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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역사강화 ◈
◇ 제일편(弟一編) 상고(上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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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최남선
1
弟一編[제일편] 上古[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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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章[제 일장] 朝鮮[조선]나라의 始初[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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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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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에 해 돋는 동방 東方[동방]을 「진[震]」이라고 불렀는데, 진[震] 땅에는 구멍에 살고, 사냥질로 의식[衣食]하는 되(狄[적])들이 살았다. 시방으로부터 오[五]천 년쯤 전에 먼 서방[西方]으로 부터 「白[백] 」() 이라 하는 사람의 떼가 震[진] 땅에 와서 四方[사방]에 흩어져 사는데, 이 白[백]사람은 집안을 짓고, 농사를 지어 먹고, 실로 옷감을 만들 줄을 알며, 또 병 고치는 법과, 사람 사람끼리 오며 지내는 禮節[예절]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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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네는 天神[천신]을 信仰[신앙]하여 높은 산에 그를 위하고, 이 산을 白山[백산]이라고 불렀는데, 여러 白山[백산]의 중에 시방 白頭山[백두산] 이 朝宗[조종]이 되어서 太白山[태백산]이란 이름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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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古語[고어]에 神明[신명]을 「」이라 하여 漢字[한자]의 白[백]으로 表音[표음]을 삼으니,「白民[백민]」이라하는 古朝鮮人[고조선인]의 自稱[자칭] 은 곧 神明民族[신명민족]의 稱[칭]이었다. 후에 支那人[지나인] 이 이 것을 拍[박] 혹 貃字[맥자]로 쓰기도 하고, 貃[맥]은 다시 貊[맥]으로 轉[전] 하여 그 音[음]도 「」으로 訛[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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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 들은 차차 白[백]사람에게 눌려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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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檀君朝鮮[단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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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만에 白[백]사람의 중에 하늘과 같이 알게 된 한 神人[신인]이 나시니, 이에 이 어른을 모시고 白[백]사람이 太白山下[태백산하]에 나라를 세워서 이름을 조선 朝鮮[조선]이라 하였다. 이 거룩한 어른이 檀君王儉[단군왕검] 이 시다. 檀君王儉[단군왕검]께서는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이 즐거울 여러 가지 文化[문화]를 많이 마련하사, 온 세상 사람에게 높임을 받으셨다. 이 조선 나라의 생기던 날을 뒤에 開天節[개천절]이라 하여 조선 사람의 가장 기뻐하는 名節[명절]이 되니, 시방으로부터 대략 四二六〇[사이육영] 년전 一〇[일월][삼]일의 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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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古語[고어]에 天[천]을 「단굴」이라 하고, 天降[천강]한 神人[신인]을 또한 「단굴」이라 하니, 檀君[단군]은 실로 이것을 漢字[한자]로 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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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奇子時節[기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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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단군] 의 나라는 처음 太白山下[태백산하]의 天坪[천평]에 있다가 차차 南[남]으로 옮아서 시방 大同江[대동강] 유역, 九月山[구월산] 일대 지방으로 나왔다. 합하여 一[일]천 二[이]백 년쯤 檀君[단군]의 이름으로 백성을 다스리다가, 뒤에 나라 형편이 달라지매 법을 새로 마련하고 임금의 이름을 奇字[기자]라고 일컬었다. 奇字[기자]의 시절에 와서는 안으로 農事[농사] 가 더욱 커지고, 밖으로 바다 건너 支那[지나]로 더불어 貿易[무역] 이 행하여 이동안에 여러 가지 寶物[보물]과 기술이 굴러 들어와서 문화가 더욱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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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古代[고대]에 君長[군장]은 天主[천주]인 太陽[태양]의 子[자]라하여 이를 「지」라 부르더니 音相似[음상사]한 관계로 支那[지나]의 箕子[기자]에 혼동하던 傳說[전설]이 생겼다. 「지」幾個[기개] 姓氏[성씨] 의 中[중]에 그 正統[정통]이라할 者[자] 奇字[기자]를 쓰니, 이제 여기 因[인] 하여 錯誤[착오]인 箕子[기자] 대신 奇字[기자]란 表音[표음]을 取[취]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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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字時節[기자시절]에는 시방 鴨綠江[압록강]과 大同江[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南北[남북][각] 千餘里[천여리]의 땅을 조선이라 불렀으며, 나라이름과 한가지 그 서울도 조선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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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章[제이장] 支那人[지나인]의 북새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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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衛灣[위만]의 도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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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에서 二[이]천 七[칠]백 년쯤 전으로부터 支那[지나]에는 큰 戰亂[전란] 이 여러 백 년 계속하여, 백성이 避難[피난]하여 살 곳을 찾을새, 祖先[조선] 의 좋은 말을 듣고 그 北方[북방]의 백성은 陸地[육지]로 걷고 東方[동방] 의 사람은 바다를 건너서, 연방 조선 안으로 들어와서 살았다. 