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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총(談叢) 초(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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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 1910
신채호
1
談叢[담총](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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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水雲[유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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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水雲) 유진동(柳辰仝)이 어릴 때 그림을 좋아하여 아버지나 형이 글씨를 쓰라고 종이를 주면 붓을 어지럽게 휘둘러 풍죽(風竹)도 그리며 우죽(雨竹)도 그리며 마르고 앙상한 대나무도 그리고 글씨는 한 자도 쓰지 않거늘 아버지가 성내어 종아리를 치더니, 수운이 앉아서 울다가 자리 위에 어지럽게 떨어진 눈물 방울을 모두 손톱으로 톡톡 퉁기니, 점마다 대나무 잎이요 잎마다 신화(神畫이다. 아버지가 이를 보고 탄식항여 말하기를 “너는 하늘이 낸 화가이니 내가 이를 억지로 막음이 옳지 않다” 하고 이후로 부터는 그 대나무를 그리는 것을 다시 금지하지 않더니, 마침내 조선시대 이름 난 화가가 되었다.
 
4
평(評)하여 말하기를 굳어진 천성(天性)은 고치고자 하는 것이 옳지 않으며, 특별한 장점의 천자(天資)는 변화시키고자 함이 옳지 않거늘, 이왕 선비집에서는 아이가 낳으매 그 성질이 장삿일에 가까운지 농삿일을 가까운지 일체 묻지 않고 오직 어려워 읽기가 거북한 한문(漢文)을 가르치다가 되지 않으면 문득 말하기를 “이는 재능이 없는 개돼지 같다”하니, 어찌 옳겠는가.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가르침에 있어 그 재주에 가까운 것을 구함이 옳을 뿐 아니라 곧 자기가 배움에도 또한 성질에 적합한 것을 구함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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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海日申報[대한매일신보 제1250호, 1909.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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偉人[위인]의 頭角[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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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警[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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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공(忠愍公) 최영(崔瑩)이 어렸을 때에 산에 놀러갔는데 뭇사람이 모여 떠들거늘, 그 까닭을 물은즉, 대개 산중 사람들이 함정을 설치하여 한 늙은 범을 붙잡았는데 한 촌 아이놈이 놀리느라고 함정 위로 천천히 지나다가 한쪽 다리가 우연히 빠져 범이 그 아가리를 벌리고 와서 물어 씹지도 아니하고 놓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뭇사람이 서로 의논하되, 범을 놓아주고자 하나 나온 뒤에 뭇사람을 상하게 할까 두렵고, 범을 쏘아 죽이고자 하나 죽일 때에 그 아이의 발이 다칠까 염려스러우니, 이를 어찌함이 옳을까 하여 모여 떠드는 것이었다. 최영이 이것을 보고 즉시 장대 끝에 한 소배를 걸어 거짓으로 사람의 발을 꾸며 함정 속으로 던지니, 범이 급히 아이의 발을 버리고 가짜 발을 와서 물거늘, 이에 무사히 범을 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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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德[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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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젊었을 때에 마을길을 밤에 가다가 우연히 엽전 세 닢을 구렁 속에 떨어뜨렸다. 촌사람을 모집하여 횃불을 잡히고 구렁을 뒤져 그 엽전을 찾아내니 그 비용이 엽전 1냥에 이르더라. 사람들이 이를 놀려 말하기를 “한냥 엽전을 버리고 서푼 엽전을 얻으니 이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짓이다”하거늘, 이원익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 개인으로 말하면 이 한냥을 허비하여 저 서푼을 얻으니 손해만 있고 이익이 없는 것 같으나 전체로 말하면 이 고유(固有)한 한냥 돈은 손실됨이 아니요 서푼 돈만 다시 얻은 것이니 무슨 손실이 있겠는가.
 
