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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음악사(朝鮮音樂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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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12
안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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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音樂使[조선음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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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부] 處容[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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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을축년(1925) 7월에 당하여 음악사 편집의 논의를 이왕직( 李王職)에 제출 하였다. 그 당시에 예식과(禮式課)의 과장 이하가 회의를 열고 나를 초청 참여케 하여 의견을 서로 문답하여 이내 내 뜻을 좇아서 가결하더니, 이듬해 병인년(1926) 4월이 되매 이왕직에서 나를 촉탁에 임명하고 음악사 편집 사무를 전장(專掌)하였다. 그후로 만 4개년에 걸쳐서 편찬에 종사 할 새 저 간에 있어서 재료를 수집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악리(樂理)로 1416 매, 악기로 1221매, 노래로 1639매, 악보로 1340매, 춤으로 148매, 잡고로 3101 매, 도합 8천 수백 매를 조사하여 얻은 것이다. 거기 또한 아악 부( 雅樂部) 악공( 樂工) 들의 실제 연주에 의하여 마침내 2백 수십면의 원고를 작성한 것이다. 나는 본시 음악에는 문외한(門外漢)이더니, 이 사무에 당한 후로 악률( 樂律)에 대한 상식을 얻음에 이로써 얻은 바의 의사(意思)를 드러내어 신문 또는 잡지상에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조선 음악의 연혁( 沿革)을 소개하여 음악에 대한 설명은 이로써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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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음악 발원지는 가장 오랜 데가 인도와 중국의 두 곳이다. 그 음악 발생의 뿌리는 다 각기 다르니, 인도는 종교적이요, 중국은 도덕적이다. 조선의 음악 발생도 그 시대가 오래 되어 2천 수백년 전의 일로서 삼한( 三韓) 시대에 시작한 기록이 있다. 그 발생의 원인은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역사 기록에 보면, 인민이 모여 제천(祭天)하는 마당에 가무(歌舞)를 흥행 하였다하고, 삼한에서는 축(筑) 같은 현악기도 쓴 일이 있다고 하였다.『문헌통고 (文獻通考)』에"삼한의 풍속에는 귀신을 믿었고 언제나 5월에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밤낮으로 모여 마시고 북을 치고 금슬을 타고 노래하고 춤추고 땅을 밟고 하였는데 절도가 있었다. 10월이 되어 농사를 끝내고 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주 : 瑟[슬]은 筑[축]과 같다. 그것을 타는 음곡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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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 등에 부여(扶餘) • 예맥(濊貊) • 마한( 馬韓) 등지의 풍속을 말함에도 동일한 기록이 있어 "무리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그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서 서로 따르며 땅을 울리고 허리를 굽히고 손발을 서로 응하며 탁(鐸) 소리에 맞추어 절도 있게 노래하고 춤춘다.(群聚歌舞[군취가무] 其舞數十人[기무수십인] 俱起相隨[ 구기 상수] 蹋地低昻[답지저앙] 手足相應[수족상응] 節秦有以鐸聲[ 절 진유 이탁성]) "라고 하였다. 그런즉 당시의 노래와 춤은 토속적으로 발생한 것을 제식( 祭式)에 응용한 것인지, 또는 제식을 시초하여 비로소 발생한 것인지 자세치 않다. 그러나 추측으로 보면, 발생은 여하간에 제식에 크게 행한 것은 사실이니, 그러므로 조선의 음악 시초의 뿌리는 인도와 같이 종교적인 의미를 띠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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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의 가무악(歌舞樂)의 성질은 과연 어떠하였는지 이것을 연구함이 필요하다. 이상에도 말한 것처럼 여러 문적에 빙자하면 노래는 즉흥적으로 된 듯하다. 악기는 축(筑) 같은 현악기 곧 오늘날 가야금(伽耶琴) 같은 형체의 물건을 쓰고 또한 거기 박자를 맞추는 타물(打物)도 있었던 듯하다. 그 현악기에 대하여 출처가 미상하나 나는 그를 '한금(韓琴)’이라고 명칭을 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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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용에 있어서는 조금 사실(査實)하면 도리가 있다.『예기』명당위(明堂位)에 동이(東夷)의 음악을 '매(昧)’라 하고,『주례(周禮)』 춘관( 春官)에는 동이의 음악을 '매(靺)’라 하고 그 악사를 '매사(靺師)라 하며, 『 효경 』 구명결( 鉤命決)에는 동이의 음악을 '매(佅)’라 한 것이다. 이 '昧[ 매] • 靺[말] • 佅[매]’는 '매’음으로서 동음이자(同音異字)이니, 고대 동이의 악무(樂舞)를 '매’라 한 듯하다. 진양(陳暘)『악서(樂書)』권173에 매악( 靺樂)의 춤을 말하되, 동이의 춤은 완약이음설(緩弱而淫褻 : 느리고 약하나 음란하고 외설스럽다)이라고 하고 그 무리는 40명이 1단이라 하며, ' 매사’ 의 도본(圖本)에는 긴 창을 가진 것이다. 이는『주례』같은 조 주( 註)에 "그 나라에 좇아서 그 풍속을 고치지 않았다.(從其國[종기국] 不變其俗[불변기속])"라고 하였으니, 그 악제(樂制)와 풍격은 곧바로 당시의 본색을 유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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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상도 풍속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는 것과 음악회 등을 말하되 '매굿’ 이라 하는데, 이 '매굿’의 '매’는 앞서 말한 문적에 있는 '昧[ 매] • 靺[말]’와 같은 음인바 이로 인하여 옛날 악무의 명칭이 '매’가 됨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매굿’의 '굿’은 지금 무녀(巫女)의 신주 무용( 神呪舞踊)을 '굿’ 이라 하며, 또한 무당이 삼지창(三枝槍)을 들고 춤추는 의용( 儀容)과 매사(靺師)의 도본을 대조하여도 서로 같으며, 이 '매’ 와 '굿’을 합하여 말하는 것을 보아 음악의 발생은 고대 종교적 의식으로부터 시작된 일이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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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무용의 성질은 전쟁 생활을 형성한 바 평화스런 무사(武士)의 율동적 절률(節律)로 되고 손과 발이 서로 응하는 품이 활발도 하고 또 표정도 풍부하며 개인으로 추는 일도 있으나 흔히는 단체적이 많은 것이다. 그런 즉 당시의 악무는 제천 봉신(祭天奉神)의 사상이 있어 그딴에는 일체 감정을 표현함에 어떤 종합적 되는 형식을 자탁(藉託)하는 일이 있었다. 곧 당시 사람의 심사는 예술은 동시에 종교요 종교는 또한 예술로서 쌍방 관념을 떠나지 못한 것으로 된 듯하니, 이것이 고대의 음악 상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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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율동적 • 표정적 형식 ② 보통은 단체적 상고 무용의 성질 ① 무의미한 도약도 있다내용 ② 혹간은 극적인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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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는 음악이 점차 발달하였다. 이때는 사람의 지혜가 진보되어 각종 생활 정도의 발전을 따라 예술도 괄목상대의 형세를 이루었다. 그 심미감의 활동이 음악을 크게 진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음악 발달의 원인을 말하면 두 방면으로 관찰할 수 있다. 