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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壁) ◈
◇ 제 1 막 ◇
카탈로그   목차 (총 : 4권)     처음◀ 1권 다음
1959년 6월
이무영
1
벽(壁) · 전 3 막 4 장
 
2
때  현 대
3
곳  서울
4
사람
5
  안현식 (고고학자· 교수, 48 세)
6
  정혜경 (안의 아내, 40 세)
7
  안응길 (안의 장남· 고교생, 18 세)
8
  안현수 (안의 제·병종, 28 세)
9
  안옥주 (안의 딸· 여대생, 24 세)
10
  이승달 (옥주를 짝사랑·유한 청년.27세)
11
  분 이 (식모, 19 세)
12
  윤임숙 (혜경의 동창생·혜경과 동년배)
13
  박인혜 (동)
14
  최계숙 (동)
15
  오영란 (옥주 친구)
16
  김형근 (의사· 윤임숙 남편, 43 세)
17
  박 호 (시인, 38 세)
18
  오 교장 (오영란의 부친, 55 세)
 
 
19
제 1 막
 
20
무대
21
  안 교수의 주택. 학교 사택이라 비교적 넓다. 정면으로 내실. 내실 앞으로 한· 양 절충식의 대청. 우측으로 사랑 겸 응접실. 현수가 주로 쓰고 있다. 우측에 조그만 방. 응길의 공부방이다. 현관은 우측 후면에 있으나 보이지 않아도 좋다. 이층 계단은 무대 구성상 어디도 좋다.
 
22
  초춘 오후 3시 경
23
  막이 오르면 내실에 혜경. 낮잠을 자고 있다. 몸치장에 무관심한 성격. 중심적인 대범한 여인이다. 현수는 막이 오르기 전부터 자기 방과 대청을 거친 사자처럼 왔다 갔다한다. 몹시 흥분했다.
 
 

 
 
24
현수 -   (거닐며) 벽! (대청까지 와서) 벽! (또 거닌다.) 벽이란 말야. (대청까지 또 나와서) 어디를 보나 벽이다! 벽! (또 거닐면서) 벽이란 말야. 앞을 보나 뒤를 보나 벽이다. (거닌다.) 옆도 벽, 하늘도 벽! (멍청하니 서서 기가 막힌 듯이) 그러니 난 어떡한다지? (사이. 갑자기 소리) 엉! 그래, 어떻게 해야 좋다는 거야.
 
25
혜경 -   (깜짝 놀라 일어난다.)
 
26
현수 -   네, 아주머니! 난 어떻게 하면 좋다지요?
 
27
혜경 -   즈 삼촌도 남들처럼 취직두 하고 결혼두 하고 자식 낳고 살아야지요?
 
28
현수 -   그래, 사방 꽉 막힌 이 벽을 그냥 두구서 살아야 한단 말이지? 에잉! (홱 현관으로 뛰어나간다. 현관문 메다치는 소리)
 
29
혜경 -   (부스스 마루로 나오면서) 날마다 벽만 찾으니 그래, 벽 없는 집에 살기가 그렇게도 소원이람? 그럼 동물원으루 가서 곰이 되거나 새가 되거나 할 께지, 사람 사는 집에서 벽타령만 하니. (하품) 아이, 낮잠 한번 맘놓구 못 자게 하니.
 
30
임숙 -   (그때 현관 쪽에서 소리만) 집에 있니?
 
31
혜경 -   (반가이) 어, 어서 들어와.
 
32
인혜 -   (소리만) 집에 있니?
 
33
혜경 -   아니, 거 누구냐? (그제야 일어나며) 인혜 목소리 아니냐?
 
34
인혜 -   왜 아니어, (올라온다.) 또 있어 괜히.
 
35
계숙 -   (소리만) 집에 있냐? (하고 올라온다.)
 
36
혜경 -   아아니, 이거 모두 웬일들이야.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계숙이가 다 우리 집엘 온다냐. 어서들 이리루 들어와. (새삼스럽게 계숙의 손을 잡으며) 아아니. 정말 니가 다 웬일이냐. 참 오래간만이로구나. 이건 아주 동창회나 하는 것 같구나.
 
37
계숙 -   내가 아니. 작은 계집애가 봄 세탈 짜내라구 악질 부려서 그걸 들구 앉았으려니까 저것들이 몰려와서 영감두 없는데 놀러나 다니지 뭘하느냐고 잡아 나꾸는구나.
 
38
임숙 -   그럼 뭐냐. 선생님은 전세계를 빙빙 돌면서 오늘은 미국 여자. 내일은 독일 여자, 또 모레는 불란서 여자… 이렇게 끌구 다니며 뒹구는데 또 글쎄 저 멍추는 이 좋은 봄날에 털실뭉칠 들구 앉았구나. 청승맞게두.
 
39
혜경 -   그러면 그렇지. 계숙이가 제 발루 우리집엘 걸어올 리가 없지…
 
40
인혜 -   옳지. 그래서 자꾸만 택실 타자구 그랬구나?
 
41
혜경 -   그러다 보니 수선 피우다가 인사가 늦었구나. 축하합니다. (절한다.)
 
42
계숙 -   아니. 얘가 생급스럽게 이게 다 뭐야? 축하가 다 무슨 축하냐?
 
43
혜경 -   서방님께옵서 사회사업 시찰차 세계일주를 하시잖아?
 
44
계숙 -   에이끼. 무슨 소리라구. 인저 얼마 안 있으면 돌아올 텐데 인제서야 인사야? 왜 좀더 뒀다 하지 그러냐?
 
45
인혜 -   그래두 사후 약방보다야 낫지 뭐냐? 공짜니 그냥 들어둬.
 
46
혜경 -   자. 이러지들 말구들 앉자꾸나. 어디가 좋을까. 안방으로 모실까요. 여기에 모실까요?
 
47
인혜 -   네 양심껏 해!
 
48
임숙 -   고리탑작지근하게 방은 무슨 방. 이 좋은 봄바람에 ─ 강화 화문석에다 쌍길 철자 둥근 방석에 화채 그릇두 자개쟁반에 받쳐내 오구.
 
49
혜경 -   얘, 화채가 있을까봐 걱정이다. (안방에서 돗자리 내다 깔며) 강화 화문석은 있어도 방석은 없다야. (모두 앉는다.)
 
