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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黃眞伊)라 하면 송도삼절(松都三絶 〓 徐花潭[서화담]의 擧行[거행]과 박연폭포(朴淵瀑布)의 勝景[승경]과 黃眞伊[황진이]의 美色[미색])의 하나로서 조선왕조 五[오]백년 간의 대표적 명기(名妓) 임은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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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려서부터 인물이 천하절색일 뿐 아니라 문필이 또한 절등하였었다. 나이 二八[이팔]방년에 이르매 그의 아리따운 소문이 국내에 자자하니 누구나 그를 한번 보기를 원치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도 그 이웃에 사는 한 청년이 누구 보다도 더욱 그를 연모하여 주야로 그를 한번 만나보려고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내외법이 극히 엄격한 중 황진사 집은 개성에서 원래 문벌이 당당한 명문가이기 때문에 비록 사생녀인 황진이라도 외간남자로서는 도저히 그 문호도 엿볼 기회를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그 청년은 다만 혼자 심화만 태우다가 결국 그 빌미로 병이 들어 가련한 청춘에 천고유한을 품고 영원한 나라로 드디어 가고 말었다. 그의 집에서는 울며 애통을 하고 초종 범백을 치른 다음에 북망산으로 매장을 하러 가게되었다. 상엿군들은 그의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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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이렇게 슬픈 섬로가(薤露歌)를 부르며 그 청년의 집을 떠나 북망산으로 향하는데 그 상여가 마침 황진이의 집 문앞을 지나게 되니 이상하게도 그 상엿군의 발이 땅에 딱 붙고 다시 떨어지지 않아서 꼼짝 달싹을 못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여 이것이 대체 무슨 까닭이냐 하고 한참 소란하게 떠들며 어찌할 줄을 몰랐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어떤 사람이 황진이를 보고 그 청년의 죽은 사정과 또 상엿군의 발이 땅에 붙고 떨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황진이는 크게 감동하여 혼자 생각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남을 살리는 좋은 일은 못할지언정 나로 인하여 남의 집 아까운 청년이 죽기에까지 이르렀다면 그아니 가여운 일이며 난들 어찌 죄악을 면할 수 있으랴. 이와 같을 진대 이후에도 일개 나의 미색으로 하여 병들어 죽을 사람이 또 몇몇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그까짓 구구하게 정조니 문벌이니 볼것도 없이 차라리 아주 해방의 생활을 하여 여러 사람을 위안도 시키고 나도 이 세상에서 마음껏 놀다가 죽는 것이 좋겠다하고 대담스럽게 자기 부모에게 그 사정을 자세히 말하고 소복담장으로 뛰어나아가서 그청년의 시체를 끌어안고 어루만지니 그제야 그 상엿군의 발이 땅에서 떨어져서 무사히 장례를 지내게 되고, 황진이는 그날로 바로 그 부모에게 죽기로 맹서하고 기생이 되었다. 그는 원래 천재가 비상한 까닭에 기생이 된지 불과 며칠에 노래와 춤이며 그외 모든 음악을 다 능통하게 되니 그의 방명이 일시에 천하를 풍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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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유수 송모(留守宋某)는 또한 풍류 남자로 화류장의 백전 노장이었다. 진랑(眞娘)을 한번 보고 칭찬하여 과연 명불허전이라 하고 극히 사랑하고 관대하니 그의 첩은 또한 평안도의 명기라 문틈으로 진랑을 엿보고 놀라 생각하되 이세상에 어찌 저러한 미인이 있으리요, 유수(留守)가 만일 저러한 여자를 사랑하면 내 일은 다 낭패가 되리라 하고 머리를 풀고 맨발로 뛰어 나아가서 야료를 치니 유수가 놀라 일어나고 다른 좌객들도 또한 피하여 달아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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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유수는 그의 대부인 한갑잔치를 하는데 경향의 명기명창이 한곳에다 모이고 인군의 수령방백(守令方伯)이 모두 참여하였었다. 다른 기생들은 모두 가진 호사와 화장을 할대로 다하고 저마다 자기가 제일 잘난 명기 노릇을 하려고 애들을 썼으나 유독 진랑은 단장도 호사도 아무것도 아니하고 수수하게 차린 의복에다 본 얼굴 그대로 참석을 하니 천연한 그 아리따운 태도가 만좌를 경동시켜 누구나 진랑만 바라보았었다. 더욱이 옥을 굴리는 듯한 그 청아한 목소리로 공중이 떠나가게 노래를 부를 때에는 그야말로 요지의 왕모(瑤地王母)가 백운요(白雲謠)를 부르는 듯, 계궁의 항아(桂宮姮娥)가 월광곡을 부르는듯, 신녀인지 선녀인지 자못 정신이 황홀하여 마취되지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그 회석에 참가하였던 악공의 엄수(樂工嚴守)라 하는 이는 七十[칠십]의 노령으로 가야금이 전국 중 명수요, 그외 일반 음률도 모두 능통하였는데 처음으로 진랑을 보고 탄복하여 왈 자기가 오십여년 간을 화류장에서 놀았으나 이러한 미인은 처음 보았다 하고 선녀(仙女)라고 부르더니 급기야 진랑의 노래를 듣고는 또 놀라일어나 말하되 이것은 분명히 선계의 여운(仙界餘韻)이요 인간의 속조는 아니라고 까지 하였었다. 