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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壁) ◈
◇ 제 3 막 ◇
카탈로그   목차 (총 : 4권)     이전 4권 ▶마지막
1959년 6월
이무영
1
벽(壁)
 
2
제 3 막
 
3
  전장으로부터 약 2주일 후 오후.
 
 
4
무대  제1막과 같다. 만주에서 초동(初冬). 무대는 같되 가구 커튼 등으로 가급적 변화를 보여주면 효과적이다.
 
5
  막이 오르면 현수 멍청하니 섰다. 그때 분이 살짝 나와서 현수를 탐스럽게 바라다본다. 짝사랑하는 줄을 알 수 있다. '벽이다’를 흉내내 보다가 뛰어들어가더니 사과를 하나 들고 가까이 간다.
 
 

 
 
6
분이 -   아저씨, 이것 하나 잡수시겠어요?
 
7
현수 -   (천천히 돌아다본다. 사이) 그게 뭐냐?
 
8
분이 -   사과 아니어요. 아저씨두.
 
9
현수 -   그것만 먹으면 죽냐?
 
10
분이 -   아니 아저씨두, 잡숫구 돌아가실 것을 설마 드릴라구요.
 
11
현수 -   (꾹하니 보더니만, 사과를 빼앗아서 한입 딱 물어 떼어 분의 얼굴에다 탁 뱉고 내동댕이 친다. 발작적이다. 분이 질겁을 해서 뛰어들어가다가 돌아서서 멍하니 바라다본다. 갑자기 울며 사라진다.)
 
12
현수 -   미친년, 날더러 죄의 씰 먹으라구? 악의 실과를, 사과를! (발로 막 뭉갠다. 그때 옥주, 안방에서 나타나 바라보다가)
 
13
옥주 -   삼촌, 좀 진정하셔요. 좀 주무시지, 그러셔.
 
14
현수 -   괜찮아.
 
15
옥주 -   간밤에두? 꼬박 새우시나 보던데?
 
16
현수 -   잠이 안 와! 올 리두 없구.
 
17
옥주 -   그래두 좀 쉬세요. 들어가세요.
 
18
현수 -   아니야, 놔둬. 지금 몇 시냐?
 
19
옥주 -   세시야요.
 
20
현수 -   누가 올 거야.
 
21
옥주 -   누가요?
 
22
현수 -   올 거야. (그때 발소리) 온다. 나가 봐. 오 교장일 거야.
 
23
옥주 -   영란 아버지?
 
24
현수 -   응.
 
25
소리 -   안 군, 있나?
 
26
옥주 -   네. (오 교장 안내하고 들어간다.)
 
27
현수 -   가서 뵈어야 할 텐데 죄송했습니다.
 
28
교장 -   이 사람, 그래, 내가 이렇게 찾아오도록 있단 말인가? 날마다 기다리지 않았나.
 
29
현수 -   죄송했습니다.
 
30
교장 -   앉게. (자기도 앉는다.) 오늘 교장회의가 있는데도 왔어.
 
31
현수 -   죄송합니다.
 
32
교장 -   이렇게 된 이상 긴 얘기가 필요 있나. 부끄러운 꼴 나기 전에 새달 안으로 식을 해치우세나. 자네만은 꼭 믿었더니 그래 내 낯을 보기로니 자네가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사람아!
 
33
현수 -   죄송합니다.
 
34
교장 -   세상 젊은 놈이 다 비뚤어져도 자네만은 꿋꿋할 줄 알았었네. (사이) 그러나 그까짓 얘기 자꾸 해 뭣하겠는가? 내달 열흘께로 준비시킬 테니 그런줄 알아!
 
35
현수 -   (오랜 사이 침묵)
 
36
교장 -   날짜가 바쁜가? (그래도 말없다.) 준비 때문에 그런가? (말없다.) 아, 이 사람이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됐나? 준빈 염려 마라. 내 자네 형과 연락해서 그날까지 댈 테니. 알았나? (말없다.) 아, 답답해 못견디겠다. 이 사람아, 어쩌라구 그러구만 있는 거야, 엉? 왜 이제 와서 딴소리 좀 해볼 궁리를 하는 겐가? 딴소릴? 어림도 없지… 남의 귀한 딸자식을 ─ 그것두 제 은사를 생각 하더라구 어떻게 감히! 말이 될 말인가. 그래놓구서 지금 와서? 대답해! 않겠다는 건가?
 
37
현수 -   (멍하니 앉았기만 한다.)
 
38
교장 -   아니, 이런 부아통이 터질 일이 있단 말인가? 그래, 네가 지금 와서 달아나겠다는 거냐?
 
39
현수 -   하겠어요!
 
40
교장 -   허, 그래야지.
 
41
옥주 -   (뛰어나오며) 삼촌! 뭘 어떻게 하신다는 거야요?
 
42
현수 -   들어가!
 
43
옥주 -   글쎄, 삼촌!
 
44
현수 -   들어가래두! 이따 얘기 할테니 들어가!
 
45
옥주 -   무엇 하나 몰라졌어. (들어간다.)
 
46
교장 -   (부드럽게) 잘됐네. 그렇잖아두 난 자넬 늘 생각하구 있던 길이었어. 저두 그랬지만, 허지만 이 사람, 참지, 그게 무슨 짓인가. 그럼 난 가보겠어. 형 한텐 내 따루 연락해 만나지.
 
47
현수 -   제게 맡기세요.
 
48
교장 -   그러면 더 좋구. 그래라 그래, 허지만 서둘러얄 게다. 청첩이니 뭐니는 내다 함세. 낼이구 모레구 와.
 
