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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독립운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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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018년 7월 31일
부록
제3장 海山 全基弘 義兵將
about 임실독립운동사 (2005)
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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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홍 # 창의동맹단
【저작】
(2018.07.31. 10:25) 
◈ 제3장 海山 全基弘 義兵將
전기홍은 자(字)가 수용(垂鏞)이며 호는 해산(海山)이고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1879년(고종 16)에 전병국(全炳國)과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의 장남(長男)으로 지금의 임실군 오수면 국평리 고전동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여의고 형수의 손에 의하여 자랐다.
 

1. 제3장 海山 全基泓 義兵將

 
전기홍은 자(字)가 수용(垂鏞)이며 호는 해산(海山)이고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1879년(고종 16)에 전병국(全炳國)과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의 장남(長男)으로 지금의 임실군 오수면 국평리 고전동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여의고 형수의 손에 의하여 자랐다.
 
천안 전씨의 시조 섭(聶)은 백제시조 온조왕 때의 환성군(歡城君)이었고 중시조 락(樂)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천안부원군이었다고 한다. 조선 초에 호조판서를 지낸 극예(克禮)가 단종(端宗) 폐위 사건으로 두 아들 자온(自溫)과 자양(自讓)이 모두 화를 입자 서울을 버리고 鎭安과 江昌으로 은거하였으니 그가 곧 전기홍의 14대조이다. 그로부터 克禮의 자손은 鎭安에서 번성하여 그 고을의 호족이 되었다.
 
해산의 아버지는 시골 선비로서 그가 어려서부터 재예가 출중함을 보고 일찍이 선생을 찾아서 그를 입학시켰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서와 역사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입학한 뒤 얼마 안 되어서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스승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문리를 깨우쳐 서법이 또한 극묘하였다. 자라서는 경적(經籍)을 널리 섭렵하고 특히 문장의 학을 좋아하여 한퇴지(韓退之)와 구양수(歐陽修)의 학문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옛 충신열사의 전기를 대하면 몇 번이나 즐겨 읽었다. 이와 같이 그는 어려서부터 재예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충절을 매우 높이 여겼던 것이다. 그가 뒷날 의병장으로 활약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 이미 그 바탕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95년(고종 32년)에 민비(閔妃)를 시해한 일본은 1905년(광무 9년)에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어서 우리의 주권을 빼앗았다. 이를 보고 그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사방에 뜻이 있어 앞으로 바다를 건너 천하의 대세를 널리 살피고 들으려 하였는데 금지를 당하였고 을사에 이르러서는 왜적과 우리나라의 5적이 군부(君父)를 협박하여 5조약을 맺어 우리의 정권과 삼천리 강토와 500년의 예의가 없어지고 오랑캐와 같이 짐승의 나라가 되었구나.” 하며 탄식하였다.
 
그 뒤에 면암 최익현이 호남에서 거의하였다가 대마도에서 순절하니 안팎의 의사들이 밤낮으로 계책에 골몰하게 되었다. 이때에 임실의 정재 이석용과 그는 본래부터 친분이 두터운 처지로서 의기가 서로 맞았는데 1907년 가을에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에 둘이서 조직한 창의동맹단의 부서는 다음과 같다.
 
 
의병대장 李錫庸
선봉 박만화(朴萬華), 최덕일(崔德逸), 송판구(宋判九),
중군 여주목(呂柱穆), 김운서(金雲瑞), 김성학(金成學),
후군 김사범(金士範), 윤명선(尹明善), 전성학(全成鶴),
참모 전해산(全海山), 한사국(韓士國), 이광삼(李光三),
총지휘 박갑쇠(朴甲釗), 곽자의(郭子儀), 임종문(林鍾文),
연락 홍윤무(洪允武), 박성무(朴成武), 윤병준(尹秉俊),
도로부장 김사원(金士元), 김공실(金公實), 김성율(金成慄),
보급 한규정(韓圭井), 박금동(朴今東), 박문국(朴文局),
운량 오기열(吳琪烈), 조영국(趙榮國), 김학문(金學文),
기실 전해산(全海山), 한사국(韓士國)
 
 
이 조직은 1907년 8월부터 1908년 3월에 남원의 사촌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할 때까지 유지되어서 남원, 임실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게 유격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 후에 이석용과 전기홍은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한 결과 전기홍이 전남 지방으로 가기로 하였는데 그 때 이석용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과 녹천 고광순(鹿川 高光珣), 김참봉 준(金參奉 準)의 창의군이 성세가 매우 컸는데 요사이 듣자 하니 성재와 녹천이 적에게 잡혀 순절한 후로는 김 참봉이 대신 대장이 되어 싸우고 있다. 나는 북도에 근거를 두고 의군을 모아 힘을 길러서 기회를 기다리고, 형은 남도로 내려가서 김 참봉과 합모(合謨)하여 일을 할 경우, 남과 북이 서로 의진한다면 성세가 저들과 겨룰 만한 것이어서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오.”
 
