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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壁) ◈
◇ 제 2 막 제 2 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4권)     이전 3권 다음
1959년 6월
이무영
1
벽(壁)
 
2
제 2 막 제 2 장
 
3
  전장으로부터 2개월 후 중추
 
4
무대  무대 1막과 같음.
 
5
  막이 오르면 현수, 옥주, 싸움이나 한 사람들처럼 무대 좌우 끝에 서 있다. 관객이 지루할 정도의 사이. 그때 박호가 들어와도 모른다.
 
 

 
 
6
박호 -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아니, 이 사람들 봐. 마치 연극은 끝이 났는데 막이 내려오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는 배우들 형상이네그려, 그런가들?
 
7
현수 -   (그제서야) 아, 왔나?
 
8
옥주 -   (반가워한다.) 박 선생님, 마침 참 오셨어요.
 
9
현수 -   왜요? 오늘두 뭐 안방에 잔치가 벌어졌나요?
 
10
옥주 -   그게 아니구요. 이때까지 삼촌하구 토론을 하다가 결말을 못 지어서 그래요.
 
11
박호 -   토론이란 게 원래 결론이 없는게지요. 토론하는 데 심판한답시구 앉아 있는 친구들처럼 쑥이 있을까.
 
12
옥주 -   그럼 토론이 아니예요. 논전이지. 정정합니다.
 
13
박호 -   그건 또 논전하는 사람들 자체가 쑥이지. 사람이란, 평론가 말을 빌리면 인간이란 다 제각기 다른 생각을 갖게 마련이거든요! 사람이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성명 이름이 각각 다 다른 법이지요. 그런데 왜 남이 어떤 생각을 가졌거나 간섭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말야. 간섭까지도 또 좋은데 이건 사뭇 내가 가진 생각이 옳으니 네가 가진 생각은 버리라는 것이 생긴단 말야. 안 그렇습니까, 옥주 씨? 그렇게 쑥스러운 일이 있나요!
 
14
옥주 -   그럼 박호 선생님을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할까요? 토론도 논전도 다 필요가 없다?
 
15
박호 -   없지요! 아무것두 필요치 않아. 난 죽음이라는 것도 없어야겠다고 생각하지요.
 
16
옥주 -   (웃는다.) 아니, 선생님은 모든 것을 부인하시면서도 장수하고 싶긴 하신 게로군요?
 
17
박호 -   아니, 내가 언제 살고 싶다고 그랬던가? 사람 ─ 아니, 나도 좀 유식해져야지, 인간들이 하도 죽음이란 것을 무서워하니까 말씀입니다요.
 
18
현수 -   (지금까지 어처구니없다는 듯 둘의 대화만 듣고 있다가) 아니 박군, 그러면 자네 한텐 대관절 뭐가 필요하다는 겐가?
 
19
박호 -   내게 필요한 거? 별로 없지. 글쎄, 굳이 찾자면. (옥주를 턱으로 가리킨다.)
 
20
옥주 -   참 지난 추석이에요.
 
21
박호 -   네.
 
22
옥주 -   제가 신신서 제빌 뽑잖았겠어요? 그랬더니만 상아 파이프가 나왔겠지요? 여자한테 그게 무슨 소용이답니까?
 
23
박호 -   상아 파이프! 그거 날 주면 좋았을걸.
 
24
옥주 -   아마 대개 그런가봐요. 필요한 사람한테는 매양 쓸모없는 것이 해당 되는 가보군요. 그런가보죠, 박 선생님?
 
25
박호 -   옥주 씨한텐 내가 필요치 않을지 모르지만 내겐 필요하거든. 가끔 설렁탕 값을 뺏어야겠으니까.
 
26
현수 -   (괴로워서) 난 어떻게 하면 좋은가?
 
27
박호 -   죽으면 좋아.
 
28
현수 -   죽을 순 없어! 이대룬! 세상에 태어났다가 이대루 죽을 순 없어!
 
29
박호 -   그럼 살면 좋아.
 
