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낙조(落潮) ◈
◇ 4 ◇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4권 다음
1948
채만식
1
落 照[낙조]
 
2
4
 
 
3
사흘인가 지나서였다.
 
4
점심 후 진고개(舊本町通)의 헌 책사를 들러 명동 거리를 내려오다 국방경비대의 소위의 복장으로 차린 영춘을 퍼뜩 만났다.
 
5
반가와하면서, 그러지 않아도 상의할 말이 있어 일간 나를 한번 찾아오려던 참이라고 하여, 골목 안의 조용한 다방으루 데리고 들어갔다.
 
6
손위의 형도 없거니와 손아래로 동생이 없는 나는 이 영춘을 친동생처럼 귀애하였고, 영춘도 나를 잘 따르고 신뢰를 하고 하였다. 더러 복잡한 일이 있든지 하면, 나를 찾아와 상의를 하곤 하였다.
 
7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나는 곰곰이 영춘을 바라다보았다.
 
8
키가 후릿하고 살이 알맞추 있고 표정은 분명하였다.
 
9
이 알맞은 살과 분명스런 표정은 3년 동안의 군대적인 강력한 훈련으로 다져진 것이었으리라.
 
10
체격과 기상은 그렇게 좋고, 국방경비대의 소위에 나이는 20…… 거동은 그러나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11
이렇게 어느덧 헌헌장부가 된 영춘이, 지금으로부터 열아홉 해 전 겨우 첫돌이 지난 젖먹이의 유아로 삐악삐악 울면서 어머니인 황주 아주머니 등에 업혀 고향 황주로부터 살길을 찾아 막막히 서울 거리에 나타나던 그 영춘이던가 하면, 희한도 하려니와 일변 감회 깊은 것이 없지 못하였다.
 
12
20이라는 어린 나이로는 흔치 못한 곡절의 연속이었다.
 
13
첫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미니의 등에 업혀 막막하고 고달픈 생애를 출발하였다는 것이 벌써 심상치 아니한 운명이었다.
 
14
열두 해를 가난과 고로(苦勞)와 싸우는 어머니 밑에서 찬밥덩이를 먹고 누더기를 걸치고 함께 고초를 겪으면서 자랐다.
 
15
고향 황주로 돌아가 살던 해방까지의 다섯 해 동안은 경제적으로는 매우 윤택하게 지낼 수 있는 시절이었다.
 
16
그러나 우울하고 늘 불안한 날을 보내야 하던 시절이었다.
 
17
형 박재춘이 일본인 소학교에다 전학을 시켰고, 중학도 일본인 중학에 입학을 시켰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18
일본 아이들은 ‘센징’ ‘요보’를 텃세하고 구박하였다. 함께 휩쓸려 놀아주지를 않고 돌려놓았다.
 
19
마늘 냄새가 난다구‘센징구사이’하다면서 옆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는 아이까지 있었다.
 
20
숙제 같은 것을 잘 하여 선생의 칭찬을 받는다치면 시새워 한결 더 구박을 하였다.
 
21
한 아이와 시비가 나면, 먼저 잘못이야 어는 편에 있던지 동족인 일본 아이의 편역을 들어 여러 놈이 몰매를 때리곤 하였다.
 
22
해방되던 해요, 중학 3년급에서 4년급으로 진급하던 무렵이었다.
 
23
그날치 한 학과에 예습이 미흡한 것이 있어 통학하는 차중에서 노트에 적기를 하다 연필심이 부질러졌다.
 
24
둘러보는데 마침 저편짝 구석자리에서 역시 통학생인 일본인 고등여학교 생도 하나가 연필을 깎고 있었다.
 
25
열서너 살이나 되었을까한 소녀였었다.
 
26
영춘은 가 칼을 빌려다 연필을 깎고는 이내 돌려주었다.
 
27
이날 학교가 파하여 정거장으로 오는 길에서, 영춘은 여남은이나 되는 일본인 생도들에게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늑신 매를 맞았다.
 
28
표방하는 죄목은, 중학생 녀석이, 더구나 주둥이가 새파란 녀석이 벌써부터 그런 풍기 아름답지 못한 거동을 하니 괘씸하다는 것이었었다.
 
29
저희들은 아주 노골하고 심각한 장난을 여생도들과 하면서…… 그러므로, 푸기 어쩌고 하는 수작은 억지엣 구실일 따름이었다.
 