 
11
<제 1252호, 1909.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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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人[철인]의 面目[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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操修[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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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나이 16세에 봄밤의 달빛을 타서 책을 읽더니, 이웃집 한 소녀가 담 밖에서 가만히 듣다가 또랑또랑한 글 읽는 소리에 그 봄밤의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담을 넘어왔거늘, 선생이 얼굴빛을 바로 하여 여자 수신(修身)의 말로 다정하고 친절히 깨우쳐 주며 말하기를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것은 금수의 행실이니 네가 죄를 후회하거든 나의 회초리를 받아라”하고 뽕나무 가지를 꺾어 그 종아리를 때렸더니 그 여자가 시집간 뒤에 숙녀가 되어 규범(閨範)으로 소문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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耿介[경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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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그 살던 곳 이웃에 한 오얏나무가 있었는데 그 가지가 선생 집의 담 안으로 뻗쳐서 축 쳐져 붉게 익은 그 열매 한 개가 땅에 떨어졌거늘 선생께서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두려워하여 이것을 주워 담 밖으로 던지니 그 지조(志操)의 경개(耿介)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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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穷[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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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선생이 어렸을 때에 들판에 나가서 채소를 채취하게 하였더니, 무릇 3일 동안을 빔 바구니로 들어오거늘, 부모가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첫째날에 보던 종달새가 둘째날에 그 날아오른 높이가 몇 길을 더하며, 셋째날에 또 몇 길을 더하므로 이것을 탐구하고자 하여 채소 솎아오기를 잊었습니다.” 부모께서 “네가 그러면 그 이치를 알았느냐?” 하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땅 기운의 온도가 날로 오르는 것으로 그 새의 날아오름이 날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새의 이름 ‘종다리’를 고쳐 ‘종지리(從地理)’라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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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3호, 1909.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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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집에 돌아오는 것을 들어온다 하며 다른 사람 집에 향하는 것을 나간다 하거늘, 오늘날 보통의 말에 청나라에 가려면 “청나라에 들어간다” 하며 일본에 가려면 “일본에 들어간다” 하며 , 조국에 오는 것을 “내나라에 나온다” 하니 언어상에도 주객(主客) 분별하지 못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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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부정한 행위를 들추어 욕하거나 자기 형의 불미한 일을 들추어 욕하면, 이를 성내며 이를 아파하며 자기 부형의 저지른 일의 잘잘못은 묻지 않고 욕하는 사람과 결투하고자 하건마는, 조국 역사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욕하든지 어떻게 업신여기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것을 들으니, 오늘날의 사람은 사사로운 덕목은 얼마쯤 남아 있으나 공덕(公德)은 없어진 것이 이미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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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4호, 1909.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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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일 소설가의 추세를 살피건대,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놀랄 만하게 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이 소설(小說)도 음탕한 짓을 가르치는 소설이요, 저 소설도 음탕한 짓을 가르치는 소설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주색(酒色)에 빠져 방탕하게 노는 모습을 묘사해 내며, 남자가 화류계에 빠져 노는 신분을 그려내어, 한번 읽으매 음탕한 마음이 싹트며 두번 읽으매 음탕한 마음이 끓어오르게 하니, 아아, 소설은 국민의 나침반이라 그 말이 저속하고 그 붓이 교묘하여 글자를 알지 못하는 노동자라도 소설을 잘 읽지 못할 자가 없으며 또 즐겨 읽지 아니할 자가 없으므로, 소설이 국민을 강한 데로 이끌면 국민이 강해지며 소설이 국민을 약한 데로 이끌면 국민이 약해지며 바른 데로 이끌면 올바라지며 그릇된 데로 이끌면 그릇되어지니, 소설가가 된 자는 마땅히 스스로 삼갈 것이거늘, 오늘날 소설가들은 음탕한 짓을 주된 내용으로 삼으니 이 사회가 장차 어찌될 것인가. 요사이 대한신문(大韓新聞)에 게재된 『한강선(漢江船)』을 읽으니 더욱 말을 잃겠으며 길이 탄식할 뿐이다. 비록 그러나 『한강선』은 명백히 음탕함을 기록한 것으로, 비유컨대 창칼로 사람을 죽임과 같아서 보고 피하기 쉽거니와 다른 많은 소설가는 이름하여 ‘사회소설(社會小說)’이라 하고 이름하여 ‘정치소설(政治小說)’이라 하고 이름하여 ‘가정소설(家庭小說)’이라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음탕한 이야기를 고취하는 맹렬한 독약으로 사람을 죽임과 다름없으니, 아아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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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5호, 1909.