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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인규옥소선(掃雪因窺玉簫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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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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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규옥소선 (掃雪因窺玉簫仙)
2
- 눈을 쓸며 옥소선을 옅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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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에 어느 이름난 재상이 평안감사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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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을 떨쳤고, 자연이나 누대의 빼어남과 풍류의 성함이 천하 제일이었다. 풍류 호사와 벼슬아치들이 가끔 그곳의 명성을 일소에 부치다가, 한번 가보고는 3년이나 머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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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감영의 기생 명부에 나이 어린 기생이 하나 있었으니, 이름은 자란이요, 호를 옥소선이라 하였다. 나이가 겨우 12세로 타고난 아름다움이 비길 데 없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하나같이 절묘하였다. 더구나 재주와 식견이 있고 똑똑하여 능히 한시와 문장을 지을 줄 알아서 으뜸이라는 향기로운 이름이 이미 평안도 지방에 자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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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감사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그의 나이도 12세로 용모가 그림 같고, 어려서부터 경전과 사서에 능통하였으며, 글을 짓는 것이 민첩하여 붓을 쥐면 글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동이라 하였다. 감사에게는 다른 자녀가 없고 다만 아들 하나뿐이었는데, 재주 또한 빼어나서 특히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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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마침 생일날을 맞아 아래 사람들과 더불어 추향당에서 잔치를 벌였다. 기녀들과 악공들을 불러 크게 잔치를 벌였는데, 술에 취하여 즐거움이 무르익자 아들에게 춤을 추게 하였다. 행수기생을 불러 나이 어린 기생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그의 아들과 마주 춤추게 하여 분위기를 돋우었다. 여러 기생들과 감영에 있는 사람들이 꽃다운 자태와 절묘한 재주를 지닌 자란이라면 좋은 상대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자란의 나이가 감사의 아들와 동갑이었다. 드디어 그 둘로 하여금 명을 받게 하니, 한 쌍의 절묘한 춤이 간드러지기가 연한 버들가지와 같고 나풀나풀 하는 것이 제비처럼 가벼웠다. 좌상에 앉아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찬탄을 금치 못하며 그 기이하고 절묘함을 칭찬하였다. 감사가 매우 기뻐하며 자란을 불러 상머리에 앉게 하고 음식을 주었다. 또 비단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 그리고 자란을 도령 모시는 기생으로 정하여, 차를 끓여 올리고 먹 가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잠시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둘이 함께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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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지난 뒤에는 두 남녀가 모두 자라 드디어 남녀관계를 맺게 되니, 두 사람의 정이 모두 깊이 얽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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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왜전>에 나오는 정생과 이왜의 사이와 같았을 뿐만 아니라, <앵앵전>에 등장하는 장랑과 앵앵의 관계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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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임기가 벌써 끝났으나, 조정에서 그가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여 다시 유임시키니 부임한 지 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감사의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떠날 날짜가 임박하매, 감사와 부인이 그들의 아들과 자란을 떼어놓을 일로 깊이 우려하였다. 자란을 버리고 가고자 하니 그의 아들이 상사병에 걸릴까 염려되었고, 그녀를 데리고 가자니 그의 아들이 아직 미혼이라 그의 장래에 누가 될 것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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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부인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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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마땅히 그 아이에게 물어서 결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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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아들을 불러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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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가 좋아하는 일은 아비도 말릴 수가 없다. 나는 네가 하는 일을 말릴 생각이 없다. 너는 자란과 정이 이미 깊어서 장차 헤어지기 어려울 듯하다. 네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는데, 이제 만약 첩을 둔다면 네 혼인에 방해될까 걱정스럽다. 한편 생각하면, 사내가 첩을 하나 두는 것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네가 만약 자란을 잊지 못하겠으면 비록 사소한 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개의할 게 없다. 마땅히 네 생각대로 결정하여 숨기지 말고 말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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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께서는 어찌하여 제가 한낱 어린 기생과 헤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시고, 혹시 상사병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하십니까? 제가 비록 한때 눈이 어두워 가까이하였으나 이제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가는 마당에 어찌 미련을 두고 잊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버님께서는 행여 다시는 그런 걱정을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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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부인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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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이 참으로 대장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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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하게 되매, 자란이 흐느껴 울어 차마 볼 수 없었으나, 감사의 아들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빛이 없었다. 감영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그의 사나이다움을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감사의 아들은 자란과 함께 5, 6년을 지내면서 일찍이 하루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까닭으로 세상에서의 이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쾌활하게 말을 하며 그 이별을 가볍게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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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감사직을 마치고 대사헌 임명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매, 그도 부모를 따라 서울로 가니, 점차로 자란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겼으나 감히 말이나 표정으로 나타내지 못하였다. 그 때에 성균관에서 치르는 소과(小科)가 열리게 되자,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친구 몇 사람과 함께 산사에 가서 과거 공부를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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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친구들은 모두 잠들었으나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홀로 일어나 뜰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그 때는 추운 겨울이어서 눈과 달이 하얗고, 깊은 산 고요한 밤에 모든 것이 적막하였다. 