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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조선(兒時朝鮮) ◈
◇ 제1부 사력 편(事歷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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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4
최남선
1
兒 時 朝 鮮[아시 조선]
 
 
2
目 次[목차]
3
第一部[제 일부] 事歷篇[사력 편]
4
  第一章[제 일장] 하나에서 여럿으로
5
  第二章[제이장] 人類[인류]와 文化[문화]의 歷史[역사]
6
  第三章[제 삼장] 朝鮮[조선] 사람의 搖籃地[요람지]
7
  第四章[제 사장] 朝鮮[조선] 사람의 줄거리
8
  第五章[제 오장] 「」 사람의 半島[반도] 南下[남하]
9
  第六章[제 륙장] 朝鮮[조선]과 壇君[단군]의 出現[출현]
10
  第七章[제 칠장] 扶餘[부여]와 根本部[근본부] 南移[남이]
11
  第八章[제 팔 장]  지 朝鮮[조선]의 卓越[탁월]
12
  第九章[제 구장] 더부살이의 북새 질
13
  第一○章[제 일 영장] 衛滿[위만] 新王朝[신왕조]의 影響[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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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十一章[제 십 일장][한] 나라 四郡[사군]의 幻滅[환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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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十二章[제 십 이장] 大同江[대동강] 中心[중심]의 時代[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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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十三章[제 십 삼장] 樂浪[낙랑] 四圍[사위]의 諸民邦[제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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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十四章[제 십 사장] 鴨綠谷裡[압록곡리]의 新勢力[신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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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十五章[제 십오장][한] 郡縣[군현]의 쫓겨나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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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十六章[제 십 륙장] 古朝鮮人[고조선인]의 分布圈[분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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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十七章[제 십 칠장] 해상[海上]으로 나간 支派[지파]
21
  第十八章[제 십팔장] 震域[진역] 內外[내외]의 異民族[이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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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部[제 이부] 文化篇[문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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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十九章[제 십 구장] 朝鮮[조선] 古文化[고문화]의 淵源[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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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二○章[제 이 영장] 石器[석기] 로서 鐵器[철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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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二一章[제 이 일장] 祭祀[제사] 中心[중심]의 生活相[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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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二二章[제 이 이장] 古代[고대]의 神域[신역]과 靈儀[영의]
27
  第二三章[제 이 삼장] 瑞石[서석]과 支石[지석]과 「업」
28
  第二四章[제 이사장] 祭祀[제사]와 女子[여자]의 地位[지위]
29
  第二五章[제 이 오장] 古代[고대]의 君主[군주]와 天符[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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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二六章[제 이 육장] 久遠[구원]의 國土[국토]는 東方[동방]
31
  第二七章[제 이 칠장] 古震人[고진인]의 敎學[교학] 藝術[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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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二八章[제 이 팔장] 上代人[상대인]의 衣食[의식] 居處[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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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二九章[제 이 구장] 上代人[상대인]의 婚喪[혼상] 諸俗[제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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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三○章[제 삼 영장] 古震人[고진인]의 生活[생활] 原理[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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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民族本支圖[조선민족본지도] (卷頭[권두] 畵報[화보] 參照[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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兒時朝鮮[아시 조선]의 卷頭[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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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稽古箚存[계고차존]〉을 쓴 지도 이미 一○[일영]數年[수년]입니다. 생각하면 그동안 多少[다소]의 進境[진경]이 있을 듯하기에, 다시 古代史[고대사]의 重霧[중무]를 약간 헤쳐보려 하였더니, 적어보매 依然[의연]히 曠野迷徨[광야미황]의 感[감]을 禁[금]치 못하겠음이 스스로 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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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篇中[편중]에 述[술]한 바 모든 章節[장절]이 다 多年[다년]의 苦心[고심]과 熟考[숙고]의 存[존]한 바요, 率爾[솔이]하게 放言[방언]한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所言[소언]이 다 正鵠[정곡]을 얻었다 할 수 없 음은 毋論[무론]이지마는, 대개 新試[신시]와 創見[창견]에 屬[속]함은 讀者[독자]의 알아주실 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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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수록 휑하여 헤매고 어리둥절함은 處女地[처녀지]대로 있는 朝鮮歷史[조선역사]의 原始林[원시림]입니다. 여기 적은 것이 앞으로도 많은 檢覈[검핵]과 折磨[절마]를 지내서야 비로소 좀더 톡톡해지고 탄탄해질 것은 當然[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아무도 손 대는 이 없는 兒時朝鮮[아시 조선]의 討究[토구]에 대하여, 나는 아직 이렇게 보고, 생각하고, 적어본다는 의미로, 모든 視野[시야]의 줄거리만 뽑아서 이 編[편]을 만들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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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個[각개]의 細論[세론]은 따로 記述[기술]할 機會[기회]가 있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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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 暮春[병인 모춘][일] 一覽閣[일람각]에서 著者[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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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 四月中[병인 사월중], 〈古朝鮮[고조선], 그 文化[문화]〉란 題[제]로 朝鮮日報[조선일보]에 連載[연재]하였던 것을 그대로 編印[편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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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部[제 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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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章[제 일 장] 事歷篇[사력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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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에서 여럿으로 시방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처음부터 시방 보는 저 모양대로 생겼던 것 아니다. 시방 가진 그 모양들은 총히 오랜 歲月[세월]로 많은 變遷[변천]을 지낸 끝에 그렇게 생기게 된 것이다. 사람도 당초부터 사람이던 것 아니요, 地球[지구]도 당초부터 地球[지구]이던 것 아니요, 萬物[만물]과 日星[일성]이 도무지 당초부터 저 모양으로 생겨서, 언제까지든지 저 모양대로 가는 것 아니다. 環境[환경]의 形便[형편]을 따라서 천천히, 또 가만가만히 形體[형체]가 바뀌고 種類[종류]가 늘어서 마침내 어수선한 시방의 世界[세계]가 생기기도 하였거니와, 시방도 또한 눈에 뜨이지 아니하는 中[중]에 연방 이러한 造化[조화]가 행하여 더욱 어수선스러운 將來[장래]의 世界[세계]를 만들고 있다. 다만 사람의 壽命[수명]이 짧고 注意力[주의력]이 허소하므로 그런 줄을 살피지 못할 따름이다. 이렇게 그前[전]의 모양이 없어지고, 새 모양이 대신 나오는 조화를 이르되 進化[진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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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化[진화]란 것은 큰 데나 작은 데나, 有形[유형]한 것에나 無形[무형]한 것에나 무엇에든지 다 있다. 모든 것이 이 進化[진화]의 속에서 생기고 머무르고 없어진다. 그前[전]의 생기던 동안을 過去[과거]라 이르고, 시방 머무르는 동안을 現在[현재]라 이르고, 인제 없어질 동안을 未來[미래]라 하고, 이 세 토막을 合[합]하여 時間[시간]이라 이르니, 過去[과거]는 그 적의 現在[현재]요, 現在[현재]는 過去[과거]의 未來[미래]요, 未來[미래]는 이 다음의 現在[현재]인 것처럼, 뒤에도 또 뒤가 있고, 앞에도 또 앞이 있어, 時間[시간]은 시초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 이 그지없는 時間[시간]과 거기 매달려서 내려가는 進化[진화]의 일을 담아 가지고 있는 터전을 이르되 空間[공간]이라 하니, 空間[공간]은 어디로든지 막다른 데가 없이 한껏 크고 넓은 것이다. 이 時間[시간]의 길이와 空間[공간]의 넓이를 合[합]해 가진 덩어리가 世界[세계]란 것이니, 進化[진화]는 이 世界[세계]의 꼼지락 거리는 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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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세계]는 처음에 한 흐리멍덩한 두루뭉수리였다. 그러나 그 속에 「힘」이 있더니, 이 힘이 벌떡거리기 시작하여 이렁이렁 번득이는 통에 形相[형상]이 생기니, 形相[형상]은 進化[진화]의 始初[시초]이다. 묽던 形相[형상]이 톡톡해지고, 어설픈 形相[형상]이 어울리면서 한옆으로 많은 새끼를 치매, 새로운 形相[형상]이 뒤를 대어 나오고 또 나오는 대로 아름다 움과 굳셈을 더하였다. 이중에서 언제는 生命[생명]있는 것이 생겨나니, 生命[생명]이란 것은 나서, 자라서, 새끼라는 새 허울을 만들어서 낡은 제 몸을 담아 놓고 가는 힘이다. 이 生命[생명]도 당초에는 아주 변변치 아니한 한 꼼지락이였다. 이것이 時間[시간]에 닦달되고 空間[공간]에 출렁 거리는 통에, 몸도 굳어지고 가지도 늘어 가서 점점 잘생긴 새것을 이루어 가니, 시방 있는 高等[고등]·下等[하등]의 허다한 動物[동물]· 植物[식물]들은 도무지 다 연방 새로 바꾸이는 環境[환경]에 맞추어 살려하는 結果[결과]로 가지가지 생겨나서 그 子孫[자손]을 남겨 놓은 것이다. 變[변]해진 環境[환경]에 맞추지 못하면 작게는 그런 놈이 먼저 죽고, 크게는 그런 종락 이아주 없어지나니, 그러므로 이 世界[세계]에는 環境[환경]에 맞지 아니하여 이미 없어진 物種[물종]도 많고, 방장 없어져 가는 것과, 장차 없어질 것도 또한 적지 않다. 여러 物種[물종] 틈에 어느 한 物種[물종]이나, 같은 物種[물종] 중에 어느 한 個體[개체]나, 무슨 個體上[개체상]에 어느 한 行爲[행위]나, 다 그 때와 저희 處地[처지]에 合當[합당]해야 부지하기도 하고 잘 되기도 하나니, 이것을 이르되 適者生存[적자생존]이라 한다. 世界[세계]가 進化[진화]의 놀이터임은 변시 適者生存[적자생존]의 놀음판인 것이니, 이렇게 環境[환경]에 맞추어서 살려하는 통에, 서로 이아치는 모양을 生存競爭[생존 경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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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章[제 이 장] 人類[인류]와 文化[문화]의 歷史[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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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物[생물]의 씨는 처음 水中[수중]에서 생겼다. 이것이 오랜 뒤에 動物[동물]을 이루고, 또 오랜 뒤에 陸上[육상]으로 나왔다. 다시 오랜 뒤에 動物[동물]의 中[중]에 줄띠 있는 종락이 생기고, 또 그중에서 젖 먹이는 종락이 생기고, 또 그중에서 서서 다니는 종락이 생기고, 또 그중에서 腦髓[뇌수]가 특히 커다래진 종락이 생기니, 腦髓[뇌수]가 크기 때문에 智力[지력]이 월등하여 다른 모든 動物[동물]의 中[중]에서 가장 높은 地位[지위]를 얻게 된 것이 우리 人類[인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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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球[지구]가 생기고 그 위에 物類[물류]가 생기고, 그중에 生物[생물]이 생기고, 生物[생물]이 변하고 붇다가 進化[진화]의 한 고작으로 人類[인류]를 만들어내기는 참 까마득한 오랜 동안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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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類[인류]의 처음 생기기는 시방부터 대강 五○[오영]만 년쯤 전이요, 이것이 처음에 「비슷한 사람」으로 비롯하여, 「어울려 가는 사람」「앞서난 사람」을 거쳐 「참 사람」을 이루는 동안이 퍽 오래였으니, 능히 깊은 생각도 하고 어수선한 말도 하여, 시방 우리의 바른 祖上[조상]이라 할 「다 된 사람」은 실상 二[이], 三[삼]만 년쯤 전에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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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原始人類[원시인류]의 가장 오랜 자취는, 시방 亞細亞[아세아]의 西南方[서남방]에 머물러 있는데, 이 종락이 이리로 부터 사방으로 번 져 나가서, 風土[풍토]와 다른 事情[사정]을 따라서 오랜 동안에 形貌[형모]와 言語[언어]와 習俗[습속]이 각각 달라지게 되니, 크게는 人種[인종]과 작게는 民族[민족]이란 것이 이래서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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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類[인류]는 知識[지식]을 가지고, 言語[언어]를 가지고, 또 이것을 縱橫[종횡]으로 써서 經驗[경험]이라는 큰 힘을 가지게 되니, 이 몇 가지는 人類[인류]의 生活[생활]을 엄청나게 便利[편리]하고 아름답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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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驗[경험]과 改良[개량]으로써 연방 좀더 나은 生活方法[생활방법]을 만들어 낸 것을 이르되 文化[문화]라 하니, 人類[인류]의 잘살려는 慾望[욕망]이 온갖 方面[방면]으로 크게 나타나서 갈수록 文化[문화]의 정도를 높이고 또 그 內容[내용]을 가멸하게 하였다. 잘살자, 내 몸 하나뿐 아니 라나의 같은 種族[종족]과 또 우리 子孫[자손] 언제까지든지 늘고 붇고 돋우어 가면서, 재미있고 뜻 있고, 힘과 생색 있는 살림살이를 하자는 노력이 쌓이고 덮치는 곳에, 文化[문화]의 탑은 그대로 높고 빛나졌다. 人類[인류]의 生活[생활]과 및 그 때문에 생기는 文化[문화]가 어떻게 생겨서 자라고퍼지고 변해 왔는지를 時間[시간] 차례로 살펴서 그 興廢存亡[흥폐존망]하는 理法[이법]을 알려 하는 것이 歷史[역사]이니, 본디는 무엇에든지 다 歷史[역사]가 있을 것이로되, 文化[문화]란 것은 人類[인류]의 特色[특색]이기 때문에 다만 歷史[역사]라 하면 문득 人類[인류]의 歷史[역사]란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人類[인류]의 歷史[역사]를 온통 한 歷史[역사]로 보기도 하려니와, 독특한 來歷[내력]을 가진 어느 한 民族[민족]이나 社會[사회]나 時代[시대]의 歷史[역사]를 따로 떼어 살피고 배우기도 하니, 이를테면 朝鮮人[조선인]이란 人類中[인류중]한 덩어리의 생활해 내려온 內容[내용]을 硏究[연구]하는 것을 朝鮮[조선] 歷史[역사]라고 일컬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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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類[인류]의 文化[문화]는 손에서 시작되고, 손의 조화는 연장에서 나타났다. 몸 밖에 있는 물건을 가져다가 便利[편리]한 器具[기구]를 만들어서 몸 수고를 덞은, 거의 人類[인류]만 가진 재주이었으니, 器具[기구]의 감과, 솜씨와, 가지의 늘어감은 곧 그 文化[문화]의 소용이 커지는 尺度[척도]이었다. 옛적에는 저절로 생긴 나뭇가지나 돌덩어리를 집어다 썼겠지마는, 차차 쓰기에 좋음을 위하여 다듬고 깎기를 시작하고, 또 그 資料[자료]도 튼튼한 것을 취하게 되니, 그 發達[발달]하던 來歷[내력]을 보건대, 처음 한참 동안은 돌로만 만들어 쓰던 石器時代[석기시대]요, 그보다 이것 저것을 만들어 쓰기에 편리한 靑銅器時代[청동기시대]가 그다음을 잇고, 또 그러고도 더 단단한 鐵器時代[철기시대]가 그뒤를 받쳐서 오늘날까지 내려옴이 그것이며, 이 세 時代[시대]를 通[통]하여 만들기 쉽고 쓰기 만만한 土器[토기]· 骨角器[골각기]가 있어서 인류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鐵器時代[철기시대]에 들어와서는 人類[인류]의 智慧[지혜]가 더욱 활발하게 發作 [발작]하여, 단순한 器具[기구]가 점점 복잡한 機械[기계]로 변하니, 機械[기계]가 精妙[정묘]해지는 대로 人類文化[인류문화]의 効用[효용]은 달 음질로 뛰어 올라온다. 한옆으로 피륙 짜기와 불 쓸 줄을 알아서 人類生活[인류생활]의 特色[특색]이 더욱 顯著[현저]해지고, 먹을 것 장만하는 方法[방법]도 주움질·사냥질로 부터 짐승치기로 나아오고, 다시 곡식 심을 줄까지를 알게 됨에 미쳐서 一定[일정]한 處所[처소]로 모여 사는 일이 생기고, 떼를 지어 오래 지내자 하매, 저절로 구순하게 사는 法禮[법례]를 마련 하게 되니, 나라라 法[법]이라 하는 것은 이래서 생겨나고, 다시 宗敎[종교] 기타의 힘으로써 그 團合力[단합력]이 굳게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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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章[제 삼 장] 朝鮮[조선] 사람의 搖籃地[요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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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세계]의 人類[인류]에는 큰 무더기 셋이 있으니, 흔히 黃人[황인]으로 부르는 蒙古系[몽고계], 白人[백인]으로 부르는 高加索系[고가색계], 黑人[흑인]으로 부르는 亞弗利加系[아불리가계]란 것이다. 蒙古系[몽고계]의 人種[인종]은 시방부터 한 一[일]만 년 전까지 中央亞細亞[중앙아세아]를 중심으로 하여 그 四方[사방]의 谷間[곡간] 혹 川邊[천변]에 각각 한 덩어리씩을 지어서 규모 있는 살림살이를 하였다. 그네들은 대개 일찍부터 하늘을 무서워 섬기고, 날마다 한 바퀴씩 하늘을 막질러 건너다니는 해를 世界[세계]의 임자로 믿고, 高山[고산]의 꼭대기는 하늘 通[통]해 다니는 발판인 동시에 하느님의 人間[인간]에 와 계시는 대궐로 생각하여 하늘과 해와 高山[고산]을 한 끈에 꿰듯한 굳은 信仰[신앙]을 가졌었다. 넓은 하늘과 빛난 해와 높은 멧부리를 우러러 보고는 지극히 크고 먼 氣像[기상]을 기르는 사람의 씨이었다. 우뚝하여지라 하는 理想[이상]의 불꽃이 가슴속에 활활 거림에 끌려서 무척 어려운 일이라도 아주 우습게 해내는 勇氣[용기]를 가진 사람 들이었다. 그 덩어리의 事情[사정]을 따라서 더 强[강]하고 弱[약]한 差異[차이]는 있으되, 이 理想[이상]의 김은 어느 部族[부족]의 사이에든지 서려 있었다. 이 理想[이상]에 눈뜬 것이 그네로 하여금 그때에 있어서 가장 高貴[고귀]한 精神世界[정신세계]의 임자이게 하여, 큰 希望[희망]과 한가지로 큰 자랑을 가졌었다. 이 理想[이상]의 싹을 북돋우어 기르면서 그네들의 고요한 生活[생활]이 몇천 년을 계속하였다.
