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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인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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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6.25~
백신애
1
광인수기
 
 
2
아이고 ─.
 
3
비도 비도 경치게 청승맞다. 이렇게 오면 별것 없이 흉년이지 뭐야.
 
4
아 ― 이 무서워라. 또 큰물이 나가면 어떡해요. 그 싯누런 큰물 아이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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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하느님! 제발 덕분에 비를 좀 거두시소……. 그래도 안 거두시네!
 
6
허허 참 사람 죽이는구나. 글쎄 이 양통머리 까지고 소견머리가 훌렁 벗겨진 하늘님아. 내 말 좀 들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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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꾸 쓸데없는 물을 내려 쏟으면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 큰물이 나가면 다리가 떠나가고 사람이 빠져 죽고 별일이 다 ― 생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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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흉년이 지면 두말없이 백성이 굶어 죽지요 ─. 하나도 이익될 게 없는데 왜 그렇게 물을 내려 쏟는가 말이오!
 
9
아이 아이고 무서워라! 하느님이 제 욕한다고 벼락을 내리칠라. 히히히 벼락이라니, 나는 암만 해도 마음속으로는 당신을 그리 밉게 여기지는 않는다오. 용서하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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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네 이 놈 하느님아. 에이 빌어먹을 개새끼 같은 하느님아! 네 가분명 하느님이라면 왜 그 악하고 악한 도둑놈의 연놈을 그대로 둔단 말 인고. 당장에 벼락 천둥을 내려 연놈을 한꺼번에 박살내어 버릴 일이지 ─. 아니올시다. 아이 무서워, 거짓말이올시다. 그 연놈에게 죄가 있을리 있나요. 다 내 팔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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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웃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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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워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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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빌어먹다 낮잠이나 잘 하느님은, 저를 위해 주고 두려워하면 할수록 점점 더 건방이 늘고 심술이 늘어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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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를 점점 사람으로 여기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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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두를 팔자에 돌리고 조용히 굴며 좋다고만 하니까는 아주 나를 바보로 아는 모양이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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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아이고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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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을 욕하면 무엇하는기요. 당신도 이미 빤히 내려다봤으니 알 일이 지 마는 내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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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할 내가 아니지……. 아이고 추워라. 오뉴월 무덕더위라고 한창 더울 이때에 빌어먹을 비 까닭에 이렇게 추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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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참, 그 놈의 다리는 경치게도 높다. 조금만 더 낮았다면 비가 덜 들 이칠 텐데, 아이 이것도 내 팔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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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놈은 팔자 좋아 시원한 집에서 더우면 전기 부채 틀어 좋고, 비가 와서 이렇게 추워지면 따뜨무리하게 불을 때서 번 듯이 드러누워, 남편 놈과 우스개 놀이나 주고 받고 하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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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겠나. 무어 또 맛있는 것 사다 놓고, 먹기 싫도록 처먹어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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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참 그 빛깔 좋은 과실 한 개 먹어봤으면……. 아이고 생각하면 무엇 하나. 왜 이렇게 추운가. 옳지 비를 이렇게 많이 맞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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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이것이, 말이 저고리지 걸레나 다름없지 뭐……. 아이고 아이고 흑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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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뉴월 궂은 비는 처정처정 청승맞게 오는데 이 떨어진 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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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옷인가? 걸레지. 벌벌 떨며 이 다리 밑에 혼자 쭈굴치고 앉았으니 거지나 다름없지……. 벌써 해가 졌는가…… 왜 이리 어두침침하노. 대체 구름이 끼었으니 해가 졌는지 있는지 알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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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새끼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27
비는 몹시도 들이친다.
 
28
하느님아, 할 수 없구나,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서 이야기합시다.
 
29
그때 말인가요?
 
30
내 나이는 열일곱 살, 그이 나이는 열여덟이었지요. 그이가 나에게로 장가들게 되는 것을 아주 기뻐한다고 중매하던 경순이네 할머니가 나에게 말 해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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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도 속으로는 은근히 좋아서 어서어서 혼인날이 왔으면 싶어서 몹시도 기다렸지요. 그럭저럭 혼인식도 끝내고 첫날밤이 됐지요.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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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히히히 무척도 부끄럽더라. 문밖에서는 모두들 들여다보느라고 킥킥 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그이는 부끄럽지도 않던지 온갖 재롱을 다 부리겠지요.
 
33
참 술잔을 따라 나에게 자꾸만 받으라고 졸라대겠지요.
 
34
"색시요! 이 술잔 받으시오. 어서어서." 하며……. 그렇지만 얼마나 얌전한 색시였다고, 덥석 손을 냈을 리가 있는가요. 어림도 없지요.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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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쭉 빼물고 흔들림없이 앉아서 곁눈 한번 떠 본 일이 없었지요.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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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신랑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야 말할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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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이는 권하다 못하여 나의 손목을 슬쩍 잡아당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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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술잔 받으시오." 하며, 그때 나는 손을 움츠리며 얼른 한번 흘겨보니 머리를 빡빡 깎았지마는 우뚝한 코, 얌전스런 입, 눈도 그리 밉잖게 생겼고, 눈썹이 새까만 것 이아주 맘에 쑥 들어 가슴이 찌릿해지고 어떻게 새삼스럽게 부끄러운지 눈물이 핑 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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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참, 지금 생각해도 땀이 난답니다. 그이는 그 날 밤에 왜 그리도 술잔을 받으라고 조르는지요. 중매한 늙은이가 아마도 신부는 술 깨나 마신다고나 했는지. 기어이 술잔을 받으라고만 성화였어요.
 