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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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隸工夫[노예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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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창 아래 아이들 3,4이 모여 앉아 노는데 그 가운데 한 아이가 양양자득(洋洋自得)의 태도로 자랑하기를, “나는 어릴 적부터 우리 큰댁 양반의 귀여움을 사려고 옥퉁소 불기, 춘향가 소리하기, 무동춤 추기를 잘 배웠는데, 내가 퉁소를 한번 불매 나리마님이 무릎을 치고, 소리를 한번 하매 서방님이 박수를 치고, 춤을 한번 추매 아씨가 갈채를 한다”고 하거늘, 좌중 아이들이 모두 그 비열한 성품을 웃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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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요사이에 일본어 찌꺼기와 산술 몇낱이나 배워가지고 판임(判任)·주임(奏任)깨나 얻어 하려고 헐떡거리며 다니는 자들은 더 큰댁 양반의 귀여움 사는 종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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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잡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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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그 자제를 대하여 말하기를 “무슨 노릇을 하든지 돈만 벌어라” 하며, 또 말하기를 “제것 없이 잘먹는 것은 만고의 영웅·호걸이다” 하여 그 자제에게 정의(正義)와 인도(人道)는 가르치지 아니하고 협잡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니 그것은 협잡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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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요새는 시대가 변하여 협잡도 못하게 되었건만 협잡가들이 어찌 그리 그렇게 번성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건대 다름 아니라 몇백년을 협잡교육만 시킨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협잡, 형이 아우에게 가르치는 것도 협잡, 어른이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협잡 이니까 협잡가가 많이 나올 수밖에 있나. 언제나 큰 결운검(決雲劒)을 얻어다가 저 협잡 학교를 부서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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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6호, 1909.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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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년에 견훤(甄萱)이 왼편에서 찌르고 궁예(弓裔)가 오른편에서 부딪쳐서 삼한(三韓) 통일의 옛날 위광(威光)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저 못나고 어리석은 김부(金傅)가 백기(白旗)를 세우고 고려 진중에 투항하매 왕자가 대성통곡하여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이 마땅히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 죽기를 결단할 것인데, 어찌 1천년 국가를 가벼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리요”하되, 어리석은 임금과 노예의 신하가 걸음을 나란히 하여 송악산 아래 여생을 포로가 되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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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라사(新羅史)를 읽다가 여기에 이르러 처음에는 노한 기운이 가슴에 꽉 차고 나중에는 크게 꾸짖음을 마지 아니하였으니, 대저 신라가 박혁거세 이래로 그 당당한 나라 역사의 빛이 어떠하며, 문무왕(文武王)이래로 그 맹렬한 국가의 위세가 어떠하였느냐. 이에 적병이 지경에 와서 살 하나를 일찍이 쏘지 못하고 한 칼날을 서로 주고받지 못하고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이 적진에 무릎 꿇되 부끄러움을 오히려 알지 못하였으니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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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2호, 1909.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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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壯國[소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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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한국을 노모국(老耄國)이라 손가락질하고 붓으로 조롱하며 입으로 조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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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중국을 가리켜 노대국(老大國)이라 일컫는 까닭으로 양계초(梁啓超)가 분해서 말하기를 “늙고 크다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이 없거늘 저들이 중국을 노대국(老大國)이라 하니 중국이 어찌 노대국이리요. 나의 안중에는 소년 중국이 뚜렷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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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저들이 중국에 대해서는 노대(老大)라 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노모(老耄라 하니, 그 한국을 모욕함이 우심하고 더욱 극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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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사람이 늙으면 죽을 때가 가까워진 것과 같이 나라가 늙은 것도 또한 죽을 때가 가깝다는 것이니, 이 ‘노모’ 두 자가 어찌 우리나라 사람이 되어 슬퍼 통곡할 일이 아니리요.
 