이 支那人[지나인] 의 더부살이가 五[오], 六[육] 백 년 모여서 제법 한 세력을 이루었을 때에, 政治[정치]의 經驗[경험]을 가진 衛滿[위만]이란 자가 새로 들어와서 이 세력을 거느리고 조선의 宮廷[궁정]을 쳐서 빼앗고 대신 이 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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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字[기자]의 이름으로 임금 노릇한 동안은 九[구]백 년 남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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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樂浪郡[낙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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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조선과 支那[지나]와의 사이에는 貿易上[무역상]으로 큰 관계가 있었는데, 衛滿[위만]의 나라가 중간에서 利益[이익]을 집어먹으매 支那[지나]에서 이를 미워하여 군사를 데리고 와서 쳐서 없애고, 그 자리에 樂浪[낙랑] 의 곁에 臨屯[임둔]‧眞番[진번]‧玄莵[현토] 등 세 고을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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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韓[한]의 四郡[사군]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세 고을은 本土[본토] 삶의 反抗[반항]을 인하여 고대 없어지고, 시방 平安道[평안도]와 黃海道[황해도]에 걸쳐 있던 樂浪郡[낙랑군]만이 부지하여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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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古代[고대]의 國都[국도]에는 대개 神山神水[신산신수]가 있어, 山[산]을 「」이라고 하고, 水[수]를 「알」이라하니, 樂浪[낙랑]은 「알내의 漢譯字[한역자]」 이요, 또 그 別譯[별역]으로 列水[열수]란 字[자]도 쓰니, 列[열] 도 「알」의 訛[와]인 「얼」의 表音[표음]이었다. 古語[고어]에 國都[국도] 를 또 「나라」라 하여, 樂浪[낙랑]이 또한 그러한데, 樂[낙]에는 「라 」音[음] 이 있으므로 支那人[지나인]은 樂浪[낙랑]의 樂[낙]을 洛音[낙음]으로 읽어서 「나라」의 音[음]을 表[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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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滿[만]의 나라는 九[구][영]년쯤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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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낙랑]의 고을을 처음 두던 때에, 支那[지나]에는 漢[한]이란 나라가 한참 융성하였었는데, 이 漢[한]나라의 進步[진보]한 기술이 조선의 많은 才力[재력] 과 합하여 樂浪[낙랑]의 문화는 놀랍게 발달하였으며, 또 支那本國[지나본국] 과 같이 큰 난리를 치르지 아니하여 樂浪[낙랑]의 榮華[영화] 가 오래도록 지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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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 새나라의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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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人[지나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조선 사람들이 四方[사방]으로 흩어져서 여러 새 나라를 만드니, 樂浪[낙랑]을 가운데 두고 말하자면 그 南[남]으로 시방 忠淸[충청]‧全羅[전라]‧慶尙[경상] 三道[삼도]의 땅에 咸鏡道[함경도]에 沃沮[옥저]가 있고, 北[북]으로 압록강 골짜기에 高句麗[고구려] 가 있고, 또, 그 北[북]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扶餘[부여]가 있고, 이 사이에 허다한 작은 나라들이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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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句麗[구려]는 처음 鴨綠江[압록강]谷地[곡지]의 一小部[일소부]로서 뒤에 附近[부근]의 小國[소국]을 倂合[병합]하여 强大[강대]하여지매 高句麗[고구려] 로 일컬었다. 高[고]는 今語[금어]「큰」의 古표音[고표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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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章[제삼장] 民族[민족]의 自覺[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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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民族[민족]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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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人[지나인] 의 樂浪[낙랑] 고을로 하여 생활이 점점 압박을 받으매 조선 사람의 여러 나라는 다 각기 저희쪽으로 부터 樂浪[낙랑] 고을을 밀어 낼양으로 애를 썼다. 그러나 樂浪[낙랑] 의 굳은 뿌리는 얼른 흔들리지 아니하니, 이에 조선 사람이 전 민족의 힘을 합하여 한꺼번에 달려들어야 할 필요를 깨닫고, 여러 나가라 합력하여 四方[사방]에서 한꺼번에 들려 좁혀서 차차 樂浪[낙랑]의 세력을 줄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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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樂浪[낙랑]의 쫓겨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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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은 나라로는 큰 힘을 쓸 수 없으매 차차 나라들의 통합이 행 하여 一[일] 천 八[팔]백 년쯤 전에는 高句麗[고구려]가 北方[북방]에서 큰 세력이 되어 國號[국호]도 高句麗[고구려]가 되고, 그 보다 백 년쯤 뒤져서 南方[남방]에서 百濟[백제]가 盛大[성대]하여서, 앞뒤로 부쩍부쩍 우그린 결과로, 一[일]천 六[육]백 년쯤 전에 四[사]백여 년 들어앉았던 樂浪[낙랑] 이 말끔히 쫓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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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三國[삼국]이 벌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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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낙랑] 이 몰려 나가매 高句麗[고구려]와 百濟[백제]가 그 자리를 다투기 비롯하여 시방 漢江[한강]‧大同江[대동강]의 사이에 싸움이 끊인 적이 없 없는데, 이동안에 시방 慶尙道[경상도] 땅에서 新羅[신라]라는 새 나라가 일어나서 두 틈을 뻐개고 들어와서 漢江[한강]의 상류 지방을 갉아 뜯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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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로부터 다른 작은 나라들은 있어야 없음과 같고, 震[진] 땅이 高句麗[고구려] ‧百濟[백제] ‧新羅[신라] 세 나라의 겯고트는 마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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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나라는 한가지 二[이]천 년쯤 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생겨나니, 高句麗[고구려] 는 東明聖王[동명성왕]이 시방 압록강 건너 通溝[통구] 부근(國內城[국내성])에서 세운 바이요, 百濟[백제]는 溫祚大王[온조대왕]이 시방 廣州[광주](漢城[한성])에 세운 바이요, 新羅[신라]는 赫居世王[혁거세왕] 이 시방 慶州[경주](金城[금성])에 세운 바라 한다. 