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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문화사) ◈
◇ 第二編 檀君朝의 業績과 功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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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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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編 檀君朝의 業績과 功德
 
 

1. 第一章 彭吳와 夫婁의 治水와 支那 交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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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綱目』에 "檀君이 彭吳(팽오)에게 命하여 國內山川을 다스리다" 하고, 『西郭雜錄』에 「彭吳(팽오)는 檀君 때에 洪水를 다스린 사람이니, 이제까지 民間에서 그 遺德을 생각하여 그를 崇祀[山嶺마다 城隍堂을 設하고 人民이 往來하며 致敬함이 곧 彭吳(팽오)가 山川治理한 功德을 祝한다 하는 彭吳祠라 한다]한다」 하였는데, 柳得恭(유득공)氏가 말하기를, "彭吳(팽오)는 漢[支那(중국)의 王朝]의 使玉으로 朝鮮에 通한 자거늘, 後世史家들이 그릇 利用하여 檀君 때, 彭吳(팽오)가 있는 줄로 알았다" 하여 이를 削除하매, 이 뒤에 作史者들이 매양 柳(유득공)氏 말을 좇았더라. 그러나 檀君 때에 洪水 있음은 事實이요, 洪水가 있었으면 洪水를 다스린 사람이 있었을 것은 事勢라. 어찌 漢의 「彭吳(팽오)」와 同名이라고 檀朝의 彭吳(팽오)를 漢臣으로 疑心하여 妄證을 믿을 바리요. 著者가 일찍 『西郭雜錄』의 彭吳(팽오)를 崇祀한다는 말로 말미암아 民間의 崇祀하는 神의 이름을 찾아본즉, 彭吳(팽오)란 이름은 없고 오직 西北 等地에서 「마울」(혹 조상마울이라 함)이란 神祀가 있는데, 우리를 살리며 우리를 洪水에서 건진 이가 곧 「마울」이라 하여 거의 「三神」과 같이 尊奉하니, 무릇 吏讀字를 쓸 때에 漢字가 본音대로 있지 아니하여, 古語에 善射者가 「듀물」이거늘 漢字로 朱蒙(주몽)이라 쓰며, 兵馬元師가 「말치」이거늘 漢字로 「莫雜支」라 썼나니, 그런즉 「彭吳(팽오)」는 漢字로 「마울」이라 씀인가 하노라. 洪水는 古代의 큰 禍運이요 洪水를 다스림은 큰 功德이니, 彭吳(팽오)의 功德이 萬世에 崇祀 받을 만하도다. 그러나 古史가 殘缺하여 겨우 그 몇 마디의 歷史가 傳說로 전하여 왔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히 外國의 史乘에 朝鮮의 洪水 다스린 法으로 支那(중국)의 洪水를 다스리던 事實을 적은 것이 있어서, 그 反面에서 彭吳(팽오)의 大才大智를 發見할 수 있도다. 이제 그 대강 빼어 적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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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古史에는 다만 檀君이 太子 夫婁(부루)를 支那(중국)의 塗山에 보낸 일만 있으나, 그러나 『吳越春秋』에는 이보다 比較的 자세한 記錄이 있도다. 그 記錄에 가로되, 「夏禹氏」(漢族의 主)가 洪水를 다스리다가 功을 이루지 못하여 愁然히 沈思하더니, 문득 按知하니, 九山東南의 天柱되는 宛委山에 聖人의 적으신 『黃帝中經』이 있는데, 그 嶺上에는 赤帝의 宮闕이 있고, 그 글은 文膨으로 싸며 盤石으로 덮고, 金으로 簡을 삼고, 靑玉으로 字를 삼고, 白銀으로 衣를 삼고, 文字는 다 離琢한 책이라 하였거늘, 禹가 이에 東으로 衡嶽에 가서 白馬血로 祭하고 致誠하나 어찌 못하고, 山에 올라 하늘에 向하여 哀嘯하더니, 忽然히 夢中에 赤繡衣 男子가 玄夷의 蒼水使者라 自稱하며, 이곳에서 文命(문명, 禹의 字號)을 기다린 지 오래노니 戱吟치 말라 하며, 覆釜山에 의지하여 東으로 돌아보며, 禹더러 일러 가로되, 우리 山의 神書를 얻으려거든 赤帝巖下에서 齋戒하라 하더라. 禹가 그 말대로 三月을 齋戒하고 「庚子日」에 山에 올라 巖石을 열어 보니 「金簡」의 글이 있거늘, 「禹」가 다시 三月 齋戒하고 庚子의 「宛委山」에 올라 「金簡」을 내고 「玉字」를 發見하여 五行治水의 道를 얻고, (中畧) 「禹」가 이에 안으로는 「釜山」에서 받은 「州愼」의 功德을 생각하고 밖으로는 그 聖德을 演述하여 天心에 應答하고, 「茅山」의 이름을 고쳐 「會稽山」이라 하고, (中畧) 禹 가로되, "그 열매를 먹으면 그 나무의 가지를 傷치 아니할지며, 그 물을 마시면 그 末流를 흐리지 않을지라. 내가 覆釜의 神書를 얻어 天下의 大災를 救하였으니, 어찌 그 德을 잊으리오." 이에 諫官을 두어 宮室을 다스리며, 나무를 베어 邑居를 만들며, 印信이며 門關을 짓고, 權衡이며 斗斛을 고르게 하고, 井田을 지어 萬世의 法度를 삼게 하고, 밋이윽고 年老하매 歎曰 "壽 장차 다하리니, 五月의 後 어떤 날을 會稽에 葬하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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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夏禹」가 곧 夫婁(부루)에게 治水의 道를 받은 재미있는 이야기라. 「宛委山·覆釜山·茅山·會稽山」은 다 塗山의 別名이니, 神書를 얻음으로 宛委라 이름하고, 「夫婁(부루)」를 만남으로 「覆釜」라 이름하고, 原名은 「茅山」이니 塗山의 轉音이요, 「會稽」는 改名이니 神道를 稽考한 紀念이요, 「玄」은 朝鮮 五部의 玄部니 後世에 玄菟라 일컬은 자요, 「蒼水」는 滄海니 古代에 黃渤海를 滄海라 하였나니. 「夫婁(부루)」가 海路로 간고로 蒼水使者라 함이며 「州愼」은 곧 朝鮮이니, 音을 訛譯함이며 「赤繡衣」는 外國에 가려면 반드시 紋繡의 衣를 입는 扶餘의 故俗(後漢書 扶餘傳)이며, 夢中에 만났다 함은 이 글의 神聖함을 表示함이니, 「箕子(기자)」가 "하늘이 禹에게 洪範을 주었다" 함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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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朝 考證家 毛奇齡(모기령)氏가 가로되, 五行·五音·五禮·五福과 九歌·九功·九山·九州 等의 五·九 兩數로 文物에 씀은 夏禹 以前에 없는 것을 創用하였다 하니, 그 考據가 精詳하다 할지나, 다만 五·九 兩數로 지은 物名이 朝鮮에서 건너간 것을 말하는 자 없었다. 