30
두들겨패면서 그들은 연방 ‘센진노 구세니, 나이찌진노 죠세이도니 모숑오 가께루난떼 나마이끼’라고, ‘요보노 구세니, 붕기오 시라나이 야쓰’라고 하였다.
 
31
정히 민족적인 집단성(集團性)을 띤 성적 질투(性的嫉妬)였었다.
 
32
영춘은 억울한 매를 맞고도 분함을 꿀꺽꿀꺽 삼켜야 하였다.
 
33
형 재춘더러 말을 하면 그야 분풀이를 하여 주기는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신 영춘은 형에게 못생긴 녀석이라는 가혹한 꾸지람과 무서운 매를 맞아야 할 것이매, 차라리 혼자 꿍꿍 참고 말기만 못한 노릇이었다.
 
34
처음 입학하던 1년급 때에 일본 아이들한테 몰매를 맞고 돌아와 형에게 일렀다 사정 없는 꾸지람과 매를 맞은 전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5
아뭏든 그리하여 소년 영춘은 학업이 싫은 바는 아니면서도 학교가 싫어 우울하고 늘 불안한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36
8·15의 해방이 왔다.
 
37
영춘의 해방의 고마움을 살이 아프도록 느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38
그 기승스럽고 야속히 굴던 일본 아이들이 그만 풀이 껶여버리는 것이며, 죽은 소리도 못하고 봇짐을 싸는 것이며…… 주먹덩이 같은 것이 여러 해 동안 뭉쳤던 가슴이 단박에 후련히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다.
 
39
해방의 기쁨은 그러나 순간이었다. 형 박 재춘이 형수와 함께 참살을 당하였다.
 
40
현장에 가 시체를 거두어 올 염두조차 못하고 있는데 군중이 집을 습격하였다.
 
41
모자가 피하여 산에서 이틀을 지내고 내려왔을 때는 집은 지붕과 기둥만 앙상하니 남아 있었다.
 
42
사람은 없고 맹수만 시글시글한 고장에 있는 듯싶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해가 바뀌고, 이듬해 2월에는 재산의 몰수와 추방명령이 내리었다. 모자는 꿈에도 뜻하지 아니한 고달픈 남행(南行)을 다시 한번 해야만 하였었다.
 
43
영춘은 타고난 천품도 천품이었지만, 아울러 일찍부터 그러한 생활상의 신고와 곡절을 유난히 치른 것으로 하여, 그는 20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진 것이 있던 것이었었다. 영춘은 월남(越南)하여 와서 이내 국방경비대에 들었다.
 
44
돈이나 조금 가지고 왔다곤 하지만, 그것을 장대고 배포 유하게 공부나 하고 앉았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취직을 하자 하니 중학도 미처 마치지 못한 이력이매 우난 직업자리가 얻어질 리가 없고, 그래서 차라리 군인이라도 될까 하는데, 형님은 의견이 어떠시요 하고 나에게 상의를 하였었다.
 
45
나는 그렇더라도 학업을 계속하는 편이 옳겠다고 하였으나, 고쳐 생각하겠노라고 하더니, 역시 경비대엘 들어가고 말았다.
 
46
3년 반이나마 중학을 다닌 기초가 있고, 체격이 좋고, 다부진 구석도 있고 한 것으로 연해 술술 승차를 하더니, 오늘은 본즉 소위였었다.
 
47
시원한 차를 마시면서 피차의 집안 안부를 묻고 그러고는 시국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훨씬 그런 뒤에 영춘은 비로소 애틋한 황해도 사투리와 악센트가 섞이는 말로
 
48
“형님을 좀 뵙자든 것은 다름이 아니구요……”
 
49
하고 상의엣 말이라는 것을 꺼내었다.
 
50
“전 아무래두 집에서 나와야 할 거 겉애요.”
 
51
“………”
 
52
모친 황주 아주머니와 뜻이 오락 맞지를 않아 가끔 의견의 충돌이 있고 한 줄은 나도 알고 있었다.
 