처음에는 다 조그만고을이더니 차차 곁에 있는 작은 나라를 합하여 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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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東明[동명]은 一[일]에 鄒牟[추모]‧中牟[중모]‧朱蒙[주몽]등으로 써서 今語[금어] 「츰」 의 一古形[일고형]을 表音[표음]한 것이니, 곧 始祖[시조] 의 義[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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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溫祚[온조]는 上代[상대]의 義[의] 요, 赫居世[혁거세] 는 弗矩內[불구내] 로 읽어서 神代[신대]의 義[의]를 가진 것이니, 다 前說上[전설상]의 通例[통례] 인 時代[시대]의 人格化[인격화]로 볼 것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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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四章[제사장] 三國[삼국]이 覇[패]를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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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〇[일영], 高句麗[고구려] 强大[강대]하여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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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라 가운데 國土[국토]가 먼저 커지고 세력이 가장 굳세어진 者[자] 가 高句麗[고구려] 니, 百濟[백제]와 新羅[신라]가 漢江[한강] 以南[이남]의 땅을 둘에 쪼개서 가졌을 때에, 고구려는 벌써 밥록강을 가운데 두고 南北[남북]으로 각가 千里[천리]나 되는 땅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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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고구려는 半島[반도]안으로 보다 大陸[대륙] 저쪽으로 뻗어 나가려하더니, 이때 四方[사방]에 마침 鮮卑[선비]라 하는 강대한 민족이 새로 일어나서 힘을 마음대로 쓰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발길을 南[남]으로 돌려서 먼저 半島[반도]의 통일을 생각하게 되고, 이 때문에 三國[삼국]의 覇權[패권] 싸움이 더욱 야단스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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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십일], 廣開土王[광개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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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이기려면 먼저 힘을 길러야 할 것이매, 경쟁하는 마당에 나선 세 나라는 서로 실력을 튼튼하게 만들기에 죽을 힘을 들였다.그런데 고구려는 大陸[대륙]으로 支那[지나]와 西域[서역] 여러나라를 連[연]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얻어 들여오기가 편리한 고로 그 발달이 가장 빠르고 크더니, 一[일][오][사][영] 년쯤 전에 廣開土王[광개토왕]이란 英雄[영웅]이 나서 이 세력을 잘 써서 在位[재위][이][이]년간 夫餘[부여] ‧沃沮[옥저] ‧濊[예] 등을 다 병합하고, 南[남]에서는 漢江[한강]以北[이북]을 다 차지 하였으며, 그 아들 長壽王[장수왕]이 뒤를 대어 서울을 압록강변에서 시방 平壤[평양]으로 옮기고, 더욱 신라와 백제를 내리 눌러서 東[동]에서는 太白山[태백산] 과, 중간에서는 俗籬山[속리산]과, 西[서]에서는 牙山彎[아산만] 以北[이북] 의 땅을 高句麗[고구려]의 판도에 넣었으며, 그 위엄이 南海[남해] 건너의 倭[왜](後[후]의 日本[일본])에까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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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廣開土王[광개토왕]은 그 碑[비]에 永樂好太王[영락호태왕]이란 號[호] 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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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이 太白山[태백산]은 시방 慶尙道[경상도]와 江原道[강원도]의 境界[경계]에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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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과로, 百濟[백제]는 서울을 시방 廣州[광주]로부터 公主[공주](態津[태진]) 로 옮겼으며, 얼마 뒤에 扶餘[부여](所夫理[소부리], 또는 泗批[사비]) 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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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십이], 佛敎[불교]의 傳來[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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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한참 外國[외국]의 進步[진보]한 文物[문물]을 끌어들일 때에, 印度[인도] 로서 支那[지나]에 있어서 佛敎[불교]가 다시 우리에게로 전하여 왔다. (시방으로부터 一五六〇[일오육영]년 전, 고구려 小獸林王[소수림왕][이] 년, 西曆[서역] 三七二[삼칠이]년.) 佛敎[불교]는 그때 支那[지나]에 있어서 思想上[사상상]으로 큰 세력을 가진 것이므로 支那[지나]에 대하여 평화로이 交際[교제]하여 감에 매우 필요한 방편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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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로 들어온 지 얼마 아니하여 佛敎[불교]가 백제와 신라로 차례로 전하여 갔는데, 正[정]히 이때에 當[당]하는 백제의 聖王[성왕]과 신라의 法興[법흥] ‧眞興王[진흥왕] 의 代[대]는 다 각기 그 나라의 中興期[중흥기]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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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불교]와 전후하여 西域[서역] 먼 곳의 사상과 예술이 많이 이리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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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제오장][수]와 唐[당]의 入寇[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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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십삼], 隋煬帝[수양제]의 大敗[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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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뒤로 여러 强[강]한 이웃을 데린 고로 신라‧백제를 어기하면서 국민의 의기가 더욱 떨쳐서 위엄이 四方[사방]을 눌렀다. 그동안 支那[지나]에서는 오랫동안 南北[남북]이 갈려서 여러 나가라 시끄럽게 지내다가 隋[수]라는 새 나라가 생겨서 비고소 이것을 통일하였는데, 다만 北方[북방]으로 西[서]에는 突厥[돌궐]이 있고 東[동]에는 고구려가 있어서 걱정이 여기 있던 중, 고구려와 突厥[돌궐]이 서로 교통하는 줄을 알고는 더구나 마음이 마음을 놓지 못하여, 고구려의 嬰陽王[영양왕] 二三[이삼]년(약 一三二〇[일삼이영] 년 전)에 隋[수]의 煬帝[양제]가 水陸[수륙] 百萬軍[백만군]으로써 고구려를 침노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에는 워낙 준비가 있으므로, 乙支文德[을지문덕]이라는 名將[명장]이 나서서 이것을 대적하다가 마지막 淸 川江[청천강] 싸움에 그 군사를 거의 다 陷沒[함몰]시키고 불과 수천 명 이 목숨을 도망하여 가게 만들었다. 隋[수]는 이 빌미로 하여 그두나 나라를 망해 버리고 唐[당]이 대신 支那[지나]의 임자가 되었다.
 