五行·五音 等만 아니라 곧 五帝의 名稱도 『黃帝中經』과 함께 支那(중국)에 건너간 것이라. 朝鮮 五部의 이름은 黃·靑·赤·白·玄인즉, 黃部의 大加는 곧 中央의 黃帝요 靑·赤·白·玄은 곧 東·南·西·北의 四帝니, 元來 神界에 五帝가 있어서 五色·五行·五音 等을 分掌하였다 하여 이 表準으로 人界의 治制를 定함이니[支那(중국)에서 軒轅氏를 黃帝라 하고 太皥氏를 靑帝라 하고 한 等이 夏禹氏가 五帝의 이름을 朝鮮서 輸入한 뒤에 傅會한 것], 『黃帝中經』이라 함은 곧 朝鮮 黃部의 聖經이라. 本 『春秋』에는 "禹中經을 얻어 治水하였다" 하고, 箕子(기자)는 "禹가 洪範을 얻어 治水하였다" 하며, 本 『春秋』에 또 가로되, "中經을 얻어 五行治水의 道를 얻었다" 하고, 箕子(기자) 洪範에는 「初一日 五行」이라 하였으니, 中經과 洪範이 다른 글이 아니라 다만 洪範은 箕子(기자)가 周武王을 위하여 大義를 譯述한 것이니, 中經의 全文은 아니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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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史와 『吳越春秋』를 參照한즉, 대개 檀君이 彭吳(팽오)를 시켜 洪水를 다스리고 다시, 支那(중국)의 水患을 애달피 여겨 「夫婁(부루)」를 보내 中經을 주고, 또 朝鮮의 洪水 다스릴 때에 쓰던 「橇梮」과 「巨斧」 等을 주어, 드디어 禹로 하여금 功을 이루게 한 고로, 禹가 곧 朝鮮을 仰慕하여 朝鮮의 制度를 본떠서 井田을 만들며 斗斛과 印信 等을 고치고, 그 죽을 때에도 會稽의 因綠을 잊지 못하여 自己 몸을 會稽山에 묻히게 함이라. 『墨子』는 "夏禹가 東으로 九夷를 가르치러 가다가 會稽山에서 죽었다" 하니, 이는 事實을 顚倒하여 배운 것을 가르쳤다 함이며, 近日 「章炳麟(장병린)」·「劉師倍(유사배)」 等(中國 現代學者로 最著名人)은 "夏禹의 五行은 곧 亂敎오 叛敎라" 하니, 이는 朝鮮의 恩을 잊으며 禹의 功을 저버림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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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論) 이에 對하여 附論코저 하는 바는 곧 「虞舜」의 일이라. 虞舜은 朝鮮于部(當時 山東의 殖民地)의 사람인 고로 國號를 「虞」라 하였으며, 朝鮮이 「舜華」의 産土인 고로 이름을 「舜」이라 하였다. 고로 支那(중국) 故書에도 舜을 매양 東夷人이라 함이라. 舜이 堯의 相이 되어 當時에 洪水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伯鯀(백곤)」을 내치고 「禹」를 써서 洪水를 다스리라 하였으니, 그런즉 「舜」이 아니면 「禹」를 쓰지 못 하였을 것이며, 「夫婁(부루)」가 아니면 禹를 가르칠 이가 없을 것이니, 고로 洪水의 다스림은 始終 朝鮮의 功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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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國內에 있는 「花郞」의 歷史는 올리지 아니하고, 外國에 있는 「花郞」 歷史를 略載하였나니, 이는 우리가 오늘에 읽은 바라. 슬프다. 花郞의 後身인 우리의 읽는 바, 『三國史記』 가운데의 花郞은 곧 「支那(중국)」人의 侮蔑한 筆法으로 記錄한 것이니, 어찌 花郞의 참을 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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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의 「皂衣」는 또 「金富軾(김부식)」이 『隋書』를 引用하여 「高句麗」의 「皂衣先人」(一名 翳屬仙人)이 있다 할 뿐이며, 『明臨答夫傳』에 「椽那皂衣明臨答夫」라 할 뿐이요, 「皂衣」가 무엇인 것은 말하지 아니한 바라. 그러나 『高麗圖經』에 가로되, "在家和尙은 袈裟도 입지 아니하며 佛戒도 갖지 아니하고, 自紵의 窄衣에 皂帛으로 허리를 두르고 閭閻에 居하며 妻孥를 두는데, 매양 公共한 일에 힘써 道路의 掃除와 溝洫의 開通과 城郭의 修築 같은 것을 從事하며, 戰爭이 일면 스스로 粮食을 가지고 同類가 團結하여 出戰하며, 다― 戰爭에 勇敢하여 每戰에 先登하나, 그 實은 刑餘의 役人이거늘, 다만 鬚髮을 깎음이 佛敎와 같은 고로 和尙이라 함이라" 하니, 이것이 高句麗 皂衣의 遺風이 될지라. 皂帛으로 허리를 두른 고로 이름을 皂衣라 함이며, 支那(중국)史書에 或 帛衣라 함이며, 仙人은 佛敎 以外의 딴 敎인 고로 「在家和尙」이라 함이니, 그런즉 「高句麗의 皂衣와 新羅의 花郞」이 다르지 아니하는 武鬼이라. 國家에 對한 信念이 굳은 고로 生死를 가벼이 하며, 俗務와 世情에 拘碍가 없는 고로 몸을 公益에 잘 바치며, 平日의 勞苦로 身體를 잘 단련하여 體育이 健勇을 함으로 戰亂에 나아감이 勇敢함이며, 「明臨答夫」가 무리로써 起事한 고로 地方的 革命으로 成功을 容易하게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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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徐兢(서긍)」은 外國의 使臣으로 그 遊覽 가운데 이런 말을 적었나니, 「金富軾(김부식)」이 어찌 보고 들은 花郞歷史를 모른다 하리오. 다만 儒敎徒의 色眼鏡을 씌워 놓기 爲하여 新羅 花郞史는 겨우 外國 사람의 記錄을 引用한 外에는 全部를 刪削하였고, 皂衣는 겨우 『隋書』를 引用하여 그 名稱만 썼을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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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此에 對한 硏究를 보건대, 「先人」은 高句麗史의 或 仙人이라 썼나니 「先人」·「仙人」은 다― 「선비」란 말의 音譯이요, 花郞은 「新羅樂老」의 「徒領」이라 하였나니 徒領은 곧 「도령」이란 말의 音譯이라. 