53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54
“첨에 제가 경비대에 들어간 것은, 형님두 아시다시피 뚜렷한 목적이나 어떤 신념이 있어가지구 그랬던 지가 아니라, 막연히 그저 들어가 보았던 게 아니나요?…… 했던 것이 지끔 와선 저두 조금은 철두 들구, 또 군인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라던지 자각이라던지가 그동안 서진 것이 있구 해서, 전 제 한몸을 군인으루써 나라에 바치겠다는 굳은 각오가 생기구 말았어요. 그런데 오마인 글쎄 자꾸만 절더러 경비댈 고만두구 나오라구 조르구 성활 대시느만요.”
 
55
“어머니가?”
 
56
나는 부지중 이마를 찡그리면서 되물었다. 엊그저께서 황주 아주머니가 와 칼국수를 자시면서
 
57
“……이승만 박사루 대통령이 났으니깐. 이내 곧 정부가 생기구, 이어서 독립이 되구. 그리군 국방경비대가 쏟아져 나가서 38선을 뚜드려부시구. ……우리 영춘인, 이박사께서, 쳐랏 호령만 내리시면 지끔 당장 이래두 뛰어가서 38선을 무찌를 테라구. 저이 동간들허구두 늘 얘기하느니 그 얘기라구, 비번날 집일 다니러 오는족족. 그리면서 벼른답니다……”
 
58
하던 말로 미루어 아들 영춘이 국방경비대로 있는 것을 은연중 자랑도 스러워하는 눈치였지, 마땅치 않아하는 기색은 전혀 없지 않았던가.
 
59
“오마이 말씀은 이거야요. 오래잖아 인제 국방경비대가 북조선을 치게 될 텐데, 네가 만일 나갔다 죽기나 한다면 나는 누구를 바라구 살더란 말이냐? 그러니 일찌감치 지끔 나오구 말게 해라, 이거야요.”
 
60
“어머니의 처지루 생각한다면 그럭허시는 것두……”
 
61
“형님……”
 
62
영춘은 급히 말을 가로막으면서
 
63
“전 오마이 생각과 대단히 불순(不純)하다구 보아요. 오마인 늘 말씀이, 어서 바삐 이승만 박사께서 북조선을 쳐라 하는 영을 내리서야 우리 국방경비대가 38선을 직쳐 넘어가서 그놈들 공산당———살인강도 놈들을 모주리 쳐 죽여, 형의 원술 갚구 우리 재산을 도루 찾구 하느라구, 머 노래부르듯 하신답니다. 그리시면서두 절더런 북조선을 치다 죽으면 안되겠으니, 슬며시 자끔 빠져나오라구 졸라대시니, 말씀이죠, 형님. 나는 위험한 데서 빠지구, 남이 피흘려 가면서 일해놓는다치면, 가만히 앉았다 그 덕이나 보자는 교활한 타산이 아냐요? 그렇잖아요 형님?”
 
64
“………”
 
65
“그것이 우리 오마이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 사람들이 아주 나쁜 버릇이야요. 나는 안전한 곳에 편안히 앉어 구경이나 하다, 나중 가서 떡이나 얻어먹자구 드는 심보. 그거가 나랄 망해 먹은 장본예요. 조선 사람이, 그 버릇 그 심보, 내다 버리기 전엔 독립이 돼두 이내 또 망하죠. 대체, 희생정신과 민족관념이 없는 민족이 어떻게 자주독립을 길게 지탕하나요?”
 
66
“………”
 
67
“오마인 불순한 것이 또 있어요. 오마인,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게 되면, 공산당을 모조리 잡아 죽이구, 그래서 죽은 형의 원술 갚구, 그리구 뺏긴 집이랑 사과밭이랑 논이랑 다 도루 찾구 할 테니깐, 그래 오마인 밤이나 낮이나 앉아서 어서 바삐 북조선을 들이쳐야지 하구, 노래 부르듯 하는 거야요. 그러니깐 오마인, 남조선이 북조선을 친 그 결과를 관심하는 거지, 아들의 원술 갚구, 뺏긴 재산을 도루 찾구 한다는 것이 문제의 중심이지,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두 흥미두 없거든요. 또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못하냐 하는 것두 전혀 오마이한텐 문제가 아니구요…… 그러니깐 오마인 결국 남의 불에 겔(蟹) 잡자는, 아조 게으르구 이기적인 그런 타산(打算) 아냐요? 내 아들은 죽을까 무서니깐 슬며시 빼돌리구, 남이 필 흘려 주길 기대려 가만히 앉았다 원술 갚구, 재산을 도루 찾구 하는, 덕만 보자는 교활하구 이기적인…… 그렇잖아요, 형님? 형님은 오마이의 그런 맘상과 행동에서, 조선 사람 전체에 배 있는 망국 민족의 기질을 발견하신다구 생각지 않으시나요?”
 