49
현수 -   네. (교장 나간다. 옥주 뛰어나오며)
 
50
옥주 -   아니 삼촌,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세요?
 
51
현수 -   내게 맡겨!
 
52
옥주 -   글쎄, 맡기는 것두 정도가 있지요.
 
53
현수 -   내게 맡겨둬. (휙 나가다 말고) 옥주야, 나 오늘 안 들어올지 몰라. (꾹 하니 옥주를 바라다보다가 홱 나가버린다.)
 
54
옥주 -   대체로 무엇이 어떻게 돼가는 겐지! 모르겠어! 어딜 간다구? 갈 데가 어디람, 삼촌이? 한 군데밖에 없지, 뭐! (그때 혜경, 들어온다. 깨끗이 차렸으나 기운이 푹 죽어 있었다.)
 
55
옥주 -   그래, 김 박사 아주머닌 만나셨어요. 어머니?
 
56
혜경 -   (한참 말이 없다가 퍽 주저앉으며) 만났다.
 
57
옥주 -   그래, 뭐라고 그래요?
 
58
혜경 -   뭐라구 제가 입이 열둘이기로니 무슨 할 말이 있겠니? 미안하다는 거지. 잘못했노라구.
 
59
옥주 -   그래, 그뿐이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얘기두 없구.
 
60
혜경 -   그야 뭐 앞으로도 그러겠다구 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허지만 그걸 어떻게 믿냐? 망아지가 아닌 다음에야 붙들어매 두겠냐?
 
61
옥주 -   글쎄, 물론 말이야 그렇게 하겠지만 어머니 보기엔 그렇게 말하는 태도가 참 스러워 보이더냔 말씀예요?
 
62
혜경 -   글쎄, 너두 답답두 하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두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단 말 두 못 들었냐? 제 입 가지구 제 맘대루 야불거리는 걸 내가 어떻게 제 속을 알수가 있겠다고 그러느냐? 더구나 고게 어떤 계집이냐? 나하구 짜구서 홀랑 뒤집어선 감쪽같이 글쎄 너 아버질 휘어잡지 않았니? 그야 남 나무래 뭘 하니. 그래, 나이 오십이나 된 이가 계집 자식 옆에 놓구서 그년이 꼬인다구 그 종애에 떨어져서 허덕허덕하구 있어야 옳아? 고건 원래 학교 시대부터 그런 인간이었는데, 뭐.
 
63
옥주 -   어머니야말루 남의 탓 하실 것 없어요. 밥 먹구들 할일이 없으니까 몰 켜다니면서 그따위 연극들이나 하구 다니지. 이번 일은 물론 아버지만 잘못하셨다군 할 수 없어요.
 
64
혜경 -   아니 그래. 누가 잘했다더냐?
 
65
옥주 -   그래, 제가 어머니보구 늘 뭐라구 그랬어요. 아버지가 워낙 대범하시구 말이 없으신 어른이시지만 왜 같은 나이에 머리는 뚜르르 말아서 핀이나 몇 개 꽂구 꼭 선머슴처럼 몸뻬 조각에다 구제품 잠발 뒤집어쓰구 계시냐구 몇 번이나 그랬어요. 늙어가면서 뭐 양단으루 칭칭 감구 파마까진 모른대도 전 신마 사질 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을 보면 소록도에 문둥이 수용소가 있다니 그리 루들 할 묶음에 엮어다 보냈으면 싶어지지만 또 어머니처럼 그 꼴 하구있는 여편네들 보면 한심해 못견디겠습니다.
 
66
혜경 -   모두 느 아버지 위해서 그랬지 뭐냐.
 
67
옥주 -   아따, 아무려면 어머니가 먼저 짜부라지시지 아버지가 먼저 늙으실 줄 아셨어요? 아버지가 뭐 연세가 많으셔요. 아직 오십 전 아니세요. 지금 남자들 오십 이면 청년 행셀 한대요! 소 잃구서 외양간 고치는 식이 됐지만 어머니가 요새처럼 몸단속을 하시니까 얼마나 깨끗해 뵈구 젊어 뵈우? 같은 거지라 두 깨끗한 거질 주구 싶단다우. 아버진 뭐 깨끗하구 아름답구 한 걸 모르시는 어른이신 줄 아세요? 저보구두 몇 번이나 그러십디다. "느 어머닌 치마저고리 한 벌두 없다던?" 걸핏하면 "어머닌 집안에서 뭐 ─" 그러시지만, 아니, 그럼 여자가 집안에 있잖구 장바닥에 가 있수?
 
68
혜경 -   얘야. 이젠 좀 고만해라.
 
69
옥주 -   하두 분하구 답답하니까 하는 말이죠.
 
70
혜경 -   휴우 ─
 
71
옥주 -   그래, 아버진 뭐라구 그러세요?
 
72
혜경 -   고년 말하구 또 꼭 같구나. 그래, 아직두 연극을 하는 모양이다. 암만 해두. 둘이서 외워가지구 해두 그렇게 꼭 같겐 못하겠더라. 고년두 사랑 양반들 끼리 해결할 일이지 내가 어떻게 하겠다구 말할 수 있느냐구 그러더니만 글쎄. 느 아버지두 그러시는구나. 짜구 하는 노릇이지 뭐야.
 
73
옥주 -   그야 그렇지요. 말이 그렇지, 어머니가 아버지하구 그 아주머니하구 걸어서 쌍벌죄로 고손 못하시겠지요?
 