後世에 와서 「先人」은 賤戶의 階級이 되어 그 이름은 在家和尙이라 하고, 「선비」란 이름은 儒敎徒가 차지하며 花郞은 百流에 伶官이 되어 歌舞의 一藝만(歌舞도 學藝의 一科) 맡으매, 도령님이란 이름은 斑族이 빼앗음이며, 皂衣가 花郞보다도 먼저 賤人이 된 고로, 「徐兢(서긍)」이 벌써 刑餘의 罪人에 比함이라. 오늘 八道에 남아있는 花郞(광대) 들과 咸鏡北道의 끼쳐있는 在家和尙들이 남이 저를 모를 뿐 아니라 곧 저희들도 그 先代가 國家의 中心됨 을 잊었나니 世主와 史家의 罪가 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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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富軾(김부식)」의 後에 난 우리들은 金富軾(김부식)이 記錄한 花郞과 皂衣의 事實을 어디서 發見하여 그 淵源을 찾으리오마는, 그러나 古記의 簡斷을 遺拾하며 『三國史記』의 反面에서 찾으면 그 彷彿한 것은 얻을 수 있나니, 대개 『高句麗史』의 「平壤者 仙人王儉之宅」은 곧 新羅 仙史의 첫머리니, 夫餘와 高句麗 때에 漢字의 音을 取하여 吏讀文이란 것이 처음 創始될 때에, 매양 漢音의 反切에서 그 머리도 떼며 그 꼬리도 빼어 或 兩字가 一音도 되며 或 三字가 一音도 되었나니, 「先人」이라 「仙人」이라 함은 다 兩字가 合하여 「선비」란 선의 音이 됨이요, 이윽고 『新羅』에 와서는 吏讀文이 比較的 發達되었으나, 그러나 그 完全히 쓰게 된 것은 「爲尼·爲也」 等의 「토씨」요. 名詞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漢字의 義譯을 더 主張하여 「斯盧」란 國名을 고쳐 「新羅」라 하며, 「居西干」·「尼斯今」이란 王號를 고쳐 大王이라 하였으니, 花郞은 곧 이때에 發達된 것이요, 仙史는 이때에 著作한 것이라. 고로 「先人」이란 名詞는 廢하고, 다만 「仙人」이라 함이니 仙人王儉은 곧 先人王儉이요, 先人王儉은 곧 「檀君」이시니 「皂衣先人」의 「始祖」라. 「花郞」이란 이름도 그 처음에는 「花郞」이라 아니하고 다만 「先人」이라 한 고로 「花郞淵源史」를 곧 仙史라 함이며, 『三國遺事』 花郞記에도 「眞興大王」이 卽位하고 神仙을 많이 崇拜하여 花郞 創設을 곧 神仙崇尙이라 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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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來에 仙人·神仙 等 字가 支那(중국)의 仙敎와 混同될 嫌疑가 있는 고로 特別히 「國仙」이라 「花郞」이라 한 區別名詞를 세우니, 國仙의 「仙」은 先人의 「先」의 音譯이요, 花郞의 「郞」은 「先人」의 意譯이라. 그러나 末世의 讀史者들이 매양 그 區別을 混同하여 곧 『輿地勝覽』의 江陵·襄陽 等地에 花郞四聖의 遺蹟을 읊은 文人의 著述들을 보면, 그 千篇 百篇이 모두 金丹·尸解 等의 意味로 지어 國仙을 곧 支那(중국)仙敎의 遺派로 알았나니, 오늘에 비록 「仙人王儉」의 「仙」은 「國仙」의 「仙」이며 「선비」의 「선」이며, 우리 「仙敎」의 「仙」이요 「支那(중국)仙敎」의 「仙」이 아니라 하면 그 누가 믿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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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라, 國粹의 무너짐이 이에 이르렀도다. 三郞도 高句麗 以前에 반드시 三仙이나 三仙人이라 이름하고 三郞이라 이름하지 아니한 것일 터인데, 「新羅」에서 先人의 이름을 郞이라 하면서 드디어 三郞으로 고치고 三郞寺를 지어 尊奉함이라. 고로 「檀君」은 仙史 가운데에 첫 「선비」요 三郞은 仙史 가운데 첫 「도령」이니, 三郞城은 高句麗 皂衣의 城郭 쌓은 곳이 巡歷의 길에 國防의 重地가 될 만한 고로 쌓은 것이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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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 徐天祐(서천우)― 『吳越春秋』의 說을 論駁하여 가로되, 『孟子』에 禹 八年 外에 在하였다 하고, 「禹貢」에는 十三載를 作하였다 하여 兩說이 不同하니, 대개 十三載는 곧 鯀의 九年 治水를 合하여 말한 것이니, 어찌 七年이 되도록 功을 이루지 못하리오. 또 馬融(마융)의 말을 引用하여 가로되, "禹― 治水 三年에 八州가 平하다" 하니, 이는 대개 鯀(곤)의 治水하던 해부터 計算하여 十二年 만에 「八州」가 平하고 十三年만에 「兗州」가 平함이라. 그런즉 禹가 불과 四年만에 成功하였거늘, 어찌 七年만에 겨우 「玄菟使者」의 神書를 받아 通水의 理를 알았으리요. 또 가로되, "禹가 越에 감은 治水의 後라, 禹가 治水할 때에는 越에 가지 아니한 고로, 禹貢이 적은 바, 南方山川이 今日과 같지 아니함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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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 써 하되, 「徐(서천우)氏」의 말은 다 武斷的이다. 鯀은 洪水를 막아 도리어 水害를 더하게 할뿐더러 禹貢은 禹의 功을 적은 글이니, 어찌 鯀의 治水와 合算하였으리오. 그 武斷이 (一)이요, 「東漢馬融」의 三年에 八州가 平하다 한 말은 더욱 根底 없는 말이니, 「禹」가 비록 神異하나 어찌 三年 동안에 洪水를 平하며, 또 三四年만에 成功하였다 하면 『孟子』가 「禹」― 八年을 外에 있었다 하였느뇨. 그 武斷이 (二)요, 「禹貢」에 적은 바, "南方山川이 무엇을 今日과 不同하다" 함을 가리킴인지 모르거니와, 만일 山川의 名號가 같지 아니하다 하면 北方山川도 그럴지며, 만일 水道와 丘陵이 變更되었다 하면 北方 山川도 그럴 지거늘, 이로써 治水할 때에 「越」에 가지 아니하였다 함이니, 그 武斷이 (三)이오. 「禹貢」에 明白히 禹가 江淮 等에 至하였거늘, 이는 「禹」가 親히 가지 아니한 것이라 하니, 그러면 무엇을 因하여 北方 某山·某水에 至하였다 함은 「禹」의 親至라 하고, 南方 某山·某水에 至하였다 함은 「禹」의 親至가 아니라고 區別하였느뇨? 이는 武斷함이 (四)라. 徐(서천우)氏의 말은 다만 "中國이 他人의 補助를 받아 治水하였다 함을 羞耻라" 하여 이같이 顚倒한 辨明이니, 此 所謂 尊華攘夷的인 春秋筆法을 가져 이런 僻論을 取한 것이라 하노라.
 