그가 달을 보며 자란을 생각하니, 마음이 처량하고 슬펐다. 마음속으로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고자 하니,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서 마치 실성하여 미친 사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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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한밤중에 드디어 절을 떠나 곧바로 평양으로 향하였다. 머리에는 털모자를 쓰고 푸른 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고는 줄곧 걸어서 갔다. 10여 리도 못 가서 발이 부르터 갈 수가 없었다. 촌가에 이르러 가죽신을 짚신으로 바꾸어 신고, 털모자를 버리고 테두리가 떨어진 낡은 전립을 구하여 머리에 썼다. 가는 길에 걸식을 하였으나 굶주릴 때가 많았다. 주막집에 자면서 밤새도록 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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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귀한 집의 자제로,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자라서 일찍이 문 밖에는 몇 걸음도 나가 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천리 길을 걸어오게 되니, 절름거리다가 기다가 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굶주리고 얼며 갖은 고생을 다하다 보니, 옷은 해져 누더기가 되고, 얼굴 모습이 검고 파리해져서 거의 귀신의 형상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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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걸어서 한 달 남짓만에 비로소 평양에 이를 수 있었다. 곧바로 자란의 집으로 갔으나, 그녀는 없고 그녀의 어머니만 있을 뿐이었다. 자란의 어머니는 그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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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 사또의 아들이라네. 자네 딸을 잊을 수가 없어서 천리 길을 걸어왔네. 자네 딸은 어디 갔길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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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의 어머니가 그의 말을 듣고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26
“제 딸은 새로 온 사또 자제의 총애를 입어, 밤낮으로 산정에서 함께 지내고 있소. 신임 사또 자제가 잠시도 외출을 허락해 주지 않으니, 집에 오지 못한 지 벌써 몇 달이 되었소. 도련님이 비록 멀리서 왔으나 서로 만날 길이 없으니 참으로 안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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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전혀 맞아들일 뜻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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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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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을 보러 왔으나 그녀를 만나 볼 수가 없고, 그녀의 어머니는 박대를 하는구나. 어디 갈 만한 데가 없으니,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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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고 있을 즈음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감사로 있을 때에 본부의 아전 아무개가 일찍이 중죄를 지어 장차 죽게 되었으나 용서를 받지 못했었다. 그가 불쌍히 여겨서 부모를 모시는 여가에 구할 방도를 주선하니, 감사가 그의 말을 따라 살려준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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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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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전이라면 내가 저를 구해 준 은혜가 있으니, 그를 찾아가면 며칠 동안이야 환대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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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마침내 자란의 집을 떠나 아전의 집을 찾아가니, 그 아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그가 이름을 대며 말하니 그제야 매우 놀라서 맞아들였다. 사랑채를 깨끗이 치워서 머물게 하고 반찬을 잘 차려 대접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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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머물면서 그는 아전과 함께 자란을 만날 계책을 의논하였다. 아전이 한참만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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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만날 수 있는 길은 참으로 없습니다. 만약 그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고자 하시면, 제가 한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련님께서 과연 기꺼이 따르실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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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가 그 방법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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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눈이 온 뒤에 감영의 눈을 치우는 일은 전례에 따라 성내의 백성들을 나누어 차출해서 하는데, 제가 마침 그 일을 맡고 있습니다. 도련님께서 만약 이번에 일꾼들 속에 섞여 산정에서 눈을 치우시면, 자란이 지금 정자에 있으니 그의 얼굴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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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전의 계책에 따라 이른 아침에 여러 일꾼들과 함께 산정에 들어가 빗자루를 들고 앞뜰의 눈을 치웠다. 새로 온 감사의 아들이 마침 창을 열고 기대앉아 있었고, 자란은 방에 있는지 볼 수 없었다. 다른 일꾼들은 모두 장정이라 눈을 쓰는 것이 매우 힘찼으나, 그가 하는 비질만이 서툴어서 다른 사람에 미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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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아들이 그것을 보고 웃으며 자란더러 나와 보게 하였다. 자란이 명을 듣고 방에서 나와 앞마루에 서니, 그가 전립을 말아 올리고 그녀 앞으로 지나가면서 쳐다보았다. 자란이 한동안 뚫어지게 그를 보다가 곧 방으로 돌아가서는 방문을 닫고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낙심하여 아전의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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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은 본래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말없이 앉아서 눈물을 흘리니, 감사의 아들이 괴이하게 여기어 그 까닭을 물었다. 자란이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다가 거듭 물으니 비로소 입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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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천한 것입니다. 도련님께서 천한 저를 총애하시어 밤에는 비단 이불을 함께 덮고 낮에는 진기한 음식을 함께 먹으며, 제가 잠시 집에 가는 것도 허락치 않으신 지 벌써 몇 달이 되었습니다. 제게는 영화롭고 다행함이 그지없습니다. 제게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저의 집이 가난한지라, 아버지 돌아가신 날이 돌아올 때마다 제가 집에 있을 때는 감영에서 비용을 빌어다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서 꼼짝할 수가 없군요. 내일이 마침 아버지의 제삿날인데 노모가 홀로 있으니 밥 한 그릇 떠놓는 것도 못할 듯합니다. 그래서 문득 그것을 생각하고 혼자 슬퍼서 우는 것입니다.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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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아들이 자란에게 빠진 지 오래인지라 그녀의 말만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측은히 여기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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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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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곧 제수를 성대히 차려 자란에게 주며 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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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이 급히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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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 사또의 도련님이 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에 여기 계시리라 했는데 지금 계시지 않으니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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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이 과연 너를 보려고 걸어서 어느 날 우리 집에 왔었으나, 네가 감영에 있어서 서로 만날 길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곧 제 발로 가 버렸을 따름이다. 