74
혜경 -   고년만 걸어서 고소할 순 없니?
 
75
옥주 -   어머니의 그런 사고방식이 틀렸에요!
 
76
혜경 -   아이, 고년 갈아먹어두 시원치 않다.
 
77
옥주 -   어머니 생각엔 어떠신지 몰라두 난 김 박사가 그대루 안 있을 것 같아요. 대개 자기 품행 나쁜 사람이 상대방의 정존 요구하거든요. 자기가 데리구 노는 계집들한테 하던 생각을 하구 자기 아내가 딴남자한테 했을 여러 가지 행동을 상상한다면 참을 수 없을 거야요.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 되려 일 시 과실이니 하구 관대해질 수 있을지 몰라도.
 
78
혜경 -   쌍벌죄로 고솔 하면 어떻게 되나?
 
79
옥주 -   뭐 어떻게 돼? 둘이 다 징역이지!
 
80
혜경 -   김 박사가 설마 고소야 할까? 자식들두 있구 한데?
 
81
옥주 -   한다구 서둘더래.
 
82
혜경 -   누가 그러던?
 
83
옥주 -   하두 답답해서 김 박사의 딸을 불러내어 물어봤지요.
 
84
혜경 -   그래, 고솔 한다더래?
 
85
옥주 -   당장 집에서 나가라구 쫓아냈대요. 어머닌 어디서 만나셨수?
 
86
혜경 -   계동 아주먼네 집에 와 있더구나.
 
87
옥주 -   질래 거기두 못 있을 거야.
 
88
혜경 -   질래는 커녕 그 아저씨가 곧 돌아오시잖니. 그러구 친구 사이지만 이런 시끄러운 일에 누가 발을 매일려구 그러겠냐?
 
89
옥주 -   장난할 때처럼 합심들이 됐으면 ─ 어쨌든 오늘이야 탁방을 내겠지. 오늘 김 박사가 아버지 뵈러 오신대. 두분이 만나야 끝장이 나지.
 
90
혜경 -   그래? 참 큰일이다. 어쩌다 집안이 이 꼴이 된단 말이야? 응길이 녀석은 오늘두 소식이 없지?
 
91
옥주 -   없어요. 서의 동무집도 알아볼 만한 데는 거의 다 알아본 셈이어요. 세 놈이 몰켜 나갔다니 어디 가서 무슨 지저굴 하구 있는지 신문에 학생강도니 어쩌니 하는 제목만 눈에 띄어두 가슴이 그만.
 
92
혜경 -   즈 삼촌 때문에 모두.
 
93
옥주 -   아니, 삼촌은 왜 들먹여요! 그 양반이 그래 보여두 제정신 가진 눈은 우리 집안에선 삼촌밖에 없어요. 아버진 그저 외곬수셔서 세상 물정을 모르시다가 저런 횡액에 빠져 버렸지.
 
94
혜경 -   난 걸핏하면 삼촌! 벽에 미친 사람 가지구 뭐 제정신이라구?
 
95
옥주 -   어머닌 모르셔!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96
분이 -   (들어와서) 손님 오셨어요.
 
97
혜경 -   어서 오셨는가 여쭈어 보구 들어와야지, 이년아.
 
98
소리 -   낙원동 김 내과에서 왔습니다.
 
99
옥주 -   어마! 임숙 아주먼네 아저씨야.
 
100
혜경 -   김 박사? 나가봐라, (분보고) 넌 왜 해맹이 잃은 애처럼 그러구 섰는거냐! (분, 나가고 옥주, 옷매무새 고치고 나간다.)
 
101
옥주 -   (소리만) 아버진 아직 안 들어오셨지만 들어오시지요.
 
102
소리 -   어머닌 계신가. 계셔? 그럼 잠깐 올라갈까? (옥주 따라서 김 박사 들어온다.)
 
103
혜경 -   어서 들어오세요. 참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104
김박 -   오래 못 뵈었습니다. 안 선생은 외출하셨다구요?
 
105
혜경 -   네. 방으로 들어가실까요?
 
106
김박 -   뭐 괜찮습니다만. 안 선생 안 계시니 부인과라도 이야길 좀 하구 갈까요? (옥주, 슬며시 응접실 쪽으로 가버린다.) 뭐 다 아시는 일이니까 부인과 이야기 하는 편이 낫겠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자면, 부인께서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시려는지요?
 
107
혜경 -   그야 저이로서는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까? 저이로서야 그저 선생님께 사과를 올리고 처리를 바랄 뿐이지요.
 
108
김박 -   안 선생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지요?
 
109
혜경 -   집양반두 그렇지요, 뭐.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선생님 처분만 바라고있을 겝니다.
 
110
김박 -   내 처분을?
 
111
혜경 -   그렇지 않겠습니까?
 
112
김박 -   자기 잘못을 다른 사람이 처분한다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요? 자기 잘못은 자기 자신이 처리하겠지요.
 
113
혜경 -   전 선생님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그러면 임숙이는 이 일을 어떻게 조처한다고 합니까?
 
114
김박 -   그야 나도 모르지요. 저 자신의 양심에 맡기고 있습니다.
 
115
혜경 -   그러니까 선생님은 임숙이가 어떻게 조처하기를 바라고 계시는지 그 점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116
김박 -   나로선 누구한테나 뭐 어떤 방법을 요구할 의사도 없습니다. 요는 본인들의 자유 의사에 맡기지요. 그러나 또 나로서는 희망 조건이 없지도 않지만 그 점을 안 선생이 돌아오시는 대로 제게로 오시든지 (일어나면서) 연락을 해주시든지 해주시지요. (하고 나가는데 안 교수 마침 돌아온다.) 아, 오시는군.
 