30
현수 -   박 군!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 심정 나도 잘 아네. 잘 알아. 그렇게 말하는 자네의 고민도 알고 모든 현실에서 초연해 보고저 하는 그 초조도 나만은 알아!
 
31
박호 -   알면 그만둬. 아는 얘길 안다구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 더구나 내 심정이야 자네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는데 자네가 나한테 내 심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잖으냐 말야. 안 그런가, 이 사람!
 
32
현수 -   (머리를 그러안는다) 호야, 나, 괴롭다! 괴로워!
 
33
박호 -   얼마나 행복이냐!
 
34
현수 -   자넨 농담으로 수작은 놀지만 그 심정두 안다. 자네 농담은 그 누구의 진실한 얘기보다도 내게는 가장 진지하게 들린다. 감동도 주고 공명도 가져오고, 자네 농담은 경구야, 진리고.
 
35
박호 -   이 사람, 그러다가 나 또 장로 만들겠네.
 
36
현수 -   아니야. 난 농담할 줄 모르는 사람이네.
 
37
박호 -   진담은 내가 할 줄 모르고.
 
38
현수 -   (사이, 그동안 현수 전 무대를 되는 대로 거닌다. 점점 황해지고 빨라지 더니 박호 앞에 와서 딱 서며) 호! (사이) 호! 자넨 문학자 아닌가, 시인 아닌가? 예술가지? 한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토록이나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동정심도 안 일어난단 말인가?
 
39
박호 -   자네가 살기 위해서 하는 고민인가? 자기 생명을 깎기 위한 고민이지. 대체로 자네의 고민이 어디 있는가. 국가? 민족? 인류? 나도 알지. 자네가 지금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벽 ─ 그것은 기실은 벽이 아닐세, 그것이 무슨 벽인가? 이 세대와 다음 세대를 막아논 칸막이야. 그 칸막이 다음 세대가 와야만 뚫을 수도 있구 때어 핑개칠 수도 있는 거야!
 
40
현수 -   칸막이라?
 
41
박호 -   그렇지, 칸막이지!
 
42
현수 -   그러면 그건 누가 제거시킨다? 누가?
 
43
박호 -   시간이!
 
44
현수 -   그러면 우리는 그 시간을 손 모아놓구 앉아서 기다려야 하던가!
 
45
박호 -   기다려야지.
 
46
현수 -   이 현실은?
 
47
박호 -   현실? 그건 제가 존재할 권리가 있는 거야. 오늘날의 모든 사회조직,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어느 부문을 보나 자네 말대로 벽이지! 그러나 도리가 없어. 이 현실은 그 자체가 존재할 충분한 권리를 갖구서 존재하는 거야! 내버려 둬! 여당이 한다고 정치가 안 되고 야당이 한다고 정치가 잘될 줄 아나? 여당도 이 세대 인간이고 야당도 같아. 무소속두 어디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선진국의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들 아니야. 이 세대 이민도 ─ 다시 말하면 이 현실이란 어디 뱃속에서 나온 자녀들이란 말야. 내버려 둬요! 저희끼리 싸우게. 해먹게 내버려 둬, 그게 크는 거야. 자라는 게구. 전진하는 게구.
 
48
현수 -   민중은?
 
49
박호 -   민중? 민중이 어째? 저희들 민도가 그밖에 안 되는데 어째?
 
50
현수 -   민중은 다 죽어두?
 
51
박호 -   오죽 좋아? 다 죽어 없어져야 해! 못난 민중이 다 죽어 없어져야 새 민중이나 올 것 아닌가? 십만 명이 모여서두 사람 하나 제대루 뽑을 줄 모르는 민중 ─ 그까짓 것은 뭘하는 거야. 그래놓구는 잘하네, 못하네, 죽겠네, 살 겠네다 죽어 없어져야 해!
 
52
옥주 -   아니, 난 박 선생님은 허무주의자이신 줄만 알았더니만 인제 보니 파괴주의두 겸하셨군요?
 
53
박호 -   난 파괴적 허무주의잡니다. (껄껄 웃는다.)
 