하나는 중국 수(隋) • 당( 唐) 의 문물을 수입하매 그로부터 중국의 음악이 유입한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관념으로서 선도(仙道)와 불교(佛敎)가 발흥하매 이로부터 부대 조건으로 음악이 크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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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는 23종의 악기를 썼으니 현악기 7종, 관악기 12종, 타악기 4 종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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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기 : 오현금 • 비파(琵琶) • 사피비파(蛇皮琵琶) • 와공후(臥箜篌) • 수 공후( 竪箜篌) • 봉수공후(鳳首箜篌) • 쟁( 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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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기 : 소(簫) • 약(籥) • 생(笙) • 적(笛) • 횡취(橫吹) • 의취적( 義嘴笛) • 대필률(大觱篥) • 소필률 • 도피필률(桃皮觱篥) • 호로생(胡蘆笙) • 소엽( 嘯葉) • 패( 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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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기 : 요고(腰鼓) • 제고(齊鼓) • 담고(擔鼓) • 철박판( 銕柏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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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3 악기는 수 • 당이 고구려의 악대를 설치하고 늘상 연주했다는 기록에서 조사해낸 것이다. 그러므로 국내에서는 실제에 있어서 그 이상의 악기를 썼는지도 알 수 없다.『통전(通典)』에 보면 "수 • 당 9부악은 모두 고구려와 싸우고 나서 상설한 것으로 25곡조가 있었다.(隋唐九部樂[수당구부락] 皆高麗伎武後[개고려기무후] 時常有二十五曲[시상유이십오곡])"라고 하고 『당서』양재사전(楊再思傳)에 보면, 양재사는 당시 재상으로서 고구려 춤을 춘 일이 있다 하니, 이런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의 음악은 크게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춤은 사인무(四人舞) • 호선무(胡旋舞) • 지서무( 芝栖舞) • 괴뢰(傀儡) 등이 유명했었고, 노래는 지서가(芝栖歌) • 내원성( 來遠城) • 연양(延陽) • 명주(溟州) 등의 곡조가 유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음곡의 악보와 문구는 지금에 전하지 아니하여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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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음악도 크게 발달한 모양인데 기록에 나타나 있는 악기는 겨우 11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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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기 : 금(琴) • 쟁(箏) • 공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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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기 : 간(竿) • 생(笙) • 적 • 지(篪) • 도피관(桃皮管) • 도피필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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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기 : 고( 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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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음악은 일본에 많이 전했으니, 『영의해(令義解) 』『 일본서기(日本書紀) 』 등에 의하면 삼국의 악사 각 4인, 악생(樂生) 각 20인을 항상 두었고 또 백제 악사(樂師)가 직접 교수한 일도 있으며, 사자무(獅子舞) • 곤륜( 崑崙) • 역사(力士) • 취호(醉胡) 등 10기(伎)가 행하고 그후 점차 발달하여 일월조(壹越調) • 평조(平調) • 쌍조(雙調)의 3조 합계 30여곡이 행하니, 현재 궁내성(宮內省) 식부(式部)에서 상주(常奏)하는 납소리곡( 納蘇利曲)은 당시에 전래한 것이라 한다. 노래는 정읍(井邑) • 지리산(智異山) • 선운산(禪雲山) • 무등산(無等山) • 방등산(方等山) 등의 곡조가 유명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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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음곡의 악보 및 문구는 전하지 아니한다. 그 가운데 정읍가( 井邑歌) 는 내가 『 악학궤범( 樂學軌範) 』에서 발견하여 발표한 것이 있으니, 이는 실로 진귀한 고문학 재료니『조선(朝鮮)』제 160호를 참조하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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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음악도 발달하였는데 그 사용한 악기는 11종을 헤아려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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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기 : 현금(玄琴) • 가야금 • 향비파(鄕琵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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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기 : 적 • 대금(大笒) • 중금 • 소금 • 각(角) • 가( 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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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기 : 박판(柏板) • 대고( 大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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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곡의 명목은 대단히 많으니, 춤으로는 회소(會蘇) • 가야(伽耶) • 황창랑( 黃昌郞) • 무애(無㝵) • 배해(俳諧) • 상염(霜髥) • 옥도령(玉刀鈴) • 지백( 地伯) • 처용(處容) • 대금(碓琴) • 가무(笳舞) • 하신열(下辛熱) • 사내( 思內) • 한기(韓岐) • 상신열(上辛熱) • 소경(小京) • 미지(美知) 등이요, 노래는 그 수를 매거하기 곤란한데 동경(東京) • 목주(木州) • 여나산( 余那山) • 장한성(長漢城) • 이견대(利見臺) • 처용(處容) 등 6곡은 고려시대까지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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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음악이 발달한 원인은 4가지가 있다. ① 정부에서 장려하니 진덕왕 5년(651)부터 음악서(音樂署)를 설치하고 장(長) 2인, 대사(大舍) 2 인, 사( 史) 4인 등 관원이 있어 악정(樂政)을 시행할새 새로이 작곡한 것도 있고 민요(民謠)를 수합하여 윤색(潤色)도 하며, 당악(唐樂)을 수입도 하니, 문무왕 4년(664)에 성천(星川) • 구일(丘日) 등 28인을 당의 군영에 보내어 당악을 학습하니, 이는 음악계의 새 소식을 전한 것이다. ② 민간에서 발흥하니, 이는 나라 사람의 자연적인 정(情)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③ 화랑도(花郞徒)라는 청년단이 있으니, 이 단체에서 가악을 숭상하여 각 지방에 순회하던 풍속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음악은 크게 진작하였다. ④ 승려의 조장이다. 불교도는 본시부터 신앙심을 고동(鼓動)키 위하여 음악을 숭상하는 풍습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불설(佛說)에는 부처의 영혼이 직접 음악으로 나타난다는 신비설도 있다. 이럼으로 해서 불교도는 크게 음악을 위주함이있으매, 불교가 홍포(弘布)하면서 그로부터 진전하는 음악은 일반음악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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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권1 사절유택조(四節遊宅條)에 "제49대 헌강왕(憲康王) 대에 성 안에는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고 처마와 담장이 연이어 붙어있었으며 노래부르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차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고 하고, 또 같은 책 권2 처용랑 망 해사조( 處容郞望海寺條)에 "서 울 로부터 망해사 경내에 이르기까지 담장이 즐비하게 이어졌으며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고 생황의 노랫소리가 도로에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 기사를 보면 신라시대의 음악은 물어보지 않아도 그 발달된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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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수입한 당악은 그 성질이 어떠한 것이냐. 