68
“………”
 
69
“물론 전 명령 일하에 총을 잡구 나설 테야요. 38선 무찌르구, 북조선을 치구 할 테야요. 그렇지만 지가 북조선을 치는 데에 참가하는건, 그것이 통일 독립이라는 우리 조선민족의 지상 명령, 그 지상 명령을 실현하는 수단이란는 걸 잘 알구 있기 때문야요. 다른건 없어요. 형의 원술 갚는다는가, 그런 건 저한텐 문제가 아냐요…… 그야 저두 사람인 이상……”
 
70
영춘은 부지중 흥준하였던 음성을 차악 갈앉히면서, 곰곰
 
71
“필 노눈 형이 그런 악찬스런 죽음을 당한 것이 분하기두 하구 애처로운 맘두 없지 않아 있구 하긴 해요. 해두, 전 복술 할 생각은 없어요. 도대체 형이 잘못을 했으니까요. 너무 무도한 짓을 했으니까요. 방법이 좀 잔인했을 따름이지, 형은 자기가 저지른 죄과의 당연한 댓가를 치른거야요. 제가 그 고장 사람들이라구 하더래두, 도저히 박재춘일 용서하고픈 도량까지는 나질 않았을 거야요. 재산은 더구나 말할 것두 없어요. 정당한 재산이라구 한다면, 형이 처가에서 탄 백 주짜리 사과밭한 뙈기허구, 오마이가 서울서 가지구 내려가신 돈2천 원허구 그것뿐야요. 월남할 때 현금 10만 원 가지구 왔으니깐, 그 두 가지만큼은 넉넉히 찾은 심이 아냐요? 그 밖에 집이라든지 논이라든지 큰 사과밭이라든지 다시 찾구퍼 하는 맘부터가 벌써 죄야요. 이 다음 그것이 우리 것으루 돌아올 기회가 있다구 하드래두 전 절대루 그걸 받지 않을 테야요. 절대루……”
 
72
“으음……”
 
73
나는 저절로 이런 탄성이 흘러져 나오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영춘을 좋게 본 나의 눈이 무디지 않았음이 기뻤다.
 
74
일변, 그러나 나는 마음이 문득 어두워지는 것이 있었다.
 
75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는 날이면?’
 
76
혹은 북조선에서 남조선을 먼저 칠는지도 모르는 것인데, 한번 사단이 이는 날 우리는 남북을 해아리지 않고 대규모의 동족상잔, 골육상식이라는 피의 비극 속에 휩쓸려 들고라야 말 것이었다. 제주도의 사태가 전조선적인 구모로 확대가 되는 것이었었다.
 
77
“영춘아?”
 
78
“네?”
 
79
“너허구 나허구쯤 백날 앉아서 그런 걱정을 한댔자 아무 소용두 없는 노릇은 노릇이지만서두, 그 남조선이 북조선을 친다는 것 말이다. 그런 수단이 아니군 달린 남북통일을 할 도리가 없을 꺼나? 동족 도포끼리 서루 죽이구 필 흘리구 하질 말구서 말이야.”
 
80
“그야 슬픈 일이죠. 허지만 그밖엔 아무 도리가 없을 땐 그렇게라두 해서 남북은 통일을 해놓아야 할 게 아니겠어요?”
 
81
“남북이 반드시 통일이 돼야만 한다는 건 나두 절대 주장이지만, 아무래두 필 흘려야만 된다?”
 
82
“전, 최고지도잘 믿습니다. 이승만 박살 믿습니다. 평화적인 방법으루다 하다 못하는 날이면, 그때 비로소 비상수단을 취한다는 어짐과 총명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구, 그러니깐 전 명령이 나리는 날이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수단, 피치 못할 막다른 수단인 걸루 전적 신뢰를 하구서 총 잡구 38선으루 달려간다는 것뿐입니다. 핀 흘리드래두, 통일을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테니깐요.”
 
83
“………”
 
84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85
“영춘아?”
 
86
“네?”
 
87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다 만약 불행해서 실팰 하는 날이면?”
 
88
“글쎄요. 전 그럴 리가 없다구 생각합니다만……”
 
89
“무슨 근거루?…… 미군이 남도선에 그대루 주둔해 있을 테란 걸루?”
 