54
현수 -   내버려 둬라? (거닐며) 내버려 둬라?
 
55
박호 -   내버려 둬. 애들두 싸워야 커. 아직 애들이지 뭔가? 언제 정칠 해봤다구? 언제부터 행정관들야? 언제부터 저희가 민주사회구? 언제부터 민주 신문 이구? 삼천만 중에서 신문기자만이 민주적이야? 당수들만이? 아무리 큰소리 해 보았자 당수도 회장도 신문기자도 다 이 백성 민도 평균점에서 벗어나지못해. 내버려 두면 싸우면서 크는 법야.
 
56
현수 -   (아직도 거닐며) 내버려 둬? 이대루 내버려 둬? (선다.) 아니지! 난 그대루 둘 수 없어! 그대루 두고 볼 순 없어!
 
57
박호 -   그래, 그럼 버스 안에서 담배 피는 놈이나 때려주러 다니게! 새치기하는 학생이나 때려주구.
 
58
옥주 -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삼촌의 그런 심정을 전 이해할 수 있어요! 물론 제삼자로서 본다면 우스운 일이겠지요. 인생의 앞을 턱 막고 있는 벽에 직면하고 있는 사람의 행동으로 볼 때 그것은 실로 미미한, 아주 사소한 일로 밖에 보여지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 현실을 이토록. 악의 구렁 속에다 집어넣고 있는 것은 결국은 이런 조그만 악의 축적이 아니겠어요? 요새도 상영 되고 있지만 「죄와 벌」이란 영화를 보다가도 삼촌 생각을 했어요. 대학생의 지성으로 한 고리대금업자를 죽이는 데 만족하는 심정이 저의 삼촌한테 서는 그런 작은 일로 표현이 된 것이라고요!
 
59
현수 -   그만한 목적의식이나 있었다면 또 좋겠다. 발작이야! 미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의 순간적인 발작이야!
 
60
옥주 -   인간의 행동치고서 발작 아닌 것이 있던가요? 다만 그것을 정상적으로 보는 사람과 비정상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작년 크리스마스날 밤 삼촌이 거지 아이들 육칠 명을 충동여서 흥에 겨워 춤추고 돌아가는 댄스홀에다 잉크병 이십여 개를 던져서 말썽이 됐을 때도 저 자신 상은 찡그리면서 역시 통쾌했어요! 삼촌이 지금 절박해 있는 심정은 이 온갖 악의 총 본영에다 수소탄 같은 것을 던지고 싶은 데 있을 거야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될 때 삼촌은 그 돌기둥에 머리를 깨고 죽을 수도 있으실 겝니다. (이때 오영란, 들어오다 주춤 선다.) 악엔 크고 작은 차이가 없지 않잖아요? 크거나 작거나 악과 대결할 수 있는 사람은 존경해야겠죠. 작은 악에 무관심할 수 있는 인간치고 (박호, 접근한다. 뚫어져라 옥주를 본다) 큰 악에 항거한 예가 있었던가 몰라!
 
61
박호 -   (발작적으로 옥주의 머리를 끌어다 입에다 키스를 한다.)
 
62
옥주 -   (기함을 한다. 오영란 소리를 내고 놀란다. 입을 닦으며) 아니, 선생님!
 
63
박호 -   발작이야! 악에 발작이 허용된다면 선의 발작도 허용돼야 옳지.
 
64
현수 -   (호들갑을 떨며 웃어댄다.) 허허허, 됐어! 선의 발작이라? 막을 수 없지! 선의 발작을 막는 것은 악이니까. 됐어! 됐어, 우리 호란 놈 됐어!
 
65
영란 -   (그제야 나서며) 키스 강도시군요?
 
66
박호 -   영란이도 당하고 싶은 표정인 것 같긴 하지만 거부. (손으로)
 
67
영란 -   오해 마세요!
 
68
박호 -   안 봤어! 그것두 영화야?
 
69
현수 -   (거닐며) 선의 발작이다! 됐어! 호란 우스운 놈야. (거닌다.) 선의 발작이다… 얘, 옥주야.
 
