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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임실독립운동사 (2005)
임실독립운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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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018년 7월 31일
부록
제4장 任實地域의 3․1 萬歲運動
about 임실독립운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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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2018.07.31. 10:25) 
◈ 제4장 任實地域의 3․1 萬歲運動
제1절 任實邑의 3·1萬歲運動 / 3․1 운동에 관한 제반 연락이 임실읍에 전해진 것은 3월 2일이었다. 천도교 전주교구를 통하여 임실 교구장 韓榮泰에게서였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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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4장 任實地域의 3․1 萬歲運動

 
 

1.1. 제1절 任實邑의 3·1萬歲運動

 
3․1 운동에 관한 제반 연락이 임실읍에 전해진 것은 3월 2일이었다.
 
천도교 전주교구를 통하여 임실 교구장 韓榮泰에게서였다. 한영태는 독립선언서와 시위운동에 대한 지침서를 전달받은 즉시 같은 교도 姜啓大, 朴判德, 韓俊錫, 崔養玉, 禹成五, 黃成瑨, 金榮遠, 朴成根 등을 통해 둔남, 운암, 청웅, 관촌, 성수면 등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각 요소마다 격문을 붙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독립선언서의 배포 임무를 맡은 강계대는 당시 천도교 순회교사의 위치에 있었다. 그는 이날 밤 자정을 지나 고요한 시간에 한아름의 독립선언서를 품에 안고 뛰어나가 시장거리와 학교, 군청, 면사무소의 벽이나 건물 게시판에 붙이고 다녔는데 심지어는 경찰서 벽에까지도 붙였다. 또한 한준석은 운암면의 입석리, 선거리, 학산리 등 여러 마을에 밤새워 붙였으며, 박판덕 등 모두가 자기가 거주하는 면이나 이웃 면에 붙이거나 연락이 닿는 대로 극비리에 전달하게 되니 서울에서의 거사는 삽시간에 군내 구석구석까지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특히 임실은 천도교의 교세가 어느 지방보다 컸으니, 이 고장 청웅 출신인 천도교 도사(道師) 朴準承은 일찍이 중앙총부 敎主 孫秉熙와 밀접한 사이로 그를 대표로하는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데서 그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이로 인하여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있었고 또한 만세시위에 대한 낌새도 암암리에 연락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임실군의 많은 인사들이 국상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으며 고종의 국장일이 3월 1일이었으므로 서울의 소식은 더더욱 빠르게 전달되었다. 이처럼 천도교를 배경으로 하여 교인들의 시위운동이 열성적이었으며 여기에 하나의 의로운 미담이 있으니 불과 16세 나이의 임실 출신 文明根이 임실독립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소년이었음은 기록할 만한 일이다. 文明根은 가세가 빈한하여 군청 급사로 근무하던 중 평소 일인관리의 조선인 차별대우에 분격하였던 바, 국상을 당하자 그 슬픔을 누르지 못하고 직장을 결근하면서까지 상경하여 국장에 참여하고, 서울의 시민과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거룩한 민족의 분노를 느꼈다. 고종 인산에 참여한 후 입술을 깨물며 고향에 내려온 후 그는 곧 급사직을 사직하고 격문을 지었다. 그 내용은 조선인으로서 군수, 면장 기타 관공서 직원들은 모두 사직하고 민족의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자는 것으로써 일일이 붓글씨로 정서하여 당시 일본인이 군수를 맡고 있던 완주, 익산, 옥구군을 제외한 도내 11개 군수에게 3월 5일자 우편으로 발송을 하였다.
 
그런데 격문을 받은 군수들 중에서 부안, 진안, 순창의 군수들이 이를 임실군으로 반송하자 경찰서와 군청이 발칵 뒤집혀 격문을 작성한 주인공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처음에는 16세 소년이 주인공이라곤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행동이 수상하여 필적을 대조한 결과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연소자인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군청의 일개 사환이 격문으로 그것도 16세의 어린 나이로 각 군 군수에게 동맹사직을 권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자는 격문을 돌린 것은 당시 그의 식견과 우국충정, 그리고 임실이라는 지역이 의병항쟁 때부터 항일정신이 깊은 곳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 소년의 용맹스러운 활동이 도화선이 되어 3월 12일 임실읍의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 아침부터 각 면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오전 10시경 장날인 읍내시장 한복판에 무려 2천여 명이 참여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때 순식간에 온 시장과 거리는 태극기의 물결이 장관을 이루었으며 거리마다 집집마다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물결은 불어나 장관을 이루었다. 이에 급거 몰아닥친 헌병과 경찰로 인하여 군중은 흩어지고 잠시 죽음과도 같이 읍내는 조용해졌으나 읍내는 다시 만세소리 속에 진동하였으며,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일경들의 총소리가 요란하였다. 임실읍의 뒷산 봉우리에는 봉화가 하늘높이 솟아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군중들은 일경의 총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황한 헌병들이 봉화를 올리며 만세소리를 외치는 뒷산으로 올라가자 시가지에서는 다시금 만세소리가 터져 나오고, 일본 경찰이 시가지로 내려오면 산 위에서 다시 봉홧불이 솟으면서 만세소리가 터지니 일본경찰과 헌병들도 어쩔 수 없었다. 밤새도록 산 위에서와 시가지에서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의 함성이 끊이질 않고 새벽을 맞이하였다.
 
 
❏ 任實邑의 3·1 紀念塔 碑文은 다음과 같다
 
半萬年 이어온 國權이 時運의 不利로 庚戌年에 이르러 一時國의 悲運에 빠졌었으나 連錦한 民族精氣는 날로 드높아 드디어 己未年 3월에 온 겨레가 起하여 獨立萬歲를 외치며 回天의 大運動을 전개하자 이에 呼應하여 이 고장 任實郡에서도 先覺的 愛國志士 朴準承 先生의 先導로 獒樹를 비롯하여 郡 全域에 걸쳐 大大的인 萬歲運動으로 示威를 展開하여 靑史에 特筆케 되었으니 아아! 이 어찌 壯烈하지 아니한가?
 
이로써 獄中殉節하신 韓榮泰先生과 그 자리에서 원통히 殉國하신 허업 선생을 비롯하여 끝까지 굽히지 않고 모진 獄苦를 겪으신 그 先烈들의 거룩한 節義는 실로 萬古에 빛나고 忠誠은 뒷사람들의 가슴마다 깊이 아로새겨 겨레의 올바른 길을 밝혀주셨도다.
 
光復 後 33年이 흐른 오늘 늦으나마 이에 紀念碑를 세워 그 先烈한 義擧를 追念하고 在天하신 英靈의 冥福을 삼가 빌며 군민들의 그지없이 솟구치는 追慕의 情과 丹誠을 모아 여기 三一 동산에 아로새기는 바이다.
 
1977年 3月 1日
글 李 熙 昇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264面 (2004年 發行),《任實郡誌》 (1997年 發行) 227. 264面
 
 
 

1.2. 제2절 雲岩面의 3·1 萬歲運動

 
운암면의 3․1 만세운동은 임실군에서도 맨 먼저 서울로부터 연락이 된 지역으로 되어있다. 일찍이 이곳은 기미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선출된 33인 중 박준승 선생과 양한묵 선생의 스승인 김영원 선생의 출생지이며, 천도교 임실교구장이었던 한영태선생의 고향이고, 3․1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또한 임실군에서 처음 천도교를 접한 최찬국 선생의 고향으로서 지금도 천도교의 동학정신이 이어져오고 있는 바, 어느 지역보다 독립운동 사상이 배어있는 성지로도 손색이 없는 지역이다. 따라서 운암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己未 三·一 運動 碑文
 
己酉年에 <合二成一非古非令琴調失令古家門翁>의 降時로 庚戌國恥를 미리 感知한 孫義庵先生은 日帝侵略에 대한 警戒와 아울러 獨立運動 準備에 事前計劃을 세우며 物心兩面으로 全力을 다하였다.
 
韓半島는 地政學的 位置 때문에 大陸과 海洋勢力의 進出로 인하여 寧日이 없는 角逐場이 되었다.
 
己未獨立運動은 日帝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중, 일 세 나라가 鼎足(정족)의 勢로 東洋의 安定勢力을 構築(구축)하고 東洋平和로 重要한 一部를 삼는 世界平和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을 만들어 東洋 全局이 共倒同亡(공도동망)의 非運을 防止하자는 것이 根本目的이었다.
 
孫義菴 先生의 獨立運動準備를 미리 感知한 任實 崔承雨, 金榮遠 韓榮泰는 己未二月末頃에 只今의 全州市 完山區 老松洞 李君弼(이군필)집에서 全羅北道 代表들과 獨立運動을 展開하기 위하여 두 차례나 모여서 비밀회의를 가졌으며, 崔承雨는 宣言書를 임실, 남원, 순창, 진안, 장수, 구례, 곡성 등지에 보내어 그 地方에서 獨立萬歲를 부르도록 示唆하였다.
 
우리 任實에서는 三月二日 子時에 雲岩面 國士峯 靑雄面 白蓮山, 德峙面 回文山, 三溪面 원통산 聖壽面 聖壽山 新德面 馳馬山에서 올리는 烽火를 信號로 郡內 各地에서 宣言書를 뿌리고 大韓獨立萬歲를 힘차게 불렀다.
 
萬歲를 부르던 群衆은 日帝의 사나운 銃劍에 의하여 일단 解散했으나 그 후 六個月동안 繼續하여 郡內 各地에서 大韓獨立萬歲를 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임실郡內에서 數百 名이 逮捕되었는데 그 중 三人이 獄死하였고, 百餘名이 實刑을 받았다.
 
金榮遠은 酷毒한 拷問에 의하여 불구의 몸으로 獄中에서 呻吟하다 己未年 八月 二十六日에 獄死하였다.
 
當時 天道敎區長인 韓榮泰는 三月 二日에 拘束되어 背後關係를 頑强하게 否認하다가 견디다 못해 三月九日 子正에 혀를 깨물고 옷을 찢어서 새끼를 꼬아 목매어 自決하였으며, 崔鳳商은 내 나라를 잃고 내 나라를 찾자는 것이 무슨 罪냐고 倭警과 싸우다가 酷毒한 拷問에 못 이겨 獄中에서 殉國하고 말았다.
 
己未三一運動이 일어난 지 六十여 년 만에 三一運動의 偉大한 殉國精神을 되살리면서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碑를 세우나니 千秋萬代의 後孫들은 愛國愛族의 거룩한 精神을 이어받아 先進祖國建設에 邁進하라.
 
 
註 : 《任實郡誌》 (1997年 發行) 266面 雲岩面 己未三一運動記念碑文 拔萃本임.
 
 
己未 三·一 運動 謀議者
 
최승우, 박준승, 박성근, 강계대, 우성오, 박판덕, 최종수, 이강세,
박준창, 이기동, 최양옥, 박영창, 박완엽, 허 영, 김한경, 박성언,
김한암, 김교승, 최종기, 최종택, 최여필, 김교석, 최종환, 김교일,
이화영, 모낙선, 최명국, 황철규, 황준규, 황승규, 박종실, 안경열,
윤귀섭, 염유환, 김한익, 임재화, 공재학, 박규진, 손태성, 최대필,
배웅이, 김양수, 임희상, 박순섭, 이영도, 백복남, 김기선, 곽원귀,
이명노, 박관수, 노도삼, 노도진, 조영수, 최종주, 최창식, 황선명,
지연종, 김정문, 강동엽, 이덕교, 손정엽, 양석봉, 박화생, 김정권,
김교봉, 최홍필, 최중필, 최계필, 최무필, 엄옥암, 김동석, 백만순,
신몽길, 이헌우, 모락선, 강경환, 김태순, 이화영, 이종달, 박정원,
한준석, 조우삼
 
 
己未 三·一 運動 時 獄死者
 
김영원, 한영태, 최봉상
 
 
己未 三·一 運動 時 獄苦者
 
박준승, 강계대, 문명근, 성준섭, 박태엽, 한기수, 박용식, 이강세,
한도수, 이기섭, 이성의, 박준창, 최종수, 박성근, 정필조, 양성도,
최병태, 강선칠, 황해수, 황성진, 최극삼, 김제룡, 소귀남, 송성학,
문성술, 이기송, 심상용, 김종윤, 이주의, 이기우, 오병용, 이용의,
이윤의, 김종창, 이송의, 하용기, 이영의, 김태순, 김용식, 이춘만,
박판덕, 이태재, 노유원, 이창준, 이하의, 이재의, 김종태, 곽병민,
곽병희, 김일봉, 김정기, 라학용, 한정교, 김정업, 한교석, 허 근,
허 섭, 허 봉, 우성오, 이중혁, 엄길영, 이회열, 이병열, 이준명,
최상학, 안성섭, 한인석, 최영열, 이회근, 최경호, 최영기, 황쾌동,
김종식, 이만의, 김찬오, 김영필, 이정의, 이영보, 최원호
 
 
 

1.3. 제3절 獒樹普通學校 學生들의 萬歲運動

 
오수면의 3․1 만세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선창하였으니 이것은 전국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기할 만한 일이다. 3․1 운동이 일어날 당시 오수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던 李光壽는 남원의 3․1운동 지도자인 덕과 면장 이석기의 조카이다.
 
그는 고종의 국장일이 알려지자 극비리에 서울에 올라가 오세창, 최팔용 등 젊은 지도자들과 만나고 손병희로부터 직접 3․1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부여받고 내려왔다.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만세운동은 이러한 이광수의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생들은 3월 10일 오전 10시경에 첫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을 신호로 오수공립보통학교(지금의 오수초등학교) 1, 2학년생과 3, 4학년생 약 반수가 운동장에 집합하여 오수 역전으로 몰려가 일제히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에 일본인 교장과 주재소 순사들은 크게 당황하여 학부형들을 불러 훈계하고 학생들에게도 경고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일은 일경의 위협과 유도로 배후를 밝히려 하였으나, 비록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끝까지 비밀을 지키며 서울에서 내려온 모르는 사람이 독립선언문을 주고 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광수의 이러한 활동은 다음달인 4월 4일 남원의 3․1 운동과 관련되어 밝혀짐으로써 숨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국내에서는 항일운동이 어려워짐을 느끼고 중국으로 탈출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 평생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외에서 고인이 되었다.
 