90
“형님?”
 
91
부르는 영춘의 기색은 문득 강경한 것이 있었다.
 
92
“형님은 우리 남조선에 미군이 앞으루 언제까지구 주둔해 있길 희망하십니까? 정부가 서구, 독립이 되구, 국제적으루 승인을 받구, 그런 독립국가 조선에 말씀야요. 형님은 미군이 그대루 주둔해 있길 희망하십니까?”
 
93
“희망토록은 아니지만…… 희망이라니보다두, 지끔 형편 돌아가는 눈치가 어쩐지……”
 
94
“외국 군대가 주둔해 있는 독립두 그것두 독립이나요? 보호국이지, 독립국은 아닌 거 아냐요?”
 
95
“그야 물론……”
 
96
“이승만 박사께서, 미국 신문기자한테 남조선에 독립정부가 서드래두, 미군은 눌러 그대루 주둔해 있어 달라구 할 테라구 말씀을 하섰다는 신문 기살, 허긴 저두 보긴 봤읍니다. 그렇지만, 전 이승만 박살 믿는 만침, 그 으런이 절대루 그런 말씀을 하섰으리라군 믿구 싶질 않어요. 그으런이 그런 생각을 가지구 기실 이치가 없어요. 아마 미국 자신이 어떤 정치적 필요에서, 의식적으루 꾸며낸 정치적 제스추어기 쉴 겁니다.”
 
97
“그럴까?”
 
98
“소위 북조선 인민해방군이 남조선을 친다는 걸 가상하구서 난 말인 것이 분명한데 말씀이죠. ……형님, 가사 그런다구 합시다. 그런다구 하드래두 우리 사상이나 정치 노선은 상극이라두, 다 같은 우리 조선 사람한데 압박이면 압박, 창피면 창필 받구 살아야 합니까? 내 땅을 외국 군대가 차지하구 있는 총칼 밑에서, 이름만 독립이요, 실상은 보호국 노릇을 하구 살아야 합니까?…… 전 노골한 말이지, 요새두 연방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루 오구 있는 사람들더러, 저 독도사건(獨島事件)을 비롯해서 개인적인 살인, 강도질, 강간, 천시, 모욕, 비방, 중상 이런 갖추갖추의 우릴 개도야지만큼도 못 여기는 그런 밑에서 살기와, 북조선에서 노동자 농민에 의한 독재(獨裁) 밑에서 핍박받구 살기와 그 어느편이 더 괴롭구 원통하구 섧구 하느냐구, 전 그 월남해 오는 북조선 동포들더러 한번 물어보구파요.”
 
99
“………”
 
100
나는 영춘의 말이 노상 편협한 감정인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101
“그러니깐 이상적으루야 외국 군대가 물러가구. 남조선이 자력으루 북조선을 쳐 뻐젓하게 남북통일을 해치우구 하는 게 이상적이긴 이상적인 데 말이다. 그러니깐 우선 그럼, 미국 군대가 물러갔다구 가정을 하자꾸나. 하구서,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는데…… 치다. 그만 불행해서 실팰 하는 날이면 어떡헌다?”
 
102
“그런 것두 한번은 생각을 해봄직한 일은 일이죠만, 저 자신이 잇읍니다.”
 
103
“넌 군인이니까 신념이 그래야 할 것이지만, 전쟁이란 실력으루 승패가 졀정나는 거지, 감정이나 희망으루 되는 건 아니니깐. 너나 나나 남조선이 북조선을 쳐 승릴 하길 바라구 또 그래야만 하긴 하지만, 지끔 남조선의 실력두 미지수, 북조선의 실력두 미지수, 따라서 승패두 미지수가 아닌가? 그러니 불행히 북조선을 쳤다 실팰 하는 날이면…… 이것두 한번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냔 말야?”
 
104
“남조선이 승릴 하면, 남조선 정부의 호령이 압록강 두만강까지 미칠테구, 실팰 하는 날이면 북조선 정권이 제주도까지 미치구 할 테죠.…… 남북 사이에 전단이 이는 날이면 그날루 38선이란 건 아뭏든지 없어지구서, 다신 유지되신 못할 테니깐요. 미국의 남북전쟁이 그랬구, 신라(新羅)의 백제(百濟)에 대한 통일전쟁이 그랬구 한 것 처럼, 이번의 남북통일 전쟁두 둘 중에 하나가 결정적으르루 쓰러지구 마는 그날까지 계속이 될 것이지, 그래서 남조선이 없어지거나 북조선이 없어지거나 하구서, 단지 조선이 남구 말 것이지, 절대루 둘이 다시 남아 있겐 아니 될 게 아니겠어요?”
 