70
옥주 -   네?
 
71
현수 -   너? (하다가 사이 두고) 아니다. (또 거닐며) 선에도 발작은 있을 수 있지.
 
72
응길 -   (고등학생 교복에 가방. 들어오면서 삼촌 흉내를 낸다.) 벽이다. 벽! 앞 도벽, 뒤도 벽. (한바퀴 돌고서 삼촌 보고 경례)
 
73
현수 -   야, 응길아!
 
74
응길 -   네.
 
75
현수 -   이리 좀 와!
 
76
응길 -   때리실려구?
 
77
현수 -   야만처럼 운동만 하나? 너, 당수를 또 배우러 다닌다구? 권투, 당수, 이눔아, 독서를 좀 해! 성적은 낙제면서 대학엔 어떻게 들어갈 거냐?
 
78
응길 -   그렇기에 저두 벽을 찾잖아요? 난 삼촌만 믿어요.
 
79
현수 -   자식은. 이 녀석아, 운동만 하면 동물 돼!
 
80
응길 -   그럼 열심히 하겠어요.
 
81
현수 -   십대까지가 벽이야. 대관절 당수라는 게 뭐냐. 너, 깡패 될려나?
 
82
응길 -   뵈어드릴까요? (가까이 가서 팔을 한 번 탁 치자 현수 기함을 하고 팔을 못 쓴다.) 이런 거야요, 삼촌. (그러고는 들어가며) 벽이다! 벽! 앞도 벽, 뒤 도벽! (안방으로 사라진다.)
 
83
옥주 -   쟤 때문에 큰일났어요, 참.
 
84
박호 -   가만있으시오. 또 팔 못 쓸려구.
 
85
옥주 -   그렇잖아두 한번 혼났대요.
 
86
박호 -   가끔 혼 좀 나야지.
 
87
옥주 -   박 선생님처럼 멋없으신 분이 시는 어떻게 쓰시는가 몰라.
 
88
박호 -   연애를 못해 봐서 그래. 누가 날 사람으루 취급해야지. 옷도 이쪼지. 집 한 칸 없지.
 
89
옥주 -   연애와 옷과 무슨 관련이 있어요.
 
90
박호 -   아니, 옥주 씨가 상당한 지성인인 줄 알았었는데 반대로 상당히 무식하신데.
 
91
영란 -   그게 유식한 거예요.
 
92
박호 -   옳지, 그러니까 영란인 그렇게 유식한 연애만 하는군그랴.
 
93
영란 -   아니, 이 선생님은.
 
94
박호 -   이승달인 줄 아는군? 난 박가야.
 
95
영란 -   아니, 말을 막 하셔. 꼭 영란이 자기 딸 이름이나 부르듯 하시니 웬일이셔요?
 
96
박호 -   장님은 누가 봐두 장님이구 바보는 구가 봐두 바보야. 영란이도 좀 영리해요! 연앨 해두 지성인다운 연앨 하구? 영란인 대학생 아니야? 몇 달 안 있어 졸업이지?
 
97
영란 -   아니, 이 선생님이!
 
98
박호 -   한 대 얻어치기 전에 저리루 가.
 
99
옥주 -   박 선생님! (눈을 흘긴다. 영란, 응접실 쪽으로 가서 운다.)
 
100
현수 -   (가까이 가서 어깨에 손을 얹듯) 영란이! 노하지 말아요. 호란 그런 녀석이니까. 그렇다구 영란일 미워해서는 아니야. 그놈은 천성이 그런 놈이거든. 귀여운 놈이지.
 
101
영란 -   (울며) 그런 줄 저두 알아요. 알지만 너무하셔요.
 
102
현수 -   대낮에 남의 집 처녀한테 키슬 강도질하는 녀석인데, 뭐.
 
103
영란 -   그야 얼마나 좋은 일예요? (말해 놓고서도 제라서 웃어버린다.)
 
104
박호 -   현수! 컬컬하네나.
 
105
현수 -   대포 생각이 나는 모양이군, 또.
 