50
임숙 -   아니 그래. 넌 술두 입에 안 대는 서방님을 뫼시구 살면서 식혜 같은 것두 마련이 없단 말이냐. (시어머니처럼) 애아범이 불쌍하다니까. (일동 웃는다.) 금지옥엽으로 키워가지구… (우는 시늉을 한다.) 애아범이 불쌍해 못 보겠다니까.
 
51
혜경 -   (따지려 든다.) 에이, 망할 것! (안으로 대고) 얘, 분아. 분아!
 
52
소리 -   네. (나온다. 귀여운 처녀다.)
 
53
혜경 -   앞가게에 가서 사과하구 과자 좀 들여오게 해.
 
54
인혜 -   관둬, 얘.
 
55
혜경 -   과잔 고급으로 달라구 그래. 유과나 하구 드롭스하구 섞어 달라구. 그러구 냉큼와!
 
56
분이 -   네. (나가는데)
 
57
임숙 -   얘, 그만둬라. 뭐 우리가 사둔집 아이들인 줄 아냐? 드롭스는 다 뭐야. 저 앞 중국집에 가서 양장피잡채 한 그릇하구 짜백이 한 접시하구 해삼탕 하나, 그러구 짬뽕 세 그릇 ─ 이렇게 시켜 오너라. 아니, 네 그릇이군. 넌 짬봉이 싫거든 다른 것 맘대루 시켜 먹어. 너 뭐가 좋으냐?
 
58
분이 -   전 아무것두 안 좋아요.
 
59
임숙 -   그래? 그럼 눈깔사탕이나 하나 사먹든지.
 
60
분이 -   (어쩔 줄 몰라서) 저, 아주머니.
 
61
임숙 -   (얼른 받아서) 왜 그러냐? 돈? 돈은 나중에 어련히 와서 받아 갈라구. 어서 냉큼 갔다 와요! 또 접때처럼 제비 뽑는 구경하다가 해지우지 말구.
 
62
분이 -   아이 참, 아주머니두. (주저한다.) 저…
 
63
임숙 -   아니, 저년이 뭘 저 저 하구만 섰는 겐가? 외상값두 없는데 왜 안 갖다 주겠다구 저러구 섰다는 겐구? 어서 냉큼 갔다 와! 손님들이 욕하시겠다.
 
64
혜경 -   아이, 망할 것! 쥔 뺨치겠다. 당초에 입 한번 벙끗한 틈두 안 주는구나.
 
65
임숙 -   까마귀 소리 열 소리에 한마디 신통한 소리 없다구 네 입에서 존 소리 나오겠냐. (분이보고) 어서 쪼르르 갔다 와!
 
66
인혜 -   (주인처럼) 아이구, 할 수 없구나. 이 깡패들이 왔으니 안 된다며 되겠냐? 어서 갔다 오너라.
 
67
계숙 -   그래. 잘 생각했네나. 그저 우리 애어미가 싹싹은 하니라. 분아, 어서 갔다오 너라.
 
68
혜경 -   남자들만 어깨가 있는 줄 알았더니만 여편네 어깨패두 있구나! 정말 안 되겠다. 어서 갔다 오너라.
 
69
분이 -   네. (반신반의 나간다.)
 
70
혜경 -   아니. 망할 것들! (새삼스럽게 계속보고) 넌 참 오래간만이로구나? 한 반년이나 된 것 같다, 얘.
 
71
계숙 -   같다가 아니라 그렇게 될 거다, 얘. 어쨌든 우리집 양반이 미국으루 떠나실 때두!
 
72
혜경 -   떠나실 때두는 다 뭐냐, 떠날 때지.
 
73
계숙 -   그래, 어쨌든 떠나실 때두 (일동 웃는다.) 너 비행장에 안 나왔지?
 
74
인혜 -   그만 할려구 그러는 거야, 얘.
 
75
혜경 -   남의 신랑 길 떠나는데 내가 뭣하러 비행장까지 나간다니?
 
76
계숙 -   그러니까 벌써 반년이 넘었단 말야!
 
77
혜경 -   그런데 넌 어쩐 일이냐? 참.
 
78
계숙 -   뭐가?
 
79
혜경 -   언제 봐두 늘 그 모양이니. 오 년 전이나 삼 년 전이나 늘 그 모양이야. 네가 나보다 한 살 위 아니냐?
 
80
계숙 -   난 또 뭔 소리라구. 넌 몸치장을 않으니까 그렇지, 뭐.
 
81
임숙 -   아니,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넌 참 어쩌자구 그러니?
 
82
혜경 -   뭘?
 
83
임숙 -   언제 와 봐두 떠꺼머리 총각녀석처럼 머리는 이남박으루 하날 해가지구 언제보나 선잠 깨구 난 사람 같더라, 얘.
 
84
혜경 -   살림하는 사람이 그렇지 뭐냐.
 
85
임숙 -   쟤 좀 보게나. 아니, 그럼 너만 살림을 하구 우린 물무당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말이냐?
 
86
인혜 -   저것이 우릴 유한 매담을 만들 작정인가봐?
 
87
임숙 -   아니. 정말 너두 좀 옷두 챙겨입구 미장원에두 좀 가구 그 흔한 코티두 바르구 하렴. 너 그러다간 다 늙게 오쟁이 차지 않겠니?
 
88
혜경 -   얘야, 너 그럴 때까지만 살아라.
 
89
인혜 -   입찬 소린 무덤에나 가서 하랬단다. 얘, 느 서방님은 채가면 안 채인다던?
 
90
계숙 -   정말이다, 얘, 접때 어떤 잡지에서 보니까 남편을 바람나지 못하게 하는 비결이 났는데 언제나 남편 앞에서는 아름답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 더구나. 둘째가 뭐더라? 그래, 반드시 남편이 먹는 음식은 식모한테 맡기지말구 아내 자신이 마련해서 손수 갖다 준다는 거야. 아내의 음식 손때에 남편은 살이 찐다구 그랬더구나.
 
91
혜경 -   그것두 사람 나름이지 뭐. 아니 그래. (임숙 가리키며) 쟤 서방님은 임숙이 받들기가 부족해서 바람만 피우구 다닌다던? 간호부란 간호분 들어오기가 무섭게 집어먹구.
 