본래 당악은 입부 기( 立部伎) • 좌부기(坐部伎) • 아악(雅樂) • 산악(散樂) 등 4부에 나뉘었으나 기실은 중국 본토악인 아악, 서역(西域)에서 유입된 속악(俗樂)의 2 부이다. 삼국시대에 유입된 것은 아악은 알 수 없고 속악을 주장하여 사용 하던것이다. 이는 무엇으로써 판단할 수 있냐 하면, 『 삼국사기 』 악지( 樂志)에 보면 조(調)의 명칭이 아악 명칭이 아니요, 반섭조(盤涉調)니 월조( 越調) 니 하는 바로서 모두 속악의 명칭만 있으니, 이로써 그를 미루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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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에는 본래 풍(風) • 아(雅) • 송(頌) 3악이 있었는데, 풍 • 아는서( 序) 가 없고 오직 송(頌)에 서가 있는 것이다. 송은 군신(君臣), 풍은 천지, 아는 종묘(宗廟)에 쓰던 것이다.『사기』은본기(殷本紀)에 의하면, 주( 紂) 때에 사연(師涓)이 미미지악(靡靡之樂)을 짓고 주(周)나라 말기에 정위( 鄭衛) 의 소리가 성(盛)하니, 이것이 곧 속악의 발생이다. 진(秦)나라 때에 아성(雅聲)이 망하고 한 무제(漢武帝) 때에 숙손통(叔孫通)이 12 아곡( 雅曲)을 지어서 종묘에 쓰고 양 무제(梁武帝) 때에 12아를 개명하여 12 화( 和)라 하였다. 이로부터 아악의 생명이 보전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한( 漢) 나라 때에는 이연년(李延年)이 서역악을 수입하여 신성(新聲)을 지으니, 이 서역 악의 선법(旋法)은 수리적이기보다 정적(情的) 음계에 의한바 자못 재 미있게 들리는 것이다. 이로부터는 속악이 일어나서 완전히 악단( 樂壇)을 차지하였다. 위(魏) • 진(晉) 때에는 아악 • 속악이 다 쇠미하더니, 북주( 北周) 무제(武帝) 때에 속악이 다시 성하게 되었다. 그때에 무제가 돌궐 녀( 突厥女) 를 받아들여 황후를 삼을새 당시 황후를 따라서 온 악사 1인이 있으니, 구자인(龜玆人) 소저파(蘇秪婆)이다. 수나라 때에 정역(鄭譯)이 음악을 정리할새 구자악(龜玆樂)에 의하여 음계를 표준하더니, 수나라 문제( 文帝) 때에 아악 • 속악을 나누어 정하여 2부로 따로 세우니, 이의 속악이 곧 삼국시대에 유입된 것이다. 이 말은 대강 정조(正祖) 때에 편집한 『 시 악화성( 詩樂和聲) 』에도 말하였으니"2변7균(二變七勻)의 설은 이미 『 국어( 國語) 』에도 보이거니와 한(漢)나라 경방(京房)의 무리가 때때로 예를 들어말 했는데 위(魏) • 진(晉)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전해지지 않았다. 수나라 정역( 鄭譯) 이 7균의 악리를 구자악에서 터득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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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국(龜玆國)은 중국 사승(史乘)에 보면 구자(丘玆) • 굴지(屈支)) • 구지( 俱支) 등 동음이자(同音異字)로 적혀 있는바 원대(元代)에는 고차( 苦叉)라 하고 지금은 중국 신강(新疆) 지방의 고차(庫車)라는 것이다. 그 나라는 중국 시절에 등양(騰揚)한 불교국이다. 희랍의 적기(笛妓)같이 산골에는 노류 장화( 路柳墻花) 가 벌려 있어 풍악이 크게 성하던 데다. 후한(後漢)의 반초( 班超) 가 먼저 통하여 그 음악을 수입하더니, 수나라 때 와서는 크게 왕성 하여 당에 이르러서는 대악(大樂)이 되고 만 것이다.『오대사(五代史)』 에"수나라 이래로 악부(樂府)에서 그 소리를 취하여 4 단 28조( 四旦二十八調) 로 대악을 만들고…… 대체로 9부악은 구자부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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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악은 속악의 근본이거니와 속악은 구자악 이외 서역악(西域樂)을 포함 하니 구자도 또한 서역이다. 그러므로 속악을 통칭 서역악이라 함도 있었다. 그런데 서역악이 속악의 명칭을 띠고 악단에서 큰 세력을 차지한 것은 하나는 호기적(好奇的) 또는 정적(情的) 선법(旋法)에도 있거니와 다른 하나는 불교에 수반하여 진흥한 바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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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北史)』양무제본기(梁武帝本紀)에"무제가 이미 독실히 불법을 존경하고 또 선재(善哉)등 10편을 만들어 정악(正樂)이라 이름하였는데 모두 불법을 기술했다. 또 법악(法樂)인 기동자(伎童子)가 있었는데 기동자는 범패( 梵唄)에 의지하여 노래했고 무차대회(無遮大會)를 베풀면 그것을 노래 했다."『요사(遼史)』의위지(儀衛志)에"주(周)나라가 쇠약해짐으로부터 선왕의 음악이 잠들어 없어지고 주남(周南)이 변하여 진풍(秦風)이 되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정(鄭) • 위(衛) • 진(秦) • 연(燕) • 조(趙) • 초( 楚) 의 소리는 서로 갊아들어 나오니 아성(雅聲)도 없어졌다. 한 • 당( 漢唐) 이 왕성해졌으나 문서(文書)에 서역음이 많이 나오고 이것이 대악 • 산악( 散樂) 이 되는데 전쟁의 일은 대체로 북음(北音)인데 이는 고취악 • 횡취악이 된다. 아악에 있는 것은 그 악기가 전아하고 그 음도 역시 서역 음이다."당의 악부(樂府)에는 직접 불교악을 숭상함이 많으니 9조 29곡이 유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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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사용한 악기 가운데 소(簫) • 약(籥) • 생(笙) • 간(竿) • 고( 鼓) 등 5악기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다 서역 악기다. 예컨대 패(唄)는 나각( 螺角)이라고도 하니,『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에"옛날에 한 나라가있었는데 범패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때 한 사람이 능히 범패를 잘 부는 자가 있어 그 나라에 이르렀다. 남녀가 범패의 소리를 듣고 매우 놀라고 감동 했다. …… 아름다운 소리는 패의 힘이 아니고 손과 입과 호흡으로 부는데 있으니 그런 다음에야 귀에 들리는 것이다."라고 한 비유도 있다. 비파( 琵琶) 는 범천화라구요(梵天火羅九曜)에 그려 있는 비파와 같은 모양이다. 삼국시대에 있어 특제품의 악기는 현금 • 가야금 • 비파 • 금(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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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玄琴)은 고구려 제2상(相) 왕산악(王山岳)이 진(晉)의 칠현금( 七絃琴)을 변작(變作)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나의 조사 고찰한 바로 보면 인도의 부이나라는 것이 유입되어 그것을 변작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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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笒)은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창작한 것이라고 하나 이는 한무제 때에 장건( 張騫) 이 서역에서 가져온 횡취를 본떠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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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은 진(秦)의 몽염(蒙恬)이 서역에서 가져온 쟁(箏)을 본떠 만든 것이다. 또한 각(角)이란 것은 그 종류가 많으니 현재 이왕직에 있는 각은 길이 3척 8촌으로서 매우 긴 나팔인데, 현재 서장(西藏) 나팔은 길이 10 척이나 되매 각이란 것도 역시 서장 물건이 유입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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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사용된 음계(音階)는 어떠한지 명문(明文)이 없으나 서역 악을 이용한 것이라 한 이상 그 음계도 서역 음계로 볼 것이며, 당시의 서역 음계는 『 송서( 宋書) 』 악지( 樂志)에 의하여 7음계가 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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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에는 고래로 5음을 썼다 하고 『세종실록』악보(樂譜)에 보면 5음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조(調)에는 평조(平調)와 계면조( 界面調) 밖에 없으매 이 2조의 음계를 보면 곧바로 7음으로 된 것이니, 이 7음계의 구성은 중국의 악률의 치조(徵調) 또는 우조(羽調) 선법(旋法)으로 된 것이나 다시 양악과 인도악에 대비 하면 조선조 界羽[ 계 우] 羽 [우 ] 徵 [징 ] 角 [각 ] 界商[ 계상] 商 [상 ] 宮 [궁 ] nidhapamagarisacdagfed 인도 沙陀調[ 사 타조] 서 양 음계 인도에는 20 몇종의 음계(音階)가 있으나 그를 대별할진대 Shadj 음계, madhayan 음계의 2종인데 그 Shadj조는 사타조(沙陀調)로 번역하여 온 것인 바 이 사타조가 조선 음계와 합치하고 서양악으로는 d조와 합치한다.