105
“당연히, 북조선이 없어질 것이요, 그러길 우리는 희망하구 잇지만, 아차해서 북조선의 정권이 제주도에까지 미친다면?…… 생각만 해두 안타까운 노릇이 아냐?”
 
106
“그렇드래두 통일은 된 거 아냐요?”
 
107
그러면서 영춘은 딴 속 잇어 벌쭉 웃는 것이었다.
 
108
그러고는 내가 퍼뜩 놀라 짯짯이 저의 얼굴을 건너다보는 것을 보고는 또 한번 벌쭉 웃으면서
 
109
“염려하실 거 없어요. 빨갱이가 된 건 아니니깐요. 전 공산주인 절대루 싫어요.”
 
110
하고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111
“그렇지만, 형님. 제가 공산주의가 싫다는 것과 대세(大勢)완 다르지 않어요? 가령 여름날이 더워서 더운 것이 육체상으루 고통이요 싫다는 것과, 그러나 여름이란 더웁기루 마련이라는 것과 즉 더운 것이 대세라는 것과는 다르드끼 말씀야요. 저 한 사람이 공산주의가 아무리 싫다구 하드래두 북조선 정권이 제주도까지 오는 것이 모든 조건에서 대세란다면 전 그것을 적어두 이론상으룬 승인을 해야 하는 거라구 생각해요.”
 
112
“………”
 
113
나는 그것을 부인할 아무런 조건도 가진 것이 없었다.
 
114
“그러니깐 형님. 전 불행히 북조선 정권이 제주도까지 온다면, 감정상으룬 싫으나따나 이론상으룬 승인을 하긴 하겠지만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소련의 위성국가루써의 조선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어떤 방면에 있어서두 소련방의 간섭이나 그 제압을 받지 않는 완전 자주독립의 조선인민공화국이란 조건에서 승인을 하겠어요.”
 
115
“………”
 
116
“그리구 말씀예요, 형님. 전 비단 북조선 정권에 대해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 남조선, 대한민국에 대해서두 마찬가지야요. 옛날 비율빈처럼, 실권은 여전히 미국 재벌이 쥐구 앉었는 그런 독립은 일없어요. 일제시대의 만주국 독립 같은 그런 독립은 일없어요. ……만일 어떤 놈이구 간에 그 따위 정불 만들어 가지구 내용으룬 외국에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으면서 수염을 쓰다듬구 앉어선 독립을 했읍네 하구 국민을 호령하는 놈이 있다면, 전 그런 놈 면점 때려죽이구서 북조선을 치러 갈테야요, 단연코 용설 안해요.”
 
117
탁자 위에 놓였던 주먹을 하마 터질 듯 불끈 쥐면서 푸르르 떨었다. 눈은 불이 활활 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덧붙여 하는 말이었다.
 
118
“제가 만일 일한합병 때 나서 있었다면, 이완용이, 이용구, 송병준이 그런 놈들을 살려두질 않아요.”
 
119
차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마시면서 오래도록 서로 말이 없었다.
 
120
나는 여기서도 ‘무서운’ 후진을 봄과 아울러 범속(凡俗)하고 용렬한 나 자신을 다시금 발견하였다.
 
121
훨씬만에 영춘은 조용한 음성으로 새로운 말을 꺼내었다.
 
122
“춘자 누나를, 걸 어떻게 했으면 좋아요?”
 
123
“………”
 
124
춘자라면 나는 여러 가지 착잡한 감정이 일지 아니할 수사 없었다.
 
125
“동기간 의리에 불쌍하다군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차라리 전 청산카리(靑酸加里) 같은 거라두 앵겨주구파요.”
 
126
“………”
 
127
“인전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데까지 타락이 되구 말았어요.”
 
128
“………”
 
129
“해방되는 해 형님이 황주 오섰을 때, 제가 왜놈의 학교엘 다니면서 온갖 구박과 설움받는 이애기하지 않았어요? 그리구 통학열차에서 일본 계집아이한테 칼을 빌려쓰군, 왜놈의 아이들한테 무리맬(몰매) 맞인이애길 했죠? 들으셨죠.”
 