92
임숙 -   얘, 간호분 으레 집어먹는 거란다. (혜경, 인혜 까르르 웃는다.) 아니야, 얘들아. 개인병원에 들어오는 간호부는 그런 것쯤은 각오를 해야만 한단다. 간호부만이란다면 좋게? 인저 난 말하기두 싫어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어. 우리집 양반이란 별종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
 
93
혜경 -   우리 집 양반두 별종이니까 괜찮아.
 
94
임숙 -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두 쟨 못 들어봤나 보군? 뭐 우리집 양반은 결혼 첫날밤부터 그런 줄 아냐? 그렇지 않았단다. 그래두 한 일 년은 딴여잔 눈도 거들떠보지 않았단다.
 
95
계숙 -   거 많이 참았군. (모두 웃는다)
 
96
임숙 -   (새삼스럽게 혜경 보고) 아니 정말야, 얘. 우리 말 허술히 듣지 말아요. 그야 여기 선생님이야 정말 고명한 고고학자시구 대학교수시구 하니까 믿어도 좋지만 방심하면 안 돼요. 그런 양반일수록에 한번 삐끗하면.
 
97
혜경 -   (불쾌한 낯빛) 야, 듣기 싫다.
 
98
인혜 -   아니야, 임숙이 말두 일리 있는 말이다, 얘. 너 그렇게 엇나갈 것만두 아니야.
 
99
혜경 -   (좀 무색해서) 엇나가긴 누가 엇나가니?
 
100
임숙 -   그런 소리 하니까 넌 듣기 싫은 모양이다만 정말 너 너무 저 자신만 과 신하지 마라, 얘. 우리가 다들 같은 또래 아니냐? 남들은 피부 마사지를 한다 정형수술을 한다 법석을 대면서 한 나이라두 젊어지려구 눈들이 벌건데 모양은 안 낼망정 뭣하러 그렇게 꾀죄죄하니 있냐? 넌 선생님의 인격만 믿지만 사람이란 ─ 더구나 남자들이란 환경의 지밸 많이 받는 법이란다. 지금까진 아무런 일두 없었지만 어쩌다 기회가 돼서 한 번만 삐끗하면 그야말로 ─ 더구나 선생님 같으신 분은 외곬수가 되셔서 한번 빠지기가 망정이지, 빠져만 노면 여간해서 발을 빼치기가 어렵지.
 
101
인혜 -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잖아?
 
102
혜경 -   글쎄, 걱정을 말아요. 하늘이 두 쪽이 난대두 우리집 양반만은 끄떡 않을테니.
 
103
임숙 -   양귀비가 눈앞에서 꼬리를 쳐도?
 
104
혜경 -   없지 없어! (점점 기가 나서) 없구말구! 뭐 너의 남편들 같은 줄 아니!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되었지만 한 번 제 시간 어긴 일두 없는 이란다. 어떤 무인 고도에 양귀비 아니라 클레오파트라하구 갖다 놔 봐라.
 
105
계숙 -   어쨌든 넌 행복하다. 그렇게나 자기 남편을 믿을 수 있으니 ─ 난 바른 대루 말이지만 우리집 양반은 이번 그대로 안 돌아올 줄 안다. 그렇지만 어떡하니? 알아두 도리없지.
 
106
혜경 -   난 그런 꼴만은 못 봐!
 
107
인혜 -   뭐 누군 보구 싶어 보는 줄 아니? 나두 큰소리 탕탕 했더니만 막상 딱 당하구 나니까 별수 없더라, 얘.
 
108
임숙 -   죽이나 살리나?…
 
109
혜경 -   쌍벌죈 뒀다 뭣에 쓴다구?
 
110
임숙 -   말 마라, 얘. 쌍벌죄가 공포됐을 땐 대한민국에서 계집질하는 남자는 그날 루씨가 가는 줄만 알았더니만 웬걸? 며칠이 못 가서 큰소리 탕탕 하더라, 얘, 도리 없어. 그저 모른 체해야지. 호랑이 날고기 먹는 줄 누가 모른다던?
 
111
혜경 -   느가 모두 그따위들이니까 간호부나 땐사나 다방 마담이나 후뚜루 주워 먹는 남편에다, 집만 으레껏 떠나면 딴계집 데리구 자는 남편이 점지된 거야. 정말이지 우리집 양반만은 무인도에다 계집하구 갖다 놔두 끄떡없을 이다.
 
112
계숙 -   한번 시험해 보자꾸나, 얘?
 
113
임숙 -   해볼까? 정말.
 
114
혜경 -   해보렴!
 
115
임숙 -   (반감도 있다.) 내가 시험해 볼 테다.
 
116
혜경 -   누가 말려.
 
117
임숙 -   정말이냐?
 
118
혜경 -   암, 정말이구말구. (자신있게) 느이들이 우리집 양반을 놀려내? 이십 년 간단 한번 제 시간을 어겨본 적이 없어요! 돈인들 뭐 주머니에 많이 넣구 다니는 줄 아니? 꼭 삼백환이야. 거 삼백환두 매일 쓰는 줄 아니? 요새 학교에서 전차표가 나왔다구 벌써 닷새째나 돈 달란 말이 없는 걸 보면 아직두 그 대루 가지고 다니는 모양이야. 그런 사람인걸, 뭐. 하긴 답답할 때두 있긴 있어. 너두 융통성이 없어노니까 ─
 
119
계숙 -   야, 그건 참 지독한 고질이로구나. 우리 아이녀석들두 급할 때 쓰라구 몇 백 환씩 넣어줄라치면 그날이면 그만야.
 
120
인혜 -   다 그렇지 뭐냐.
 
121
임숙 -   그럼 애들만두 못하군 그래. 아니, 느 서방님 똥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거 아니냐?
 
122
혜경 -   글쎄, 시험해 보라니까 그러는구나.
 
123
임숙 -   너 진담이니?
 
124
혜경 -   진담이야, 그 덕에 나두 한번 시험해 보자꾸나, 얘들아. 당신 말루두 늘 무인도에 갖다 놔두 자신이 있다구 그랬으니 말야.
 