『책부 원귀(冊府元龜)』에는 사타조를 태주궁(太蔟宮) 일명 중관 고궁조( 中管高宮調)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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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역악의 진동수는 아악(雅樂)보다 1률반이 놓아서 아악의 협종률( 夾鐘律)을 속악의 기본음으로 치니, 오늘날 조선악의 최저음도 역시 1률이 높게 된 것이다. 이로써 보면 삼국시대 음계는 서역악과 관계됨이 밀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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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처용무곡(處容舞曲)을 고찰 조사하면 그 박자의 진행 보조는 3 단으로 되니, 제1단은 절주(節奏)가 느릿느릿하고 제2단에는 절주가 조금 빠르고 제3단에는 급하고 빠른 것이다.『악학궤범』에는 이를 만기(慢機) • 중기( 中機) • 삭기(數機)라 하였다. 근일 악공들의 주악(奏樂)함을 들으면 역시 3단으로서 점점 급하고 빨라 끝에는 번급(繁急)한 박자 보조로 되니, 이규정은 서역악과 같다. 진양(陳暘)『악서』권160에"옛날부터 주악의 음곡이 끝나면 다시 다른 변화가 없다. 수나라 양제(煬帝) 때는 아담하고 맑은 곡조 로써 매 곡조마다 설명이 많이 있었다. 당나라 태종 때에는 사람들 이 곡조를 끝냈으면 하는 뜻이 있게 되면 다시 그 끝내는 곡조인 번잡하고 촉급 함을 사용하여 곡조를 풀어내게 하였다. 구자의 소륵(踈勒)은 오랑캐의 제도이며 중국의 음악이 아니니 깎아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에 보든지 또한 송(宋) 심괄(沈括)의『벽난만지(碧難漫志)』에"무릇 음곡이 바야흐로 끝날 때는 대체로 소리와 박자가 촉급하고 빠르다."라고 하였고, 장염( 張炎) 의 『 사원( 詞源) 』에 "크게 휴식하는 소리는 길고 작게 휴식하는 소리는 짧은데 작게 휴식하는 것을 바야흐로 끊고 크게 휴식하는 것을 잇는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서역악은 모두 3단의 변조됨을 알 것이니, 이로써 보아도 삼국시대 음악은 서역악 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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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음악적 사상은 물론 예술적 관념에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살피면 신비적 사상도 있으니, 옥적(玉笛)을 한번 불면 천재지변 또는 병란(兵亂) 등이 스스로 없어진다 하였다. 산신과 용신 등이 왕의 어전에 모습을 나타내어 가무를 행하였다 한 일도 있다. 가야 건국 설화에 구간( 九干) 이 가무를 행하매 하늘로부터 시조가 내려왔다 하니, 이런 신화( 神話) 등은 다 당시 음악사상(音樂思想)의 일면적 재료라 할 것이다. 그 신 비적인 음악사상은 비곡(祕曲) • 비전(祕傳)의 일이 있어 마침내 옛 곡을 산망( 散亡) 케 한 영향이 없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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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와서는 음악의 황금시대를 이룬 것이다. 이 시대 500년간에 사용한 악기는 56종을 헤아린다. 현악기 15종, 관악기 14종, 타악기 27 종이 번창한 것은 예종(睿宗) 때에 안직숭(安稷崇)이 송(宋)에 가서 아악( 雅樂)을 수입하여 악기 수는 크게 늘어났다. 그렇게 많은 악기를 씀에 있어서 극히 취품(取品)하여 미적 장식이 더할 나위 없게 되니, 당시 중국서는 고려 악기를 상품으로 치고 무역을 행함에 이르니, 송 • 원(元)의 이 원 제자( 梨園弟子) 들은 고려의 비파줄을 탈취하느라고 손가락을 다친 일이 있다 하며, 생( 笙) 도 고려식을 취하였다. 장광필(張光弼)의 배하 곡( 輩下曲)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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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옷은 새로이 고려의 모양을 숭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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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령( 方領) 은 허리를 지나고 반팔로 마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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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衣新尙高麗樣 [궁의신상고려양], 方領過腰半臂裁[방령과요반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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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 문구에 의하면 중국의 궁인들은 고려 기생의 복색을 유행으로 입은듯 하여, 『 제 동야어( 齊東野語) 』에 있는 조원보(趙元父) 조모 서씨( 徐氏) 의 이야기, 『 운광루잡지( 韞光樓雜誌) 』 의 비파 제( 琵琶製), 『 휘 주 후록( 揮麈後錄) 』에 보이는 양광공(楊光功)의 일 등을 참조하면 그의 관계된 일을 알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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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음악이 발흥한 제일 원인은 불교의 극성이다. 이 시대에는 승려 로써 왕사(王師) • 국사(國師)를 삼고, 불도(佛道)로써 국교(國敎)를 삼았던것이다. 매년 봄에는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가을에는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어 대규모로 설법(說法)을 행하고 3년에 한번씩 더욱 대규모로 도량( 道場)을 개최하였다. 이들 불공회(佛供會)에는 재승(齋僧) 3만이 동원되고 각종 장식을 크게 갖출새 여기에 따라 음악과 백희(百戱)를 흥행하니 악공은 한때 천여 명을 요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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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매년 봄 • 가을 궐내 회 경전( 會慶殿)에서 여러 가지의 온갖 법사(法師)들이 대장경 등의 도량과 불사를 개설하고 또 3년에 한번씩 인왕반야백좌대회(仁王般若百座大會)를 설치했는데 재승 3만 명으로써 항식(恒式)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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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의 팔 관 재시( 八關齋詩)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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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에서 생황의 노래를 부르니 옥을 깨듯 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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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문에 걸린 등불 찬란하기가 별을 펼쳐놓은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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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선비는 광대들만도 못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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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는 오히려 붉은 비단 도포 입고 궁중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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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部笙歌淸碎玉[양부생가청쇄옥], 九門燈火爛分星[구문등화란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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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儒不及倡優輩[우유불급창우배], 猶着緋袍入帝庭[유착비포입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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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전(崔忠獻傳)에"4월 초파일에 연등회를 베푸는데 화려한 누각을 얽어 기악을 펼치고 온갖 연희를 놀아 밤새워 즐기니, 도회의 남자와 여자 관람자가 담같이 죽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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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음악이 발흥한 제2 원인은 무사(武士)의 농악(弄樂)이다. 