130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었다.
 
131
“전 그때, 왜놈의 아이들이 절 그렇게 몹시 때린 심정이 지금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대체 연애면 연애, 유희면 유흴, 조선놈허구나 한다면 구태라 누가 무어래겠어요?…… 어째서 그 XX놈들허구……”
 
132
춘자가 바람이 나기는 재작년 겨울부터였다.
 
133
미국 사람과 팔을 끼고 거리를 걸어오는 춘자와 딱 마주친 일이 있었다. 나는 알은체를 해야 옳은지, 모른 체해야 옳은지를 몰라 주춤주춤하는데, 춘자는 보아란 듯이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지나가 버렸다.
 
134
미국 사람과 찌프카에 앉아 달리는 것도 두세 차례 보았다.
 
135
춘자네 집 아래 찌프카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136
마침내 지나간 유월인가는 춘자가 아이를 뱄다는 소문이 좌악 퍼졌다.
 
137
그 소문이 퍼지면서, 춘자의 그림자는 거리에서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도 그 뒤로는 만나지 못하였다.
 
138
춘자가 타락이 되고 만 데는 그 책임이 한 부분은 나에게 있다면 있을 수가 없지 아니할 내력이 있었다.
 
139
황주서 맞선까지 보았다는 그 평양 청년과의 혼인이 깨어진 것은 춘자에게 커다란 타격이었음일시 분명하였다.
 
140
연애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맞선까지 보았고, 저편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춘자만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고, 혼담이 상당히 익었고 했던 것을, 남자편에서 파혼을 선언하였으니, 셈 들 대로 다 든 숫처녀로서 당하기엔 견딜 수 없는 실망이 아닐 수 없을 것이었었다.
 
141
나를 따라 서울로 한 보름 동안 우리 집에 있으면서 차차로 나에게 하는 태도가 매우 자연스럽지 아니한 것이 있었다. 생각컨대 한 잠자던 감정이 문득 파혼의 앙앙한 반감과 절망에서 오는 하나의 자포적이며 의식적인 반동으로 인하여, 그것이 비로소 불붙어오른 것일는지도 몰랐다.
 
142
우리 집에서 나가던 바로 그날 아침이었다.
 
143
안해는 여느때대로 부엌에서 어멈과 함께 조반 분별을 하였고, 나만 건넌방에서 혼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그러자 앞문 밖에서 춘자의 음성으로
 
144
“오빠, 나 어제 신문 좀 주세요.”
 
145
하였다. 그러면서 앞 미닫이가 손 하나 드날만큼 바깃이 열렸다. 그 열린 사이로, 툇마루에 가 모로 걸터앉았는 춘자의 소매 짧은 폴로샤쓰 소매 아래로 포동포동 드러난 팔이 내어다보였다.
 
146
처음 보는 바도 아니었으면서, 그렇게 보는 춘자의 팔은 그날 아침 따라 심히 매혹적인 것이 있었다.
 
147
책상 위에서 신문을 집어 열린 문 사이로 내밀어 주는 신문과 바뀌어 무엇이 문턱 안으로 사풋 떨어졌다.
 
148
배 볼록한 하얀 각봉투였다.
 
149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피가 와락 얼굴로 쏟혀 올랐다.
 
150
어른 미닫이는 닫혔으나, 편지‒‒‒‒각 봉투는, 기쁘면서도, 일변 방바닥에 흘린 숯불덩이같이 뜨거울 것이 무서워 손이 움츠러들었었다.
 
151
아까 춘자의 폴로샤쓰를 입은 드러난 팔이 매혹적이어 보인 것이나, 시방 그 편지를 바라다보면서 기뻐하는 것이나, 그것은 한가지로 나의 가슴속에서 진작부터 움터 가지고 잇던 어떤 특수한 한 개의 감정상태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일컬어 연애라고 하는 것이었다.
 
152
세상에 난 지 33년 처음이었다.
 
153
나는, 그리고 춘자보다도 내가 먼저 춘자에게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154
1945년 여름, 황주에 갔을 때 그때부터였든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도 더 멀리 춘자가 서울서 황주로 내려가던 열일곱 살 적, 햇물의 은어처럼 발랄하고 귀염성스럽고, 나를 따르고 하던 그 춘자 적부터였을는지 모른다.
 
