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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독립운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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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018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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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義兵運動의 展開過程
about 임실독립운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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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2018.07.31. 10:25) 
◈ 제1장 義兵運動의 展開過程
제1절 乙巳條約 締結과 義兵運動의 發端 / 1905년을 전후하여 의병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의병전쟁’으로까지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05년 11월 일제가 조선의 자주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의 체결이었다.
목   차
[숨기기]
 

1. 제1장 義兵運動의 展開過程

 

1.1. 제1절 乙巳條約 締結과 義兵運動의 發端

 
1905년을 전후하여 의병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의병전쟁’으로까지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05년 11월 일제가 조선의 자주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의 체결이었다. 기왕의 연구에서도 지적되었듯이 1905년의 을사의병운동이 단순히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비로소 촉발되었던 것은 아니다. 을사의병운동은 광무(光武) 연간의 무장농민운동이 1904년에 시작된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한일조약(韓日條約)의 체결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변화․발전한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을사조약의 체결은 종래에 있어 왔던 각종 형태의 반침략적․ 반봉건적 성격을 지닌 농민 중심의 무장투쟁을 반일적(反日的) 성격이 강화된 의병운동으로 전환케 하는 결정적 계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던 민중들의 반침략․반봉건 투쟁은 이후 농민군의 잔여세력을 중심으로 영학당(英學黨), 활빈당(活貧黨) 등 각종의 이름과 형태로 계승․발전되었다. 특히 러일전쟁 전후로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면서부터는 소위 ‘화적(火賊)’․‘적당(賊黨)’․‘비도(匪徒)’ 등으로 불리우는 농민무장집단이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활동과 투쟁의 성격은 이전의 활빈당과 유사하였으나 그 주요 공격방향이 일진회 등 친일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한층 반일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의병을 자칭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는데, 그 대부분은 무명의 평민 출신이 지도하는 무장집단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유생이 의병운동을 지도한 경우도 있었다. 원주(原州) 또는 주천(酒泉)의 원용팔(元容八)의병부대와 단양(丹陽)의 정운경(瀞雲慶)의병부대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원용팔의 의병부대는 주로 강원도의 원주에서 충북의 단양에 이르는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 주력은 포군(砲軍)으로 구성된 약 2백 명의 병력이었다. 원용팔은 1905년 8월에 체포되었다. 정운경은 충청북도의 단양과 영춘(永春)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1905년 10월 25일에 체포되었다. 이밖에도 이름만 알 수 있는 의병 지도자로 지평(砥平)의 이문호(李文鎬), 광주(廣州)의 구만서(具萬書) 등이 있었다.
 
대체로 1904년부터 시작된 이 의병운동은 1905년 11월의 소위 ‘보호조약’(保護條約) 체결 이후에 비로소 보다 광범위한 대중적인 기반을 갖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즉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점차 가시화되고 이에 따라 조선 민중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가던 분위기 속에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보호조약’의 체결은 반일 의병운동을 고양시키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을사조약의 체결이 알려지자 민중들의 반일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와 함께 을사조약과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반일운동이 전국적 차원에서 각계각층으로 급속히 파급되었다. 이 반일운동에는 기왕의 의병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개화파 지식인들이 항일적 언론활동을 통하여 적극 가담하고 있었다. 또한 전․현직(前現職)관리들도 상소를 통해서 또는 분사(憤死)와 같은 극단적 방법까지도 불사하며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였다. 상인과 학생들은 철시투쟁과 동맹휴교에 들어감으로써 이러한 반일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렇게 다시 시작된 의병운동은 1895년 민비시해(閔妃弑害)사건과 단발령(斷髮令)으로 촉발된 을미의병운동(乙未義兵運動)과는 다른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을미의병운동 당시는 친일개화당 정권과 척사파 간의 정치적 갈등이 국내 정치세력의 기본적 대립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에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해서는 친일매판 세력과 이에 대항하는 계몽운동 세력 및 보수 유생들 사이에 종전과 다른 새로운 정치적 이해관계가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의 성격과 강도 또한 더욱더 노골화되고 있었다.
 
