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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문화사) ◈
◇ 第三編 阿斯達 王朝時代와 檀君 以後의 分裂과 殖民地의 盛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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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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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編 阿斯達 王朝時代와 檀君 以後의 分裂과 殖民地의 盛衰
 
 

1. 第一章 檀君의 阿斯達 退守와 三京五部의 瓦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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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古의 歷史가 아무리 殘缺하였다 하나, 檀君 千餘年 동안은 內外 各史에서 조각조각 주워 모아 보더라도, 그 治制며 文化가 곧 東洋 各國의 으뜸이 되어, 隣國의 模範이 되어왔음을 보겠도다. 이는 이미 그 事實을 第一編 안에 論述한 바거니와, 그러나 이러하던 治制와 이러하던 文化를 가진 나라로서 어찌 黑暗의 빠져, 곧 檀君 一千年부터 二千一二百年까지 무릇 千數百年 동안이나 되는 그 사이에 하나도 자랑할 사람이나 자랑할 거리가 없어졌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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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三韓傳에 三韓 各族의 現狀을 말하며 가로되 「無大君長不善統禦」註5)단재(단재 신채호)는 이 인용문은 『후한서』 「삼한전」에 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있다. “無大君長”은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 邑君三老 經主下戶”로, “不善統禦”는 “國邑雖有主師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라 하며, 『史記』와 『漢書』의 「匈奴傳」에 匈奴와 東方의 關係를 말미암아 東方 各族의 歷史를 말하여 가로되 「百來莫能相一」註6)원전에는 “百有餘戎 …… 莫能相一”으로 되어 있다.이라 하였으니, 이 말들이 비록 남의 記錄이요 또 簡單한 記錄이나, 이에서 곧 朝鮮 古代의 衰微가 不統一로부터 나온 것을 알지로다. 檀君의 代가 이미 멀매, 다시 그 聖德을 펴서 本族을 統一하며, 外國을 感化하는 第二의 檀君이 나지 못하며, 그 功烈로 天下를 慴服케 하는 第二의 彭吳(팽오)가 나지 못하며, 그 文敎로써 外族까지 가르친 第二의 夫婁(부루)가 나지 못하며, 또는 思想의 雄이 되어 民族의 精神을 統一할 만한 第二의 神誌(신지)도 나지 못하고, 오직 同族 안에서 서로 싸울 새, 部와 部가 싸워 分裂하며, 五部가 몇몇 五部로 갈라지며, 族과 族이 싸워 九族이 몇몇 九族으로 나뉘며, 無數한 千百 小國들로써 大團結된 支那族이나 匈奴族들과 對峙하게 되니, 어찌 抵當하리오. 이것이 衰微의 原因이라. 그러나 檀君朝의 政治統一區域이 그와 같이 널리, 北으로 黑龍江을 지나며, 南으로 玄海를 건너며, 西로 支那(중국)의 沿海岸과 燕과 東蒙古를 抱內하며, 東으로 太平洋을 接하여 朝鮮의 文明을 建設하였나니, 이러한 統一이 어느 때 무너져 곧 外國人에게 不統一이란 嘲弄을 받게 되었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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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古史를 뒤져도 어느 때에 檀君朝의 統一이 깨졌다는 記錄을 볼 수 없고, 오직 古記에 가로되, 檀君 一千四十八年에 서울을 阿斯達로 옮겼다 하니, 대개 아사달의 서울 옮김이 곧 檀君의 統一이 깨어지던 처음이라 하노라. 阿斯達에 서울 옮김에 對하여 或은 이를 檀君 子孫이 箕子(기자)를 避하여 감이라 하나, 箕子(기자)가 兵力으로 朝鮮에 들어옴도 아니며, 또 朝鮮에 와서 大帝王된 일도 없을뿐더러, 또 阿斯達에 옮김은 一千四十八年이요 箕子(기자)의 들어옴은 一千二百十二年이니, 그 동안이 一百九十餘年이나 되나니, 어찌 一百九十餘年 前의 王朝가 一百九十餘年 後의 箕子(기자)를 爲하여 避하였으리요. 고로 이는 徐居正(서거정)의 『東國通鑑』에나 安鼎福(안정복)의 『東史綱目』에 이미 다 辨正한 일이라, 더 말할 것 없이 다만 한 가지의 疑問은 阿斯達이 곧 어느 곳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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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에 阿斯達은 「白州」(白川)에 있는데 或 開城 東에 있다 하였다 하고, 또 가로되 檀君(그 子孫)이 唐藏京으로 옮았다가 阿斯達에 退隱하다 하고, 『高句麗史』와 『輿地勝覽』에는 阿斯達은 文化 九月山이요 唐藏京은 그 山下의 庄庄坪이라 하매, 後人들이 다 後說을 쫓아 阿斯는 아홉(九)이오 「達」은 달(月)이니 阿斯達의 九月山됨은 疑心없다 하나, 그러나 古記에 또 가로되 檀君 後世가 扶餘로 옮았다 하여 許眉叟(미수 허목)의 『檀君世紀』나 安順庵(순암 안정복)의 「東史考異」에도 이를 쫓았으니, 만일 阿斯達을 文化 九月山이라 하면 이는 南·北의 兩檀君朝가 있을지며, 그렇지 않으면 阿斯達의 檀君朝가 다시 扶餘로 옮았음이라 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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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文化의 北遷한 일도 史冊에 보인 일이 아닐 뿐더러, 또는 文化 少數의 敗國殘民이 能히 五部 强族의 사이를 뚫어 數千里나 되는 扶餘까지 간다 함이 事勢에 안될 일이라. 故로 阿斯達을 九月山이라 함보다 차라리 扶餘가 곧 檀君 後世에 옮아간 곳인가 함이 事實이 되리로다. 그렇다하면 九月山이 阿斯達이며 山下의 唐藏京이라 함은 어찌되어 나온 말이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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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歷代의 史冊을 가지고 상고하건대, 朝鮮 北部의 地名이 南部로 옮아오고 그 地名의 옮아옴을 따라 그 古蹟까지 옮아온 일이 많은데, 그 原因을 캐건대, (一) 元來 檀君 五部의 制에 東·南·西·北·中 五部를 나누고 五部 안에 어떤 地名은 매양 같이 짓고, 그 머리에 東·南·西·北 等 字로 形容詞를 씌워 區別하였나니, 이를테면 鴨綠江이 三이니, 松花江은 北鴨綠이요 今 鴨綠江은 東鴨綠이라 한 類며, 蓋馬山이 二니, 千山은 西蓋馬요 白頭山은 東蓋馬山이라 한 類라. 