오수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이들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그간 잠잠했던 오수면이 감연히 시위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이는 그 동안 준비 단계로 뜻을 모아 거사를 모의하였다. 이들은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대하여 자주 의견을 나누고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서울의 3․1 운동 소식을 접하고 어린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하는데 자극을 받아 3월 15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일어서기로 약속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國家報勳處 發行)에는 개인별 공적에 표시된 내용과 《전북지역 독립운동사》 264面에 3월 23일로 기록되어 있는 오수 장날이기도 한 이날, 기미를 눈치채고 임실군수, 경찰서장 등이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하여 지방 유지들을 두루 만나 회유협박을 했다. 그러나 유지 가운데 이기송, 이만의, 오병용 등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마침내 강행했다. 그리고 인근의 동지들에게도 미리 연락을 취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오수면은 물론이고 지사, 삼계, 덕과, 사매, 산서면 등 부근의 다른 지방에서도 많은 인사들이 모여들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오수보통학교는 남원의 보절면, 덕과면, 사매면의 학생과 장수의 산서면 순창의 동계면 학생들도 다니던 때라 그곳의 학부형들도 자연스럽게 오수에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날 이기송은 연단에 올라 3․1운동에 대한 일장연설을 하고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모여든 군중들도 따라 연호하며 태극기를 흔들어 댔다. 하오 2시, 비록 처음에는 불과 20~30명의 소규모였으나 이기송이 일본인 경찰서장과 맞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다가 끝내 체포당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삽시간에 참여하는 군중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천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오병용, 이병렬, 이만의, 김일봉 등의 뒤를 따라 진행하면서 이기송의 석방을 외치는 한편 80여 명의 성난 군중이 경비망을 뚫고 주재소에 난립하였다. 이에 놀란 왜경이 부득이 이기송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송을 구출한 군중들은 의기양양하여 다시 그를 앞세우고 시위를 계속하여 석양 무렵에는 그 수가 약 이천여 명으로 불어나는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이리하여 시장은 철시되고 일인의 상점은 습격을 받아 파괴되고 급기야 면사무소는 시위대에 의해 점령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면사무소에 도달한 시위대는 면 직원들을 향하여 “너희들도 조선 사람이니 함께 나와 만세를 부르자.” 하였으나 겁에 질려 아무도 나서지를 못하였다. 이 때 일부 군중들이 면장을 끌어내어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게 하니 그때서야 면서기들도 나와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면사무소를 나온 만세 대열은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곳에 가 본 즉 주재소는 이미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그러나 이만의가 창문을 부수고 주재소 안에 돌입하여 주재소에 잡혀와 있던 동지들을 풀어주니 주재소 안에 있던 순사보 高宅基가 총을 겨누며 위협하였다. 이만의는 덤벼들어 총을 빼앗고 그에게도 만세를 부르도록 시키니 만세운동은 다시 한 번 환호성을 올리며 그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자 저녁 무렵, 비상정보를 받고 남원에서 출동한 일본헌병 분견대와 임실경찰서의 무장병력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에게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삼계면 출신인 허박(許樸)이 그 자리에서 순직하고 많은 부상자가 속출하여 부득이 해산되었다. 군중들은 흩어지고 날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만세운동을 하던 시위 군중들은 바로 흩어진 것이 아니었다. 밤이 되자 흩어진 군중들은 삼, 사백여 명씩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여기저기서 날이 밝을 때까지 외쳐댔다. 그러나 이 때 이지역의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둔남면의 이기송을 비롯 이윤의, 이주의, 이회열, 오병용, 이병렬, 이용의, 이만의, 이기우, 김용식, 하용봉 그리고 삼계면의 허섭, 영광군 법성포의 양태환 등이 체포 구금되었으며, 이 가운데 이기송, 오병용, 이윤의, 이주의, 이만의 등 지사들은 재판에 넘겨져 2년~7년의 실형을 받고 항고하기도 하였다. 이 고장의 명문인 전주 이씨가 태반으로 이들의 억울한 법정투쟁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기송의 치열한 법정항쟁은 재판관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으로 유명하다.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264面 (2004 年發行)《任實郡誌》 (1997年 發行) 229面
 
 
❏ 雪山 李光壽 先生의 3·1運動 碑文
 
先生은 全州 李公 雪山 李光壽이다. 1896년 2월 15일 南原郡 사매면 대신리 매헌 이현기 공의 6형제 중 4남으로 南原龍城普通學校를 졸업, 京城師範學校에 다니던 중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겠다고 學生 동지들과 결합하여 지하운동을 하였으며 1917년 개교와 동시에 본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2월 초순에 동경 유학생 대표 崔八龍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선생께서 任實郡, 南原郡을 責任지시고 지방 실정에 맞게 국민을 總 蹶起 獨立萬歲운동에 참여케 하라는 지시를 받고 獒樹로 내려 오셨다. 3월 10일 첫 시간 교실에 들어선 선생님은 정장을 하신 채로 교단에 쓰러지시며 울분을 터트려 痛哭하셨다. 그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나라 잃은 설움과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니 어린 제자들도 감동되어 첫 교시가 끝나는 종을 신호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普通學校 학생으로서는 국내에서 唯一의 義擧로 日本人 교장과 일본 경찰들의 肝膽을 서늘케 하였으며 이 운동을 더욱 확산 전개코자 獒樹面을 위시한 인근 8개 면의 학부형들을 야간에 방문하고 이기송, 오병용, 이윤의씨 등과 모의하여 거사일을 오수 장날인 3월 23일로 정하였다. 운집한 군중들이 손에 太極旗를 흔들면서 獨立宣言文 낭독과 만세를 외치니, 이 운동이 25일까지 계속되어 日本 경찰에게 체포, 투옥된 애국지사가 부지기수였다. 이정기 공의 친절로 숙부와 친족들이 모의하여 4월 3일 덕과 사매에서 4일에는 남원 장날 장터에서 국민 독립만세로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와 투옥자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생님이 독립운동의 주모자임이 발각이 되자 교직을 사임하고 만주 길림을 거쳐 러시아 일크스크시로 망명하셨다. 상해 臨時政府에 합류하여 활동 중 일본경찰에 체포 일본 동경에 압송 투옥 중에도 동경 유학생 조직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시다가 일경의 가혹한 고문으로 얻은 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귀국하셨으나 1948년 전주道立病院에서 숨을 거두셨다. 선생님이 몸담고 계셨던 본교의 어린 학생들이 全國에서 유일하게 독립만세를 외친 3월 10일 의거일을 기념하고 이를 이끌어 주신 선생님의 뜻을 영원히 기리고 명복을 빌면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교정에 이 비를 세우노라.
 
1988년 3월 10일 유족 子 석만(錫萬), 석진(錫軫), 석규(錫奎)
 
 
註 : 獒樹初等學校 校庭에 세워져 있음.
 
 
 

1.4. 제4절 靑雄面의 萬歲運動

 
청웅면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박준승 선생의 고향이다. 이런 연고로 이 지역은 일찍부터 항일운동이 싹이 트고 있었고 자부심도 대단한 고장이다. 청웅면에서의 첫 시위는 3월 11일 밤 9시 어둠을 이용하여 면내 애국지사들이 모여 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하였다(《전북지역 독립운동사》 266面에는 3월 15일로 기록되어 있음). 당시의 지도 인물은 이강세, 박용식, 한도수, 한기수, 이성의, 최종수, 이기섭 등이었다. 그리고 이 시위는 한 군데에서 집단적으로 이뤄진 대규모가 아닌, 각 리와 마을 단위로 산발적으로 일어난 분산 시위였다.
 
3월 15일 밤 9시를 택한 구고리 시위는 참가 인원이 백여 명이 넘었는데 이를 시발로 하여 16~17일에는 이강세, 박용식, 한도수, 한기수, 이성의, 최종수, 이기섭 등이 주동이 되어 구고리 중앙에 있는 큰 나무 아래 모여 대열을 짓고 마을을 돌며 만세를 불렀다. 또한 16일 밤 9시에는 남산리에서 정필조, 박준창 등의 지도로 주민 1백 50명이 뒷벌에 모여 만세를 불렀으며, 이 시위는 이튿날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한일봉, 최세철, 최영섭, 최병태, 성준섭, 최응삼, 문성술, 황성학 등도 이웃마을 옥전리, 석두리 일대를 두루 왕래하면서 만세운동을 격려하였다. 특히 옥전리와 석두리에서의 시위 도중 왜경에 체포되어 구금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별동대를 구성하여 분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대신 분통을 삭이지 못한 군중이 보복책으로 청웅면사무소와 일본인 주택을 습격 파괴하였다. 청웅면 일대의 시위는 그 후 3월을 넘기고 4월에도 줄기차게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註 : 《全北地域 獨立運動史》 266面 (2004年 發行), 《任實郡誌》 230面, 《靑雄面誌》 제 89面
 
 
 

1.5. 제5절 只沙面의 萬歲運動

 
지사면 방계리에서의 봉기는 3월 20일 상오 10시경에 일어났다.
 
청년 최완호, 이영곤 등이 주동이 되어 주민 70여 명이 북쪽 산마루에서 만세를 불렀고, 때맞추어 최상학, 최영필, 한인석, 최영렬, 최기현 등이 방계리 언덕에서 주민 50여 명과 더불어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21일 하오 9시경에도 같은 장소에서 김영필, 한인석 등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266面 (2004年 發行),《任實郡誌》 231面
 
 
 

1.6. 제6절 江津面의 萬歲運動

 
강진면 갈담리에서는 장날인 3월 23일 만세 시위를 했는 바 청년 이중혁과 엄길영 등 농민 수백 명이 가담하였다.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266面 (2004年 發行)《任實郡誌》 231面
 
 
 

1.7. 제7절 新德面의 萬歲運動

 
신덕면의 한정교(韓正敎), 나학용(羅學用)이 지휘하는 시위대는 4월 6일 밤에 신흥리와 삼길리 노상에서 만세를 불렀다.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266面 (2004年 發行)《任實郡誌》 231面
 
 
 

1.8. 제8절 聖壽面의 萬歲運動

 
성수면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불길처럼 번져갈 때 아직 조용했다. 이때 성수면 삼청리 천동마을의 박성식은 21세의 청년으로 정기태와 협의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3월 28일 밤 9시에 일제히 횃불을 들고 양지리 부동 앞산 ‘사창개’에 올라 백여 명의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쳐대니 밤하늘의 정적을 깨고 성수면 전체를 뒤흔들었다. 놀란 주재소 순사들이 총을 쏘며 산 위로 올라오니 군중들은 부득이 해산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 박성식과 정기태는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4월 7일 송귀남(宋貴男), 김제룡(金濟龍), 최극삼(崔極三), 송성학(宋性學), 문성술(文成述) 등이 성수면 오봉리 수방의 산중턱에 불을 질러 시위운동의 여세를 과시해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 임실 일대의 시위운동을 전체적으로 통찰해 보건대 대낮에는 워낙 왜경들의 감시가 심하여 부득이 밤의 어둠을 택해 시위를 벌였다는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임실군 일대의 만세시위 운동은 그 참가 횟수와 가담 인원이 많았던 만큼, 왜경에게 체포 구금되어 재판을 거쳐 옥고를 치렀던 지사들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형량도 최소 6개월에서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사람이 무려 80여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 가운데서도 韓榮泰, 金榮遠 등은 왜경의 모진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한 열사들이었다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266面 (2004年發行)《任實郡誌》 231面
 
 
 

1.9. 제9절 任實地域 萬歲運動 主動者의 行蹟

 
❀ 강 계 대 (姜啓大)
강계대는 1884년 11월 29일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739-2번지에서 父 강화수와 母 장덕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위암이고, 천도교인이다. 1919년 3월 2일 서울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를 임실읍 내의 관공서 게시판에 게시하였다. 그는 이날 운암면 지천리에 있는 천도교 교구실에서 교구장인 한영태로부터 박판덕, 한준석, 최영옥, 우성오, 황성진, 김영원, 박성근 등의 교도와 함께 독립선언서 9매를 전달받았다.
 
이에 그는 이날 밤 독립선언서를 학교, 경찰서, 면사무소, 장터 등의 관공서 게시판에 게시하여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이 지역 주민들에게 전함으로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3월 12일의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의 정신적 배경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체포되어 이해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수형번호 5-1489) 1971년 1월 24일 별세하였다. 고인의 후손은 강홍석으로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에 전적하여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195面
 
 
❀ 강 선 칠 (姜善七)
강선칠은 1892년 2월 30일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 덕재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판성(判聲)이라고도 하고 본관은 진주이다.
 
그는 1919년 3월 13일의 전주 장날을 이용하여 이운영, 김봉추, 김진영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곳은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천도교,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이 계획을 눈치챈 일본 경찰은 예비 검속을 실시하여 일부 주동자를 체포하고 각급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리는 등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어 신흥, 기전학교 학생을 동원하여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였고, 천도교 측에서도 교구실에서 수천 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각지의 교도들에게 13일의 만세운동 계획을 연락하였다. 거사 예정일이 다가오자 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눈치 챈 일본경찰과 헌병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3월 13일 정오, 그는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를 채소가마니로 위장하여 무사히 공립 제2보통학교 교정에 운반한 후, 기독교도와 천주교도학생이 중심이 된 1백 50명의 시위군중에게 이를 나누어 주고, 시위군중과 함께 공립 제2보통학교를 출발하여 대화동을 거쳐 우편국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헌병과 경찰이 우편국 앞에서 대치하여 승강이가 벌어졌다. 이때 시위군중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자 일제는 총검을 휘둘러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그는 이때 체포되어 이해 10월 4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수형번호 5-1482) 고인의 子 강윤희는 성수면 덕치마을에 살고 있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195面
 
 
❀ 곽 병 민 (郭秉珉)
곽병민은 1889년 4월 14일 임실군 오수면 주천리 711번지에서 부 곽정규와 모 김성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현풍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 장터에 모인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였다. 일본 경찰에 의하여 시위 주동자 이기송 등이 연행되자 주재소를 습격, 기물 등을 파괴하고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고향에서 살다가 1942년 11월 29일 광복의 기쁨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29面
 
 
❀ 곽 병 희 (郭秉禧)
곽병희는 1890년 8월 25일 임실군 오수면 주천리 691번지에서 부 곽보규와 모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장터에 모인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다가 일본경찰에 의해 시위 주동자 이기송 등이 연행되자 주재소를 습격, 총기를 빼앗고 기물 등을 파괴하며,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47년도 12월 10일 타계하였다. 孫子 곽효원과 증손자 곽진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30面
 
 
❀ 김 영 앙 (金泳昻)
김영앙은 본적이 오수면 봉천리이며 주소는 지사면 방계리로 되어 있다. 직업은 중매업(仲買業)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당시 40세에 3․1만세 운동에 참여하다가 1919년 5월 16일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대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것으로 수형자 명부에 나타났으나 그 외 기록은 없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김 영 필 (金永弼)
김영필은 오수면 봉천리 출신으로 고종 17년(1880년)에 태어나 중매업(仲買業)을 하고 있었으며 주소는 지사면 방계리로 나타나 있고, 이때 나이 40세였다. 선생은 인격이 뛰어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일찍부터 일본의 불법침략을 분개하여 오다가 때마침 3․1 운동을 당하니 면민의 지도적 위치에서 봉기하고 만세대열의 선두에서 싸웠다.
 
