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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동학 농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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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 (東學農民運動)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교도와 농민들이 함께 일으킨 대규모의 농민 혁명 운동. 그러나 단순한 농민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 개혁의 성격이 강한 민중 봉기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말로는 '갑오 농민 운동' 또는 '갑오 농민 전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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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지도
동학 농민 운동 (東學農民運動) 동학 동학 운동 동경대전 민족 대표 33인 용담정 천도교 홍범 14조 1894년 1811년 손병희 전봉준 최제우 김홍집 박인호 방정환 순조 조병갑 최시형 홍경래 집강소 군국 기무처 용담유사 갑오개혁 홍경래의 난 3·1 운동 갑신정변 을미개혁 정주성 싸움 진주 민란 청·일 전쟁
▣ 주요 정보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 참조 원문/전문
갑오비화 甲午秘話 근/현대 수필 차상찬 (13) 녹두장군 綠豆將軍 근/현대 소설 차상찬 (13)
▣ 시민참여콘텐츠
◈ 인기순 (1 ~ 4 위)
2023.12.26
【소설】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 이곳 임실은 동학세상을 이루었다. ​민충식 임실군수는 김개남 장군의 포덕으로 동학에 입도를 했다. 김개남 장군이 상이암에 들어와 있을 때 민충식 군수는 개남 장군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고 결의형제까지 맺었다. 이 때문에 민충식 군수는 전라감사 이도재의 청으로 파탈되었다. 임실은 전북 제일의 천도교세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전라감사 이도재가 임실현감 민충식을 고해바쳤다.
2022.01.12
동학의 성지, 교룡산에 가다
【역사탐방】 최제우가 ‘동학’이라 명명한 곳
2020.05.08
【문화】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가 주최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형규)이 주관하는 ‘제126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녹두의 함성, 새 하늘을 열다’를 주제로 5월 11일*(월) 오후 3시 전북 정읍 황토현 전적에서 열린다.【전통문화과 - 이동융 (044-203-2551)】
2019.11.22
【문화】 ○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전주의 상황이 담긴 일기와 전주 승암산과 전주천의 지소(紙所, 종이를 생산하는 곳) 위치가 담긴 효행록이 ‘제7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공보담당관】
◈ 등록순
2023.12.26
【소설】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 이곳 임실은 동학세상을 이루었다. ​민충식 임실군수는 김개남 장군의 포덕으로 동학에 입도를 했다. 김개남 장군이 상이암에 들어와 있을 때 민충식 군수는 개남 장군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고 결의형제까지 맺었다. 이 때문에 민충식 군수는 전라감사 이도재의 청으로 파탈되었다. 임실은 전북 제일의 천도교세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전라감사 이도재가 임실현감 민충식을 고해바쳤다.
2022.01.12
동학의 성지, 교룡산에 가다
【역사탐방】 최제우가 ‘동학’이라 명명한 곳
2020.05.08
【문화】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가 주최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형규)이 주관하는 ‘제126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녹두의 함성, 새 하늘을 열다’를 주제로 5월 11일*(월) 오후 3시 전북 정읍 황토현 전적에서 열린다.【전통문화과 - 이동융 (044-203-2551)】
2019.11.22
【문화】 ○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전주의 상황이 담긴 일기와 전주 승암산과 전주천의 지소(紙所, 종이를 생산하는 곳) 위치가 담긴 효행록이 ‘제7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공보담당관】
2019.09.20
【인문】 전라북도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 125주년 및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9월 25일 오전 10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문화유산과 (063-280-2032)】
2017.07.31
【--】 경기도에서 활약한 농민 의병장 김수민 2017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공훈관리과 - 이동률 (044-202-5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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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찬 (2)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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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8) 백과 동학 (4) 백과 홍경래의 난 (4) 백과 을미사변 (3) 백과 임술민란 (3) 백과 최제우 (3) 백과 1894년 (2) 백과 갑오개혁 (2) 백과 담양군 (2) 백과 민긍호 (2) 백과 순창군 (2) 백과 임오군란 (2) 백과 입암산성 (2) 적상 산성 (2) 백과 정감록 (2) 백과 조병갑 (2) 백과 천도교 (2) 백과 최시형 (2) 백과
▣ 백과사전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교도와 농민들이 함께 일으킨 대규모의 농민 혁명 운동. 그러나 단순한 농민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 개혁의 성격이 강한 민중 봉기로 평가되고 있다. 이 운동은 규모가 방대하고 이념적으로도 체계가 잡힌 농민 혁명이었다.
 
농민들이 관원들의 부정과 외세에 항거한 이 해가 갑오년이라 하여 다른 말로는 '갑오 농민 운동' 또는 '갑오 농민 전쟁'이라고도 한다.
 