125
계숙 -   (부채질하듯) 그만둬 얘. 공연히 그러다가 정말 오쟁이 지구서 옛날만 못 하니 깩깩 울구 다니지 말구.
 
126
혜경 -   글쎄, 그럴 때까지만 살라니까 그래.
 
127
임숙 -   (진지하고 새삼스럽게) 얘들아, 가만히 생각하니 참 재미있겠다. 우리 연극 한번 해보잖으련?
 
128
인혜 -   어떻게?
 
129
임숙 -   이렇게 말야. 내가 어디루 끌어내거든, 선생님을?
 
130
계숙 -   그래서?
 
131
임숙 -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어떤 여성이 있는데 꼭 선생님을 한번 뵙게 해 달라니 만나주시겠느냐고?
 
132
혜경 -   나가야 그런 말이라두 해보지.
 
133
임숙 -   글쎄, 가만 있어! 안 나올 게 어딨어. 뭐 고고학자는 마음까지두 골동품이 돼 버렸다던?
 
134
혜경 -   글쎄, 재주껏들 해봐요, 정말이야. 그래서 한번 웃지 뭐야.
 
135
임숙 -   너 분명히 그렇게 말했겠다?
 
136
혜경 -   그렇다! 우리집 양반 홀려내면 한턱 쏜다, 정말.
 
137
임숙 -   다들 들었지?
 
138
인혜,계숙 -  듣구말구!
 
139
혜경 -   아니야.
 
140
임숙 -   거 봐라. 금방 아니라잖니.
 
141
혜경 -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참다워진다.) 나두 흥미가 생겼어.
 
142
인혜 -   (되레 놀란다.) 흥미랄께?
 
143
혜경 -   너들 이야길 듣구 있자니까 나두 슬며시.
 
144
임숙 -   바람이 나니.
 
145
혜경 -   망할 것! (때리려 한다. 임숙, 비명지르며 피한다.) 그런게 아니라 나두 슬시 우리집 양반을 한번 시험해 보구 싶은 흥미가 생겼다니까!
 
146
계숙 -   옳지. 인저 바람은 진짜루 나는군. 그래, 다른 게 바람이 아니야. 그런 게 바람이란 게지.
 
147
혜경 -   왜 요새 뭐 심장 건강상태를 특정하는 기계가 있잖던? 창경원이나 어디 아이들 많이 모이는 데 가면 십환씩 내구서 힘껏 불면 바늘이 돌아가는? 그런 식으루 그 우리집 양반을 한번 시험해 보구 싶어졌다는 거야.
 
148
계숙 -   그럼 이건 남편 바람측정기라구 해야겠구나.
 
149
혜경 -   까짓 이름이야 어찌 됐든 (임숙보고) 얘, 정말 연극 한번 해보자꾸나. 응?
 
150
임숙 -   (슬쩍 뺀다.) 여편네들이 밥 처먹구서 할일들이 없으니까…
 
151
혜경 -   (되레 몸이 달아서) 얘,그러지 말구 한번 꾸며 봐라. 원작, 각색, 연출, 주연 ─ 네가 아주 다 맡아봐. 재미있잖니?
 
152
임숙 -   재미야 있지. 늙바탕에 우리 정혜경 여사의 신세가 따분해지니까 걱정이지.
 
153
혜경 -   글쎄, 그럴 때까지만 살라니까?
 
154
인혜 -   하지만 말야. 이 댁 선생님은 위험해. 그랬다가 정말 바람이 나버리면 어쩐 다지? 바람측정 실험감으룬 너무 순진해, 얘들아. 중학생 아이들두 단 하루를 몸에 못 지니는 지금 돈 삼백환을 며칠씩 주머니에 넣구 다닌다는 양반을 실험대에 올려놨다가… 안 돼. 너무 순진해.
 
155
혜경 -   순진하니까 가장 정확한 숫자가 나오지 뭐냐?
 
156
임숙 -   너 정말이냐?
 
157
혜경 -   그럼!
 
158
임숙 -   그러구서 찔찔 울면서 돌아다닐라구? 야, 그 꼬락서닌 또 못 보겠다. 난봉꾼 남편 하나 얻었더니만 여기저기 다니며 일을 저질러 놓구서 위자료를 내라느니 내 딸 처녀루 물러내라느니. 뭐 제 딸년이 처녀였던지 내가 봤던가? 여편네 남편 단속을 잘못 하느니 뭐 갖은 쨀소릴 다 갖구 와서 사람을 들 볶아 대는데 인제 너까지 와서야? 난 싫다. 더구나 그 양반을 갖다가?… 큰일 나지! 고기맛 본 중처럼 괜히 뒤늦게 정말 바람이 나가지구.
 
159
혜경 -   우리집 양반만은 절대 없습니다! 무인도에 젊은 계집하구 갖다 가두어 놔두 염려 없다니까! 난 정말 자신이 있다. 허세가 아냐. 정말 깨끗한 사람이 거든요! 지금까지 남의 여자 손 한번 만져본 일이 없어요.
 
160
임숙 -   그래, 네가 따라다녀 봤단 말야?
 
161
혜경 -   안 봐두 알아.
 
162
임숙 -   이 어벙아. 날고기 싫다는 호랑인 혹 있는지 몰라두 계집 싫다는 사내 있 단말 못 들었다. 평생 영화 하날 보나, 술 한잔을 하나, 그저 곰팡내 나는 책만 잔뜩 끼구서 걸음을 걸어두 (열이 나서 흉내낸다. 모두 웃는다.) 그저 땅만 들여다보지! 그러니까 누가 하나 거들떠보기나 한다던? 그러니까 그래.
 
163
혜경 -   어쨌든 한번 시험해 봐. 저만 뭐 제 남편 두둔하자는 게 아니라 그일 그렇게 말하는 것 장밀 싫다. 얘. 나두 한번 실험해 볼 테야.
 
164
계숙 -   그러구서 낄낄 울구 다녀보구 싶단 말이지?
 
165
혜경 -   글쎄, 그럴 때까지만 살라니까그랴.
 
166
임숙 -   너 정말이냐?
 
167
혜경 -   그럼!
 
168
임숙 -   정말이랬겠다? 그래, 어디 보자. 이렇다는 멋쟁일 하나 떡 안겨주어 봐야지. 생전 맘도 못 내보다가야 세상에 이런 미인도 있나 싶어 눈이 게슴츠레해가지구.
 