국제정세 면에서도 을미의병운동 당시 일본의 조선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청일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에 곧 이은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인해 현저히 약화되었고 그 결과 친러파가 득세하였다. 반면에,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의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와 영일동맹, 카쓰라-테프트 조약 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은 외교적으로 고립을 면치 못한 채 일본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처럼 을사의병의 봉기 이후의 한말 의병전쟁은 국내외적으로 민족적인 위기감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된 시점에서, 그리고 주체적 측면에서는 종전의 민족운동 역량의 지속적 성장과 새로운 방향 모색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부여된 상황 속에서 단계적으로 성숙․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반일운동이 각계각층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을사조약 체결 직후 의병운동을 표면적으로 주도한 것은 지방의 유생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 지방의 유생들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을사조약의 본질과 그 침략성을 규탄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일부 유생들은 죽음으로써 일제의 만행에 대해 항의를 표시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 유생들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한시적이었고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지방의 유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적극적인 대안은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각지에서 유명, 무명의 의병들이 봉기하여 소규모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5월 11일에 이르러 전참판(參判) 민종식(閔宗植)이 홍산(鴻山)에서 거병하여 홍주성(洪州城)에 입성하였다. 민종식 의병부대는 그달 말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하고 민종식 자신은 그 해 11월에 공주군(公州郡) 탑산(塔山)에서 체포되었다. 민종식 의병부대의 봉기는 같은 해 최익현(催益鉉)의 순창(淳昌) 의거와 함께 지방 유생들의 여론을 한층 자극함으로써 이후 의병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을사조약 체결 직후인 1906년경 의병봉기를 주도한 것은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대체로 지방사회에서 이름이 잘 알려진 전직고관 출신의 척사파 유생들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척사파 계열 유생들의 의병봉기가 당시 민중들의 반침략투쟁을 고무시키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반일 의병운동은 1895년의 의병운동과는 달리 그들 만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도된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을사조약 체결 이전에 이미 농민층 중심의 반침략․반봉건 운동이 당시의 정세변화에 맞춰 독자적으로 의병운동으로 전환해 가고 있었다. 또한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경우는 1906년 3월 13일(음력)에 영해(儜海)에서 거병한 이후 경상북도 해안 지역 일대에서 대규모 의병부대를 이끌고 실제로 일제를 긴장시켰을 만큼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한말의 호남지역 의병운동은 이처럼 새롭게 조성된 정세 속에서 전국 각지의 의병운동의 발전과 상호연관을 가지면서, 동시에 그 지역 나름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을 반영하면서 한말 의병전쟁의 구심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1.2. 제2절 湖南 義兵運動의 發展過程과 特徵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이후 ‘남한대토벌’에 이르는 기간에 호남지역에서 전개된 의병운동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당시 전국적으로 앙양된 의병운동의 발전과 기본적으로는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지만, 호남지역이 지닌 역사적,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다른 지역의 의병운동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발전과정을 겪었다. 이제 그렇게 전개된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발전과정상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대체로 다른 지역의 의병운동이 쇠퇴하거나 또는 침체 국면으로 전환된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고조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직후 강원도와 경기도, 그리고 충청북도 및 경상북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급속히 고양되었던 의병투쟁은 1908년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토벌공세에 밀려 사실상 쇠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 이후에도 오랫동안 의병봉기가 없었고, 1906년 6월 면암 최익현의 의병봉기 이후에도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했던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오히려 이 시기에 급속히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1908년 하반기 이후는 전라남북도 전역이 전국 의병활동의 중심지로 되면서 명실상부한 ‘의병전쟁’의 격전장으로 변하였다.
 
둘째,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지역적으로 몇 가지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발전하였다. 대체로 동부의 산악지대에서는 문태수와 같은 평민 의병장의 주도 아래 비교적 커다란 세력 교체 없이 꾸준히 의병운동이 전개된 반면에 대륙과 서부 해안지대에서는 초기의 명망 유생에서 무명 유생 내지는 평민 출신의 의병장으로 주도세력이 교체되면서 의병운동이 폭발적으로 고양되어 나갔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기삼연 의병진의 계통이었다. 사실상 다른 몇 가지 요소를 제외하면 전라북도의 남부, 전라남도의 서부 및 북부 평야지대에서 의병운동이 고양된 것은 기삼연의 의병봉기가 결정적 계기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여기서 기삼연 의병진의 발전과정을 표로써 정리해 보면 아래의 <표 1>과 같다.
 