 
58
年代[연대]가 나아가고 地域[지역]이 갈림을 따라서 이 蒙古系[몽고계]의 人種[인종] 중에 許多[허다]한 分派[분파]가 찢겨나고, 一邊[일변]으로는 그 生活上[생활상] 事情[사정]을 因[인]하여서 文化[문화]의 程度[정도]와 內容[내용]에 許多[허다]한 差別[차별]이 생기게 되었다. 水利[수리] 좋은 「투란」平野[평야]에서는 진작부터 農業[농업]이 시작되어서 定着[정착]한 生活[생활]을 배포한 이도 있고, 이네들의 사이에는 建築[건축]과 製造工業[제조공업]도 조금씩 생겨났지마는, 高原[고원]과 山間[산간]에 웅거한 이는 牧畜[목축]과 狩獵[수렵]으로써 生活[생활]의 기본을 삼는 이가 오랜 뒤까지도 많이 있어, 이네들은 앉은 文化[문화]를 지음에는 얼마쯤 遲鈍[지둔]하였으나, 서서 理想[이상]을 나타냄에는 특히 勇敢[용감]하고 활발 스러웠다. 더욱 高山[고산]·深谷[심곡]·平原[평원]·曠野[광야] 등 自然[자연]의 威力[위력]을 느낄 기회를 많이 가진 그는 人生[인생]과 自然[자연]의 사이에 微妙[미묘]한 관계를 깊이 體認[체인]하여 敬虔[경건]한 宗敎的[종교적] 情緖[정서]가 항상 이네들 생활의 中心支柱[중심지주]를 지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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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네들의 天性[천성]은 思究的[사구적]인 것보다 實行的[실행적] 이기 때문에, 그네의 宗敎[종교]도 가장 이 方面[방면]으로 發達[발달]을 이루어, 그네 信仰[신앙]의 標的[표적]인 「한우님」은 아무것보다도 그네의 進取[진취] 實行[실행]의 策勵者[책려자]이었다. 이 信仰[신앙]의 衝動[충동]에 끌려서, 곧 「한우님」이신 太陽[태양]에게로 가까이 가리라는 努力[노력]이 그네로 하여금 「파미르」와 天山[천산]의 荒險[황험]을 무릅쓰고그 무서운 藪澤[수택]을 뚫고서 東[동]으로 東[동]으로 나오면서 世界[세계] 생긴 뒤의 처음인 인류의 발자국을 내었다. 信仰[신앙]의 偉大[위대]한 힘이 그네를 몰아서 이 勇敢[용감]한 開拓者[개척자]를 만들었다. 이렇게 길이 한번 난 뒤에는 東方[동방]에도 살기 좋은 땅이 있다 하는 지식이 널리 퍼져, 氣候[기후]의 變遷[변천]과 食物[식물]의 缺乏[결핍]과 戰亂[전란]의 繼續[계속] 등 살기 어려운 事情[사정]이 西方[서방]의 搖籃地[요람지]에 發生[발생]하는 대로 東方[동방]으로나 移住[이주]하겠다는 무리가 자꾸 생겨서 東方[동방]의 새 世界[세계]가 漸次[점차]로 人類生活[인류생활]의 稠雜[조잡]한 舞臺[무대]를 이루고, 그중에는 무론 農業的[농업적] 文化[문화]의 所有者[소유자]들도 많이 끼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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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章[제 사 장] 朝鮮[조선] 사람의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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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세계]의 용마름이라 하는 「파미르」 高地[고지]에 서서 보면, 손가락을 편 것처럼 山脈[산맥]이 四方[사방]으로 찢겨나간 中[중]에 雄大[웅대]하고 기찬 것은 그 東方[동방]의 分支[분지]니, 北[북]에 치우쳐 나간 것은 天山山系[천산산계]요, 南[남]에 치우친 것은 「히말라야」山系[산계]요, 그 中間[중간]을 타고 나간 것은 崑崙山系[곤륜산계]요, 여기서 다시 허다한 山脈[산맥]이 곁가지로 찢겨 나간 것이 있다. 이 山系[산계]와 山系[산계]와의 사이는 실로 蒙古系[몽고계] 人種[인종]의 大分派[대분파]를 지은 界限[계한]이니, 「히말라야」 쪽으로 붙어 나간 것은 「인도네시아」人[인]· 「말레이」人[인] 등 南部[남부] 種族[종족]을 이루고, 崑崙山[곤륜산] 쪽으로 붙어 나간 것은 支那人[지나인]의 大榦[대간]을 이루고, 北方[북방] 天山[천산] 쪽으로 붙어 나간 것은 東北亞細亞[동북아세아]의 蒙古[몽고] 正統[정통] 모든 種族[종족]을 이루었으며, 또 山系[산계]에 딸린 山脈[산맥]과 大山脈[대산맥]에 딸린 小山脈[소산맥]은 각기 같은 種族[종족]의 중에서 다시 여러 小部族[소부족]을 나누는 界限[계한]이 되었다. 또 同一[동일]한 本源[본원]에서 나와서 同一[동일]한 逕路[경로]를 말미 암 은이라도, 移徙[이사] 時代[시대]의 先後[선후]와, 文化[문화] 發達[발달]의 高低[고저]를 따라서 연방 새로운 中心[중심]을 가지는 各異[각이]한 部族[부족]들을 이루어서 여기저기 分布[분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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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一[일]만 년 전쯤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天山山系[천산산계]를 끼고 東[동]으로 策動[책동]하여 北[북]으로 기울어진 者[자]는 阿爾泰山脈[아이태산맥]· 杭愛山脈[항애산맥]· 雅布魯諾奧山脈[아포로낙오산맥]· 大興安嶺[대흥안령]을 지나서 黑龍江[흑룡강] 流域[유역]으로 하여 大震地域[대진지역]으로 들어오고, 그 南[남]으로 기울어진 者[자]는 祁連山脈[기련산맥]을 끼고 黃河[황하] 流域[유역]으로 나오다가 다시 두 갈래에 나뉘어서 北[북]으로 陰山山脈[음산산맥] 밑으로 하여 西喇木倫[서라목륜]을 지나서 또한 大震地域[대진지역]으로 들어오고, 南[남]으로 大行山脈[대행산맥]을 지나서 河流[하류]를 따라 山東地域[산동지역]으로 들어간 一大部族[일대부족]이 있었으니, 그 本國[본국]은 「」이라 하고, 그 氏系[씨계]는 「」 라하고, 그 族號[족호]는 「」이라고 일컬었다. 「」과「」과 「」은 다 天[천]을 意味[의미]하는 말이니, 무엇으로나 自己[자기]네는 天國[천국]으로서 나온 天帝[천제]의 族屬[족속]이로라 함이었다. 이른바 天國[천국]이란 것은 觀念上[관념상]에 있어서는 무론 天帝[천제]의 대궐인 저 碧虛太空[벽허태공]이지마는, 그 實際上[실제상] 意味[의미]는 天孫族[천손족]의 居住[거주]라 하여 天國[천국]으로 自認[자인]하던 「파미르 저쪽」의 種族的[종족적] 搖籃地[요람지]를 가리킴이었다. 「」은 후에 漢字[한자]로 「桓[환]」 혹 「韓[한]」이라 쓰고, 「」은 「大[대]」 혹 「夷[이]」(古音[고음] )라 쓰고, 「」은 「白[백]」 혹 「貊[맥]」(原音[원음] )이라고 쓰게 된 것이니, 이 種族[종족]은 시방 黃河[황하]와 黑龍江[흑룡강]을 휩싼 사이에 퍽 長久[장구]한 동안 꽤 자유로운 部族的[부족적] 分化[분화]를 이루었는데, 이렇게 自己[자기]네들의 퍼져 사는 地域[지역]을 통틀어 「」라 일컫고, 그중에서 東[동]으로 치우치는 지방은 別[별]로 「」 혹 「신」이라고 부르니, 「」는 후에 漢字[한자]로 渤海[발해]라 譯[역]한 것이요, 「신」은 「鮮[선]」「震[진]」「辰[신]」 등으로 譯[역]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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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과 및 天支[천지]로 믿는 高山[고산]의 信仰[신앙]은 널리 蒙古系[몽고계] 人種[인종], 특히 그 北系[북계] 種族[종족]의 사이에 행한 信仰[신앙]이지마는, 그중에서도 이 一支派[일지파]는 특히 天帝[천제]의 子[자]로 뽑혀서 人間[인간]의 治者[치자]가 되어 내려왔다고 믿음으로써, 스스로 일컫기를 「」 혹 「」 혹 「」 등 天人[천인]이로라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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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네의 나라는 대개 高山[고산] 巨嶽[거악]을 의지하여 排置[배치]되고, 그네의 생활은 이 山[산]을 天[천]으로 崇奉[숭봉]하는 祭祀[제사]로써 중심을 삼아서 자갸네의 있는 곳이면 변시 저절로 天國[천국]인 줄로 알았으며, 이 天國[천국]을 擴張[확장]하여 다른 未開[미개]한 地域[지역]과 民衆[민중]에게 미침이 자갸네들의 使命[사명]임을 믿었었다. 그러므로 자갸네들의 開拓[개척]하는 땅에는 흔히 「」이라는 이름을 붙이니, 「」은 「」의 略語[약어]요, 「」은 神明[신명]의 原義[원의]로 부터 轉滋[전자]하여 開發[개발]·滋蔓[자만]·光明[광명]의 義[의]를 가지게 된말이며, 후에 漢字[한자]로 譯[역]하여 「貊[맥]」「發[발]」「夫里[부리]」 등을 作[작]하고, 다시 訛[와]하고 略[략]되어 「番[번]」「方[방]」「夫餘[부여]」 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네들이 넓은 땅에서 아무 거리 낄 것 없이 한 군데 두 군데씩 「」이나 불려 나가는 生活[생활]은 平穩[평온]한 가운데서 여러 千年[천년]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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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제 오 장] 「」사람의 半島[반도] 南下[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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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域[진역]에 있어서 가장 高大[고대]한 山岳[산악]은 白頭山[백두산]이니, 이 山脈[산맥]과 그 主峰[주봉]은 진작부터 高山[고산]을 天視[천시]하는 이 民族[민족]의 崇仰[숭앙]하는 標的[표적]이 되어서 「」이란 이름으로써 이를 부르게 되었다. 「」은 神[신]으로 섬기는 山[산]을 일컫는 神聖[신성]한 이름이니, 天神[천신]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民族[민족]의 사는 곳에는 반드시 자갸네를 衛護[위호]하고 保育[보육]해 주는 줄을 생각하여 神[신]으로 尊崇[존숭]하는 山[산]이 있어, 이 법은 작은 곳에나 큰 곳에나 한결같이 行[행]하였는데, 여러 작은 「」을 거느리는 으뜸 되는 것에는 「」의 이름을 붙이니, 白頭山[백두산]은 무론 그때로 부터 그 뒤 언제까지나 한결같이 이 민족의 「」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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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후에 略[략]하여 또한 「」이 되고, 「」이 다시 略[략]하여 「」 혹 「」이 되니, 시방 朝鮮[조선] 山名[산명]의 「白[백]」「朴[박]」「비루」「불」 等字[등자]로 쓰는 者[자]는 總[총]히 옛적의 神山[신산]이던 者[자]요, 太白[태백]·長白[장백] 등으로 쓰는 者[자]는 다 「」의 略[략]하여 飜譯[번역]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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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民族[민족]의 新開拓[신개척]하여 移住[이주]하는 곳인 「」이 생기면, 그곳에는 으례 한 「」이 늘었다. 이렇게 「」과 「」으로써 旗幟[기치]를 삼는 文化[문화]의 임자인 「」人[인]의 걸음이 차차 白頭山[백두산]으로 부터 南[남]으로 向[향]할 때에 오래오래 컴컴에 잠겼던 밤의 半島[반도]가 차차 文化[문화]의 빛에 비추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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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島[반도]를 바로 뚫고 내려간 脊椎山脈[척추산맥]을 隔壁[격벽]으로 하여 이 移住[이주]의 團體[단체]는 저절로 두 줄기에 나뉘니, 그 東側[동측]을 끼고 내려간 支派[지파]는 豆滿江邊[두만강변]에서 이미 小白山[소백산](慶源[경원])· 白岳山[백악산](慶興[경흥])을 만들고, 다시 長白山[장백산](乃至[내지] 祖白山[조백산])을 만들어서 挹婁沃沮[읍루옥저]가 생기고, 다시 南下[남하]하여 太白山[태백산](洪原[홍원])· 白亦山[백역산]· 白階山[백계산]· 白雲山[백운산](並[병] 咸興[함흥])· 鼻白山[비백산](定平[정평])· 太博山[태박산](永興[영흥]) 등을 만들면서 玄菟[현도]· 東沃沮[동옥저](即[즉] 南沃沮[남옥저])가 생기고, 다시 南進[남진]하여 鐵嶺[철령]· 金剛山[금강산](並[병] 淮陽[회양])· 雪岳山[설악산](麟蹄[인제])· 五臺山[오대산](江陵[강릉], 이상은 다 白雲[백운] 또 그 비슷한 古名[고명]· 別名[별명]을 가진 山[산]) 등을 만들면서 臨屯[임둔]·濊[예]가 생기고, 太白山[태백산](奉化[봉화])· 八公山[팔공산](大邱[대구])· 白月山[백월산](慈仁[자인])· 金剛山[금강산](慶州[경주], 別名[별명] 柏栗[백률]) 등을 만들면서 辰韓[진한] 여러 部族[부족]이 생기고, 盆山[분산](金海[김해])· 白月山[백월산](昌原[창원])· 防禦山[방어산](咸安[함안])· 碧山[벽산](固城[고성])· 伽倻山[가야산](陜川[합천], 舊名[구명] 牛首[우수]) 등을 만들면서 弁韓[변한] 여러 部族[부족]이 생겼으며, 脊椎山脈[척추산맥]의 西側[서측]을 끼고 내려간 支派[지파]는 白川[백천](凞川[희천])· 白梁山[백량산](鐵山[철산])· 白馬山[백마산](義州[의주])· 白雲山[백운산](鐵山[철산])· 白碧山[백벽산](雲山[운산])· 大朴山[대박산](江東[강동])· 大聖山[대성산](平壤[평양]) 등을 만들면서 朝鮮[조선]·樂浪[낙랑]의 여러 部族[부족]이 생기고, 다시 南下[남하]하여 白雲山[백운산](谷山[곡산])· 正方山[정방산](黃州[황주])· 太白山[태백산](平山[평산])· 北嵩山[북숭산](海州[해주])· 聖居山[성거산]· 崧岳[숭악](開城[개성])· 白岳山[백악산](漢陽[한양]) 등을 만들면서 帶方[대방]이 생기고, 다시 南進[남진]하여 冠岳山[관악산](果川[과천])· 負兒山[부아산](龍仁[용인])· 白雲山[백운산](安城[안성])· 聖居山[성거산](稷山[직산])· 俗離山[속리산](報恩[보은], 別稱[별칭] 天王[천왕])· 白花山[백화산](泰安[태안])· 白月山[백월산](靑陽[청양])· 浮來山[부래산](扶餘[부여])· 鷄龍山[계룡산](公州[공주])· 彌勒山[미륵산](益山[익산])· 邊山[변산](扶安[부안])· 德裕山[덕유산](長水[장수])· 白雲山[백운산](光陽[광양]) 등을 만들면서 馬韓[마한] 여러 部族[부족]이 생기고, 南方[남방]의 「」인 頭流山[두류산]에 이르러 東西[동서] 兩派[양파]가 마침내 발끝을 서로 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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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全半島[전반도]가 이 民族[민족]의 生活地[생활지]를 이루어, 이르는 곳마다 그네의 「」을 보게 되기는 대개 한 四[사]천 乃至[내지][삼] 천년 쯤 前[전]의 일이니, 「」이 北方[북방]에 있어서는 흔히 夫餘[부여]로 轉[전]하고, 東韓[동한]에서는 伐[벌](혹 弗[불])로, 西韓[서한]에서는 「夫里[부리]」로 轉[전]하였는데, 무론 「」이 있는 곳에는 「」이 반드시 있어, 뒤에 흔히 白山[백산]으로써 일컫게 되었다. 