169
계숙 -   입을 헤 벌리구…
 
170
혜경 -   (분해서) 잘들 놀아 봐라. 너희들 우리집 양반을 그렇게 봤다간 큰코 다치느니라. 인식부족이라. 저것들은 저의 신랑 본위루 사람 평가를 하려들 든다니까.
 
171
임숙 -   누가 할 소린구.
 
172
혜경 -   어쨌든 재주껏 꾸며들 봐. (일어서며) 아니, 얜 어떻게 된 거야, 분아! 분아. (나간다.)
 
173
임숙 -   저 혜경이 코를 한번 납짝하게 해볼 테니 봐라들.
 
174
계숙 -   만만찮을 것 같아.
 
175
임숙 -   글쎄, 내게다 맡기라니까. 소리 안 나는 북 칠 맛 있더냐?
 
176
혜경 -   (과일을 들고 들어오며) 아, 이눔의 계집애가 어딜 갔기에 이렇게 안 오는거야. 부엌문두 활짝 열어제껴 놓구서. 얘들아, 어디 참한 식모 있건 하나 장권해 주렴.
 
177
임숙 -   왜 분이가 어때서 그러니? 인물두 훠언하거니와 제 몸 다루는 것 보면 깔끔두 해보이지 않니? 아주 똘똘한데 그랴.
 
178
혜경 -   지나치게 똘똘해서 탈이라네, 아주 알루 깠어. 얘들아, 거기다 나일 먹었다구 요샌 어떻게 모양을 낼랴구 드는지 그저 거울 들여다보는 게 제일이란다. (부엌 쪽을 살피며 나직히) 글쎄, 얘들아. 이것 좀 봐. (모두 다가앉는다.) 글쎄,고년이 벌써 계집애 틸 낼려구 드는구나?
 
179
인혜 -   몇 살인데?
 
180
혜경 -   열아홉이지.
 
181
임숙 -   저런, 애들 열아홉이면 늦은 편이지, 뭐.
 
182
계숙 -   그래. 벌써 애인이 있단 말야?
 
183
혜경 -   애인이 있어두 이만저만한 애인이 아니란다.
 
184
인혜 -   아마 이 댁 선생님인가보구나, 그러냐?
 
185
혜경 -   망할 것! (나직히) 이 댁 선생님은 아니지만 그 제씨 되시는 젊은 서방님 이시란다.
 
186
일동 -   뭐?
 
187
혜경 -   쉬!
 
188
임숙 -   아아니 그래, 그 벽서방님 말이냐?
 
189
혜경 -   누가 아니래!
 
190
임숙 -   어쩌면! 얘, 그 양반두 돌았구나! 아니 그래, 대학까지 나온 양반이 어디 여자가 없어서 집에서 부리는 식모아일 건드린다니?
 
191
혜경 -   아냐. 그런 건 아니야. 계집애가 저 혼자서 괜히 몸이 달아서 그런다니까 즈 삼촌이 집에 있을라치면 콧잔등이 시어서 못 본단다.
 
192
임숙 -   그렇지만 벽서방님이 그런 걸 받아주기에 그런 게지. 그런 눈칠 보이거든 눈 한번 딱 부릅떠 봐라. 감히 어디라구, 얘, 암만 해두 느 벽서방님 뒤가 쿠리다.
 
193
혜경 -   그건 절대루 아니다. 아니, 뭐 즈 삼촌한테 죽자사자 따라다니는 여자가 한 둘인 줄 아냐?
 
194
임숙 -   그래?
 
195
혜경 -   그 중에서두 오 교장 딸은 치더릴 정도란다. 왜 있잖아. 저 남산중학교 교장 딸. 언젠가 너두 한 번 봤잖니?
 
196
임숙 -   꽃 사 갖구 왔던 여자? 아, 저 경마말 같던 여자?
 
197
혜경 -   그래.
 
198
임숙 -   아직 학생이라면서? 뭐 어디 대학생이랬지?
 
199
혜경 -   금년 졸업반이지.
 
200
임숙 -   야, 내가 사내라두 그런 여잔 안 돌아다보겠다.
 
201
혜경 -   아니야, 얘. 요새 말하는 전후파 기질이라서 하나 탈이지 체격이야 오죽 좋으냐. 인물두 그렇지. 아기자기하게 이쁘달 건 없지만 훤한 얼굴이지 뭐냐. 우리 나라 사람들 취미두 인저는 달라졌단다, 얘. 옛날처럼 오목조목하다든가 그저 잔존하기만 한 그런 얼굴은 미인값에두 안 가나 보더라. 마릴린 몬로라든가 뭔가의 거 모주 먹은 오리처럼 흔들어대는 궁둥이에 반해서 법석들을 하는 판인데 뭐. 걘 한복을 입으면 호마 같아두 양장을 하면 참 멋지단다. 그런데 그날은 왜 하필 통 안 입던 한복을 떨치구 왔던지 몰라.
 
202
임숙 -   즈 삼촌이 한복 입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지.
 
203
혜경 -   뭘 좋아하는지 통 모르지. 한복을 입구 와두 덤덤, 양장을 빼트리구 와서 아양을 떨구 해두 덤덤.
 
204
임숙 -   아아니, 그 꼴에다 또 아양? 경마말 네 굽 구르듯 아양을 떨던?
 
205
혜경 -   얜, 그렇지 않아, 얘. 아양을 떠는데두 여간 자연스럽지 않다! 아주 세련이 됐어요. 그러구 또 봄에는 말괄량이 같아도 여간 삽삽하지가 않아요. 인정두 있구. 그저 또 한 가지 뭐랄까? 요새 말하는 아프레 냄새가 풍겨서 그게 하나 탈이지.
 
206
계숙 -   탈 중엔 젤 큰 탈을 골라잡았군 그래.
 
207
임숙 -   그래, 어떠냐, 거 벽서방님 요샌 좀 나아졌니?
 