40
"이 술잔은 우리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맹세한다는 뜻인데, 당신이 받아주지 않으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지요. 아마도 당신이 술잔을 받지 않는 것을 보니 나를 싫어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당신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은가 합니다." 하며 아주 성을 내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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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하도 딱하고 기가 막혀 말은 할 수 없고 그만 참다 못하여 울어 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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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갑자기 바싹 다가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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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시오. 그래도 내 술 한 잔 안 받을 터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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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당기겠지요. 나는 흑흑 흐느끼며 못 이긴 체하고 그 술잔을 쥐어주는 대로 받아 들기는 했지마는 어디 마실 수야 있어야지요. 그래서 방바닥에 살며시 놓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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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그머니 그랬더니 창 밖에서는 아주 킥킥 하며 웃어 재끼는데 그 부끄러움이야 어디다 비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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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그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병풍으로 창을 가려서 뺑 둘러 쳐 버리고내 곁에 와 앉더니 내 머리도 쓰다듬어 보고, 내 허리도 쓰다듬어 보고, 머리를 굽혀 내 얼굴도 들여다 보고, 온갖 아양을 다 부린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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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요! 대답 좀 해보시오." 하겠지요, 이때는 그에게 잡힌 내 손을 그대로 맡겨두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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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하고 묻겠지요.
 
49
허이 참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무어라고 대답하는가요. 바로 말하면 아직 그 의 얼굴도 자세히 쳐다보지 못했으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그때는 그 이 가왜 그런 말을 물을까, 그런 말을 물어서 무엇하려는가, 결혼한 이제는 할수 없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서 되는 일인가.
 
50
나는 가슴이 찌릿찌릿하고 이만치 부끄러운데 ─ 하는 생각만 가득하여 고개를 푹 숙였더니, 그는
 
51
"아, 감사합니다. 이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하였지요. 아마도 그는 내가 고개를 숙이니까 머리를 끄덕이는 줄 알았던 모양이지 요. 하하하!
 
52
그래 참 하하하 참 우습다.
 
53
그이가 먼저 옷을 벗고 내 왼편 버선을 한 짝 벗기고 나더니 내 치마 끈을 잡아당기겠지 ─. 나를 홀랑 벗길 작정인 것쯤이야 내가 누구라고 모르겠소.
 
54
아 나야 학교 공부는 못했지마는 그래도 귀한 집 딸이라고, 한문 글도 배웠고, 꽤 똑똑한 색시였으니깐 알았지요. 아이고 참, 내 말이 거짓말인 줄아나 봐……. 내가 왜 한문을 몰라! 소학도 다 배웠는데 ─ 할부 정( 割不正) 이어든 불식(不食)하며 석부정(席不正) 이어든 불좌(不坐)하며 ─. 이 것이다 소학에 있는 글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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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참 내가 정신이 없구나.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야지.
 
56
하느님! 당신 뜻인가요? 참 재미있지요. 그래 그래 ─ 그래서 말이야…….그이가 아주 눈이 발칵 뒤집혀가지고…… 히히 아주 숨쉬는 소리가 황소 같더군요. 제까짓 신랑놈이 아무리 지랄을 한들 내가 가슴을 꼭 껴안고 있으니 어디 내 옷을 벗길 수 있어야지……. 그렇지만 너무 뺑소니를 치면 또성을 낼까봐 겁도 나고 그뿐 아니라 옛날 어떤 신랑놈처럼 첫날밤에 신랑은 색시를 벗겨야 한다니까, 아주 색시의 껍질을 벗겨 놓더라는 말도 생각 이나고 해서 살그머니 못 이긴 체 했더니 아 그놈의 신랑놈이 그만…… 히히히 참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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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 줄만 알지 마소, 하하하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간지럽다.
 
58
"여보 색시! 당신 허리는 어쩌면 이다지 알맞게 생겼소. 아이고 이뻐라 우리 색시. 오늘부터 우리들이 백 년이나 천 년이나 변함없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살자구……. 아이고 이쁜 우리 색시!"
 
59
아이 참 그이는 어쩌면 그렇게도 내 간장을 녹이려고 드는지, 아주 나는아 그 놈의 신랑에게 그만 녹초가 됐지요. 하하하, 하하하.
 
60
참 그때는 무척도 좋더니…… 그이가 대체 무엇이라고 그이만 보면 그렇게 기쁘고 좋은지……. 참 알 수 없지, 알 수 없어……. 왜 또 부끄럽기는 그 리도 부끄럽던지…….
 
61
그때 생각에는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은 천 년 만 년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고 묵사발이 되도록 변함없이 살 줄만 알았지요.
 
62
그러기에 그이에게는 내 살을 베어 먹여도 아깝지가 않을 것 같았어요.
 
63
에이 빌어먹을 년, 이 년이 암만해도 멍텅구리 같은 미친 년이야…….
 
64
그렇게 좋고 좋던 우리 사이도 시집을 가고 보니 그 여우 같은 시누이 년 까닭에 싸움할 때가 있게 되었지요.
 
65
그러다가 그이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공부하러 갈 때만 해도 나는 안타까와서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우면서 그이를 떠나서 그 무서운 시집에서 나 혼자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며 자꾸 울었답니다.
 
66
아이고 배고파라. 벌써 저녁때가 넘었나 보다. 아이 추워라. 비는 경치게 도 온다. 옷이 함빡 젖었네.
 
67
아이고 빌어먹다 자빠져 죽을 년, 시어미, 시누이 그 두 년과 무슨 원수가 맺었던가…….
 