117
혜경 -   그렇잖아두 지금 막 나가시는 길이신데 마침 잘 돌아오셨군요. 임숙이네 선생님 김 박사님은 안으로는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도 한번 상면들도 못하셨으니.
 
118
교수 -   내가 옹졸해서 그렇습니다.
 
119
김박 -   피차 그렇게 됐습니다.
 
120
혜경 -   그럼 앉아들 말씀하시지요. (일어선다.)
 
121
김박 -   아닙니다. 부인께서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임숙이도 곧 올겝니다. 사건은 두 사람이 일으켰지만 뒷수습을 하는 데는 아무래도 두 가정의 관련자가 합석하는 게 좋을 겁니다.
 
122
혜경 -   그럼 임숙이 올 때까지 차나 준비시키고 들어오겠습니다. (일어난다)
 
123
김박 -   그럼 죄송합니다만 좋은 얘기두 아닌 터구 맨숭맨숭하니 앉아 이야기 하기엔 너무 빡빡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술 한잔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124
혜경 -   그렇지 않아도 준빌 시키고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125
교수 -   술을 못해 노니까 늘 이런 실례를 하게 되는군요.
 
126
김박 -   손으로 와서 술 청탁까지 해서 죄송합니다.
 
127
교수 -   원 천만에, 되려 부끄럽습니다.
 
128
김박 -   그럭저럭 20년 가까이나 되면서 이런 일로 이렇게 된 것은 실로 유감입니다.
 
129
교수 -   면목없습니다. (회화가 중단되고 담배들만 피운다. 둘이 다 멋쩍은 침묵이다.)
 
130
김박 -   안 선생, 대체로 이 사건의 사후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131
교수 -   그야 자연 여러 모로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또 중단된다. 사이. 그때 현관문 소리)
 
132
김박 -   임숙이도 온 것 같습니다. (안 교수 담배만 피우고 있다. 사이) 임숙인 모양인데 뭣때문에 안 들어오노? 부인 좀 불러 보시지요.
 
133
교수 -   여보! 여보!
 
134
혜경 -   (소리만) 네, 지금 곧 들어가요.
 
135
교수 -   빨리 들어와요.
 
136
혜경 -   (소리) 네, 곧 갑니다.
 
137
김박 -   우리 다 좋은 사이가 이런 일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 했습니다.
 
138
교수 -   나 또한 내가 내 평생에 이런 과오를 범케 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구요. (그때 혜경, 임숙을 앞세우고 들어온다.)
 
139
김박 -   부인도 앉으시지요. 어디 앉으시겠스니까? (임숙, 난처해한다.) 글쎄, 이 부인은 누가 자리를 권해야 옳을지 모르겠군요. 내가 권키도 거북하고 그러고 안 선생이 권할 수도 없을 테니 역시 부인께서 자릴 잡아주시지요.
 
140
분이 -   (빼꼼히 나타나서) 아주머니, 이것 좀 드셔야겠어요. (혜경 "오냐." 하고 나가서 교자상에 마른 안주 몇 가지와 양주병 들고 들어온다. 분이, 나간다.)
 
141
혜경 -   믿을 만한 상점에서 진짜라기에 가져왔습니다만 진짠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142
김박 -   시침떼고서 20년이나 같이 살아도 진짠지 가짠질 모르는데 술이야 더하지 않겠습니까? (공기가 이상해진다.) 어째 자리가 너무 공소해지는군요. (임숙보고) 윤 여사, 술 한 잔씩 따르고, 이런 이야기할 때는 약간 술기운이 있는 게 낫습니다요. 그렇겠지요. 안 선생? 자, 임숙. (병을 집어주며) 누구한테 먼저 따르든지 그것은 당신의 자유 의사에 맡깁니다. 안 선생도 잔을 드십시오.
 
143
교수 -   나야 원래 술을 하지 못하니까.
 
144
김박 -   뭐 이런 경우야 술을 하구 못하구가 상관없지요. 자, 잔 잡으시지요. (안, 할 수없이 잔 잡는다.) 임숙이, 어서 당신 마음 내키는 대로 먼저 따르라구!
 
145
혜경 -   제가 따르겠습니다. (술병 뺏으려 든다.)
 
146
김박 -   아닙니다. 놔두십시오. 이런 땐 윤 여사가 따르는 게 예의겠지요. 자, 임숙이, 어서 따르라구.
 
147
임숙 -   (술병 들고 오래 생각하다가 대담하게 안 교수 잔에 먼저 따른다. 일동 아연해진다.)
 
148
김박 -   잘했소. 그렇게 하는 게 옳다 생각하면서 역시 또 좀 섭섭해지는구려. 어쨌든 우리 임숙이답소. 자, 듭시다. (쭉 마신다. 안도 약간 입에 댄다.) 자, 그럼 우리.
 
149
교수 -   김 박사, 하나 청이 있습니다.
 
150
김박 -   말씀하시지요.
 
151
교수 -   먼저 우린 이 문제를 가장 옳게 수습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우리는 이 사건을 범죄 시하는 관념에서 떠났으면 합니다. 이의 범죄성과 또 그 경중은 우리가 짓는 결론에서 자연 밝혀질 것이니까요. 그래야만 각자가 다 자유스럽고 또 자연스러운 심리상태로서 이 자리에서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152
김박 -   잘 알았습니다. 이 사건을 범죄시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153
교수 -   그렇습니다. 범죄로서 규정짓기까지에는 그런 선입관으로 이 사건에 임하지 말자 그런 말씀이지요.
 