이와 같이 같은 地名이 많다가, 이윽고 統一이 깨어지고 列國이 分立하여 나라마다 各히 그 地名을 그대로 두고 區別하던 形容詞를 없애매, 地名에 딸린 故蹟이 많이 混亂하였으며, (二) 新羅 景德王이 西北 等地를 모두 渤海에게 잃고서는 西北山川 州城을 그 이름을 고쳐 南方으로 옮길 새, 加瑟良은 東夫餘의 古都 琿春 等地어늘 곧 江陵이라 하며, 樂浪은 衛滿(위만)의 遺墟 「海城縣」이거늘 곧 平壤이라 하여 無數한 地名을 모두 이 붓으로 고쳤음에, 이에 北方의 故蹟이 土地名을 쫓아 많이 南方에 移徙하였으며, (三) 『輿地勝覽』은 더욱 本朝 偏安時代에 지은 책인 고로 더욱 景德王의 본에다 채를 더하여 成川을 卒本이라 龍岡을 安市라 東明聖帝의 古都를 平壤이라 하는 等의 미친 붓을 들으매, 드디어 우리 先祖의 故蹟들이 많이 제자리를 떠나 或 百里도 오며 或 千里도 왔나니, 文化 九月山이 阿斯達됨도 大槪 이런 原因에서 나옴이라. 고로 『三國遺事』의 白川 또 開城 等地에서 阿斯達을 찾음은 오히려 地名과 곧 故蹟을 옮기는 처음이라. 史家 들이 아직 躊躇審顧하는 態度를 가진 고로 確定이 없이 말하였으며, 『輿地勝覽』의 文化에서 阿斯達을 찾음은 이미 風氣가 偏安에 굳고 人心이 北方故疆을 잊은 지 오랜 고로, 이같이 勇敢하게 斷案을 내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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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그 形迹을 볼 것은 三危太白을 太白은 妙香山이라 하고 三危는 九月山이라 하지 아니하였는가. 太白은 白頭요 妙香은 아님은 先儒의 말도 있는 바이거니와, 三危로 말하여도 九月山이 아닐지라. 무릇 檀君이 朝鮮 全幅 數萬里 가운데서 그 가장 큰 山을 가리켜 神山으로 삼았을 터인데, 어찌 南方에서도 첫째로 크지 못한 九月山을 가져 白頭山과 對稱하였으리오. 이는 『輿地勝覽』이 이미 妙香을 太白이라 하고는, 그 比例로 九月을 三危라 함이며 三危는 阿斯達의 別名이요, 唐藏은 阿斯達 山下에 建設한 서울인 고로 三者를 同時에 옮김이 明白하다. 대개 三危는 內外興安嶺이요 太白은 白頭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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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에 있는 一京이 扶蘇樑이요, 太白의 西南에 있는 一京이 五德地요, 東南에 있는 一京이 百牙岡이요, 興安嶺의 總名이 三危요, 哈爾濱(하얼빈)에 가까운 部分의 別名이 扶蘇樑인 고로, 그 서울도 扶蘇라 이름이니, 扶蘇의 音이 「우스」라 함은 前述한 바거니와, 阿斯의 音도 「우스」에 가까우니 곧 우스의 音譯이며, 達의 音은 「달」이니 古語에 橋梁을 「돌」이라 하며 後世에 「달이」라 하나니, 「돌」이나 「달이」의 音譯이 達이 됨이니, 扶蘇樑·阿斯達은 다 「우스달」이라. 우스달이란 말이 變하여 아홉 달이 되고, 阿斯達을 音譯하여 九月됨인가. 音義의 變遷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檀君王朝가 第一期의 衰弱으로 阿斯達로 쫓겨 가고, 第二期의 衰弱으로 哈爾濱(하얼빈)으로 다시 쫓겨 갔다함은 史冊에도 보이지 않는 일일뿐더러, 事勢에도 안될 일이라. 고로 夫餘[哈爾濱(하얼빈)]가 곧 阿斯達, 阿斯達이 곧 夫餘니, 한 곳이요, 두 곳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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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三京은 檀君이 이를 두시고 神誌(신지)로 하여금 萬世에 豫示的 訓戒를 주시되, "三京은 곧 저울의 몸과 다리임과 머리와 같아 하나라도 廢하면 王業이 기울어지리라" 하셨나니, 이제 南方의 兩京을 버리고 北方의 一京을 가져 이 땅에 偏安코저 하니, 이것이 萬一 兩京이 叛亂하여 檀君朝와 分立이 아니면, 곧 檀君朝에서 兩京의 長官에게 權利를 너무 주어 그 末流의 禍가 드디어 檀君朝의 命令을 받지 아니함이니, 이 어찌 分裂의 처음이 아니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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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은 곧 汗이요, 三韓은 곧 三汗이며, 三汗은 곧 三京의 長官이니, 三汗이 分立하여 三國이 됨이라 함은 第一編에 이미 말한 바거니와, 대개 三汗이 三國됨은 이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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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古記』가 없어짐으로 後人들이 다만 金富軾(김부식)의 『三國史』와 陳壽(진수)·范曄(범엽) 等의 「三韓傳」을 가지고 三韓의 事實을 찾는 고로, 衛滿(위만)의 뒤에야 三韓이 난줄 아나, 그러나 王符(왕부) 『潛夫論』에 "韓西가 衛滿(위만)에게 쫓겨 달아났다" 하니, 이는 三韓이 衛滿(위만)의 때에도 있던 證據며, 司馬遷(사마천) 『史記』에 "眞番朝鮮이 前燕 全盛時에 侵略을 當하다"라 하고, 徐廣(서광)의 註에 "眞番은 一作眞莫(音말)이라" 하고 史記索隱에 "燕이 眞番二國을 침이라" 하니, 그런즉 眞은 辰韓이요, 番은 卞韓이요, 莫은 馬韓이니, 當時에 漢字로 音譯한 고로, 辰韓을 秦韓이라 卞韓을 弁韓이라 馬韓을 慕韓이라 한 책이 많은즉, 眞番은 辰卞이요 眞莫은 辰馬이다. 辰卞馬 三國을 가리킴이니, 이는 三韓이 衛滿(위만) 前 몇 百年에 벌써 있는 證據며, 『管子』의 「秦夏」는 곧 辰韓이요, 『尙書大傳』의 「扶餘馯貊之屬」의 馯은 곧 三韓의 韓이니, 이는 檀君 一千年 頃에 三韓이 벌써 그 名義로써 支那(중국)에 交通있는 證據라. 韓의 名義로 外國과 交際함은 곧 外交를 自由로 함이요, 外交를 自由로 함은 곧 王朝와 分離함이며, 三韓이 王朝와 分離함은 곧 三京의 分立이라. 이는 檀君王朝의 統一의 末路니라. 三京이 비록 分立하였다 하나 阿斯達 곧 扶蘇樑의 一京은 王明의 차지가 되었은즉 三韓의 차지는 어디 어디이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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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燕은 東으로 遼東眞番의 利를 산다" 하고, 『漢書』에 "眞番의 利가 燕과 相接하다" 하니, 遼東 等地가 辰·卞 二韓 땅이요. 『說文』에 「樂浪潘國」이라 하고 『漢書』에 遼東汗縣이라 하니, 番汗은 卞韓이요 潘國은 卞國이니, 潘汗縣이 遼陽海城의 等地인즉 卞韓은 곧 五德地의 京에 서는 자요, 『漢書』에 辰國이 韓을 通하려다가 右渠(우거)의 막은 바가 되었다 한즉, 衛滿(위만)의 東이 辰韓이니 辰韓은 곧 百牙岡의 京이요. 馬韓은 『晋書』에 "挹婁의 곁에 寇莫汗(寇漫汗이라고도 함)國이 있다" 하고, 『魏書』에 "勿吉의 곁에 大莫盧(豆莫婁라고도 함)가 있다" 하니, 莫汗은 馬韓이요 莫盧는 馬韓 五十餘國 가운데의 莫盧요 挹婁는 勿吉의 別名인데 挹婁는 夫餘 東北 千餘里에 있다 하였은즉 馬韓은 扶蘇樑의 東北이니, 『史記』·『漢書』·『晋書』 等이 비록 後代의 글이나 그 가운데 적은 地名들은 대개 古代의 끼친 것이리니, 이는 舊三韓의 자취라. 만일 『三國史記』에 적힌 三韓은 遷徙한 三韓이며, 陳壽(진수) 等 『三國志』에 적힌 三韓은 거의 新舊 三韓의 일을 混同하여 적은 것이 있나니, 이는 뒤에 따로 論述코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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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京이 이미 分立하매, 이에 五部 九族들도 모두 어지럽게 紛爭하는 판이 되어 黃·靑·赤·白·玄·畎·于·樂浪·帶方·句麗 等 列國의 이름이 史冊에 보이기 시작하니라.
 