106
박호 -   사람 칠 줄 모르는 것이 코피만 낸다더니 어쭙잖은 술에 주정 한번 하구서 아주 신용을 잃었거든. 끽해야 대포 석 잔이면 그만야. 옥주 씨, 키스값 내 시오.
 
107
옥주 -   뵈기 싫어! (눈을 흘기면서도 애정이 넘친다. 안방으로 돌아가서 오백 환한 장 갖다 주며) 내 용돈은 모두 박 선생님 설렁탕값하구 대포값으루 나가는 거.
 
108
박호 -   영광으로 알아요. 인제 내 전기에 다 나올 테니. 일 소녀 시성 (詩聖) 박호의 설렁탕값을 대다… 일 소녀라고만 하면 모를까! 옥주 소저 ─ 중국식으로 이렇게 써야겠군. 돼지란 놈이 기름은 많은 놈이거든. 속이 느끼해서.
 
109
옥주 -   뵈기 싫여요! 어서 가 잡숫고 오세요.
 
110
박호 -   그래두 마음으루 보기 싫은 건 아닌 것 같지? (현수보고) 또 오랄젠? 요새 여성들은 모두 말을 뒤집어 하니까. 청개구리처럼.
 
111
옥주 -   어서 가세요.
 
112
박호 -   그렇지. 그게 갔다 오란 뜻이지. (나간다.)
 
113
현수 -   에라, 나두 가서 한잔한다. (나가는데 영란 매달린다.)
 
114
영란 -   선생님, 급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115
현수 -   내게?
 
116
영란 -   네.
 
117
현수 -   긴가요?
 
118
영란 -   간단해요.
 
119
현수 -   그럼 지금 들읍시다. (의자에 앉는다. 영란도 의자에 다가앉으며)
 
120
현수 -   무슨 얘기지요?
 
121
영란 -   저 임신했어요!
 
122
현수 -   네?
 
123
영란 -   노하지 말아주세요.
 
124
현수 -   노하긴 내가 뭣하러.
 
125
영란 -   넉 달이나 됐답니다.
 
126
현수 -   좋겠군.
 
127
영란 -   좋긴 뭐가 좋아요.
 
128
현수 -   그럼? 난 좋아서 자랑하러 왔다구?
 
129
영란 -   그래, 온거 아니예요. 맡아줍시사구 왔에요!
 
130
현수 -   맡는다구? 나 산파 그만둔 지 오랜 줄 모르오?
 
131
영란 -   아이 아버지가 돼달란 말씀예요. 원래 현수 씨 아길 갖구 싶었어요. 그랬지만.
 
132
현수 -   그럼 그애 내 아이 아닙니까?
 
133
영란 -   어떻게 선생님 아이가 되겠습니까?
 
134
현수 -   내 아이 아닌 걸 내가 어떻게 맡는다지요? 대부가 되란 말씀 같은데 어디 내가 가톨릭 신자라야 말이지. 내 친구 하나 소개해 주리다.
 
135
영란 -   그런 게 아니어요. 아버지가 아셨어요! 방법을 차리느라고 병원엘 갔었어요. 그랬더니 약을 한주일 계속해서 먹으라고 그래요. 그러구 다시 오라구요. 그랬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절 불러가지구 누구 자식이냐구 대라구 그러세요. 주소두 이름두 막 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버지한테 귀띔을 해드렸나 봐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선생님이라구 그랬죠.
 
136
현수 -   뭐?
 
137
영란 -   의사 자식 유산시키는 약을 준 게 아니구 보하는 약이었다나 봐요.
 
138
현수 -   그 자식 미쳤군. 시바나 여남은 개 주어둘 게지.
 
139
영란 -   시바라뇨? 그 약은 네댓 개만 먹어두 직사라는데요?
 
140
현수 -   그러니까 두 사람이니까 열 개랬잖았소.
 
141
영란 -   아마! 날 죽으란 말씀이군요.
 
142
현수 -   글쎄, 그게 그 말이던가?
 