40
만일 한국인이 이와 같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분발함이 없으면 과연 한국은 늙은 나라인가. 그러나 한국은 결코 늙은 나라가 아니라 병든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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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단군 시대에 고고(呱呱)의 소리가 나와 삼한 시대에 유년 시대가 지나고 고구려·신라·백제 시대에 소년 영기(英氣)가 한참 일어나다가 고려 이후로 병의 빌미가 점점 일어나 노예 품성이 뇌에 젖어들고 악정(惡政)이 몸을 상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천식의 기침으로 숨이 끊어지기에 미쳤으니 한국은 노모국이 아니라 병든 나라이다.
 
42
슬프다! 노모국은 구할 수 없지만 병든 나라는 구할 수 있으니, 과연 이 병만 치료하는 날에는 하나의 권토중래(捲土重來)하는 소장국(少壯國)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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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4호, 1909.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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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邯贊[강감찬]과 카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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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부르가 열약(劣弱)한 이태리에서 태어나 식량을 계산하고 군사를 길러서 오스트리아를 격퇴하고, 강감찬이 잔약한 고려에서 태어나 식량을 계산하고 군사를 길러내 거란(契丹)을 격퇴하였으니, 그 위기에서 꿩이 엎드리고 토끼가 벗어나는 수단이 대략 같았다.
 
46
그러나 카부르 이후의 이태리는 그 나라의 굳셈이 저와 같으며, 강감찬 이후의 고려는 그 약함이 옛날과 같았으니, 같은 영웅이 건설한 국가라도 강약의 차이가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다름아니라 첫째는 고려 현종(顯宗)은 못생기고 어리석어 이태리 국왕같이 도모하여 다스리지 않고 난이 이미 평정되매 기뻐할 뿐이며, 둘째는 고려조 신하와 백성이 몽매하여 이태리 국민같이 분발하지 않고 거란 군사가 이미 물러나매 깊이 잠들었을 뿐이니, 어찌 이태리같이 굳셈을 얻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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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까닭으로 이태리 국민은 당시에 카부르가 하루만 없으면 장님이 상(相)을 잃고 젖먹이가 어미를 잃은 듯이 어쩔 줄 모르고 찾았거늘, 강감찬은 한번 난을 물리친 이후에 한가로운 처지에 던져 정사(政事)를 더불어 듣지 못하였으니 슬프다!
 
 
48
슬프다 한국 영웅의 역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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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을지문덕(乙支文德)·김유신(金庾信) 등 여러분에 대한 역사의 없어진 것은 일반으로 같이 개탄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것은 혹 시대가 멀어진 때문이라 하려니와 곧 강감찬(姜邯贊)·최영(崔瑩) 등 여러분은 6백년 안팎의 인물이로되 그 사적이 거칠거나 없어져 쓸쓸하며, 김시민(金時敏)· 정기룡(鄭起龍) 등 여러분은 2, 3백년 안팎의 인물이로되 그 행장(行狀)이 소략하고, 곧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산과 바다에 맹세한 의로운 자취도 그 스스로 쓴 일기(日記) 및 장계(狀啓)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그 행한 일의 어떠함을 고찰할 곳이 없을 것이니, 슬프다! 당시 적에 대한 의분심으로 외적을 막는 피끓는 뜻을 품고 하늘을 깁고 해를 드는 수완을 휘두른 큰 인물로 백여 년이 겨우 지나면 후세 국민이 어찌하여 서로 망각의 곳에 내버리니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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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5호, 1909.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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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의 사상 발표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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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思想) 발표의 이기(利器)는 혀와 붓이 이것인데, 한번 뱉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유쾌하며 정신이 상쾌한 것은 혀가 붓에 지나치나 먼곳에 전파하며 후세에 전하는 것은 붓이요 혀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철리(哲理)가 가슴에 가득차며 정견(政見)이 마음에 차서 넘치더라도 이것을 발표하는 것은 부득이 붓을 기다려야 할 것이거늘, 고대에는 국문(國文)을 가볍게 여기고 한문(漢文)만 숭상하였으므로 언문일치(言文一致)가 되지 못한 까닭으로 마음으로 능히 생각하며 입으로 능히 말하여도 몇십년 한문을 힘써 사용하여 저작(著作)에 능하지 못하면 도저히 이것을 책으로 써서 후세에 전할 수 없고, 또 혹시 한문에 능하여 그 사상을 능히 발표할지라도 몇몇 한문학자(漢文學者) 이외에는 능히 해독하는 자가 없는 까닭으로 먼지 상자 속에 쌓여 좀벌레의 먹이에 이바지할 뿐이니, 아깝도다! 그러므로 나라를 잘 영위하는 것은 언문일치의 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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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국사]의 逸事[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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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에 향전(鄕戰) 써서 말하기를 “김유신이 당나라 군사와 합하여 백제를 멸망한 뒤에 다시 기묘한 계책을 써서 모두 갱살(坑殺)하였다”하였으며,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가다가 요양(遼陽) 계관산(鷄冠山)에 한 비석(碑石)이 있는데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크게 패하여 단기(單騎)로 달아나다가 이 산에 머물러 잤다”고 기록한 것을 몸소 보았다고 했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 “일컫기를 이 주머니 속의 한 물건을 어찌 알리요, 하늘의 꽃을 떨어뜨린 흰 깁이라는 것을.(謂是囊中一物耳[위시낭중일물이] 那知玄花落白羽[나지현화락백우])”이라고 하여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패하고 눈을 다친 것을 명백히 말하였고, 명나라 사람 정효(鄭曉)가 저술한 『오학편(吾學編)』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다가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함을 밝게 기록하였는데, 우리나라 역사책에 모두 실려 있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다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속박되어 이들을 일체 말살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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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양(平壤)에 갔을 때 그곳에 사는 사람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56
“본군(本郡) 석다산(石多山) 아래에 을지문덕 승전비(勝戰碑)가 있었는데 조선조 중엽에 이것을 넘어뜨려 땅속에 묻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삼국 이래 수많은 사적(史籍)도 이 비석과 같이 되어 이와 같이 전해지지 못한 것이 아닌가. 슬프다!
 