154
김박 -   지당한 말씀입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다 각기 자기의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요. 그러면 아주 단적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릴까요?
 
155
교수 -   좋겠습니다.
 
156
김박 -   내가… 나뿐이 아니라 전 학계가 심심한 존경으로 받들어 온 안 선생께서 이런 사건에 개재된 데 대해서는 실로 유감천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된 경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처 임숙이가 내게 대한 반감에서 그렇게 나갈 수 있었다는 것도 나는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만으로서 이 사건이 처리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안 교수와 또 우리 학계를 위해서 나는 두 분의 행동을 현명한 법에 묻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157
교수 -   법에 묻다니요…
 
158
김박 -   안 선생께서 내 말을 못 알아들으셔서 물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나는 오늘 두 분은 우리 국법에서 다스려 줍소사는 신청을 완료했습니다.
 
159
혜경 -   선생님! 그러실 수가 있으십니까?
 
160
김박 -   안 선생이나 임숙이도 이것을 원했으리라 믿습니다.
 
161
혜경 -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십 년간 부처님처럼 믿어온 남편이었습니다. 이십 년간 친형제처럼 진일이나 궂은일이나 같이 겪어온 임숙이었습니다. 그 남편한테 배반을 당했고 그 친구한테서 속았어요! 선생님은 임숙이 한테만 속았지만 전 두 사람한테 속았습니다. 분하기는 선생님보다도 제가 몇 배 더해요… (운다.) 억울함, 생각만 해도 갈아먹어도 시원치가 않을 것 같아요! (사이) 그렇지만 네, 선생님. (운다.) 그렇지만, 분하시지만 참으셔야 해요! 그것만은 참으셔야 해요! 두 사람을 갈가리 찢더라도 그런 방법만은 참으셔야겠어요! 네, 선생님!
 
162
김박 -   부인!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값싼 복수심에서 그렇게 하기로 작정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국보적 존재이신 고고학의 최고권위 안현식 선생의 명예를 위해서입니다. 처음에는 나도 나 개인이 처리하려 했습니다. 간단하게, 내 아내는 간단했습니다. 그러나 안 교수만은 나란 의사가 단순히 임숙의 남편이라는 권리만으로서는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깨달은 것 입니다. 그렇게 처리해 버리기에는 안현식이란 이름은 너무도 컸습니다. 이런 어른을 하치않은 일개 돌팔이 의사가 단독으로 심판한다는 것을 안현식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우리의 학계 전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163
혜경 -   그러면 선생님. 집양반과 임숙이는 법의 심판을 받는다지만 아기들은 어떻게 되시지요?
 
164
김박 -   그런 것까지 묻지 말아주십시오. 그것은 일종의 내정간섭이니까요.
 
165
혜경 -   댁에뿐 아니라 저의 집에도 아이들이 있기에 말씀입니다.
 
166
김박 -   댁 아기들 문제에 관한 것도 저로선 터치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167
혜경 -   네, 선생님! 한 번 진정하시지요. 사람이 일생에 한 번쯤은 과오를 범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둘은 다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168
김박 -   난 부인께서도 나의 해결책에 공조해 주실 줄 믿었었는데 실로 의외입니다. 부인께서도 이런 기회에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밝히시리라고 믿었군요. 이번 사건은 우리 두 가정에만 한한 경종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울리는 경 종이 될 것입니다.
 
169
혜경 -   선생님, 저의 집 양반이 이런 과오를 범하게 된 이면에는 저 같은 여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앉아 생각하면 정말 전 남의 아내 될 자격이 없는 여자 였어요! 아내 노릇을 못했습니다. 식사 한번 몸소 내 손으로 따뜻하니 장만 해서 시중한 기억이 없을 정도로 식모한테 내맡겨 왔었어요. 그래도 한마디 불평을 않았어요. 불평을 않는 데서 전 점점 더 무관심해졌던가 봐요.
 
170
김박 -   부인!
 
171
혜경 -   한 말씀만 더 하게 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이 무관심이 집양반으로 하여금 그런 과오를 범케 했다는 자책을 받고 있습니다. 죄의 책임의 반은 제 게도 있다고요. 이 말은 선생님의 경우에도 맞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선생님은 사실 그런 문제로 임숙이를 많이 울리셨어요! 그건 우리 동무들이 다 알고있지 않습니까?
 
172
김박 -   그러니 임숙이가 진 죄의 반은 내게 책임이 있다는 것인가요?
 
173
혜경 -   그렇습니다.
 
174
김박 -   그야 없다고도 할 수 없지요. 사실 나는 여자 일로 많이 임숙이를 울렸습니다. 그리고 제 말마따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좀더 순수한 남성에 대한 막연하던 동경이 그런 장난을 하는 동안에 안 선생한테 끌렸다는 그 심정은 이해 합니다. 안 선생도 그랬을 것입니다. 덤덤한 아내, 무관심한 아내만을 보다가 삽삽한 여성과 접촉하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끌렸겠지요. 임숙이 한테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이 곧 이 사건을 수습하는 방법은 못 될 겝니다. 생각해 보시지요. 나는 비록 외도도 하고 질서 없는 생활도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안 선생 품에 들었던 임숙일 내가 아내라고 품에 안을 수가 있겠습니까? 남자의 에고이즘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이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175
혜경 -   그렇다면 아내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라도.
 
176
김박 -   아내 자격이 없는 어머니란 존재가치가 없지요! (사이) 그러나 부인과의 토론은 이 정도로 하십시다.
 