68
내가 밤마다 우는 것은 그이 생각에 가슴이 녹는 듯해서 운 것인데
 
69
"아이 재수없이 요망스럽게 젊은 계집 년이 밤낮 울기는 왜 울어, 글쎄 서방을 잡아먹었나. 무엇이 한에 차지 않아서 저 지랄인고." 하고 시어머니는 깡깡거리지요.
 
70
"아이고 오빠도! 오늘도 언니께 편지 부쳤네, 내게는 한 번도 보내지 않으면서." 하고 그이에게서 온 편지는 모조리 중간 차압을 해서 나에겐 보이지도 않고 저희 끼리 맘대로 다 뜯어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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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오빠가 저의 마누라 보고 싶어서 울었단다……. 내 읽을 께 들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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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 동안 얼마나 어른들 모시고 고생 하시는가…….’고 씌었구료. 글쎄 누가 오빠 사랑하는 사람을 못 살게 굴었다고 이래……. 아마도 언니가 오빠에게 온갖 거짓말을 다 꾸며서 편지질을 한 거지 뭐 ─."
 
73
아이구 참 기가 막히지요. 내가 벼락을 맞으려고 남편에게 시어미, 시누이 험 구를 했겠는가요. 이런 말이 어디 있어요?
 
74
아이 참, 지금 생각해도 기절을 할 일이지……. 그 편지 온 후부터는 나날이 태도가 달라지더니, 하루는 점심상을 받고 앉았던 시누이가 갑자기 밥을 한 술 푹 떠들고 벌떡 일어서더니 내게로 달려들며
 
75
"이것 봐. 이것, 나를 죽이려는 거지. 밤낮 제 서방 생각하느라고, 밥에다 파리를 막 집어 넣고 삶았구나. 이러고도 시어른 모시느라구 고생하는 건가?" 하고 나를 떠밀고, 내 밥 그릇을 동댕이치고 야단을 하는구료.
 
76
정말 밥에 파리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지마는 너무나 안타까와 나는 자꾸 빌기만 했지요.
 
77
아이구 하느님요, 내가 무슨 심사로 시누이 먹고 죽으라고 일부러 파리를 밥에다 넣었겠소.
 
78
그뿐입니까. 시누이는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앙앙 울면서
 
79
"나는 밥 안 먹을 테야. 더럽게 파리 넣어 삶은 밥을 누가 먹어! 가거라, 가! 너의 집에 가려무나. 이러고도 시집살이 무섭다고 오빠에게 고자질만 하니 바보 같은 오빠는 그만 넘어가서 우리 모녀를 흉칙하게만 여기고 제 여편네만 옳다고 하니 저 년을 두었다가는 아마도 나중에 우리 모녀는 길 바닥에 나 앉겠구나. 남의 집에 윤기를 끊는 년……. 가거라 가거라!" 하며 방에 가서 발딱 드러눕는구료. 글쎄 나는 도무지 모를 소리지요. 죽으라면 죽고, 때리면 맞고, 인형같이 있는 나를 이리 몰아세우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있는가요.
 
80
그래서 시누이에게 손이야 발이야 빌고 빌었으나, 앙앙 울며 나를 보기도 싫다고만 하는구료. 그래도 자꾸 빌었더니, 그만 했으면 풀릴 일이나 굳이 듣지 않고 옷을 와르르 끄집어내어 보에다 하나 가득 싸더니,
 
81
"나를 업수이 여겨도 분수가 있지, 내 팔자가 기박해서 신행 전에 서방을 잡아먹고 열일곱에 과부가 되었지마는 이런 데가 어디 있단 말인고……."
 
82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옷 보퉁이를 마루로 끌어냅디다.
 
83
어디 고 년이 그렇게 악독하니까 제 신세가 그 모양이지요. 신행 전에 서방을 잡아먹었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84
열일곱 되는 봄에 결혼을 했는데 아주 부자집 맏아들이요 좋은 자리라고 알았더니, 웬걸 초례청에 들어선 신랑이 사십에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85
전처에게 아들이 없어 첩장가를 든 것이었지요. 그래서 우리 시누이는 첫날 밤부터 신랑을 소박하고 아주 신랑과 인연을 끊었어요. 말하자면 머리는 올렸어도 실상은 숫처녀입니다. 남에게 첩으로 시집갔단 말은 하기 창피하고 분해서 제 입으로 서방 잡아먹은 과부라고 하는 거지요.
 
86
그러기에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동정하고 위로해 주는데, 저는 나를 이렇게 몰아세우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87
"가거라, 네가 안 가면 내가 갈란다." 하고 옷 보퉁이를 이고 뜰로 내려갑니다. 이것을 보는 시어머니는 방바닥을 두들 기며 대성통곡을 내놓는구료. 아이 참 할 수 있나요.
 
88
내가 우루루 내려가서 옷 보퉁이를 빼앗아 방에 갖다 놓고
 
89
"어디로 가십니까? 못 가요. 내가 가지요. 내가 가겠습니다." 하고 빌며 내 방에 들어와서 치마를 갈아입고 얼른 뜰로 내려섰지요.
 
90
물론 내가 그렇게 하면 시누이의 성이 풀릴 줄 알고 어쩔 수 없이 그런 것 이지요.
 