그러다가 불행히도 일경(日警)에 체포되니 그들은 소위 기미년 형공 제191호의 법령을 적용하여 전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3개월(보훈처의 자료는 대구고등법원에서 10월로 되어 있음)의 형을 언도받았다. 형을 마치고 석방된 후에도 선생은 끝까지 일제에 불복하니 그들의 압박이 날이 갈수록 심한지라 고향을 버리고 떠났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관리번호 35757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후손(後孫)들을 찾을 수가 없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86 面편집자 자료에 의함.
 
 
❀ 김 용 식 (金容湜)
김용식은 1892년 1월 16일 남원시 덕과면 고정리 출신이다. (《임실문화》 제6호, 1989년 발행, 81面에서는 오수면 출신으로 되어 있음.) 본관은 김해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출동한 한국인 고택기 순사에 의해 이기송이 강제로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촌정(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출동한 일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04面
 
 
❀ 김 일 봉 (金一奉)
김일봉은 1891년 4월 10일 임실군 오수면 동후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金海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 장터에 모인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고 일본경찰에 의해 시위 주동자 이기송 등이 연행되자 주재소를 습격, 기물 등을 파괴하며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4월 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孫子 김만두는 서울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88面
 
 
❀ 김 정 기 (金正基)
김정기는 1902년 12월 30일 임실군 오수면 오암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919년 3월 13일 전주 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기독교 측 인사들은 천도교 측과 함께 힘을 합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을 세우고 3월 13일 전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해 나아갔다. 이때 신흥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정기는 기독교 인사 및 기전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밤을 새우며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각지의 교도들에게 3월 13일의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긴밀히 연락을 취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3일 김정기는 신흥, 기전학교 학생들과 함께 채소 부대로 위장한 가마니 속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넣어 남문장터까지 무사히 운반하였으며, 정오경 남문에서 울려나오는 인경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천도교, 기독교인 및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학생 등 150여 명이 남문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김정기 등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시민들과 장사꾼들도 이에 호응하여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화동을 거쳐 우체국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피체(被逮)되어 4개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8월 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4券 208面
 
 
❀ 김 정 업 (金正業)
김정업은 1882년 3월 26일 임실군 삼계면 삼계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이기송이 강제로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촌정(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주재소 밖으로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일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10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06面
 
 
❀ 김 제 룡 (金濟龍)
김제룡은 1882년(고종 19년) 8월 14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에서 父 김운선과 母 吳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고물상 업을 하였으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선생은 일찍부터 항일사상을 품었다가 3․1 운동에 희생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때의 나이는 38세였다.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형공 제237호를 적용하여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1937년 10월 10일 별세한 것으로 제적부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34563호를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후손(後孫)은 주소불명으로 찾을 길이 없다.
 
註 : 《任實文化》 第6號(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63面편집자 자료에 의함.
 
 
❀ 김 종 식 (金鍾湜)
김종식은 1893년 8월 16일 임실군 오수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이기송이 경찰주재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촌정(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를 포위하여 “너희들도 조선 사람인데, 어찌하여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느냐?”고 호령하였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면사무소 안으로 밀고 들어가 면장과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일본 무장병력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그는 일제의 주동자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고인의 子인 金喆年은 오수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07面
 
 
❀ 김 종 윤 (金鍾閏)
김종윤은 1875년 1월 4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이기송이 강제로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촌정(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주재소 밖으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일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고인의 子 김상수(金相洙)는 고향인 오수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08面
 
 
❀ 김 종 창 (金鍾暢)
김종창은 1879년 5월 6일 오수면 둔덕리 531번지에서 부 김정기와 모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천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이곳에서는 이미 3월 10일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임실군 내에서 제일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에 의해 만세운동이 다시 계획되었다. 이들은 천도교, 기독교인들과 연락하여 장날인 3월 23일 오후 2시에 대규모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준비를 하였다. 3월 23일 오후 2시 이기송은 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연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따라서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후 시위군중들이 계속 모여들어 그 수가 2천여 명이 되었다. 이들은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완전히 파괴하고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로 몰려가 투석을 하고 창문 등을 파괴하였다. 김종창은 이날의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피체(被逮)되어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36년 12월 3일 고향에서 타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5券 134面
 
 
❀ 김 종 태 (金鍾泰)
김종태는 1885년 1월 18일 임실군 오수면 오산리에서 부 김문기와 모 소일택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 장터에 모인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고 일본경찰에 의해 시위 주동자 이기송, 김영필 등이 연행되자 주재소를 습격, 기물 등을 파괴하며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7년 9월 10일 고향에서 살다가 타계하였다. 후손으로는 증손자인 김재주가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92, 93面
 
 
❀ 김 찬 오 (金贊五)
선생은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263번지에서 1874년 12월 19일 출생하여 3․1만세운동 당시에는 45세의 나이였다.
 
그는 인품이 준수하고 학식이 있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일찍이 일본의 불의를 저주하여 오다가 때마침 3․1운동을 맞이하니 면민들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여러 차례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그 때마다 만세 대열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 체포되었고 소위 기미년 형공 제355호의 법령을 적용받아 전주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형을 마치고 석방된 후에도 선생은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므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 결국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방랑한 바 지금까지 거처를 모르고 그 후손(後孫)도 찾을 수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원 덕과면에 이사한 것으로만 추정한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84 面
 
 
❀ 김 태 순 (金泰順)
김태순은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출신으로 고종 32년(1895년)생이니 이때 나이 25세였다.
 
그는 일찍부터 일제의 불의를 저주하여 오다가 때마침 3․1운동을 맞이하니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여러 차례 만세운동을 거사하고 대열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끝내 일경에 체포되어 1년 형을 언도받고 출소하였으나 고향을 떠난 後孫들은 찾을 길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82 面
 
 
❀ 김 행 즙 (金幸楫)
김행즙은 1879년 4월 15일 남원시 사내면 월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2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출동한 한국인 고택기 순사에 의해 이기송이 강제로 체포 연행되었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고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일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12面
 
 
❀ 노 유 원 (盧有源)
노유원은 1873년 6월 27일 임실군 오수면 용두리 618번지에서 부 노석현과 모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장터에 모인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고 일본경찰에 의해 시위 주동자 이기송 등이 연행되자 주재소를 습격, 기물 등을 파괴하며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子 노순옥은 전주에서 살았으며, 현재 증손자는 노시중으로 밝혀지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118面
 
 
❀ 라 학 용 (羅學用)
라학용은 고종 24년(1887년)에 임실군 신덕면 삼길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나주 나씨 후예로 일찍부터 항일 사상에 불타오르다가 3․1 운동을 맞이하니 여러 동지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33세였다.
 
불행히도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선고받았는데 그 후 계속된 일제의 압박으로 고향을 떠나니 후손(後孫)들을 찾을 길이 없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76面
 
 
❀ 문 명 근 (文明根)
문명근은 1902년 2월 4일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에서 父 문한수와 母 엄수영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호는 오천(五泉)이다.
 
1919년 3월 당시 임실군청 사환으로 재직 중에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감동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서 이해 3월 5일 16세의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으로 일제 관공서에서 일하는 사람은 동맹 퇴직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여 전라북도 내의 11개 군수에게 발송하고 활동하다가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같은 해 5월 16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子 문병열은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에서 중앙의원을 경영하다 별세하였고, 후손인 문장곤은 임실읍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123面
 
 
❀ 문 성 술 (文聖述)
문성술은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출신으로 남평 문씨의 후예인 바 고종 광무 6년(1902년)에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이때 나이 17세 소년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로 용감하게도 항상 3․1운동의 선두대열에서 열렬히 활약하다가 불행히도 일경에 체포되어 기미년 형공 237호를 적용받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919년 5월 2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국가보훈처에서 34565호의 관리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그의 장남(長男) 용완은 전주에서 살았다고 한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64 面편집자 자료에 의함
 
 
❀ 박 덕 주 (朴德柱)
박덕주는 본적이 둔남면 오수리이며 주소는 전주 본동 253번지로 되어 있으며 조끼商을 한 것으로 되어 있고. 당시 26세에 3․1만세 운동에 참여하다가 1919년 8월 4일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전주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것으로 수형자명부에 나타났으나 그 외 기록은 없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박 성 근 (朴成根)
박성근은 1867년 5월 22일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父 박철수와 母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성암(成庵)이다.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와 3․1 독립운동에 관한 연락이 천도교 전주교구를 통하여 임실군 천도교 교구에 도착한 것은 1919년 3월 2일이었다. 그는 이날 천도교 전교사 최양옥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그가 거주하는 청웅면 지역을 책임 맡아 배포하였다. 또한 그는 장남 원엽에게 독립선언서를 청웅 면사무소 게시판에 붙이게 하였으며 장차 우리나라가 독립할 것이므로 일제에 항거하라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다가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그리하여 4월 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 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며.(수형번호 3-50) 1925년 1월 16일 고향에서 돌아가셨고, 고인의 손자(孫子) 박재영은 청웅면 구고리 고향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券 174面
 
 
❀ 박 성 식 (朴成植)
박성식은 1896년 11월 28일 임실군 성수면 삼청리 천동마을 433번지에서 父 박홍준과 母 김홍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이요 호는 석천(石泉)이며, 시조는 고려예부상서 선(善)의 26세손이다. 그는 천품이 굳고 과감하며 강개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부모상을 당했을 때와 같이 통곡하더니 국장을 계기로 일어난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메아리칠 때 24세의 청년으로 인산(因山)에 참가 차, 서울에 상경하여 3․1만세운동에 동참하여 파고다공원에서 33인 대표들과 같이 만세를 부르고 귀향한 대표 중 한 사람이다. 임실 출신인 박준승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얻어 귀향하였다.
 
그때 임실, 청웅, 오수 등 다른 면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는데 성수면은 조용함을 느낀 그는 동지인 정기태와 협의하여 함께 독립선언서 20장을 만들어서 면 내에 배포하였다.
 
그들은 3월 28일 밤 9시를 기해 일제히 횃불을 들고 양지리 부동 앞산 ‘사창개’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100여 명의 군중이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성수면 소재지의 일경주재소까지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 후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암암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또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여 조상의 봉사와 빈민의 구휼 등에도 남의 모범이 되었음으로 복옹(福翁)이라고 일컬었으며 시문에도 뛰어나서 이름이 높았다.
 
광복 후에는 임실군수의 표창장과 군내 기관장들의 감사장, 3․1 운동 공로상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여 아쉬움이 더할 나위 없다. 고인의 子 朴炳互는 임실군 성수면 삼청리 천동에서 살고 있으며 손자 정규는 전주에서 살고 있다.
 
註 : 《任實郡誌》와 朴正圭의 자료에 의함.
 
 
❀ 박 용 식 (朴庸植)
박용식은 1881년 6월 7일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父 박흥권과 母 임씨 사이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본관은 함양이고, 호는 운고(雲皐)이다.
 
1919년 3월 16일, 17일, 19일 이강세, 한도수, 한기수, 이성의, 최종수, 이기섭 등과 청웅면 구고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6일, 17일, 19일까지 3일간에 걸쳐 2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소나무 아래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들을 인솔하여 구고리 일대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1919년 5월 28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수형번호 3-507, 5-1488) 1958년 3월 3일 돌아가셨고. 고인의 子 朴炳琦는 청웅면 구고리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19面
 
 
❀ 박 준 수 (朴俊洙)
박준수는 1873년 7월 27일 임실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2일의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이래 서울 및 도내의 전주와 임실 등지에서 거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공일, 이종대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2일 오후 5시 그는 장터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이에 호응하는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긴급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20面
 
 
❀ 박 준 창 (朴準昌)
박준창은 1890년 6월 30일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에서 父 박사범과 母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919년 3월 16일, 17일, 19일 정필조 등과 청웅면 남산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정필조 등 마을 유지들과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6일, 오후 9시경 남산리 뒷 들판에서 15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튿날에도 계속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29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수형번호 3-507) 1939년 3월 7일 순직하였으며, 고인의 孫인 朴 鐸은 임실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21面
 
 
❀ 박 태 엽 (朴台燁)
박태엽은 1893년 3월 28일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748번지에서 父 박용균과 母 김경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이 고장의 호족 함양 박씨의 후예이며 수심제 박훈(收心薺 朴薰)의 후손이고 아호는 일송(一松)이다. 일송은 영광 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재직 중, 3․1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때 약관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보다 먼저 18세 때도 전라도 관찰사 이두황(李斗璜)이 ‘한일합병문’을 낭독하자 의분(義憤)이 복받쳐 땅을 치며 통곡하니 이를 본 관찰사도 눈물을 흘리고 군중들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3․1 운동 지도 후 동지 16명과 함께 곧 체포되어 영광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광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을 마치고 석방된 후에도 비밀리에 대동단을 조직 구국운동에 평생을 몸바쳐왔다.
 
장남 세영은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여 남달리 노력한 끝에 보통학교 출신으로 보통궁시험(普通宮試驗)에 합격하였다. 그 후 다시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를 역임하고 그 후 서울에서 변호사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손자 박준은 현재 서울특별시 강동구 성내동에 살고 있다고 한다.
 