143
영란 -   (빌붙는다.)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 진정입니다. 아이 아버지가 돼주세요! 아버진 펄펄 뛰시면서 죽으라고 그러시더니만 선생님 아이랬더니 그 자리에서 푹 수그러지셨어요. 저런 고연 사람! 그러시더니만 할 수 없지 ─ 이러세요! 이따구 낼이구 부르실지 몰라요. 부르시거나 오시거나 하시건 선생님 아이라구 말씀해 주세요. 네, 선생님!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예, 선생님!
 
144
현수 -   아니, 영란 씨가 난 그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이 갖구 낳구 하는 것쯤에? 참 이상한데?
 
145
영란 -   잘못 생각했었어요! 그게 뭐 죄냐 싶게 대범하게 생각했었는데.
 
146
현수 -   자랑으로 알았었지.
 
147
영란 -   그랬더니 아니예요. 딱 당해 노니까 안 그래요! 다 헛소리예요! 암만 큰소리 해 봤자 도리가 없는걸요! 말루는들 "어떠나, 뭐 생리를 무시한 인간이 어디 있니?" 어쩌구저쩌구 젠체하던 애들두 다 손들었어요! 누가 하나 처녀가 아이 난 것을 이해해 주어야죠.
 
148
현수 -   그거 왜 모를까?
 
149
영란 -   선생님, 애원입니다. 네, (매달린다) 네, 선생님. 선생님이 한 번만 절 살려주세요.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잊지 않겠어요.
 
150
현수 -   또 낳아다 줄라구?
 
151
영란 -   천만에요. 다신 안 나오겠어요.
 
152
현수 -   이가놈 아인가?
 
153
영란 -   네.
 
154
현수 -   (에익! 벌컥 떠밀고 일어난다.) 바보 같은 것! 다른 놈이라면 또 모르겠다. 그만큼 귀띔을 해주지 않았나! 그랬는데두! 가거라. 더러운 것! 썩 못 나가!
 
155
영란 -   (울며 다리에 매달린다.) 선생님! 한 번만 살려 주세요. 속았에요. 그 놈한테 술을 먹여가지고 그랬어요! 술 속에 약을 탔던가봐요.
 
156
현수 -   춤추구 술 먹고 하는 여자 대학생이 뭐 아이 못 날까, 나서 키워.
 
157
영란 -   키우긴 제가 키울 테니까. 아버지한테만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예, 아버지한테 만요. 애원입니다. 선생님, 한 번만 들어주세요. (운다.)
 
158
현수 -   몰라! (하고 발을 차니까 나동그라져서 운다.) 너희들 같은 건 죽어도 싸! (휙 나가다가 다시 서서 오래 생각에 잠긴다. 천천히 접근해서 안아 일으키며) 영란이, 안심해. 내 맡아줄 테니 몸이나 조심하라구, 알겠나!
 
159
영란 -   (울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160
현수 -   아예 딴생각 말구서 몸 조심해. 전후파 여성이란 이런 때 굳센 데 장점이 있는 거야, 알겠지?
 
161
영란 -   네.
 
162
현수 -   있으라구. 내 잠깐 다녀올게.
 
163
영란 -   아니예요. 저두 가보겠어요. (둘 다 나간다. 잠시 무대 빈다.)
 
164
옥주 -   (행주치마를 둘렀다. 손을 씼으며) 아니, 여태들 안 왔나. 영란아! 얘두 갔나 봐? 그런데 어머님 어째 여태 안 오실까? 아버지가 어떻다구 어머닌 그 성화시어? 아이 참, 요새처럼 집안이 송구스러워선. (들어가려는데 이승 달 들어온다.)
 
165
승달 -   아, 마침 계시군요?
 
166
옥주 -   영란인 다녀갔는데요?
 
167
승달 -   네? 영란이두 왔었던가요? 난 오늘은 옥주 씨한테 상의가 있어 왔습니다.
 
168
옥주 -   내게요?
 
169
승달 -   네. 마침 아무도 없어 좋군요. (가까이 온다.)
 
170
옥주 -   (물러서며) 무슨 말씀이신지 하시지요. 삼촌 금방 들어오실 테니까요.
 