배경

동학 농민 운동의 뿌리는 18세기부터 비롯되었다. 18세기는 조선 왕조의 봉건적인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한 때였다. 당시 조선 왕조는 정치적으로 각종 부패가 만연하였으며, 탐관오리의 행패도 갈수록 심해졌다. 부패가 심하다 보니 자연히 불필요한 세금을 과다하게 부과하여 농민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으로는 이처럼 부패가 만연하고, 밖으로는 다른 나라의 침략이 잦아짐에 따라 나라의 기반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러한 안팎으로의 어려움 속에서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차츰 눈을 뜨고 각종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18세기 이전에도 임꺽정이나 장길산이 이끄는 민중 봉기가 있었으며, 그 후의 민란 중에는 1811년(순조 11)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2)이 가장 규모가 컸다.
 
'홍경래의 난'이란 1811년(순조 11)에 평안 북도 가산군 다복동에서 홍경래가 일으킨 반란으로, 5개월 동안 관군과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그 후 1862년(철종 13) 진주에서의 농민 반란과 곳곳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는 동학 농민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혁명의 이념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1824~1864)가 유(儒)·불(佛)·선(仙), 즉 유교와 불교· 도교의 교리와 풍수 사상을 내세워 서학(천주교)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 인내천' 사상을 앞세우면서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최제우의 동학 이념은 재야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던 지식인 계급과, 오랫동안 학정과 궁핍으로 고생하고 있던 수많은 백성들에게 순식간에 퍼져 나가 곧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최제우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세력이 자리를 잡으려 하자, 조정에서는 민심을 나쁜 쪽으로 이끌고 있다는 죄로 최제우를 체포하도록 지시하였다. 교조인 최제우가 관원에게 체포되자 동학 교도들은 최제우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1864년(고종 1) 최제우 에게 극형을 내렸다. 이에, 최제우를 따랐던 백성들은 통분을 참지 못하였다. 결국 백성들은 함께 궐기하자는 강경론을 앞세웠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힘을 합하여 동학군을 만들었는데, 동학군을 앞장 서서 지도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 이었다.
 

제1차 농민 운동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으로의 경제적인 침투를 꾀하였다. 조선을 일본의 시장으로 여기고 쌀을 약탈해 감으로써, 조선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들의 생존마저 위태롭게 하였다. 더구나 일본 상선들이 무역 은 물론, 세금으로 거둔 쌀과 곡식을 실어가기 위해 조선 해안으로 기선을 들여오자, 조선의 상인들은 몰락할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세금으로 거둔 곡식의 운반을 맡은 전운사 의 횡포가 극심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더욱 커져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백성들에게는 온갖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탈취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을 추모하는 비각 을 세우기 위하여 농민들로부터 1,000여 냥의 돈을 강제로 거두어들였다.
 
또한, 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를 축성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였고, 수세로 받은 700여 섬을 가로채는 등 온갖 탐욕과 학정을 부렸다.
 
이에 고부 군민들은 더 이상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울분을 견디기 어려웠던 고부 농민들은 당시 동학 의 고부 접주로 있던 녹두 장군 전봉준을 앞세워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1894년(고종 31) 2월 10일 새벽, 마침내 1,000여 명의 동학 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었다.
 
"전운사를 폐지하고 균전사(백성의 실정을 살피고 토지의 등급을 다시 사정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되던 중앙관리. 품등을 결정하며 세금을 매기는 등 그 권한이 커서 폐단도 많았다.)를 없애라, 외국 상인의 곡식 매점과 밀수출을 방지하라, 조선에 대한 외국 상인들의 횡포를 막아라, 각 포구에서의 어염선세를 없애라, 수세 와 기타 잡세들을 혁파하라, 탐관오리를 잡으라, 각 읍의 수령과 이서들의 협잡과 학정을 거두라"는 등의 폐정 개혁을 내걸고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다. 농민들은 무기를 빼앗고, 강제로 징수당했던 세곡들을 탈취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 전라 감사로부터 고부에서의 농민 반란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고부 군수 조병갑을 체포 하고, 그 후임으로 용안의 현감 박원명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흥 부사로 있던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냈다.
 
안핵사는 조선조 때의 임시 관직으로 지방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하였던 관리이다. 후임으로 부임한 고부 군수 박원명은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곧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민란을 일으켰던 농민들은 스스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현지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농민 봉기의 주모자와 동학 교도 가담자들을 체포하여, 그들에게 민란의 책임을 물으려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전봉준은 몸을 피하여 정세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던 전봉준은 오히려 이번 기회에 부패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해야 겠다고 결심하였다. 전봉준은 곧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렸다. 다 함께 궐기하여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 안민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원통함을 풀어 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같은 전봉준의 호소에 동학 접주들은 호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병력을 앞세우고 전봉준이 점령하고 있던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무장·금구·부안·고창·흥덕 등의 접주들이 합세한 동학군은 모두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때는 1894년(고종 31) 3월 하순이었다.
 