 

2. 第二章 箕子東渡와 支那의 宗敎變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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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 一千二百十二年에 支那(중국)의 箕子(기자)가 亡命하여 朝鮮에 들어오고, 그 끝에 支那(중국) 안에서 朝鮮殖民과 支那(중국)族 사이에 宗敎的 戰爭이 일어나 數百年의 亂根을 세웠는데, 舊史에는 겨우 箕子(기자)의 들어온 말만 있고 그 들어온 原因이며 그 關係로 일어난 戰爭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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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강 陳述하면 夏禹가 檀君의 神經과 五行을 夫婁(부루)에게서 받음은 第一編에 말한 바거니와, 夏禹가 그 敎를 支那(중국)에 펴매, 支那(중국)族들이 혹 禹를 反對하는 者가 없지 않으나, 그러나 禹의 洪水 다스린 功烈이 높아 敢히 겨루지 못하고 드디어 禹가 夏王이 되어 支那(중국)를 統一함에 이르더니, 이윽고 禹가 죽고 그 太子 啓(계)가 王位를 이으매, 有扈氏(河南省 等地의 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禹의 敎를 받지 아니하거늘, 啓(계)가 이에 「甘誓」(『尙書』의 篇名)를 지어 有扈氏의 罪를 聲討하여 가로되, 三正을 怠棄하며 五行을 威侮한다(「甘誓」에 보임) 하니, 三正을 舊註에 子·丑·寅 三正이라 하였으나 子·丑·寅 三正은 夏正·殿正·周正을 이름이니, 啓(계)는 夏王이라 股周 以前의 일이니, 어찌 子·丑·寅 三正이 있으리오. 고로 三正은 곧 正德과 利用과 厚生이니, 이는 「大禹謨」(『尙書』의 篇名)에 보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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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德은 三神의 道요, 利用은 水·火·金·木·土 五行의 用法이요, 厚生은 井田으로써 人民의 生産을 豊富케 함이요, 五行은 곧 水·火·金·木·土니 三正의 一이지만, 이로써 五帝의 德에 分配하여 水德·火德·木德·金德·土德이라 하며, 五部의 職에 分掌하여 司水·司火·司金·司木·司土라 하여 그 用이 가장 많으며, 또 夏禹氏가 五行으로써 洪水를 다스린 故로 따로 條目을 세워 人民을 가르침이요, 이에 反對하는 有扈氏를 침이라. 有扈氏가 啓에게 敗함에 支那(중국) 全幅이 다 慴伏하여 모두 三正·五行의 敎를 받으니, 支那(중국) 안에 있는 朝鮮殖民들은 宗敎에 同感으로 하여 支那族과 親近하며, 支那族들은 더욱 朝鮮사람을 歡迎하여 支那(중국) 沿海岸에 朝鮮殖民들이 날로 增加하더니, 檀君 五百年頃에 禹의 後孫 桀이 暴虐하매 殷王 湯이 朝鮮殖民의 援助를 얻어 桀을 대신하여[劉向(유향)의 『說苑』에 "九夷의 군사가 桀을 돕지 아니하매 湯이 이에 桀을 치다 함"] 王이 되어, 또한 夫婁(부루)와 禹의 遺訓을 쫓아 三正과 五行을 높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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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檀君王朝가 阿斯達에 옮겨 三京이 分立하고 五部가 爭雄하여 支那(중국) 안에 있는 朝鮮殖民들이 母國의 援助가 끊어지며, 支那族 가운데에 有扈氏 같이 三正·五行을 反對하여 朝鮮의 宗敎를 떠나 따로 一派를 세우고 全 支那(중국) 안에 朝鮮殖民의 자취를 끊으려는 梟雄들이 없지 아니하나, 다만 殷朝가 主權을 가져 골똘히 朝鮮에 기울어질뿐더러, 또한 殷湯 뒤 그 六百年 동안에 賢聖한 君王들이 六七이나 되어 德澤이 民間에 젖어 强悍한 諸候도 敢히 마음을 내지 못하다가, 이윽고 檀君 一千一百八九十年 頃에 周候(陝西省 안) 姬昌(희창, 文王)이 殷紂를 치고 이를 대신하여 周가 全 支那(중국)에 君臨하려 하며, 이에 伏羲氏의 八卦를 가져 殷의 五行을 攻擊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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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五行과 八卦는 다 朝鮮에서 輸入하여 五行으로써 實物에 應用하고 八卦로써 理諦를 說明하여 서로 調和한 夏禹의 連山易과 殷湯의 歸藏易이 있거늘, 이제 姬昌(희창)이 五行을 빼고 따로 八卦를 敷演하여 六十四卦를 만드니, (一) 殷의 宗敎를 攻擊함이요, (二) 朝鮮의 思想을 反對함이라. 殷王 紂가 듣고 크게 겁내어 昌(희창)을 잡아 美里 獄에 내리나 昌(희창)이 屈服하지 않고 獄中에서 다시 六十四卦의 卦辭를 지으며, 昌(희창)의 家臣 散宜生(산의생)은 財寶를 紂에게 바쳐 昌(희창)을 贖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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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희창)이 周에 돌아가 날로 殷의 國을 치나, 紂가 淫昏하여 깨닫지 못하고 다만 宮室과 器用이나 치례하며 妖婦 妲己(달기)를 사랑하여 政事에 마음을 두지 아니함으로, 王族 箕子(기자)·比干(비간) 等이 諫한즉, 紂가 이를 듣기 싫어하여 比干(비간)의 가슴을 쪼개거늘, 箕子(기자)가 紂의 죽임이 될까 하여 佯狂하였으나 마침 갇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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數十年 後에 支那(중국) 諸國이 殷을 버리고 姬昌(희창)과 結托하는 자 거의 三分의 二나 되더니, 姬昌(희창)이 죽고 그 아들 發(발, 武王)이 이 자리를 이으니, 發(발)은 昌(희창)보다가 더 勇武한 怪桀이라. 곧 昌(희창)을 높여 文王이라 하고, 六十四卦敎에 歸依한 八百 諸候를 거느리고 木製한 偶像을 軍中에 세워 昌(희창)의 神位라 이름하고 殷紂를 치니, 殷紂가 너무 殘暴하던 탓에 곧 五行을 信仰하는 나라들도 援助하지 아니하였다. 드디어 發(발)과 孟津에서 싸워 크게 敗하여 피가 흘러 내가 된지라, 紂가 鹿臺에 올라 自殺하고, 發(발)이 殷의 서울 朝歌에 들어와 大赦를 行하니, 箕子(기자)도 이에 놓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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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발)이 비록 六十四卦敎의 諸國의 宗主가 되었으나, 오히려 箕子(기자)를 찾아 五行傳授의 源流와 義理를 묻거늘, 箕子(기자)가 이에 簡畧하게 그 源流를 說明하여 가로되, 鯀이 洪水를 다스릴 때 洪水를 막음에, 五行의 原理에 違反함으로 天帝가 怨하사 「洪範九疇」를 주지 아니하고, 禹가 나서 「洪範九疇」를 天에게 받음이라고 하였다. 이에 「洪範九疇」의 차례를 따라 (一) 五行은 水·火·木·金·土 (二) 五事는 貌·言·視·聽·思 (三) 八政은 食·貨·祀·司空·司寇·賓·師 (四) 五紀는 歲·日·月·星·曆 (五) 皇極(마음) (六) 三德은 正直·剛柔 (七) 稽疑는 卜·筮 (八) 庶微은 雨·暘·燠·寒·風 (九) 五福과 六極은 壽·富·康寧·攸好德·考終命·夭死·疾·夢·貧·惡 等 九類의 義理를 說明하여, 하늘과 사람의 서로 感應하는 것을 말하였더라. 九疇는 곧 九類요 洪範은 곧 大道니, 「洪範九疇」는 곧 九類요 大道요, 天帝는 곧 檀君이요, 天이 禹에게 「洪範九疇」를 주시다 함은 곧 夫婁(부루)를 天使로 말함이니, 이는 곧 『吳越春秋』에 이른바 禹가 玄菟使者를 꿈에 보았던 事實를 가리킴이라. 「洪範」 全篇이 모두 五行相應의 理를 말하였은 즉, 洪範이란 글은 곧 夫婁(부루)의 주신 바와 夏禹의 받은 바, 五行을 쓴 「黃帝中經」의 金簡玉字를 箕子(기자)가 譯述한 것이니, 곧 「中經」의 一部分이요 全文은 아닐지라. 슬프다! 비록 譯述이나마 檀君의 經이요 朝鮮 五千年의 古書거늘, 「洪範」의 硏究로 終身한 朴玄石(현석 박세채)·李星湖(성호 이익) 諸先輩들이 이 關係를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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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기자)가 「洪範」을 陳述함은 姬發(희발)이 悔悟하여 五行에 歸依하고 殷朝를 恢復케 할까 함이나, 이는 한 殷朝 遺臣의 哀痛에서 나온 空想이요 實際에 보일 수 없는 일이다. 箕子(기자)가 곧 姬發(희발)의 頑逆함을 깨닫고 이에 朝鮮으로 向하니, 뒤를 따른 者 五千餘人이나 되었다. 箕子(기자)가 朝鮮에 들어오는 뜻은 (一) 宗敎的이니, 高句麗가 老敎를 높이매 惠亮(혜량) 禪師가 新羅로 달아나며, 印度가 釋敎를 壓迫하매 達摩(달마) 大聖이 支那(중국)로 쫓기듯이, 姬發(희발)이 三正·五行을 排斥하므로 箕子(기자)가 그 信仰의 祖國되는 朝鮮으로 向함이니, 古代에는 宗敎 感情이 매양 政治보다도 더하였다. (二) 政治的이니, 高麗가 亡하매 李牧隱(목은 이색)이 明에 請援하며, 朱氏가 亡하매 黃黎洲(여주 황종희)가 倭에 乞兵하듯이, 殷朝가 周에게 亡하매 箕子(기자)가 朝鮮으로 들어옴도 이와 같은 일이니, 古代의 君臣의 義가 氏種의 區別보다도 더하나니, 箕子(기자)가 朝鮮으로 오는 것이 그때 形便으로 오히려 當然하다 하겠다. 當時 朝鮮이 箕子(기자)에 對한 歡迎도 想像할 수 있나니, 同敎의 國人이며 隣邦의 老師며 殷朝의 忠臣이며 亡命한 孤客이니, 이러한 吾敎의 賢師로서 末路의 悲劇에 빠졌으니, 어찌 同情의 느낌이 없으리오. 그러므로 平壤 一隅에 郡邑을 주어 諸候를 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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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遷(사마천)의 「武王封箕子」註7)『사기』에는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으로 되어 있다.라 함은, 朝鮮을 誣告함일 뿐더러微子(미자)를 汚辱함이라. 箕子(기자)가 일찍 微子啓(미자계)와 王子 比干(비간)더러 『我는 臣僕이 아니 되리라』 하였는데 어찌 武王의 封爵을 받으리오. 고로 班固(반고) 『漢書』에는 이런 말을 빼고 다만 箕子(기자)가 朝鮮에 避地하였다 하고, 本朝 張谿谷(계곡 장유)이 班固(반고)를 引證하여 司馬遷(사마천)을 論責하니, 그 所見이 至當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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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後人이 매양 箕子(기자)가 帝王이 되어 朝鮮 全國을 가진 줄로 앎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다. 箕子(기자)가 비록 聖人이라 하나, 어찌 外國의 나그네로 들어오는 길에 곧 帝王이 되리오. 强土를 넓히어 帝王의 權力을 갖게 됨은 後世 子孫의 일이요 箕子(기자)는 오직 한 小諸候에 不過하였다. 當時의 諸候는 곧 人民의 選擧로 하는 자도 있으며 世襲으로 하는 자도 있으나, 그 結果는 매양 王朝의 冊封을 받아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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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檀氏王朝는 扶餘로 옮겨 命令이 온 곳에 行치 못한즉, 箕子(기자)의 封爵은 王朝에서 받은 것이 아니며, 平壤은 今 平壤이 아니라 五德地 곧 北平壤의 附近 廣寧縣이며, 廣寧은 當時 卞韓의 管境이니, 箕子(기자)가 王될 때에 반드시 卞韓과 關係가 있을 것이다. 만일 箕子(기자)가 帝王이 되었다 하면 이도 箕子(기자)를 誣辱함이니, 箕子(기자)가 이미 姬發(희발, 周武王)과 深仇가 있는데, 朝鮮의 帝王이 되고도 姬發(희발)에게 問罪치 못하였다 하면, 어찌 箕子(기자)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면 箕子(기자)가 諸候가 되어 姬發(희발)에게 問罪하지 못함은 可할까? 그렇다. 그 때의 諸候는 한 고을의 郡守니, 箕子(기자)는 곧 平壤의 郡守라. 아무리 復讎할 생각이 간절한들 平壤郡守가 어찌 支那(중국)에 對하여 宣戰할 權利가 있으리오.
 