당대는 무사가 정권을 장악하여 국사가 전혀 저들의 수중에 달렸었다. 무사는 항상 연회를 개설하며 활발한 형식을 떨쳐 폄에 그에 따라 음악 백희의 오락적 호사가 크게 떨친 것이다. 이 발동(發動)으로 나오는 음악은 불교의 조장을 겸하여 한량없이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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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의 음악은 불교도와 무사들의 조장으로써 발달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도와 무사의 음악 관념은 흥을 돕는 부수물로 치고 예술상 한 부문의 가치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 음악은 예술적 진보를 얻지못하고 형식적 장엄함에 수식(修飾)될 뿐이다. 곧 이지적보다 정조적( 情調的)으로 기울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질보다 양에 있어 그 발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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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의 음악은 양적 발달에 따라 3종류가 있으니, 1은 향악(鄕樂), 2 는 당악( 唐樂), 3은 아악(雅樂)이다. 그 가운데 향악 • 당악을 합하여 속 악( 俗樂)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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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악 ………… 향악…… 속 악 음악의 종류 당악 외래 악……… 아악 ……… 정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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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雅樂) 은 송(宋)의 대성악(大晟樂)이니, 곧 중국의 고악(古樂)이다. 이는 다른 음악에 비하여 3종의 특색이 있다. ① 전혀 수리적( 數理的)으로 된 것이다. 그 수리는 천문(天文) • 역법(易法)에 부회(附會)하니, 우연히 양 악 음계와 거리 동리(同理)로 되었다. 그러나 매우 단조(單調)로 되고 그 율관( 律管) 곧 조자적(調子笛)은 오늘날 음향학(音響學)과 합치되지 않아 여러 악기의 합주가 서로 화협(和協)되지 못한다. ② 악좌(樂座)는 2조( 組) 로 나누니 위에 등가(登架)라는 악좌를 차려 노래를 위주하고 아래에 헌가( 軒架)라는 악좌를 차려 야외적인 합주를 행하니, 이는 천지 상응( 天地相應)이라는 조리에 부회(附會)한 것이다. ③ 일반의 악음은 모두 단속적이니, 곧 1음과 1음의 진행하는 중간에 반드시 휴지부를 삽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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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악은 위에 진술한 바와 같이 서역의 음악으로서 수리를 위주로 하지 않고 감정을 위주한 것이다. 여기는 무극(舞劇)을 주장하여 기생이 성( 盛) 하니, 조선의 기생은 실로 고려대에서 발흥한 것이다. 향악은 조선 본래의 음악이다. 그러나 대개는 당악과 같되 그 가사(歌詞)는 전혀 조선어로 된 것이다. 요컨대 향악의 일반 조직은 당악보다 단순한 양식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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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음악은 고려대 음악을 보수(保守)함에 힘썼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는 유교(儒敎)를 존숭함에 따라 학술적으로 발달함을 얻으니, 악론 • 악설(樂說)이 점점 발달해 나간 현상이다. 제7대 세조 때에는 전래 악곡을 절반씩이나 생략하여 간단을 위주로 하였다. 선조 때로부터는 점차 멸망 기에 당하여 나중에는 전혀 산망(散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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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에 정도전(鄭道傳)이 전대 음악을 정리 보존하더니, 세종이 그것을 재차 정리할새 세종은 아악을 주장하니, 당시 제조한 악기는 70 몇종에 이르렀다. 세종 때에 가장 이상한 색채를 나타낸 것은 불악(佛樂)의 가곡을 시작한 것이다. 명의 영락제(永樂帝)가 서승(西僧) 상사 합립마( 尙師哈立麻) 를 시켜 영곡사(靈谷寺)에 법단을 배설하고 황고비(皇考妣)를 천사(薦祀)한 대 범패 공악(梵唄空樂)이 천상에서 들렸다 하여 부처의 덕을 찬송하는 가곡을 지어 공중에 상행(尙行)한 것이다. 그때에 불가곡을 우리 나라에 보내니, 세종은 부처를 배척하나 명나라의 교섭을 받아들여 이에 불가를 일으켰다. 세종도 역시 인왕산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가 7곡 9장을 창하며 또 『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 』 도 지어낸 일이 있었다. 그 명의 불가 곡은 아직도 민간에 유행하여 매우 고상한 것으로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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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음악의 멸망한 원인은 악사(樂師)들의 과실에 있다. 본래 음악에 대한 사상은 고상하였으나 직접 음악의 책임에 대해서는 관노의 천인을 악사( 樂師) 로 임명하여 모든 악정(樂政)을 그들에게 일임한 것이다. 악사들은 본래 천인이라 지식도 없고 책임도 모르고 오직 쉽게 하고 군왕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심사만 있었으니, 그로 인하여 악기는 불협(不協)하고 옛 악곡은 그 참된 선율을 변하여 마침내 망국악을 지으니,『숙종실록』 20년 조, 『 효종 실록 』 18년조, 『정조실록』 2년조, 『순조실록』30년조 등을 참고 하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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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왕직 아악부에 보존한 악기 수는 50 몇종이 되나 모두 파기( 破器)에 불과하고 악사들이 실제 연주한다는 악곡은 9곡밖에 안되는데, ① 공자묘 제 악( 孔子廟祭樂) ② 종묘제악(宗廟祭樂) ③ 여민락(與民樂) ④ 보허자( 步虛子) ⑤ 영산회상(靈山會相) ⑥ 정읍곡(井邑曲) ⑦ 가곡(歌曲) ⑧ 낙양춘( 洛陽春) ⑨ 취타(吹打) 등인데, 모두 다 옛악보와는 잘못하여 선율이 틀리고 박자가 틀려 1곡도 들을 취미가 없다. 거기다가 악사들은 곡명을 자기 뜻대로 개변하여 그 진상을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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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음악사에 대하여 다시 말하여 둘 것은 군악대다. 각 군영에 군악을 전장( 專掌) 한 것은 2조(組)가 있으니, 하나는 내취(內吹)라 하는데 이는 진행 곡만 연주하는 악대요, 또 하나는 세악수(細樂手)라 하니 이는 군중 연회 또는 궁내 군사 행락(行樂)에 필요한 악대이다. 각 군영의 세악수는 각 기도가( 都家) 를 설치하고 악을 익혀서 나중에는 내취로 승차하는데 전 군악대는 선전관청에 계라(啓螺)라는 군관이 있어 그를 통솔하였다. 그런데 세 악수의 도가는 5처가 있고 그 5도가를 지배하는 대도방(大都房)이 있으니, 이대 도방에서는 전국의 무격(巫覡)을 관할하였다. 그들이 연주하는 악곡은 고취 곡( 鼓吹曲)인데 민요(民謠)도 연주하는 일이 있어 아악과 민간악을 조화 하는 기관이 되어 대중음악에 대하여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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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조선 음악을 연구함에는 두 길이 있으니, 첫째는 궁정 음악, 둘째는 민중 음악이다. 궁정 음악은 궁중에서 연주하던 것이니, 이는 군왕이 자기 조상의 공덕을 찬송하는 것, 자기의 위신을 위하여 의식( 儀式)으로 연주하는 것 또는 궁중 연회의 오락을 위하는 것 등 3항의 관념으로써 구성한 것이다. 이는 자못 학술적으로 된 것이다. 민중악은 국민음악으로서 전혀 감정적인 조화를 위주하여 인정미(人情美)에 합당한 자연적인 음악이다. 그러므로 민중음악 규칙을 정리한 선율에 나가서도 어떠한 경우에는 자기 감정에 맡겨서 그 규칙을 깨뜨리고 양악의 카덴사처럼 자기 애호하는 음을 넣는 습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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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음악에 있어 보통 사용하는 악기는 15종에 불과한 소수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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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기 : 거문고 • 가얏고 • 깡깡이 • 양금
102
관악기 : 저 • 피리 • 단소 • 날라리 • 각( 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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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기 : 북 • 소고 • 장고 • 징 • 제금 • 꽹과리
 