그 중에서 太白山[태백산]은 朝鮮[조선]의, 長白山[장백산]은 沃沮[옥저]의, 金剛山[금강산]은 濊[예]의, 太白山[태백산]은 辰韓[진한]의, 彌勒山[미륵산]은 馬韓[마한]의, 伽倻山[가야산]은 弁韓[변한]의 각각 一封疆內[일봉강내]의 一時[일시] 「」이던 것이요, 北[북]의 白頭[백두]와 南[남]의 頭流[두류] 兩大山[양대산]은 「」 중의 「」으로 古今[고금]없이 半島[반도] 住民[주민]에게 靈聖[영성]스러운 높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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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章[제 육 장] 朝鮮[조선]과 壇君[단군]의 出現[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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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백]」民族[민족]의 「」에는 반드시 「얼검」이란 이가 있어서 民衆[민중]을 代表[대표]하여 天主[천주]께 祭祀[제사]드리고, 祈禱[기도]하고, 또 天主[천주]의 뜻을 물어서 民衆[민중]에게 가르쳐 주는 소임을 맡았다. 그때 世上[세상]에 있어서는 이 天帝[천제] 섬기는 일이 가장 高貴[고귀]한 일이므로, 이 宗敎的[종교적] 任務[임무]의 主張者[주장자]는 동시에 그 社會[사회]의 모든 일을 總察[총찰]하는 어른이었으니, 대개 그 時節[시절]에는 祭祀[제사]가 萬事[만사]의 根本[근본]이요, 다른 것은 總[총]히 여기 附屬[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헤어져 있는 「얼검」 들이 다 한가지로 우러러 首長[수장]으로 아는 「얼검」중의 「얼검」이 따로 있었으니, 그는 온 震域[진역] 안에 있는 「」山[산]의 으뜸인 大[대] 「」山[산]을 모시고 있어서 天帝[천제]의 直孫[직손]이라고 하는 一氏族[일씨족]의 「얼검」이었다. 이 어른을 「당굴 - 얼검」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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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王[만왕]의 王[왕]이신 「당굴 - 얼검」은 太伯山[태백산]을 依支[의지]하여 神宮[신궁]을 營造[영조]하고, 이 神宮[신궁]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를 만들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을 디디건대 「당굴 - 얼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다. 天上[천상]의 世界[세계]는 「桓[환]」이라 하는데, 그 나라님의 아드님 중에 桓雄[환웅]이라 하는 분이 天道[천도]를 人間[인간]에 펴고자 하시매, 나라님께서 太伯山[태백산]을 택하여 國土[국토]로 정하시고, 天符[천부] 三印[삼인]을 주어서 인간을 다스리게 하였다. 桓雄天王[환웅천왕]이 眷屬[권속][삼]천을 데리고 太伯山[태백산]에 내려오셔서 神壇[신단]을 모으고, 神政[신정]을 行[행]하면서 神市[신시]라고 일컬었었다. 여러가지 문화를 펴면서 一邊[일변] 「熊[웅]」氏[씨]· 「虎[호]」氏[씨] 등 허다한 異姓[이성]을 同化[동화]하여 가다가 位[위]를 그 아드님에게 전하사, 이 어른이 震域[진역]에서 비로소 「나라」의 體制[체제]를 세우시니, 이때에 朝鮮[조선]이란 이름이 비로소 생겼으며, 또 당신이 그 나라를 거느리는 이가 되니, 이 位號[위호]가 곧 「당굴 - 얼검」 이란 것이었다. 朝鮮[조선]은 「처(음)샌」 ── 곧 最初[최초]의 文明處[문명처]란 뜻이니, 別[별]로 「수신」(肅愼[숙신])이라 일컬음도 同一[동일]한 의미이며, 「당굴 - 얼검」은 후에 檀君王儉[단군왕검]이라고 쓰고, 略[략]하여 壇君[단군](又[우] 檀君[단군]· 天君[천군]· 登高[등고]) 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니, 譯[역]하면 天帝[천제]를 의미하는 古語[고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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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굴 - 얼검」의 새 나라는 곧 朝鮮國[조선국]과 朝鮮[조선] 人文[인문]의 始初[시초]이니, 시방의 白頭山下[백두산하] 松花江[송하강] 谷地[곡지]는 그 最初[최초]의 國土[국토]로 傳[전]하는 곳이요, 그 政事[정사]는 天上[천상]의 뜻을 받아서 風雨[풍우]를 고르게 하고 人事[인사]를 가지런하게 함이니, 이른바 人事[인사]란 것은 첫째 農業[농업]을 발달시킴이요, 醫療[의료]를 施設[시설]함이요, 運命[운명]을 指導[지도]함이요, 善惡[선악]을 審判[심판]하는 따위이었다. 一邊[일변]으로는 여러 子孫[자손]을 다시 各處[각처]로 分派[분파]하여서 각각 그 地方[지방]에서 작은 한 나라를 배판하고 그 곳의 「얼검」이 되게 하니, 이러하여 各處[각처]의 「」과 宗主[종주]되는 당굴의 나라와의 사이에는 血族的[혈족적]으로는 大小家[대소가]의 관계를 가지고, 信仰上[신앙상]으로는 本支流[본지류]의 聯結[연결]이 되어서 渾然[혼연]한 一大[일대] 집안을 이루었었다 한다. 모든 일이 單純[단순]하고 또 생활이 便易[편이]한 世上[세상]이매, 극히 簡素[간소]하고 또 平穩[평온]한 가운데 一[일]천여 년의 「당굴」時代[시대]가 經過[경과]하니, 時間[시간]은 長久[장구]하지마는 누구라는 個人[개인]의 이름의 전함이 없음은 記憶[기억]에 머무를 만한 큰 事變[사변]과 그 中心人物[중심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요, 다만 文籍[문적]이 없음만에 말미암은 것 아니었다. 壇君時代[단군시대]는 퍽 더 오랜 것이지마는, 公用[공용] 紀元上[기원상]으로는 隆熙[융희] 庚戌[경술]을 距[거]하기 四二四三[사이사삼]년 전으로 부터 무릇 一○四八[일영사팔]년의 間[간]이니(西曆[서력] 紀元前[기원전] 二三三三[이삼삼삼] ∼一二八七[일이팔칠]), 西隣[서린] 支那[지나]에서는 그동안 唐[당]·虞[우]·夏[하]·殷[은]의 四王朝[사왕조]를 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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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章[제 칠 장] 扶餘[부여]와 根本部[근본부] 南移[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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壇君[단군]의 뒤에는 夫婁[부루]라고 일컫는 이가 朝鮮[조선]을 거느려 다시 한 時代[시대]를 이루니, 옛적에는 國土[국토]와 時間[시간]을 人倫[인륜]에 比擬[비의]하여 앞선 것을 父[부]라 하고, 뒷선 것을 子[자]라 하는 버릇이 있으므로, 이 事實[사실]을 古傳[고전]에는 壇君[단군]의 父[부]인 後[후]를 夫婁[부루]인 子[자]가 繼承[계승]하였다고 말하였다. 夫婁[부루]는 본디 「불」이니, 古語[고어]에 神聖[신성][우] 高貴[고귀]를 의미 하는 것으로, 또한 君主[군주]의 一[일] 稱呼[칭호]이요, 뒤에는 君王[군왕] 뿐 아니라 貴族[귀족]이나 高官[고관]의 名號下[명호하]에도 붙여 神冑[신주] 聖孫[성손]의 의미를 가지게 한 것이다. 夫婁時代[부루시대]에 들면서 社會[사회]의 발달이 점점 速度[속도]를 더하게 된 中[중]에, 특별히 顯著[현저]한 現象[현상]은 經濟的[경제적] 事情[사정]에 끌려서 國土[국토]의 중심이 새로운 方向[방향]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니, 夫婁時代[부루시대]는 곧 文化[문화]의 중심이 山上[산상]으로 부터 漸次[점차]로 江邊[강변]으로 옮기는 期間[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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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初[원초]의 「」들은 一[일]은 宗敎的[종교적] 理由[이유]와, 또 하나는 防護上[방호상] 必要[필요]로 말미암아서 미상불 高山[고산]과 深谷[심곡]에 많았었다. 그러나 狩獵[수렵]이 생활의 主[주]되는 方法[방법]이던 때에는 山谷[산곡]이 오히려 便利[편리]하였을지도 모르지마는, 사회가 자라고, 民衆[민중]이 늘고, 농업이 커짐을 따라서 深高[심고]한 곳은 차차 不便[불편]이 많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中心[중심]이 차차 水原[수원]으로 부터 流域[유역]을 좇아 내려가서 水邊[수변] 平衍[평연]한 곳이 都邑[도읍]· 聚落[취락]을 짓게 되니, 그전에 나라가 높은 데 있기 때문에 「재」라 하고, 깊은 데 있기 때문에 「골」이라 부르던 것이, 뒤에 차차 「벌」이라고 일컬리는 벌어진 平野[평야], 곧 벌판으로 나라가 옮겨진 까닭이다. 이 「벌」이 北方[북방]에서는 뒤에 扶餘[부여]로 轉[전]하고, 다시 略[략]하여 「배」로 일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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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론 自然[자연]의 힘에 依賴[의뢰]함이 크던 時代[시대]이매 地利[지리]를 두터이 탄 이가 가장 優强[우강]한 勢力[세력]을 가지게 되니, 허다한 扶餘[부여]의 中[중]에 이런 곳 다섯이 생겼다. 松花江[송화강]을 낀 北扶餘[북부여]로 부터 鴨綠江[압록강] 谷地[곡지]의 卒本[졸본](西[서]) 扶餘[부여], 豆滿江[두만강] 谷地[곡지]의 東扶餘[동부여], 大同江[대동강] 流域[유역]의 王險[왕험](中[중])扶餘[부여], 漢江[한강]·錦江[금강]의 사이의 南扶餘[남부여]가 그것이니, 이 五扶餘[오부여]가 중심이 되어 여러 작은 「」 들이 차차 그리로 統攝[통섭]되어 가는 것이 夫婁時代[부루시대]의 大勢[대세]이었으며, 이밖에 北[북]의 遼河[요하]에는 貉人[맥인]의 一扶餘[일부여]와, 南[남]의 洛東江[낙동강]에는 辰人[진인]의 一扶餘[일부여]가 있어, 五扶餘[오부여] 이외의 勢力[세력]이 그리로 吸取[흡취]되는데, 前者[전자]는 異民族[이민족]에게 부대끼는 장판이 되어서 마침내 큰 團體[단체]를 形成[형성]하지 못하고, 後者[후자]는 세월과 한가지로 그 發達[발달]이 자못 顯著[현저]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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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扶餘[오부여]의 中[중]에서도 가장 高貴[고귀]한 傳統[전통]과 優强[우강]한 세력을 가지는 者[자]가 宗敎[종교]의 배경과 經濟[경제]의 保障[보장]에 의하는 특수한 尊榮[존영]을 누리어 居然[거연]히 宗主國[종주국] 노릇을 하는 법인데, 初國[초국]이란 뜻과 한가지로 首邦[수방]을 의미 하는 「朝鮮[조선]」 이란 國號[국호]는 이 地位[지위]를 가진 이의 물건이 되었었다. 처음에는 이 榮譽[영예]가 國祖[국조]의 發祥地[발상지]인 太伯山[태백산]을 등진 관계로 北扶餘[북부여]에게 붙이었더니, 「白[백]」民族[민족]의 발전이 南[남]으로 향할수록 그 前進[전진]의 要衝[요충]이요 分布[분포]의 中心點[중심점]인 大同江邊[대동강변]의 王險扶餘[왕험부여]가 부쩍 고개를 쳐들고, 더욱 北方[북방]에서처럼 사나운 異民族[이민족]의 侵陵[침릉]을 당하는 일이 거의 없고, 도리어 貿易[무역]의 利[리]와 文化[문화]의 도움을 가지고 오는 西隣[서린] 支那人[지나인]의 平和的[평화적] 移住[이주]에 여러 가지 큰 힘을 장만하기 때문에, 그네의 物的[물적]· 心的[심적]의 모든 발달이 동무중에 우뚝하여져서 「朝鮮[조선]」의 地位[지위]가 어느덧 中[중](王險[왕험])扶餘[부여]에게로 돌아가게 되고, 이로 부터 大同江[대동강] 유역의 扶餘[부여]가 朝鮮歷史[조선역사]의 發展[발전]해 나가는 主軸[주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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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章[제 팔 장] 지朝鮮[조선]의 卓越[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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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陽[태양]을 시방 말로는 「해」라 하지마는, 옛날에는 「」라 하니, 「」는 시방 크다는 「크」와 같은 말로, 무릇 高大尊貴[고대존귀]한 것을 부르는 이름이요, 太陽[태양]도 이런 뜻으로 「」라 이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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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백]」民族[민족]은 자갸 民族[민족]의 本源[본원]이 통히 天國[천국]으로서 나오고, 그 主權者[주권자]는 특히 天主[천주]의 直系子孫[직계자손]임을 믿었는데, 그때의 天主[천주]는 시방과 같이 抽象的[추상적]의 하느님이 아니라, 光明[광명]과 熱力[열력]으로써 天地[천지]를 主宰[주재]하는 줄로 안 太陽[태양] 저것이니, 그러므로 자갸네의 主權者[주권자]가 天主[천주]의 子孫[자손]이라 함은 곧 日[일]의 아들이라 함이요, 「白[백]」民族[민족] 古國[고국]의 創業主[창업주]들이 總[총]히 日精[일정]으로 感生[감생]되어 天帝子[천제자](혹 天王[천왕]·天王郞[천왕랑])로 稱呼[칭호]되었음은 대개 이런 出處[출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日子[일자]를 古語[고어]로 읽으면 「지」가 되니, 지는 변시 天帝子[천제자]의 原語[원어]이며, 「당굴」이나 「얼검」이나 「불」이나 한가지로 그때에 임금을 부르던 한 이름이며, 또 「지」는 子裔[자예]를 의미하는 동시에, 種族[종족]· 姓氏[성씨] 등의 轉義[전의]를 가져서, 「지」가 뒤에는 王號[왕호]로 부터 王[왕] 一族[일족]의 種姓[종성]을 稱謂[칭위]하는 말을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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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義上[어의상]으로 보면 古代[고대]의 王者[왕자]나 王族[왕족]은 總[총]히 