선생의 공훈기록이 파악되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58面
 
 
❀ 박 판 덕 (朴判德)
박판덕은 1900년 4월 8일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에서 태어났으며 판영(判永)이라고도 한다.
 
1919년 3월 2일 임실군 천도교구장인 한영태를 중심으로 강계대, 한준석, 최양옥, 우성오, 황성진, 김영원, 박성근과 함께 전주교구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배포문제에 대하여 협의한 후 마을에서 주민들을 규합하여 3월 12일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日警)에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4월 16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157面
 
 
❀ 소 귀 남 (蘇貴男)
소귀남은 고종 23년(1886년) 11월 2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907번지에서 父 소봉문(蘇鳳文)과 母 조광(趙光)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선생은 이때 나이 34세로 일찍부터 항일 사상을 품어 오다가 3․1 운동에 희생적으로 참여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21일 보안법 위반으로 형공 제237호를 적용하여 전주법원에서 6개월 형을 언도받았으며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34564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으나(보훈처나 수형자 명부에는 宋貴男으로 되어 있으나 성수면 제적부에는 없는 이름으로 파악됨), 불행히도 선생의 후손(後孫)을 찾을 길이 없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63面편집자의 자료에 의함.
 
 
❀ 송 성 학 (宋性學)
송성학은 1894년 8월 19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536번지에서 父 송문옥과 母 김장수 사이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여산이다.
 
1919년 3월 초순부터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이에 성수면 오봉리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같은 해 4월 7일 마을 뒷산에서 송귀남, 최극삼 등과 함께 마을주민들을 규합하여 뒷산에 모이게 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해 5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의 子 송길섭은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180面
 
 
❀ 심 상 용 (沈尙龍)
심상용은 1897년 8월 16일 임실군 오수면 용두리 913번지에서 부 심성택과 모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송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이기송이 강제로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주재소 밖으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47세의 나이에 4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을 찾지 못하여 훈장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 보훈처에서 관리번호 7863호를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오수면의 제적부를 열람한 바 청송 심씨이며 1897년 8월 16일생이니 3․1운동 당시 나이 22세이고 1966년 1월 17일 타계하였다고 되어 있다. 子는 심동섭으로 되어 있는데 위의 내용으로 보아 후손을 찾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차후에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됨. : (편집자의 의견임)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25面
 
 
❀ 안 성 섭 (安成燮)
 
안성섭은 1880년 10월 17일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203번지에서 안병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박정주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였는데,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박정주가 강제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주재소로 달려가 박정주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증손인 안태환과 안도빈은 강원도 원주시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3券 226面
 
 
❀ 양 성 도 (楊成道)
양성도는 1880년 9월 28일 임실군 청웅면 옥전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본관은 南原이다.
 
그는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소재 예수병원 사무원으로 있던 중 1919년 3월초 영명중학교 교사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등과 3월 6일 군산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는 상황에서도 만세시위를 강행하였다. 이들이 서울에서의 3․1 운동 소식을 접한 것은 3월 1일이었다. 서울에서 청년학도 김병수가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 등에게 선언서를 전달하면서 옥구에서의 만세운동은 즉각 추진되었다.
 
이때 만세운동의 중심인물들은 영명학교 교사와 양성도가 근무하는 예수병원의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거사 일을 3월 6일 군산 장날로 정하고, 영명중학교 기숙사 2층 다락방에서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였다. 그런데 3월 5일 오전에 이러한 움직임을 사전에 탐지한 일경에 발각되면서 박연세 등의 교사들이 피체(被逮)되었다.
 
이때 양성도 등은 더 이상 발각되기 전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으고 3월 5일 오후에 수천 매의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시위대는 군산시내를 행진하였으며,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5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이일로 피체(被逮)되어 1919년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물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수형번호 5-1498) 子 양병주는 서울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13券 68面
 
 
❀ 양 태 환 (梁太煥)
양태환은 1885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원래 은선암(隱仙庵)의 승려인데 이날 오후 2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이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이기송이 강제로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 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주재소 밖으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을 찾지 못하여 훈장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7890호를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3券 227面
 
 
❀ 엄 길 영 (嚴吉永)
엄길영은 1900년 2월 2일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 208번지에서 父 엄자명과 母 송선이 사이에서 5남으로 태어났으며, 오수면 대정리에서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실문화》 6호 72面 참고) 그는 1919년 3월 23일 강진면 갈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중혁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으며 이날 오후 3시 30분경 장터에서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24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77년 8월 3일 77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순직하였으며 고인의 孫子 엄기섭은 강진면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28面
 
 
❀ 오 병 용 (吳秉鎔)
오병용은 1881년 7월 8일 임실군 오수면 대정리 596번지에서 부 오정문과 모 김 정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이만의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때 주재소에서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출동하여 주동자인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시장으로 돌아와서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그곳의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고인의 子 오두엽은 고향인 오수면 대정리에서 살았었고, 증손자인 오송영은 정읍시 북면 화해리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30面
 
 
❀ 우 성 오 (禹成五)
우성오는 1880년 5월 16일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인으로 1919년 3월 2일 임실군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3월 2일 천도교 전주교구로부터 서울의 독립선언서가 임실군 천도교 교구에 도착하자 이날 정오경 그곳에서 교구장인 한영태 및 천도교도인 강계대, 박판덕, 한준석, 최양옥, 황성진, 김영원, 박성근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의 배포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때 한영태로부터 전해 받은 18매의 독립선언서를 임실(任實), 오천(烏川), 두 면의 주요 장소에 게시함으로써 3월 12일에 전개된 임실읍 독립만세 시위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고인의 子 우봉민은 임실읍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31面
 
 
❀ 이 강 세 (李康世)
이강세는 1894년 6월 23일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6일, 17일, 19일 3일간에 박용식, 한도수, 한기수, 이성의, 최종수, 이기섭 등과 청웅면 구고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일간에 걸쳐 2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나무 아래서 만나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들을 인솔하여 구고리 일대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25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수형번호 3-507) 1937년 2월 20일 돌아가셨고, 고인의 子 이용재는 서울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33面
 
 
❀ 이 경 구 (李京九)
이 경구는 무주군 용계면에서 태어났다.
 
본 내용은 판결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32세의 나이인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김영필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註 : 판결문에서 인용함.
 
 
❀ 이 기 섭 (李起燮)
이기섭은 1882년 11월 15일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父 이성철과 母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6일, 3월 17일, 3월 19일 3일간에 이강세, 박용식, 한도수, 한기수, 이성의, 최종수 등과 청웅면 구고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일간에 걸쳐 2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나무 아래서 만나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들을 인솔하여 구고리 일대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16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69년 10월 29일 돌아가셨으며 고인의 孫子 이석재는 공직을 마감하고 전주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34面
 
 
❀ 이 기 송 (李起松)
이기송은 1888년 11월 7일 임실군 오수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미 오수리에서는 3월 10일 보통학교 학생들을 주축으로 임실군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본인 교장이 교사들과 함께 학생 및 학부형에게 당부하여 학생에 의한 만세운동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오병용, 이만의를 비롯하여 천도교인, 기독교인들과 연락하여 장날인 3월 23일 오후 2시를 기하여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이날 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따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시위군중이 점점 불어나 800여 명으로 늘어나고 기세도 오르자, 경찰주재소에서 파견된 순사가 그를 강제로 연행하여갔다. 이에 격분한 80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이 주재소 안으로 몰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당황한 일본인 순사 촌정(村井)이 그들의 위세에 눌려 석방하였다. 다시 그를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 군중이 시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전개할 때에 그 수가 2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만세시위의 대열은 면사무소에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 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대가 주재소로 쇄도하자 일본인 순사들은 달아나 버리고, 순사보 고택기만 총을 겨누고 위협을 하니 군중들은 총을 빼앗고 만세대열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며 만세를 부르게 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대거 출동하여 시위 대열과 대치하다가 무자비한 발포로 일단 해산되었지만, 시위군중은 3, 4백 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튿날부터 일제는 검속을 단행하여 결국 그는 체포되고 말았다.
 
1919년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에서 32세의 나이에 7년 형을 선고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여 독립만세의 당위성을 강력히 역설하였으나,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고인의 子 이강후는 전주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35面
 
 
❀ 이 기 우 (李起堣)
이기우는 1879년 8월 5일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455번지에서 부 이금용과 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이기송이 강제로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주재소 밖으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일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과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36面
 
 
❀ 이 만 의 (李萬儀)
이만의는 1880년 2월 28일 임실군 오수면 신기리 317번지에서 부 이석재와 모 황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출동한 한국인 고택기 순사에 의해 이기송이 강제로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일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1920년 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 및 소요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9월 30일 타계하였고, 고인의 손자(孫子) 이강재는 전주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38面
 
 
❀ 이 병 열 (李秉烈)
이병열은 1872년 1월 10일 임실군 지사면 옥산리 650번지에서 이정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광주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촌정(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김영필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孫子 이 용위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39面
 
 
❀ 이 병 춘 (李炳春)
이병춘은 1864년 2월 2일 임실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인으로서 1919년 3․1 운동 당시 전라북도 총 책임자로 상경하여 서울 파고다공원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준승과 긴밀히 연락하여,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전주 천도교구에 운반하여 독립만세운동 준비를 마쳤다. 그 후 상경하여 파고다공원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3년 형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하다가 발각, 체포되어 다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2券 393面
 
 
❀ 이 성 의 (李聖儀)
이성의는 1884년 2월 17일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6일, 17일, 19일 3일 간에 박용식, 한도수, 한기수, 이강세, 최종수, 이기섭 등과 청웅면 구고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일 간에 걸쳐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나무 아래서 만나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들을 인솔하여 구고리 일대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16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수형번호 3-507) 1938년 3월 3일 고향에서 돌아가셨고 그의 후손 이판봉은 청웅면 구고리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42面
 
 
❀ 이 송 의 (李松儀)
이송의는 1888년 5월 4일 임실군 오수면 신기리 263번지에서 부 이만우와 모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하오 2시경에 임실군 오수면 오수장터에서 이기송과 같이 장날 모인 다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고 계속하여 군중과 함께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의 총검을 탈취하였다. 또한 오수면사무소의 시설과 기물을 파손하는 등 시위활동을 하던 중 피체(被逮)되었다.
 
동년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동년 8월 5일 대구복심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子 이기준은 오수에서 살았으며 손자 이강국은 전주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8券 477面
 
 
❀ 이 영 보 (李永甫)
이영보는 1892년 5월 7일 지사면 방계리에서 태어나 거주하였다. 1919년 3월초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마을 뒷산에서 최원호, 최경호, 최영기 등과 함께 주민들 다수를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4월 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子 이곤호는 장수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263面
 
 
❀ 이 영 의 (李英儀)
이영의는 1890년 8월 1일 임실군 오수면 용정리 187번지에서 부 이창재와 모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병열, 이만의,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김영필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이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와 주거침입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80년 4월 20일 타계한 것으로 조사되고, 고인의 子 이기순은 오수에 살았었으며, 손자 이강길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43面
 
 
❀ 이 용 의 (李鎔儀)
이용의는 1888년 7월 9일 임실군 오수면 용정리 185번지에서 부 이창재와 모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 문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김영필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 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50세의 나이에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 8월 7일 타계한 것으로 조사되고, 고인의 孫子 이강안은 전주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46面
 
 
❀ 이 원 세 (李原世)
이원세는 본적이 청웅면 구고리이며 농업에 종사한 것으로 파악되고. 당시 26세의 나이로 3․1만세 운동에 참여하다가 1919년 4월 15일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전주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것으로 수형자 명부에 나타나 있으나 그 외 기록은 없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이 윤 의 (李倫儀)
이윤의는 1890년 11월 6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판결문에는 대정리로 표기됨) 88번지에서 부 이성우와 모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 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49년 5월 26일 타계한 것으로 파악되며, 고인의 子 이기대는 전주에 살았었고 그의 손도 전주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47面
 
 
❀ 이 재 의 (李宰儀)
이재의는 1885년 7월 7일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314번지에서 부 이민우와 모 송규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하오 2시경에 임실군 오수면 오수장터에서 이기송과 같이 장날 모인 다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고 계속하여 군중과 함께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의 총검을 탈취하였다. 또한 오수면사무소의 시설과 기물을 파손하는 등 시위활동을 하던 중 피체(被逮)되었다.
 
동년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동년 8월 5일 대구복심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4년 8월 7일 고향에서 타계하였고, 증손인 이강전은 부산시 영도구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8券 477面
 
 
❀ 이 정 우 (李鼎宇)
이정우는 오수면 용두리 418번지에서 부 이회정과 모 우씨 사이에서 1865년 6월 2일 태어나 3․1만세 시에는 54세의 고령이었다. 선생은 우리 고장의 명문 전주 이씨의 후예인 바 천성이 강직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일찍부터 일본의 불법적 침략을 저주하고 은밀히 동지를 규합하여 구국운동을 펴 오다가 때마침 3․1운동을 맞이하니 지도적 위치에서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여러 차례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노령을 무릅쓰고 항상 대열에 앞장서 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끝내 체포되니 일제는 소위 기미년 형공 제 234호의 법령을 적용하여 전주법원에서 4개월 형을 언도받아 형기를 마쳤으며 1923년 7월 19일 고향에서 타계하였다. 증손자인 이강산은 전주시 덕진구 인후 2동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공훈 기록은 없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文化院發行) 80面
 
 
❀ 이 정 의 (李正儀)
이정의는 1861년 8월 21일 임실군 오수면 신기리 240번지에서 부 이종우와 모 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오수리는 임실군의 동남부에 위치하여 남원군과 인접하여 있고 군내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는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중 서울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이기송, 이만의 등과 1919년 3월 23일을 거사일로 약정하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계획한 오수리 장날 8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 행진을 벌여 면장과 면서기 등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언도받고,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7년 2월 20일 타계하였으며, 子 이강년은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고, 손자인 이권재는 서울시 동작구 본동에 주소를 두고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券 360面
 
 
❀ 이 주 의 (李柱儀)
이주의는 1876년 9월 17일 임실군 오수면 용정리 186번지에서 부 이진우와 모 한오산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김영필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로 하여금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수형번호 3-506) 1923년 11월 27일 타계하였다. 고인의 子 이기한은 오수면 용정리에서 살다가 타계하였고 손자인 이강희가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48面
 
 
❀ 이 준 명 (李俊明)
이준명은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633번지에서 부 이회정의 아들로 고종 20년(1883년) 11월 21일에 태어났으며 이때의 나이는 37세였다. 선생은 우리 고장 명문인 전주이씨의 후예로 소년 때부터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에 깊은 적개심을 품어오다가 3․1운동을 맞이하자 면민들을 지도하며 거사를 하였다.
 