나야 그 분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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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자란이 울부짖으며 어머니를 책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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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람의 도리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머니는 어찌 차마 하셨습니까? 나와 도련님은 동갑이고, 열두 살 때 사또 생신 잔치에서 춤을 추던 날 감영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천거하여 짝이 되게 하였습니다. 비록 남들로 말미암아 맺어졌다고 하나, 이는 하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도련님을 배신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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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로부터 일찍이 하루도 그 분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자라서는 곧 정을 나누었으니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짝이 된 즐거움을 다른 데서 찾으려 해도 고금에 비길 데가 없습니다. 도련님이 비록 나를 잊으시더라도 저는 죽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도련님을 배신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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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사또께선 저를 사랑하는 아드님의 배필로 여기시고, 미천하다 하여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깊이 어루만져 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려 주셔서 그 은덕이 하늘과 같으니 세상에 드문 일입니다. 이것이 제가 도련님을 배신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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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땅은 큰 길이 나 있고,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고귀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서 제가 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도련님은 기품이 아름답고 빼어나며, 재주가 많고 똑똑하십니다. 저는 아직까지 이런 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평소에 그 분에게 의지하며 살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도련님을 배신할 수 없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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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은 비록 저를 버리시더라도 제가 도련님을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인데도, 저는 못나게도 죽음으로써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위세에 억눌려 이제 다시 새 도련님에게 정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듯 행실이 없는 천한 것을 천리가 멀다 하지 않고 걸어서 찾아오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도련님을 배신할 수 없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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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도련님이 얼마나 귀하신 분인데도 한낱 천한 기생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으며 여기에 오셨으니 저의 도리로 차마 괄시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비록 집에 없었으나,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전날 보살펴 주시던 정과 끼쳐 주신 은혜를 생각지 않고 밥 한 그릇을 차려 드려 머무시도록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는 사람의 도리로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 어머니는 그것을 차마 하였으니 제가 어찌 스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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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이 한참 울부짖다가 곧 진정을 하고 생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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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안에는 도련님이 계실 만한 곳이 없으니 필경 그 아전의 집에 가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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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곧 일어나서 그 아전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그는 과연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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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마주 잡고 흐느낄 뿐 서로 한 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자란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여, 술과 안주를 푸짐히 차려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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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자란이 그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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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다시는 서로 만나기 어려우니 이를 장차 어찌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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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니, 두 사람은 마침내 몰래 의논하여 달아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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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이 그녀의 옷장에서 무명옷은 다 버려 두고 비단 수를 놓은 옷가지를 꺼내고, 또 약간의 가벼운 패물을 꺼내서 보자기 두 개로 쌌다. 밤이 깊어 그녀의 어머니가 깊이 잠든 틈을 타, 두 사람이 짐을 꾸려 몰래 달아났다. 양덕, 맹산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촌가에 의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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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거기서 품팔이를 하였으나, 그가 막일을 하지 못하는지라, 자란이 베를 짜고 바느질을 하여 입에 풀칠을 하였다. 점차로 시간이 지나매 마을에다 몇 칸의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 자란이 길쌈과 바느질을 부지런히 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때로는 상으로 받은 옷가지와 패물을 팔아 음식을 장만하여 능히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자란은 이웃 사람들과 잘 사귀어 그들로부터 환심을 얻으니, 사방의 이웃 사람들이 신접살림이 빈궁함을 보고 가련히 여겨 도와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편안한 보금자리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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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그와 함께 산사에 들어갔던 여러 친구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가 보이지 않자 크게 놀라서 즉시 중들과 사방의 산을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드디어 그의 집에 알리니, 그의 집에서는 놀라서 많은 종들을 풀어 절 근처 수십 리를 두루 찾아보았다. 며칠이 되어도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모두 여우에게 홀려서 죽지 않았으면 반드시 사나운 호랑이에게 물려 갔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발상을 하고 혼을 불러 시신 없이 장례를 치렀다.
 