 
57
<제1266호, 190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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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郡邑誌[군읍지]
 
 
59
읍지(邑誌)는 각기 그 군(郡)의 건치연혁(建治沿革)의 역사와 물산(物産)과 풍토와 명인(名人)의 유적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니 이것 또한 야사(野史)의 일종이다. 이것으로 국사(國史)의 빠짐을 보충할 것이나 그러나 내가 몇몇 군의 읍지를 읽어보건대 어찌 그 그릇됨이 이와 같으며 틀리고 어긋남이 이와 같은가. 고대의 일을 논한 것에는 아무개가 알에서 나왔다, 아무개는 강을 옮겼다 하는 허황된 이야기뿐이며, 연혁을 논한 것에는 안주(安州)가 안시성(安市城)이니 성천(成川)이 졸본(卒本)이니 하는 눈먼 이야기뿐이다. 심하다 기념할 만한 성질의 결핍이여! 인물 사적은 잃어버린 것이 더욱 심하여 충역(忠逆)을 거꾸로 하고 시비(是非)를 뒤섞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곧 내가 모군(某郡)의 신간 읍지를 읽어보건대 근래 사람마다 목격한 탐욕스럽고 포악한 수령(守令) 누구를 소부(召父 : 召信臣[소신신])라 하며, 협잡 간사한 아무개를 위인(偉人)이라고 하였다. 아아, 귀척(貴戚)·간신(奸臣)이 나라 권세를 잡으매 벼슬아치가 흑백을 어지럽히며, 패악스런 관민(官民)이 읍권(邑權)를 천단하매 고을 선비가 진정과 거짓을 섞어버리니, 아아, 서적을 모두 믿는다면 차라리 서적이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이중심(李仲心) 씨가 말하기를 “안동군(安東郡)에 신라 시대 호적이 남아 있더니 조선조 중엽에 아무개가 그 군의 수령이 되어 이것을 취하여 벽에 발랐다” 하니, 슬프다, 이런 무리가 어찌 고적(古籍)의 귀중함을 알겠는가.
 
