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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협의 채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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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
이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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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의 채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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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평야 거의 한가운데에 C 조그마한 산이 솟아 있고, 그 산 남쪽 산줄기에는 백여 호 되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그 산의 서쪽 모퉁이를 차지한 사오 채나 되는 일본 가옥이 있으니, 이것은 일인이 경영하는 K농장이다. 이 농장은 게딱지처럼 땅에 달라붙은 조선 가옥에 비하면 그 마을에서는 보기좋은 왕궁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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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K농장의 소작료 받는 마지막 날이 왔다. 일반 농민에서 정해준 기한 날을 어기는 일은 비교적 적었었다. 대개는 그 기한 전에 받았고, 늦어도 그 기한한 그날에는 반드시 받았다. 그리고 기한을 넘기는 자가 있으면 소작권을 빼앗아버리고 왔다. 이 소작권을 빼앗는 것이 소작인들에게 제일 큰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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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소작권을 이어 오랫동안 가지려는 노예 계약을 스스로 유지하려는 소작인 기십 명이 그 넓은 농장 마당에 들끓었다. 혹은 지게에 한 섬도 채 못 되는 벼를 짊어지고 온 이도 있다. 어떠한 사람은 소에게 여러 섬을 실리기도 하였고, 또 어떠한 사람은 구루마에 싣고 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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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인들은 그들의 집 앞에 우두커니 서서 창고 문 열기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창고 문은 열리지 않고 농장 사무실에서 머리에 지름칠을 반지런하게 한 ⎯이러한 시골에서는 하이칼라라 할 만한 청년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여러 소작인들에게 사투리 섞인 어조로 오늘 도조 내고 갈 사람들은 농장 일을 좀 하기 위하여…… 어디로 가서든지 돌을 한 짐씩 지고 오라 명령한다. 그리고 “돌을 가져오지 않는 사람은 도조를 받지 않겠다.” 하며 돌 놓을 장소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크고 적은 돌이 산과 같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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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말을 듣고도 소작인 가운데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감히 이유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만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농장 하이칼라 사무원은 어서 가서 돌을 주워 오라 재촉한다. 얼핏 가고 싶은 사람은 얼핏 주워 오라 한다. “어서 그러고만 있으면 밤이 새게 될는지도 알 수 없으니…….” 거듭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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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은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농장 사무원이 사무실로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제기 붙을 것!”이라 중얼대며 지게를 어깨에 메고 농장문 밖으로 나간다. K농장 앞뜰에는 부려놓은 볏짐이 늘어놓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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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삼(金成三)도 소작료 납입 기한이 꽉 찬 오늘에 도조를 내러 온 무리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만일 오늘의 기한이 아니었으면 차마 집 안을 떠나지 못할 형편이었다 . 농장과 그가 사는 동리와는 상거(相距)가 십여 리나 되는 까닭에, 농장에 두어 섬 되는 도조를 내러 온다면 아침 일찍이 집을 떠나 두어 차례 왕래하면서 하루 품은 꼬박 버리게 된다. 이러한 터에 그 집에는 목숨이 한 시간 뒤에 끊어질는지 두 시간 뒤에 끊어질는지 알 수없는 병자가 있다. 그 병인은 성삼의 늦게야 얻은 여섯 살 된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십여 일 전에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중대하게 보지 않았다. 전에는 병을 앓은 일이 있었으나, 대개는 며칠만 뜨거운 방에서 조리하면 쾌복(快服)되었었다. 그러하던 것이 금번에는 열흘이 지나도 병세가 덜리지 않고 도리어 삼 일 전부터는 위중하여졌다. 그는 병이 위경(危境)에 이르도록 의원에게 진맥 한 번 똑똑히 시켜보지 못하고, 약 한 첩을 변변히 써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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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어제서야 비로소 이웃 동리 의원을 청하다가 진맥하여본 결과, 병인은 그날을 무사히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삼은 크게 놀랐으나, 벌써 때는 늦었다. 할 수 없이 명이 끊어지거나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고 단념하기는 하였으나, 가끔가끔 평일의 모든 재롱 부리던 일이 생각나고, 따라서 자기의 과실로 진즉 서둘러보지 못한 일이 뉘우쳐질 때마다, 그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이 아팠다. 머리를 어느 바윗덩이에나 부딪쳐 깨어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고통하는 가운데도 오늘 이 소작료 납입 기한이란 생각은 결단코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을 할 때마다 논 이정표가 눈에 어른 나부끼었다. 그리고 한 해 동안의 주림으로 남은 가족이 사방에 흩어지게 되리라는 예감이 자주 아픈 가슴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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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성삼은 할 수 없이 병든 자식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그날 아침 일찍이 벼 한 짐을 단단히 지고 동리를 떠났다. 그리하여 벼 두어 섬을 두 번에 운전하는 데에 세 시간 이상이 걸리었다. 그 아들의 병세는 첫 번째 집을 떠날 때보다 두 번째가 더욱 위중하였다. 그리하여 두 번째에는 차마 집을 떠날 수 없었으나, 먼저 한 섬 갖다 둔 벼도 있으므로 할 수 없이 숨이 어느 때 끊어질지 알 수 없는 병인을 두고 그대로 나왔다. 그러나 발이 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뒤만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생활의 위협은 기어코 그를 K농장으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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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는 도조 되는 것을 보고 아무쪼록 일찍이 집으로 돌아올까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도조 받아주기를 기다렸으나, 도조를 일찍 받기는커녕 도리어 돌을 주워 오는 일을 시킨다. 