 

2. 第二章 三郞의 巡遊와 仙敎의 傳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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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 摩尼山의 三郞城은 傳說로써 檀君의 아들 三人이 쌓았다 하며, 그 속에 祭天檀은 「檀君」이 祭天하던 곳이라 하는 바라. 조그마한 一片城으로서 四千餘年을 지내오며 그렇게 傳하여 옴은 實로 奇異한 事이며, 「高麗 李叔詹(이숙첨)」의 三郞城詩에는 「漁樵猶說舊天京」이라 하니, 이 寂寞하고 외진 곳을 天京이라 하여 그 같이 尊慕하였음이 또한 奇異하며, 三郞의 歷史는 오직 이 城 하나 쌓은 것뿐인데, 新羅 때나 高麗 때에 다― 三郞寺를 지어 三郞을 崇拜하였으니 더욱 奇異하도다. 무릇 三郞의 이름은 城으로 傳함이 아니라, 城으로 傳하였다 하면 어찌 이 같은 崇奉을 받으리오. 故로 前史에 그런 말이 없지마는, 이는 곧 「新羅」의 「花郞」이나 「高句麗」의 「仙人」이 다― 三郞에서 淵源한 바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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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世 사람들이 皂衣의 淵源은 아는 이도 없거니와, 花郞의 事實은 오직 『三國史記』에 「新羅君臣 患無以知人 擇美貌男子 傳粉粧飾之 名曰花郞 欲使類群遊 知其邪正而用之」註2)『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羅人 患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擧用之 遂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 …… 困此知其邪正”란 말로 말미암아서 花郞은 新羅의 科擧法으로 알 뿐이니, 이는 모두 金富軾(김부식)에게 속아서 花郞의 「참」을 모름이니라. 대개 花郞은 檀君 때부터 내려오던 宗敎의 魂이요 國粹의 中心이거늘, 다만 羅末麗初에 儒敎徒에게 殘滅을 當하여 그 歷史도 알 수 없게 되었도다. 『輿地勝覽』에 가로되, 南湖에 있는 四郞의 碑가 胡宗旦(호종단)의 破碎한 바 되어 오직 그 龜趺만 남았다 하니 이는 그 正面에서 花郞이 儒敎徒에게 殘滅 입음을 볼 것이며, 『高麗史』에 가로되, "李知白(이지백)이 成宗의 華風을 樂慕함을 미워하여 花郞會를 中興하자" 하였으니, 이는 그 反面에서 花郞이 儒敎徒에게 殘滅 當하였음을 볼지로다. 『三國史記』를 지은 「金富軾(김부식)」은 그 僻見이 成宗과 胡宗旦(호종단)의 무리보다 더 甚함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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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所謂 三國史記를 지을 새, 花郞의 淵源과 花郞의 事實을 모두 빼어 永郞(영랑)·安郞(안랑)·南郞(남랑)·述郞(술랑)의 四郞은 곧 『高麗史』[金(김부식)氏의 一百年 後에 지은 史記]에까지 四聖으로 높인 바거늘, 「金(김부식)氏」는 그 姓名도 傳치 아니하며, 「花郞」의 講道에 聽衆이 매양 數千人이 됨은 곧 金(김부식)氏의 三百年 後인 李朝 『佔畢齊集』에도 보인 바거늘, 金(김부식)氏는 그 影響도 쓰지 아니하며, 「花郞」의 淵源되는 仙史를 던지고는 겨우 「崔孤雲(고운 최치원)」의 『鸞郞碑序』의 두어 마디를 引用하며, 「二百 花郞」의 聖蹟을 빼고는 「斯多含(사다함)」 等 四五 花郞의 戰功을 記할 뿐이었으니, 그 「花郞」에 對하여 痛惡하는 心事를 可히 볼 수 있다. 그러면 「金(김부식)氏」가 어찌하여 다만 몇 줄이나마 花郞의 일을 적었느뇨. 이는 다름 아니라 當時 곧 外國 사람들도 花郞의 이야기를 알아 곧 唐人의 『大中遺事』나 『新羅國記』에도 적은 바가 있은즉, 國內에 있는 花郞의 碑는 破滅할 수 있으며, 花郞의 世記나 仙史도 없이할 수 있었으나 外國에 傳한 것은 「金(김부식)氏」의 能力不及이며, 또는 外國이 적은 「花郞」의 歷史는 그 事實이 踈略하고 그 言辭가 嘲弄에 가까워 비록 傳하여도 儒家와 對峙할 것이 못 되도록 만들었나니, 이는 「金(김부식)此」가 어찌하고자 할 必要도 없이 생각하고 一切 事實을 削滅한 바라.
 
 

3. 第三章 神誌의 歷史와 預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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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誌(신지)」는 先輩들이 檀君의 史官이라 하니, 字義로 보면 神誌는 「神의 적음」인즉, 대개 後人이 檀君 때의 歷史를 尊重히 여겨 그 歷史를 『神誌』라 이름하고, 이에 歷史 지은 이까지 그 이름을 「神誌(신지)」라 함이라. 上古에는 매양 그 사람의 才調나 事業으로 곧 그 사람의 이름을 지은 일이 많으니, 神誌(신지)가 사람 이름 되는 同時에 글 이름으로 봄도 無妨하도다. 或은 神誌(신지)가 歷史를 지었을 뿐 아니라 곧 朝鮮 古代에 글을 낸 이라 하나, 그러나 八卦와 書契를 지은 『風部』의 「伏羲(복희)」氏는 곧 支那(중국)의 文字 지은 『蒼頡(창힐)』보다도 數百年 前이요, 「三皇內思文」을 傳한 『靑邱』의 「紫府先生(자부선생)」은 神誌(신지)보다도 數百年 前이니, 朝鮮의 「글」 있은 지 이같이 오랜지라. 고로 神誌(신지)와 同時代되는 夫婁(부루)가 中經을 傳할 때에 「金簡玉字」로 「銀編」에 裝飾한 책을 가짐이니, 어찌 다시 神誌(신지)가 지은 글이 있으리요. 고로 神誌(신지)의 歷史가 곧 우리 글로 지었을지나 글 낸 始祖는 神誌(신지)가 아니니라. 『神誌』의 本文은 다 兵火에 타고 오직 그 十句가 漢文의 譯本으로 傳하였나니, 『高句麗史』에 「神誌秘詞」라고 揭載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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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秤錘極器 秤幹扶蘇樑 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謢神精 首尾均平位 興邦定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註3)『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如秤錘極器 秤幹扶疎樑 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精 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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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함이라. 第四句 以上은 「扶蘇樑」·「五德地」·「百牙岡」 곧 檀君의 三京을 저울의 몸 달임 머리에 比하여 「三京」의 形勢를 말하고, 第五句 以下는 곧 檀君이 七十國을 征服하여 「三京」으로 分治한 事實을 말하고, 第九句 以下는 「三京」에 하나만 廢하는 날이면 朝鮮이 衰弱하는 날이라는 預示를 말함이요, 또 『西郭雜錄』에 「神誌」의 「秘詞」라고 揭載한 바 있으니, 辰巳聖人出 午未樂堂堂의 一句가 있나니, 『西郭雜錄』이 비록 信史가 아니나, 그러나 檀君이 「戊辰」 卽位하여 「乙未」에 唐藏에 移都하였다 한즉 「辰巳·午未」가 맞으며 「堂堂」은 『輿地勝覽』에 『唐藏坪』을 一名 『庄庄坪』이라 하니, 堂堂庄庄이 거의 同音인즉 或 唐藏을 堂堂이라 함이니, 兩句도 神誌史의 끼침이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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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誌(신지) 以前에 『朝鮮』에 글이 있었으니, 神誌(신지)의 史가 『朝鮮』 글로 지은 神誌(신지)의 史를 「朝鮮 사람」이 어찌 再譯하였느뇨. 대개 文字史의 飜覆이 많은 것은 「朝鮮族」(퉁구스족 全體 包含)이라. 『梁書』에 "新羅는 刻木으로 書信을 삼는다" 하니 刻木字도 한 글이거늘 後世에 傳치 아니하며, 三國時代의 「吏讀文」은 비록 漢字의 音節을 가져 만든 것이나, 또한 「페니키아」 文字가 「이집트」의 形字를 떼어 音文을 만듦과 近似하거늘, 이제 『三國遺事』에 傳한 「新羅 鄕歌」를 읽으려면 입을 벌릴 수 없는 곳이 많고, 「渤海」와 「女眞」이 다 文字가 있을뿐더러 女眞은 그 盛時에 곧 「女眞」字로 詩도 짓고 文도 지었거늘 그냥 없어지고, 「淸朝」에 와서 다시 「滿洲字」를 지었으며, 우리의 오늘에 쓰는 國文은 第三回로 지은 글인지, 第四回로 지은 글인지, 第五回·六回로 지은 글인지 모르는 바라. 그 原因을 생각하건대, (一) 保守性이 不足함이요, (二)는 支那(중국)·蒙古(몽골)·日本 等 方面에서 들어오는 大亂이 잦아 제대로 그 文化를 잘 아껴두지 못한 까닭이다. 하물며 上古時代에 金簡玉字로 만든 貴重한 책은 民間에 널리 傳布되지 못하고 오직 上流社會가 아는 바일 터인데, 後世에 嬴政(영정)·冒頓(모돈)·劉徹(유철)의 亂 같은 것을 만나 王宮이 불에 타고 國都가 깨어져 一切의 國寶가 다 부서져 없어질 때에 누가 이 책을 돌아보리오.
 
