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웅이란 것은 세계를 창조한 성신(聖神)이며, 세계란 것은 영웅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만일 상제(上帝)가 세상을 창조하신 이래로 영웅이 하나도 없었던들 아득한 산야는 새와 짐승이 울부짖는 쓸쓸한 풀밭을 이룰 뿐이며, 푸르디푸른 바닷물결은 고기와 용이 출몰하는 긴긴 밤 같은 굴을 이룰 뿐이요, 이른바 인류는 한모퉁이에 칩복(蟄伏)하여 몸은 있되 집은 없으며, 무리는 있되 나라는 없으며, 생활은 있되 법률은 없어서 단지 벌떼·개미떼 같은 꿈틀거리는 물건으로 이렇게 오며 이렇게 가며 이같이 살고 이같이 죽어 곰·범·승냥이에게 세상을 머리 숙여 양보하고 한번 웃고 한번 통곡에도 그 소리를 감히 높이지 못할 것이니, 슬프다, 영웅이 없고 세계만 헛되이 있다면 조물주가 눈을 들어 한번 바라봄에 쓸쓸히 슬픈 눈물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 시인 그레이가 말하기를, 우주란 것은 영웅을 숭배하는 등단(登壇) 전의 번연(翻烟)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
영웅이라 일컬음은 어떠한 명사인가. 영웅 두 자는 비유컨대 맹수를 범이라 하고 진금(珍禽)을 매라 함과 같이 위인에게 바치는 휘호(徽號)이다. 이 휘호는 어떠한 사람이이야 마땅히 얻을까. 그 입이 둘이라도 이 휘호를 얻기 어려울 것이며, 그 팔이 여섯이라도 이 휘호를 얻기 어려울 것이요, 오직 그 지식이 만인보다 뛰어나며 기개가 일세에 덮어 어떤 종류의 마력으로 든지 반드시 한 나라가 풍미(風靡)하고 천하가 산같이 우러러 태양이 만유(萬有)를 흡인하듯이 동서남북 수림이 빽빽히 울창한 듯한 인물이 모두 그 한몸을 향하여 노래하고 울며 사랑하고 사모하며 절하고 존경하여야 이에 그 사람을 영웅이라 할 수 있다.
4
이와 같은 것이 반드시 영웅이거늘, 고대인의 견식(見識)은 왕왕 협의적(狹義的)으로 영웅을 관찰하였으니, 가령 한국인더러 묻기를 “너희 나라의 영웅이 그 누구요”하면 대답하기를 “① 을지문덕 ② 연개소문이다”할 것이며, 중국인더러 묻기를 “네 나라의 영웅이 그 누구요” 하면 “① 진시황 ② 항우(項羽)다” 할 것이며, 서양인 및 일본인더러 물어도 대기 케사르·한니발·풍신수길 등에 불과할 것이요, 그 밖에 종교가·정치가·실업가·문학가·철학가·미술가 등에는 비록 기위굉걸(奇偉宏傑)한 인물이 출현하더라도 반드시 그 명칭을 구별하여 하나는 성현이라 하며 하나는 책사(策士)라 하며 하나는 부호라 하며 하나는 문호(文豪)라 하며 또는 고사(高士) 혹은 재사(才士)라 하여 영웅이란 휘호가 한모퉁이 무공가(武功家)의 전유물이 된 지 이제 수천년인데, 근세에 이르러 학문의 논리가 크게 밝아지매 협의적으로 영웅을 구하지 않고 광의적으로 영웅을 취하여 그 사람의 손에 칼을 잡았던지 대포를 잡았던지 붓을 잡았던지 주판을 잡았던지 문서를 잡았던지 이것은 다 따지지 않고 오직 그 잡은 바 잘하는 것으로 풍운을 질타하며 (風雲) 산하를 전이(轉移)하여 눈귀와 손발을 갖춘 영물(靈物)로 일체 그 무릎 아래 굴복케 하는 능력만 뛰어나게 있으면 이를 영웅이라 부르는 것이다.
5
이에 영웅을 관찰하는 범위가 고대보다 광활하고 또 고대에는 비록 어떠한 큰 영웅이 큰 안목을 쾌히 놓고서 큰 수완을 쾌히 휘두르더라도 듣고 보는 것이 국한되고 시세에 구애되어 프랑스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더라도 프랑스의 영웅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독일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더라도 독일 영웅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러시아에 있는 사람은 러시아의 영웅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스트리아에 있는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영웅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동아(東亞)의 영웅은 동아의 영웅일 뿐이요, 서구의 영웅은 서구의 영웅일 뿐이니, 곧 우리 한국으로 논할지라도 지난 시대에 세계적 영웅의 자격을 갖춘 인물이 어찌 없으리요마는 당시 공렬(功烈)과 위엄과 명망이 겨우 중국·일본에 미칠 뿐이요, 태평양 일대를 건너 유럽이나 각 대륙의 이목을 놀라게 못하였더니,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각기 자기의 능력대로 세계를 좌우할 만한 시대이다.
6
그 학술이 칸트 · 스펜서와 같으면 세계 학술가가 그 자리 앞에 무릎 꿇고 절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 선생 우리 선생이라 할 것이며, 그 정치가 그래드스턴 · 윌슨과 같으면 세계 정치가가 그 휘하에 나아가 엎드리지 않을 수 없어 위인, 위인이라 하며, 기타 사업에도 오직 그 사람의 재목과 인격에 따라서 가치를 얻으니, 이에 영웅의 활동하는 무대가 고대보다 장쾌(壯快)한 것이다.
7
그런즉 이 시대는 영웅이 분연히 소매를 떨치고 일어날 때가 아닌가. 저 학술을 닦지 않으며 의지와 기개도 기르지 못하고 세월만 헛되이 던져서 지금 두룡치활(頭龍齒豁)에 호흡이 막혀 숨이 끊어지려는 사람은 공자가 말씀하신 40·50이라도 듣지 못한 사람이라 족히 두려워할 것 없다는 한마디 평가를 더할 뿐이거니와 만일 저 청년 인사로 전정이 끝이 없는 사람은 그 회포의 크고 작음을 따라 사업의 크고 작음이 나타날 것이며, 그 인격의 높고 낮음을 따라 가치의 높고 낮음을 드러낼 것이거늘, 만일 고목(古木)을 근근히 지키어 완고함을 스스로 달게 여기거나 간난(艱難)을 두려워하고 겁내어 진취를 스스로 단념하거나, 옛사람을 우러러보아 미치지 못함으로 자처하거나 굴복과 실패를 슬퍼하고 , 탄식하여 희망을 스스로 끊거나 이 몇가지에 그 하나만 있으면 어지 가련하지 아니한가.
8
하물며 오늘날 국가는 국경을 막고 조약을 끊고 장막 안에서 스스로 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요, 반드시 세계와 교섭하며 세계와 힘껏 싸워야 세계 가운데서 독립함을 얻을 것이니, 그런즉 그 나라에 세계와 교섭할 영웅이 있어야 세계와 교섭할 것이며, 세계와 힘껏 싸울 영웅이 있어야 세계와 힘껏 싸울 것이니, 영웅이 없고서야 그 나라가 나라 됨을 어찌 얻을 것인가.
9
금년 새해 새달에 영웅론을 써서 새 인물을 불러일으키노라.
10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1908. 1.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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