65
신임 감사의 아들은 자란을 잃자, 서윤으로 하여금 자란의 어머니와 친척들을 가두고 그녀를 찾았으나 한 달이 지나도 찾지 못하자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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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자란이 거처를 정한 뒤에, 자란이 그에게 말하였다.
 
67
“당신이 재상가의 외아들로 한낱 기생에게 빠져 부모를 버리고 궁벽한 산골짜기 속으로 도망하여, 그 생사 여부조차 집안에 알리지 않았으니 불효가 막심합니다. 행실을 떳떳이 하여 이제 이곳에서 늙도록 살아갈 수도 없고, 또한 뻔뻔한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당신은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68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69
“나도 또한 그 점을 걱정하였으나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을 뿐이오.”
 
70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썩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족히 지난 잘못을 덮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로는 가히 부모님을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제 말씀대로 하실 수 있는지요?”
 
71
하니, 그가 어떤 방법인가를 물었다.
 
72
“다만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는 길뿐입니다.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당신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73
하니, 그가 매우 기뻐하며 말하였다.
 
74
“나를 위해 당신이 세운 계획이 참으로 좋소. 그런데 어떻게 책을 구하여 공부를 하겠소?”
 
75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마땅히 당신을 위해 마련하겠습니다.”
 
76
이 때부터 자란은 이웃 사람들에게 값을 따지지 않고 책을 사겠다고 말하여 두었으나, 깊은 산골의 벽촌이라 오래도록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77
하루는 문득 행상이 하나 지나가는데, 책 한 권을 가지고 팔려고 하니, 마을 사람 하나가 벽을 바르기 위해 그 책을 사려고 하였다. 자란이 그 책을 가져다가 그에게 보여 주니, 그 책은 근래 우리 나라의 과거 시험 준비용 책으로, 작은 글씨로 썼는데도 매우 두꺼워서 거의 수천 편의 글이 실려 있었다.
 
78
그가 그 책을 보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79
“이 책 한 권이면 충분하오.”
 
80
자란이 즉시 그 책을 사서 그에게 주니, 그는 이 책을 얻고 나서부터 쉴 사이 없이 읽었다. 밤이면 등불을 하나 밝혀 놓고, 그는 한편에서 책을 읽고, 자란은 다른 한편에서 누에 실을 삼았다. 그가 어쩌다가 조금이라도 나태해지면, 자란이 문득 화를 내어 질책하며 격려하였다.
 
