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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수집(屑穗集) ◈
◇ 소설 못 쓰는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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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2. ~7.
계용묵
1
설수집(屑穗集)
 
2
소설 못 쓰는 소설가
 
 
3
내일 모레가 정말 최종 마감이라고, 그날까지는 꼭 써 주어야겠다는 A지의 간곡한 부탁도 부탁이려니와, 너무도 여러 차례나 기일을 어긴 것이 내자신 미안도 해서, 오늘은 무어든 한 삼십 장 끼적여서 색책을 하리라. 아침부터 책상을 대하고 마주 앉았으나, 언제나 마찬가지로 붓끝에는 흥이 실리지 않는다. 그야 목을 내대고 칼과 대결을 하자면 쓰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다. 세상 되어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가슴속에서 피가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 그러나 기껏 그 주변이나 어이돌면서 눈치붓이나 들어야 하는 이 붓이니, 이 붓 끝에 무슨 흥이 실릴 것인가. 일본의 식민지 백성 노릇을 할 때는 말하지 마자, 이정권 시대는 어떠했으며, 이정권이 무너진 오늘은 어떤가, 내 복부에 이상이 있어 어떤 한의에게 진찰을 받아 보았더니, 울화를 참으면 피가 복부로 모여서 그런 증상을 나타낸다는 진단이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겠다고 버둥대다가는 차마 쓰지를 못하고 쓸 수도 없는 이야기를 가슴속에다 간직만 하게 되는 그 울화가 병의 원인이라면, 그리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금시라도 쓰게 된다면 복부에 서렸던 이 피가 온통 펜 끝으로 풀려 나오면서 복약도 아무것도 필요 없이 병은 거뜬하게 나을 것만 같기도 하건만-.
 
4
답답하다 창변으로 다가앉아 미닫이를 밀어 본다.
 
5
오월의 한낮 볕이 유난히 장그럽다.
 
6
‘아니! 이런!’
 
7
내 눈이 뜨락 주위로 돌아가던 순간, 나는 내 눈이 놀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이 엄숙해지는 것 같음을 느꼈다. 거기 버려져 있는 풍경은 내가 아침 한나절 붓방아를 찧으며 생각하고 앉았던 내 머리속 풍경과는 너무나도 대차적인 세상이었던 것이다.
 
8
-고양이는 블록담 위에 모로 근더져서 꼭대기를 지치며 뒷다리를 들어 새끼들에게 젖을 내맡기고 졸고, 건넌방 마루 위에서는 주인집 할머니가 흐트러진 하얀 머리를 식모처녀의 무릎 위에다 되는대로 내어 맡기고 이를 잡히며 존다. 그리고 마당에 널어 놓은 메주 멍석 귀에서는 쥐 한 마리가 뒷다리에 힘을 주고 제지바듬이 서서 주위를 도록도록 살피다가는 고개를 까닥거린다.
 
9
나는 얼빠진 사람같이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10
바람이 울타리를 넘어 나비와 같이 넘어오며 장독대 곁에 핀 샛노란 개나리꽃 가지를 흔든다. 고양이도 할머니도 쥐도 슬며시 눈을 뜬다. 봄의 향훈이 대기 속에 흩어져 그들의 코로 흘러드는 모양이다. 고양이는 피부가 늘어나는 데까지 마음껏 입을 벌려 하품을 한 번 하고 수염 끝에 스치는 향훈마저 핥아 드리는 것처럼 혀를 내밀어 휘이 좌우 수염을 핥아 드리고, 할머니는 사지가 늘어나는 듯하게 기지개를 켜며 네 활개를 주욱 펴고 벗듯이 나가 근더지고, 쥐는 뒷다리마저 꿇고 멍석 위에 코를 박는다.
 
11
고양이를 지척에 두고 조는 쥐, 쥐를 지척에 두고 조는 고양이 - 잡념이라고는 깡그리 잊은 평화의 경지다.
 
12
이러한 경지도 있기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뜰 안 한복판에 몸을 내던지고 저 분위기 속에 휩쓸려 모든 것을 깡그리 잊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진다. 그리고 차라리 이 경지를 그대로 떠다가 A지에 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쓰지도 못할 이야기를 쓰겠다고 버둥버둥 애를 써 보느니보다는.
 
13
참으로 쓸 수 없는 이야기를 써 보겠다고 버둥대며 애를 쓰다가는 속 깊이 간직만 하여 두고 붓대를 놓게 되는 그 울화의 집적이 병의 원인일까 합승을 잡아 타고 또 거리로 나온다. 원고지와 마주 앉았다가는 항상 뛰쳐나오는 버릇 그대로다.
 
14
속이 클클할 때 뜨거운 커피 한잔은 참 좋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문다. 옆 의자에 누가 와 앉는다. A지의 편집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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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도 선생님이 나오셨나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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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이야기는 아니나, 이 말이 원고 독촉임은 말할 것도 없다.
 
17
“글쎄 지금도 원고를 써 볼까 하다가 답답해서 또 나왔지요.”
 
18
“내일 모레까지가 정말 최종 마감입니다. 선생님 아직 점심 전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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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나도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20
“오늘은 날이 제법 덥습니다. 냉면 생각이 나는데요.”
 
21
밤 아홉시부터 복통이 일어난다. 이윽고 구토와 설사. 새로 두 시가 넘기까지 십여 차나 변소를 드나들었더니 통 맥이 뽑히고 속이 부영거려서 그 이튿날까지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음날도 오정이 가깝도록 누웠다가 겨우 미음 한술을 마시고 머리를 들고 앉았노라니 A지의 편집인이 또 찾아온다. ‘내일 모레’ 라던 원고 최종 마감일이 바로 오늘이라, 원고 때문일 것은 물을 것도 없다.
 
22
그러나 나는 여느 때에 원고를 못 썼다고 대답하던 때와는 달리 마음이 괴롭지 않게 대답할 수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원고를 못 썼을 것은 뻔한 일이었을는지 모르나 복통 때문에 못 썼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3
“그놈 그날 냉면이 탈인가 봐, 그만 제육을 빼랄걸 또 잊어버리고.”
【원문】소설 못 쓰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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