이 몇가지의 일만 보아도 진랑의 인물이 어떠한 것과 노래가 어떠한 것을 저으기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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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랑은 이와같이 조선에서만 이름이 났을 뿐 아니라 중국에 까지도 소문이 높아서 당시 명나라 사신(明使)이 와서 조선의 사정을 물을 때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랑의 소식을 물었다. 한번은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는 길에 개성에 잠간 들리었었는데 구경하는 남녀가 길가에 잔뜩 모여서 인산인해를 이룬 중 진랑이 또한 그중에 섞이어 있었더니 명사(明使)가 멀리 바라보고 통역더러 말하되 천하절색은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보았다고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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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비록 기적(妓籍)에 이름을 두었으나 원래 천성이 고결한 까닭에 보통의 속류 기생들과 같이 사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관부 연회석같은 데를 가도 결코 새옷을 갈아입거나 특별한 화장을 하지 않고 자기 평소에 입던 의복 그대로 가며, 시정의 무식천류배는 비록 천만금을 준다하여도 결코 같이 놀치를 않고 항상 명사문객과 서로 상종하기를 좋아하며 글읽기를 좋아하되 특히 당시(唐詩)를 애독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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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禪僧)이 있었으니, 학자는 곧 화담 서경덕(花潭徐敬德) 선생이요, 선승은 지족암(知足庵)에서 三十[삼십]년동안을 면벽참선(面壁參禪)한 만석선사(晩釋禪師 或[혹] 云妄釋[운만석])이었는데 만석은 자칭 도학이 회담선생 이상이라고 하는 터이었다. 황진이는 평소에 두 사람을 다 흠모하던 중 한번은 그 인물의 어떠한 것을 시험하여 보려고 먼저 화담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조금도 난색이 없이 과연 승락하였다. 황진이는 얼마 동안 선생에게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밤에도 집으로 돌아가지않고 선생의 침실에서 같이 자며 공부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또한 허락하였었다. 그렇게 수년 동안을 한방에서 동거하는 중에 황진이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선생을 유혹시키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목불(木佛)과 같이 조금도 동심을 하지 않고 담연자약하니 황진이는 크게 경복하여 다시 절하며 말하되 선생은 참으로 천하 대성인(大聖人)이라 하고 그 뒤에는 다시 다른 뜻을 두지 않고 더욱 선생을 경모하여 항상 말하되 개성에는 박연폭포(朴淵瀑布)와 서선생(徐先生)과 자기등 삼절이 있다고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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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이와 같이 서화담을 한번 시험하여 본 뒤에 다시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시험하여 보려고 지족암을 찾아가서 자기가 제자가 되어 수도하기를 청하니 지족선사는 여자는 원래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처음부터 절대 거절을 하였었다. 황진이는 그 선사의 태도가 너무도 냉정하여 말도 부치기가 어려움을 보고 혼자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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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어디 보자 진소위 새침더기 골로빠진다고, 네가 아무리 도도한 척을 하여도 나의 묘계에 한번 빠져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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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돌아와서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 단장으로 청춘 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가서 그 선사가 있는 바로 옆방에다 침소를 정하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간 불공을 한다고 가칭하고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하는데 자기의 손으로 축원문(祝願文)을 지어서 청아한 그좋은 목청으로 처량하게 읽으니 그야말로 천사의 노래도 같고 선녀의 음률도 같어서 아무 감각이 없는 석불금불이라도 놀랄만 하거던 하물며 감각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감히 귀를 기우리고 듣지 않을가 보냐. 