만세운동 대열에서는 항상 선봉장이 되어 열열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불행히도 일경에 체포되니 그들은 소위 기미년 형공 제 234호를 적용하여 전주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언도받았으나, 고등법원에서 3년으로 늘어나 옥고를 치렀다.
 
그의 손자인 이기신과 이기석, 이기흥은 현재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에서 살고 있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70面
 
 
❀ 이 중 혁 (李重赫)
이중혁은 1899년 12월 11일 강진면 방현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 장터에서 엄길영과 함께 장날에 운집한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1919년 4월 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은 후 4월 24일 대구복심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5년 중국 북경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중 일본군에 피체(被逮)되어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8券 482面
 
 
❀ 이 창 준 (李昌俊)
이창준은 임실군 오수면 대정리 389번지에서 1875년 9월 4일 부 이대오와 모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3․1만세운동 시에는 44세의 나이였다.
 
선생은 우리 고장의 명문인 전주이씨의 후예인 바 인품이 뛰어나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천성이 강직하여 일찍이 일본의 불의를 저주하여 은밀히 항일운동을 펴 오다가 때마침 3․1운동을 맞이하니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여러 차례 만세운동 대열에 앞장서고 항상 용감히 활약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 체포되니 그들은 소위 기미년 형공 제234호의 법령을 적용, 전주지방법원에서 8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형을 마치고 출소한 뒤에도 선생은 일경에 굴하지 않고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1년 6월 6일 타계하였고, 그의 장녀 이정례 여사가 오수면 둔기리에 거주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80面
 
 
❀ 이 춘 만 (李春萬)
이춘만은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242번지에서 1898년 2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정안이다. 선생은 3․1만세운동 시 나이는 22세의 청년이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품어오다가 3․1운동을 맞이하자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여러 차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끝내 일경에 체포되어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가족들은 전주로 전적된 것으로만 어렴풋이 추정되고 있으며 지금도 後孫들을 찾을 수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 : 《任實文化》 第 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81面
 
 
❀ 이 태 우 (李太宇)
이태우는 1867년 10월 13일 임실군 오수면 용두리 734번지에서 부 이회창과 모 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 장터에 모인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던 중 일본경찰에 의하여 시위 주동자 이기송 등이 연행되었다. 그러자 2천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어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물 등을 파괴하고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39년 1월 20일 고향에서 타계하셨고 그의 후손은 이기운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283面
 
 
❀ 이 하 의 (李夏儀)
이하의는 1871년 5월 18일 임실군 오수면 용두리 516번지에서 부 이기우와 모 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 장터에 모인 8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던 중 일본경찰에 의하여 시위주동자 이기송 등이 연행되자 주재소를 습격, 기물 등을 파괴하며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49년 8월 19일 타계하였다. 고인의 子 이기남은 오수면 고향에 살았었으며 손자 이강영은 서울시 노원구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286面
 
 
❀ 이 학 선 (李學善)
이학선은 1889년 1월 19일 임실군 신평면 창인리 36번지에서 父 이내백과 母 김계월 사이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본관은 경주이다.
 
선생은 천도교에 입도하여 활동하던 중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확실한 자료는 없다.
 
다만 53세의 고령임에도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1919년 10월 28일 전주법원에서 4개월간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룬 것으로만 파악되고 있으며, 제적부에 의하면 그는 관촌면 벌림정(伐林亭)(지금의 복흥리 금정마을 추정됨)으로 이사를 하여 살았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子 석규 석봉, 한철, 인철, 또한 관촌에서 낳아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이 회 근 (李晦根)
이회근은 1862년 6월 28일 임실군 지사면 안하리 452번지에서 이한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협천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김영필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 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1944년 1월 25일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당천집(唐川集)>을 발간하여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4개월 간 금고를 받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고인의 후손 이규생은 서울 강동구 암사 1동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50面
 
 
❀ 이 회 열 (李會烈)
이회열은 1872년 2월 9일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판결문에는 오수면 용정리로 기록)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 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4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고인의 子 이강우는 지사면 영천리에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51面
 
 
❀ 정 기 태 (鄭基泰)
정기태는 1892년(庚寅) 11월 21일 성수면 삼청리 천동마을 385번지에서 父 鄭汶容과 母 전주 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來)요 字는 경택(京澤)이며 호는 청강(淸岡)이다.
 
그는 효행과 경모사상이 투철하고 집안의 위선봉사로 평생을 일관하여 왔다.
 
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메아리칠 때 임실, 청웅, 오수 등 다른 면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는데 성수면은 조용함을 느낀 그는 동지인 박성식과 함께 독립선언서 20장을 만들어서 면 내에 배포하였으며, 3월 28일 밤 9시를 기해 일제히 횃불을 들고 양지리 부동 앞산 ‘사창개’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성수면 소재지(양지리)에 있는 일경주재소(日警駐在所)까지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 후 박성식과 함께 임실지구 주모자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암암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임실군수의 표창장과 군내 기관장들의 감사장, 3․1운동 공로상을 받은 바 있다.
 
그는 1966년(丙午) 4월 2일 향년 77세로 별세하니 配 창녕 성씨와 함께 성수면 삼청리 산 31번지에 합장하여 모셔져 있다.
 
장남은 강조(康朝)인데 1981년에 卒하고 현재 長孫子 인상(寅相)이 전주시 완산구 평화1동 일성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여 아쉬움이 크다.
 
註 : 長孫子인 寅相의 記述內容임.
 
 
❀ 정 종 수 (呈宗洙)
정종수는 본적이 청웅면 구고리이며 농업에 종사한 것으로 파악되고, 당시 37세의 나이로 3․1만세 운동에 참여하다가 1919년 4월 16일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전주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것으로 수형자 명부에 나타났으나 그 외 기록은 없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정 필 조 (鄭弼朝)
정필조는 1861년 9월 12일 청웅면 구고리에서 父 정기인과 母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16일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의 뒷산에서 박준창, 한일봉, 최세철, 최영섭, 최응삼, 최병태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150여 명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남산리 뒷벌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1919년 4월 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33년 1월 10일 돌아가셨으며 子 정한모는 청웅면 구고리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336面
 
 
❀ 진 만 조 (陳萬祚)
진만조는 1894년 2월 7일 남원시 덕과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을 세우는 데 동참하고 3월 23일 이기송의 주도 아래 이기우, 이윤의, 이주의, 심상룡, 이회열, 오병용 등과 함께 장터에 모인 군중을 규합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일본인의 가옥을 습격하는 등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피체(被逮)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1券 283面
 
 
❀ 최 경 호 (崔京鎬)
최경호는 1890년 7월 28일 지사면 방계리 607번지에서 최규삼의 아들로 태어나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초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마을 뒷산에서 최원호, 이영보, 최영기 등과 함께 주민들 다수를 규합하여 뒷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후손인 최동림은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2동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359面
 
 
❀ 최 극 삼 (崔極三)
최극삼은 1880년 12월 12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에서 父 최성춘과 母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通川이다.
 
그는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1919년 3월 초부터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윽고 4월 7일 밤 오봉리 후방산림에서 김제룡, 송귀남, 송성학, 문성술 등과 함께 다수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자부(子婦)인 하선학은 성수면에서 살고 있으며 손녀 최수자는 익산시 동산동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1券 292面
 
 
❀ 최 병 태 (崔炳泰)
최병태는 1893년 4월 15일 임실군 신평면 창인리 263번지에서 父 최응구와 母 라월촌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삭영(朔寧)이다.
 
그는 1919년 3월 초 오수면의 이기송의 주도 하에 일어난 오수 시장 3․1 만세운동의 핵심요원으로 오수면의 이기우, 오병용, 이송의, 김일봉, 지사면의 최경호, 최영열, 한일봉, 임실의 강계대, 문명근, 청웅의 박준창, 이기섭, 이용식, 최종수, 성수면의 문성순, 최응삼, 홍성학, 강진면의 엄길영 등과 함께 신평면의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그 후 3월 14일 전주 완산동 완산교 부근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전주는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기독교도, 천주교도, 학생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계획하여 3월 13일 전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 바도 있었다.
 
3월 14일 오후 3시경 전날 전개된 만세시위로 인해 일경과 일본 헌병의 경비가 한층 삼엄해진 가운데, 최병태 등 300여 명은 완산동 김제 가도를 출발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다가동 2가 쪽으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전날 시위 때 피체(被逮)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벌여나갔다.
 
그러나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본 경찰 수비대가 무력을 행사하여 시위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도자를 검거하였다. 그는 이 일로 피체(被逮)되어 이해 6월 2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65년 10월 23일 고향에서 7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子 최명우는 고향인 신평면 창인리에 살고 있으며 2남인 최봉우는 경기도 부천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4券 792面
 
 
❀ 최 봉 상 (崔鳳商)
先生은 안한경을이(安漢慶乙而) 7월 3일생이며 운암의 3열사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자료가 없어 증빙(證憑)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의 족보(族譜)에는 ‘3월 26일 졸(卒) 묘(墓) 당산동(堂山洞) 발생을미(發生乙未) 독립 선언시 유공(獨立宣言時有功) 왜경피체이옥사(倭警被逮而獄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3․1 만세운동(萬歲運動)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운암의 최동안(崔東安)은 그가 지은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책 속에서 선생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최봉상(崔鳳商) 선생은 구호(龜湖) 선생의 5대손으로 1855년 7월 3일에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에서 풍익(豊翊)의 2남으로 출생하시었다. 어려서부터 재기(才氣)가 넘치시어 15살 때 이미 경서(經書)를 통달하시고 1873년 족형(族兄) 봉성(鳳成)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은도(隱道)로서 수백 호의 동학교인을 입교시켰다.
 
1892년 임진 삼례취회(三禮聚會), 대신사신원운동(大神師伸寃運動)과 1893년 계사 서울 복합상소와 그해 보은취회 시 중요한 역할을 하시고, 1894년 갑오동학혁명 시 임실, 남원 석권 때는 물론이고 9월 남원 여원치대전이며 10월 전주, 삼례, 논산, 경천을 거쳐 그해 11월 공주대전에 참전하시어 용감히 싸웠으나 한일연합군의 신무기 앞에 동학군 수만 명이 전사하여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 선생은 여기서 패주하여 6년간을 은신생활을 하시고 갑신혁신운동 시 전라도 대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1906년 임실교구 신축사업, 삼화학교 건립사업에 그 공이 지대하시며, 1908년 무신의병(戊申義兵) 시 의병장 정상현 부대에 입대하시어 중요 역할을 하시고 이 사업이 발각되어 일본 헌병을 피하여 5년간 은신생활을 하셨다. 1918년 12월에 전주 이군필(李君弼) 집에서 3․1운동 준비 사전 모의에 참석하시고, 1919년 2월 27일 임실군 운암면 전교실(傳敎室)에서 3․1 거사 실천 조직 모의에 참석하시었다. 그해 3월 1일 12시에 봉화를 올리는 책임자로 국사봉에 봉화를 올리시고, 3월 2일 자정을 기하여 각 마을에 선언서를 붙이시고, 3월 10일경 운암면 지천리 양요정에서 청년들을 모아놓고 만세를 부르셨다. 이 사건으로 3월 15일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수차 혹독한 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혼자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시었다. 더욱이 내 나라를 찾기 위하여 우리나라 백성으로는 정당히 행할 바를 행하였는데 무슨 죄냐고 주장하니 혹독한 고문이 더욱 가해지고 불행히도 그 신문을 못 이기시고 옥중에서 임종하시었다.
 
선생께서는 갑오동학혁명(甲午東學革命)부터 14개 성상을 종교사업과 구국운동에 전심전력하시었다. 일본헌병과 경찰에 쫓기는 몸으로도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시고 전력을 경주하시다가 필경에는 일본경찰에 붙잡혀 심문치사(諶問致死)를 당하였으나 광복 된 지 40년이 지나도록 그 후손이 없어 현재까지 사적(事蹟)이 밝혀지지 않고 있음은 진심으로 통탄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註 : 《任實郡誌》 267面崔東安의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35面
 
 
❀ 최 상 학 (崔相鶴)
최상학은 1858년 4월 29일 임실군 지사면 안하리 262번지에서 부 최한도의 아들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0일 당시 22세의 어린 나이에 김영필, 최영일, 최기현, 한인석 등과 함께 지사면 방계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 오후 10시경 방계리에서는 두 갈래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한 갈래는 최완호, 이영곤 등이 주동이 되어 70여 명의 주민과 함께 방계리 북쪽 산마루에서 전개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시간에 그는 김영필, 한인석, 최영열, 최기현 등과 주동이 되어 방계리 언덕에서 5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마을을 돌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1919년 5월 16일 대구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고인의 후손인 최정규는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56面
 
 
❀ 최 세 호 (崔洗鎬)
최세호는 본적이 지사면 방계리이며 농업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당시 27세의 나이로 3․1운동에 참여하다가 1919년 4월 30일에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복심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것으로 수형자 명부 자료에 나타났으나 그 외 기록은 없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최 승 우 (崔承雨)
선생의 본관은 全州이며 1861년(철종 12년, 辛酉) 12월 28일 운암면 지천리에서 찬국(贊國)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휘(諱)는 준필(俊弼)이요, 字는 승우(承雨)요, 일명 성좌(聖座)이고 도호(道號)는 복암(復菴)이다. 평소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 앞에 굽힐 줄 몰랐으며 충성심이 강하였다.
 