91
아 그랬더니, 후유 ─ 시어니가 와락 마루로 뛰어나오더니
 
92
"어허! 동리 사람들아. 이 일이 무슨 일이요. 철없고 속 시끄러운 시누이가 설령 성을 냈더라도 그걸 갉을 게 무엇이냐. 친정 간다고 나선다. 동리 사람들아. 이 구경 좀 하소! 네 ─ 이 년 바삐 가거라. 바삐 가!" 하면서 막 내어 쫓는구료. 어느 영이라고 반항하나요.
 
93
할 수 없이 쫓겨났지요. 그래도 대문에 붙어 서서 성 풀리기를 기다렸으나 대문을 열어줘야지요. 그 날 밤이 되면 담이라도 넘어 갈까 했더니 해가 지니까 시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쑥 나서더니 조그마한 옷 보퉁이 하나를 내 앞에 내동댕이치며 이것 가지고 썩 돌아서 가라고 하고는 다시 대문을 꽉 잠그고 맙니다.
 
94
그래도 울면서 자꾸 빌었지요. 빌고 또 빌어도 어디 들어주어야지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향했지요.
 
95
친정까지 이십 리를 그 밤중에 혼자 걸어갔지요.
 
96
집에 가니 아버지가 또 영문도 모르시고 야단이지요.
 
97
"나는 옷 보퉁이 싸가지고 밤길 다니는 딸을 낳은 기억이 없다. 아마도 너는 여우로구나. 우리 딸은 한번 시집가면 그 집에서 죽어서나 나오는 법이지, 살아서 시집을 못 살고 쫓겨 오지는 않는다." 라고 당장에 쫓아냅니다.
 
98
그 놈의 옷 보퉁이가 또 대문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99
어이, 참 그 놈의 옷 보퉁이가 무엇이 그리 중한 것이라고 늙은이들은 그 놈을 내 앞에 기어이 갖다 던지는지.
 
100
예전 사람들은 시집 못 살고 갈 때는 꼭 옷 보퉁이를 가지고 간다더니, 과연 옷 보퉁이는 중한 것인가 봐요.
 
101
아이구 참 우습다 히히히. 그래서 할 수 있나요. 할 수 없이 그 걸로 친 삼촌댁으로 갔지요. 이 집에서야 설마 또 쫓을라구요. 그래서 숙모님이 아주 분기 충천하여 나를 위로해 주더군요. 그래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숙모님같이 좋은 사람이 없는 줄 알았이요. 그랬더니 뒤미처 어머니가 달려와서 또나 의 편이 되어 주는 구료.
 
102
그러니까 세상에 무서운 사람은 우리 시어머니, 시누이, 우리 아버지 세 사람 이지요.
 
103
시아버지도 살아 있었더라면 이 세상 어느 사람보다 더 무서웠을지 모르지 ─. 그리고 얼마 동안 숙모님 댁에 있다가 친정으로 불려가서 있었지요.
 
104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했던지 그 후 아버지도 말은 없어도 나를 꾸중 하시지는 않더군요.
 
105
좌우간 내가 퍽 얌전한 색시였기도 했으니까 ―. 아버지도 내가 쫓겨온 것이 내 죄가 아님을 아신 게지 ─.
 
106
그러던 어느 날 내 이름으로 편지 한 장이 왔겠지요. 하도 반가워 받아 보니 바로 그이에게서 온 것이었어요.
 
107
그만 두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가슴이 쿵덕거리더군요.
 
108
시누이년이 무어라 고자질을 했는가. 그이도 나를 꾸지람하면 어떻게 할까……. 그러나 편지를 뜯고 보니 웬일일까요. 참 놀랬지요. 그이는 도리어 나를 위로하고 자기 어머니와 누이를 용서하라고 했어요.
 
109
그래서 나는 하도 기쁘고 감사하여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이의 은혜는 죽어도 못 갚게 될 것 같더군요.
 
110
실상은 아무 은혜랄 것도 없는 일이지마는 그래도 나를 알아주는 것이 하도 고마워서 하는 말입니다.
 
111
그러는 중에 그이는 대학교도 그만두고 돌아오게 되어 그이의 주선으로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이가 있으니 또 별일 없이 살았지요.
 
112
그러는 중에 맏딸년 정옥이를 낳았고, 맏아들 석주를 낳았고, 둘째 딸 정희를 낳은 것입니다.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더군요.
 
113
그이와 내가 서로 만나 온갖 산고를 다 겪고 살아오는 중에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갔구료. 그러니까 그이 나이가 서른여덟이지요. 우리 살림은 누가 보든지 자리가 잡히고, 아주 착실했지요.
 
114
아이구 하느님, 이렇게 말하니까 그이는 나의 애를 태우지 않은 것 같지 요만 알고 보면 그이도 상당했더랍니다.
 
115
그 놈의 무슨 주의자라나 그것 까닭에 몇 번이나 감옥에 드나들었지요. 그 뿐입니까. 몸이 약하여 밤낮 앓지요. 그래서 나는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 그래도 추운 줄을 모르고 밤마다 냉수에 멱을 감고 정성을 드렸지요.
 
116
"하느님, 부디부디 몸 성하게 해 주시고 주의자 하지 말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밤마다 빌었답니다. 어떤 때는 빌고 나면 온몸이 얼음덩어리가 되는것 같더군요. 그래도 추위를 느끼면 행여나 정신이 부실하다고 하느님 당신이 비는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봐 한번도 춥다고 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아이구 맙시사다. 아이구 빌어먹을 도둑놈.
 
117
네가 하느님이야? 도둑놈이지.
 
118
그치만 내가 정성을 드렸으면 조금이라도 효험을 보여주어야 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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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어머니나 시누이나 조금도 틀림없는 것이 하느님 당신이 아닌가?
 