171
승달 -   그런가요? 글쎄, 찬찬히 해야만 할 얘기긴 하지만 뭐 서로 모르는 터도 아니구, 저리 좀 가 앉으십시다.
 
172
옥주 -   말씀하시지요.
 
173
승달 -   옥주 씨. (하고 손을 잡으려 든다. 옥주, 물러선다.)
 
174
옥주 -   손은 가만 두고 말씀하시죠.
 
175
승달 -   뭐 길게 말씀할 것 없습니다. 지난번 편지 받으셨지요?
 
176
옥주 -   예, 받았어요.
 
177
승달 -   거기 대한 회답을 들으러 온 겝니다.
 
178
옥주 -   글쎄요. 무슨 내용이든지 편질 받긴 받았지만 뜯지두 않구 아궁이에 넣어 버려 내용을 모르겠는데요?
 
179
승달 -   그건 너무 심하신데. 결국 거절이시군요?
 
180
옥주 -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두 그렇게 생각하셔서 좋을 겝니다. 전 선생님 같은 분이 우리집 문턱에 들어오시는 것까지도 거부해 왔으니까요.
 
181
승달 -   너무 가혹합니다.
 
182
옥주 -   그 이상을 몰라서 그랬어요.
 
183
승달 -   그러면 좋습니다! 후회 않으시지요. (분연히) 내 말 한마디로써 옥주 씨 댁은 그대로 파멸입니다. 아시겠어요? 아버님 되시는 국보적 존재이신 안현식 씨는 사회적으로는 물론 학계, 아니 시민권까지도 박탈당하고 불우의 생활을 하셔야 할걸요.
 
184
옥주 -   매우 좋습니다.
 
185
승달 -   잘 생각해 하시지요. 난 불은 꺼야 할걸요.
 
186
옥주 -   기왕 붙었으면 꺼질 때까지 타야지요.
 
187
승달 -   좋습니다! 옥주 씨는 아직 몰라 그렇지만 아버지 뵙구서 남한산성에 언제 뭣 하러 누구하고 가셨던가 한번 여쭈어만 보십시오. 그러구 나중에 회답 해주시지요.
 
188
옥주 -   친절하셔서 감사합니다만, 말씀 다 듣고 있습니다.
 
189
승달 -   그렇게 엇나갈 일이 아닐걸요. 자, 옥주 씨. (다시 손을 잡으려 할 때 옥주 침을 탁 뱉는다.)
 
190
옥주 -   아니, 썩 못 나가요! (마침 박호 들어오면서)
 
191
박호 -   (이를 보고서) 아니, 이 청년이 어떻게 또?
 
192
승달 -   이거 이 댁은 풍속이 그런가?
 
193
현수 -   (들어오면서) 야, 옥주야. 너 때문에 손해… (하다가 이를 보고) 아아니. 넌또 웬일이냐?
 
194
승달 -   이 사람아.너가 뭔가?
 
195
옥주 -   삼촌! 삼촌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서요. 저분께서 오늘 정중하게 저한테 구혼을 오셨는데 그런 손님께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됩니까?
 
196
현수 -   구혼? (갑자기 아랫배를 끌어안고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더니) 아, 그런 일로 온 줄이야 누가 알았나. 이리 오시게. 그런 정중한 이야길 서서 하는 데가 있나. 이리 오시게.
 
197
승달 -   그렇지. 역시 남자끼리라야 이야기가 통해. (가까이 와서) 아무리 해도.
 
198
현수 -   그렇구말구. 여자야 아무러면 맘먹은 대루 할 수가 있는가.
 
199
승달 -   뭐 다 아는 얘기 되풀이할 것두 없을 것 같네만 옥주 씨와 결혼하고 싶어. 자넨 날 상당히 불량하게 보지만 실은 그렇지만도 않으이. 이 점은 옥주 씨도 매우 오해를 하고 있지만.
 
200
옥주 -   삼촌, 전 여성이기 때문에 제 손을 잡으러 오는 손바닥에 침밖에 못 뱉어 주었어요.
 