177
혜경 -   아닙니다, 선생님. 저 두 사람한테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선생님! 잘못을 저지른 사람한테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오직 잘못했노라는 사죄가 있을 뿐이지요.
 
178
김박 -   그런 말 한마디도 없는데요?
 
179
혜경 -   임숙아! 왜 그러구만 있는 거야?
 
180
임숙 -   (울면서, 고개를 한 번 숙인다. 울음소리 커간다.)
 
181
교수 -   김 박사, 나로 하여금 박사의 마음을 괴롭히고 가정에 파탄을 가져온 데 대하여 심심한 사과를 올립니다. 그렇다고 이 사과가 김 박사의 해결책에 장해를 주자는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닙니다.
 
182
김박 -   어떻게 하시는 말씀이신지? 법의 판정에 맡기라는 말씀이신지? 그렇지 않으면 달리?
 
183
교수 -   나로선 김 박사의 처사에 장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뿐입니다.
 
184
혜경 -   여보세요! 엎드려 빌어도 시원치 않을 자리에서.
 
185
김박 -   아닙니다, 부인. 안 선생은 과연 신사이십니다. 남의 행동에 장해가 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얼마나 신사다운 태도입니까?
 
186
혜경 -   임숙아, 넌 울고만 있으면 어쩔 작정이냐! 울기만 하면 해결이 나? 뭐라구든지 말을 해야 하잖아? (밉살맞아서) 아니, 그 목석 같은 양반을 후려대던 그말솜씬 다 어쩌구 꿀먹은 벙어리처럼 저러구 앉았기만 하는 거야! (김 보고) 네, 선생님. 밖으로나 안으로나 좋은 친구가 아니십니까? 임숙이와 저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두 집 사이에서 그렇게 해결을 지을 수가 있겠어요? 한 번만 돌리세요…
 
187
김박 -   (발끈해서) 아닙니다! 나는 피를 봐야 합니다! (벌떡 일어난다.) 피를 안 보구는 나는 참을 수가 없다! (모자를 찾아 들고 나가려 할 때 임숙, 뛰어가 앞을 막는다.) 왜 이러오?
 
188
임숙 -   잠깐만 앉으세요!
 
189
김박 -   앉아서 무엇하자는 거야? 이야긴 다 끝났소.
 
190
임숙 -   아니예요. 정말 이야긴 이제부터가 아니겠어요?
 
191
교수 -   (일어나서 가까이 가며) 김 박사, 잠깐 앉으십시다. 어떻게 처리하시든, 우리가 할 얘기가 있지 않을까요?
 
192
김박 -   (갑자기 안 교수의 뺨을 후려친다.) 에이끼. 배신자! 학자의 이름이 아깝다. 고고학자? 대학교수? 국보적존재?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하고서도 교단에 서? 학생들한테 강의를 하고?
 
193
혜경 -   선생님! 실컷 더 때려주세요! 선생님의 울분이 확 풀릴 때까지 실컷 때려주세요. 그러구서 확 풀어주시시오! 선생님은 남자 어른이십니다. 고발을 해서 징역을 보내는 것보다는 그것이 되려 선생님을 진정시켜 줄 거예요. 실컷, 마음껏 때리시구서 푸세요. 네, 선생님! 그래두 시원치 않으시면 저두 때리세요! 이 집에 불을 퍽 질러서 노염이 풀리신다면 그렇게라도 해주세요! 선생님의 말씀 단 한마디에 달렸습니다. 가정도, 자식도. 네, 선생님, (운다.) 이렇게 애원합니다.
 
194
김박 -   (깊은 생각에 잠긴다. 안 교수에 접근하며) 안 교수! 폭행을 해서 명목이 없습니다.
 
195
교수 -   그 정도가 무슨 폭행이겠소.
 
196
김박 -   부인, 나 술 한잔 더 주십시오. (혜경, 뛰어가서 가져온다. 따른다. 쭉 마시고 또 내어민다. 석 잔째 마시고) 부인, 술기가 도니까 슬퍼지는군요! 울고싶어졌습니다.
 
197
혜경 -   한잔 더 하시고서 실컷 화풀이를 하십시오. 그리고 한 번만 돌리세요.
 
198
김박 -   나, 감일등 하기로 약속합니다.
 
199
혜경 -   네?
 
200
김박 -   (주머니에서 고소장 꺼내어 찢으며) 고발하는 것만은 포기하겠습니다.
 
201
혜경 -   감사합니다. 그것만 중단하신다면 뭣이든지 달게 받겠어요, 뭣이든지!
 
202
김박 -   안 교수! 나와 몇 가지 약속을 할 수 있으신가요?
 
203
교수 -   하지요.
 
204
김박 -   좋습니다. 그럼 내 하나하나 들겠습니다. 부인도, 임숙도 잘 들어두오. 첫째로 난 안 교수께 안 교수 명의로 된 일체의 교과서나 저서를 폐책 처분하기로 요구합니다.
 
205
혜경 -   하구말구요.
 
206
김박 -   아니, 안 교수 자신이 말씀해 주시지요.
 
207
교수 -   불행입니다. 교과서는 쓴 것이 없고 저서 두 권은 이미 절판된 지 오랩니다.
 
208
김박 -   그럼 좋습니다. 안현식이란 이름으로 신문잡지에 집필도 않으시겠지요?
 
209
교수 -   당분간 안 쓸 겁니다. 안 쓰기보다 못 쓰게 되겠지요.
 