208
혜경 -   나아져! 얘, 말 마라. 요새 와선 한술 더 뜬단다. 날마다 벽만 찾구 있어요, 글쎄. 그야 지금 세상 어디 벽처럼 답답치 않은 구석이 있던? 정치가 그렇지 국민 생활이 그렇지. 날마다 신문엔 탐관오리가 어쨌느니 무슨 부에 의옥 사건이 있으니 군복강도다 날치기다 기차사고다 학생깡패다 떠들어대니까 답답하기 야하지. 그렇지만 벽소리만 찾구 있으면 되다던? 접땐 글쎄 좀 봐요. 웬 점잖은 신사가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그저 다짜고짜루 담밸 뺏어다 발로 비볐다지 뭐냐. 그래, 대판 쌈을 하구 들어와가지고는 그저 벽이다. 벽!
 
209
임숙 -   멋은 있더라. (벌떡 일어나서 흉내낸다. 아까 벽 청년이 하던 식이다. 일동 웃는다.) 벽이다! 벽 (거니는 흉내) 앞을 봐도 벽! 뒤를 봐도 벽! 아! 벽이다! 벽!
 
210
혜경 -   (웃으며) 남매랬으면 꼭 알맞겠다. (현관문 소리 난다.) 오나부다.
 
211
계숙 -   벽서방님?
 
212
혜경 -   즈 삼촌이시우?
 
213
교수 -   나요.
 
214
혜경 -   어머나! (벌떡 일어난다.)
 
215
임숙 -   이리 모셔와요, 좀. 돈 얼마나 썼나 따져보게요.
 
216
교수 -   (혜경과 같이 들어온다. 일동 일어난다. 고색창연의 학자다. 모자, 양복, 가방, 모두가 구제품 인상이다.) 아, 윤 여사, 오래간만이시군. 김 박사두 안녕하시지요? 안에서 늘 이렇게 다녀두 우린 얼굴두 모르구 있으니 어서들 앉으시지요. (이층 층계 쪽으로 가려고 한다.)
 
217
임숙 -   선생님, 좀 앉으세요. 뭐 공부는 일평생 두구 하실 공부신데 인혜두 왔구 오래간만에 계숙이두 왔는데 얘기나 좀 하다 가세요.
 
218
교수 -   앉아들 노시지. 꼭 조사해 두어야 할 것이 있어서 ─
 
219
임숙 -   그럼 선생님. 돈이나 좀 내놓구 가세요. 과일이나 좀 사다 먹게요.
 
220
교수 -   돈이 있어야지. (웃는다.)
 
221
혜경 -   (자신있게) 돈 다 쓰셨나 보구려!
 
222
교수 -   쓰긴, 내 돈이야 고대루 있지만.
 
223
혜경 -   그럼 다 내놓구 가세요.
 
224
교수 -   다? (파스곽을 꺼내더니 삼백환을 내주고 올라간다. 일동 까르르 웃는다.)
 
225
혜경 -   (자랑스럽게) 글쎄. 봐라, 내가 거짓말이냐? 우리집 양반이란 저런 양반이라니까.
 
226
계숙 -   자신없는데.
 
227
인혜 -   안 되겠어…
 
228
임숙 -   뭘. 염려 마. 단단한 나물수록에 부러지려 들면 소린 크니까.
 
229
교수 -   (멋도 모르고 눈치만 보다가) 그럼 나 실례합니다.
 
230
임숙 -   선생님. 어느 날 학교 나가시나요?
 
231
교수 -   월요일, 금요일 그렇습니다. 왜 뭔 일이?
 
232
임숙 -   아닙니다! 올라가시지요. (안 교수 올라간다.)
 
233
혜경 -   봤지들?
 
234
임숙 -   글쎄, 걱정 말래두 그러게. 내게 맡겨요. 후회는 네가 하구. 너 나중에 우리 칭원 않는다?
 
235
혜경 -   (자신만만하다.) 암! 아. 만일에 우리집 양반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됐지 뭐냐? 실상 따지자면 일평생 제 아내 이외의 여자 손목 한번 못 잡아 봤단다 면 그것두 바보지 뭐냐. 난 밑져야 본전이거든! 안 넘어가면 그래서 또 좋구 넘어갔다면 또 그래서 값이 나가구.
 
236
계숙 -   아, 큰소리 막 하는구나!
 
237
혜경 -   못할 건 뭐냐?
 
238
분이 -   (들어온다.) 아주머니, 시켜왔습니다.
 
239
혜경 -   아니, 넌 그래 거기 갔다 오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단 말이냐?
 
240
분이 -   늘 가던 집에 갔더니만 환갑잔치를 맡아서 배달을 못해 주겠대요. 그래서 저 아래 버스 정류장 앞에 갔더니만 집을 모른다고 같이 가자구 그러는군요. 그래, 기다려서 데리구 오느라구 늦었어요.
 
241
임숙 -   어, 고년 똑똑은 하다만 하마터면 너의 집 아씨 헛생색만 낼 뻔했구나.
 
242
인혜 -   (주인처럼) 저게 헛똑똑이라는 거야. 이것아, 그렇거든 핑계가 좋잖아. 그대로 올 게지 뭣하러 먼데까지 가느라구 야단야. 눈치도 없이!
 
243
분이 -   (인혜한테) 아주머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나간다.)
 
244
임숙 -   야. 요것 봐라. 한술 더 뜬다. 벽삼촌쯤 어림두 없겠는데? 먹히겠다, 얘.
 
245
혜경 -   설마. (부엌 쪽에서 그릇 소리)
 
246
분이 -   (빼끔 내다보고) 아주머니, 상 어디다 볼까요?
 
247
혜경 -   마루서 먹자들? 이리로 내와. (그때 현관 쪽에서 발소리, 사람 소리) 누가 들어오는군. 얘 분아, 문 닫구서 안방에 차려놔.
 
248
분이 -   네. (안방 문을 닫고 나간다.)
 
249
옥주 -   (오영란과 함께 들어온다. 둘 다 여대생이다. 옥주는 가방을 들었으나 영란은 노트 한 권 도르르 말아 들었다.)
 
250
옥주 -   (들어오면서) 그러니까 말야 (하다가) 어머나! (인사한다.) 안녕들 하셨습니까? 아이구 (계숙보고) 최 선생님 댁 아주머님도 오셨네. 그동안 어떻게 그리 꼼짝 않으셨어요?
 
251
계숙 -   아니,옥주가 저렇게 이뻤댔나?
 