27
이것이 上代의 글이 없어진 原因이니, 그 가운데 『神誌』의 歷史가 남아 옴은 마치 印度의 太古 『梵境』이나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詩史가 다만 民間에 외워서 傳하던 것을 그 千年 後에 文士가 收集하듯이, 三國 末葉에 高興(고흥)·李文眞(이문진) 等이 이를 모은 바요, 當時의 朝鮮 글은 이미 없어지고 漢文이 盛行하므로 드디어 漢文으로 譯述함이니라. 漢譯이나마 이미 檀君의 歷史라 하여 全國이 貴重히 알아온 것이 어찌 겨우 그 十餘句만 남고 그 全部가 없어졌느뇨.
 
28
대개 『神誌』의 本文이 줄글이 아니요 귀글이라. 마치 『三國遺事』에 보인 新羅 노래와 같이 五字나 或 八字로 구절이 된 고로 「高興(고흥)·李文眞(이문진)」 等이 이에 의지하여 漢文으로 譯述치 않고 漢詩로 譯述함이며, 이미 譯述한 뒤에 그 簡潔蘊奧한 글이 民俗에 普及이 못 될까 하여 다시 『神誌史』의 本義를 敷演하여 『三韓古記』며, 『檀君古記』며, 『海東古記』 等의 各史를 줄글로 짓고, 新羅 居漆夫(거칠부)는 또 이 속에서 뽑아 仙史를 짓고, 支那(중국)의 陳壽(진수)·范曄(범엽) 等은 또 古記의 글을 얻어 『三韓列傳』의 이름을 『後漢書』·『三國誌』 等 가운데 揭載함이라.
 
29
或은 陳壽(진수)·范曄(범엽) 等이 記錄한바, 『三韓列國』이 朝鮮의 記錄에서 본 것이 아니요, 다만 제 마음대로 朝鮮의 나라 이름을 漢字의 音에 맞추어 쓴 것인 줄로 아나, 이는 그렇지 아니하니, 『三韓列傳』 이름 가운데 「斯盧」는 新羅史에 보인 바이며, 「不期」는 百濟 東城大王의 『圖書』에 보인 바이니, 그 三國 初代의 「雛形」의 「吏讀文」됨이 明白할뿐더러 하물며 伽倻國의 「伽」는 意譯하여 「狗」라 하며 「倻」는 音譯하여 「耶」라 하여 「狗耶國」됨이 꼭 「斯羅」가 「新羅」됨과 같이 더욱 朝鮮사람의 붓인 줄을 볼지니, 「陳壽(진수)·范曄(범엽)」 等이 어찌 이같이 朝鮮의 漢譯法을 알리오.
 
30
「三韓」의 淵源은 장차 第×章에 說明하려니와, 金富軾(김부식)이 그 所謂 三國史記를 지을 새, 이에 時代로는 三國 以後부터 끊어 그 以前의 王朝는 곧 高句麗·百濟의 先祖되는 「夫餘」도 빼며 疆域으로는 鴨綠江 以東부터 劃하였으며, 그 以西의 王國은 곧 高句麗의 後裔되는 「渤海」도 버리고, 그 列傳은 儒敎에 가까운 人物로 限하여 그 以外에 宗敎는 國仙의 四聖이나 「佛敎의 兩聖」도 한 자리를 주지 아니하며[高麗 睿宗 詔에 永郞(영랑) 等을 四聖이라 하고 高麗 仁宗의 詔에 元曉(원효)·義湘(의상) 等을 東方大聖이라 함], 그 世紀는 春秋筆法의 奴隸가 되어 「柳花聖母」의 修道나 「東明聖王」의 聖蹟은 一句도 올리지 아니하였으니, 곧 支那(중국)사람의 心理로 지은 史記라.
 
31
이 史記를 全國에 펴고 이에 『神誌』·『三韓古記』·『海東古記』·『仙史』·『花郞世記』·『舊三國史』·『新羅古史』 等은 몰아다가 宮中과 內閣에 두어 民間에 傳覽을 許諾지 아니하여 永世禁物을 만든지라. 故로 『金謂磾(김위제)』가 秘史 十句를 傳함도 內閣에서 『神誌史』를 얻어 본 뒤에 傳함이며, 李奎報(이규보)가 지은 『東明聖王詩』도 相國이 되어 內閣의 舊『三國史』를 본 뒤라. 이윽고 高麗 末에 蒙古(몽골)가 侵逼하매 더욱 上代 全盛의 歷史는 감추고 오직 金(김부식)氏의 『三國史記』로써 外人에게 보일 뿐이더니, 이윽고 本朝에 와서도 金(김부식)氏의 遺法을 지켜 內閣에 감춘 秘祠가 따로 있고 民間에 펴는 官史가 따로 있는지라. 故로 「李睟光(이수광)」氏가 內閣에 들어가 高麗 以前의 秘史를 많이 보았다 함이라. 壬辰倭亂에 漢陽 宮闕이 타며 內閣에 감춘 『神誌』 等 史도 따라서 다 없어졌도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에 本 國史冊에 依支하여 말하는 「檀君朝」의 歷史나 外國史에 의지하여 말하는 「檀君朝」의 歷史가 모두 『神誌』의 끼친 바니, 讀史者가 어찌 『神誌』의 恩을 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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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誌(신지)氏가 그 歷史 지은 밖에 預言이 많으니, 그 하나는 『震檀九變局圖』요 그 다음은 『朝鮮秘錄』이라. 『圖』는 萬世末來의 變局을 그린 것이요, 『秘錄』은 대강 그 그림을 풀이하여 말한 것이라. 그 속에 歷代의 政局 變更을 말하였을뿐더러 朝名과 人名도 말한지라. 高麗의 「虎頭宰相 崔瑩(최영)」도 『秘錄』의 奇驗에 놀랐으며, 『龍飛御天歌』 註에도 神誌(신지)가 李氏 得國을 預言함을 嘆服하였으니, 만일 預言이 있고 預言者가 있다 하면 「神誌(신지)」 같은 巨匠밖에 없을 것이로다. 그러나 李朝 太宗大王이 『秘錄』의 「李氏五百年」이란 말을 싫어하여 無學(무학)·河崙(하륜) 等으로 漢陽 八千歲說을 짓게 하고 그 圖의 『秘錄』을 불에 넣어 없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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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 二千數百年에 「支那(중국)」 秦의 「候生(후생)·盧生(노생)」이란 자가 「三神山」을 찾아 海上에 나왔다가 『亡秦者胡』란 『秘錄』을 얻어 秦始皇에게 올리매, 始皇이 이를 보고 萬里長城을 쌓으며 「匈奴」를 쳤으나, 마침내 「胡亥(호해)」에게 亡하니라.
 