210
혜경 -   무슨 면목으로 씁니까? 안 쓰구말구요. 저 자신이 못 쓰게 하겠습니다.
 
211
김박 -   일체 교직에서 물러나실 수 있으시겠지요? (이때 박호, 옥주, 들어와 구석에 선다.)
 
212
교수 -   (빤히 쳐다본다.)
 
213
김박 -   나는 우리의 신성한 교단에는 파렴치죄의 현행범이 나서는 것은 묵인할 수가 없습니다.
 
214
혜경 -   선생님, 그건 너무 심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가만히 앉아서 전 가족이 굶어 죽으란 말씀이 아닙니까? 전 가족이 앉은 해 굶어죽어서 선생님이 통쾌하실 것은 없지 않습니까? 네, 선생님!
 
215
김박 -   (생각한다. 사이)
 
216
혜경 -   네, 선생님. 그것만은 너무 가혹하셔요.
 
217
김박 -   그럼 좋습니다. 나도 인간입니다. 당자가 그렇게 가혹하다신다면 조건 부로 하지요. 일 년간입니다. 법의 제재를 받는대도 일 년은 자유롭지 못할 테니까 요. 전과자로서 다시 교단에 설 순 없지 않습니까? 이것만 약속 하신다면 난 금후 일체 내 아내와 만나지 않는다는 약속 하나만으로 해결을 짓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일 년간도 거부하시나요?
 
218
교수 -   (깊은 생각에 잠긴다. 오랜 사이 후에 잔을 갖다가 혜경에게 내밀고) 나, 술 한잔 주오. (반쯤 따른다.) 아니오, 가뜩 부우. (따른다. 쭉 들이마시고 거닌다.)
 
219
혜경 -   (몸이 달아서) 일 년쯤은 어떻게든지 살아요! 염려 마세요! 네, 어떻 게든지 살아가요! 걱정 말구 약속하세요. 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버티어 가겠어요!
 
220
교수 -   (꾹 노리고 보다가 크게) 이 세상에 어디 낮잠 품삯 주는 집은 있는 줄 아오! (또 거닐다가) 좋습니다!
 
221
김박 -   양해하셨군요! 나도 기쁩니다. 우리가 이 정도로 신사적 해결을 진 것은.
 
222
혜경 -   ('휴’ 한숨 쉰다.) 김 박사님에게 감사합니다. (그대로 거닐고 있는 안 교수를 따라다니며) 잘 용기를 내세요! 그까짓 쥐꼬리만한 월급 몇 푼 없어도 살아가요! 남의 집 빨래라도 해요! 식모루라도 가겠어요!
 
223
교수 -   (역시 거닐며) 좋습니다! (선다.) 요구하신 일 년 아니라 삼 년 아니 일평생이라도 교직에서 물러나리다. 그러나 유감천만입니다만 맨끝 조건만은 (거닌다.) 난 약속할 수가 없습니다.
 
224
김박 -   네? 끝조건이라니요?
 
225
혜경 -   아니? 여보!
 
226
임숙 -   선생님! (앞으로 나아간다.) 선생님! 안 돼요! 안 돼요!
 
227
교수 -   (임숙을 밀어치우고) 김 박사가 제시한 조건은 다 듣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으니까. (거닐며) 그러나 마지막 조건 ─ 임숙과 금후 일체 교섭을 끊어 달라시는 조건만은 나로선 보장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228
혜경 -   아니, 이 양반이 미쳤나! 이 양반이… (덤빈다.) 아니, 미쳤어! 미쳤어!
 
229
교수 -   그래, 미쳤소! 미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장한가? 얼마나 행복되고!
 
230
임숙 -   (덤비며) 선생님! 안 돼요! 안 돼요.
 
231
교수 -   (침통하게 거닐며) 교직도 저작도 다 버릴 수 있소. 그러나 난 내가 새로 찾은, 새로 발견한 나의 인생은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십 년간 나는 미를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여성이란 그렇게도 단아하고 상냥하고 유순하다는 것은 모르고 살아왔었소. 내게는 꿈이 없었소. 무지개도 없고 번개도 모른 채 오직 회색의 깊은 안개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오. 나는, 나는 일찍이 내 청춘의 정연이 연소되는 소리를 못 들은 채 살아왔던 것이오. (또 거닌다. 혜경 울음소리, 윤임숙도 운다.) 그러나 난 지금 간 곳 모르던 내 청춘을 찾았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깨달았어요! 이 깊은 회색 안개를 걷어내고 나타난 것이 윤임숙이었던 것이오. 나는, 나는, (윤, 덤벼서 입을 먹는다.)
 
232
임숙 -   거짓말예요! 안 선생님은 거짓말을 하고 계세요!
 
233
교수 -   임숙! 무엇이 거짓말이라는거요? (잡아 흔들면서) 응, 임숙, 무엇이 거짓말이야? 난 거짓이 아니야. 진정이야. 내 청춘은 이렇게 고백하기를 내게 명령 했다. 임숙, 당신이야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어! 우리의 연극은 막이 내렸어. 무엇때문에 거짓말을 해! 무엇이 무서워서? 김 박사가 무서워서! 쌍벌죄가 두려워서? (대소한다.) 쌍벌죄? 하하하하. 고발하라지! 고발하래! 난 재판관한테 말해 줄 테야. 평생 고독 속에 살아오던 오십 난 사나이가 계집을 두름으로 엮어서 끌고 다니는 한 탕아한테 지치어 빛을 모르는 한 여인과 사랑을 했습니다. 나는 학자요 대학교수의 지성으로 법의 판정을 기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 내게 벌을 주시오. 반년도 좋고 일 년도 좋고 삼 년도 좋습니다. 그 대신 나는 나의 나머지 청춘을, 나머지 인생을 찾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겠소. 임숙, 당신도 아직 삼십 년이란 인생이 남았소, 반년이 나일 년 주고서 이십구 년이란 우리의 인생을 찾는데 뭣때문에 주저하겠소, 뭣때문에 거짓말을 해! 자, 임숙, 이리 오라구! 벌을 받구서 우리 청춘을 찾는데 간섭할 사람이 누구냐 말이다. 김 박사? 물러가 주시오. 당신의 권한도 임무도 다 끝났으니 돌아가 주시오. 임숙, 와요! (벌컥 잡아당긴다. 임숙 쓰러지듯 품에 안기며 운다.)
 