 
55
十四[십사], 新羅[신라][당]을 업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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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支那[지나]와의 사이에 틈이 생김을 보고, 신라는 이 기회를 이용 하여 와짝 國運[국운]을 좋게 돌리기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안으로 制度[제도] 를 바로잡으며, 才力[재력]을 마련하며, 人物[인물]을 길러내는 동시에, 밖으로 唐[당]나라에 대한 외교에 힘을써서 그 국력을 빌어서 고구려를 누르기로 國策[국책]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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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신라 사람의 上下[상하] 一心[일심]하여 있는 결과로, 唐[당]의 고구려에 대한 감정은 은근히 언짢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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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십오] 唐太宗[당태종]의 敗歸[패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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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도 唐[당]에 대하여 구태여 혼단을 내려고 하지 아니하여, 처음에는 그 뜻을 거스르지 말자 하였으나, 唐[당]이 신라의 청을 듣고 고구려가 신라에게 빼앗겼다가 도로 찾은 땅을 신라에 내어주라고 말을 하매, 고구려에서는 그 억탁에 심히 분개하여 唐[당]나라에 敵意[적의]를 가지게 되었다. 한옆으로 신라의 쏘개질이 그대로 심하여, 고구려 寶藏王[보장왕][삼] 년(약 一二九〇[일이구영]년 전)에 唐[당]의 太宗[태종]이 드디어 水陸[수륙] 三〇萬軍[삼십만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노하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에는 泉蓋蘇文[천개소문]이라는 偉人[위인]이 나라를 맡아서 서호한 틈이 없으므로, 唐軍[당군]이 到處[도처]에 利[이]를 보지 못하고 八八[팔팔]일 만에 무수한 군사를 죽이고 공없이 물러났다.
 