81
이렇게 하며 3년이 지났다. 그는 평소 글재주가 많아서 문장력이 크게 늘었고, 문장에 대한 구상이 풍부하여 붓만 대면 글이 이루어졌다. 그의 글은 뛰어나 풍부하고 아름다웠으니,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82
때마침 나라에서 알성과를 보인다고 하자, 자란이 행장을 갖추어 주며 그를 보고 과거에 응시하라고 하였다. 그가 걸어서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마련된 시험장에 들어갔다. 임금이 친히 자리하자, 시험문제가 내 걸렸다. 그는 단번에 생각이 샘솟듯하여 즉시 답안을 써서 제출하고 나왔다.
 
83
방을 내걸 즈음에 이르러, 임금이 어전에서 봉투를 열게 하여 보니 그가 장원이었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이조판서로 마침 임금을 모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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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이조판서를 불러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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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까닭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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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곧 명하여 답안지를 가져다 보여 주었다.
 
87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임금 앞에서 조금 물러나 흐느끼며 대답하였다.
 
88
“이는 곧 신의 아들이옵니다. 3년 전 친구들과 산사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어느 날 밤 홀연히 없어졌습니다. 끝내 찾을 수가 없어, 아마도 필경 맹수에게 물려 죽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치렀고, 얼마 전에 탈상을 했습니다.
 
89
신에게는 다른 자식이 없고 다만 그 아이 하나뿐입니다. 그 아이의 재주와 성품이 자못 빼어났었는데 뜻밖에 잃고 보니 애처로운 심정이 지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답안지를 보니, 과연 그 아이의 글씨체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잃을 당시에 신의 직책이 외람스럽게도 대사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쓴 듯합니다.
 
90
그러나 그 아이가 지난 3년 간 어디에 있다가 이번에 과거를 보러 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91
임금이 그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즉시 그를 불러 보도록 명하였다. 그는 방이 붙기 전이라 선비의 복장으로 들어가 뵈었다. 그날 임금을 모시고 있던 신하들이 보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금이 친히, 그가 산사로부터 무엇 때문에 3년 동안 떠나서 어디에 있었는지 등을 물었다. 그가 조금 물러나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었다.
 
92
“신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부모를 버리고 달아나서 인륜에 어긋나는 죄를 지었으니 원컨대 죽여주소서.”
 
93
“임금과 아비 앞에서 숨김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낱낱이 아뢰어라.”
 
94
그가 즉시 처음부터 끝까지의 일을 상세히 갖추어 아뢰니, 주변에서 듣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귀기울여 들었고, 임금은 한층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임금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95
“경의 아들이 이제는 잘못을 뉘우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조정에 들게 되었소. 젊은 사내가 잠시 여색에 빠졌다고 해서 그다지 탓할 것은 못되니, 지난 잘못을 모두 용서하고 앞일이나 잘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자란은 능히 경의 아들과 산중으로 도망하였으니, 그 일이 벌써 기이하고, 또한 꾀를 내어 책을 사주고 그 뜻을 격려하였으니, 칭찬을 할 일이지 관기라고 해서 천하게 여길 것은 못되오. 경의 아들로 하여금 다른 데 혼인하게 하지 말고, 자란의 신분을 올려 정실로 삼게 하고, 거기서 태어난 자식들도 높은 관직에 오르는 데 구애됨이 없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96
곧 이어 방을 써 붙였다. 그의 아버지가 어전에서 아들을 만나고, 그는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풍악을 울리면서 집으로 가니, 온 집안이 모두 놀라 희비가 엇갈렸다. 그의 부모들이 임금의 명에 따라 가마를 준비하여 자란을 맞아 돌아왔다. 크게 잔치를 열고 자란을 본부인으로 삼았다. 그 뒤에 그는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고, 부부가 해로하여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다.
 
97
그의 집에서 맹산에 있는 자란을 맞아 오던 날, 그가 장원을 해서 6품직을 받고 병조좌랑이 되었으니, 자란은 좌랑의 아내로서 가마를 타고 상경하였다. 그 일로 해서 지금까지도 맹산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마을을 좌랑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문】소설인규옥소선(掃雪因窺玉簫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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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소설〕
▪ 분류 : 고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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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방(任埅) [저자]
 
  고대 소설(古代小說) [분류]
 
  야담(野談)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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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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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인규옥소선(掃雪因窺玉簫仙)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4년 02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