 
60
<제1268호, 190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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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文[국문]의 起原[기원]
 
 
62
오늘날 사람들이 모두 국문(國文)을 조선조 세종대왕이 창조(創造)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로 그렇지 않다. 내가 일찍이 책방을 지나다가 『진언집(眞言集)』이란 한 책자가 있어 이것을 읽어본즉, 이에 불가(佛家)에서 전교(傳敎)하기 위해서 국한자(國漢字)를 교용(交用)하여 저술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국문의 기원을 말한 일단(一段)이 있는데 창조(倡造)한 사람은 고승(高僧) 요의(了義)라 하였으니, 요의가 어느 때 사람인지 알지 못하나 세종 이전 사람이 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63
일본인이 근래 땅속을 파다가 출운족(出雲族) 고대문자를 발견하여 동양 역사사전에 실었는데 그 글자체의 구조가 우리 국자(國字)와 매우 비슷하고 또 마메아오 등의 글자가 있는데 이것이 삼국시대 한문(漢文)을 수입하여 건네준 것같이 이 문자도 곧 우리나라로부터 옮겨간 것이 아닐까. 그런즉 우리 국문은 대개 단군 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64
<제1277호, 1909. 12. 29>
 
 

 
 
65
棄子山[기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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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난날에 한 역사학 선생을 마난ㅆ는데 선생이 고구려 때 일을 설명하다가 기자산(棄子山)이라는 말에 이르러 분개하여 말하기를, “기자산은 자식을 버리는 산이니 곧 고구려 사람이 그 아들을 전쟁터에 보냈다가 패하여 돌아오면 이 산에 버렸던 것이다. 이것을 보아도 족히 당시 고구려 전성시대에 갑옷을 입은 장병이 100만에 이르고 큰 진(鎭)이 60에 이르러 강국으로 동아시아에 이름난 원인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하거늘, 내가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그렇구료, 그렇구료. 저 스파르타 사람의 약한 아들 버리기와 일본인의 전사하기를 비는 것이 다 국민으로 하여금 백번 싸워 백번 이기고 나가기만 하고 물러남이 없는 기개와 힘을 도야(陶冶)하여 국가의 강성함을 이루었으니, 우리 고구려의 부강(富强)이 또한 그 까닭이 있다”고 하였다.
 
67
애저 이 시대에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자가 그 국민에게 군국민(軍國民)교육을 베풀지 않고는 결코 그 다리를 세우지 못하거늘, 이에 저 국민의 적개심을 온갖 칼로 말살하는 슬픈 교육을 시험삼아 생각건대 꿈속에서도 슬픈 눈물이 흘러내림을 막을 수 없다.
 
 
68
<제1280호, 1910. 1. 5>
 
 

 
 
69
偃武修文[언무수문]
 
 
70
동양 역대 창업한 제왕이 전조(前朝)를 이미 뒤엎은 뒤에는 반드시 ‘언무수문(偃武修文)’ 넉 자를 주창하여 인민으로 더불어 태평을 함께 누리게 한다 하였으니, 아아, 간사하다 그 계책이여! 명분은 “인민으로 더불어 태평을 누리게 한다” 하나 실인즉 인민을 재앙의 굴에 몰아넣는 것이다.
 
71
안의 불평을 제거함도 무력으로써 할 것이며 외적의 침입을 막아냄도 무력으로써 하니, 무력은 한때라도 굽혀야 할 것이 아닌데, 저 인민의 적들이 이미 자기들의 욕망을 달성하여 번쩍번쩍 빛나는 임금 자리를 차지하고 이것을 자손 만대의 사업(私業)으로 만들고자 하여 부득이 인민의 굳세고 씩씩하여 굽힐 줄 모르는 기운을 누른 뒤에야 이것이 될 수 있기에 이에 군사를 쇠약하게 하며 의협한 자를 죽이고 엄연히 아래에 임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언무수문(偃武修文)이다”하니, 간사하다 그 계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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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무(文武)는 한길이라 강직하고 씩씩한 연후에 문(文)이라고 할 것이며, 중정(中正)한 연후에 문이라 할 것이니, 무(武)를 쉬고서야 어찌 문이 있으리요.
 
73
그런데 저들은 문약(文弱)의 문만 문으로 아는지 이것으로 인민을 속여 혼돈미열(渾沌迷劣)의 태도를 이루어 품격이 타락하게 하였도다. 아아!
 