어려서부터 동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국가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 전주에 창동학교(昌東學校)와 청웅면에 삼화학교(三和學校)를 건립하여 후진들을 가르치다가 일본 헌병에 의하여 폐교 당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3․1 운동에 가담하여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헌병에 쫓겨 은둔생활을 하면서 지하 독립운동을 했다. 1926년 65세로 세상을 떠나니 주민들이 애국지사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손자(孫子)인 최동안(崔東安)은 운암면 상운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가 지은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책 속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부께서는 1861년 포덕(布德) 2년 신유 12월 28일에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에서 찬국(贊國)의 장남으로 탄생하시니 휘(諱)는 준필(俊弼)이요, 자(字)는 승우(承雨)요, 일명 성좌(聖座), 도호는 복암(復菴)이시다. 조부께서는 5살 때부터 한학에 취학하시어 10살 때에 경서(經書)를 읽으시고 12살 때부터 동학(東學)에 입도(入道)하시고 포덕사업(布德事業)에 적극 노력하시다가 임진 신원운동(壬辰伸寃運動) 때 전라도 총대표가 되어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하시고 계사(癸巳) 보은(報恩) 취회며 경성복합상소(京城伏閤上疏)의 자리에도 참석하시었다.
 
갑오동학(甲午東學)에 전라좌도 도접주(全羅左道 都接主)가 되어 임실(任實)을 무혈(無血)로 석권하시고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시어 민정을 다스리고, 남원의 김홍기 대접주(金洪基 大接主)와 합세하여 진안, 장수, 무주, 용담, 남원, 구례, 곡성, 순창, 옥과를 석권하시고 그해 7월에 태인의 김개남 대접주(金開南 大接主)와 남원에서 합류하여 경상도로 행군하였으나 여원치(女院峙)에서 실패하여 동학군 수천 명의 사상(死傷)을 보았다. 작전계획을 다시 연구하던 도중 해월신사(海月神社)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북상 명령을 받고 전세를 변경하여 남원, 임실, 전주, 삼례, 논산, 경천을 거쳐 공주로 진격하였는데 전주에서 전봉준(全奉準) 군과 합류하여 마침내 손병희(孫秉熙) 선생 군과 합류하였다. 당시 군세는 손병희(孫秉熙) 선생 군이 십만이요, 전봉준(全奉準) 군이 3만 5천이요, 전라좌도 군이 6만 5천, 도합 이십만 병력이 공주에 집결하여 공격하였으나 왜병의 살인무기 총과 대포 앞에서 도저히 당할 수 없어 동학군은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어 수만 명이 전사하였으며 만부득이 패주하였다. 김홍기(金洪基) 접주는 남원에서 그해 12월 27일에 포도대장 이응백에게 체포되어 을미 2월 13일에 남원읍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전봉준은 순창군 쌍치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시고, 김개남은 전주 초록바위 상관에서 사형을 당하고, 최승우(崔承雨), 최유하(崔由河), 김영원(金榮遠), 한영태(韓永泰), 최동필(崔東弼), 김학원(金學遠) 등은 회문산까지 패주(敗走)하여 칩거은둔(蟄居隱遁) 생활을 6년간 하시었다.
 
은둔생활 도중 무술 3월 20일 부친께서 환원하시었다는 비보와 함께 유서를 받으셨다. 그 유서는 나의 유산을 구국운동과 종교사업에 전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유서와 비보를 접하시고 6명 모두 3일간 단식을 하였는데 시중을 들고 계신 아버님(宗箕)께서 효성을 다하시어 그 어른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 다시 수저를 들게 하였다 한다. 그 이듬해 증조부님 소상(小祥)때에는 여섯 분이 하산하여 제사에 참석하였다.
 
조정에서 동학금지령을 해제하자 다시 포교를 시작하여 1904년에 이르러 20,000여 교인을 확보하고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전국에 전개하였다. 그 내용은 국정개혁과 생활운동을 적극 추진하는 것이었다. 문자는 국문으로, 백의(白衣)는 색복(色服)으로, 공장을 설치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고, 제례(祭禮)는 허례허식이니 105일에 탈상하는 것 등이었다. 그 해 9월 1일에 20,000여 명이 색복(色服)을 하였고, 9월 9일 임실군 청웅면 남산(홈교리)에서는 5,000여 명이 삭발을 하였고, 김제(金堤)와 금구(金溝)에서 8,000여 명, 전주와 삼례에서는 9,000여 명이 삭발하는 등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친일파 이용구, 송병준 등이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단합할 것을 강요하여 우리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자 손병희(孫秉熙)선생께서 을사 12월 1일에 동학을 오늘부터 천도교(天道敎)라 개칭하시고 진보회(進步會)를 해산하여 천도교(天道敎)로 귀일(歸一)하시었다.
 
당시 임실 출신은 최승우(崔承雨), 김영원(金榮遠), 조석휴(趙錫烋), 한영태(韓永泰), 최유하(崔由河), 박준승(朴準承), 이기동(李起東) 등이다.
 
1905년에 천도교 임실 제1교구를 운암면 지천리에 건립하여 초대 교구장이 되시고, 청웅면 구고리에 임실 제2교구를 건립하여 초대 교구장에 박준승(朴準承), 2대에는 조부님(俊弼)이시다.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할 목적을 갖고 사재를 털어 청웅 삼화학교(靑雄 三和學校), 전주 창동학교(全州 昌東學校)를 건립하여 김영원(金榮遠)선생을 교장(敎長)으로 모시고 조부님께서는 양 교의 재단이사(財團理事)로서 우수한 청년들을 배출하시던 중 배일사상이 농후하다하여 일본헌병에 의해 포덕 50년 9월에 강제 폐교 당하였고 그해 10월에 전주 창동학교(全州 昌東學校)도 폐교 당하였다. 이 학교 출신으로 대표 일문은 삼십 삼인 중의 한 사람인 양한묵(梁漢黙), 박준승(朴準承)씨이다. 박용(朴龍) 역시 삼화학교(三和學校) 출신으로 일제 당시 한국인으로 초대 경부(警府)가 되어 3․1 운동 시 임실경찰서 근무 중 자기 어머니가 찾아와 칼을 내려 놓고 이 대열에 참가하라고 강력히 주장하니 용(龍)이 답하기를 그보다는 이 자리에서 그분들을 제 양심껏 도와주는 것도 한 방법이니 안심하시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 결과 비록 일본 경찰일지라도 우리 독립투사들에게 많은 선심을 써서 우리 임실은 6개월 간이나 계속 우후죽순처럼 만세를 불렀으나 옥고를 치룬 자는 전국적으로 제일 많으면서도 사망자는 타 지방에 비하여 적은 편이다.
 
다음 말씀은 조부님께서 늘 말씀하셨기에 기록에 남겨둔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배일사상(排日思想)이 더욱 굳어져서 특별 성심 및 희사금을 거출하여 천도교 대교당 및 우이동 봉황각 건축자금이며 무신의병(戊申義兵)의 군자금이며 모든 자금을 조달하시고 경술 7월 9일에 국치(國恥 :한일합병)를 당하매 7일 간을 단식하시며 특별 기도를 실행하시었다. 7일 간 단식을 계속하여 사경(死境)에 이르자 교우(敎友)와 친족들의 만류로 기도를 중지하시었다.
 
1911년 특별 성미금을 모금하여 구국사업에 전력하시었고 손병희(孫秉熙) 선생께서 밀령(密令)하신 독립운동자금 거출에 불고가사(不顧家事)하고 전심전력하시었다. 1913년 포덕(布德) 53년 계축에 독립운동 사전모의자 특별수련자 49인 중 한 사람으로 특별수련을 받으셨다.
 
성문회(聖門會)를 조직한 후 김영원(金榮遠), 한영태(韓永泰)선생과 같이 동합하여 구국동지회를 조직하고 착착 진행하던 중 일본헌병에 발각되어 이 단체도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이 성문회 자금도 조부님께서 책임을 지셨다. 1918년에 독립운동 거사 사전모의 전라북도 책임자로 밀령을 받으셨다. 같은 해 각 지방 교구를 순회하며 비밀조직을 완수하시었다.
 
1919년 3․1 운동 거사 밀령을 받으시고 전주시 노송동 이군필(李君弼)씨 집에서 2월 1일에 전라북도 각 지방 대표들과 모여 2차례 밀회를 갖고 2월 27일 운암면 전교실(傳敎室)에서 임실군 대표들과 밀회를 한 후 완전거사 실천에 들어갔다. 그 당시 부서는 봉화책(烽火責), 선언서책(宣言書責), 동원(動員) 및 연락책(連絡責) 3부로 나뉘어져 3월 1일 12시에 봉화로 신호하여 일제히 선언서를 붙일 것, 3월 2일 일제히 동원하여 각 면소재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밀약하였다. 봉화장소는 제1봉화 국사봉(國士奉), 제2봉화 청웅면 백연산(白蓮山), 제3봉화 덕치면 회문산(回文山), 제4봉화 삼계면 원통산, 제5봉화 성수면 상이암산(上耳庵山), 제6봉화 신덕면 치마산(治馬山)으로 전하여 봉화를 올리고 선언서며 사람 동원까지 물샐틈없이 진행되어 마치 일반 군중들은 바로 조국광복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맹렬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왜정이 군경합동 동원으로 군경의 총검 하에 모두 일시 해산하였으나 그 후 6개월 간 각 면에는 계속 독립만세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수백 명이 체포 되고 4명이 옥사하고 백여 명이 실형을 받았다. 김영원(金榮遠)씨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단독소행(單獨所行)이라고 하며 정당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함이니 당연지사라 하고 굴하지 아니하였다. 극심한 심문으로 불구의 몸이 되어 옥중에서 고생하시다가 그해 8월 26일에 옥사하시었다.
 
한영태(韓永泰)씨는 당시 교구장으로 3월 2일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당하면서도 모든 것을 단독 소행이라 주장하였다. 당시 조사관 경부(警府) 박용(朴龍)을 보고 “너는 삼천리 강산 대한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하시며 대한사람으로서 잃어버린 내 나라를 찾겠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 하며 대통으로 박용의 머리를 때리며 “내가 너를 가르칠 때 그렇게 가르쳤느냐?” 하고 호통을 치니 박용은 사제지간이 되어 조사를 못하고 전주로 이송하였다. 그러나 시종일관 조직 일체를 부인하시다 3월 9일 자정을 기하여 혀를 깨물고 옷을 찢어 새끼를 꼬아 목을 매어 순도(殉道)하시었다. 최봉상(崔鳳商) 허복량(許襆兩)씨 역시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정당한 일이라고 반항하시다가 혹독한 고문을 못 이겨 옥중에서 순도(殉道)하시었다.
 
조부님께서는 각 군을 순회하시며 만세를 부르도록 선도(先導)하시며 일본경찰에 쫓기는 몸으로 진안, 장수, 무주, 남원, 구례, 곡성, 순창, 담양, 장성 등지를 순방하시었다. 가사를 돌보지 않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시며 성금(誠金)과 희사금(喜捨金)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밀송하고 일본경찰에 쫓기어 3년 간을 집에 오시지 못하고 피신생활을 계속하시었다.
 
1924년 신유년에 이르러 일본경찰의 체포는 피하였으나 요시찰(要視察) 인물로 기재되어 그림자처럼 형사들이 뒤따라 다녔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고 계속 사업으로 자금을 거출하여 상해임시정부며 망명인사들의 자금조달에 전력하시었다.
 
우리집 가보(家寶)인 갑오동학 일성록(甲午東學日省錄) 31비록(秘錄)을 잘 보관하시던 중 불행히도 6․25사변 시 1950년 12월 31일 아군의 방화로 인하여 전 가옥이 소각당하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일성록(日省錄) 31비록 이외에는 무신의병(戊申義兵)때 임실 서부 의병대장 정상현(鄭相鉉) 씨가 발행한 250냥의 영수증이며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급한 일백 원의 영수증이 불 속에 들어가 그 자료가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다만 국가의 공훈기록에는 누락(漏落)되어 자세한 활동 상황을 인정받지 못함이 후손들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註 : 《任實郡誌》 268面崔東安의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17面
 
 
❀ 최 영 기 (崔永琪)
최영기는 1897년 8월 26일 지사면 방계리 598번지에서 최경신의 아들로 태어나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20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마을 뒷산에서 최원호, 최경호, 이영보 등과 함께 주민들 다수를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후손인 최장선은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368面
 
 
❀ 최 영 열 (崔英烈)
최영열은 1869년 12월 14일 임실군 지사면 금평리에서 태어났으며 이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907년 1월 1일 이미 양한규, 박재홍, 양문순 등과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였으며 지사면의 군자금 조달책으로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3월 20일 같은 면 방계리에서 최기현과 함께 다수 주민을 규합하여 몇 차례에 걸쳐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피체(被逮)되었다.
 
그 후 1920년 3월 6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을 언도받고, 3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1년 10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손자(孫子) 최장호는 지사면 금평리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券 494面
 
 
❀ 최 원 호 (崔元鎬)
최원호는 1893년 11월 16일 지사면 방계리 622번지에서 최성보의 아들로 태어나 거주하면서 1919년 3월 20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마을 뒷산에서 이영보, 최경호, 최영기 등과 함께 주민들 다수를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4월 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후손인 최영훈은 인천시 서구 석남동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372面
 
 
❀ 최 종 기 (崔宗箕)
최종기는 1883년(고종 20년)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에서 승우(承雨)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부친으로부터 500석의 유산을 받아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특히 3․1 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운암면 일대에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그 후 1938년 천도교의 105일 심고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천도교 임실교구장이 되어 평생을 애국운동과 종교운동을 하다가 1953년에 별세하였다. 선생의 子인 최동안(崔東安)은 그가 지은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책 속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아버님께서는 1883년 12월 22일에 운암면 지천리에서 할아버지 승우(承雨)의 장남으로 출생하시었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시고 10살 되시던 해에 동학(東學)에 입도(入道)하시었다.
 
12살 때인 갑오동학혁명 시 동몽성찰(童蒙省察) 책임의 소임을 다하시고, 남원 여원치작전이며 공주대전에 참전하시고, 공주에서 패주하시어 부친과 삼형제가 회문산으로 입산하시니 순창군 유등면 유등리 외가댁에서 은신생활(隱身生活)을 하시면서 회문산에 은신하신 분들의 모든 연락을 다하시고, 1904년 갑신혁신운동(甲申革新運動)에는 전라도 청년책(靑年責)으로 그 소임을 다하시었다.
 