 
60
第六章[제육장] 新羅[신라]의 統一[통일]
 
61
十六[십육], 金庾信[김유신]
 
62
唐太宗[당태종] 의 군사가 헛되이 돌아간뒤에 高句麗[고구려]의 新羅[신라] 를 누름이 더하고, 百濟[백제]에도 武王[무왕]이라는 英主[영주]가 나서 신라의 西方[서방]을 집적거리매, 한때 신라의 형세는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국민은 더욱 허리띠를 졸마매고, 內政[내정]은 金庾信[김유신]에게 맡기고 外交[외교]는 金春秋[김춘추]를 내세워서 비상한 활동을 계속 하여, 大局[대국]이 차차 신라에 利[이]롭게 되었다.
 
 
63
十七[십칠], 百濟[백제]를 滅[멸]
 
64
고구려는 사귈 수 없고, 신라는 唐[당]을 업어서 형세가 외로우매, 백제는 南[남]으로 日本[일본]과 손을 잡으니, 대개 日本[일본]에서도 구구려와 신라의 누르는 힘이 바다를 건너올까 두려워하던 터이므로, 즐겨서 백제를 돕게 되었다. 그러나 日本[일본]의 힘은 그리 큰 것이 아니므로 백제는 아무 덕을 보지 못하고 國運[국운]이 점점 기울어 가더니, 義慈王[의자왕]이 서매 奢侈[사치]를 힘쓰고 酒色[주색]을 일삼아, 국력이 疲弊[피폐]하고 민심이 풀어지거늘, 신라의 武烈王[무열왕]이 이 틈을 타서 백제부터 집어치우기를 생각하고, 唐[당]나라를 움직여 義慈王[의자왕]二〇[이영]년(약 一二七〇[일이 칠 영 년 전])에 그 군사 十三[십삼]만을 빌어다가 백제를 망하여 버렸다.
65
백제의 歷代[역대]는 三一王[삼일왕]에 六七八[육칠팔]년.
 
 
66
十八[십팔], 高句麗[고구려][망]
 
67
백제를 滅[멸]한 후, 신라와 唐[당]과의 연합군은 여러해를 두고 해마다 고구 렬르 침노하였으나 번번이 蓋蘇文[개소문]에게 쫓겨 가고, 도리어 고구려에서 신라를 조처할 양으로 한강 근처의 신라 땅을 공략하더니, 불행 이 중도에 蓋蘇文[개소문]이 죽고, 그 여러 아 사이가 좋지 못하니, 신라  이 武烈王[무열왕] 이 아들 文武王[문무왕]이 이 기틀을 잃지 못하리라 하여, 고구려 寶藏王[보장왕] 二五[이오]년에 唐[당] 大軍[대군]을 빌어다가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는 蓋蘇文[개소문]의 죽은 뒤에 內訌[내홍]으로 하여 힘이 매우 줄어건마는 오히려 三[삼]년 동안 敵軍[적군]을 막아내더니, 때에 마침 흉년이 들고 다른 天災[천재]도 있어, 마침내 二八[이팔]년(약 一二六〇[일이육영년전])에 이르러 平壤城[평양성]이 깨지고 高句麗[고구려]가 망하여 버렸다.
68
고구려의 歷代[역대]는 二八世[이팔세]에 七〇五[칠영오]년.
69
이렇게 백제와 고구려가 八[팔]년 동안에 先後[선후]하여 망하고, 신라의 손에 半島[반도]가 비로소 통일한 나라를 이루었다.
70
백제와 고구여의 끼친 백성들이 오래도록 나라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마침내 공이 없었으며, 그 옛 땅에 한때 唐[당]나라에서 都毒婦[도독부]를 두고 本土[본토] 사람을 벼슬시켜 다스리게 하였으나, 신라에서 알게 모르게 그 땅을 집어삼켜, 얼마 뒤에는 大同江[대동강]과 元山[원산] 以南[이남]의 半島[반도] 全土[전토]가 완전히 신라의 판도에 들게 되었다.
 
 
71
第七章[제칠장] 渤海[발해]의 따로 남
 
72
十九[십구], 大祚榮[대조영]
 
73
고구려의 서울이 깨어져서 南[남]쪽에서는 나라가 무너졌으나, 압록강 以北[이북]에는 항복하지 아니한 城[성]이 많으니, 이에 고구려의 끼친 將帥[장수] 大祚榮[대조영]이 이것을 收合[수합]하고 또 고구려의 屬民[속민]이던 靺鞨[말갈]의 여러 部族[부족]을 聯結[연결]하여, 白頭山[백두산]의 東北[동북], 松花江[송화강]의 上流[상류]에 새 나라를 세ㅐ우고 이름을 震[진] 이라 하니, 地方[지방]이 넓고 세력이 강하여 고구려의 옛날에 내리지아니하였다. 震[진]은 唐[당]에서 渤海[발해]라고 부르고, 이것이 後世[후세] 의 널리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74
〇 靺鞨[말갈]은 古[고]에 挹屢[읍누]라 하고, 뒤에 勿吉[물길]이라 하던것이니, 대개 시방 滿洲族[만주족]의 祖先[조선]이다.
 
