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이해나 주의 등이 같은 사람끼리 모인 단체)을 만들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치 형태.
성리학의 공도론(公道論)에 바탕을 두고, 붕당 상호간에 비판 과 견제를 하며, 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정치 참여의 기회를 넓히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붕당 간의 갈등이 국리 민복보다 자기 당파의 이익을 앞세우게 되면서 사회 발전에 지장을 주기도 하였다.
16세기 사림 사이에 동·서 분당이 되면서 시작되어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이조정랑(吏曹正郞) 자리 문제
신진 사류
김효원을 지지하는 일파와 인순왕후(명종의 비)의 동생
심의겸을 지지하는 일파의 대립
1589년 (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 - 배후 :
성혼,
정철 (
서인)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에서 촉발되어 다수의 동인이 처벌된 사건.
통신정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의 엇갈린 보고.
황윤길(黃允吉) - 서인(西人)의 입장에서 장차 반드시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김성일(金誠一) - 동인(東人)의 입장에서 일본의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
당시 동인이였던
이산해(李山海)의 계략으로,
정철, 광해군 세자 책봉 건의.
정철, 삭탈관직당하고 유배
-> 강경파 :
북인 - 이산해, 정인홍 등. 화담 서경덕과 남명 조식의 문인
-> 온건파 :
남인 - 우성진, 유성룡 등, 퇴계 이황의 문인
임진왜란 후반 - 의병장 많이 배출한 북인 득세
남인 - 3년 (왕은 특별하다), 서인 - 1년 (왕도 다를게 없다)
1674년 제2차 예송 논쟁 - 효종의 왕비 인선대비 상
서인 - 9개월, 남인 - 1년
남인 집권. 북인, 서인의 처벌 문제로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
->
청남 온건파 (승리,
송시열의 죽음을 면함)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 (경신대출척)
숙종의
남인 제거.
서인 득세 (
송시열 복귀)
숙종의 외척(광산김씨 김익훈)에 대한 처분문제로 서인 분파.
남인인 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을 왕세자 책봉 문제
서인(송시열 등) - 반대 (송시열, 제주도 유배후, 사약)
남인 - 찬성 (득세)
서인의 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 이를 제거하려던 남인이 화를 입음
숙종, 남인 쫓아내고,
소론의
박세채,
남구만 등용.
소론, 목호룡의 고변사건을 일으켜
노론 추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