<표 1> 奇參衍 계통 의병진의 봉기 및 발전과정
비고 : ① 위에서 ◎는 유생, ○는 평민을 각각 표시한다. 나머지는 그 신분이 미상이다.
② 각 단계가 반드시 의병장의 활동 기간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발견되는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처음부터 명망 유생 의병진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거병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한 수많은 의병부대들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심남일과 같은 유생 출신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평민 의병장들이었다. 여기에는 안규홍, 김동신(의업), 문태수, 양진여양상기 부자와 같이 비교적 이름이 잘 알려진 의병부대를 비롯하여, 최산흥(催山興), 임세묵(林世黙), 김영백(金永伯), 강사과(姜司果), 조정인(趙正仁), 정성운(鄭聖運), 김동수(金東洙), 김창섭(金昌燮)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신분을 알 수 없는 의병장의 상당수가 또한 평민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이 장기간 그리고 강력히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의병운동이 본격화되는 단계에 있어서 유능한 의병장의 출현과 잘 훈련된 부장급(部將級) 간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1908년 봄을 전후하여 출현한 의병장들은 1909년 9월 일제의 대토벌이 시작될 때까지 대부분이 투쟁을 계속하였다. 또 일제의 토벌공세가 한층 강화될 때는 부장급 간부 중심의 소부대로 기존의 의병부대를 나누어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는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1908년 말 이후 새로운 소규모 의병부대의 급속한 증가는 이 사실을 단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상에서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전개과정상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무엇보다 호남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이상과 같이 발전될 수 있었던 원인에 관해서는 이 지역에 있어서 일제의 식민지적 경제 수탈과 지역 내부의 계급관계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나,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 장에서 설명하였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의병전쟁이 고조에 달했던 1909년 기간 중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례없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맺고 말았다. 이것은 전력상 의병측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데 비해 일제의 무자비하고 집중적인 토벌공세가 주효했던 데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적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1.3. 제3절 全羅北道의 義兵運動

 
기삼연의 봉기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전라북도에서는 김동신, 문태수 등이 의병부대를 이끌고 동부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삼으면서 충청북도와 경상남도 지방을 넘나들며 일제를 위협하였다. 또 익산의 유생 이규홍(李圭弘)은 유지명(柳志明) 등과 함께 1907년 11월 초 익산에서 봉기하여, 이듬해 4월 부대를 해산할 때까지 익산, 금산, 진안, 용담 등 전라북도 북부의 산간지방에서 일본군과 빈번히 전투를 벌였다.
 
전라북도 동부 산악지대에서는 임실군 성수면이 고향인 이학사(李學士)로 널리 알려진 정재 이석용이 기삼연과 호응하여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암에서 500여 명의 의병들을 모아 격중가를 부르며 ‘호남의병 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임실, 진안, 전주 등지에서 적극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측은 당시 이석용의 의병투쟁에 대하여 “적괴(賊魁) 이학사는 임실 동방 약 40리 지점인 팔공산(八公山) 부근을 근거지로 삼고, 이미 임실을 습격하여 크게 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진안, 장수, 남원, 거창 등 각 군에 출몰하여 우리 우편인, 체송인 또는 연락병 등에게 해를 끼치는 등, 그 수가 빈번하였으므로 우리 토벌 기관은 전심전력 이학사(이석용) 포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돌연히 나타났다가 홀연 자취를 감추어 용이하게 그 소재를 알 수 없었다.” 라고 적었다.
 