29
매양 腐儒들이 말하기를, 姬發(희발)은 天命을 받은 고로 箕子(기자)가 深仇로 볼 수 없다 하나, 그 所謂 天命이란 자가 무엇을 標準함이뇨. 成功하는 자를 天命 받은 자라 하면 이는 强權이 곧 天命이니 是非가 없을지며, 正義를 가진 자가 天命을 가진 자라 하면 正義란 것이 또 어떤 것인가. 民心을 따라 行하는 者가 正義라 하면 姬發(희발)이 殷을 친 뒤에 人心이 殷을 생각하여 殷京의 人民이 다 叛하였으니, 姬發(희발)의 正義가 어디 있으며, 暴君을 벤 자가 正義라 하면 紂가 비록 殘暴하나 賢聖한 임금이 六七代나 되던 王室을 없이함이 무엇이 正義며 前代 六七 聖君의 德政이 紂의 殘暴를 救하지 못함이라 하면 어찌 하여 姬發(희발)이 殷室의 大聖 箕子(기자)·微子(미자)를 세워 聖君의 遺統을 잇게 아니하였으며, 民心이 곧 天心이라면 當日에 紂가 速히 죽고 箕子(기자) 같은 大聖이 서기를 바람이 民心이니, 어찌 하여 天心은 民心과 달라, 紂의 在位한 壽命은 二十年 三十年이나 길게 하여, 기어이 그 惡이 차서 西周 小酋에게 亡하게 하였느뇨.
 
30
그런즉 天命 때문에 箕子(기자)가 姬發(희발)을 深仇로 볼 수 없다 함이 愚夫의 말이며, 만일 姬發(희발)이 武庚(무경)과 微子(미자)에게 封爵을 주어 殷祀를 끊지 아니한 고로 箕子(기자)가 姬發(희발)을 深仇로 알 수 없다 하면, 곧 末世의[三十八字(畧)에] 일도 무엇이 姬發(희발)과 다르뇨. 만일 全國이 벌써 姬發(희발)의 손에 들어가 箕字(기자)가 深仇로 알아도 쓸 데 없는 고로 深仇라도 道를 傳하고 封爵을 받았다 하면, 勢力 밑에는 大節이 없음이 可할가. 어느 모로 보든지 箕子(기자)가 姬發(희발)을 深仇로 알지 아니하였다 하면 賤儒俗客의 말이다.
 
31
그러므로 箕子(기자)가 洪範을 說明함은 다만 自己의 敎理가 이러함을 表示할 뿐인데 그 內容으로 或 伯夷(백이, 伯夷는 다음 節에 보임)가 姬發(희발)을 諫하던 心事의 한 部分도 가짐이며, 箕字(기자)가 朝鮮에 들어옴은 救援을 請한 길이나 다만 朝鮮이 當時에 큰 사나이가 없어 箕字(기자)의 請을 願하여 군사를 들어 姬發(희발)을 베지 못함이니라.
 
 

3. 第三章 孤竹 遺臣 伯夷 叔齊의 餓死

33
孤竹은 『修文備史』에 九族의 一이라 하니, 대개 朝鮮의 西藩이요 檀君 五部의 後孫이니, 孤竹 建國(今 永平府 等地에 있던 나라)의 처음은 史冊에 보임이 없고, 오직 伯夷(백이)·叔齊(숙제) 兄弟의 일로써 비로소 歷史에 보였나니, 伯夷(백이)·叔齊(숙제)도 또한 偉人이라 하겠다.
 
34
伯夷(백이)·叔齊(숙제)의 祠堂이 海州 首陽山에 있는데, 先儒들이 이로써 伯夷(백이)·叔齊(숙제)의 餓死한 곳이 곧 海州 首陽山이라 하나, 그러나 海州 首陽山도 또한 朝鮮이 古代 疆土를 잃어 다시 孤竹을 多勿하지 못하고는, 드디어 首陽山을 海州로 옮기며 伯夷祠를 그 山에 지어 後人으로 하여금 孤竹의 이름이나마 잊지 말게 한 消極的 記念이어늘, 史家들이 이에 累百年의 뒤에 앉아, (一) 孤竹의 本源을 모르며, (二) 首陽山의 옮긴 原因을 모르고, 이에 伯夷(백이)·叔齊(숙제)의 末路가 朝鮮에 있었다 한다.
 