 
75
二〇[이영], 渤海[발해]의 疆土[강토]
 
76
大祚榮[대조영] 의 뒤에 英主[영주]가 자꾸 나서 四方[사방]을 공략한 결과로 그 강토가 北[북]은 黑手[흑수]에 이르고,西[서]는 遼水[요수]에 걸치고, 南[남]은 시방 咸鏡道[함경도]의 全部[전부]와 平安北道[평안북도] 의 大部[대부]에 뻗쳤으며, 그 안에 五京[오경] 十二府[십이부]를 두고, 시방 寧古塔[영고탑] 西南[서남]인 東京城[동경성]에 있던 上京[상경]을 서울로 하였다.
 
 
77
二一[이일], 발해의 勢力[세력]
 
78
渤海[발해] 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고 또 唐[당]나라와 西[서], 北方[북방]에서 처음 보는 높은 文明國[문명국]을 만들었으며, 南[남]으로 바다 건너의 日本[일본]과, 西[서]으로 大陸[대륙] 여러 나라에 무역을 힘써서 富力[부력] 이 자못 컷었다. 武力[무력]이 또한 강대하여 모든 이웃을 누르고지내었으며, 신라도 항상 그를 두려워하였다.
79
시방으로 부터 약 一二三〇[일이삼영]년 전, 大祚榮[대조영]의 건국으로부터 二五〇[이오영]년 가량 나라를 누렸다.
 
 
80
第八章[제팔장] 新羅[신라]의 盛時[성시]
 
81
二二[이이], 서울의 繁華[번화]
 
82
신라가 統一[통일]의 大業[대업]을 이루매, 財物[재물]과 人材[인재]가 말끔 中央[중앙]으로 몰리고, 또 唐[당]나라를 사이에 두고서 그때 세계의 모든 文物[문물]을 빨아들여서, 신라 서울의 문화는 찬란을 極[극]하고 그 貴人[귀인] 의 생활은 豪奢[호사]가 대단하였다. 한참 盛[성]할 시절에는 서울의 戶數[호수]가 十七[십칠]만이 되어서 길이가 五五里[오오리]에 뻗치고, 이 것이 대개 기와집이었으며 노래와 풍악 소리가 거기 널렸었다 한다.
 
 
83
二三[이삼], 佛敎[불교]의 興隆[흥융]
 
84
신라에는 예로부터 「부루」라는 神道[신도]가 있어 국민의 신앙을 統一[통일] 하여 가더니, 中年[중년]에 佛敎[불교]가 들어와서 그 敎徒[교도]가 문화와 정치상에 공헌이 많음으로부터 佛敎[불교]의 세력이 늘면서서 「부루」의 종교적 의미가 엷어지고, 인하여 風月主[풍월주]니 國仙[국선] 이니 花郞[화랑] 이니 하는 이름으로써 그 敎團[교단]이 一種[일종]의 敎化機關[교화기관]을 이루었다. 더욱 통일 운동의 내면에 佛敎人[불교인]의 활동이 많았던 까닭으로, 통일의뒤에 불교의 세력이 더욱 늘고, 또 中[중]에서 거룩한 인물이 많이 나서 그 지위가 더욱 무거워졌다.
 
85
〇 「부루」는 또한 「」의 一變形[일변형]이니, 新羅夫[신라부]에는 「風月[풍월]」 혹 「風流[풍류]」란 史道[사도]로써 이를 寫音[사음] 하였다.
 
86
義湘[의상]과 元曉[원효]는 다 통일 운동 당시에 난 傑僧[걸승]이니, 國事[국사]에도 많이 애를 썻거니와 더욱 불교의 敎理[교리]를 크게 밝혀서 이름이 天下[천하]에 높았으며, 그중에도 元曉[원효]는 어수선한 佛敎[불교] 의 義理[의리]를 단출하게 다스리고, 寺刹[사찰] 속에 숨겨 있던 불교의 修行[수행]을 일반 민중에게 내어주어서, 다만 우리에게서 뿐 아니라 世界[세계] 佛敎上[불교상]에 처음 보는 改革者[개혁자]가 되었다.
87
신라의 서울에는 몇 집 걸러 하나씩 절이 있고, 그중에 큰 절도 많았으니 黃龍寺[황룡사] ‧芬皇寺[분황사] ‧四天王寺[사천왕사] 등은 크기가 대궐과 같았으며, 지방에도 이름난 곳에는 반드시 큰 절이 있었으니 通度寺[통도사] ‧海印寺[해인사] ‧浮石寺[부석사] ‧華嚴寺[화엄사] 등은 그중에서 유명한 것이다.
88
新羅[신라]時節[시절]의 예술은 저절로 불교의 주위에 있었으니, 시방도 전하는 佛國寺[불국사]의 건축과 石佛寺[석불사](시방 石窟庵[석굴암] 이라하는 것)의 彫刻[조각]은 그 의사와 솜씨로 크게 세계에 이름난 것이다.
 