「지」를 稱謂[칭위]할 수 있을 것이나, 夫婁時代[부루시대]에 와서는 차차 用途[용도]가 局限[국한]되어서 「」라는 姓[성]도 北扶餘[북부여]와 王險扶餘[왕험부여] 두 군데서나 쓰게 되고, 그중에도 「 지」 란 王號[왕호]는 新朝鮮[신조선]인 王險扶餘[왕험부여]에서만 쓰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大同江[대동강] 流域[유역]은 支那[지나] 중에서도 古文明地[고문명지]인 山東半島[산동반도]로 부터 살기 좋음을 取[취]하여 건너오는 支那人[지나인]들의 모여드는 한복판이므로, 漢土文化[한토문화]의 影響[영향]이 일찍부터 현저하여, 言文[언문]과 制度[제도]와 乃至[내지] 民俗[민속]· 傳說[전설]까지도 彼此[피차]의 混淆[혼효]가 많게 되니, 「처샌」이란 國號[국호]에 朝鮮[조선]이란 漢字[한자]를 充對[충대]함도 이때의 일이요, 「」이란 古語[고어]를 「分黎[분려]」로 譯[역]하고, 그것이 約[약]하여 「平[평]」이 되고 略[략]하여 「列[열]」이 되고, 다시 轉[전]하여 樂[락]이 되고(齊魯間[제노간]의 水[수]에 濼[락]이 있음으로써 脫來[탈래]한 것), 일변 扶餘[부여]의 語形[어형]에 대하여 「浿[패]」의 字[자]를 對[대]하게 된 것이 다 이때 이네의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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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支那[지나]에는 옛날 殷[은]이란 나라의 末年[말년]에 箕子[기자]라 하는 王族[왕족]이요 重臣[중신]이요 또 聖人[성인]인 이가 周[주]라는 新王朝[신왕조]에 節[절]을 굽히기가 싫어서 東[동]으로 外國[외국]에 逃入[도입]하였다는 傳說[전설]이 있더니, 文學[문학]으로써 朝鮮[조선]에 來仕[내사]하던 支那人[지나인]들이 「지」와 箕子[기자]의 音相似[음상사]하고, 그 建國[건국] 年代[연대]의 비스름하고, 또 朝鮮側[조선측] 古傳[고전]의 변변치 아니한 것을 좋은 일만 여겨서, 朝鮮[조선]·支那[지나]의 사이에 예부터 特殊[특수]한 交涉[교섭]이 있음을 立證[입증]하여, 自己[자기]네들의 地位[지위] 確保[확보]에 便宜[편의]하게 하자는 主見[주견]으로서, 「지」를 箕子[기자]에 附會[부회]하게 되었는데, 朝鮮[조선]의 「 지」 들도 域內[역내]에 더부살이하는 支那人[지나인]을 統制[통제]하는 上[상]으로나, 또 貿易[무역]과 文化[문화]를 받아 오는 支那[지나] 本土[본토]에 대한 便宜[편의] 獲得上[획득상]으로나, 그것이 또한 해롭지 아니하므로, 有意無意[유의무의]하게 그런 체하여, 드디어 箕子[기자]의 假名[가명]이 「지」의 實體[실체]를 가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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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味[토미]의 기름진 平野[평야]와, 流勢[유세]의 느린 大水[대수]와, 平和[평화]의 이어나가는 許久[허구]한 歲月[세월]을 가지고서 「 지」朝鮮[조선]의 産業[산업]은 長足[장족]의 進步[진보]를 이루었다. 田蠶[전잠]과 織作[직작]이 具備[구비]하게 되었다. 生活[생활]의 豐裕[풍유]를 따라서 道義[도의]와 禮俗[예속]이 크게 발달되고, 또 배편마다 들어오는 支那文化[지나문화]를 攝取[섭취]하여서 人文的[인문적] 發達[발달]은 불일 듯 하였다. 震域[진역]에 나라다운 나라의 始初[시초]는 실로 「 지」朝鮮[조선]에 있었다. 倨傲[거오]하고 스스로 尊大[존대]하는 支那人[지나인]도 大人[대인]· 君子[군자]· 善人[선인]· 仁賢之邦[인현지방]이란 讃辭[찬사]를 아끼지 않을 만한 것이 있었다. 특히 밤에 문을 닫을 필요가 없도록 盜賊[도적]이란 事實[사실]이 없음과, 男女[남녀] 風紀[풍기]의 嚴正[엄정]이 確保[확보]되어, 그 家庭生活[가정생활]의 깨끗한 것과는 크게 外人[외인]의 注意[주의]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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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九章[제 구 장] 더부살이의 북새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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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婁時代[부루시대]의 震域[진역]에 있어서 가장 높은 文化[문화]와, 많은 富力[부력]과 편리한 生活條件[생활조건]을 가진 곳이 大同江[대동강] 유역 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視線[시선]이 이리로 집중되고, 또 福土[복토] 찾는 이의 발길도 대개 이리로 향하여 大同江[대동강] 차지가 當代[당대]에 卓越[탁월]해지는 最大[최대] 條件[조건]이 되매, 한참 동안의 部族的[부족적]과 民族的[민족적]의 競爭[경쟁]은 總[총]히 大同江[대동강]을 목표로 하여 演出[연출]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西隣[서린] 支那[지나]는 이른바 戰國時代[전국시대]를 前後[전후]로 하여 전쟁이 끊이지 아니하고, 또 間間[간간]이 큰 饑饉[기근]이 덤비어서, 부대끼다 못한 人民[인민]이 사방으로 離散[이산]할 때에, 그 東北方[동북방] 流民[유민]은 農業[농업]과 平和性[평화성]으로 소문난 震域[진역], 특히 大同江[대동강] 유역으로 꾀어 듦이 自然[자연]한 趨勢[추세]이었다. 또 貿易[무역]의 利[리]와 조선에 오면 優待[우대]받는 등 現實的[현실적] 理由[이유]와, 인간의 福地[복지]는 東方[동방]에 있다는 傳統的[전통적] 信念[신념]은 그네의 東方[동방] 進出[진출]을 크게 誘導[유도]하여, 山東半島[산동반도]로서 風帆[풍범]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그 東方[동방] 齊魯[제노]와, 陸路[육로]로 薊門[계문]을 나서서 遼野[요야]를 뚫고 나오는 그 北方[북방] 燕趙[연조]의 流民[유민] 떼가 더럭더럭 大同江[대동강]을 바라고 들이밀렸다. 그리하여 이네의 더부살이 聚落[취락]이 총총들이로 생기고, 民族的[민족적] 衝突[충돌]의 端緖[단서]가 이 때문에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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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지나]의 歸化人[귀화인]들은 아무러했든지, 그때의 本土人[본토인]에 비하여 文化的[문화적]으로 優勝[우승]한 사람들이매, 이네의 侵入[침입]이 朝鮮文化[조선문화]의 變通[변통]에 대한 一大刺戟[일대자극]인 동시에, 文學[문학]과 技術[기술]로써 「지」王朝[왕조]의 벼슬사는 이도 적지 아니하여, 그 社會的[사회적] 地位[지위]와 政治的[정치적] 勢力[세력]이 차차 만만치 아니하게 되어 갔다. 처음에야말로 平安[평안]히 살게 된 것만을 즐겨하였지마는, 人群[인군]이 慾心[욕심]과 한가지 늘매, 政治的[정치적] 무슨 계획이 그중으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더니, 이 機運[기운]이 한창 爛熟[난숙]한 夫婁時代[부루시대]의 末期[말기]에 이르러 一大[일대] 陰謀家[음모가]가 나와서, 마침내 重大[중대]한 政治的[정치적] 變革[변혁]을 만들어 내었다. 始祖[시조] 「지」로 부터 四○[사영]餘世[여세]를 지낸 準王[준왕]의 時節[시절]에, 漢高祖[한고조]의 治下[치하]에 있는 燕[연]이 叛逆[반역]을 꾀하다가 滅亡[멸망]하매, 그 國人[국인] 衛滿[위만]이란 者[자]가 亡命[망명]하여 千餘人[천여인]의 黨[당]을 거느리고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들어와서, 容儀[용의]와 服色[복색]까지 白民[백민]의 俗[속]으로 고쳐 信順[신순]의 誠[성]을 보이면서 準王[준왕]에게 降服[항복]하고, 西界[서계]에 있어서 朝鮮[조선]의 藩屛[번병] 노릇 하기를 願[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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準王[준왕]이 그 亡命[망명]하여 갈 바 없는 사정을 斟酌[짐작]하고, 또 恩義[은의]로써 기르면 설마 어떨 것 아니리라 하여, 北方[북방] 근심을 잊으려던 김에 그 所請[소청]을 許施[허시]하여 博士[박사]를 시키고 淸川江[청천강] 부근 百里[백리]의 地[지]를 封[봉]하여 西邊[서변]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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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淸川江[청천강]으로 부터 鴨綠江[압록강]의 사이에는 그전부터 支那[지나]로서 避亂[피난]해 들어온 사람 數萬口[수만구]를 두었으니, 滿[만]의 眞意[진의]는 실로 이 勢力[세력]을 이용하자 함이었다. 滿[만]이 한참은 信寵[신총]을 얻느라고 忠勤[충근]을 表[표]하기도 하였지마는, 漢[한]의 亡黨[망당]을 誘引[유인]함이 많아지고, 또 眞番[진번]·臨屯[임둔] 기타의 朝鮮[조선] 對立者[대립자]를 和同[화동]하여서 羽翼[우익]이 이미 이루매, 거짓 사람을 朝廷[조정]에 보내어서 漢兵[한병]이 一○道[일영도]로 침입하니 들어가 宿衛[숙위]하겠다 하고, 軍士[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侵伐[침벌]하매, 준비 없는 準王[준왕]이 싸우다가 對敵[대적]하지 못하고, 그 左右[좌우] 宮人[궁인]을 거느리고 海路[해로]로 韓地[한지]로 가서 韓王[한왕]이라고 일컫고, 그 故地[고지]에는 衛滿朝鮮[위만조선]의 出現[출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盜賊[도적]으로 盜賊[도적]을 막고, 또 집안 싸움에 外人[외인]의 힘을 빌다가, 덕을 보기는새로에 도리어 큰 逢變[봉변]을 한 朝鮮[조선] 사람의 첫 經驗[경험]이요, 이 뒤 四[사], 五百年[오백년]까지 나가는 大江[대강] 爭奪戰[쟁탈전]의 긴 「필름」중에 가장 애달픈 場面[장면]이 되는 民族的[민족적] 汚辱[오욕]이다. 그러나 勢力[세력]의 강한 더부살이를 너무 많이 붙인 당연한 歸結[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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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婁時代[부루시대]는 「지」朝鮮[조선]의 興亡[흥망]으로써 歷年[역년]을 삼으니, 紀元[기원] 一二一二[일이일이]년으로 부터 二一四○[이일사영] 년까지에 當[당]한다(西紀前[서기전] 一一二二[일일이이]∼同[동] 一九四[일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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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章[제 일영 장] 衛滿[위만] 新王朝[신왕조]의 影響[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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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滿朝鮮[위만조선]의 出現[출현]은 여러 가지로 朝鮮史上[조선사상] 初有[초유]의 大事件[대사건]이었다. 國土[국토]의 處女性[처녀성]이 더러워진 것도 큰일이겠지마는, 그보다도 더 이때문에 생긴 歷史的[역사적] 波動[파동]에 중대한 意義[의의]가 있었다. 첫째는 朝鮮人[조선인]에게 民族的[민족적] 感情[감정]이 비로소 생겼음이니, 이때까지의 싸움과 겨눔으로 말 하면 部族[부족]들끼리에 그쳤고, 설사 異民族[이민족]하고 相持[상지]가 생긴다 해도 局部的 小派瀾[국부적소파란]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러니, 衛滿[위만]의 일은 오랜 國本[국본]이 처음으로 흔들리고 生活[생활] 自由[자유]의 主客關係[주객관계]가 뒤집힐 뿐 아니라, 백췌 딴판의 治制[치제]가 온갖 傳統[전통]을 無視[무시]하게 된 일이매, 그네들의 가슴에 지 내 보지 못 하던 一種[일종]의 心理[심리]가 激發[격발]되지 아니치 못하니, 이것이 그로 하여금 氏族[씨족]·部族[부족] 이외에 民族[민족]이란 것이 있 음을 가르쳐 준 始初[시초]이다. 둘째는 질펀한 땅에 성긋하게 헤어졌던 「白[백]」民族[민족]의 세력을 톡톡하게 엉기어들게 하는 기회를 주었 음이니, 이 때까지로 말하면 北[북]으로 黑龍江[흑룡강]으로 부터 南[남]으로 瀚海[한해]에 이르는 萬里大域[만리대역]에 극히 稀薄[희박]한 統制力[통제력]으로 하늘이나 섬기고 배나 불리면서 살았었지마는, 異民族[이민족]의 주먹이 腹心[복심]을 질러서 땅이 南北[남북] 두 동강이에 나면서 그 脅威[협위]가 부근의 모든 部族[부족]에게 미치매, 이때까지 모르던 社會的[사회적] 緊張[긴장]의 필요를 느끼어 民族的[민족적] 感覺[감각]이 部族的[부족적] 結束[결속]까지를 탄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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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중대한 일은, 「지」朝鮮[조선]의 南遷[남천]에 因[인]하여 南方[남방] 韓地[한지]의 開發[개발]이 촉진된 것이니, 이때까지의 韓地[한지]로 말하면, 北方[북방]으로 밀려 내려오는 部族[부족]의 쓰레기통 비슷하여 모든 것이 零星[영성]하고 幼稚[유치]하더니, 全[전] 「白[백]」民[민] 중의 最高[최고] 權威[권위]이던 「지」王朝[왕조]의 南方[남방] 移轉[이전]은 優秀[우수]한 人物[인물]과 文化[문화]의 一時[일시] 流入[유입]을 보게 되고, 겸하여 이 波動[파동]이 南方[남방]의 구석구석까지 傳及[전급]하여, 잠잠하던 嶺湖[영호] 地方[지방]이 頓然[돈연]히 活氣[활기]를 띠게 되었다. 韓地[한지]에 나라다운 나라의 생김과, 朝鮮文化[조선문화]의 正統[정통]이라고 볼 것이 南方[남방]에 많이 떨어졌음은 대개 「 지」의 옮겨옴으로 부터 비롯한 것이다. 또 한덩어리와 외줄기로 내려오던 「白[백]」民族[민족]과 朝鮮國[조선국]과 壇君文化[단군문화]가, 거연히 南北[남북] 兩部[양부]에 나뉘어 多少[다소]의 異色[이색]을 띠게 된 것도, 朝鮮[조선]의 허리통인 大同江[대동강] 유역에 異民族[이민족]의 勢力[세력]이 이로 부터 한참 동안 가로막고 있어서 各別[각별]한 발달을 이루게 한 것과, 朝鮮[조선]인 中扶餘[중부여]의 衰移[쇠이]로 因[인]하여 扶餘[부여]의 中心[중심]이 없어지자 한쪽에서 곱닿게 지내온 北扶餘[북부여]의 實力[실력]이 부쩍 늘어서 「白[백]」民族[민족]의 根本勢力[근본세력]이 다시 한번 北[북]으로 돌아간 듯한 것 등은 다 衛滿[위만]의 變[변] 뒤에 생긴 注意[주의]할 現象[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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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滿[위만]의 朝鮮[조선]이란 것은 要[요]하건대 朝鮮[조선] 本土人[본토인]과 支那人[지나인]과의 聯立國[연립국]이었다. 