1906년에 천도교구 신축과 청웅 삼화학교 및 전주 창동학교 건립 재정책(財政責)으로 아버님의 뜻에 따라 전답을 매각하여 재정을 담당하시고, 중앙총부 건축자금이며 독립운동거사 준비자금 조달을 위해 전답을 매각하여 실행하였다. 1918년 12월에 기미 3․1운동 준비 밀회 장소인 전주 이군필(李君弼) 집에 참석하시고, 1919년 기미 2월 27일 운암 전교실(傳敎室)에서 3․1 운동 거사 모의에 참석하시어, 그해 3월 1일 자정을 기하여 국사봉에 봉화를 올리고 선언서를 붙이시고, 그해 3월 9일 운암면 입석리 양요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후 6개월 동안 일본 경찰을 피하여 각 면(面)을 순방하시며 만세를 부르게 주도하시고 이 사건이 노출되어 일본경찰이 체포하려 하므로 은신(隱身)생활을 3년 동안 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재지에 있는 집을 도저히 갈 수 없어 최봉덕(崔鳳德) 씨와 박정삼(朴正三) 씨 주선으로 소재지에서 4㎞ 떨어진 기암리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심하여 집에서 1㎞ 떨어진 박정삼 씨 도장방 밑에 굴을 파고 토굴 생활을 4년간이나 계속하여 이 험악한 수사망을 피하였다.
 
1929년 포덕 70년에 특별성금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 밀파원(上海臨時政府密派員)에게 전달하고 그 후 임시정부의 직인이 찍힌 일백 원 권의 영수증을 보관하였으나 6․25 사변 당시 전 부락 소각으로 인하여 갑오동학 일성록과 기미 3․1 비록 또 이 영수증이 조국광복 시 가보로 알고 소중히 간직한 것이 근거가 없어지고 말았다.
 
1934년 포덕 75년 천도교 4세 교주 춘암상사(春庵上師)의 밀령(密令)으로 멸왜운동(滅倭運動)을 시작하시었다. 그 밀령(密令) 내용은 105일 특별연성(特別軟性)을 하되 심고(心告)에 개 같은 왜적 놈들을 무궁한 조화로 하느님께 조화 받아 하룻밤 사이에 소멸시키고 대보단에 맹서하고 한(汗)의 원수 갚아 보세였다. 이 심고는 일제가 물러날 때까지 계속하시었다. 또한 특별성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자금을 지원하라 하시었다.
 
아버님께서는 임실, 남원, 진안, 장수, 순창, 연원관(淵源管) 내교인 댁을 순방하시며 멸왜운동(滅倭運動)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5년간을 실행하시던 중 1938년 2월에 황해도 도경에 고발(告發)되어 천도중앙교회 간부 김재계(金在桂)선생 외 4명이 황해도 도경형사대에 구속되어 해주로 압송되었고 이 사건이 확대되어 전국 구파교인 연원대표가 구속되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으로 임실에서는 아버님 외에 김한경(金漢京), 박성언(朴成言), 최종택(崔宗澤), 김교승(金敎升) 5인이 구속되어 무수한 신문(訊問)을 당하시고 처음에는 강력히 부인하다가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되었다고 세계 만방에 선포하고 언어문자며 성(姓)까지도 창씨(創氏)라는 명목을 붙여 강제로 완전히 한국의 국문이며 언어까지도 없애려고 하였다. 또한 지나사변(支那事變)을 세계 제2차대전으로 계획을 세워 진행 중인 상태에서 이 사건의 관계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자로 구속하였으나 이 사건이 만약 확대되면 3․1운동 이상의 혼란이 올 것을 예상하여 일본 천황 소화(日本天皇昭和)의 특별명령으로 무조건 석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검거되었던 모든 교인들이 석방되었고 아버님과 같이 구속된 일행 5명도 구속된 지 21일 만에 석방되시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제는 사실상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항복한 것이었다.
 
아버님은 기미독립만세 이후 일본경찰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형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었다. 석방된 후 고문의 여독으로 3개월간 고생하시고 계실 때에도 3일이 멀다하고 항상 감시를 받아 왔고 그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외출하실 경우에는 그림자처럼 형사가 뒤따라다녔으나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시고 멸왜 운동(滅倭運動)을 1945년 광복 당시까지 계속하시었다.
 
일제의 항복 이후 우리나라는 자주독립국가로 될 줄 알았으나 불행히도 국토는 분단되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양 세력이 대두되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종교사업과 남북통일문제를 항시 걱정하시며 연원(淵源)들에게 지시하시기를 우리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으로 남북통일이 되어야 하며, 사상통일이 되지 않는 한 남북통일을 이룰 수 없으며, 남북통일 없이는 세계평화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우리 교인들은 정성을 한데 모아 조국통일에 정성을 다하라고 권유하고 특별연성(特別軟性)을 조국통일이 될 때까지 계속하라고 하시었다.
 
1946년에는 천도교 중앙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7년 4월 5일 조국통일추진위원회를 조직하시고 위원장이 되시었다. 1931년 포덕 72년에 특별성금을 거출하여 상해임시정부에 김재계(金在桂)선생을 통하여 제공하시었는데 이 증거는 중앙교회에서 발급한 은동장(銀銅章) 6점이 보관되어 있다.
 
1947년부터 5년간을 가사도 잊으시고 조국통일 사업에 전력하시다가 1951년 11월 신환(身患)으로 병석에 눕게 되시었는데 이듬해 3월까지 와병 중에도 염주(念珠)를 놓으신 적이 없이 주문을 계속 외우셨다.
 
그해 3월 14일 저녁 9시에 청수(淸水)를 봉행(奉行)하시고 아들 4형제를 불러서 유언하시기를 “우리 집은 4대를 계속하여 5백 석 전답을 다 매각하면서 구국운동과 종교사업 및 육영사업을 지속하여 왔는데 나는 명이 다하여 이 사업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내일에는 틀림없이 저세상으로 가게 되니 너희들은 포덕천하 광제창생(布德天下 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업을 이루도록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종교사업에 추호도 어김없이 봉행하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1952년 3월 16일 오전 11시에 환원하시니 향년 70세이시다.
 
 
그러나 선생의 자세한 공훈기록이 없기에 후손들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註 : 《任實郡誌》 268面崔東安의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43面
 
 
❀ 최 종 수 (崔宗洙)
최종수는 1897년 4월 20일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父 최석필과 母 박이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고은(高隱)이다.
 
1919년 3월 16일, 17일, 19일 3일 간에 박용식, 한도수, 한기수, 이강세, 이기섭 등과 청웅면 구고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일 간에 걸쳐 2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나무 아래서 만나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들을 인솔하여 구고리 일대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16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수형번호 3-507) 1974년 8월 30일 고향에서 돌아가셨고 고인의 子 최규성은 청웅면 구고리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57面
 
 
❀ 최 종 택 (崔宗澤)
종질(從姪) 최동안(崔東安)의 기록에 의하면,
 
종숙(從叔)께서는 종조부 인필 공(麟弼公)의 2남으로 1888년 5월 13일에 운암면 지천리에서 탄생하시니 처음 이름은 종연(宗淵)이요, 일명 종택(宗澤)이요, 도호(道號)는 계암(桂菴)이시다. 종숙께서는 5살 때에 한학에 취학하시어 한학을 공부하신 인품이 출중하시고 기골이 장대하신 분이다.
 
1894년(포덕 35년) 12월 7살 때 당시 남원군 둔덕방 둔덕리(현재 둔남면 둔기리)에 종형 종기(宗箕)씨와 외가댁에 피신하던 중 동학포도대장(이응백)을 보고 종형에게 이곳을 피하자고 말씀하여 외가댁에서 하인을 동반하여 순창군 유등방 유등리 종형의 외가댁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2년 간 한학을 읽으시고 9살 때에 귀가하시었다. 9살 때 동학에 입도하시어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布德天下 廣濟蒼生 輔國安民)의 대업에 전력하시었다.
 
1904년 갑신혁신운동 시에는 17세의 소년으로 청소년 선도책으로서 그 소임을 다하시고, 1905년 2월 4일 18세 때에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슬픔을 당하시었다. 그런 비통한 중에도 구국운동과 종교사업, 육영사업에 열중하시고 유산인 전답 백 두락을 매각하여 천도교 임실교구 신축, 삼화학교 건립과 구국운동에 기증하셨다.
 
1919년 기미 3․1운동 당시 천도교 임실교구 청년동원책으로 적극 활약하시었으며, 그해 3월 5일 운암면 국사봉 만세사건이며 3월 10일 양요정 만세사건(兩樂亭萬歲事件)을 종형과 공모하여 실행하시었다.
 
이 사건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려 하자 종형과 같이 3년 간을 숨어서 살아야했다. 구국운동을 계속하시다가 1922년 운암공립보통학교 건립추진회장으로 선임되시어 2년 간에 걸쳐 학교 건립에 열중하신 결과 1924년 5월 1일 준공 개교하였고 육성회장을 36여 년 역임하셨다.
 
1934년 4월 5일 제4세 교조 박인호(朴寅浩)의 비밀명령을 종형을 통하여 받으시고 멸왜독립운동(滅倭獨立運動)에 적극 활동하시었다. 희사금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고 105일 특별연성도 하시었으며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민족사상을 고취하시기를 5년 동안 계속하시었다. 1937년 2월 황해도 도경에게 신천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홍순희(洪淳熙)씨를 위시하여 수백 명이 검거되었다. 천도교구파 중앙간부 김재계(金在桂) 외 4명도 체포되어 황해도 도경으로 연행되었고 그해 3월에 각 지방으로 확대되어 지방의 구파 교인 총수들이 검거되었다. 임실에서는 최종기(崔宗箕), 박성언(朴成言), 김한경(金漢京), 최종택(崔宗澤), 김교승(金敎升) 등이 체포되어 수십 일 옥고를 치루었다. 소화(昭和)의 특명으로 전국에 검거된 교인이 석방되었다.
 
일제는 당시 한국을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자칭하며 언어문자는 물론 성(姓)씨 까지도 강제 창씨를 강행하고 세계 2차대전을 진행 중이었다. 일제는 만약 이 사건이 확대되면 3․1운동 이상으로 혼란이 봉기(蜂起)될 것을 우려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이들을 체포하였다가 무죄 석방한 것은 사실상 정신적으로는 일제가 우리에게 항복한 것이었다.
 
그 후 일본경찰에게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일거 일동에 형사가 그림자처럼 뒤따라 다녔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구국운동과 종교사업에 전력하시었다.
 
천사사(天師仕)의 감화지덕(感化之德)과 연합군(聯合軍)의 분투로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항복하였다. 8․15 해방을 맞이하여 우리 삼천만 민족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38선이라는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38선 이남은 민주공화국으로, 38선 이북은 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하여 6․25라는 전란을 맞이하였다.
 
종숙께서는 조국의 분단을 염려하시고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남북통일에는 사상이 통일되어야 하며 남북통일이 없이는 세계평화도 성립되지 않는다 하시며 임실, 남원, 순창, 장수 등 각 지방의 교인댁을 순방하여 민주주의와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을 통일하여 하루속히 남북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방안이라고 각 교인들에게 고취하시며 전심전력 조국통일 성업에 진력하시었다.
 
1957년 신환(身患)으로 회춘 못 하실 것을 예견하시고 아들 길성(吉晟), 중성(仲晟) 종질을 불러서 유언하시기를 “3대에 걸쳐 계속 사업으로 구국운동과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성업을 완수치 못하고 타계하게 되니 심히 유감이나 너의 재종형 동안(東安)과 상의하여 이 성업을 완수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1957년 4월 6일에 환원하시니 향년 70세이시다.
 
註 : 崔東安의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49~51面
 
 
❀ 최 종 호 (崔宗鎬)
최종호는 본적이 지사면 방계리이며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당시 30세의 나이에 3․1만세 운동에 참여하다가 1919년 5월 28일에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복심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것으로 수형자 명부에 나타났다.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36797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으나 그 외 기록은 없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하 용 기 (河龍基)
하용기는 1891년 1월 15일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판결문에는 오수리로 되었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때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 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子 하경옥은 전주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愛國志士 河公容基 墓碑文
 
河公의 諱는 龍基初諱는 容鳳이요 字는 成根 號는 江石이시다.
31世 始祖司直公諱는 珍以 後로 年代를 中略하고 10世祖 晋山府院君諱는 允源, 11世祖 聞慶公諱는 啓宗, 12世祖 按廉公諱는 仲龍이시며 父親의 諱는 永植의 三男으로 태어나셨다. 少年時節부터 英敏하시다는 讚辭를 받으면서 成長하였으며 天性은 剛直하여 他人의 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시는 儒生이셨다.
庚戌年에 倭賊이 우리祖國을 奪取함으로 國家自主獨立을 爲하여 地方儒生諸賢吳秉鎔 李起松 李倫義氏等과 相議하던 中 己未年 3 . 1運動이 展開되던 날이 마침 獒樹開市日이라 雲集한 數萬群衆을 設頭하시어 大唱 大韓民國獨立萬歲及示威를 誘導하시다가 倭兵들의 無差別亂射한 銃彈으로 因하여 解散되였는데 數日後倭警에게 逮捕되어 作計同志들의 姓名과 隱身處를 自白하라는 매질 손톱 밑에 竹針을 꼽는 等 形言할 수 없는 酷毒한 拷問에 못 이겨 氣折하셨다가 드디어 全州刑務所에 移送되셨다.
公께서는 本性이 剛直하신 탓으로 獄內에서도 倭食을 拒否하시고 죽음으로써 悲憤을 淸算하시려다 甚한 監視와 家族들의 勸誘로 自意를 未遂하셨다. 이와 같은 功績을 大韓民國政府로부터 認定받아 뜻깊은 光復節을 맞이하여 大統領表彰 1953號를 推敍받으셨고 後孫들의 學資金免除와 年金醫療專擇을 받게되었으며 今番 墓碑도 政府保助로 建立하게 되었기에 玆以 記錄함.
 