35
支那(중국) 史家들이 孤竹을 朝鮮의 九族인 줄로 알았으나, 또한 伯夷(백이)의 事實을 誣辱하여 殷의 遺臣인 고로 殷을 위하여 守節함이라 하는도다. 伯夷(백이)·叔齊(숙제)는 箕子(기자)와 한 때라, 伯夷(백이)·叔齊(숙제)도 孤竹의 王子인즉 그 地位가 殷의 箕子(기자)와 같으나, 箕子(기자)는 先王의 庶子인 고로 王이 못되었거늘, 伯夷(백이)·叔齊(숙제)는 先王의 嫡子라 王位를 버렸으니 그 出身이 다르고, 伯夷(백이)·叔齊(숙제)가 武王이 殷을 침을 反對하여 그 意見이 箕子(기자)와 같으나 箕子(기자)는 支那(중국)族이거늘 伯夷(백이)·叔齊(숙제)는 朝鮮族이니 그 種姓이 다르고, 伯夷(백이)·叔齊(숙제)가 異族의 西周에 감이 箕子(기자)가 朝鮮에 들어옴과 그 踪跡이 같으나 箕子(기자)는 朝鮮에서 늙었거늘 伯夷(백이)·叔齊(숙제)는 西周를 버렸으니 그 末路가 다르고, 宗敎는 같으나 伯夷(백이)·叔齊(숙제)는 孤往하였거늘 箕子(기자)는 佯狂하였으며, 貞節은 같으나 伯夷(백이)·叔齊(숙제)는 餓死하였거늘 箕子(기자)는 壽終하여, 두 편의 處地와 行事의 同異를 따라 그 性質을 볼지라.
 
36
이제 伯夷(백이)·叔齊(숙제)의 歷史를 말하고자 한다. 伯夷(백이)는 孤竹王의 長子요, 叔齊(숙제)는 王의 季子라. 兄弟가 다 天性이 潔峭하여 뜻에 合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앉으면 마치 朝衣朝冠한 사람으로 塗炭 위에 앉음과 같이 여겨 곧 달아나더니, 이윽고 父王이 죽을 때에 叔齊(숙제)를 사랑하여 遺命으로 王位를 이으라 하였으나, 叔齊(숙제) 말하기를 兄弟의 체례를 잃을 수 없다 하여 伯夷(백이)에게 사양하는데, 伯夷(백이)는 父命이 아니라 하고 달아났다. 叔齊(숙제)도 또 伯夷(백이)를 따라서 달아났다.
 
37
孤竹의 사람들이 할 수 없어서 先王의 中子를 세우거늘, 伯夷(백이)·叔齊(숙제)가 함께 손을 이끌고 北海에 다다라 살다가 周侯 昌(창)의 治積을 듣고 다시 西周로 向하니라. 伯夷(백이)·叔齊(숙제)가 異族으로써 禍心을 가진 周文王에게 돌아감은 한 疑問이나, 그러나 그의 武王을 排斥함을 보면 다만 養老의 恩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무슨 懷抱가 있어서 감이로다.
 
38
周에 이르매, 文王 姬昌(희창)이 죽고 武王 姬發(희발)이 卽位하여 文王의 神主를 싣고 八百 諸侯를 모아 殷을 치러 가거늘, 伯夷(백이)·叔齊(숙제) 그 앞을 막고 姬發(희발)을 꾸짖어 가로되, 臣下가 되어 임금과 싸우려 하니 忠이라 할까? 죽은 아비를 묻지 않고 戰爭을 먼저 하니 孝라 할까? 이 말이 끝나지 못하여 姬發(희발)의 左右가 칼을 들어 치려하나, 多幸이 姬發(희발)의 大將 姜太公(강태공)이 伯夷(백이)·叔齊(숙제)를 義士라 하여 保護하여 데리고 감으로 죽기를 免하니라.
 
39
姬發(희발)이 殷을 滅하고 殷京을 차지하여 將士에게 爵賞을 내리며, 人民에게 大赦를 놓으며, 諸侯들은 땅을 더 주며 學士들은 優禮로 불러 마치 無頭賊黨들이 그 賊得한 物件을 나누고 그 나머지로 남에게 던져 주며, 그 恩功을 자랑코자함과 한 가지지만, 殷의 舊臣과 舊民들이 모두 네 무릎을 땅에 꿇고 그치기를 빌려 하는지라.
 
40
伯夷(백이)·叔齊(숙제)의 눈에 이것도 볼 수 없는 일이거니와, 또는 姬發(희발)이 方今 군사를 내여 沿海岸을 向하여 朝鮮殖民의 나라를 치려함을 알고, 伯夷(백이)·叔齊(숙제) 兄弟가 이때에 周의 祿을 받음이 義가 아니라 하고, 드디어 故國을 向하여 孤竹의 首陽山에 올라 고사리를 캐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41
首陽의 뫼에 올라
42
고사리나 캐리로다.
43
모짐으로 모짐을 대신 한들
44
그른 줄 어찌 알리!
45
神農氏도 가시고
46
舜도 禹도 다 죽었어라.
47
그 뉘를 의지하리!
48
어-하. 가리로다.
49
누리가 이만인가.
 
50
(此詩는 『史記』에서 譯出한 것)
 
51
노래를 마치고는 주림을 못 이겨 兄弟가 함께 首陽山에서 죽으니라. 百歲 뒤에나 千歲 뒤에라도 이 노래를 읽어보면 伯夷(백이)·叔齊(숙제)의 목청이며 얼굴이 곁에 있는 듯할 것이다. 威力에 꺾이지 않으며 富貴에도 끌리지 않고 自己의 뜻을 이루었도다.
 
52
그러나 後人들이 매양 伯夷(백이)·叔齊(숙제)의 心事를 誤解하여, 或은 殷을 爲함이라 하고 或은 周를 싫어함이라 하나, 伯夷(백이)·叔齊(숙제)는 殷의 諸侯도 아니며 屬臣도 아니며 舊臣도 아니니 무슨 因緣으로 殷을 爲하여 죽으며, 또는 周가 殷을 代함이 不義라 하여 이를 싫어함이라 하면 父國되는 孤竹으로 돌아가거나, 祖國되는 朝鮮으로 옮아감이 可하거늘, 어찌 支那(중국)의 王室을 爲하여 죽었으며, 仁人의 눈에 彼我를 가리지 않는 고로 支那(중국)를 爲하여 죽음이라 하면 어찌 다시 孤竹으로 돌아와 죽었으리오.
 
53
대개 姬發(희발)이 殷을 滅함은 宗敎戰爭의 濫觴이요, 朝鮮植民의 危機라. 姬昌(희창)이 이미 五行을 排斥하고 六十四卦를 가져 따로 支那(중국)의 敎門을 세워 朝鮮과 對峙하려 하며, 姬發(희발)은 그 아비의 뜻을 이어 군사를 들어 五行의 信仰 가진 殷을 滅하니, 그 禍機가 장차 沿海의 朝鮮植民에게 미칠 줄은 바보라도 알 바이거늘, 朝鮮은 本國이나 그 植民地나 말 말고 檀君王朝가 夫餘로 옮아 三京이 分立된 뒤로, 內部에는 兄弟가 서로 爭奪하며 外部로는 九族이 서로 分裂하여 다시 五部의 古風을 돌릴 수 없는 고로, 伯夷(백이)·叔齊(숙제)가 兄弟가 서로 王位를 사양함은 그 潔性이 그럴 뿐 아니라 또한 末俗을 醒驚함이며, 西周를 流浪함은 姬昌(희창)을 달래어 그 野心을 禁束함이오. 姬發(희발)의 動員을 보고는 時機가 너무 急迫하여 從容히 談論할 겨를이 없으므로 馬首를 막아 諫함이오. 殷이 亡하매 事勢가 어찌할 수 없으므로 故國으로 돌아옴이며, 故國이나 同族의 植民들은 모두 死鬪의 惡習에 결우어져서 姬發(희발)의 덤빌 줄은 잊은 고로, 그 노래 가운데도 『神農(신농)』을 생각함은 伏羲(복희)가 八卦를 긋고 神農(신농)이 田穀을 지어 朝鮮의 先民으로 처음 支那(중국)에 移植한 聖人인 까닭이요, 舜은 神農(신농)의 뒤의 朝鮮 植民으로 支那(중국)에 入住한 第二人인 고로 舜을 생각함이며, 禹는 「夫婁經」을 받아 支那(중국)에 편 賢君인고로 禹를 생각함이니, 故人을 노래하여 切迫한 時勢에 植民들을 깨우침이니, 伯夷(백이)·叔齊(숙제)는 當時의 先覺이라. 그의 죽은 뒤 얼마 못되어 朝鮮·支那(중국) 兩族의 大戰爭이 나니라.
 