이와같이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축원을 하니 노선사가 처음에는 무심하게 들었으나 하루 이틀 들을수록 자연히 마음에 감동이 생겨서 그 三十[삼십]년동안이나 잔뜩 감고 옆에 사람도 잘 보지않던 눈을 번쩍 떠서 황진이의 태도를 한번 보고 두번 보니 보면 볼수록 선계의 정념(禪計淨念[선계정념])은 점점 없어지고 사바의 욕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불과 며칠에 황진이와 서로 말을 부치게 되니 진이는 예의 그 능란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완으로 그 선사를 마음대로 놀리어서 최후에는 그만 파계(破戒)를 하게까지 되니 지금까지 세상에서 쓰는 「망석중 놀리듯 한다」는 말이라든지 「십년공부 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 사실을 일러서 하는 말이요, 속간에서 흥행하는 망석중노름이라 하는 것도 또한 그 사실을 실연(實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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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그와같이 인물이 비범하니만치 다른 여자로서는 염두에도 먹지못하는 일을 많이 하였으니 그 중에도 큰 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유람을 특히 많이 한 것이다. 그는 강원도 금강산(江原道金剛山)이 천하의 제일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유람할 생각을 두었으나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여의하게 못가더니, 때에 마침 서울서 이씨(李氏)란 청년(靑年)이 개성으로 놀러왔는데, 그는 어떤 재상의 아들로 위인이 청수호탕하고 또한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진랑은 그 사람을 보고 조용히 말하되 내가 듣건대 중국사람들도 원생고려국하여 일견금강산(願生高麗國[원생고려국] 一見金剛山[일견금강산])이라 하고 누구나 금강산 구경하기를 원한다하니 더구나 우리 조선 사람으로 자기 나라에 있는 금강산을 못본다면 그것이 어찌 수치가 아니요, 내가 우연히 당신을 만나뵈니 가히 동무하여 유람을 갈만하다 하고 두 사람이 서로 악수한 뒤에 하인이나 일반행구는 다 제폐하고 황진이는 죽장망혜에 굵은 삼베치마와 저고리를 걸쳐입고 이씨도 또한 표의초립으로 양식을 친히 짊어지고 산정수로(山程水路) 몇백리를 도보 하여 내외금강의 만이천봉과 장안(長安) 유점(楡站) 신게(神溪)등 고사명찰을 모조리 찾아 구경하니 그 운치야 물론 범용한 사람으로 감히 맛볼 수 없는 것이지만 고생인들 여간 하였으랴. 노자가 떨어져서 기갈이 심한 중에 노독까지 나고보니 초라한 형용은 가위 무부구시용(無復舊時容)이라 할만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호사다마로 중도에서 두 사람이 서로 종적을 잃게 되니 황진이는 천신만고를 다 하여 이씨를 찾었으나 역시 종적이 묘연하므로 할 수 없이 걸식을 하여가며 내친 걸음에 경상도 태백산(慶尙道太白山)과 전라도 지리산(全羅道智異山)까지 두루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주(羅州)에 이르니 때는 마침 나주 목사(牧使)가 무슨 연회를 하는데 인향각군의 명기 명창이 한 곳에 모여 질탕하게 놀고 있는 중이었다. 진랑은 그 소식을 듣고 폐의파상(弊衣破常)의 초라한 행색으로 회석에 돌입하니 만좌가 모두 그를 광인이나 걸인으로 알고 대경대괴 하였다. 그러나 보옥은 아무리 진흙 속에 묻혀있어도 광채가 있는 격으로 진랑은 비록 그렇게 걸인의 행색을 하고 갔을지라고 원래에 골상이 비범한 까닭에 목사도 한번 보고 또한 범인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좌석을 허락하였다. 진랑은 한손으로 헌옷에 있는 이(虱[슬])를 잡으며 목청을 한껏 놓으니 그노래 소리가 멀리 공중을 통하고 고저 장단이 모두 절조에 부합하여 그 좌석에 있는 소위 명기명창이라도 감히 따르지를 못할만하게 하니 만좌도 모두 괄목경탄하고 특히 우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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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선전관 이사종(宣傳官李士宗)은 풍류 호객으로 노래가 천하 절창이었다. 평소에 황진이의 염명을 익히 듣고 한번 같이 놀아보려고 일부러 개성까지 갔었는데 황진이의 집에는 직접 가지 않고 그의 집 근처 천수원(天壽院) 천변 가에 말을 매고 백사장에 드러누어 두어곡조의 노래를 부르니 진랑이 풍편에 잠간 듣고 놀라며 말하되 이노래의 곡조는 심상한 시골 촌부의 능히 할바가 아니요, 필경 어떤 명창의 노래인데, 내가 듣건대 서울의 풍류남자 이사종이 당대절창이라 하더니 아마 그사람이 이곳에 놀러 온가부다 하고 사람을 보내 탐문하니 그는 과연 이사종이었다. 황진이는 즉시 이 씨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수일을 같이 노는데 자연 자기가 서로 합하니 피차에 육년간을 같이 살기로 약속하되, 먼저 삼년간은 자기가 일체 생활비를 담당하여 살고 뒤의 삼년간은 이씨가 일체 생활비를 담당하여 살기로 하고 황진이가 먼저 자기의 가장집물을 전부 팔아가지고 이씨 집에 가서 삼년간에 이씨 돈은 한푼도 쓰지 않고 자력으로 이씨까지 살리다가, 삼년 후에는 이씨가 또한 살림을 하게되어 먼젓 날에 황진이가 자기에게 하던 것과 똑같이 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재미스러운 행복한 생활을 부러워 하였다. 그와같이 삼년을 또 살다가 약속한 육년의 만기가 되니 황진이는 그 약속대로 이씨를 작별하고 표연히 고향으로 나려가니 이씨가 비록 섭섭하기 짝이 없으나 또한 어찌 하지 못하고 그냥 헤어졌다. 