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백담사에 대하여 포스팅하고 있다. 잘 아시다시피 백담사는 설악산 국립공원내 위치하며 교과서에 나왔던 <<님의 침묵>>으로 알려진 만해(卍海) 한용운스님과 제5공화국의 전대통령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오늘은 어제의 수심교(修心橋)에 이어 범종루와 만해 기념관에 대하여 알아본다.
▼ 템플스테이 하면 좋겠다.
▼ 범종루 범종루 안에 운판, 법고, 범종, 목어가 보인다.
▼ 금강문을 쓴 무림 김영기님의 글씨다.
▼ 백담사 통일대종이라 표시되어있다.
▼ 범종루 측면
▼ 범종루 뒷면
▼ 만해 한용운 (1879~1944) 흉상(胸像)과 시비(詩碑)
▼ 비에 젖은 만해 흉상(胸像)
▼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만해-
▼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앞면) 이 적힌 시비
▼ 1917년 지은 한용운의 오도송(悟道頌, 뒷면): 오도송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시를 말한다.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 남아가 가는 곳은 어디나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 : 그 몇 사람 객수(客愁) 속에 길이 갇혔나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 한 마디 버럭 질러 삼천세계(三千世界) 뒤흔드니 雪裡桃花片片紅(설리도화편편홍) : 눈 속에 점점이 복사꽃 붉게 지네.
▶백담사 만해 기념관 : 무료 입장
만해 기념관은 만해의 민족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97년 약 100평 규모로 개관하였다. 기념관 앞뜰에는 시 << 나룻배와 행인: 앞>> ,<<오도송(悟道頌):뒤>>을 새긴 비와 만해 스님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만해스님의 일대기와 만해 스님을 기리는 후학들이 만든 조각품, 초상화, <<조선 불교 유신론>>, <<불교대전>>, <<님의 침묵>>,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등 유물 80여 점이 전시중이다.
▼석주스님의 글씨다.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南國黃花早未開 : 남국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江湖薄夢入樓臺 : 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雁影山河人似楚 :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추고 無邊秋樹月初來 : 끝없는 가을 나무 사이로 달이 뜨네.
▼승려·시인·독립운동가 한용운 기념주화(한국 조폐공사)
▶만해 한용운의 일생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남 홍성에서 1879년 탄생.
▼ 충남 홍성 생가
ⓑ 한응준(韓應俊)의 차남이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 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1884년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또한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 조선불교유신론
ⓘ 1914년≪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다.
ⓚ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 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고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다.
ⓡ 1933년≪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 심우장
ⓥ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박광(朴珖)·홍명희(洪命熹)·송월면(宋月面)·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1967년 파고다 공원에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가 건립되었다.
▼ 파고다 공원 만해 선사비
ⓨ 1997년 백담사 만해 기념관 건립되다.
출처: 민족문화대백과,문화재청.백담사 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