120
그래 내 청을 하나인들 들었던가 말이다. 그이와 살림을 잡혔다고는 하지 마는 단 하루라도 내 마음을 놓게 한 적이 있었느냐 말이다.
 
121
후유 ─. 처음엔 친구 집에 간다고만 속였으니 내가 알 리가 있어야지.
 
122
아마도 눈치가 다르니 또 다시 주의자를 시작했는가…… 싶어서 간이 콩알만 했지요. 그래 ─ 아무리 보아도 눈치가 다르고 때로는 밤을 새우고 들어올 때도 있었어요. 혼자서 생각다 못하여 나도 단단히 결심을 했더랍니다.
 
123
어느 날입니다. 저녁을 먹고 그때 아들 놈이 중학교에 입학 시험 준비 한다고 아버지께 산수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그이는 급한 일이 있어 나가야겠으니, 누나 정옥이에게 배우라고 그만 핑 나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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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딸 정옥이는 고등여학교 2학년이었지마는 저도 학기말 시험공부 하느라고 석주의 산수를 가르쳐 줄 여가가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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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와락 성이 났지마는 꾹 참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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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슨 볼일이 있어요. 주의자 할 때는 자식새끼가 어렸으니 당신 할 일이 없었지마는 이제는 아이가 시험을 치는 때이니 그만 나다니시고 아이도 좀 위해 주어야지요." 하고 혼잣말 비슷하게 했지요. 아참 기가 막혀. 그이는 휙 돌아서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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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어쩐다고? 무식한 계집이란 할 수 없다니까. 그래 네가 자식을 얼마나 훌륭하게 낳았기에 배운 것도 모르는 멍텅구리 같은 그런 자식 놈인가 말이다. 계집이 건방지게 사나이를 아이새끼들 앞에서 꾸짖고 야단이야…." 하며 아주 노발대발하여 방문이 부서지게 내리밀치고 나가 버리는구료.
 
128
대체 이 때려 죽일 놈의 하느님아. 내가 그 추운 겨울 얼음을 깨고 목욕 하며 빌고 빌고 하여 몸 건강하게, 주의자를 그만두게 해달라고 했더니 무슨 심정으로 글쎄 몸도 건강하고 주의자는 그만두었다 할지라도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해주었느냐 말이다. 주의자 할 때는 그래도 잡혀갈까봐 그것만 애를 태웠지. 지금 같은 이런 말머리쟁이는 듣지 않았지요.
 
129
그이같이 마음이 바르고 굳세고, 어디까지나 정의를 사랑하던 사람도 없었는데 주의자를 그만두자 이렇게 기막히는 말이나 하는 인간이 되고 마니 딱한 일이 아닙니까.
 
130
나는 그 자리에서 분함을 참지 못했지요. 이것도 나의 욕심인지 모르나 아이 놈이 시험에 미끄러지면, 첫째 아이가 낙방할 것과, 둘째 시어머니께 내 가 자식 잘못 낳았다는 꾸지람을 듣겠으니까 여러 가지로 여간 애가 타지 않았는데, 글쎄 그이는 저대로 쑥 빠져나가 버리며 남기고 간 말이 그게 무엇이란 말이오.
 
131
그래 나는 벌떡 일어나 빨리 집을 나섰습니다.
 
132
골목 끝에 나서 좌우를 바라보니 전등빛에 그이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이겠지요. 나는 두말없이 뒤를 따라 갔습니다.
 
133
골목 사이를 이리저리 굽어들더니 나중에 조그마한 대문을 밀고 쑥 들어가지 않습니까.
 
134
아이구머니 ─ 나는 가슴이 덜컹하였습니다. 그이가 주의자 할 때도 저렇게 남의 눈을 피해가며 다니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135
'아이구 주의자를 버린 줄 알았더니 아직 그대로 하는구나.’
 
136
나는 입속으로 부르짖고
 
137
"맙소 맙소 하느님 ─." 하고 한숨을 쉬었지요. 그래서 집으로 힘없이 돌아와서 아이들을 재우고, 나도 돌아누워 곰곰이 생각하며 그이가 돌아오기만 기다렸습니다. 밤이 새로 2시가 되니까 그제야 돌아오는구료. 내가 자는 척하고 눈을 감으니 그는 살그머니 옷을 벗고 자기 자리에 가서 소리없이 드러누워 그만 잠이 들어 버리더군요.
 
138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그이가 순사에게 또 잡혀갈까봐 정말 가슴이 졸여서 그 밤을 꼬박 세웠습니다.
 
139
그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서 아이들을 깨워 아침밥 때까지 공부하라고 한 후 나는 부엌으로 나갔다 들어오니 그이는 한잠이 들어 자는구료.
 
140
차마 일으키기가 안 됐어서 그대로 나가 아이들 밥을 거두어 먹인 후 모두 학교로 보내고 그이를 깨웠지요.
 
141
"아이 곤해, 귀찮게 왜 이 모양이야!" 하고 성을 벌컥 내는구료.
 
142
"밤 늦게 제발 좀 다니시지 마세요. 몸에 해롭지 않아요." 하며 그에게 주의를 버려 달라고 애걸하려고 시작했습니다.
 
143
"밤 늦게? 누가 말이야? 간밤에도 내가 일찍 돌아왔는데, 그래 날 보고 아이들 공부 가르치라고 하면서 저는 초저녁부터 잠이나 자는 거야? 무식한 계집이란 아무 소용없어. 자식 교육을 할 줄 아나……. 밥이나 처먹고 서방에만 밝아서……. 에이 야만이야, 천생 금수나 다름이 없지 뭔가."
 