이런 사실은 황진이와 같은 여류 기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못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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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벽계수 (靑山裏碧溪水)야 쉬이 감을 너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明月滿空山[명월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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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조는 황진이의 지은 시조로서 몇백년이 된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흔히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지은 출처에 있어서는 또한 자미스러운 이야기가 숨어있으니 그때에 왕족(王族)중에는 벽계수 이모(碧溪守李某)가 있었다. 그는 원래 조행이 방정한 사람으로 평생에 기생외입이라고는 한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평소에 항상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황진이를 한번만 보면 모두 침혹한다고 하지마는 그것은 다 그들의 의지가 박약한 까닭이다. 만일에 내가 그 계집을 본다면 침혹은커녕 천하 요망스러운 년이라고 당장에 호령을 하여 축출하겠다고 장담을 하였었다. 황진이는 그 소문을 듣고 혼자 웃으며 어디 그가 얼마나 고정한가 한번 시험하여 보리라 하고 중간에 사람을 놓아 벽계수를 유인하여 만월대(滿月臺)구경을 오게 하였는데 때는 마침 모추시절이라 중천에 월색이 교교하고 만산에 낙엽은 소소하여 누구나 감개한 회포가 일어날 즘이었다. 황진이는 단장소복으로 숲속에 숨어 있다가 연연히 나와서 이씨의 말고삐를 휘여잡고 위에 적은 노래를 한곡조 부르니 이씨가 월하에서 그 어여쁜 자태를 보고 또 청아한 노래를 들으매 스스로 심신이 황홀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부지중에 말에서 떨어지니 황진이가 웃으며 말하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축출을 못하고 도리어 낙마를 하느냐고 조롱하니 이씨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아무 말도 못하였다. 원래 이 노래 속에 벽계수(碧溪水)란 말은 곧 벽계수(壁溪守)를 대용함이요 명월은 황진이의 자(字)인 까닭에 진이는 그때 즉경을 취하여 그노래를 지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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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비록 화류장에 몸을 던졌으나 항상 척당불긔(倜黨不羈)한 지개와 비분강개의 뜻이 있어서 달밝고 고요한 밤이면 선죽교(善竹橋)나 만월대(滿月臺)에 가서 통곡도 하고 노래도 하여 고려의 옛일을 조상하였다. 한번은 몽중에 어떤 백마(白馬)를 탄 장수가 예전 고려 때의 활쏘던 사장(射場)에 와서 말을 멈추고 연연하여 차마 가지못하는 것을 보고 깨어서 생각하되 그 장수는 필경 옛날 고려시대의 어느 장수로 죽은 고혼이라도 차마 고국을 잊지못하여 그리하는 것이라 하고 추연히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한편 지었으니 이것도 세상에 많이 유전하는 소위 송도 회고지가(松都懷古之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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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년도읍지(五百年都邑地)에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커늘 인걸(人傑)은 어디간고 두어라 고국흥망을 물어무삼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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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이와같이 일생을 지나다가 사십내외에 불행히 병에 걸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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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을 때에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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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 하였은즉 고적한 산중에다 묻어 주지 말고 내인 거객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다 묻어주며,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하였은즉 장사 지낼 때에도 곡을 하지말고 풍악을 잡혀서 장례를 지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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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더니 집안 사람들이 그의 유언대로 풍악을 잡혀서 큰길가에다 장례를 지냈었다. 