최익현의 거의에 밀접히 관계하였던 양윤숙(梁允淑)도 1907년 10월경부터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런가하면 1907년 말에는 이평해(李平海)란 인물이 약 1백 명 규모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태인 일대에서 활동 중이라는 일제의 보고가 있고, 1908년 1월경에는 임병찬이 재기했다는 일제의 기록이 있으나 실제 의병활동을 벌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당시 실제의 의병투쟁을 주도한 것은 임병찬과 함께 거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양치운(梁致云 : 의병장 梁致元과 동일 인물로 생각됨)이었다. 그러나 양치운의 활동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라북도 지역의 의병투쟁도 이제 조금씩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4. 제4절 任實地域 抗日義兵의 歷史的 背景

 
한국의 근대사는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외세에 저항하고 안으로는 낡고 부패한 봉건사회를 배척하는 이른바 반봉건과 반외세의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투쟁운동을 양 축으로 삼아 성립하였다.
 
1905년 11월 조선의 자주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의 체결’은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 강원, 충청, 경상 등 여러 도(道)에서는 의병(義兵)이 크게 일어나 ‘을사조약’ 이후 나라가 온통 들끓 듯 하였다. 그러나 1894년 ‘반외세’, ‘반봉건’ 투쟁의 기치를 올렸던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지역이었던 전라도에서는 다소 떨어져 성기(聲氣)가 서로 접하지 못하여 깃발을 세워 맹세하는 무리가 없었다고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다른 지역보다 조금 늦은 1906년 최익현의 봉기로부터 의병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기우만’이 <척왜기의(斥倭起義)>를 촉구하는 통문(通文)을 발하는 등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본격적인 의병항쟁을 촉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북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지역으로 동학이 실패하자 많은 지도자들이 희생을 당한 후라 의병에 참여할 인재도 부족할 뿐 아니라 사회변화의 참여에 두려움과 관망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습재실기》(최제학 유고집)에 의하면 을사년(1905) 정월 고향(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을 떠나 면암 최익현 선생을 호남지방으로 모시고 의병운동을 전개하고자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한편 충청도에서는 홍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종식(閔宗植) 등이 의병집단을 그들대로 면암을 지도자로 추대하고자 여러 차례 많은 권고를 하여왔으나 이런 상황에서 면암은 그들 홍주 의병에게 “태극 깃발에 오랑캐를 물리치고 나라를 찾자.” 존양토복(尊壤討復)이라는 네 글자만 써 주고서 격려해 주고 “호남 땅은 임진왜란 이후로 의병이 크게 일어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사직을 구한 조선의 보배다. 그러니 내 마땅히 호남으로 가서 국권회복에 목숨을 바칠 것이다.” 하시고 분연히 호남을 찾아오실 때 ‘습재’를 찾아나선 면암의 글이 《면암집》에도 전해오고 있다.
 
‘면암’은 습재의 배종을 받으며 호남을 향해 먼저 태인에서 임병찬을 만나 면담 후 거사에 동참하기로 합의하고 면암을 진안 성수면의 ‘삼우당’(습재의 선대 어른들이 모여 우애를 나누던 장소로 이곳은 숲이 울창하고 사람의 발길이 뜸한 외딴집이다.)에 한 달 간 머물면서 습재는 영남과 호남지방 각처로 연락을 취하여 동지를 모았으며 그해 음력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에서 봉기한 면암 최익현은 태인, 정읍, 곡성을 거쳐 순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최익현 부대는 순창에서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병사들로 구성된 토벌군과의 전투에 임박하여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고 말았다. 그는 임병찬 등 의병 12명과 함께 토벌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후 그는 대마도에 끌려가 식음을 전폐하고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이처럼 최익현 부대의 의병활동이 실패하자 일단 주춤했던 의병활동은 1907년 전북 임실에서 독자적인 구상으로 자발적 의병을 일으킨바 이가 곧 정재 이석용 의병장이다.
 
정재 이석용은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바위 앞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라고 이름하고 결성하니 이때 이 제단을 중심으로 고천제가 끝나자 모든 의병들은 환호를 올리면서 그를 바로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궐기대회가 끝난 이튿날인 9월 13일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진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집중 포화를 쏘아대니 왜적들은 전주방향으로 도망을 한지라 사기가 충천한 이석용 의병대는 그로부터 임실, 진안, 장수, 남원, 순창, 구례, 곡성, 거창 등지를 주무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저작】 임실독립운동사 (2005)
• 제2장 靜齋 李錫庸 義兵將
• 제1장 義兵運動의 展開過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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