252
옥주 -   암만 그러셔도 오늘은 저 돈 없어요. 아주머니. (안방에서 그릇 놓는 소리)
 
253
계숙 -   한 푼두 없니?
 
254
옥주 -   없어요, 아 참, 십환짜리 두 장은 있을 거야요.
 
255
계숙 -   얘, 이십환 가지군 어림두 없다. 되물러라두 다우.
 
256
옥주 -   뭘요,그냥 남 듣기 좋게 이쁘니 잘생겼느니 하는 칭찬쯤은 이십환두 많아요.
 
257
계숙 -   저놈 좀 봐. 아냐, 참 이뻐졌구나.
 
258
인혜 -   즈 어머닐 그냥 쏙 빼꽂았지?
 
259
임숙 -   다 닮아두 몸뻬이는 닮지 말아라. 낮잠하구.
 
260
혜경 -   그렇잖아두 왜 남들처럼 깔끔히 못 차리구 늘 선머슴처럼 하구 있느냐구 주장 질이 라우. 학자 여편네가 모양은 내서 뭣하니?
 
261
임숙 -   뭐 학잔 사내 아니라던? 말은 않아두 그런 이들이 바라긴 더 은근히 바란단다. 집안에서 눈요기래두 해야지.
 
262
옥주 -   어머니,아버진?
 
263
혜경 -   지금 오셨다.
 
264
옥주 -   서재?
 
265
임숙 -   전재산 삼백환 뺏기구 올라가셨단다.
 
266
옥주 -   삼촌은 안 계시지? 얘. 영란아. 우리 그럼 삼촌방으로 가자. (냄새를 맡듯) 그런데 어디서 이렇게 구수한 냄새가 풍겨올까? 뭐 많이 차리우, 어머니?
 
267
혜경 -   그래,오래간만에 아주머님들이 오셨기에. (영란, 삼촌방 쪽으로 비켜선다.)
 
268
임숙 -   와서들 달구치기에!
 
269
혜경 -   한턱 낼려구.
 
270
임숙 -   울며 겨자 먹기루.
 
271
옥주 -   (영란보구서) 글쎄. 내 말 들어서 득 보는 일 없다니까. 그냥 가자니까 기를 쓰구 끌구 들어가 짜장면을 먹이더니 봐라. 얘. 탕수육만 안 먹었어두 ─
 
272
혜경 -   먹 구들 왔구나! 그래두 아주머니가 비싼 것만 골라 시켰으니 들어들 가자꾸나!
 
273
계숙 -   안 선생님은?
 
274
혜숙 -   (이층 턱으로 가리킨다.) 술을 뚝 뜨시곤 "난 올라간다." 그러면 그만 이란다. 자들 그럼 들어가자. (안방으로 몰려들어간다.)
 
275
옥주 -   (내려와서) 안 잡수신대요, 어머니.
 
276
혜경 -   (소리만) 그러면 그렇지, 웬걸 내려오시겠니. 자. 어서들 앉자꾸나. (극이 진행 되는 동안 그릇 소리, 웃음 소리, '맛있다’ 등등 소리 들려오나 극의 진행에 방해는 안 된다.)
 
277
옥주 -   (삼촌방 의자에 앉으며) 그러니까 말야. 무엇보다두 우리 삼촌 성질을 잘 알아야 해요. 그의 고민두 알아야 하구.
 
278
영란 -   넌 뭐 내가 건성 따라다니는 줄 아니? 현수 씨 성격은 그만하면 나두 알구. 고민이 뭔지두 알구. 넌 내 성격이 삼촌한테 안 맞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런 분한텐 나 같은 사람의 성격이 필요할 거야. 내가 뭐 아프레냐? 전후 판아니잖아? 벽만 찾구 있으면 나중엔 어떻게 된다지?
 
279
옥주 -   미치잖으면 자살일 테지…
 
280
영란 -   거 봐요, 저대루 내버려 두면 큰일나요. 살인할지도 모른다. 정말! 지난 겨울만 해두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노릇이야? 입나무를 잔뜩 실은 산소에다 불을 지르다니 말이라도 될 법한 얘기냐? 나중에 그러는데 소가 참새로 보이 더라는 거야! 하마터면 소를 그대로 끄시를 뻔하잖았어! 순경도 걸작이지? 되려 통쾌한 청년이라는 거 아냐? 난 유치장에 집어넣는 줄 알았어.
 
281
옥주 -   대체로 사람들이 폭이 넓어진 건 사실이야.
 
282
영란 -   요샌 또 엉뚱한 생각만 하구 있어요! 이태조가 두문동에 칠십이인을 가두고 불을 살라 죽이듯이 버스나 극장에서 담배 피는 놈을 위시해서 차탈 때 새치기 하는 놈, 길에 침뱉는 놈, 모리배, 탐관오리, 권력을 남용하는 놈, 아첨 하는 놈, 밀수범, 공산당 ─ 이런 놈들을 모두 남산에 모아놓구서 휘발유를 끼얹고서 불을 지를 궁리를 하구 있거든! 참 댄스하는 연놈들두 그런다는 거야. 그래서 서해바다 고기를 한강으루 불러다가 큰 잔치를 베풀면 좋겠다는 거 아냐?
 
283
옥주 -   그러기에 영화다 산책이다보다도 너도 삼촌과 함께 벽 앞에 서야만 해. 그 벽을 같이 봐야 해! 지금의 삼촌한텐 애정문제란 인생문제에 속하지두 않아요. 어떻게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이 벽을 뚫음으로써 자기 생을 개척하 느냐지, 애정문제 같은 덴 도시 흥미를 가져보려구두 않아요. 넌 삼촌이 널 싫어하느니 미워하느니 그러지만 밉구 싫구가 아니야. 대체루 흥미를 안 가지려는 태도야.
 
284
영란 -   뭐 그런 사람이 있다니?
 
285
옥주 -   있는 것을 어쩌냐? 현재. 어쨌든 그런 삼촌 앞에 거 뭐냐. 이승달인가 하는 사람은 뭣하러 끌고 왔느냐 말야. 같은 대학동창이긴 하지만 우리 삼촌이 그런 정치 브로커나 하구 다니는 사람을 사람값에나 치는 줄 아니? 이승 달씨 하구 네가 돌아간 담에 얼마나 분개한 줄 알아? 아주 펄펄 뛰었단다.
 