그의 무덤은 몇백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변에 있어서 천하호협 시인(豪俠詩人) 임백호(林白湖 ─ 名[명]은悌[제])같은 이는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부임하던 길에 일부러 제문(祭文)을 지어가지고 그의 무덤에까지 가서 제를 지내 주었다가 그것이 언관(言官)에게 말썽거리가 되어 그 일로 좌천까지 된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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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떨어지고 물이 흘러 삼백여년을 지난 오늘에는 절대명기인 그의 무덤조차 찾아 볼 길이 없고, 다만 그의 시 몇편과 노래 몇종이 남아있어서 시인 가객들의 입에서 향그럽게 회자(膾炙)될뿐이다. 끝으로 그의 시조와 시 몇편을 소개하고 붓을 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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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靑山)은 내뜻이요 녹수(綠水)는 임의 정이라,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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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옛날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같으어 가고 아니 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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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그린 님 오신날 밤이어든 굽이굽이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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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蕭然傍御構[고사소연방어구], 夕陽喬木使人愁[석양교목사인수], 烟霞冷落殘僧夢[연하냉낙잔승몽], 歲月崢嶸破塔頭[세월쟁영파탑두], 黃鳳羽歸飛鳥雀[황봉우귀비조작], 杜鵑花發牧羊牛[두견화발목양우], 神嵩憶得繁華事[신숭억득번화사], 豈意如今春似秋[기의여금춘사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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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구 옆에 있는 옛절 쓸쓸하기 짝없으니, 석양에 남은 고목 근심만 자아낸다. 불기가 싸늘하니 중들이 잠못자고, 세월이 오래지니 탑머리도 깨어졌다. 황붕은 간곳 없고 산새만 날으며, 들두견화 만발한데 염소들이 놀고 있다. 번화하던 그옛날일을 다시금 생각하니, 봄도 가을철 다름없이 이러할줄 어찌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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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下庭梧盡[월하정오진],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樓高天一尺[루고천일척],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流水和琴冷[유수화금냉],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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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아래 오동잎 지고, 서리 속에 국화폈다. 다락이 높고보니 하늘이 단 한자요, 사람이 취했으니 술이 천잔이로구나. 물소리는 거문고를 화답하고, 매화는 저소리에 향내난다. 내일아침 이별한 뒤 그정을 비한다면 물결보다 더 길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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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脈長川噴壑朧[일맥장천분학롱], 龍湫百仭水潨潨[용추백인수총총]. 飛泉倒瀉疑銀漢[비천도사의은한], 怒瀑橫垂完白虹[노폭횡수완백홍],雹亂霆馳彌洞府[박난정치미동부], 珠春石碎徹晴空[주춘석쇄철청공]. 遊人莫道廬山勝[유인막도여산승], 須識天磨見海東[수식천마견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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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기 세찬 물결 구렁으로 쏟아지니, 충충하게 괴는 용늪 백길물을 이루었다. 나는 샘 쏟아질때 은하수인가 의심되고, 성낸 폭포빗겼으니 흰무지개 다름없다. 우박과천동소리 동중에 잔뜩 차고, 구슬쪼각 돌부스러기 공중으로 날아간다. 여산승경 그렇다고 세상사람 말말고서 조선에 제일 가는 이 천마를 알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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