병력을 정비한 전봉준은
 
곧 ①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충효를 다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
③왜적을 몰아 내고 성스러운 도리를 밝힐 것,
④병사들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벼슬이 높고 권세가 강한 사람들을 모두 물리칠 것
등의 4대 강령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그 동안 관리들의 탐학에 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인근 동학군과 농민들은 앞을 다투어 전봉준이 있는 백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3월 29일, 태인의 동학군이 먼저 관아를 습격하여 부패한 관속들을 처벌하고 무기를 빼앗으면서 혁명군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다. 이같은 놀랍고 다급한 소식을 전해 들은 전라 감사 김문현은 영장(지방 군대의 관리) 이광양과 이재섭 등에게 명령을 내려, 그들 휘하에 있는 지방 군대의 병사 250명과 보부상 으로 이루어진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동학군을 모두 섬멸하라고 하였다.
 
관군은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도교산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을 맞아 황토현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관군은 동학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의 관아를 모두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갇힌 죄수들을 풀어 주었으며, 무기를 탈취하고 이서가에 불을 질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을 양호 초토사에 임명하고, 해로와 육로로 800명의 병사를 보내 동학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조선조 때 서울에 주둔하여 시위를 맡아 보던 군대로 임금을 호위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과 전봉준의 동학군은 월평리의 황룡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함락하였다.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 밖 완산에 진을 치고서 동학군에게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경군에게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소총과 죽창 등 재래식 무기만으로는 경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마침내 동학군은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등 크게 패하자 전의를 잃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러한 틈을 타 동학군에게 조정의 개혁 의지를 알리고 이를 따르라는 설득 작업을 벌였다.
 
정부는 그 동안 부패가 심했던 고부 군수와 전라 감사· 안핵사 등을 이미 처벌하였고, 탐관오리는 엄중히 징계할 것이며, 계속하여 그 동안의 폐단을 시정해 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때마침 조정이 청나라에 요청하였던 청나라 원군이 6월 8일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청나라의 병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알고 이를 경계한 일본 정부는 거류민을 보호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6월 7일에 조선에 군대를 보낼 것을 결정하였다. 이처럼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더 이상 전투를 벌이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게다가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출동하여 나라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동학군의 본래 목적에도 벗어나는 일이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에 동학군은 폐정 개혁 12개조를 요구한 뒤 정부군의 선무 공작에 순순히 응하였다. 6월 11일, 강화가 성립된 뒤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자진하여 해산하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학군은 폐정 개혁의 실시와 교세 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군에 민간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는 이미 조선에 상륙한 뒤였고, 일본도 텐진 조약을 구실로 자국의 병사를 조선에 파견한 뒤였다.
 

제2차 농민 운동

전봉준은 전라도 각 읍에 민간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 정치의 실현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군사들이 1895년(고종 32) 궁궐을 침범하여 조선조 26대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1851~1895)를 살해하고, 대원군(1820~1898 고종의 아버지)을 섭정(임금이 나이가 어리거나 그 밖의 사정으로 임금을 대신하여 통치권을 맡아 나라를 다스림)으로 하였으며, 1894년 7월 23일 청·일 양국이 풍도 앞바다와 아산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봉준은, 그렇다면 이제는 조정을 상대로 폐정 개혁을 논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먼저 항일 투쟁을 벌여야 할 때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햇곡식이 익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각각 궐기하였으며, 호남 지방과 호서 지방에서도 동학 교도와 농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목천의 세성산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벌였던 동학군은 일본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고 수백 명의 목숨을 빼앗기고 다치는 등 크게 패배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다시 전주 삼례를 근거지로 삼고 많은 동학군을 모아 각기 3방향으로 흩어져 공주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과 옥천 등의 요지를 점령하여 동학군을 도왔다. 사전에 이러한 정보를 알게 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 부대를 요청하여 동학군이 공주에 당도했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는 6~7일에 걸친 목숨을 건 큰 전투로, 그 횟수만도 40~50회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학군은 근대적 무기와 화력을 갖춘 막강한 일본의 군사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학군은 결국 우금치에서 크게 패배하여 논산·금구·태인 등지로 물러났다.
 
전봉준 은 순창에서 다시 기회를 엿보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1895년(고종 32) 3월, 전봉준이 처형됨으로써 역사상 일찍이 유래가 없었던, 대단위의 무장 봉기였던 동학 농민 운동은 1년 동안에 3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막을 내렸다.
 

의의

동학 농민 운동은 당시 지배층의 부패가 더 이상의 체제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에 당시 농촌의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소농민을 주력으로 하여 상공인·중농·부농 등이 가담한 동학 농민 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민중 혁명 운동으로서 조선 봉건 사회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개혁 의지는 그 뒤 위정자의 반성 과 각성을 이끌어 냈으며, 갑오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직후에 조직된 최초의 근대적 내각 정부가 일본 의 간섭하에 그 때까지의 정치 제도를 버리고, 서양의 법식을 본받아 새로운 국가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정책 208건을 의결하였다.
 
주체 세력으로서 민중의 민족적 결집의 효시가 되었던 동학 농민 운동은 우리 나라 근대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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