234
김박 -   말씀 잘하셨소. 아마 내 임무는 끝났나 봅니다. 남편의 권한도 임무도, 안 교수가 나머지 청춘을 거슬러 받도록 해드리는 친절만은 저버리지 않으리다. (휙 나간다.)
 
235
교수 -   (임숙 안은 채) 임숙, 갔다! 갔다! 우리가 우리의 남은 청춘을 찾는데 이를 막을 자유를 가진 사람이 누구냐 말이다!
 
236
혜경 -   내가 막겠소! 내가, 정혜경이가 막을 권리가 있어요. 임숙아! 이리 못 나오느냐? (안 교수 점점 안고 임숙도 안긴다.)
 
237
교수 -   무엇이? 당신한테 막을 권리가 있다고? 천만에 당신한테는 내 청춘을 찾아야겠어! 물러받아야겠소! 이십 년간 막아논 정열의 저수지가 터졌는데 누가 막겠다는 거야. 당신이? 어림도 없어! 유사 이래로 이 몸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왕권으로도, 폭탄으로도 ─ 이 이십 년간 축적된 정열의 홍수를 당신이 막아? 낮잠이나 자! 몸빼나 입구서! 과학이 이것을 막을 수 있으 리라고 생각하느냐? 한 시간에 지구를 핑핑 도는 인공위성도 이 탁류만은 막을 수 없어!
 
238
혜경 -   (자꾸 울기만 한다.)
 
239
박호 -   (빙빙 돌며) 정열의 저수지… (거닌다.) 축적된 정열! 잃어진 청춘… 나는 이 것들을 어디 가서 찾아야 한다? 설렁탕집? 설렁탕집 그놈의 영감쟁이가… 국물 한 모금만 더 달래도 안 주는 그 텁석부리 영감쟁이가?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그놈의 텁석부리 돌려주기는커녕 내 남은 청춘을… 아니, 내 몸뚱이째 가마솥에 넣어서 끓여 먹고 싶을 거다… 끓여서 팔자구 할 께다!
 
240
옥주 -   (노래하듯) 시인 설렁탕 가마에 들다! 쇠족과 함께 뒹굴 테지.
 
241
임숙 -   (죽은듯이 있더니 갑자기 안 교수의 가슴에서 튀어나와서) 안 돼! 안 돼! 그럴 순 없어!
 
242
교수 -   임숙! 임숙. (팔을 벌린다.) 아무도 우리의 사랑을 막을 사람은 없어! 다 갔어.
 
243
임숙 -   제가 막겠어요! 윤임숙이가 막겠어요. 인공위성은 못 막았지만 제가 막겠어요! 제겐 권리가 있어요, 힘도 있구요! 선생님, 꿈을 깨주세요! 꿈을! 그리고 혜경이한테로 돌아가 주세요!
 
244
교수 -   임숙! 임숙. (팔 벌린다.)
 
245
임숙 -   안 됩니다! 정열의 저수지는 이미 배수구가 막혔어요. 막았습니다. 윤임숙이가 막아버렸습니다. 자, 돌아가 주세요! 혜경이! 왜 이러고 있어! (혜경을 벌떡 떠밀어 안 교수한테 안겨주고 살처럼 빠져 나간다.)
 
246
교수 -   임숙! 임숙! (혜경을 슬며시 밀어 치우고 비틀비틀 의자에 가서 픽 쓰러진다.)
 
247
순경 -   (소리만) 여보시오! 여보시오. (몹시 당황하게) 이 댁이 안현수 씨 댁입니까?
 
248
박호 -   (뛰어나간다.) 그렇습니다.
 
249
순경 -   (소리) 안현수 씨가 미도파 7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습니다. 빨리 가보십시오.
 
250
교수 -   어? (벌떡 일어난다.)
 
251
옥주 -   (비명 치며 얼굴 가린다.)
 
252
박호 -   (비실비실 들어오며) 사람두! 왜 하필 미도파람? 명동엔 인제 나갈 수가 없잖아. (비실비실) 사람두 참, 인젠 시도 써먹을 수 없잖아? 그 자식 생각 이나서. 옥주! 돈이나 있건 좀 주. 이 친구 또 늦게 왔다구 벽 같은 놈이라구 괴벽을 부리겠다.
 
253
옥주 -   가만 계세요! 나두 가겠어요!
 
254
박호 -   사람 녀석! 그 용광로 같던 정열의 저수진 어떻게 처릴 하구 갔노. 자식! 영란이 하구 식이나 올리구 가잖구.
 
255
옥주 -   아버지, 다녀오겠어요. (휙 나간다. 박호도 따라나간다)
 
256
<1952>
 
 
257
<「신태양」80호, 1959년 6월>
【원문】제 3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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