 

4. 第四章 十月|| 三月|| 五月 等의 大會와 風俗 慣習의 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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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 三日」을 「檀君」 誕日이라 하여 이 날에 祭禮를 올림은 오늘까지 民間에 流行하는 바라. 「十月 三日」을 或 「太白」의 날이라 하며, 「香山」의 날이라 함은 「檀君」이 「太白」에서 내리심으로 일컬음이요, 「香山」은 『輿地勝覽』에 「太白山」을 곧 「妙香山」이라 한데서 訛傳함이라. 『文獻備考』에도 馬韓이나 「濊」나 「高句麗」나 「駕洛」이나 다 十月에 大祭를 行한다 하고, 高句麗는 十月祭를 「同盟」이라 이름한다 하였으니, 十月의 檀君 誕日의 祭禮를 行하여옴은 곧 歷史上 故事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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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高麗圖經』에 가로되, 「高麗」가 前朝 곧(高句麗) 十月 「同盟」의 大祭는 「八關齋」라 이름하여 十月 望日에 行한다 하고, 『高麗史』에 가로되, 每歲 十一月에 「八關齋」를 行한다 하였으니, 무릇 「檀君」 誕日 「同盟會」에 「八關齋」를 行함은, 대개 「三國」 末葉에 檀·佛 兩敎를 調和할 때에 매양 兩敎의 儀式을 混合한 것이 많으므로, 佛敎의 「八關齋戒」의 儀를 「檀敎」에도 씀이니 이는 疑心할 것 없거니와, 『高麗圖經』에는 「東盟」을 十月 望日이라 하여 날짜가 三日과 틀리고, 「高麗史」에는 十一月이라 하여 달이 十月과 틀리도다. 大祭의 月日을 後人이 마음대로 變更하지 못할 것이요, 『高麗史』의 十一月 「八關會」가 거의 해마다 「列王朝」의 年期의 보인 것인즉, 文字에 誤書한 것도 아니니, 그러면 어찌 이 같은 差異가 있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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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되, 「高麗」에 「兩八關會」가 있나니, (一)은 「西京八關會」니, 『高麗史』에 가로되, 「西京」에 「八關會」를 特設하고 「元祖」의 「御衣」를 두었다 하였나니, 이는 곧 「高句麗」 「東盟會」의 月日을 좇아 「檀君」을 祭하고 「東明聖王」과 「元祖」로써 配享함이요, (二)는 「中京八關會」니, 『高麗史』에 가로되, 「太祖 元年」 十一月에 有司― 請하여 前主의 遺制를 좇아 「八關會」를 行하였다 하니, 前主는 「弓裔(궁예)」를 가리킴이라. 「太祖」의 遺詔에 가로되, 「八關祭」로 「天」을 事하고 「燃燈祭」로 佛을 事하라 하니 대개 古代에 「天」과 「檀君」을 한 가지로 높인 고로, 『三國遺事』의 「王曆篇」에 「高朱蒙(고주몽)」을 「檀君」의 「子」라 하고 또 「天帝子」라 하며, 「權擥(권람)」의 『應製詩註』에 「解慕漱(해모수)」를 「天王郞」이라 하고 또 「檀君子」라 함이니, 「中京八關」이 이미 天祭의 禮儀인즉 이 또한 「檀君」에게 올리는 祭禮이요, 「西京八關會」가 곧 「高句麗」의 「檀君誕日祭」인즉 「中京八關會」는 곧 「新羅」에서 받드는 「檀君誕日祭」라. 어찌하여 兩王朝의 定한 「檀君誕日祭」가 이같이 다르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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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國祖」에 對하여 두 가지의 誕日祭가 있음은 「檀君朝」 末葉에 「列國」이 分立하여 統一이 깨어지매 各國의 曆法이 서로 다른 고로, 『後漢書』에 가로되, 「夫餘」는 臘月에 祭天한다 하고 『三國志』에는 殷正月에 祭天한다 하니, 殷正月은 곧 臘月이니 이는 「夫餘」가 十二月로 歲首를 삼음이며, 『後周書』에 가로되, 「百濟」는 「寅月」로 歲首를 삼았다 하니, 이로 보면 列國 가운데 百濟 以外에 正月로 歲首를 삼지 않은 나라가 많음이라. 曆法이 이같이 다른 고로 「檀君誕節」에 對하여도 「夫餘」는 十二月로 하며, 「百濟」와 「新羅」는 十一月로 하며 『馬韓』과 『高句麗』는 十月로 하여 各國이 서로 다른 바라. 이윽고 「高麗」가 「新羅」를 代하매 「西京」에는 高句麗의 定한 날로 쓰며 「中京」에는 「新羅」에 定한 날로 씀으로 八關祭가 둘이 됨이며 「西京八關日」을 『徐兢(서긍)』이 그릇 듣고 『圖經』에 올림이라. 그런즉 「新羅」와 「高句麗」에 「檀君」祭日이 다름은 그 祭가 다름이 아니라 曆法이 다름이거늘, 高麗가 그를 精하게 校正하여 어느 한 달, 한 날로 定치 않고 문득 兩祭日을 만들었으니 그 粗率함이 어찌 이에서 더하리오. 그러나 「本朝 五百年」 사이에는 아주 廢止하였으므로, 우리가 만일 民間의 習俗과 歷史의 傳說이 아니라면 「檀君」의 祭日을 이같이 明白하게 證明치 못할 것이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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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 三日 以外에도 祭日이 많으니, 『文獻備考』에 高句麗·新羅·馬韓·駕羅 諸國이 다― 「重三」(三月 三日)·「重五」(五月 五日)·「重九」(九月 九日)·「重元」(八月 十五日) 等 日로써 「天」 「祖神」에게 祭한다 하고, 『遼史』·『金史』·『北盟錄』 等 書에도 그 나라들의 典禮를 적어 가로되, 重三·重五·重九·重元 等 日로 「拜天儀式」을 行한다 하니, 무릇 後世에는 우리나라가 「契丹(거란)」·「女眞」 等과 風俗을 通할 機會가 없었은즉, 곧 「檀君朝」의 大統一時代에 되던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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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滿의 土人들이 매양 三月 十五日로 大祭를 擧行할 새, 南으로 「太白山」을 바라보고 눈물을 뿌리며, 그 傳說에 神話가 檀君古記에 적힌 것과 같은 고로, 或은 十月 三日은 檀君誕日이요, 三月 十五日은 檀君 「御天日」(崩日)이라 하여 史冊의 말한바, 三月 三日과 다르니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으며, 五月 五日·八月 十五日·九月 九日 等의 「天」과 「祖」에 對한 祭는 또 무엇을 紀念한 것인지 明白치 아니하나, 그러나 檀君을 祭함이 어찌 誕日만을 쫓았겠는가. 誕日과 崩日과 建國紀念日 等으로 또한 春夏秋冬 四季節에 祭日이 많았을 것이다(다시 考明을 要한다). 『高麗史』의 八關會 儀式이나 『金史』의 拜天儀禮가 거의 같다. 毬場 가운데 浮階를 쌓고(『金史』에 築臺라 함) 君臣百姓이 한 가지로 모아 祭禮를 行하는 바라. 『金史』에는 拜天儀를 「遼」의 舊俗이라 하였으며, 『遼史』는 遼亡 百年 後에 収拾한 歷史는 이런 典禮의 由來를 詳叙한 것이 없고, 『麗史』 八關會는 新羅 古事라 하고, 新羅 八關會는 高句麗의 「同盟會」가 끼친 것이요, 高句麗 同盟會는 夫餘 馬韓의 祭天儀니, 그 由來의 오래임을 알지라.
 