144
아이구 하느님. 그이가 하는 말이 이러합니다.
 
145
그이가 새로 2시에 들어온 것을 뻔히 아는 내가 아닌가요.
 
146
또 그 날 밤이 되니까 그이는 어제 저녁과 똑같이 아이들이 아버지 아버지하고 배우려고 애쓰는데 다 뿌리치고 나가 버립니다.
 
147
나는 그이의 그러한 태도가 원망스러운 것은 둘째가 되고, 그이가 이러다가 잡혀갈까 봐 겁이 나서 그 날 밤도 또 따라나섰지요.
 
148
"내가 그 집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만일 순사가 번쩍거리면 얼른 그이에게 알려 주어야지." 하는 염려로 따라갔지요.
 
149
과연 이 날 밤도 어제의 그 집으로 쑥 들어갑니다. 나는 길게 한숨짓고 그 집 대문 앞에서 파수를 보고 섰지요.
 
150
그렇게 이윽히 섰다가 어둠 속에서라도 자세히 살펴보니까 대문이란 것은 겉 달린 것이고 담이 죄다 무너지고 말았으므로 그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겠지요.
 
151
그래서 나는 일변 기쁘고 일변 겁이 나면서도 나도 모르게 뜰로 살그머니 들어갔지요. 대체 그이의 동지가 몇 사람씩이나 모이는가 ― 하여서 툇마루 아래를 살펴보았더니, 하얀 여인네의 고무신 한 켤레와 그이의 구두가 가지런히 벗겨져 있지 않습니까. 나는 새삼스레 가슴이 덜컥하여 살살 집 모퉁이로 돌아갔더니 좁다란 뒤뜰이 있고 뒤창으로 불이 비치는데 아마도 창 안에는 그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므로 아주 쥐새끼처럼 기어가서 그 창 옆에 납작 붙어 섰습니다.
 
152
방안은 잠잠합니다.
 
153
그러나 내 가슴은 생철통을 두들기는 것 같이 요란합니다.
 
154
"여보 ─ 이번에 당신 아들이 중학교에 수험한다지요?" 하는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나는 그 요란하던 심장이 갑자기 깜박 까무러치는 것 같더군요. 하하하…… 하하하, 아이구 우습다 우스워…….
 
155
배가 고픈데 ─ 아이 추워, 비는 경치게 온다. 에에라 고기나 좀 잡아먹을까…….
 
156
어디 보자. 옳지 이렇게 옷을 동동 걷어 올리고 나서 고기나 잡아먹자…….
 
157
아이그 한 마리도 잡히지 않네. 아이쿠 요놈의 고기…… 안 잡히는구나. 네 이놈, 아이구구, 하하하…….
 
158
고기는 잡히지 않네! 에에라 이 놈의 냇물을 죄다 삼키지 그러면 고 기 도죄다 따라들어오겠지 ─ 꿀떡꿀떡……(냇물에 입을 대고 마십니다) 아이구 배불러라. 내 뱃속에도 냇물이 하나 흐르고 있을 게다. 고기도 많 이 놀고 있겠지……아아 배불러라.
 
159
이제는 그만 누워 잘까. 비는 들이치지마는 이 다리 아래서 자는 수밖에…….
 
160
아 참, 하느님 이야기하던 걸 잊어버렸군. 에이 귀찮아. 그만둘까? 그만두면 뭘 하나. 해버리지.
 
161
그래 ─. 그래서 말야. 그 놈의 계집년의 목소리 경치게 이쁘더군요. 나는 와락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꾹 참았지요. 그랬더니 이제는 바로 그 이의 음성이
 
162
"에 ─ 듣기 싫소. 그까짓 돼지 같은 여편네의 속에서 나온 자식새끼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사랑하는 당신과 나 사이에서 생겨난 자식이라야 참으로 내 사랑하는 자식이 되겠지. 여보 어서 아들 하나 낳아주어……. 우리의 사랑의 결정인 아주 영리한 아이를 낳아요." 합니다. 나는 눈이 확 뒤집혀지는 것 같더군요.
 
163
"하하 공연히 그러시지, 당신의 그 부인도 참 예쁘던데……."
 
164
"아니, 그 여편네 말은 내지도 말아요, 내가 열여덟 살 때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강제 결혼한 것이니까 그를 한 번도 아내로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165
"아이그 거짓말,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왜 자식을 그렇게 셋이나 낳았던가요?"
 
166
"허 ─ 그러기에 말이지, 아마도 내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직 까지내 자식이라고 해도 손 한번 쥐어 준 적이 없었어요."
 
167
"호호호 거짓말……."
 
168
"흥……. 거짓말이라고 여기거든 맘대로 하구료. 오늘까지 그 여편네와 말 한마디 해본 적이 없다오. 그런데도 자식이 셋이나 있다는 것은 정말 조물주의 장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어요."
 
169
하느님 ─ 그이가 이 따위 소리를 하고 있구료…… 우리 색시 이쁘다고 물고 빨고 하던 것은 다 어떡하고 저런 거짓말이 어디 있소.
 