政治的[정치적] 能力[능력]으로는 미상불 支那人[지나인]이 얼마 낫지마는, 民族的[민족적] 勢力[세력]으로는 물론 朝鮮[조선] 本土人[본토인]의 對敵[대적]이 아니니, 다만 權力[권력]만으로 이 많은 根基[근기]있고 反感[반감]품은 異民族[이민족]을 거느려 감은 미상불 그네의 큰 頭痛[두통]거리였다. 이 新局面[신국면]에 대한 反抗運動[반항운동]은 다만 純然[순연]한 民團[민단] 편에만 있은 것 아니라, 衛氏[위씨]와 좋아하는 듯하고 또 그의 벼슬까지 한 本土人[본토인]의 協同的[협동적] 分子[분자]의 중에서 더 根柢[근저]있는 生長[생장]을 보였었다. 滿[만]이 처음 「지」王朝[왕조]를 쫓아내고, 朝鮮[조선]의 이름을 무릅써 王險[왕험]에 都[도]를 定[정]하고 새 王朝[왕조]를 세우매, 즉시 漢[한]에 欵[관]을 納[납]하여 그 外臣[외신]이 되어서 東方[동방] 여러 部族[부족]의 漢土[한토] 侵擾[침요]를 막기로 自擔[자담]하고, 그 兵威[병위]와 財物[재물]을 얻어서 眞番[진번]·臨屯[임둔] 등을 服屬[복속]시켜서 얼른 方[방] 數千里[수천리]의 大國[대국]을 만드니, 한 때의 氣勢[기세]는 壯[장]하지 않은 것 아니었으나 엉터리뿐이요, 內實[내실]은 그의 特長[특장]이 財利[재리]와 榮爵[영작]같은 詭譎[궤휼]로써 本土[본토]의 여러 部族[부족]을 얽어 붙인 것이매, 머지 아니하여 破綻[파탄]이 內部[내부]로서 생길 것은 애적부터 決定[결정]된 일이라고도 할 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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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章[제 십일 장][한]나라 四郡[사군]의 幻滅[환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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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滿[위만]의 新王朝[신왕조]는 이렇게 不實[부실]한 基盤[기반]의 위에서 아들을 거쳐 孫[손]인 右渠[우거]에게로 넘어갔다. 새 世界[세계]가 배포 되었다 하매, 漢[한]으로서 亡歸[망귀]하는 무리가 와짝 늘고, 이럭저럭 財物[재물]도 퍽 가멸해지며, 驕虐[교학]이 생겨서 漢[한]에 대하여 約條[약조]를 지키지 아니할 뿐 아니라, 더욱 南震[남진] 여러 나라와 漢[한]과의 貿易[무역] 길을 막아 놓고 그 이익을 壟斷[농단]하매, 本土人[본토인]과 漢[한]의 朝廷[조정]에서 다 怨憤[원분]으로써 대할밖에 없었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억지로 누른 本土人[본토인]의 불평은 爆發[폭발]할 기회만 기다리는 참인데, 그 뒷배 보는 자리와 이렇게 어긋남을 보매, 本土人[본토인]들은 좋다꾸나 하고 이 틈을 타서 자갸네의 宿志[숙지]를 이루려 하였다. 그리하여 本土人[본토인]과 漢廷[한정]의 사이에 얼마쯤 默契[묵계]가 생긴 결과는, 兩國間[양국간]의 殺傷事件[살상사건] 남을 기회로 하여 漢[한]으로 부터 水陸[수륙] 兩路[양로]로 大軍[대군]을 發[발]하여 王險城[왕험성]을 攻破[공파]하게 되었다. 王險城[왕험성]이 워낙 險固[험고]하고 또 그 水陸[수륙] 兩軍[양군]의 사이에 軋轢[알력]과 猜忌[시기]가 있어 싸움은 의외로 길게 끌었다. 필경은 本土人[본토인]으로서 右渠[우거]의 治下[치하]에서 將相[장상] 노릇을 하던 路人[노인]·韓陰[한음](一作[일작][도])· 參[삼]· 王唊[왕겹] 등이 漢[한]으로 더불어 通謀[통모]하여 內部[내부] 로써 攪亂[교란]을 힘써, 마침내 右渠[우거]와 및 그 黨與[당여]를 죽여서 衛氏[위씨]의 王朝[왕조]를 覆滅[복멸]하였다. 衛氏朝鮮[위씨조선]은 紀元[기원] 二一四○[이일사영]년으로 부터 二二二六[이이이육] 년까지, 歷年[역년]이 무릇 八七[팔칠]년이었다(西紀前[서기전] 一九四[일구사] ∼一○八[일영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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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衛氏[위씨] 王國[왕국]의 없어진 자리에는 곧 漢[한]으로 부터 郡縣[군현]을 두니, 모처럼 路人[노인] 등 여러 愛國者[애국자]의 光復運動[광복운동]도 남의 힘을 빌어 한 탓으로, 마침내 범을 쫓고 승냥이를 맞 아들 인격이 되고, 얻어 가진 것은 이 몇 사람이 漢[한]으로 부터 侯[후]의 爵賞[작상]을 탐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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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朝鮮人[조선인]의 노력은 다른 方面[방면]에서 적지 않게 갚아졌었다. 이렇게라도 하여 정군산 같은 衛氏[위씨]를 들어낸 것은, 첫째 그네에게 政治的[정치적]과 外交的[외교적]으로 귀중한 새 體驗[체험]이 되었으며, 둘째 王險城[왕험성]의 沒落[몰락]으로 因[인]하여 大同江[대동강] 유역에 몰려 있었다 할 만한 支那[지나]의 人物[인물]·文化[문화]가 기왕보다 더 활발한 形勢[형세]로써 東南[동남] 兩方[양방]의 먼 데까지 散布[산포]하는 기회를 지었었다. 더욱 歷谿卿[역계경]을 先頭[선두]로 한 一團[일단]과 같이 數千人[수천인]씩의 큰 移民團[이민단]이 시방의 慶尙道[경상도] 南端[남단]까지도 이동해 나가서, 그 餘波[여파]가 日本[일본]에까지 미친것은, 미상불 東方史上[동방사상]의 큰 變運[변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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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渠[우거]를 집어치운 漢[한]의 임금은 功業欲[공업욕]이 대단한 武帝[무제]라, 戰勝[전승]의 餘威[여위]로써 東方[동방]의 富力[부력]을 吸收[흡수]할까 하여, 衛氏[위씨]의 舊地[구지]인 시방 平安道[평안도]의 大部[대부], 黃海道[황해도]의 全幅[전폭]과 京畿道[경기도]의 一部[일부]에는 樂浪[낙랑]이란 郡[군]을 두고, 다시 그 近旁[근방]의 地[지]를 계획 중에 넣어서 沃沮[옥저]의 地[지]인 시방 咸鏡南道[함경남도]의 大部[대부]에는 眞番郡[진번군]을 두고, 그 南[남]인 咸南[함남]의 南端[남단]에서 平北[평북]의 北半[북반]을 넣고, 佟佳江[동가강] 유역까지 걸쳐서는 玄菟郡[현도군]을 두고, 濊[예]의 地[지]인 시방 江原道[강원도]의 地[지]에는 臨屯郡[임둔군]을 두니, 이것이 이른바 漢[한]의 四郡[사군]이다. 그러나 團結[단결]과 反抗[반항]이 어떻게 큰 威力[위력]을 發揮[발휘]하는 줄을 實驗[실험]한 本土人[본토인]들은 衛氏[위씨] 이래로 練磨[연마]하고 長育[장육]해 가진 民族的[민족적] 反撥力[반발력]으로써 기약지 아니하고 一致行動[일치행동]을 취하여, 四方[사방]으로서 漢[한]의 세력을 排除[배제]하매, 南方[남방]에 있는 眞番[진번]·臨屯[임둔] 兩郡[양군]은 빈 이름에 그치다가, 그나마 二六[이육]년 뒤에는 아주 撤廢[철폐]치 아니치 못하고, 玄菟郡[현도군]도 또한 沃沮[옥저]의 地[지]에서 撤退[철퇴]하여 渾河[혼하]의 上流[상류]로 郡治[군치]를 옮기고, 오직 漢人[한인]의 세력이 뿌리박힌 樂浪郡[낙랑군]만 한참 옛 面目[면목]을 保維[보유]하여 南震[남진] 여러 民邦[민방]의 交涉[교섭]을 맡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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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二章[제 십이 장] 大同江[대동강] 中心[중심]의 時代[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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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지나]의 交通[교통]은 貿易[무역]과 文化[문화] 輸入[수입]으로 그때 震域[진역] 諸國[제국]의 生活發展上[생활발전상] 絶對[절대] 必要事[필요사]니, 林産[임산]·水産[수산]과 武器[무기] 등을 가져다가, 그 대신 儀器[의기]· 服飾[복식] 등 奢侈品[사치품]을 얻어 옴이 常例[상례]이었다. 그런데 직접으로 漢[한] 遼東郡縣[요동군현]과 交易[교역]도 하되 대개는 손쉬운 樂浪郡[낙랑군]을 거쳐 하니, 이러므로 樂浪[낙랑]은 此方[차방]에 대한 總交涉衙門[총교섭아문]·總稅務司[총세무사]를 兼[겸]하여, 그 威權[위권]이 자못 크고 또 財寶[재보]의 淵叢[연총]이 되어서 그 질번질번함이 비길 데 없었다. 樂浪太守[낙랑태수]를 古史[고사]에 혹 樂浪王[낙랑왕]이라 함은 그 風力[풍력]이 王[왕]만하였기 때문이었다. 樂浪郡[낙랑군]에는 매양 二○[이영] 內外[내외]의 屬縣[속현]이 있었으나, 그 中心[중심]은 시방의 平壤[평양] 부근으로, 옛 國號[국호]를 취하여 朝鮮[조선]이라 하던 城[성]이니, 때를 따라 江[강]의 南北[남북]으로 城[성]을 옮아다니기는 하였으나 언제든지 붙들고 놓지 못한 것은 大同江[대동강]이었다. 원체 開明[개명]도 오래된 곳이어니와, 겸하여 支那[지나] 本國[본국]에 대한 交通上[교통상]의 利便[이편]과 地勢[지세]가 險固[험고]하여, 防禦上[방어상] 여러 長處[장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樂浪郡[낙랑군]이 있기까지 朝鮮歷史[조선역사]의 中心[중심]은 依然[의연]히 大同江[대동강] 中心[중심]의 時代[시대]를 지었으니, 近來[근래] 續續[속속]히 發掘[발굴]되는 樂浪時代[낙랑시대]의 遺蹟[유적]·遺物[유물]을 보면, 그때 그네의 生活狀態[생활상태]가 어떻게 富裕[부유]하고 奢麗[사려]하였음을 짐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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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平壤市街[평양시가]의 西[서]인 箕子井田[기자정전]이라고 전하는 古都市[고도시]의 遺蹟[유적]인 듯한 곳에서 南[남]으로 大同江[대동강]을 건너가면, 地名[지명]도 土城里[토성리]라고 부르는 오랜 土城[토성] 자리가 있어 밭 된 도랑 가운데로서 분명한 樂浪郡[낙랑군]의 遺物[유물]이 나오고, 그 부근에서도 그러하며, 또 그 東南[동남]의 平丘[평구]에 千數百[천수백]의 古墳[고분]이 纍纍[누누]히 벌려 있어 塼槨[전곽][우] 木槨[목곽]의 중에서 金[금]·銅[동]·玉[옥]·陶[도] 여러 가지 漢代[한대]의 古器物[고기물]이 퍽 많이 나옴으로써 이 一帶地[일대지]가 어느 時期[시기]의 樂浪郡治[낙랑군치] 있던 자리임을 알았다. 여기서 발견한 古物[고물]에는 玉[옥]·璧[벽]·鐘[종]·鼎[정]·瓦當[와당]·印章[인장] 등 諸種[제종]이 있고, 더욱 多數[다수]한 당시의 漆器[칠기]가 나왔는데, 거기 精妙[정묘]한 紋畫[문화]와 한가지 正確[정확]한 記銘[기명]이 있어 二[이] 천년 전의 進步[진보]한 工藝[공예]를 놀라게 하며, 또 어느 한 金製[금제] 帶飾[대식]에는 金線[금선]·金粒[금립]을 붙여서 六龍[육룡]이 꿈틀 거리는 形相[형상]을 나타낸 것이 있어, 그 技工[기공]의 精巧[정교]함을 感嘆[감탄]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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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最近[최근]에 發掘[발굴]된 王盱墓[왕우묘]란 것은 大約[대약][일] 천 八[팔],九[구]백년 전의 營造[영조]로, 그 木槨[목곽]은 완전히 남아 있는 東洋[동양] 最古[최고]의 木造[목조] 建築[건축]으로도 稀奇[희기]하거니와, 모든 것이 埋藏[매장]하던 당시의 상태대로 곱다랗게 있고, 또 布帛[포백]· 器具[기구]까지 實際生活[실제생활]에 쓰이던 완전한 實物[실물]이 들어 있어, 二[이]천 년 전의 文化[문화]와 생활을 徵驗[징험]하는 귀중한 자료인데, 거기서 나온 漆器[칠기]는 樣式[양식]·手法[수법]이 더욱 精巧[정교]하고, 그중에는 東洋[동양] 最古[최고]의 純繪畵[순회화]라 할 것도 들어 있어, 여러 가지로 크게 價値[가치]있는 것이며, 더욱 그것이 一微官[일미관]의 무덤이건마는, 漆盃[칠배]· 漆器[칠기]· 粧奩(장렴)· 樂器[악기] 등 모든 所入[소입]이 당시 生活[생활]의 대체 奢侈[사치]스러움을 알게 함이 퍽 재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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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평양]에서 西[서]으로 百里許[백리허]를 나가면 龍岡郡[용강군]에 於乙洞[어을동] 古城[고성]이란 土城[토성] 자리가 있고, 그 근처에 一古碑[일고비]가 있는데, 그 碑文[비문]을 判讀[판독]한 결과로, 거기가 樂浪郡[낙랑군]의 一屬縣[일속현]인 秥蟬[점선]의 故址[고지]임을 알았다. 이 碑[비]는 대개 一[일]천八[팔]백 년 전에 세운 것으로 推定[추정]되어, 域內[역내] 最古[최고]의 金石遺物[금석유물]이요, 그 글씨도 漢代[한대]의 古隸[고예]를 짐작하기에 훌륭한 實跡[실적]이 되거니와, 더욱 그 辭意[사의]는 神祠[신사]를 세우고 거기 위한 太平山君[태평산군]께 神光[신광]을 내 리사 五穀[오곡]이 풍성하고 境內[경내]가 安穩[안온]하게 해 주시기를 祈祝[기축]한 것이어서, 당시 漢人[한인]의 사이에 本土人[본토인]의 信仰[신앙]하는 山神[산신]이 國神[국신]으로 尊崇[존숭]된 것을 알고, 또 그 對象[대상]은 朝鮮[조선] 最高[최고]의 神體[신체]요, 그러면 太白山神[태백산신], 곧 壇君[단군]이실 것을 짐작할 수 있으므로, 古史[고사] 稽考上[계고상]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된다. 山君[산군]의 名號[명호]에 頭字[두자]가 없어졌으므로 꼭 말할 수는 없으나, 필시 太白[태백]의 一類語[일유어]인 太平[태평]일 것은 平壤[평양]의 平[평]이 또한 古語[고어] 「」의 轉譯[전역]임으로써 짐작할 듯하다. 大同江[대동강]은 본디 浿水[패수]라 하던 것이니, 浿[패]는 扶餘[부여]의 約[약]해진 것이요, 扶餘[부여]는 「」「」의 略[략]임이 전에 말한 것과 같으며, 또 古語[고어]에 長流水[장류수]를 「냥」이라 하니, 시방 平壤[평양]이란 이름은 실상 「냥」의 의 ㄹ의 ㄴ으로, ㅇ으로 轉[전]하여서 생긴 것이요, 또 平[평]과 白[백]은 다른 데도 「」의 譯語[역어]로 共通[공통]한 證據[증거]가 있은즉 秥蟬碑[점선비]에 보인 것은 본디 太平山君[태평산군][즉] 太伯山君[태백산군]으로, 壇君[단군]의 漢文的[한문적]으로 雅化[아화]된 이름임이 의심 없을까 한다. 