 
89
二四[이사], 해상의 活動[활동]
 
90
신라의 盛運[성운]이 통일후 一三〇년[일삼영]년쯤을 계속하더니 惠恭王[혜공왕] 의 뒤로부터 內亂[내란]과 凶年[흉년]이 連疊[연첩]하여 국운이 좀 기울기 시작하였는데, 시방부터 一[일]천一[일]백 년전 興德王[흥덕왕]의 代[대]에 張保皐[장보고]란 偉人[위인]이 있어서 시방 莞島[완도]에 淸[청][해][진] 이란 근거를 두고 많은 배로써 支那[지나]와 日本[일본]의 각지를 왕래하 굉장히 貿易[무역]을 행하여, 東方[동방]의 海上權[해상권]  서을 한손에 잡고 富力[부력]과 威勢[위세]가 一世[일세]를 덮으니, 이동안에 신라의 국력이 매우 펴여서 前日[전일]의 번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91
張保皐[장보고]의 배에는 일본에서 신라로 오는 留學生[유학생]이 항상 리려 다니고, 또 日本人[일본인]의 支那[지나] 交通[교통]도 대개 長氏[장씨] 의 船便[선변]과 周旋[주선]을 힘입었다.
 
 
92
第九章[제구장] 後三國[후삼국]의 벌어짐
 
93
二五[이오], 經濟力[경제력]의 쭈부러짐
 
94
오랫동안 豪華[호화]하고 安逸[안일]한 생활을 하여 人心[인심]이 풀어지고, 不當[부당]한 唐[당]나라 흉내와 過度[과도]한 佛敎[불교] 崇尙[숭상]에 財力[재력]이 말라서 신라의 일이 말못되는 중에, 一〇五〇[일영오영] 년쯤 전으로부터 흉년이 잦아서 백성이 살 수 없이 되매, 地方[지방]에서 반역자가 많이 생겨서 그 형세가 만만치 아니하게 되었다.
95
통일 전후로 唐[당]에 留學[유학]하는 것이 성풍하여, 거기서 큰 명예를 얻는자 더러 있고, 그중에도 崔致遠[최치원](號[호] 孤雲[고운])은 十二[십이] 세에 唐[당]으로 가서 十八[십팔]세에 科擧[과거]에 급제하고 聲名[성명] 이 海內[해내]를 움직였더니, 돌아오매 세상이 이미 끝판이 되어서 抱負[포부] 를 베풀지 못하고, 글 짓고 구경 다님으로써 세상을 잊어버리매 사람들이 아까워하였다.
 
96
〇 崔致遠[최치원]은 신라 憲康時人[헌강시인]이니, 唐[당] 僖宗[희종] 乾符年間[건부년간]에 魁科[괴과]에 뽑혀 侍御史內供奉[시어사내공봉]기타 여러 벼슬을 지내고, 黃巢[황소]의 亂[난]이 나서 高駢[고변]이 征討軍[정토군]을 거느리매 陂[피]하여 從事[종사]를 삼으니, 致遠[치원]이 그를 위하여<討黃巢檄[토황소격]>을 지어 問名[문명]이 드디어 天下[천하]에 그득하게 되었다. 支那[지나]에서 지은 公文類[공문류]를 모은 < 桂苑筆耕集[계원필경집] 이 전한다.
 
 
97
二六[이육], 後百濟[후백제]와 後高麗[후고려]
 
98
지방의 叛徒[반도] 西[서]에서는 甄萱[견훤]에게로 뭉켜서 시방 全州[전주]에 서울을 정하고 後百濟[후백제]를 일컬으며, 北[북]에서는 弓裔[궁예]에게로 뭉켜서 鐵原[철원]에 자리를 잡고 泰封[태봉]이라고 이름하더니, 弓裔[궁예] 의 部將[부장]중에 王建[왕건]이란 者[자] 후백제를 좁히고 威望[위망] 이 크매, 이에 弓裔[궁예]를 없애고 一〇一〇[일영일영]년 쯤 전에 대신 王[왕]이 되어 國號[국호]를 高麗[고려]라 하여 高句麗[고구려]의 뒤를 이음이 내타내고 서울을 시방 開城[개성](松嶽[송악])으로 옮겼다.
99
이가 高麗[고려]의 太祖[태조]이다.
 