201
현수 -   그냥 침이었냐, 가래침이었냐?
 
202
옥주 -   그냥 맨침이었어요.
 
203
현수 -   거 섭섭했겠는데? 그래서 남자인 나하구 얘기하자는 게로군 그래? 그런가?
 
204
박호 -   잘못 왔어. KNA 탄 셈 됐군.
 
205
현수 -   그래서 옥주와 결혼을 하겠단 말씀이신가? (이, 말을 못한다.) 왜 말이 있으 신가? (역시 말을 못한다.) 해야지.
 
206
승달 -   (머뭇거리다가) 자네, 날 조롱할 셈인가? 그렇다면 가겠네, 나.
 
207
현수 -   아니야. 이야길 좀 하잔 말일세. 얘길 해야 알잖는가.
 
208
박호 -   이 사람, 이야기가 뭔가? '담화’라구 그러는가 보데나.
 
209
승달 -   아니, 박 형까지도 날 조롱할 셈이오.
 
210
박호 -   아니. 그럼 손을 잡으러 오지도 않는데 쫓아가서 침을 뱉어 달란 말요? 그럴 성의는 난 없어. 그런 정열이 있으면 벌써 자살을 해치웠네. 난 도시 꿈적 하기가 싫은 사람이 돼서 약방에 가구 약을 사서 안 넘어가는 것을 삼키구 도시 그런 수속이 귀치않아서 이날 이때껏 살아 있는 위인거든.
 
211
승달 -   (불끈하며) 이 자식이! 돼먹지 못한 자식. (썩 저고리를 벗고서) 맛 좀 보련? 계집애 용돈 알겨다 사먹는 설렁탕 맛보다야 낫지 않으리.
 
212
박호 -   (현수보고서) 어떻게 되나? 내 차례가 되나?
 
213
승달 -   에이끼, 얼치기 시인녀석! (하고 몸을 솟구는데 현수의 주먹이 가슴에 펑 튀며 나동그라진다.)
 
214
현수 -   (달려가서 발로 두어 번 족이고) 할말 있건 해봐! 이눔아! 영란이한테 너 이눔. 어떻게 했지? 그러구서 어째서 책임은 안 져, 이눔아!
 
215
박호 -   시다! 시여, 그대로 산 시야!
 
216
현수 -   (딱 버티고 서서) 일어나 나가! 이 자식! 냉큼 안 나가면 죽여버릴 테다!
 
217
송달 -   (슬그머니 일어서 나가며) 어디 보자! 네놈 집이 성할 줄 아느냐! 내 말 한마디면 완전 파괴다. 완전무결하게! (홱 나간다.)
 
218
박호 -   이건 죽은 시고.
 
219
현수 -   (멍청하니 섰다가) 벽이다. 어디를 보나 캄캄한 벽뿐이야! (갑자기 주먹 을불 끈 쥐고 고함) 캄캄한… 아! 나는 미칠 것 같다! 옥주야! 호야! 난 미칠것 같다!
 
220
박호 -   괜찮아 같을 정도는 미친 것 아니니까. (거닐면서) 괜찮아.
 
221
옥주 -   (울며) 삼촌! 진정해요! 삼촌이 그러니까 저까지 미치는 것 같아서!
 
222
박호 -   그럼 세상 바루 잡히지. (시적시적 거닌다.) 하지만 사람 미치기가 그렇게 쉽던가. 내가 여태두 멀쩡한 것 못 보나? 사람 미치기란 안 미치기 보다두 어려운 거니!
 
223
혜경 -   (그때 시름없이 들어와서 멍하니 무대 가운데 섰다가 퍽 주저앉으며 울어 버린다.) 그럴 줄 몰랐어. 정말 당신이 그럴 줄 몰랐어요! 이십 년 쌓은 탑을 이렇게 무너뜨릴 줄 몰랐어요. 으으흑. (통곡 소리. 일동 선 자리에서 부동. 울음소리 고조에 달할 때 막 ─)
【원문】제 2 막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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