 

4. 第四章 扶餘族의 僑民과 支那族과의 大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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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기자)의 洪範宣言은 宗敎上으로 激刺를 줄 만하며, 伯夷(백이)·叔齊(숙제)의 採薇歌는 種族上으로 感憤을 줄 만하니, 만일 이 끝에 朝鮮 列國이 支那(중국) 안에 있는 植民 諸國과 聯合하여 周를 치면, 새로 定하여 基礎가 튼튼치 못한 나라로서 능히 대적할 수 없을뿐더러, 하물며 支那(중국)人들로 五行을 信仰하거나 또 殷을 생각하는 이면 모두 머리를 둘러 朝鮮을 向하리니, 그 勝敗의 數가 싸움나기 前에 判斷될 일이거늘, 딱하다 朝鮮 當時에 이 같은 偉大한 計劃을 냄이 없어 先覺의 警告를 져버리며 敵國의 跋扈를 맡기어, 드디어 海外에 있는 植民 諸國으로 하여금 洪水의 浩劫을 만나게 하였도다.
 
56
이 때 支那(중국) 안에 夫餘族의 가장 繁盛한 곳은 (一) 山東, (二) 山西, (三) 燕薊니, 이제 順序를 따라 먼저 山東을 말하리라.
 
57
山東에 있는 植民이 建設한 나라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 가장 큰 王國을 들면 萊·奄·嵎 三國이니, 嵎國은 檀君 때에 設立하여 堯의 신하 羲仲(희충)의 測候하던 곳과 接近하니 今 兗州府 等地요, 萊國도 檀君 때에 設立되어 일찍 夏와 文字로 通商하였나니 今 萊州府 等地요, 奄國은 그 起源이 史冊에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대개 萊와 嵎의 同時니 今 濟南府 等地라.
 
58
姬發(희발)이 이미 殷을 滅하고는, 곧 大將 姜太公(강태공)을 營口에 封하여 諸侯라 이름하여 大兵을 거느리고 山東 全境의 朝鮮族을 壓迫하려고 들어오는데, 嵎·奄 等 國은 다 闇昧하여 깨닫지 못하나, 오직 萊國王이 英明하여 곧 太公(태공)이 오기 前에 營口를 차지하여 周와 對抗하려고 군사를 들어 빨리 營口로 向하더라. 營口의 舊長官은 다 떠나고, 新長官 姜太公(강태공)은 아직 到臨치 아니하여 城中이 空虛하니, 危機가 참으로 터럭 끝에 달렸더라.
 
59
姜太公(강태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다가 中路 旅舘에서 자더니, 旅舘 主人이 깨쳐 가로되, 『時勢 한 번 가면 오지 않나니, 客의 꼴을 본즉 無事한 者 아니거늘, 어찌 이같이 安寢하느뇨. 자못 時勢를 아는 者 아니로다.』 姜太公(강태공)이 이내 길을 재촉하여 營口에 다다른지라. 萊國王이 이미 姜太公(강태공)이 옮을 알매 營口 빼앗을 機會가 이미 간 줄 알고 이에 回軍하니라.
 
60
萊國王은 이와 같이 豫料에 빠르고 進取에 날래어, 만일 旅舘 主人의 姜太公(강태공)을 깨우침이 없었다면, 먼저 營口를 차지하여 大局에 爭雄할 만하며, 또는 植民 諸國이 다 萊國王과 뜻이 같아 一時에 聯合하여 齊를 쳤다면, 비록 營口를 어찌 못하여도 오히려 周武王 姬發(희발)의 野心을 꺾고 朝鮮의 光榮을 날리게 될지며, 設或 敗亡하였더라도 오히려 壯烈한 朝鮮魂을 보일 일이거늘, 다만 萊國王이 하나요 둘도 못되는 고로, 諸國들이 앉아서 滅亡을 당하였도다.
 
61
그러나 姬發(희발)과 姜太公(강태공)이 山東 諸國에 對하여 먼저 圖謀코저 하는 바는 奄國이라. 萊國은 비록 强固하고 國王도 英明하나 元來 小國이라 大勢를 좌우할 수 없고, 奄國은 大國이요 地方이 거의 千里라. 고로 姬發(희발)이 姜太公(강태공)으로 하여금 萊를 防備하여 奄을 援助치 못하게 하고, 이에 그 아우 周公(주공)으로 하여금 支那(중국)族 諸侯의 大兵을 聯合하여 奄에 入寇하거늘, 奄國王이 또한 國軍을 募集하여 四面으로 막더니, 姬發(희발)이 죽고 그 太子 成王이 서서는 더욱 進過하거늘, 奄國이 血戰 三年에 마침내 糧食이 끊어지고 運輸의 길이 막혀, 어찌할 수 없는 줄 알고 奄國王이 死士로 더불어 出戰하여 죽으니, 때는 檀君 一千二百餘年이더라.
 
62
奄國王이 비록 萊國과 植民地 諸國 가운데 가장 主盟할 만한 大國으로 諸國을 聯盟하여 支那(중국)族의 聯合軍을 막지 못하며, 또 萊國王과 같이 自己의 管境을 保守치 못하고 敵兵이 城下에 臨한 뒤에야 겨우 對戰할 經營을 했으니, 그 智計의 拙함은 諱할 수 없으나, 마침내 亡國하는 날에 俘虜의 辱을 當치 않고 칼머리에 매운 죽음이 되었으니, 또한 壯烈하도다.
 
63
嵎國의 滅亡은 어느 때인지 史冊에 보이지 않았으나 年代와 事勢로 미루어 보건대, 곧 奄國과 運命이 같았으리로다. 奄國은 姜太公(강태공)의 所有가 되고 嵎國은 成王이 周公의 아들 伯禽(백금)을 封하더니, 嵎國이 비록 亡하였으나 五部의 餘俗이 오히려 남았으므로, 後世에 그 古地에서 孔丘(공구)·孟軻(맹가) 등이 朝鮮의 五行과 『周易』의 六十四卦를 좋아하여 新哲學을 組織하여 『繁辭』·『文言』 等의 著述이 있었더라. 嵎·奄 兩國은 이미 立하였으나 萊國은 數百餘年까지 오히려 齊와 相持하였고, 右三國 밖에 顓臾·根牟 等 여러 小國이 있으나 그 成敗存亡이 이 大勢에 關係 없는 고로 적지 않노라.
 
64
燕薊에 있는 植民 나라들은, 永平府로 서울한 孤竹이 千里地方을 가져 가장 크고, 그 다음에는 順天府 附近에 서울한 令支와 孤竹의 東南에 있는 令支요, 이 밖에도 여러 小國들이 있으며, 山西에는 扶餘族이 蒙古(몽골)人種과 聯合 建設한 赤國·白國 等이 있더라.
 