170
"여보, 나는 정말로 불행합니다. 나는 노모를 위하여 참아 왔고 또 그 여편네가 가엾기도 하여 나 자신의 삶을 희생해온 거랍니다. 그렇지마는 나는 아직 젊습니다. 아무리 억제해도 억제하지 못할 때가 있었어요. 나는 가정적으로 너무나 불행한 까닭에 성자(聖者)가 아닌 이상 어찌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있나요. 너무나 모두들 무지하니까 나는 지적(知的)으로 너무나 목 말랐 더랍니다. 아내란 것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나에게 맛있는 음식이나 먹여 주고 옷이나 빨아 주고 밤이 되면 야수 같은 본능만 아는 그런 여편네와 이십 년이란 세월을 살아왔구료. 아무 감격도 신선함도 이해도 없는 그런 부부생활이었어요. 당신까지 나를 이해 못 하고 그러십니까? 그 여편네는 나에게 무지(無知)하기를 원하고 생활이 평안하도록, 일하는 남편이 되기 원하며 자식에게는 정신적으로 충실한 종이 되기 원할 따름이에요. 그러니 나라는 사람은 어느 결에 나를 위한 삶의 시간을 가지란 말인가요?"
 
171
흑흑흑…….
 
172
나는 울었습니다, 울었어요. 그이의 하는 말이 용하게 꾸며내는 혓바닥의 장난 일 줄은 알지마는 그 순간 나라는 존재는 그이에게 그만치 불행한 존재 임을 느낄 때 무척 슬펐습니다.
 
173
하느님, 당신 바로 판단하구료. 그이의 말이 옳습니까? 응? 대답해봐!
 
174
암! 암! 그렇지, 그 말이 죄다 틀린 말이지, 틀렸고 말고. 아예 당초에 인간이란 게 공부를 잘못하면 제 행동이 옳든 그르든 간에 아무리 틀린 말이라도 교묘하게 이론만 갖다 붙여서 그저 합리화하려고 하는 재주만 늘어 갈 뿐인 것이라오. 그이가 그처럼 나를 무지몰각한 돼지 같은 여편네라고 할 때는 아마도 그 여인은 상당히 많은 학교 공부를 한 여자인가봐요.
 
175
나는 단지 한문 글씨나 배웠을 뿐인 무식쟁이지만 그이의 하는 말에 반박 할 말이 수두룩한데 웬일인지 그 여인은 생긋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는 모양이구료.
 
176
아이고 아이고, 그 뻔뻔스런 년, 남의 남편을 빼앗아 앉아서…… 아이구 분해!
 
177
글쎄 하느님아! 들어봐요. 그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해 왔던가는 다 별문제로 재껴 놓더라도 사람이란 건 천하 없어도 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아무려면 깊은 산 속 멀리 인간사회를 떠난 곳에서 제 혼자 있는것보다는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178
우선 나 하나를 돌아 보더라도 세상에 제 하나만 위하고 제 마음의 자유와 기쁨을 위한다면 이렇게 미치광이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이렇게 세상을 다 떨치고 내 맘대로 살고 있는 나이지만 불만이 많기가 끝이 없어요.
 
179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이 인간 세상에서 미우나 고우나를 물론하고 한데 얽매이고 서로 엇갈려 있다는 뜻이 아닌가요.
 
180
그런데 그이는 제 혼자의 삶을 주장합니다. 아이고 아니꼬와…….
 
181
내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그이가 한 아름답게 보이는 여인에게 반했다는 그것뿐이에요. 이십여 년을 정답게 정답게 아들 낳고 딸 낳고 살아오다가고운 여인을 보고 욕심이 나니까 제 마음대로 떳떳하게 욕망을 채울 수가 없어 별 지랄 같은 소리를 다 하는 거지.
 
182
한 가정의 귀한 아들 딸과 어머니와 아내를 다 버리고 한 개의 욕망! 결국 은 계집에게 반한 그 마음 하나를 억제 못해서 사나이 자식이 온갖 거짓말과 괴로운 이론을 끌어다 붙이려고 애쓰는 그 꼴이 어디 되었나?
 
183
아이고 아이고 귀한 우리 자식들!
 
184
아무리 나에게야 악했지마는 그래도 이미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시어머니…….
 
185
다 불쌍해라. 너희들의 간장을 녹여주면서까지 너희 아비는 제 삶을 산다고 저러고 있단다. 히히히…….
 
186
귀하고 중한 내 자식들아, 너희를 누가 만들었노! 너희를 만들어 놓고 너희에게서 아비를 거두어 간 그 아비…….
 
187
하느님, 아비 없는 자식은 불량자가 되기 쉽다지요……. 아이구 이 일을 어찌 하노…….
 
188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자꾸 변한다고요? 참 잊어버렸군,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찰나가 연장 해가는 것이니까 이 순간 아무리 사랑하지마는 다음 순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지요.
 
189
그러니까 그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까.
 
190
보자 보자, 그러니까 또 그이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 여인과의 사랑이 변하여 나에게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191
아이구 다 그만두자. 그까짓 것…….
 
192
아이고 어두워졌구나…… 하하하.
 
193
나는 참았다. 참았다.
 
194
나는 하도 많이 참아 보아서 이제는 습관이 되었나 보다. 그래도 참고 집으로 돌아가자. 아이새끼들은 공부하느라고 어미를 돌아보지도 않았어요.
 
195
딸년은 학기말 시험공부 한다고, 아들놈은 중학교에 입학하려고……, 작은딸 년은 숙제한다고…….
 
196
나는 참았다. 눈물을 참고 밖으로 뛰어나가 과실과 과자를 사다가 나누어 먹였더니
 
197
"엄마 엄마, 어디 아파요? 엄마도 먹어요. 아버지는 왜 여태까지 안 오시나, 또 감기나 들지 않을까……."
 
198
아이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하여 서로 이야기하며 맛있게 먹습니다.
 
