經을 받았다" 하였으며, 古記에 檀君太子 夫婁(부루)가 夏禹를 塗山에서 보았다 하였으니, 三史로 參照하면 箕子(기자)의 洪範은 곧 「夫婁(부루)」의 中經을 講述한 者이요. 「五行」이 이미 洪範 곧 中經의 根據이거늘, 『尙書』에 「夏禹」의 子가 곧 有扈(유호)氏의 五行을 威侮함으로 討滅하다 하였으니, 兩書로 參照하면 곧 朝鮮思想이 支那(중국)에 들어가 一時에 큰 論爭이 되어 戰爭까지 일어난 자이니, 이와 같이 事實을 따라 參照하여 證據함이 可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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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은 追證이니, 「高句麗 榮留王記」에 「唐帝」가 使者를 보내 "京觀을 헐기를 請하였다" 하니 京觀은 곧 戰勝의 紀念塔이니, 이로 보면 곧 乙支文德(을지문덕)이 「隋」를 이긴 뒤에 偉大한 紀念塔을 지은 일이 있으니, 「唐帝」의 請이 實行되지 아니하였은즉 "遼陽의 白塔이 곧 그 遺物이 될지며(白塔은 支那人이 尉遲敬德(위지경덕)의 쌓은 바" 라 하나 『唐書』에 尉遲敬德(위지경덕)은 高句麗 亡하던 前에 죽었으니 곧 浪說), 『順天誌』·『永平府誌』 等 書 가운데 唐太宗이 高句麗兵을 誘引하기 爲하여 쌓은 바, 『詤糧臺』라 한 것이 있으니, 이로 보면 泉(淵)蓋蘇文(연개소문)이 唐을 쳐 直隸省 一帶를 蹂躝하던 光景을 볼지니, 遼東의 「蓋蘇屯」은 곧 初次의 行營이 될지라. 이와 같이 이 事件이 있음으로 저 事件이 없지 아니함을 證據함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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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는 反證이니, 夏禹가 이미 「夫婁(부루)」의 弟子인즉, 朝鮮에 와서 배울지언정 가르칠 스승은 못되니, 그런즉 『墨子』에 "禹가 東으로 九夷에 가르치려고 가다가 會稽에서 道死하였다" 함은 곧 배우려고 오든 事實을 뒤집어 말함이오. 「箕子(기자)」의 洪範은 中經의 遺統인즉 그 思想이 朝鮮에서 받은 바거늘 어찌 도리어 朝鮮에 傳하리오. 그런즉 前史에 箕子(기자)가 禮樂卜筮 五千人으로써 와서 說敎하다 함은 곧 箕子(기자)의 무리 五千人의 歸化한 事實을 속여 한 말이오. 敗를 諱하고 勝을 誇張함은 支那史의 通性이라. 管子의 「秦夏」 云云은 箕子(기자)의 辰韓과 싸운 「齊桓公」의 功을 한껏 자랑하였으나, 孔子(공자) 『春秋』와 左丘明(좌구명)의 傳에는 이 일을 적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齊桓公과 管中(관중)이 겨우 「辰韓」을 막아 支那(중국) 諸國의 半自由를 恢復할 뿐이요, 그 實際의 戰爭과 交涉에는 辰韓에게 꿀린 일이 많은 고로 孔(공자)氏·左(좌구명)氏가 管仲(관중) 攘夷의 功을 贊嘆하며, 「微管仲吾其爲左袵」이라고까지 한 말을 보면 그 戰爭이 얼마나 危機에 迫하였음을 알지며, 그러나 그 『春秋』와 傳에 詳載치 아니한 것은 自家의 羞恥가 됨으로 빼고 쓰지 아니한 것이며, 땅을 잃고는 그 일의 實狀을 諱함도 支那(중국)史의 常例이니, 『史記』·『漢書』에 "滄海郡을 罷하다 眞番郡을 罷하다" 함은 반드시 朝鮮과 싸우다가 大敗한 結果이리니, 마치 唐이 新羅에게 大敗하여 浿江에 南地를 빼앗기었거늘, 『唐書』에 "以浿江以南地를 新羅에 주었다" 함과 같음이니, 이와 같이 反面에서 그 事實의 참(眞)을 發見함이 可하며,
 
49
(五)는 辨證이니, 謚法이 朝鮮에는 三國 末葉에 쓴 바요, 支那(중국)에는 周 以後에 쓴 바인데, 더구나 「祖宗」 等 字의 謚號는 支那(중국)도 漢 以後에 쓴 바이거늘, 『漢陽奇氏譜』 『鮮于氏先王遺事記』에 箕子(기자)의 謚號를 적어 太祖 文聖王이라 하였으니 이도 無理한 말이며, 그때에 箕氏와 並立한 夫餘·三韓 列國이 작지 아니하거늘 이 말은 없고 도리어 멀리 山東의 齊와 河南의 周에 交通하였다 하니, 이도 안 될 말이라. 故로 『先王遺事記』는 물을 것도 없이 僞造品이니, 다만 그 가운데 東征西伐한 武功이 있어 國光이 된다 하여, 이를 빼지 못하면 先祖의 事蹟을 속임이니라. 寺刹은 佛敎가 輸入된 뒤에 있는 名稱이라. 五十三佛이 바다로 건너옴이 비록 支那(중국)에서 印度를 通하기보다 以前이라 하나, 또한 三國 初代의 일이거늘, 『輿地勝覽』에 馬韓 "「武康王 箕準(기준)」이 「善花夫人(선화부인)」과 彌勒寺에서 놀았다" 하고 "武康王陵은 俗稱 「末通大王陵」이라 한다" 하였으니, 佛敎도 없는 때에 어디 寺刹이 있으리오. 『三國遺事』에 百濟 武康王의 이름이 「薯童(서동)」이요, 그 王后는 善花夫人(선화부인)이니, 武康王은 곧 「百濟 武王」이요, 薯는 곧 (마)니 末通(말통)은 곧 薯童(서동)이요, 馬韓은 곧 百濟의 別名이거늘, 이제 百濟의 王을 箕準(기준)이라 하고 百濟 王后를 箕準(기준)의 夫人이라 하였도다. 대개 箕準(기준)이 衛滿(위만)에게 敗하여 南方 馬韓의 一小邑을 깨치고 一時에 王이라 稱하였다가 곧 滅亡하였으므로 「陳壽(진수) 三韓傳」에도 "그 뒤에 滅絶하였다" 함이거늘, 이제 事實을 僞證하여 歷代의 系統을 어지럽게 하였도다.
 
50
이 같은 誤錄을 辨論하여 그 正確함을 求함이 可하니, 以上의 五者로써 方法을 삼아, 四千年 동안의 闕失을 채우며 訛誤를 바로잡고, 이에 그 가운데서 精하게 因果를 찾으며 公하게 是非를 가리면, 朝鮮의 價値 있는 歷史를 萬의 一 或 千의 一이라도 多勿(恢復하는 뜻)할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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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天下의 書籍을 搜集하며 地中의 遺物을 撥屈하여 參考의 材料를 삼고, 온 나라의 文人 學者들을 모아 十年 或 百年 힘을 다하여 大規模로 眞正한 朝鮮史를 장만할지니, 才와 誠과 學力을 갖추어 가진 사람에게 기다릴 바이니라.
【원문】第一編 檀君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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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申采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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