이런 碑[비]는 다른 데도 있었겠지마는 다 없어지고, 秥蟬[점선]의 그것만 남은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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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三章[제 십삼 장] 樂浪[낙랑] 四圍[사위]의 諸民邦[제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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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樂浪[낙랑]을 에둘러서 平和[평화]로이는 經濟的[경제적] 連絡[연락]을 取[취]하고, 수에 틀리면 武力[무력]으로써 근대던 「白[백]」族[족]의 民邦[민방]은 대개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시방으로 부터 一[일]천 七[칠], 八[팔] 백 년전의 形勢[형세]로써 그네의 情形[정형]을 鳥瞰[조감]하여 보자. 樂浪郡[낙랑군]의 南[남]인 시방의 三南[삼남]은 먼저 辰[진]이라 하다가 뒤에 韓[한]이라 한 것이니, 小白山系[소백산계]의 大榦[대간]을 境界[경계]로 하여 그 西[서]인 시방의 兩湖[양호]는 馬韓[마한]이라 하고, 그 東[동]인 시방의 慶尙道[경상도]는 辰韓[진한]이라 하고, 辰韓[진한]의 중에서 시방 慶尙南道[경상남도] 중의 東北[동북] 一隅[일우]만을 除[제]한 부분을 加洛[가락] 혹 弁辰[변진] 혹 弁韓[변한]이라 하여 合[합]하여 三韓[삼한]이라 하니, 각각 수십 개의 地方自治體[지방자치체]로 成[성]한 一聯邦[일년방]이었다. 크면 數萬戶[수만호], 작으면 數千戶[수천호]씩의 小邦[소방]이 많은 때에는 七[칠], 八○個[팔영개]에 달하였는데, 國[국] 마다 元首[원수]가 있어 臣智[신지]라 일컬으니, 그 先[선]은 다 馬韓[마한]에서나 왔고, 다시 都元首[도원수]가 있어 月支國[월지국]에 都[도]하고 辰王[진왕]이라 일컬으니, 또한 반드시 馬韓人[마한인]에서 뽑아서 推戴[추대]하는 법 이었다. 이렇게 治者[치자] 階級[계급]이 어디서든지 반드시 馬韓人[마한인]임은 대개 馬韓[마한]의 建國[건국]이 가장 앞서고, 또 그 血統[혈통]이 朝鮮[조선]의 正脈[정맥]을 傳[전]하였다 함에서 나옴인 듯하였다. 뒤에 「 지」王朝[왕조]가 끊어졌건마는, 韓人[한인]들이 여일히 그 祭祀[제사]를 받들었음도 그를 神裔[신예]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韓[한]은 다 農業國民[농업국민]이요, 蠶桑[잠상]과 織作[직작]에 能[능]하였으며, 특히 辰韓[진한]에는 鐵產[철산]이 있어, 北[북]으로 支那[지나]와 南[남]으로 倭[왜]에 대한 큰 貿易品[무역품]을 지었으니, 鐵[철]의 一字形[일자형]에 銕[철]이 있음은 鐵[철]이 東夷[동이]의 金[금]인 意[의]를 먹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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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낙랑]의 東[동]이요, 辰韓[진한]의 北[북]인 시방 江原道[강원도]의 地[지]에는 濊[예]가 있었으니, 山川[산천 疆理[강리]를 따라 許多[허다]한 部族[부족]에 나뉘었으며, 北方[북방]에는 不耐濊[불내예]란 別部[별부]가 있어 드러났었다(아마 시방 元山[원산] 近地[근지]). 農蠶[농잠] 織作[직작]이 다 행하고, 星象[성상] 보기와 測候[측후]하기에 능함으로 이름 있었으며, 海物[해물]과 林產[임산]의 밖에 檀弓[단궁]이라는 特產[특산]으로써 漢郡[한군]에 交易[교역]을 행하였으며, 또 商業的[상업적] 遠征[원정]을 어려워하지 아니하여, 진작부터 間關數千[간관수천][리]의 遼東[요동]까지 나다니기를 例事[예사]로 알았다. 濊[예]의 北[북]인 시방 咸鏡道[함경도]의 地[지]에는 沃沮[옥저]가 있어 南北[남북] 兩部[양부]에 갈렸었으니, 본디 眞番[진번]의 地[지]로 나중 東扶餘[동부여]를 이룬 곳이요, 일찍 狼林山脈[낭림산맥]을 중간에 두고 그 西方[서방]에도 居[거]하여, 東西[동서] 兩部[양부]에 나뉘었으므로, 西沃沮[서옥저] 없어진 뒤에도 그 버릇이 떨어져서 東沃沮[동옥저]라고도 일컬었다. 그중에 여러 部落[부락]이 있고, 部落[부락] 마다 加[가], 곧 大人[대인]이 있고, 그 위에 大加[대가]가 있어 統率[통솔]하였으나, 節制[절제]가 잘 行[행]하지 못하였었다. 貊布[맥포]가 名產[명산]이요, 또 魚鹽[어염]의 利[리]가 있어서 平時[평시]에는 交易品[교역품]이 되고, 受屈[수굴]할 때에는 貢物[공물]이 되었었다. 沃沮[옥저]의 北[북]인, 시방 豆滿江[두만강] 저편에는 挹婁[읍루]라는 部族[부족]이 있어서, 開化[개화]가 가장 뒤졌었으니, 오래도록 石器 使用民[석기 사용민]으로 있어서, 楛矢[호시]와 靑石鏃[청석촉]으로써 射獵生活[사렵생활]을 하여 弓矢[궁시]의 毒[독]함으로써 남의 무서워하는 바 되고, 유명한 挹婁貂[읍루초]란 것으로써 交易[교역]을 行[행]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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沃沮[옥저]의 西[서]와 樂浪[낙랑]의 北[북]인, 시방 鴨綠江[압록강] 中流域[중류역]으로 부터 渾河[혼하] 流域[유역]에까지 걸쳐서, 西[서]으로 漢[한]의 遼東郡縣[요동군현]에 隣接[인접]한 것이 高句麗[고구려]니, 卒本扶餘[졸본부여]를 中心[중심]으로 하여 盖馬[개마]·沸流[비류] 등 許多[허다]한 部族[부족]에 갈렸다가, 뒤에 여러 번 社會的[사회적] 發達[발달]을 지내서 桂婁[계루](內[내], 黃[황])·絶那[절나](北[북], 後[후])· 順那[순나](東[동], 左[좌])·灌那[관나](南[남], 前[전])·涓那[연나](西[서], 右[우]) 등 五部[오부]의 制[제]를 세워 가졌다. 部[부]마다 元首[원수]가 있어 大加[대가]라 일컫고, 그 위에 總王[총왕]이 있어 統制[통제]하니, 王族[왕족]은 古雛大加[고추대가]라 일컬었으며, 그 아래 對盧[대로] 以下[이하] 許多[허다]한 官等[관등]이 있어, 비교적 일찌기 엄격한 國制[국제]를 만들어 가졌다. 이는 대개 高句麗[고구려]는 大山[대산] 深谷[심곡]이 많아서 田作[전작]만 가지고 生活[생활]을 버틸 수 없으매, 저절로 富裕[부유]한 他處[타처]에 侵掠[침략]을 행해야 하고, 또 四方[사방]에 强敵[강적]이 둘러 있으므로 가장 節制[절제]있는 軍國制[군국제]를 세울 필요가 있었 음에 말미암은 것이니, 이러한 環境[환경]은 갈수록 勇武雄博[용무웅박]한 氣象[기상]을 高句麗人[고구려인]에게 稟賦[품부]하게 되었다. 高句麗[고구려]의 北[북]이요 挹婁[읍루]의 西[서]인, 시방 松花江[송화강]· 遼河[요하] 兩間[양간]의 長春平野[장춘평야]를 중심으로 하는 廣大[광대]한 幅圓[폭원]에는 夫餘[부여]가 있었으니, 五夫餘[오부여]의 중에 北[북]에 當[당]하는 것이요, 또 가장 오랜 王朝[왕조]로 諸[제] 夫餘[부여]의 根本部[근본부]이므로 뒤에까지 홑으로 夫餘[부여]로 稱[칭]하였는데, 震域[진역]의 중에서 가장 平敞[평창]한 토지와, 발달한 산업과, 優越[우월]한 문화를 가지고 珠玉[주옥]·貂皮[초피]·馬匹[마필] 등, 支那人[지나인]의 需要[수요]많은 것을 多數[다수]히 輸出[수출]하여서 國力[국력]이 항상 充實[충실]하매, 西[서]으로 烏丸[오환]·鮮卑[선비] 등 强隣[강린]을 데리고도 破壞[파괴]를 當[당]한 일이 없었다. 震域[진역]의 중에서 가장 일찍 國制[국제]를 세우고 王號[왕호]를 일컬은 者[자]가 이 夫餘[부여]니, 王[왕]의 下[하]에 諸加[제가]가 있고, 특히 馬加[마가]· 牛加[우가]· 豬加[저가]· 狗加[구가] 등 重臣[중신]이 있어 四出道[사출도]를 分守[분수]하였었다. 以上[이상]에 列擧[열거]한 중 濊[예]로 부터 以北[이북]의 諸民[제민]은 通[통]하여 濊貊[예맥]이라 일컫고, 略[략]하여 貊[맥]이라 하고, 轉[전]하여 貊[맥]이라 하는 者[자]니, 다 古[고]의 「白[백]」에서 由來[유래]한 것이며, 매우 後年[후년]에는 濊[예]를 홑으로 單單大嶺[단단대령] 곧 大關嶺東[대관령동]의 그네들을 부르는, 貊[맥][우][맥]은 遼東[요동] 一帶[일대]의 그네들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또 樂浪[낙랑]이 오랫동안 中間[중간]에 끼여서 聲氣[성기]를 隔阻[격조]하게 된 뒤에는, 그 北[북]의 사람을 貊[맥]이라하고, 南[남]의 사람을 韓[한]이라 하여, 이름도 달리 부르게 되지마는, 民俗[민속] 기타에도 약간 差異[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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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四章[제 십사 장] 鴨綠谷裡[압록곡리]의 新勢力[신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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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域[진역], 특히 半島[반도]에 있는 諸[제] 民族[민족]의 民族的[민족적] 覺醒[각성]과 社會的[사회적] 凝集[응집]과 國家的[국가적] 發達[발달]과는 오로지 漢民族[한민족]의 刺戟[자극], 특히 樂浪郡[낙랑군]의 壓迫[압박]에 말미 암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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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鴨綠江[압록강] 谷地[곡지]에 들어서 다른 民族[민족]과 部族[부족]의 壓迫[압박]이 桶[통]같이 에워들고, 게다가 土薄[토박] 物少[물소]하여 여러 가지 生活上[생활상]의 艱苦[간고]를 많이 겪는 高句麗[고구려]는 실로 萎縮[위축]하다가 自滅[자멸]하고 말든지, 躍進[약진]하여 活路[활로]를 열든지, 두 가지 중의 한 運動[운동]을 取[취]해야 할 事勢[사세]이었다. 무서운 試練[시련]이 큰 奮發[분발]로 변하매 놀라운 勢力[세력]이 鴨綠谷[압록곡]으로 부터 四方[사방]을 울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夫餘[부여]의 一部族[일부족]으로 으늑한 골짜기에 겨우 喘息[천식]을 保維[보유]함에 지나지 못하던 高句麗[고구려]가, 얼마 忍從[인종]하는 동안에 精銳[정예]를 길러 가지고 武力[무력] 中心[중심]의 統制[통제] 잘 된 一國家[일국가]로 고개를 쳐들었다. 鄒牟[추모]라는 偉人[위인]의 出現[출현]을 기회로 하여, 고구려가 國家的[국가적] 步武[보무]를 내놓기는 늦어도 秦代[진대]의 일이요, 漢[한]에 들어와서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發揮[발휘]하기 비롯 하여, 遼東[요동]에 있는 新勢力[신세력]으로 漢[한]나라 邊郡[변군]의 큰 脅威[협위]이었다. 그러나 武帝[무제]의 威力[위력]이 東方[동방]에 떨칠 때에는 高句麗[고구려]도 잠시 한구석에 屛息[병식]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이렇게 休養[휴양]하는 가운데 恢復[회복]해 가진 새 元氣[원기]는 一層[일층]의 날카로움으로써 東方[동방]의 局面[국면]에 큰 波動[파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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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祖[국조] 東明聖王[동명성왕] 鄒牟[추모]가 시방 佟佳江[동가강]의 一支流[일지류]인 富爾江岸[부이강안]인 듯한 忽本[홀본]에 나라터를 잡은 뒤에, 偉大[위대]한 自助精神[자조정신]이 發現[발현]하는 바에, 北[북]으로는 夫餘[부여]의 큰집을 찔끔시킨다, 東[동]으로 東夫餘[동부여]를 집어 삼킨다, 旁近[방근]의 작은 部族[부족]들을 하나씩 둘씩 合倂[합병]한다 하여 勢力[세력]을 늘리다가, 시방부터 一[일]천八[팔]백 년쯤 전에 太祖大王[태조대왕][궁]의 時[시]에 이르러, 와짝 威武[위무]를 빛내게 되었다. 高句麗[고구려]의 隆運[융운]이 高句麗民[고구려민] 全體[전체]의 上下[상하] 一心[일심]으로 緊張[긴장] 努力[노력]한 結束[결속]임은 진실로 毋論[무론]이지마는, 좋은 指導者[지도자]와 튼튼한 中心人物[중심인물]을 필요로 함이, 前[전]에는 시방보다도 더 간절하였다. 그런데 太祖大王[태조대왕]은 正[정]히 이 要求[요구]에 應[응]해 난 一大[일대] 人物[인물]로 四方[사방]으로 國威[국위]를 宣揚[선양]하는데, 더욱 一[일]년이 멀다고 漢[한]의 玄菟[현도]· 遼東[요동] 등 邊郡[변군]을 侵襲[침습]하여, 그네로 하여금 다시는 東方[동방]에 뜻을 두지 못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주의할 일은 濊貊[예맥]은 毋論[무론]이요, 韓[한]까지를 연결해 가지고 全[전] 「白[백]」人[인][대][전] 支那人[지나인]의 民族的[민족적] 角逐[각축]의 新局面[신국면]을 출현시킴이었다. 이렇게 前[전]과 같이 집안끼리의 싸움을 줄이고 도리어 協同戰線[협동전선]을 벌여서 漢民族[한민족]의 세력을 敵抗[적항]함은, 진실로 東方[동방]에 있는 漢[한]나라 郡縣[군현]의 뿌리에 도끼를 박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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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大王[태조대왕]의 뒤에도 新大王[신대왕] 伯固[백고]· 故國川王[고국천왕][무] 같은 英主[영주]와, 明臨答夫[명림답부]·乙巴素[을파소] 같은 賢相[현상]이 繼起[계기]하여 國運[국운]이 順調[순조]로 隆盛[융성]해 가고, 또 발전하는 國策[국책]에 응하여 都邑[도읍]도 國內城[국내성] 또 丸都城[환도성]으로 차차 옮겼었다. 이동안에 支那[지나]에는 漢[한]이 亡[망]하고, 이른바 魏[위]·吳[오]·蜀[촉]의 三國時代[삼국시대]가 되어, 後漢[후한] 末年[말년]으로 부터 五○[오영]년 동안 公孫氏[공손씨]의 따로 떼어 가졌던 遼東一帶[요동일대]와 아울러 그 勢力圈內[세력권내]에 들었던 樂浪郡[낙랑군]과, 公孫氏[공손씨]가 樂浪郡[낙랑군][남]의 空閒地[공한지]를 떼어서 시방 京畿[경기] 西郊[서교]를 중심으로 하여 新設[신설]한 帶方郡[대방군]이 모두 魏[위]·幽州[유주]의 管轄[관할]이 되었으나, 鴨綠江[압록강] 유역의 樂浪[낙랑] 屬土[속토]는 거의 高句麗[고구려]로 들어가고, 아주 下流[하류]에서 一線[일선] 通路[통로]로 간신히 遼東[요동]하고 連絡[연락]함을 얻고, 얼마 뒤에는 그도 끊어져서 半島[반도] 腹臟[복장]에 외따로 떨어진 樂[락]·帶[대] 兩郡[양군]을 海路[해로]로 通來[통래]하게 되었다. 帶方[대방]이 設置[설치]된 뒤부터는 그 南[남]에 있는 諸韓[제한]과 乃至[내지] 日本[일본]까지도 한참 帶方[대방]을 통하여 支那[지나]를 交涉[교섭]하였었다. 이 帶方郡[대방군]의 新設[신설]은 본디 高句麗[고구려]의 壓迫[압박]에 내리밀리는 民衆[민중]을 南[남]에서 收容[수용]하려 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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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五章[제 십오 장][한] 郡縣[군현]의 쫓겨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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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川王[동천왕] 憂位居[우위거](位宮[위궁])에 이르러 高句麗[고구려]의 勢力[세력]은 더욱 增上[증상]하였다. 