286
영란 -   나두 눈친 챘어. (슬프게) 내가 어리석었어. 영화에서 본 대루 그대루 한번 해본 거야. 질투심을 이용해 보자던 거였어. (눈물이 글썽한다.) 모두가 아버지 때문야. 아버지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야. (사이 눈물 닦는다.) 여 학교 때부터 말끝마다 거 현수, 그 녀석 사람이 됐어. 천재구… 중학교 교장이 된 지가 십년이지만 그런 천잰 못 보셨다는 거였어요… 평균 구십 팔 점으루 졸업을 했다는군요. 개교 이래 오십 년이나 되는 학교지만 그때까지 그런 성적이 없었대요. 대학에 가서도 그랬죠. 현수 씬 곧잘 아버지를 찾아오셨어요.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뚝 그치고 멍하니 공간을 응시하다가 느껴 버린다.) 그렇지만 삼촌은 너무하셔!
 
287
옥주 -   (위로하며) 못생긴… 네가 삼촌 앞에서도 그러니까 삼촌은 네게 대해 서더 흥밀 안 갖는 거야! 우리 삼촌은 지금 사상적으로나 인생으로나 앞 이탁 막힌 바람벽 앞에 직면하고 있는 사람이거든… 절망에 직면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다. 뭐든지, 무슨 일을 저지를지 그 자신 도모를 거야… 삼촌은 지금 위성을 타구서 지구를 빙빙 돌구 있는지도 모르지. 태양을 와득와득 깨물어 먹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 사람야!
 
288
영란 -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한다지? 어떻게 된다지?
 
289
옥주 -   감정적으로보다도 사상적·인간적으로 삼촌을 이해하게 돼야겠지.
 
290
영란 -   그건 내게 불가능한 일이야. (또 운다. 그때 현관문 소리)
 
291
옥주 -   그런 감정을 극복해요… 삼촌 오시는군. (현수, 박호 들어온다. 박호는 방랑 시 인형, 복색도 그렇다. 오영란, 눈물을 씻고 현수를 맞는다. 옥주는 박호를)
 
292
현수 -   영란 씨 왔군요?
 
293
영란 -   안녕하셨어요? 댁에 오다가 마침 옥주를 만나서요.
 
294
현수 -   그랬습니까? 나두 마침 박호 군을 만나서…
 
295
박호 -   이 댁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296
옥주 -   중학생 하나만 없지 다 계십니다. 보아하니 우리 응길이 동무는 아닐 성 싶은데요? 이 녀석이 어딜 갔을까?
 
297
박호 -   야. 응길이 친구란 좀 심한데. 손님이 왔으면 교양있는 댁에선 으레껏 주인 되는 사람이 나와서 뭐라고든지 안사 한마디쯤은 하던데…
 
298
옥주 -   죄송합니다. 문전걸식을 하는 거지두 반드시 무슨 인사가 있기에 손님이 먼저 하시는 걸루만 알구 있었습니다.
 
299
박호 -   야, 이건 남일이놈보다구 더 무서운 억지로군! 옥주 씨. 그러지 말구 청이나 하나 들어주시오. 당장 시장해 죽겠는데 이 친구두 주머니에서 담뱃 가루만 쏟아지더군. 꼬리곰탕 값 좀 내시오.
 
300
옥주 -   (눈으로 안방을 가리키며 손으로 굉장한 음식이란 형용을 한다.) 다들 아시는 분들이셔요.
 
301
박호 -   누구누구?
 
302
옥주 -   아버지, 어머니, 모두 집안식구이요. 흉허물없는.
 
303
박호 -   됐어, 그럼! (안방 문전에 가서 걸인행세 한다) 여이, 댁 안방 문전에 시인 거지가 왔소이다. 뭐 먹다 남은 것 있으면 한술 보태주십시오.
 
304
현수 -   저런 등신… (옥주, 영란, 모두 폭소, 현수 그저 거닌다.)
 
305
혜경 -   (소리만) 아니, 무슨 거지가 그래 안방 문전까지 들어온단 말요.
 
306
박호 -   대문간에서 암만 소릴 쳐도 못 들으시기에 코를 찌르는 음식 냄새에 회가 동하고 눈이 뒤집혀서 이렇게 안방 출입을 했습니다. 그저 과히 허물 마시구 한 접시 내보내 주십시오. (일동 폭소, 돌아다보고 저도 웃는다.) 됐지?
 
307
혜경 -   (소리만) 무슨 거지가 장타령 한마디 없이 뭘 달라는 거야? 장타령하면 주지!
 
308
박호 -   야, 장타령까진 심한데. (머리를 긁는다. 옥주, 하라구 주장질한다.) 장타령. 여 ─ 저번에 왔던 가난뱅이 시인 박호 선생 배가 고파서 또 왔소. 얼씨구나 절씨구 먹다 남은 찌꺼기 ─ (문이 활짝 열린다. 그러나 모두 모르는 부인들이라 기함을 하고 달아나고 부인들 허리를 잡는다.)
 
309
혜경 -   어서 오우… 무슨 거지가 저래. 어서 와요!
 
310
박호 -   (시침 뚝 떼고) 안녕하셨습니까? 손님들이 많이 오셨군요. 국민도의가 땅에 떨어졌어. 인저 거지가 안방까지 들어온단 말야. 에이, 그놈들. (와 몰려 나와서 웃음판이 된다.)
 
311
현수 -   (멀거니 웃어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와르르 벽으로 달려가며 소리친다.) 난 모르겠어, 몰라졌어. 정치도, 경제도, 산업도… (일동을 돌아보며) 너희들이 다 벽이란 말이다! (와르르 무대 중앙으로 나오면서 주먹을 내 두르면서) 벽이란 말이다. 벽! 어디를 보나 벽뿐이란 말이다! (고함과 함께 픽 쓰러진다. 사이를 두어 천천히 막이 다 내려질 때까지 절망적인 '벽이다!’ 소리가 들린다.)
【원문】제 1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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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 분류 :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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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이무영(李無影) [저자]
 
  # 신태양 [출처]
 
  1959년 [발표]
 
  희곡(戱曲)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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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