199
시어머니 방으로 가 보았어요. 노인은 누웠다 일어나 앉으며
 
200
"석주 애비는 어디 갔냐…… 바람이 찬데……." 하고 염려하였어요. 에이 도둑놈…….
 
201
아이들이 다 잠든 후, 그이는 돌아왔지요.
 
202
나는 참던 눈물이 흘러내려 돌아 앉았더니
 
203
"나 잘 테야. 요 깔아 줘……." 하겠죠. 그래서 나는 요를 깔아 주었더니,
 
204
"여보, 이리 오…… 왜 노했소. 그러지 말고 이리 와요."하며 자꾸 웃습니다.
 
205
아이고 맙소사…… 남자란 게 이런 건가? 나는 모르겠다 몰라…… 어찌 된 셈인가요 글쎄.
 
206
나는 참았지요. 입을 꽉 다물고 그이의 곁에 가 보았지요. 그이는 틀림없는 내 남편 이십 년간 살아오던 그이였어요. 조금도 다름이 없이 나를 안고
 
207
"아이들 이불 잘 덮어 주었나?" 하고 물으며…….
 
208
그리고 그이는 이십 년간 익어온 그 태도 그대로 잠이 들려는구료…….
 
209
나는 더 참고 보았지요.
 
210
이윽고 그는 잠이 들다 말고 소스라치듯 미소하며 다시 한 번 꼭 껴안겠지요.
 
211
"왜 새삼스레 이러는 거요? 이십 년이나 꼭 한 가지로 변함없이 이러는우리 사이건마는 그리 내가 사랑스러운가요?" 하고 한번 시치미를 떼 보았지요.
 
212
"암…… 내게 너만치 충실한 사람이 없고 미더운 사람이 없으니까." 라고 그가 대답합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지요. 하도 놀라와서요. 하하하…….
 
213
그래 그 이튿날이었지요. 바로 그 밤이 새고 난 날이었어요. 나는 그 밤을 또 꼬박 새우고 난 터이라 머리가 휭휭 내어 돌리기에 아이들이 학교에 간틈에 누워서 한숨 자보려고 했습니다마는 잠이 와야지요. 그래도 누웠으려니까 그이가 내 머리에 손을 얹어 보더니 깜짝 놀라며 병원에 가보라고 합니다.
 
214
아마 열이 높았던 게지요. 나는 별로 괴롭지 않아서 더 있어 보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이는
 
215
"그러면 있다 가 보오……." 하고는 휭 나가 버립니다.
 
216
나는 벌떡 일어나 따라갔지요. 그러나 그이는 그 집으로 가지 않고 어느 큰 상점으로 들어갔어요. 그래도 나는 그 상점 앞에 서서 지켰더니 그이는 전화를 빌어 어디다 전화를 걸고 나더니 쑥 나오는구료. 하는 수 있소? 딱 마주치고 말았지요.
 
217
"어디 가오?"
 
218
그이는 놀라며 물어요.
 
219
"병원에 ─."
 
220
나는 엉겹결에 대답했지요.
 
221
나는 공연히 부끄러워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더니 그 날은 토요일이라 아이들이 벌써 학교에서 돌아왔으므로 점심을 먹여 놓고 또 다시 방으로 가 누웠더니 웬 머리통이 그리도 쑤시는지 가슴이 쏵쏵 소리를 지르고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나는 어떻게 된 셈인지 벌떡 일어나서 그 집으로 달려갔어요.
 
222
막 달려갔지요.
 
223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틀림없이 그이의 신이 덩그렇게 댓돌 위에 벗겨져있겠지요.
 
224
나는 와락 달려가서 그이의 구두를 집어 들고 힘껏 그 년의 창문을 향 해던졌더니 '와당탕’ 소리가 나며
 
225
"악!"
 
226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활짝 열리며 그이가 썩 나섭니다. 바로 그이의 어깨 너머로 하얀 얼굴이 나타나며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봅니다.
 
227
그 얼굴, 그 얼굴!
 
228
그는 내가 잘 아는 여인이라오. 그는 음악학교 졸업생이랍니다.
 
229
우리 친정으로 척당이 되는, 잘 따져 보면 나에게 언니라고 불러야 되는 계집애 였어요…….
 
230
하하하. 이 일을 내가 무어라고 해결하나요. 알 수가 없어…….
 
231
대체 어떻게 된 셈인가……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어……. 나를 꽁꽁 묶어서 방 안에다 가두어 두고 의사란 놈이 별의별 짓을 다 하였지마는 그것도 대체 왜 그 지랄들인지.
 
232
하도 갑갑하고, 그이에게 물어볼 말이 많아서 그만 그저께 밤에는 온갖 재주를 다 부려서 튀어나오고 말았겠다…….
 
233
놈들이 어디 가서 나를 찾고 있는지 모르지요. 내가 이 다리 밑에 숨어있는 줄 저희들은 모를 거야…….
 
234
하하하…….
 
235
정옥아! 석주야! 정희야…….
 
236
아무리 사람들이 네 어미 까닭에 너희들이 불행하여 졌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은 믿지 말아라. 너희 아버지가 이 어미에게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놓은 까닭이다. 흑흑흑…….
 
237
아이구 보고 싶어…….
 
238
너희들이 보고 싶다.
 
239
정옥이 너는 장조림을 잘 먹고, 석주는 생선을 잘 먹고, 정희는 시루떡을 잘 먹고…….
 
240
에에라, 집으로 가야겠다…… 누가 너희들을 보호할까…… 비는 왜 이 리도 많이 오노…… 비를 노다지 맞고 가면 모두 나를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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