41
『麗史』 八關會 끝에 新羅의 古事대로 『百技와 歌舞』를 習한다 하고, 百技의 種類는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各史로 參照하여 그 몇 가지는 얻을 수 있도다. (一)은 「寒盟」이니, 寒盟은 그 이름과 같이 겨울에 얼음을 깨치고 물속에 들어가 左右 兩便이 갈라서서 물과 돌로 서로 쳐서 勝負를 가림이라. 『隋書』에는 高句麗가 年初에 이런 技藝를 傳習한다 하였으니, 이는 高句麗가 十月로 歲首를 삼은 때인 고로 年初라 함이며, (二) 「手搏」이니, 이는 곧 武器를 가지지 아니하고 白手白身으로 서로 搏擊하는 짓이니, 後에 日本에 傳하여 「柔術」이 되고, 支那(중국)에 傳하여 「턱견」이 되니라. 朝鮮 數千年 사이에 이를 매우 崇尙하여 다만 十月 三日의 大祭 後뿐 아니라, 곧 어느 名節이든지 매양 朝中의 文武를 갈라 兩便이 되어 「手搏」을 行하고 임금이 구경하더니, 이윽고 高麗 毅宗 때에 이 장난으로 말미암아 「文·武黨」의 싸움이 일어나매 곧 廢止시키고, (三) 「釼術」이니, 夫餘의 武士나 高句麗의 「先人」이나 新羅의 花郞이 가장 注重하던 바요, (四) 「弓矢」니, 太古에 支那(중국)人이 우리를 夷라 함은 東方의 大弓 멘 사람이라 하여 東夷라 함이니, 夷字가 大弓을 合한 자라 함이며, 弓矢에 精練한 재주가 優等하다 함이오, (五) 「擊球」니, 大會에 球場을 設施하여 老少男女가 國風을 이룰 만치 成習하였나니, 現代 東西洋人의 擊球가 그와 差異가 없을 것이다. (六) 「金丸」이니, 金丸으로 사람을 침이니, 崔孤雲(고운 최치원)의 「金丸詩」가 곧 會日에 金丸戱를 두고 지은 詩요, (七)은 走馬요, (八)은 「會獵」이니, 이미 百戱라 하였은즉, 이 밖에도 온갖 것이 많을지라. 그러나 右의 八者가 가장 技戱의 大宗일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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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의 禮武도 歷代에 얼마큼 變更이 되었을지며 技戱도 加減이 많았을지나, 그 大部分은 「檀君王朝」의 創始라. 後世에도 이 날에 이 모임이 있어 全國 人民이 크게 모여, 各히 所長의 技術을 내어 재주를 보여 勝負를 얻어 名譽를 날리려하던 光景이 매우 轟壯하였거든, 「檀君朝」 때에는 四方이 數萬里요, 五部九族이 累千百萬이니, 各 地方에 代表가 와서 莊嚴한 禮式을 다하고 드디어 「큰競技會」를 열어 數十日동안을 서로 勝負를 다퉈 勝利를 얻어 名譽의 銀幘을 얻어가지고 돌아가는 者는 一部內의 光榮이 되었나니, 그 盛況이 어떠하였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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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史』·『遼史』·『金史』·『匈奴史』·『蒙古史』 가운데 그 宗敎가 같고 風俗이 같고 言語가 같은 따위가 많은 것은, 대개 右의 各 名節의 競技會에 힘입음이 많았을지라. 渺然히 三四千年이 되고 서로 疎遠한 地方에 있지만 오히려 이 여러 겨레의 뿌리가 같은 것을 알 수 있으니, 聖人이 아니면 어찌 그 惠澤이 이같이 悠久에 미치리오.
 
 