英勇[영용]한 憂位居[우위거]는 어느 해 魏[위]의 邊境[변경]을 건드리지 아니하는 적이 없고, 鴨綠江[압록강] 下流[하류]에 실오리만큼 남아 있는 魏[위]나라의 官路[관로]를 마저 끊으려 하여, 赴任[부임]하는 太守[태수]의 一行[일행]을 殺掠[살략]하기까지 하였다. 魏[위]에서도 견디다 못하여, 紀行[기행]을 殺掠[살략]하기까지 하였다. 魏[위]에서도 견디다 못하여, 紀元[기원] 二五七七[이오칠칠] 년(西紀[서기] 二四四[이사사])에 幽州刺史[유주자사] 毌丘儉(관구검)이 大軍[대군]을 거느리고 高句麗[고구려]를 침입하여 丸都城[환도성]을 결딴내고, 그 이듬해 다시 掩襲[엄습]하매, 王[왕]이 하는 수 없이 北沃沮[북옥저]로 도망하였다가 密友[밀우]·紐由[유유] 兩義士[양의사]의 忠勇[충용]을 힘 입어 곧 敵軍[적군]을 쫓고 故都[고도]를 恢復[회복]하였다. 이렇게 高句麗[고구려]로 전에 없는 汚辱[오욕]을 당한 것은, 魏軍[위군]은 三國時代[삼국시대]의 練磨[연마]로 매우 進步[진보]한 戰術[전술]을 썼는데, 高句麗[고구려]는 이 點[점]을 능히 抵當[저당]치 못한 까닭이었다. 이번 일이 高句麗[고구려]의 上下[상하]에 큰 反省[반성]을 일으켜서, 國策[국책]이 차차 변하여 抵抗[저항]많은 西北方[서북방]을 뒤로 돌리고, 외따로 있는 南方[남방]의 僑郡[교군]을 집어치우기에 主力[주력]을 쓰게 되었다. 그 前提[전제]로 沃沮[옥저]와 濊[예]를 次第[차제]로 呑倂[탄병]하고, 다시 韓[한]을 連結[연결]하여, 혹은 單獨[단독]으로, 혹은 聯合[연합]으로 樂浪[낙랑]의 영토를 요모조모 떼어 먹기 비롯하여 날로 그 언저리를 줄이니, 支那[지나]의 史籍[사적]에 혹 「爲夷貊所侵[위이맥소침]」이라, 혹 「韓濊併盛[한예병성], 郡縣不能制[군현불능제]」라 함 등은 다 이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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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고구려] 하나에게만도 이미 못견딜 형편인데, 시방부터 한 一[일] 천 七[칠]백 년쯤 전(西紀[서기][삼]세기경)에는 馬韓[마한]의 一國[일국]이던 百濟[백제]가 漸次[점차]로 小國[소국]의 兼併[겸병]을 行[행]하여 勢力[세력]이 부쩍 늘면서 帶方郡[대방군]을 北[북]으로 쫓고, 都[도]를 漢山[한산](시방 廣州[광주])에 정한 뒤에 나날이 北進[북진]을 힘썼다. 半島內[반도내]의 漢[한]나라 郡縣[군현]은 이렇게 腹背[복배]로 壓迫[압박]을 받아서, 그야말로 독 틈의 탕건처럼 날로 납작하여 가다가, 高句麗[고구려] 美川王[미천왕]의 十四[십사]년(西紀[서기] 三一三[삼일삼])에는 樂浪[낙랑]은 高句麗[고구려]에게, 帶方[대방]은 百濟[백제]에게 쫓기어 官民[관민]이 다 本國[본국]으로 돌아가니, 이제야 漢武帝[한무제] 初建[초건]으로 부터 무릇 四二一[사이일]년이나 뭉기적거리던 漢[한]나라의 政治的[정치적] 施設[시설]이 半島[반도] 안에서 깨끗이 자국을 씻기게 되었다. 이는실로 漢[한]나라 郡縣[군현] 때문에 激發[격발]되고 增長[증장]된 震域[진역] 民邦[민방]의 社會的[사회적] 機能[기능]이 스승인 漢郡[한군] 그것을 잡아먹은 것이요, 衛滿[위만] 이래 前後[전후][오]백 년간의 甘苦[감고] 여러 가지 경험에 民族[민족][대] 民族[민족]의 協同[협동] 動作[동작]의 필요를 깨닫게 하여, 같은 目標[목표]에 향하여 능히 一致[일치]한 步調[보조]를 취하였음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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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漢郡[한군]이 逐滅[축멸]됨음 高句麗[고구려]에 있어서는 그 北守南進政策[북수남진정책]이 一段落[일단락]을 짓는 것이요, 百濟[백제]에 있어서는 馬韓[마한]의 統一者[통일자]로 地位[지위]가 確定[확정]되는 시초요, 또 이 形勢[형세]에 催進[최진]되어 辰韓[진한]의 統一者[통일자]가 되어 가는 新羅[신라]와 어우러져서 半島[반도] 안에 三國[삼국] 鼎立[정립]의 形勢[형세]가 생기는 開幕[개막]이니, 이는 실로 朝鮮[조선]의 民族[민족][급] 社會[사회] 發達史上[발달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換局[환국]이다. 그런데 그동안 支那[지나]에서는 벌써 魏[위]가 亡[망]하고 晋[진]이 代興[대흥]하였는데, 漢[한]·魏[위] 이래로 支那[지나]의 塞內外[새내외]에 移住[이주]한 塞外[새외] 種族[종족]이 많은 중, 遼河[요하] 東西[동서]를 웅거한 鮮卑族[선비족]의 慕容氏[모용씨]는 특히 强盛[강성]하여 高句麗[고구려]와의 사이에도 저절로 衝突[충돌]이 잦았었으며, 모처럼 玄菟[현도]를 아우르고 西[서]으로 뻗던 高句麗[고구려]의 세력도 新城[신성](시방 奉天[봉천] 근처) 이외에 변변히 나가지를 못하게 되니, 高句麗[고구려]의 南下[남하]와 그 때문에 심해진 半島[반도] 腹部[복부]에서의 激烈[격렬]한 三國[삼국]의 된판씨름은, 앞길이 慕容氏[모용씨]에게 막혀 버림에 말미암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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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朝鮮[조선] 歷史[역사]의 舞臺[무대]가 이로 부터 以後[이후]에 돋우고 뛰어도 遼水[요수] 저쪽을 시원히 건너뛰지 못하고 맒은, 요 근처가 겨 끔내기로 北方[북방] 新興民族[신흥민족]들의 支那[지나]로 향하여 銳氣[예기]를 부리려 들어가는 길목이므로, 容易[용이]히 이것을 突破[돌파]할 기회가 돌아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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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六章[제 십륙 장] 古朝鮮人[고조선인]의 分布圈[분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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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檀人[진단인]의 옛적 中心[중심]은 시방의 滿洲[만주]요, 특히 그 松花江[송화강] 流域[유역]이니, 여기서 北[북]은 黑龍江[흑룡강]의 저편까지와, 東[동]은 沿海州[연해주]와, 西[서]는 興安嶺[흥안령]까지의 사이에 무더기무더기 團部[단부]를 지었고, 南[남]으로 내려간 이는 세 갈래에 나뉘어, 半島[반도]로 들어간 中支派[중지파]는 시방 朝鮮人[조선인]의 直系[직계] 祖上[조상]이 되고, 東南[동남]으로 바다를 건너 群島[군도]로 들어간 一派[일파]는 日本[일본] 根榦民族[근간민족]의 祖上[조상]이 되고, 西南[서남]으로 遼野[요야]를 건너고 陰山[음산]을 지나서 黃河[황하] 저편의 支那大陸[지나대륙]으로 들어간 一派[일파]는 支那人[지나인]의 이른바 東夷[동이]란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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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語[조선어]에 東[동]을 「시」라 함은 新[신]을 의미함이요, 西[서]를 「하」라 함은 遠[원]을 의미함이니, 이는 먼 西方[서방]에서 새로 東[동]으로 왔음을 表[표]한 것이요, 南[남]을 「마」라 함은 對面[대면]을 의미 함이요, 北[북]을 「노」라 함은 高處[고처]를 의미함이니, 이는 北方[북방] 高原地[고원지]로 부터 南[남]을 향하여 進入[진입]하였음을 表[표]한 것이며, 또 別[별]로 南[남]을 「앏」이라 하고 北[북]을 「뒤」라 함은 더 明白[명백]히 民族移動[민족이동]의 方向[방향]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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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조선]의 이름이 本土[본토]에서는 언제부터 비롯하였던지, 支那人[지나인]들이 오랜 뒤에까지도 다만 그 塞外[새외] 東方[동방]에 있는 地方[지방] 이나 民衆[민중]의 稱呼[칭호]로 씀이 通例[통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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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지나] 內地[내지]에 있는 古震人[고진인]의 一支[일지]는 대개 夷[이]로써 稱呼[칭호]되고, 그 一部[일부]는 혹 戎[융] 혹 胡[호]로 불렸으니, 퍽 오랜 옛적부터 黃河[황하]를 중심으로 하여 古支那人[고지나인]으로 더불어 오래 各地[각지]에 混居[혼거]를 하였으나, 種族意識[종족의식]의 발달과 文化基調[문화기조]의 차이로 말미암아, 夷人[이인]은 차차 東方[동방]으로 몰려서 太行山脈[태행산맥]의 東[동]으로 하여 山東半島[산동반도] 一帶[일대]가 그 根據地[근거지] 비스름하게 되고, 이 땅이 古支那人[고지나인]의 根據地[근거지]에서 보면 東[동]이 되므로 東夷[동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시방 北京[북경]서 南方[남방]으로 부터 山東半島[산동반도]까지 이르는 동안의 지역을 옛날에 渤海[발해]라 하고, 그 앞의 大海[대해]를 또한 渤海[발해]라고 일컬으니, 이는 東夷語[동이어]로 다 神州[신주]와 神海[신해]를 의미함이요, 그즈음에 있는 가장 高大[고대]한 山[산]을 「岱[대]」(뒤에 泰[태]) 또 「府君[부군]」으로 불러 써 信仰[신앙]의 標幟[표치]를 삼으니, 이는 곧 「」山[산]·「」山[산]이었다. 이렇게 燕[연]· 齊[제]· 魯[노]의 地[지], 곧 시방 直隸[직예]·山東[산동]의 一帶[일대]에는 東夷[동이]의 君邦[군방]이 所在[소재]에 서로 바라보니, 支那[지나]의 建國說話[건국설화]라 할 黃帝[황제]가 蚩尤(치우)하고 激戰[격전]하였다는 이야기도, 要[요]하건대 朝鮮人[조선인]과 支那人[지나인]이 渤海地方[발해지방]을 중심으로 中原[중원]의 땅을 다투었다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요, 韓[한]·寒[한]·韓雁[한안]과, 涿[탁]· 靑邱[청구]· 紫府[자부]와, 白[백]·博[박]·蒲姑[포고]와, 薊[계]· 介[개]· 莒[거]· 根牟[근모]와, 嵎夷[우이]· 島夷[도이]· 萊夷[내이]· 淮夷[회이]· 徐戎[서융]과, 기타 九夷[구이]로 汎稱[범칭]하는 것 등은 支那[지나]의 國初[국초]로 부터 戰國時代[전국시대]까지 내려오면서 著名[저명]한 東夷國[동이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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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는 一隅[일우]의 部族[부족]으로 만 것만도 있지마는, 혹 强大[강대]한 國家的[국가적] 勢力[세력]을 형성하여 支那民族[지나민족]에게 크게 畏怖[외포]된 者[자]도 있었으니, 徐[서]·淮[회]의 세력을 聯合[연합]하여 周[주]의 穆王[목왕]을 黃河水[황하수] 저편에 退縮[퇴축]시키고, 그 以東[이동] 三六國[삼륙국]을 服屬[복속]하여 仁義[인의]의 政[정]을 施[시]하던 徐[서]의 偃王[언왕] 같은 이는 史上[사상]에 특히 著名[저명]한 者[자]이다. 이 徐帝國[서제국]의 疆域[강역]은 대개 後[후]의 徐[서]· 泗[사]· 淮[회]의 地[지], 곧 昭陽湖[소양호]로 부터 洪澤湖[홍택호]를 거쳐 大縱湖[대종호]까지 이르는 山東[산동]의 南[남]에서 江蘇[강소]의 北[북]에 걸친 黃河[황하] 舊水道[구수도] 유역의 꽤 큰 지방이었다. 戰國時代[전국시대]까지도 山東半島[산동반도]와 淮[회]·泗[사] 地方[지방]은 거의 東夷[동이]의 巢窟[소굴]이 되어, 相當[상당]한 세력을 國際間[국제간]에 發揮[발휘]하였고, 秦[진]이 일어나 中原[중원]을 統一[통일]한 뒤에야 차차 흩어져 民戶[민호]가 되었다. 以上[이상]의 중에 燕地[연지]의 薊[계]와 齊地[제지]의 介[개]·莒[거] 등은 震域[진역]의 解氏[해씨]와 因緣[인연]이 있고, 특히 半島[반도]도 더불어 交通[교통]이 密邇[밀이]하던 者[자]니, 箕子[기자]의 東來說[동래설]은 이러한 事實[사실]에도 관계가 있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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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七章[제 십칠 장] 해상[海上]으로 나간 지파[支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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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方[서방]의 大陸[대륙]에서 古[고]「白[백]」人[인]의 이러한 運動[운동]이 있는 동안에 그보다도 더한 활발한 移住[이주]가 東[동][우] 南方[남방]의 海島[해도]로 行[행]하였다. 古[고]「白[백]」人[인]이 東[동]으로 東[동]으로 大陸[대륙]의 끝까지 왔을 때에, 한 가지 「바다」라는 어마어마한 새 光景[광경]을 대하였다. 처음에야 驚嘆[경탄]과 恐怖[공포]로써 이를 對[대]하지 아니치 못하였겠지마는, 우연한 기회에 그밖에도 可居地[가거지]가 있고, 또 潮流[조류]를 이용하면 風濤[풍도]가 반드시 무섭 기만한 것 아님을 알매, 혹은 東方[동방] 찾는 정성으로, 혹은 덜미를 짚는 壓迫[압박]에 쫓겨서 大陸[대륙]으로 부터 바다를 건너 移住[이주]하는 떼가 차차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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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經路[경로]는 시방 沿海州[연해주]로서 실개천 같은 海峽[해협]을 건너서 樺太[화태]를 거쳐 혹 陸上[육상] 혹 水上[수상]으로 차차 南下[남하]한 이도 있고, 혹 咸鏡道[함경도], 혹 江原道[강원도]로서 日本[일본]의 복장을 지르고 들어간 이도 있고, 또 半島[반도]의 南部[남부]로서 玄海[현해]를 타고 그 西南部[서남부]로 들어가서 東北[동북]으로 치받쳐 올라간 이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扁舟[편주]로 潮流[조류]를 이용하여 다녔지마는, 차차 길이 익고 배부리는 재주가 늚을 따라, 반드시 順潮[순조]에만 말미암지 아니하게 되고, 또 集團的[집단적] 移住[이주]도 여러 번 행하게 되었다. 