104
이 밖에 소관자(小管子)라는 3공(孔)의 소횡적(小橫笛)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산망하고, 혹시 나뭇잎을 입에 물고 부는 취금(嘴琴)이라는 것도 있으나 이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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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민중악으로 유행되는 악곡은 무릇 6종이 있으니 이는 다음에 기록 하겠다.
 
107
① 요곡(謠曲) : 민요의 곡조이다. 이는 민족의 충정에서 천진( 天眞)으로나 온 바 진정한 조선 음악이다. 각 지방의 풍속에 의하여 그들의 각기의 생활을 묘사한 것이니, 그 종류가 많으나 방아타령 • 영변가(寧邊歌) 2 곡은 가장 흥미 있는 것이다.
 
108
② 시나위 : 이는 심방곡(心方曲)또는 신방곡(神房曲)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신라 때부터 유행되던 것인바 궁중에서도 연주하여 무용곡에 썼다. 무녀의 신무(神舞)에도 쓰고 새타령 • 단가 • 춘향가 휘뚜루 쓰는 것이니 만 • 중 • 삭 3단으로 조직된 곡이다.
 
109
③ 영산회상(靈山會相) : 세조대왕 때에 작보(作譜)한 것인바 최초는 단편의 가곡이더니 뒤에는 가법이 망하고 9편의 투수(套數)로 이룬 조합곡이 되니, 상영산 • 중영산 • 하영산 • 상현(上絃)• 하현 • 도드리 • 염불 • 타령 • 군악 등이다. 그 유래는 당악의 인자곡(引子曲), 여민락 • 처용가 • 무용 곡 등을 혼잡하여 개선한 것인데, 그 가운데 타령은 양악의 홀라넨더( Hollanender) 씨의 칸초넷타곡과 흡사하다.
 