5. 第五章 檀君 以後 三千年동안 五部 政權의 循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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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이 五部에 大加를 두고, 中部大加가 政權을 맡되 三年에 한 번씩 갈리며, 東·南·西·北 四部의 諸加가 갈아들게 한 뒤로, 거의 千年 동안을 아무 爭鬪 없이 내려와, 隣邦 學者들로 하여금 그 盛德大業을 노래하고 꿈꾸게 하였도다. 夫婁(부루)의 五行과 伏羲(복희)의 八卦가 支那(중국)에 輸入됨은 이미 論述하였거니와, 무릇 이 뒤 支那(중국)의 五行八卦에 對한 說明에 매양 朝鮮 五部의 治制에서 가져감이 많으니, 五部의 加를 別名을 『지』라 한 고로 後世 高句麗史에 馬加를 「莫離支」라 하고, 新羅史에 五大臣을 「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吉支·奇貝旱支」라 하며, 『蒙古史』에 典馬官을 「摩哩齊」라 하며 典羊者를 「和老齊」라 하였으니, 「支」와 「齊」는 다― 「지」의 音이니, 「檀君五部大加 別名」의 「지」에서 流傳됨이요, 支那(중국) 上古의 「帝」도 곧 「지」의 이름을 가져간 것이니라. 「지」가 加의 別名이라 한즉 「지」는 다 五道 長官의 이름에 不過하니, 上古 支那(중국)가 아무리 朝鮮 文明을 輸入하였다 한들 어찌 朝鮮 五道 行政長官의 이름인 「지」를 가져다가 그 大位에 앉아 萬民을 號令하는 자의 尊號 「帝」를 만들었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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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는 대개 「上古」의 黃部의 「大加」를 가리킴이요, 靑帝는 東方靑部의 馬加를 가리킴이요, 赤帝는 南方赤部의 狗加를 가리킴이요, 白帝는 西方白部의 牛加를 가리킴이요, 玄加는 北方玄部의 猪加를 가리킴이요, 三年小變은 五部 政權의 「三年」만큼 돌아감을 이름이요, 「十二年 大變」은 五部 政局의 「十二年」만큼 變更됨을 이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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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卦雜傳』에 「乾」은 「馬」가 되고, 「坤」은 「牛」가 되고, 「坎」은 「猪」가 되고, 「離」는 「狗」가 된다 함은 「乾」은 東方이요, 「坤」은 西方이요, 「坎」은 北方이요, 「離」는 南方이니, 고로 乾·坤·離·坎을 馬·牛·猪·狗에 分配함은, 東·西·南·北 四部가 馬·牛·猪·狗 四加에 分屬함을 가리킴이요. 「帝」가 「震」에서 出하여 「離」에 見하고 「兌」에 悅하고 「巽」에 齊하고 한다 함은, 震·離·坤·兌은 後天卦의 東·南·西·北이니, 責部 馬加가 第一次의 政權을 잡는 故로 第一의 帝 「震」에 出한다 함이요, 南部 狗加가 第二次의 政權을 잡는 고로 第二의 帝가 「離」에 見한다 함이요. 西部 牛加가 第三次에 政權을 잡는 고로 第三의 帝가 「兌」에 悅한다 함이요, 北部 猪加가 第四次에 政權을 잡는 고로 第四에 帝가 「巽」에 齊한다 함이요, 『五行大義』에 靑帝를 春이라 하며, 赤帝를 夏라 하며, 白帝를 秋라 하며, 玄帝를 冬이라 함은, 四部 政權의 循環이 春·夏·秋·冬 四時 같이 循環함을 가리킴이요. 「支那(중국)」를 華夏라 諸夏라 함은, 當時 支那(중국)가 朝鮮의 西南에 있어서 南部 大加의 管轄을 받은 故로 夏란 이름을 가짐이니, 이는 漢族의 支那(중국)가 아니요 江淮 沿岸이며, 山東·山西·直隸 等地가 다― 朝鮮의 殖民地요, 그 나머지는 苗族과 漢族의 차지라. 「苗族·漢族」을 오늘에 統稱하여 支那族이라 하나 當時에는 큰 區別이 있었도다. 「軒轅氏」는 支那(중국)族 中의 漢族으로써 「夫餘族」의 힘을 빌려 「苗族」을 물리쳐 비로소 漢族의 살림할 땅을 마련한 고로, 後人이 그 功을 생각하여 「朝鮮中部長官」의 稱號를 가져 써 「黃帝」라 함이요, 그 밖에 「帝嚳」·「帝堯」·「帝舜」 等의 「帝」도 그 地位가 「朝鮮의 部長官」에 不過한 고로, 「舜」이 「夫餘族」의 小民으로써 帝位에 앉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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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支那(중국)의 古書를 보아서 明白히 알 수 있도다. 『乾卦象』에 「群龍無首 - 吉」註4)『주역』에 의하면 “見群龍無首吉”로 되어 있다.이라 함은, 五部諸加에 特別히 首領이 없고 選擧의 制度로 서로 돌림을 가리킴이라. 「舜」이 朝鮮의 殖民으로 「堯」를 相하다가, 드디어 祖國의 制度를 써서 支那(중국)의 「世襲制」를 깨치고 君臣이 「禪授」하였으나, 三年 循環의 制를 定치 못하며, 「禹」가 「夫婁(부루)」의 「敎訓」을 받아 東洋 古代의 社會主義인 井田까지 行하고, 그의 죽을 때에 政權을 「伯益(백익)」에게 주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民德과 民智가 미치지 못하여 다시 世襲制가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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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 一千餘年 頃에 支那(중국) 「列國」의 몇몇 學者들이 朝鮮 五部의 政治를 理想하여 支那(중국) 專制의 狂瀾을 막으려 하여, 或 直接으로 「五帝의 聖治」를 論說하며, 或 間接으로 「堯·舜」의 善政을 讚述하여 世上에 傳하였으나, 이윽고 『檀君』 二千餘年 後부터 秦始皇·漢武帝의 氣焰에 눌려 敢히 드러나게 「五加制度」를 노래하지 못하며, 또 狹隘한 國粹主義가 橫行하여 朝鮮을 尊尙하는 學說이 行世되지 못하는지라. 고로 「荀悅(순열)」 等은 오직 「序卦·說卦」에 五帝의 循環과 「馬·牛·狗·猪」의 分治를 隱語로 말할 뿐이며, 「東方朔(동방삭)」 等은 神仙家言에 假託하여 「東方에 君子國」 『大人國』 等이 있다 할 뿐이며, 范曄(범엽)은 곧 「夫婁(부루) 夏禹」의 傳授한 事實을 記載할 새 그 辭意를 隱微하게 하였으며, 그 밖에 兩漢 諸儒들이 傳述한 『諸子百書』에 或 朝鮮의 政體와 「五帝」의 名號를 말한 것이 많으나, 다― 그 事實을 神界나 支那(중국) 古代의 일로 稱託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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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檀君 以後 千餘年 동안의 朝鮮은 그 治制의 善美가 古代에 가장이었으며, 文化의 發達도 隣邦各族이 模範할 만하게 되었나니, 만일 子孫된 者― 武力으로 그 文化를 保護 또 擴張하였다면, 朝鮮이 진실로 東洋文明史 首座를 占할 뿐 아니라 環球 全土를 獨占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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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字의 語源을 찾으면 이와 같이 곧 朝鮮의 五加에서 나온 것이며, 五加는 곧 共和政府의 長官이어늘, 支那(중국)에 譯傳하여 獨裁君主의 稱號가 되었도다. 堯·舜을 帝라 함은 오히려 그 禪援의 形式이 거의 五加循環의 美風에 가깝다 하려니와, 後世의 帝는 全國을 私産으로 알며 寶有를 一家의 固有物로 알아, 「지」의 本意에 틀림이 또한 멀었도다. 支那(중국) 古史에 禪受한 堯·舜은 「帝」라 하고 世傳한 夏禹는 「王」이라 하니, 오히려 그 本意를 알지 아니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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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에서는 「지」가 變하여 「치」가 되어 賤稱을 쓰나니, 마치 南道 「치」·北道 「치」·서울 「치」·시골 「치」의 類니라. 『鷄林遺事』에 가로되, 高麗人은 漱齒를 養支라 한다 하니(『康熙字典』에도 보임), 養支는 漢字로 「양치」를 譯함인즉, 莫離支·于旱支의 「支」도 音이 「치」요, 支那(중국)의 帝도 곧 「치」의 轉譯이요 「지」의 轉譯이 아니라 하는 이도 있으니, 이도 或 一說이 有理타 하노라.
【원문】第二編 檀君朝의 業績과 功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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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申采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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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