이중에도 西南[서남]으로 좇아 들어간 支派[지파]가 나중에 가장 優越[우월]한 세력을 가져, 시방 日本人[일본인]의 中軸[중축]이 되고, 日本國[일본국]의 核心[핵심]이 되었다. 이것은 무릇 四[사]천 년 전쯤부터 한 二[이] 천 년 동안 극히 활발스러이 행한 일이니, 그 動機[동기]가 많이 後進者[후진자]에게 敗退[패퇴]를 당함에 있었음은, 日本語[일본어]의 後[후]를 アト라 함에서 敵[적]을 의미하는 アタ란 語形[어형]이 생긴 것으로써 짐작할 것이요, 朝鮮語[조선어]에 異民族[이민족]을 「되」라 하는 것이 「뒤」(後[후])와 한가지임을 合[합]하여, 古[고]「白[백]」人[인] 移動[이동]의 一大原因[일대원인]이 異民族[이민족]의 逼迫[핍박]에 있었음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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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는 이 海上[해상]의 別乾坤[별건곤]을 「예」라고 부르니, 「예」는 시방 朝鮮語[조선어]에 徵[징]하건대 斷然[단연]한 決意[결의]를 표하는 感嘆詞[감탄사]인 동시에, 淺易[천이]를 意味[의미]하는 一語[일어]니, 애처롭게 故土[고토]를 떠난 意[의]를 寓[우]한 것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 拘礙[구애]없이 살기 좋은 고장이란 의미로 일컬었음일 것이다. 「예」 의땅은 於農於漁[어농어어]에 다 便宜[편의]하고, 海上[해상]에 隔絶[격절]하여 있음은 外敵[외적] 不時[불시]의 危害[위해]를 받을 리 없고, 또 自己[자기] 보다 먼저 入居[입거]한 北種[북종] 「아이누」와 南方[남방] 馬來種[마래종][등]이 있으나, 文化[문화]로나 세력으로나 懸隔[현격]이 심하여, 이르는 곳마다 容易[용이]히 驅逐[구축]하고 制伏[제복]할 수 있으매, 미상불 避亂民[피난민]의 移住地[이주지]로 퍽 살기 좋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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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先主民[선주민]을 집어치우고 處女地[처녀지]를 開發[개발]하여서 「白[백]」人[인]의 ハラ(곧 「」)가 處處[처처]에 생기고 數[수]가 많으매, 統一[통일] 節制[절제]의 運動[운동]이 저절로 그중에 생겨나서, 一種[일종]의 宗主的[종주적] 地位[지위]를 얻은 데를 タカマノハラ(高天原[고천원])라 하니, 곧 「」의 「」(最高神[최고신]의 國土[국토]) 이라 함이었다. 애초부터 ヒコ·ヒルコ(다「」의 變[변])와, タカミ· ツキヨミ(다 「」의 變[변])의 先祖傳說[선조전설]과, ヒコ· ハコネ(다 「」의 變[변]) 와, タカ·タケ(다 「」의 變[변])의 神山[신산] 信仰[신앙]과, 神道[신도] 中心[중심]의 社會[사회]와, 祭祀[제사] 中心[중심]의 생활을 가져서, 오래도록 不咸系統[불함계통]의 文化的[문화적] 特色[특색]을 지녔으며, 그 先住地[선주지]인 半島[반도]를 ハハノクニ(母國[모국]), 혹 タカラノクニ(天國[천국]), 혹 カラクニ(民族原國[민족원국]), ネノクニ(根本國[근본국]) 등으로 일컬음은, 또한 그 밑을 잊지 아니함이었다. 兩地[양지]의 사이에는 이렇게 種族的[종족적], 또 文化的[문화적] 共通[공통]이 있기 때문에 彼此[피차]의 來往[내왕]이 頻數[빈삭]하여 種種[종종]의 古傳[고전]이 있게 되니, 神武天皇[신무천황]의 兄弟[형제]인 稻飯命[도반명]이 新羅[신라]에서 나왔다 함 같음이 그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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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カマノハラ로 일컫는 비교적 優越[우월]한 「」이 생긴 뒤에도 「예」의 國土[국토]는 依然[의연]히 無數[무수]한 小[소]「」의 粟散地[속산지]이었으며, 「예」土[토]에 「예」人[인]이란 분명한 一種族[일종족]이 성립 된 뒤에도 舊土[구토]인 半島[반도]의 諸部族[제부족]은 여러 가지 理由[이유]로써 덩어리덩어리 移住[이주]가 끊이지 아니하고, 그중에도 諸韓[제한]에서 온 사람의 聚落[취락]은 筑紫[축자](九州[구주])· 中國[중국]· 畿內[기내]의 一帶[일대]에 꽤 촘촘히 散布[산포]하였다. 그중에 アメノヒボコ(天日矛[천일모]) 란 一王族[일왕족]에게 引率[인솔]된 一派[일파]는, 「얼」山[산]으로 부터 上古[상고]에 시방 九州[구주]의 北端[북단]에 來到[내도]하여, 실로 席卷[석권]의 形勢[형세]로써 諸民部[제민부]를 制伏[제복]하고 四方[사방]으로 발전하니, 筑紫[축자]의 伊都國[이도국], 中國[중국]의 但馬國[단마국]·播磨國[파마국] 등은 다 그 一族[일족] 혹 後孫[후손]의 建設[건설]한 바요, 近畿[근기]의 淡路[담로]· 近江[근강]· 若狹[약협] 등, 지나는 곳마다 그 세력을 머무르고, 但馬[단마]에서 神[신]이 되어 出石大社[출석대사]에 崇奉[숭봉]되었다. 天日矛[천일모] 一族[일족]의 야단은 日本[일본] 古代[고대]의 大事變[대사변]이니, 日本[일본]의 國家的[국가적] 萌芽[맹아]가 실로 여기 激發[격발]되었다 함은 史家[사가]의 考信[고신]하는 바이다(吉田東伍[길전동오]] 倒叙日本史[도서일본사] 上古篇[상고편] 八九[팔구] 以下[이하] 參照[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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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島[반도]로 부터 들어간 民部[민부]와 또 그네의 위하던 神[신]도 많지마는, 그중에 天日矛[천일모]가 드러나고, 또 소중한 대접을 받음은, 진실로 當年[당년]의 威力[위력]이 가장 컸음에 말미암음이다. 이렇게 部族[부족] 散立[산립]의 상태로 수천 년을 지내다가, 朝鮮半島에 漢土[한토] 民物[민물]의 侵入[침입]이 있자 그 壓力[압력]은 海島[해도]에까지 미쳐서, 「예」의 國家的[국가적] 覺醒[각성]이 더욱 촉진되고, 다시 수백 년의 뒤에 半島[반도]에 三國[삼국] 鼎立[정립]의 形勢[형세]가 완성될 무렵쯤, 이네의 國制[국제]가 겨우 確立[확립]함을 얻었다. 日向[일향]· 出雲[출운]· 大和[대화]의 三大[삼대]「」로 작은 「」들이 攝收[섭수]되다가, 여러 曲折[곡절]을 지낸 뒤에 大和[대화]의 「」이 統一[통일]의 業[업]을 이루니, 이중에도 出雲[출운]은 특히 半島[반도]로 더불어 直系[직계]의 관계를 가진 곳이요, 天日矛[천일모]로 더불어도 깊은 因緣[인연]이 있는 者[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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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에도 大陸[대륙]으로서 내리는 者[자]는 漢裔[한예]고 魏孫[위손]이고 또 辰人[진인]이고 弁人[변인]이고 줄곧 이리로 安住[안주]를 구하고, 그런대로 진보한 文物[문물]이 따라서 流入[유입]되니, 日本人[일본인]과 日本文化[일본문화]는 이러한 中[중]에 성립된 것이요, 이 現象[현상]은 훨씬 後代[후대]에까지 계속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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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八章[제 십팔 장] 震域[진역] 內外[내외]의 異民族[이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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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지나]와 그 以南[이남]의 諸民族[제민족]을 南系[남계]라 하고, 支那[지나] 以北[이북]의 諸民族[제민족]을 北系[북계]라 하여, 東亞[동아]의 種族[종족]을 兩大部[양대부]로 나눌 수 있으니, 그중 北系[북계]의 諸民族[제민족]은 옅게나 깊게나 震人[진인]으로 더불어 血的[혈적]· 文化的[문화적] 交涉[교섭]을 가지지 아니한 者[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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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北系[북계] 民族[민족]이 다시 西北[서북]과 東南[동남]의 兩大群[양대군]으로 나뉘니, 震人[진인]은 그 東南[동남]으로 치우치는 者[자][중]의 다시 南[남]으로 갈려진 者[자]로, 東[동]·北方[북방]의 다른 部族[부족]을 「되」라고 불렀다. 「되」는 後方[후방]의 人[인]을 의미하였다. 當初[당초]에는 「薰鬻(훈육)」으로 統稱[통칭]되다가, 이것이 「凶奴[흉노]」 로 변하여 西北部族[서북부족]의 이름이 되고, 거기서 찢겨난 東南部族[동남부족]에는 東胡[동호]라는 이름이 새로 생기고, 東胡[동호]의 중에 「歲白[세백]」派[파]가 다시 찢겨서 南[남]으로 南[남]으로 進展[진전]한 것이 震人[진인] 곧 朝鮮人[조선인]의 經絡[경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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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頭山[백두산]을 界限[계한]으로 하여 北[북]으로 갈수록 「되」하고 因緣[인연]이 濃厚[농후]하여 동일한 지역에 雜居[잡거]까지 하고, 南[남]으로 갈수록 朝鮮的[조선적] 色彩[색채]가 鮮明[선명]하여 半島[반도]의 허리 통부터 비로소 純粹[순수]한 朝鮮相[조선상]을 呈[정]함은 自然[자연]한 數[수]이었다. 血緣[혈연]으로나 文化[문화]로나, 夫餘圈內[부여권내]에 드는 것은 朝鮮人[조선인]의 直接[직접] 祖上[조상]으로 볼 것이요, 그렇지 못한 것은 비록 오래 域內[역내]에 混處[혼처]한 것이라도 異種族[이종족]으로 볼지니, 이는 수천 년 동안 사회적 발달의 逕路[경로]와 種族的[종족적] 雜糅[잡유]의 程度[정도]를 各別[각별]히 한 中[중]으로서 마침내 서로 섞이기 어려운 差異[차이]를 가지게 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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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東方[동방]에 있어 古今[고금]없이 가장 激甚[격심]한 種族的[종족적] 葛藤[갈등]과 그 走逐興亡[주축흥망]의 變幻相[변환상]을 呈[정]한 곳이 滿洲[만주] 一局[일국]이어늘 震域[진역]은 正[정]히 그 복판에 當[당]하고, 後年[후년] 版圖[판도]가 쪼부라진 뒤에도 언제든지 여기와 옷깃을 연하게 되니, 그러므로 震域[진역] 역사의 어수선한 種族關係[종족관계]는 그 北方[북방]에 있으며, 또 北方[북방]으로 活動舞臺[활동무대]의 중심을 삼던 그 上世[상세]에 있었다. 夫餘[부여]가 松花江[송화강] 유역에 나라를 누리고, 高句麗[고구려]가 鴨綠江[압록강] 谷地[곡지]를 중심으로 그 新興[신흥]의 氣運[기운]을 나타내려 할 때에, 右[우]로 遼水[요수] 저쪽에 西[서] 「되」 인 「鮮卑[선비]」의 大部族[대부족]이 있고, 그 南[남]에는 烏桓[오환]이 있고, 鮮卑[선비]의 西[서]에는 凶奴[흉노]가 있었으니, 高句麗[고구려]의 西方[서방] 經略[경략]이 遼水[요수]를 건너지 못함은 鮮卑[선비]가 앞을 막기 때문이요, 鮮卑[선비]의 東方[동방] 發展[발전]이 또한 遼水[요수]를 건너지 못함은 凶奴[흉노]가 덜미를 잡기 때문이었으며, 左[좌]로 太白山[태백산] 東方[동방]의 沿海州[연해주]에는 東[동] 「되」 인 挹婁[읍루]라는 一族[일족]이 있어, 高句麗[고구려]의 세력이 强盛[강성]하여지는 대로 그 服屬[복속]에 돌아가니, 이는 후에 勿吉[물길] 혹 靺鞨[말갈]이라 하는 것으로, 沃沮[옥저]로 더불어 가까운 寸數[촌수]를 가진 者[자]요, 그 一部[일부]는 蓋馬大山脈[개마대산맥]을 끼고 내려와 漢江[한강] 上流[상류]의 地[지]에까지 入居[입거]하여 그 옆나라에 半奴隸的[반노예적] 생활을 하니, 이것이 조선 古史[고사]에 「貊[맥]」()이라 하고 또 後世[후세]에 「무자」(水尺[수척])라 하는 種落[종락]의 근본이었다. 貊[맥]은 「白[백]」民[민]의 別字[별자]로, 本音[본음]이 「」이요 震人[진인]의 通稱[통칭]이어늘, 訛[와]하여 「」으로 읽고, 다시 轉[전]하여 「무자」에 充當[충당]하게 되었으나, 「무자」는 靺鞨[말갈]의 古讀[고독]으로 貊[맥]과는 본래 不相干[불상간]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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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내려오면서 江原[강원]·慶尙[경상]의 東海岸[동해안]에는 「예」라는 一部族[일부족]이 일찍부터 寄留[기류]하여 東海[동해]의 日本群島[일본군도]에 결쳐 살았으니, 後年[후년]에 島部[도부]로 몰려서 倭國[왜국]을 이룬 者[자]요, 본디는 東胡[동호]의 一族[일족]으로 海上[해상]에 移居[이거]하는 동안에 海南[해남] 諸種族[제종족](「네그리토」「인도네시아」· 印度支那[인도지나] 등)의 血統[혈통]을 섞어 가진 者[자]며, 또 南海岸[남해안]에는 潮流[조류]와 信風[신풍]을 따라 漂到[표도]한 純粹[순수]한 海南種族[해남종족]들도 약간 있었으니, 馬[마]·弁[변] 兩韓[양한]의 일부에는 그 文身[문신]의 風[풍]에 물든 者[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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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馬韓[마한]의 西海中[서해중] 大導上[대도상]에는 州胡[주호]라는 別部[별부]가 있어, 韓人[한인]보다 몸이 좀 작고, 言語[언어]도 韓[한]과 같지아니하고, 머리를 깎고, 韋衣[위의]로 위만 가려 下體[하체]는 벌거 벗으나 다름없고, 牛[우]와 豬[저]를 많이 기르고, 배로 韓中[한중]에 往來[왕래]하면서 交易[교역]을 行[행]하였음을 古史[고사]에 적었으니, 이는 시방 濟州道[제주도]를 이름이요, 그 種族[종족]은 필시 海南界[해남계]를 主[주]로 하여 四方[사방] 漂着民[표착민]의 混血[혼혈]로써 成立[성립]한 듯 하다.
 
141
朝鮮[조선]은 地勢上[지세상] 四方[사방]으로서 許多[허다]한 種族[종족]이 쉴 틈 없이 流入[유입]하니, 今日[금일]의 朝鮮人[조선인]은 실로 東胡[동호] 民族[민족] 중의 夫餘派[부여파]가 根榦[근간]이 되어, 이 여러 枝條[지조]를 同化[동화]하여 成立[성립]한 複合民族[복합민족]이요, 똑같은 듯한 중에 往往[왕왕] 容貌[용모]·風采[풍채]의 特異[특이]한 이가 있 음은 그 原初[원초]의 특징을 물려 가짐이다.
 
142
그러나 言語[언어]와 習俗[습속]과 感情上[감정상]으로 混然[혼연]히 統一[통일]을 이루어, 조금도 분간이 있지 아니함에서 夫餘族[부여족]의 偉大[위대]한 同化力[동화력]을 볼 것이다.
【원문】제1부 사력 편(事歷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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