子泰明(系出) 泰根(京玉) 泰起(在起) 孫元秀 槿秀 承秀 志秀 汀秀
 
西紀 1985年 月 日
金于齊 짓고 河桂煥 씀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58面《三溪面誌》 第 175面
 
 
❀ 한 기 수 (韓淇洙)
한기수는 1884년 6월 5일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父 한 장석과 母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6일, 17일, 19일 3일 간에 박용식, 한도수, 이강세, 최종수, 이기섭 등과 청웅면 구고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일 간에 걸쳐 2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나무 아래서 만나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들을 인솔하여 구고리 일대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28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수형번호 3-507, 5-1, 48-8) 1927년 5월 8일 고향에서 돌아가셨다. 고인의 子 韓起相은 청웅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59面
 
 
❀ 한 도 수 (韓道洙)
한도수는 1872년 7월 19일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父 한규태와 母 양씨 사이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6일, 17일, 19일 3일 간에 박용식, 한기수, 이강세, 최종수, 이기섭, 등과 청웅면 구고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일 간에 걸쳐 2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나무 아래서 만나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들을 인솔하여 구고리 일대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1919년 5월 28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수형번호 3-507) 1925년 3월 2일 고향에서 돌아가셨다. 고인의 子 한병덕은 청웅면 구고리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59面
 
 
❀ 한 돈 석 (韓敦錫)
한돈석은 1896년(고종 31년) 11월 2일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이 고장 명문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후예로 일찍부터 일본의 불법침략(不法侵略)을 분개하고 은밀히 동지들과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여 오다가 3․1 만세운동을 맞이하니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의 나이 26세였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백여 명의 시위군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니 그들은 소위 기미년 형공 355호의 법령(法令)을 적용하여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형기(刑期)를 마치고 1년 반 만에 석방되었으나 옥독(獄毒)이 골수에 맺히고 나라 잃은 울분으로 신음하다가 미구(未久)에 졸(卒)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고인의 子 한택수(韓宅洙)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고 지금도 삼계면 어은리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60面
 
 
❀ 한 영 태 (韓榮泰)
임실군지에 의하면 한영태는 1854년에 지금의 오수면 한암리에서 태어나 17살에 운암면 구암리로 이사를 하고 최승우, 김영원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를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갑오동학혁명 때에는 동학군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며, 1917년 임실 천도교구장으로 취임하여 포교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3월 2일 밤을 이용하여 임실군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벽에 붙이고 다녔다.
 
그는 당시 임실군 천도교 교구장으로서 3월 2일 전주교구실로부터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즉시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 신자인 강계대, 박판덕, 한준석, 최양옥, 우성오, 황성진, 김영원, 박성근 등과 만나 이의 배포문제를 협의하였다.
 
이에 강계대에게 9매를 주면서 읍내의 장터와 학교, 경찰서,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도록 하고, 한준석, 김영원은 운암면내의 입석리, 선거리, 학산리 일대에, 박판덕 등 다른 신도들에게도 자기 거주 면내와 이웃 면내에 게시하여 3월 12일의 임실읍 독립만세시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이튿날 일찍 발견되고 한영태와 강계대는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니 이것이 임실에서 3․1 운동으로는 처음 체포되는 사건이었다.
 
체포된 후 3월 5일에 전주로 압송되어 3일 간의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는데 혹시라도 헛소리로 동지들의 이름을 누설할까봐 염려되어 혀를 깨물어 절단하고 미리 찢어 놓은 옷으로 새끼를 꼬아 전주형무소에서 목매어 3월 9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묘는 고향인 운암면 지천리 뒷산에 모셔져 있으나 후손이 없어 마을주민들이 제초작업 등 관리를 하고 있으며, 1992년에 군의 지원을 받아 묘는 단장되었고 비문도 세워 그분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으며, 매년 임실군의 지원을 받아 운암면민 다수가 참여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다는 이유로 아직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8084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韓榮泰先生의 碑文
 
韓榮泰先生의 號는 草菴이고 任實郡 屯南面 寒岩里에서 韓昌大公의 長男으로 出生했고, 1895년 甲午東學 革命時에는 이 運動의 先驅者 崔承雨 金榮泰 先生과 情文同生共死를 盟約하고 接主의 身分으로 當時 朝政에 항거했다. 1917年 62歲의 老齡으로 天道敎 任實敎區長에 就任 敎人들을 統合胎動하는 己未三一運動擧事에 對備하시고 任實代表로 崔承雨 金榮遠 姜啓大 朴成根 等과 參席 事前計劃을 樹立하였다.
1919年 서울로부터 傳達된 獨立宣言書를 任實郡地域에 配布 群衆을 先頭指揮 獨立萬歲를 高唱하시다가 倭警에 被逮되어 全州로 送致連日 苛酷한 拷問으로 時國拷問에 못 이겨 擧事同志들의 姓名을 自白할까 憂慮 三月 七日 深夜에 斷舌不言하시고 倭警이 筆書自白을 强要하매 同年九日子正에 裂衣作繩結項自決했음.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3券 261面《任實郡誌》 242. 267 面
 
 
❀ 한 인 석 (韓麟錫)
한인석은 한일봉이라고도 하며, 1896년 6월 7일 삼계면 용가리에서 태어났고, 지사면 방계리에 거주하면서 이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동지 최상학, 김영필과 주동이 되어 1919년 3월 20일 작은 언덕에서 시위군중 50여 명과 같이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동네를 행진하였고, 21일 오후 9시경에도 계속하여 같은 장소에서 다수의 시위군중들과 더불어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말미암아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그 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언도받았고, 5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월 형을 언도받았으며, 6월 26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子 한갑수는 남원에서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券 520面
 
 
❀ 한 정 교 (韓正敎)
한정교는 1892년(고종 30년) 10월 11일 임실군 신덕면 신흥리에서 父 한경리와 母 노명규의 장남으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3․1 만세 당시에는 27세였다.
 
선생은 우리 고장 명문 청주 한씨의 후예로 소년시절부터 은밀히 항일운동을 하다가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끝내 일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1919년 4월 20일 전주법원에서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았으나(임실문화지에는 후손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아직까지 공훈기록이 없다.
 
편집자는 신덕면 신흥리 한정교의 제적등본을 살펴본 바 처 이정순과 사이에서 규석, 홍석를 두었으나 2남인 홍석은 일찍 사망하고 규석은 논산시 강경읍 동흥동 62번지에 전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곳에서 자녀를 두고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내력을 찾을 길이 없다. 한정교는 1923년 9월 8일 진안군 정천면 봉학리 312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74面編輯者 資料에 의함.
 
 
❀ 한 판 교 (韓判敎)
선생은 청주 한씨 후예로 일찍부터 일본의 불법침략을 분개하여 은밀히 구국운동을 전개하여왔다. 그러다가 3․1 운동을 맞이하니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열렬히 지휘하고 끝내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록을 찾을 수가 없으며 또한 후손(後孫)들도 찾을 길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75面
 
 
❀ 허 근 (許 根)
허근은 1869년 6월 27일(고종 6년)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에서 태어났으며 3․1운동 당시 51세의 고령이었다.
 
선생은 지방의 명문 양천 허씨의 후예로 少時以來 항일사상이 남달리 왕성하여 비밀리에 동지들과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장날에는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장터에 모인 2,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고 일본경찰에 의해 시위주동자 이기송과 김영필 등이 연행되자 격분한 시위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습격하고 기물 등을 파괴하며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기미년 형공 제234호의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고인의 子 허중열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일제시대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삼계면 고향에서 살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386面《三溪面誌》 182面
 
 
❀ 허 박 (許 樸)
허박은 1879년 3월 6일(고종 13년)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에서 태어났으며 3․1운동 당시 44세였다.
 
선생은 지방의 명문 양천 허씨 후예로 소시 이래 남달리 항일사상이 농후(濃厚)하여 은밀히 동지를 구하되 널리 뜻을 함께하여 조직적인 구국운동을 하였다. 또 대중의 설득력이 있을 뿐 아니라 학식이 풍부하고 불의를 규탄하는 강개심이 있어 일본은 무도한나라이니 때가 오면 꼭 망하고야 말 것이라 믿어왔다. 때마침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만세운동에 평소에 사귄 동지들을 접촉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겁에 질린 일본경찰 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高宅基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이때 그는 체포되고 현장에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고인의 손자(孫子) 허관욱은 삼계면 덕계리 고향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殉國烈士 許 樸 碑文
 
嗚呼라! 此는 近故湖南烈士 梅軒 許公之藏也니 公의 諱는 박(樸)이요. 字는 春三이니 陽川許氏가 以駕洛國 首露王子之 後孫 孔巖村主 諱 宣文으로 爲始祖하다. 屢傳하야 有諱 亨孫 號易遂子하니 兵判이며 諡襄安이요 封陽川君하다. 是生 孝舜하니 進士에 洗馬翊贊이요 是生 允寬하니 進士요 是生 珪하니 進士요 是生 思益하니 國子進士요 是生 증하야 號는 西湖니 進士로 文章이 名世하니 寔公之 10世祖也라. 諱 馹 號 晩悔窩와 喆과 鑛과 洺은 高曾祖與考也라 妣는 星山李氏니 箕澈의 女로 四德이 兼備하다.
以高宗 丙子 2월 24일로 生公於木洞第하니 天性이 誠孝剛直하야 事親接人을 各盡其道하고 於文於武에 素能才藝요 精於義理하며 篤於愛國睦族하야 精神이 透徹하니 遠近이 咸稱하다. 公이 自無國以後로 忍痛含冤하여 與其亨及二弟로 同心糾合救國同志之際에 當己未年 3․1運動하니 奮然動本面 同志之士 數百人하야 直抵獒樹驛而與九面之三千餘群衆으로 合勢하야 連唱 大韓獨立萬歲하며 襲據倭警之駐在所하고 連二日而續萬歲示威하니 此是 湖南之最大壯擧也라 公이 自進先頭而高擧大韓獨立萬歲之血旗하고 橫行街道而連唱萬歲타가 忽中讐彈三丸於腹部하야 淋漓鮮血에 腸露數尺하되 九唱獨立而逝하니 豈不壯哉야 壽僅 44世也라 葬於三溪面德溪里 梅峰壬坐原하다. 配는 南原楊氏니 父는 在順이요 忌는 10월 10일이며 墓는 同封하다.
有 1男 2女하니 子에 錫萬이요 婿는 全州柳在根과 洪州李恒植이라 孫에 官旭 世旭 完旭이요 曾孫은 敏會 賢會 勝會라 日東珪 洋珪 鐵珪는 柳婿男이요 日永泰 永萬은 李婿男也라 嗚呼라 自古國亡之時에 爲君捨命을 如鴻毛之輕者는 寔出於秉彛之眞則 我韓之臣民이 皆孝公殉國之烈인들 應不見 36年之屈辱也리라 何幸天祚大韓하야 乙酉光復後에 自國家로 有表彰之典하고 追下建碑之思하니 公之孫 官旭 世旭 安旭甫가 抱其家狀而來余要役者는 以世居地近하야 熟於其烈故也니 豈以不文으로 辭諸요 依狀剛潤하야 敍其槪如右하니 自不禁由中之慨也而己로다.
 
大韓民國 67年 乙丑重陽節
首陽 吳炳根 撰幷書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61面《三溪面誌》 178~179面
 
 
❀ 허 봉 (許 鳳)
허봉은 1889년 6월 15일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에서 태어났으며, 지방의 명문인 양천 허씨 후예인 바 (삼계면지에는 고종 28년생, 1891년으로 기록되어 있음) 그는 일찍부터 일본의 불의를 분개하고 은밀히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가 29세였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 장터에 모인 2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시위주동자 이기송과 김영필 등이 연행되자 시위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습격하고 기물 등을 파괴하며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子 허순기는 고향인 삼계면 덕계리에 거주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387面《三溪面誌》 180面
 
 
❀ 허 섭 (許 燮)
허섭은 1889년 2월 24일(고종 27년)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일본의 불의를 분개하고 은밀히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때가 30세였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김영필, 오병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오수 장터에 모인 2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던 중 일본경찰에 의하여 시위 주동자 이기송과 김영필 등이 연행되자 시위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습격하고 기물 등을 파괴하며 구속자를 구해내는 등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이해 6월 6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기미년 형공 제293호의 법령을 적용하고 보안법 위반으로 전주지법에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에도 계속하여 구국운동을 하였으며, 그 후손인 子 허정욱은 삼계면 덕계리 고향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387面《三溪面誌》 181面
 
 
❀ 황 성 영 (黃成瑛)
황성영은 본적이 지사면 관기리이며 주소는 성수면 오봉리로 되어 있으며 숙박업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52세에 3․1만세 운동에 참여하다가 1919년 5월 19일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대구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것으로 수형자 명부에 나타났으나 그 외 기록은 없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황 성 진 (黃成瑱)
황성진은 1868년(고종 5년) 9월 16일 성수면 오봉리에서 父 황현묵과 母 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장수이다. 그는 52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한말 의병장 이석용 선생과 한 고장 태생으로 3․1 운동을 적극 지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고 기미년 형공 제209호에 적용시켜 전주법원에서 1년 형을 언도받았다. (수형번호 3-502호) 불행히도 후손(後孫)을 찾을 길이 없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63面
 
 
❀ 황 쾌 동 (黃快童)
황쾌동은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출신으로 고종 광무 2년(1898년)생이니 이때의 나이는 22세의 청년이었다. 선생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여 항상 남몰래 의분(義憤)을 참아오다가 3․1 운동을 당하니 주민들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열렬히 지도하였다.
 
그러다가 불행히도 일경에 체포되어 이른바 기미년 형공(刑公) 제231호의 법령을 적용하여 전주법원에서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장남 종환은 전주시에 거주하며 철물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확인할 수 없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66面
 
 
❀ 황 해 수 (黃海水)
황해수는 1892년 3월 2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6번지에서 父 황진연과 母 한덕순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창원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이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며 같이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高宅基)가 출동하여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병용, 이만의, 이병열, 김일봉 등 8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겁에 질린 일본경찰 촌정(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그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시위하며 행진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 면서기들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는 주재소의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 등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에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高宅基)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이날 저녁 남원 헌병 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응원 출동한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8월 15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73년 5월 6일 별세하였으며 고인의 子 황철생은 임실군 관촌면 두기리에 살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63面
【저작】 임실독립운동사 (2005)
• 제5장 任實 만세운동의 지주 金榮遠 先生
• 제4장 任實地域의 3․1 萬歲運動
• 제3장 任實地域 3․1運動과 時代的 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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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