155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집어들었다. 앞에다 ‘송선생님’ 뒤에다 ‘춘’ 이렇게 썼었다.
 
156
나는 편지를 뜯을 용기를 문득 내지 못하였다.
 
157
그 속에는 내가 일찌기 들여가 본 적이 없는 화려한 세계가 담겨 있을 터이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무서운 세게이기도 한 것이었다.
 
158
나는 눈을 감았다.
 
159
나는 나 스스로가 몸을 단정히 가져 나의 어린 사람들에게 본받이가 되어야 할 직책에 있는 사람이었다. 의 아닌 행동을 하면서 어린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양심의 자살이었다.
 
160
나는 안해가 있는 사람이었다.
 
161
나의 안해는 연애를 한 것도 아니요, 도타운 애정이 서로간 있는 바도 아니었다. 보통학교를 겨우 마쳤을 뿐이니, 속에 든 것도 없고 인물도 별반 보잘것이 없었다.
 
162
그렇지만 그는 나의 안해임에 틀림이 없고, 나는 그의 남편임에 역시 틀림이 없었다. 좋으나 낮으나, 안해가 있는 사람이 한 다른 여자와 연애를하고 어쩌고 한다는 것은, 나의 윤리로는 허락할 수 없는 패덕(悖德)이었다.
 
163
고운 장미꽃을 완상하기 위하여, 꽃에 달린 가시에 살을 찔려야 하느냐, 꽃을 내다버려야 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비록 30분에 지나지 못하는 시간이었으나 심각하기로는 다시 없이 심각한 암투를 치러야 하였다.
 
164
나는 편지를 종이에 싸가지고 춘자가 거처하는 뜰아랫방으로 내려갔다.
 
165
춘자는 내가 대뜰에 서는 것을 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 못하였다. 옆 볼때기로, 귀로 부끄럼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166
나는 그 고개를 푹 숙이고, 볼때기와 귀밑이 새빨개서 앉았는 이때처럼 춘자는 어여뻐 보인 적이 없던 것 같았다.
 
167
“왜, 쓰잘데없는 장난을 하는 거야?”
 
168
낮은 음성으로 나무라면서 나는 종이에 싼 편지를 돌여뜨리고 돌아섰다.
 
169
나는 나의 음성과 말씨가 내가 들어도 몹시 매섭고 얼음같이 찬 데에 스스로 놀랐다. 결코 그다지 냉혹하게 말을 할 생각인 것은 아니었었는데 말이었다.
 
170
남들도 그런지는 몰라도 연애란 이상한 물건이었다. 그렇게 드는 칼로 베듯 선 자리에서 잘라버렸으면서도, 그날 그 시각 이후로 춘자의 영상은 나의 가슴에 지진 듯 박혀가지고 말았다.
 
171
나 혼자서 나 자신도 모르게 연애를 하고 있던 연애에다 춘자가 비로서 그런 모션을 보인 것으로 하여 볼에다 기름을 부은 소리치라고나 할 것인지.
 
172
잊으려고 하나 잊혀지지가 아니하였다. 무시로 불현듯 생각이 나고, 심한 때는 좌우간 얼굴이라도 좀 보았으면 싶을 적도 있었다.
 
173
늘 거취가 궁금하고 행동이 염려스럽고 하였다.
 
174
타락한 줄을 알았을 때는, 나는 울기까지 하면서 일변 가슴 아프게 책임도 느꼈다.
 
175
조반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춘자는 행장을 참겨가지고 우리 집을 나갔다 우리 집에서 나간 춘자는 일자로 발걸음을 끊었다.
 
176
그 뒤, 황주 아주머니가 월남하여 와 살면서부터는 종종 만날 기회가 저절로 있고 하기는 하였다.
 
177
춘자는 가족이나 아는 이가 있는 자리에서는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내색을 아니하였으나, 혹시 나와 단둘이 만나는 때는 뽀로통해 가지고 인사도 변변히 하지 않았다. 겨우 마음 내켜야 한단 소리가, 피 도덕군자님 행차시군이었다.
【원문】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25
- 전체 순위 : 1884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245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3) 날개
• (2) 쑥국새
• (1) 고향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낙조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8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4권 다음 한글 
◈ 낙조(落潮)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