65
山東戰爭이 이미 마치매, 周가 燕薊와 山西에 向하여 勢力을 擴張코자 하나, 마침 殷의 舊京에서 紂 子의 武庚(무경)이 舊民을 거느리고 暴亂을 이루매, 當時에 武庚(무경)과 그 舊民을 統監하던 管叔(관숙)·蔡叔(채숙)은 곧 成王의 叔父요, 周公(주공)의 兄弟로서, 도리어 武庚(무경)을 도와 周를 치매, 周의 形勢도 또한 危急한 지라. 周가 이에 內亂으로 말미암아 山西·燕薊 等地에 對한 野心을 그치고, 이윽고 殷을 쳐 武庚(무경)과 管·蔡(관숙·채숙)를 벤 뒤에도 內部의 정돈이 더욱 바쁨을 깨닫고 다시 군사를 내지 않으나, 그러나 召公 奭(석)을 燕에 封하고 唐叔(당숙)을 晋에 封하여 孤竹·令支·赤國·白國 等을 이웃 보게 하니, 이에 一時의 戰爭은 쉬었으나 兩族 사이에 將來 禍根을 심어, 드디어 四五百年 동안의 劇烈한 血戰을 겪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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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史學者 랑케氏가 그의 지은바, 『世界歷史』의 처음에 上古 各 民族의 宗敎 同異를 말하여 가로되, "古代 諸民族의 競爭은 매양 宗敎의 衝突로 中心을 삼아, 만일 同一한 神을 받들지 않는 者를 보면 人間에 兩立하지 못할 仇敵으로 알아 그를 괴롭게도 하고 그를 죽이기도 하다가, 마침내 그 나라를 滅하지 않으면 말지 아니하나니, 그 原因은 곧 宗敎가 各 民族의 特性을 代表한 고로, 宗敎가 다르면 그 民族들 사이에 반드시 風氣·主義·利益 等이 다 反對되어 協同이 되지 못한다" 하더니, 우리의 古代에 더욱 그러함을 보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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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夫婁(부루)가 西로 건너가 三神·五帝·三正·五行 等을 支那(중국)에 펼세, 이를 받는 者가 가장 먼저 夏禹라. 夏禹가 이미 夫婁(부루)의 恩惠를 받아 洪水를 다스리고는 이에 感服하여 힘을 다하여 夫婁(부루)가 敎訓한 神의 信仰으로 人民을 가르치며, 禹子 啓(계)가 卽位하여는 本敎의 反對者 有扈(유호)氏의 王國을 쳐서 깨치니, 支那(중국)의 諸侯들은 禹와 啓(계)의 功烈에 눌리어 다시 反對하는 뜻을 가지는 이 없으며, 百姓들은 三神과 五帝의 信仰에 感化하여 夫餘에 대한 感情이 融通되어, 支那(중국) 안에 夫餘族 植民들이 혹은 支那族의 部落과 離居하며, 혹은 隣接하여 한우리 안에 두 집이 살림함과 같으나, 아무 惡感과 衝突이 없이 一千年 歷史를 지냈으니, 檀君·夫婁(부루)의 德이 깊음을 볼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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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書紀年』에는 黃·靑·畒 等 部가 자주 支那(중국)를 치며, 支那(중국) 帝王들도 黃·畒 等 部를 쫓았던 이야기를 적었으나, 『竹書紀年』은 支那(중국)에서도 自來로 僞書라 하여 그 말을 歷史에 올리는 이 없은즉, 그 가운데 적은 朝鮮·支那(중국)가 서로 싸웠던 말을 어찌 믿으리오. 이윽고 檀君 一千二百餘年 頃에 이르러서는, 周文王·武王이 伏羲(복희)의 八卦를 依憑하여 六十四卦를 만들고, 또 連山·歸藏의 五行과 並叙한 卦說을 排斥하여 別派를 세워 支那(중국)와 朝鮮의 宗敎를 가르며, 또 政治上으로 殷을 쳐 支那(중국) 안에 五帝信仰의 宗國을 없이 하며 沿海岸의 植民을 쳐 支那(중국) 안에 五帝信仰에 主盟되는 强國을 없이 하여 朝鮮과 支那(중국)의 宗族을 나누니, 朝鮮의 民族이 支那(중국) 안에 송곳 셀 영이 없이 되기는 이때부터이니, 姬昌(희창)·姬發(희발)이 또한 慘毒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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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植民 諸國들은 孤單한 客이라 支那(중국)의 大國들과 싸우기에 힘이 부치리니, 그 或勝 或敗가 오히려 光榮이라 할 수 있으나, 當時에 北으로 黑水부터 南으로 鳥嶺까지, 東은 大海부터 서는 孤竹·令支까지, 넓으나 넓은 當時 朝鮮에 마침 植民을 援助코자 하던 한 사람도 없음은 무슨 일이뇨. 슬프다, 어찌 없으리오. 當時에 그 말을 묻는 이 없으며, 後世에 그 이름을 史에 올리지 아니 함이니라.
 
 