 
74
<제1289호, 1910. 1. 15>
 
 

 
 
75
兩國[양국] 史學[사학]의 反比例[반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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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역사학을 편수할 때 바늘같이 작은 아름다운 일을 방망이같이 크고 빛나게 장식하고 없는 아름다운 일을 있는 듯이 기술하는데, 한국에서는 역사학을 편수함에 있어 방망이같이 큰 아름다운 일을 바늘같이 작게 줄여 없애고 있는 아름다운 일을 없는 듯이 기술하니, 슬프다 두 나라 사학(史學)의 반비례 됨이여! 저것도 거짓 역사요 이것도 거짓 역사다. 그러나 후세 사람은 이 망녕된 역사를 보고 혹 참된 역사로 인정할 것이나 저 거짓 역사의 복됨과 이 거짓 역사의 화됨이 또한 반비례가 될 것이다.
 
 
77
<제1292호, 1910. 1. 19>
 
 

 
78
東洋革命史[동양혁명사]의 결점
 
 
79
저 서양 사람은 폭군이나 흉당(凶黨)의 학대를 괴로워하여 혁명을 일으키면 반드시 인권과 국가 이익 확장의 북을 울리어 인민의 도적의 화근을 잘라내었으니, 그러므로 혁명의 결과가 로마 동표법(銅表法)이 되고 영국의 대헌장이 되어 오늘날 문명의 연원을 열었다.
 
80
이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혁명이 대개 그 원인은 저 서양과 같되 그 결과는 저들과 다른데,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동양에서는 비록 폭군·흉당의 학대를 괴로워하여 혁명을 일으켰으되 그 마지막에는 한두 야심가의 종횡에 맡겨 앞서의 폭군·흉당을 제거한 뒤에 제이 폭군 제이 흉당이 다시 생겨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므로 이 한국의 예로 논하여도 신라 말년에 왕실의 추잡한 정치가 일어나매 이로 인하여 혁명이 일어났으나 불과 왕씨(王氏)의 기업(基業)만 열어주게 되었고 하등 인권과 국가 이익에 관한 성공이 없었으며, 고려 말년에 최가(崔家)의 횡포가 일어나매 이로 인하여 혁명이 일어났으나 또 불과 김인준(金仁俊)의 권력만 갑자기 일어나게 되었고 하등의 인권과 국가 이익에 관한 성공이 없었으니 애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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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3호, 1910. 1. 20>
 
 

 
 
82
한국의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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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에게 묻기를, “우리나라 수백년래에 저술된 서적에서 세상에 전할 만한 것이 몇가지나 되오?” 성호가 대답하기를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첫째요, 『성학집요(聖學輯要)』가 둘째요, 『반계수록(磻溪隧錄)』이 세번째요, 나의 저술인 『사설(僿設)』이 네번째이다” 하였으니, 그 의론이 크게 가혹한 듯하나, 그러나 시험삼아 생각건대 조선조 이래 유자(儒者)로 일컫는 자가 산같이 쌓여서 ‘가가정주(家家程朱)’란 속어가 있음에 이르렀으되 능히 뛰어나게 일가를 성립한 자를 구하면 어쨌든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같이 드문 것이다. 그 이른바 모선생집(某先生集)이니 모공집(某公集)이니 하는 것을 보건대 왕왕 권질(卷帙)이 수십 수백에 넘치지만 이것을 한번 펴서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엿보면 산고수려(山高水麗)·풍청월백(風淸月白)등의 말로 읊어낸 시 몇수가 있을 뿐이며, 정심(正心)·성의(誠意)·수신(修身)·제가(齊家) 등의 뜻으로 지어낸 글 몇편이 있을 뿐이다. 열 명 선생의 문집을 읽어보아도 이와 같으며 백명 선생의 문집을 읽어보아도 이와 같으니, 이들 문집은 진시황(秦始皇)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히 불타고 남은 재로 돌아갈 것이니, 슬프다!
 
 
84
<제1354호, 1910. 4. 7>
【원문】담총(談叢) 초(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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