110
④ 가곡(歌曲) : 세종 때에 명(明)의 불곡에서 연작(演作)한 것이니, 24 투수가 있는데 모두 같은 조로 된 것이며, 반엽(半葉) • 평롱(平弄) • 편( 編) • 태평가 4편은 근사하고 기타는 모두 무미한 것이다.
 
111
⑤ 여민락(與民樂) : 세종대왕이 고전을 써서 『용비어천가』를 노래 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무미하여 성행치 아니하고 고상하게만 치는 것이다.
 
112
⑥ 취타(吹打) : 당의 고취곡(鼓吹曲)으로 왕의 마상 행진곡이다. 궁 정악으로는 가장 활발한 것이다. 이것이 사회에 유출되어 있는 것인데 도리어 천시하는 편이 있어 연주함이 적은 것이다. 이는 내가 양악보로 역 출하여 『 조선 』 잡지에 발표한 것이 있다.
 
113
이상 진술한 것은 악사(樂史)의 요점을 말한 것이요, 그것을 자세히 기술 하자면 적어도 수백 면이 될 것이나 현재 신악(新樂)이 발흥하는 시기에 있어 그를 자세히 말하면 도리어 연문(衍文)이 될 듯하여 그의 요점만 말 하여 둔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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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최종에 부록으로 간단히 말하여 둘 것은 처용악무(處容樂舞)이다. 이는 근래 보통 대연(大宴)에 흥행하던 것인데 줄곧 12월 그믐날을 당하면 궁중에서 역신(疫神)을 축출하는 의식으로 행하던 것이다. 그 유래는 신라 헌강왕 때에 용신(龍神)의 전설로 태어난 것이라 한다. 자세히 살펴보건대 『 삼국유사 』에 보이는 처용랑조에 왕이 개운포(開雲浦)에 행차하였다가 궁으로 돌아올 때에 당하여 햇빛이 어두워지매 이를 용의 행위라 하여 불사( 佛舍) 를 세우라 했더니 당시에 용의 아들이 모습을 나타내어 경성까지 모시고 왔던것이다. 왕이 미녀로써 장가들게 하고 처용(處容)이라 이름한 일이 있다. 그때 역신이 있어 미녀를 흠모하여 가만히 미녀와 잔 것이다. 처용이 그 를 보고 용서해 주니, 역신이 감복하여 처용의 화상(畫像)만 있어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 맹세하였다 하니, 이 전설이 전파되면서 민가에서는 처용 의 화본(畫本)을 문에 붙이고 역신을 예방하며, 궁중에서는 그로써 노래를 지어 역시 방역(防疫)의 방법으로 삼아온 것이다.
 
116
이 처용악무는 고려시대에 대단히 유행하였는데 전염병이 역질(疫疾)을 구축함을 위주하니 그 조직은 가면(假面) 곧'탈’을 쓰고 가무를 행하는 것인데, 그 노래는 처용의 의용(儀容)을 열거하여 노래부르며 열병신을 축출 하는 어사(語詞)로 되니, 그 처용가는『악한궤범』에 자세히 실려 있는바 우상( 偶像) 의 용모를 칭찬하여 놓은 것이다. 이 가무가 유행하여 온 것을 옛날부터 시인들이 영가(詠歌)함도 있으니, 『 가정 집( 稼亭集) 』『 도은집( 陶隱集) 』『 익재 집( 益齋集) 』『 목은 집( 牧隱集) 』『 허백당집( 虛白堂集) 』『 급 고유고( 汲古遺稿) 』 등에 산견(散見)하고 있다.
 
117
이제'처용(處容)’ 2자의 어원을 고찰하여 조사하 건대 『 세종 실록 』에는 처용의 '容[ 용]’ 자를 '用[ 용]’으로 섰으니'처용’이란 어원은 한어( 漢語) 가 아니라 조선어인바 한자로는 그를 동음이서(同音異書)하여 전한 것을 알 것이다.
 
118
『악학궤범』 처용가에는"신라 성대 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천하태평 나후 덕( 天下太平羅候德) 처용아바"인데, '나후(羅侯)’와'처용’을 같은 명사로 쓴 것은 짐작되니, 이 동일한 의미의 명사를 근거하여 살필진대, 『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 상원조(上元條)에 "남녀의 나이가 나후 직성이( 남자는 10, 19, 28, 37, 46, 55세, 여자는 11, 20, 29, 38, 47, 56세) 된자는 짚풀로 인형을 만드는데 그것을 우리말도'처용’이라 일컫는다."라고 하며, 오늘 날에도 경성 토속(土俗)에 정월 15일에는 가족으로 나이 가나 후직성에 해당하는 자는 풀짚으로써 인형을 만들어 축액(逐厄)의 도구로 삼는 일이 있는데 그를'제웅’이라 하니, ' 제웅’ '處容[ 처용]’ '草靈[ 초령]’ '草俑[ 초용]’ 의 네 가지 말은 동음이 자인 바를 알 것이다. 동시에나 후( 羅侯) 란 명사와 같음을 알 것이니, 그러면'나후’란 것은 무엇인가.
 