 
100
二七[이칠], 新羅[신라]가 나라를 내놓음
 
101
이 로부터 고려와 후백제의 사이에 싸움나 大勢[대세]는 날로 고려에 이로와 졌으며, 그동안 甄萱[견훤]이 신라의 서울로 들어가서 왕을 죽게 하고 갖은 몹쓸 짖을 다하여 신라의 上下[상하]백제라하면 이를 갈거늘, 고려 이 틈을 타서 신라의 王室[왕실]을 달래어서 왕실의 尊榮[존영]을 누리게 하는 條件[조건]으로써 國權[국권]을 내어놓고 하게, 한편 견훤의 夫子[부자] 를 離間[이간] 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萱[훤]을 金山寺[금산사]에 잡아 가두게한 후 후백제를 쳐서 멸하여, 시방부터 약 一[일]천년전에 고려가 드디어 後三國[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102
신라는 건국한 뒤로 朴[박][석][김] 三姓[삼성]이 임금 노릇을 돌려하여, 都合[도합] 五六王[오육왕] 九九二[구구이]년을 지내고 前三國[전삼국]을 통일한 지 二六八[이육팔]년 만에 나라가 없어졌다.
103
渤海[발해]는 신라의 併合[병합]보다 一〇[일영]년을 앞서서 契丹[계단]에게 망하고, 그 끼친 백성이 많이 고려로 들어왔다.
 
 
104
第一〇章[제일영장] 上古[상고]의 文化[문화]
 
105
二八[이팔], 太古[태고]
 
106
檀君時節[단군시절] 은 毌論[관론]이요, 奇子時節[기자시절]의 中葉[중엽]까지도 震[진]땅의 거의전부가 石器時代[석기시대]에 있었으니, 石器時代[석기시대] 란 것은 온갖 器皿[기명]과 建設[건설]을 石材[석재]로 만들고, 木器[목기] ‧土器[토기] ‧骨器[골기] ‧各其[각기] 를 補助[보조]로 쓰며, 아직 銅鐵 [동철]을 이용할 줄 모르는 때를 이름이다. 奇子時節[기자시절]의 중엽으로부터 대개 金石[금석]을 아울러 쓰는 시대가 되고, 그중에도 조선의 중심지(大同江[대동강] 左右[좌우])는 진작 銅鐵器時代[동철기시대]로 들어갔으며, 치우쳐 있는 다른 곳에는 시방부터 二[이]천 년쯤 전까지도 그대로 石器時代[석기시대] 를 벗지 못한 자도 있었다.
107
시방 각처에 있는 「고인돌」과 「선돌」이며, 또 山谷間[산곡간]이나 河川邊[하천변]에서 줍는 石劍[석검]‧石斧[석부]‧石鏃[석족] 등은 다 石器時代[석기시대] 의 유물이다.
 
 
108
二九[이구], 信仰[신앙]과 風俗[풍속]
 
109
[진] 땅에는 예부터 「」이란 神道[신도]가 있어 太陽[태양]을 하느님이라 하여 높여 섬겼으니, 옛날의임금은 대개 神道[신도]의 어른으로 백성을 다스리던 이이요, 檀君[단군]은 실로 이러한 地位[지위]를 가지신 어른의 最古[최고] 名稱[명칭]이다. 이 神道[신도]를 위하여 一[일]년에 한번씩 一〇[일영]월에 온 國民[국민]이 모여서 天祭[천제]의 大會[대회] 를 열고, 일변 나라의 큰 공사를 여기서 처판하고, 일변 여러 가지 놀이를 베풀어 며칠씩 즐겼는데, 이것을 夫餘[부여]에서는 迎鼓[영고]라 하고, 고구려에서는 東盟[동맹]이라 하고, 濊[예]에서는 舞天[무천]이라 하고, 韓[한]에서는 弗矩內[불구내]라고 일컬었다.
 
110
〇 「」이 뒤에 時代[시대]와 地方[지방]을 따라서 혹시 「부루」로 변하기도 하고,혹시 「부군」으로 訛[와]하기도 하였으며, 혹 漢文[한문] 의 白字[백자] 를 쓰기도 하고, 불교의 八關[팔관]이라는 成語[성어]를 빌어 쓰기 도하여, 語音[어음] 과 字形[자형]이 여러 가지로 轉變[전변]하였다.
 
111
白衣[백의]를 좋아함은 夫餘[부여]로부터 그러하였으며, 溫突[온돌]의 법은 고구려로부터이었다.
 
 
112
[삼][영], 新羅[신라]와 朝鮮文化[조선문화]
 
113
조선 사람이 민족으로 하나가 되어서 동일한 국토를 지니고 동일한 언어와 習俗[습속]을 물려 나오기는 統一新羅[통일신라]에 비롯한 것이니,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초와 문화의 핵심을 찾으면 그 끝이 대개 新羅[신라]에 가서 줄이 닿음을 본다.
114
[정]월 보름과, 二[이]월 영등과, 三[삼]월 삼질과, 四[사]월 파일과, 五[오] 월 수뢰와, 六[육]월 유두와, 七[칠]월 백중과, 八[팔]월 가위와, 一〇[일영] 상달 등 名節[명절]은 다 신라로부터 숭상하여 오는 것이다.
【원문】제일편(弟一編) 상고(上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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