5. 第五章 大徐帝國의 興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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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本土에도 사람이 없고 植民地에도 사람이 없어, 支那(중국) 北部에 移植하였던 百姓들이 모든 壓迫을 받는데, 檀君 五部의 屬民들도 分裂에 分裂을 더하여 大勢를 돌아보는 눈도 가지지 못하며, 外地 同胞에게 한 팔뚝을 줄 생각을 못하던 판에 支那(중국) 南方, 곧 夫婁(부루)의 中經을 傳하던 땅이 얼마 안 되는 距離, 곧 淮河 附近에서 宗敎界의 偉人이라 할는지 政治界의 偉人이라 할는지 이름 짓기 어려운 한 偉人이 나서, 當時 朝鮮 사람의 代表가 되어 支那(중국)의 天地를 한 번 들었다 놓으니, 또한 黑暗한 가운데의 빛이라. 讀史子가 깊이 歡迎할 만한 사람이로다. 그 사람이 누구이뇨. 곧 이 아래에 말하고자 하는바 徐偃王이다. 徐·淮 兩地가 檀君 九族의 植民地의 一部分됨은 第一編에 말하였거니와, 三京이 分立한 뒤로 朝鮮 本部의 號令이 海外 植民地에 미치지 못하매, 徐民·淮民들이 다 自立하여 徐國·淮國을 建設하니, 이는 徐國의 起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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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國이 겨우 五百里의 地方으로 人口가 또한 稠密치 못하여 몇 萬家에 지나지 못하므로, 海外 各 植民 部落 가운데 손바닥만한 小國이니 偃王은 이 小國의 偉人이라. 檀君 一千三百三十年 頃에 나시니라. 그가 나실 때에 金卵에서 나왔다는 神話가 『博物讀志』에 揭載되었으나 이는 迷信時代의 例言이니, 赫居世(박혁거세)·高朱蒙(고주몽)의 外紀 같은 따위러라. 머리가 한 편으로 굽은 고로 偃王이라 이름하였다. 난 지 아홉 살 적에 前川에서 놀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朱弓·赤矢을 얻고는, 이를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 하여 射藝를 익히여, 마침내 百發百中의 能手가 되므로 弓王이란 別名이 있었고, 幼時부터 仁德이 있어서 宮中 사람들의 敬愛를 받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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偃王이 前王의 자리를 잇던 때에 곧 하늘이 機會를 주신다. 海外의 朝鮮 植民을 씨도 없이 하려던 周武王의 子孫들이 몇 代가 못되어 穆王 滿(만)이라는 者가 나서, 政治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淫蕩만 일삼아 日行千里 八駿馬를 타고 崑崙山을 지나 西王母라는 遠方 女王에게 가서 잔치하고 돌아오지 않더라. 近世史家들이 『穆天子傳』과 「西洋史」를 參考한 結果로써, 西王母는 곧 小亞細亞(소아시아) 바빌론 女王이요, 周穆王의 西遊는 곧 바빌론 女王에게 朝貢하러 간 길이라. 이때에 바빌론이 强盛하여 그 威勢가 곧 東西洋에 덮이며 周에게 向하여 貢物을 바치려 하는 고로, 穆王의 이 길이 있었다 하니, 이 考據가 옳은지 틀린지 알 수 없으나, 대개 穆王의 西遊함은 事實이다. 穆王이 간 뒤에 돌아오지 아니하매 諸侯가 다 周에 딴 마음을 두거늘, 偃王이 더욱 힘써 仁義를 行하니, 夫婁(부루)와 夏禹가 지나가, 「中經」의 彛倫이 아직 人心에 밴 곳인 고로, 모두 偃王의 바람에 기울어져, 江·淮·漢 사이에 偃王에게 와서 朝貢하는 諸侯가 三十六國이더라. 穆王이 이 기별을 듣고 크게 놀래어, 드디어 八駿馬를 달려 빨리 돌아오나, 偃王의 勢가 이미 어찌할 수 없음을 보고, 偃王이 곧 周를 滅할까 두려워하여 使臣을 보내 偃王에게 哀乞하여 支那(중국)를 두 도막에 나누어, 陝以西의 諸侯는 周가 맡아 다스리고 陝以東의 諸侯는 徐가 맡아 다스리자 하거늘, 徐偃王이 불쌍히 여겨 許諾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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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偃王의 이 허락은 큰 失策이다. 다른 宗敎를 세워 千百年이나 내려오던 朝鮮과 支那(중국)의 사람들로 하여금 感情을 破裂케 한 자가 周가 아닌가. 惡를 恕할 수 없으며 檀君·夫婁(부루)의 宗敎를 막아 다시 支那(중국) 안에 자취를 끊게 한 者가 周가 아닌가. 그 罪를 놓을 수 없으며 山東에 多數한 朝鮮植民國을 滅하여 그 人民을 죽이고 宗廟를 헐은 자 周가 아닌가. 그 不義를 자라게 할 수 없으며 山西·直隸 等地에 晋·燕 等의 周家 同姓을 封하여 夫餘族 萬世에 禍根을 삼은 자 周가 아닌가. 그 奸萌은 꺾지 아니할 수 없나니, 비록 周가 强盛한 때라도 오히려 칼을 겨눌만한 원수거든 하물며 이때에 周穆王이 淫蕩하여 하늘이 怒하고 사람이 미워하여 의지할 데 없는 판이니, 偃王의 한 號令이면 天下가 모여들어 周를 벨 날이거늘, 이에 그 哀乞에 느끼며 奸計에 속아 亡하게 된 周를 놓아 後日의 근심을 장만하니, 또한 어리석도다. 萊·奄 將卒의 넋이 周를 向하여 울며, 西山 義士의 뼈가 周를 위하여 구나니, 偃王이 어찌 이를 보지 못하였는가. 鯀(곤)이 죽지 아니하면 夫婁(부루)의 五行을 傳할 곳이 없으며, 有扈(유호)가 亡치 아니하면 朝鮮의 植民이 살지 못하였으리니, 偃王이 어찌 이도 듣지 못하였는가? 또는 周와 徐가 兩立하지 못할 줄은 아무라도 알 것이거늘, 偃王이 어찌 이를 몰랐는가. 仁義가 宗敎에 있어서는 값이 있으나 政治에 있어서는 도리어 自殺劑가 된다. 슬프다. 偃王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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偃王이 穆王의 哀乞을 허락한 지 얼마 안 되어, 穆王이 가만히 使臣을 楚에 보내어 金帛을 주고 꾀어 가로되, 楚가 徐의 뒤를 치거든 周는 그 앞을 치면 徐를 滅할 만하니, 徐가 亡하거든 그 땅을 周·楚 兩國이 나누자 하니, 楚는 當時에 安徽·江蘇 等 數千里 地를 차지한 大國이라. 楚王이 원래 徐의 勃興함을 싫어하나, 다만 徐에게 服從하는 諸候가 많음을 두려워하여 거짓 徐에게 稱臣하더니, 이윽고 周穆王의 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여, 이에 周·楚 兩國의 對徐同盟이 秘密히 成立되더라. 眞正이 詐僞를 이기지 못하며 道德이 奸惡을 化하지 못함은 政治世界의 遺恨이라. 徐偃王은 오히려 周·楚 兩國의 密約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誠信으로써 兩國을 대접하더니, 楚兵이 드디어 徐의 깨닫지 못함을 타서 徐의 南에 들고, 周兵은 그 北을 들어 앞뒤로 덤비니, 仁으로 집을 짓고 義로 門을 내어 天下를 부르던 徐偃王이 어찌 칼과 활을 막을 만한 연장이 있으리오. 다만 죽거나 닫거나 이 두 사이에 하나를 고르게 되었도다. 그러나 徐의 백성들은 仁義에 젖은 지 오래라 차마 偃王을 버리지 못하며, 또 兩敵의 奸僞를 痛憤히 여기어 모두 한 번 싸워 죽기를 請하나, 偃王은 百姓의 피와 고기로 敵國의 칼을 막지 못할 줄을 알며, 또 自己 한 몸을 위하여 殺戮의 비린내를 歷史에 끼치지 아니하려 하여 가로되, "내가 德으로 사람을 살리지 못할지언정 어찌 惡으로써 사람을 죽이리오" 하고, 百姓의 청을 허락지 아니하고 彭城의 깊은 山 속으로 달아나니, 쫓는 者가 數萬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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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偃王이 이에도 잘못하였도다. 무릇 偃王의 亡함이 한 사람의 亡함이 아니라 곧 全幅의 亡함이며, 全徐뿐 아니라 곧 海外 朝鮮植民地 全體의 亡함이며, 植民地 全體뿐 아니라 곧 朝鮮의 威靈이 망함이니, 이미 亡하는 자리거든 血肉은 亡할지언정 情神은 亡치 말지니, 만일 칼도 활도 없는 數萬 百性이 다 싸움에 죽었으면 곧 徐國의 精神이 萬世에 끼쳤으리로다. 그러나 徐偃王은 이를 생각지 못할 뿐 아니라 곧 自己가 가진 朱弓赤矢도 한 번도 써보지 아니하였도다. 徐偃王이 죽을 때에 가로되 "文事가 있거든 반드시 武備가 있어야 하거늘, 내가 仁義만 힘쓰고 武備에 뜻하지 아니 하였으니, 이에 미침이 또한 마땅하다" 하니라. 彭城 等地에 鐵門關·走馬塘 等의 地名이 있는데 本土人들의 傳說에 依하면 兩地는 다 徐偃王 末路의 遺蹟이라. 鐵門關이 明末부터 人民의 交通으로 말미암아 全體를 파고 뚫은 고로 그 遺址를 찾을 수 없으나, 古代에는 兩石이 左右에 우뚝 서서 鐵門과 같은 고로 鐵門關이라 이름하며, 그 안에는 四面이 꽉 막히고 數百家가 살 만한 벌이 있는데, 偃王이 이 속에서 楚兵에게 被圍되었더니, 얼마 아니 되여 敢死隊 數百名이 그 에움을 헤치고 偃王을 救하러 왔는지라. 偃王이 크게 느끼며 반가와 하고 그 敢死隊로 先鋒을 삼아 關門에 나와, 走馬塘에 이르러서는 말을 타고 달린 고로, 走馬塘의 이름을 얻음이라 하더라. 그러나 『後漢書』·『韓昌黎集』·『古今拾遺』·『博物讀走』에는 다 偃王이 彭城에서 죽었다 하여 이 傳說과 다르니, 어떤 말이 옳다고 아직 斷定할 수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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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偃王의 歷史를 보매, 어찌 그리 어질고 차마 못함이 많으뇨. 처음에 周의 奸計에 속아 그 和好를 許諾함은 말 말고라도, 곧 周·楚 兩國의 군사가 都城을 닥칠 때에 城中에 죽기로 싸우려는 人民이 많으니, 이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다면 그 勝敗가 오히려 알 수 없는 판이라. 偃王이 이를 하지 않고 달게 몸을 죽이도다. 만일 偃王으로 하여금 예수와 같이 賤民의 階級에서 낳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釋迦(석가)가 淨飯太子의 자리를 버리듯이, 그 王位에 앉지 아니하였다면 그 才와 德으로 萬世의 信仰을 받을 만한 大宗敎家가 되어 仁道에 빛을 끼쳤으리로다. 『博物讀志』에 가로되 "偃王이 刋溝를 파서 江淮를 通하다" 하니, 支那(중국)의 沿革 地圖로 보건대, 그 刋溝가 後來에 吳王 夫差(부차)와 隋煬帝를 지나 世界史 가운데 가장 큰 運河가 된지라. 그 運河의 完成은 隋에 와서 되었지만 그 始祖는 徐偃王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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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偃王의 功德이 後世에 끼침이 이 뿐이로다. 偃王의 죽은 뒤 百餘年 만에 그 子孫이 中興하여 淮國과 聯合하여 周와 싸워 先祖의 원수를 갚으려다가 이때 周의 宣王은 狡猾한 임금이라, 支那(중국)의 諸侯를 끌어 徐를 치니, 徐가 敗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니라.
【원문】第三編 阿斯達 王朝時代와 檀君 以後의 分裂과 殖民地의 盛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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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申采浩) [저자]
 
  1931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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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