119
『대일경소(大日經疏)』에 "나후란 일식신(日蝕神)과 월 식신( 月蝕神) 이서로 모이는 것이다. (羅侯是交會蝕神)[나후시문교회식신]"라고 하고, 『 율 사경( 聿斯經) 』에는 "나후가 모일 계책을 세우면 이 나후직성이 자리를 숨기어 나타나지 않고, 해와 달이 만나면 일식 • 월식이 되는데 신이 삼켰다고 일컫는다.(羅侯計都[나후계도] 此星在隱位不見[차성재은위불견] 逢日月卽蝕[ 봉 일월 즉식] 號日蝕神[호일식신]"고 한 것이다. 그런즉 나후는 불경에 자리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는바 일식 • 월식을 하는 별의 이름이 됨을 알 것이니,『삼국유사』에 햇빛이 어두워졌다가 처용의 용자(龍子)가 모습을 나타냈다고 말하는 전설과 같음을 판연히 알 것이다. 더욱 『 성학 정전( 星 學正傳) 』에 처서(處暑)의 처(處)자를"숨기는 것이다. 감추어 숨은 뜻이다.(隱也藏伏也[은야장복야]"라고 하고 『 숙요경( 宿曜經) 』 상권에는 "대저 해 • 달 • 직성이 인간 운명의 조짐을 지키는 별을 가까이 침범하여 없애면이 사람은 액운을 만나는 때이다. 이때 마땅히 공덕을 닦아야 하는데 특별히 진언을 가지고 도량에서 염송함으로써 액회를 물리친다. 라고 하니, 제 웅 직성에 당한 자가 초용(草俑)을 만들어 액운을 쫓는 도구로 삼는 것과 그 초 용의 전설은 모두 불설(佛說)에서 양출(釀出)함을 알 것이다.
 
120
그러나 처용 가무를 전연 불가(佛家)의 조작이라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일보를 나아가 신라의 습속과 음악 등에 대조하여 그 근본을 완전히 조사 해냄이 필요하다.『삼국사기』헌강왕 5년조에 보면"3월에 나라 동쪽 주군( 州郡)을 순행(巡幸)하니, 어느 곳에서 온지 모르는 사람 4명이 임금 수레 앞에 나와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 용모가 이상스럽고 옷과 머리에 두른 두건이 괴이스러웠는데, 당시 사람들은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고 말 했다.(주 : 古記[고기]에는 헌강왕 즉위 원년의 일이라고 일렀다) "『 삼국유사 』 의 말과 같이 당시에 일식(日蝕)이 있었고 환궁 때에 어떤 괴인( 怪人) 이 출현하였던 일은 고기(古記)로부터 전한 사실인바 불설로 부회( 附會) 한 것은 본래 이런 근거의 전설이 있었던 바이다. 그리고 그것을 음악에 사용함도 본문에'가무’했다 함에만 붙여 볼 일이 아니다. 신라 가 악( 歌樂)에는 당풍(唐風)의 나례(儺禮)를 행함이 있으니, 나례란 것은 그 역신( 疫神)을 구축하는 의식적 가무다.『허백당집』관나시(觀儺詩)에 보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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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뜰의 봄빛이 빛나는 무대 위에 떠 있고
122
붉은 상의 무늬 있는 바지 종횡으로 빛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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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환은 참으로 둘러서 춤추는 데 마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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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는 도리어 나는 제비보다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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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집 네 귀퉁이엔 허수아비를 감추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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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의 긴 장대에서 술병과 술잔이 춤춘다.
127
임금은 광대의 놀이를 즐기지 않으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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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신하들은 흥겹게 태평세상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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祕殿春光泛彩棚[비전춘광범채붕], 朱衣畫袴亂縱横[주의화고난종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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弄丸眞似宜僚行[농환진사의료행], 步索還同飛燕輕[보색환동비연경].
131
小室四旁藏傀儡[소실사방장괴뢰], 長竿百尺舞壼觥[장간백척무곤굉].
132
君王不樂倡優戯[군왕불락창우희], 要興群臣享太平[요흥군신향태평].
 
 
133
이는 성현(成俔)이 장악원(掌樂院) 소임으로 있어 목도하여 영시( 詠詩) 한 것인데 이 가사의 뜻을 가지고 『삼국사기』악지(樂志)에 있는 최치원( 崔致遠) 이 오기시(五伎詩)를 보면, 그 오기(五伎)라는 것은 곧 나례(儺禮) 됨이 분명하다. 그 나례는 부속적으로 백희(百戱)를 겸하여 행하나 본래의 면목은 『 후한서 』 예의지(禮儀志) 동지조(冬至條)에 있는바 방상씨(方相氏) 탈을 쓰고 정신(正神)이 역신(疫神)을 먹어치우는 가사를 노래부르며 축신( 逐神) 의 연극을 행하는 것이니, 이 나례에 대하여 옛날부터 있던 신화를 불교적 부회(附會)로써 처용무라 한 것을 판연히 깨닫겠다 하는 바이다. 본래 나례에는 초용을 쓰지 아니하나 중세에 변화시켜 지음에 있어서는 초용을 쓴 일이 있으니,『고사유원(古事類苑)』에 있는 추나조(追儺條)에 보면, 일본 서도 고대에는 초용을 쓴 일이 분명한 것이다. 이럼으로써 나는 말하되, 처용 가무는 그 근원이 나례라 함을 주저치 아니하겠다. 본래 처용론은 내가 이미 원고를 작성하였다가 불행히 분실하였으므로 이제 자세히 말 하기 어려우나 나의 주장만 간략히 말하여 이에 부록한다.
 
 
134
<朝鮮[조선] 제170•171호, 1931. 12~1932. 1>
【원문】조선음악사(朝鮮音樂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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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음악사(朝鮮音樂使)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