처음에는 하도 어이없어서 가만히 서있다가, 나중에는 생각을 돌이키어 그 사무원에게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성삼은 유리창 밖에서 사무실 안을 기웃 엿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방 안에는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여 밖에서 싸늘하여진 뺨을 호듯하였다. 그리고 곱게 머리는 가른 조선 양반과 일본 양반들이 어른어른 얼굴이 비치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한편 구석에서 소리를 높여 주판을 놓고 있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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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보시오. 제 건 좀 일찍 받아주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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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은 용기를 내어 힘껏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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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안의 모든 눈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성삼이가 만일 눈이나 얼음으로 된 사람이었으면, 그 모든 시선이 넉넉히 그를 녹여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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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어서 가서 돌을 한 짐 져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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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의 하이칼라 사무원이 눈을 아니꼽게 뜨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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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찍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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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은 다시 애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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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란 날카로운 소리가 또 거듭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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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은 다시 두말 못하고 그는 벼 지고 온 지게를 지고 여러 사람을 따라 돌을 주우러 나갔다.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병든 아들의 파리한 얼굴이었다. 살 한 점 없이 바싹 말라붙은 뺨 위에 우뚝 나온 광대뼈, 움푹 들어간 눈자위, 멀건 눈동자, 새카맣게 탄 입술, 모든 것이 하나도 성삼의 가슴을 아니 아프게 하는 것이 없다. 그는 도조니 무엇이니 다 돌아볼 것 없이 그대로 뛰어가서 숨넘어가는 가엾은 아들의 입술에 물 한모금이라도 넣어주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할수록 마음이 미칠 듯하였다. 이러한 한편에는 그렇게 애처로운 광경을 차라리 아니 보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이러한 비참한 최후를 다만 아내 한 사람이 당할 때에 오죽이나 갑갑할까 그것을 생각하매, 더욱 초조한 생각이 났다. 그러나 생활의 위협은 그로 하여금 돌을 주워 담게 되었다. 그는 돌을 힘껏 내붙이었다. 마치 돌이 자기의 자식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처럼……. 또는 생활을 위협하는 것인 것처럼……. 그러나 C평원은 돌이 극히 적은 들이었다. 그만큼 비옥한 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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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은 길가와 다른 사람 집 담 밑과 산 위, 눈두렁으로 돌아다니며 겨우 한 짐 되는 돌을 줍기까지는 거의 두 시간이 걸리었다. 주운 돌을 이리로 저리로 운전하여 다니는 동안에 몸은 대단히 피곤하였다. 그러나 한 짐 될때에는 그는 겨우 숨을 한번 크게 내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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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허둥지둥 바쁜 걸음으로 자기 동리에 들어섰다. 가면서도 그의 귀에는 어린 시체를 안고 느끼어 우는 자기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또 한편에는 아들의 . 병이 보지 못한 다만 몇 시간 동안에 병줄이 놓이어 쾌복의 길로 들어오지나 아니하였는가 하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더욱 힘 있게 그의 머리에 울리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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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기 집 사리문 안에 들어설 때에 가슴에서 무엇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벌써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아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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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는 홑이불로 덮어놓은 어린 시체가 고요히 누워 있었다. 성삼의 아내는 이불을 벗기며 울면서 “이것 좀 봐…….” 한다 백랍(白蠟)으로 지어 만든 듯한 얼굴에 인형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눈을 반쯤 뜬 채 드러누워 있는 시체를 그 아내는 바싹 껴안고 뺨으로 뺨을 문지르다가 한 손으로 뜬 눈을 어루만지면서 “아빠 왔다! 어서 눈을 감고 돌아가거라!” 하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성삼도 눈에서 눈물이 쭉 빠지며 목이 꽉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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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이나 애써 주웠던 돌을 그대로 그놈들에게 주어버리고 온 것이 후회가 나는 듯해 보였다. 지금 성삼의 마음 같으면 그 주운 돌로 농장 사무실 안에 거만히 앉아 있던 자들을 모조리 때려 죽여도 분이 오히려 아니 풀릴 듯하였다. 그는 다시 이를 한번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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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에 홑이불로 둘둘 싼 어린 시체가 성삼의 품에 안기어 앞 동리 공동묘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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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운동》, 1926년 1월
【원문】위협의 채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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