 
이와 같은 경위로 혼자서 전남 장성으로 간 해산 전기홍은 김 참봉이 지난 3월에 적군에게 포위되어 어등산(魚登山)에서 이미 순절(殉節)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광주와 나주 지역을 방황하다가 나주의 의병장 참봉(參奉) 오성술(吳聖述)의 집에 의탁하게 되었으니 때는 4월이었다. 오성술은 김 참봉을 도와 창의를 하다가 김 참봉이 순절하자 그 밑에 있었던 군졸을 모아서 재기할 것을 계획 중이었는데 마침 전해산이 가까운 곳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한 달 남짓을 그 집에서 지냈는데 김 참봉 부대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曺敬煥)이 또 남은 군졸을 모아서 적을 치고자 하여 해산을 찾아와서 대장이 되어 달라고 하였다. 해산은 이를 거절하여 ‘조장(曺將)은 김 참봉 군(軍)을 여러 해 동안 따라다녔으므로 여러 군졸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이제 새로 들어온 사람이라 여러 사람의 마음에 붙지 못하니 내가 마땅히 조장(曺將)을 따라서 상의하여 일을 함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여러 사람이 듣지 않고 대장으로 추대하니 그는 어쩔 수 없이 대장이 되어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조직(組織)하였는데 그 부서는 다음과 같다.
 
 
대동의병장 전기홍(全基弘)
선봉장 정원집(鄭元執)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척후장 임장택(林長澤)
도총장 김성채(金性采)
참모장 이봉래(李鳳來)
참모 이영준(李永焌), 김 돈(金 燉)
김공삼(金公三), 김원국(金元局), 이성화(李聖化)
 
 
해산(海山) 창의록(倡義錄)에 따르면 선봉장(先鋒將) 정원집은 한양(漢陽) 출신으로 키가 8척(尺)이나 되며 근위병 참위(參尉)로서 을사 5조약 때에 국사범으로 몰려 지도(智島)에 유배를 당하였는데 의병의 성세가 크다는 소문을 듣고 밤에 틈을 타서 망명하여 이 의군을 찾아온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밖의 사람은 기록이 없어서 신원은 알 수 없다.
 
이 창의단의 군졸들은 참봉 김준(金準) (金泰元이라고 나온 곳도 있음) 부대의 패잔병이 근간이 되었고 일본 측의 기록에 의하면 근처의 농민들을 포함 창의단의 규모는 1908년 8, 9월경의 최 전성기에는 총 병력이 300여 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포수(砲手)들을 데리고 와서 전력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그 편제는 군졸(軍卒) 위에 십장(什長), 도십장(都什長), 도포(都砲), 선봉장(先鋒將), 대장(大將)으로 되어 있는데 십장(什長)이 거느린 인원(人員)은 몇 명(名)인지 확실(確實)치 않다.
 
아무튼 이렇게 조직된 창의단은 조직을 마치고 선서를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의병이니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곧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행위는 절대 않는다.
 
2. 우리의 원수는 왜와 한인의 일진회이다. 이들은 보는 대로 죽이고 용서란 있을 수 없다.그러나 죄를 뉘우친 자는 후히 상을 주어 상과 벌을 명백하게 한다.
 
3. 싸움은 이기는 것이 목표이다. 이기면 이롭고 패하면 망하는 것이니 각 진은 적을 가볍게 보지 말고, 적을 습격할 때에는 필승의 계책을 세울 것이며 적을 만나면 되도록 산으로 유인하여 산 속에서 반격하여 백전백승을 할 것이다. 모름지기 삼가 싸운다.
 
 
그리고 해산 창의록에는 당시에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과 또 호남동의단(湖南 同義團)을 조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서는 다음과 같다.
 
 
대동의병대장 : 전기홍(全基弘)
제 1진 의병장 : 심남일(沈南一)
제 2진 의병장 : 박도경(朴道京)
제 3진 의병장 : 김영엽(金永燁)
제 4진 의병장 : 조대천(曺大川)
제 5진 의병장 : 신화산(愼華山)
제 6진 의병장 : 이순식(李淳植)
제 7진 의병장 : 이기손(李起巽)
제 8진 의병장 : 오성술(吳聖述)
제 9진 의병장 : 권 택(權 澤)
제10진 의병장 : 안덕봉(安德峰)
 
 
이 호남동의단은 호남지방의 의병연합체와 같은 성격을 띤 조직으로서 실제로 이 조직이 얼마만한 기능을 발휘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장들이 이와 같이 뭉쳤다고 하는 것은 작전에 유기적인 연락을 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그 이로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전 해산을 대장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 전해산이 의병들 사이에 어떠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아무튼 전해산은 장성에서 이와 같이 조직을 마치고 군사를 이끌고 7월에 영광으로 들어가서 군졸과 무기를 거두니 군용이 크게 떨쳤다. 곧 불갑사(佛甲寺 : 지금의 영광군 불갑면 불갑산에 있는 절)로 향하였는데 여기에서 왜적을 만나 싸움이 벌어졌다. 왜군은 의군을 보고 불갑산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의군의 선봉장이 용감히 앞장서서 천보총을 연달아 쏘아 왜적 두어 놈을 죽이고 또 선치에 구멍을 파고 매복시켜 적을 유인하니 적의 기마병이 따라왔다. 이에 매복하고 있는 의군이 일제히 일어나서 연달아 기마병을 죽이고 무기까지 빼앗았다.
 
불갑산의 싸움에서 전과를 올린 의군은 함평의 芝谷으로 가서 쉬고 이튿날에는 석문산(石門山)에 있는 오씨 제각에 들어가서 군졸을 점검하고 무기를 손질하며 머물렀다. 이때에 적이 광주로부터 각처의 헌병 보조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사면에서 의군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니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에 선봉장 정원집이 “왜놈들은 우리의 원수이니 이들을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라.”고 소리 지르며 연달아 총을 쏘니 적이 멀리 도망하고 의장 조경환(曺敎煥)이 또한 뒤로부터 서로 응하니 적들은 넋을 잃었다.
 
얼마 뒤에 대명동(大明洞)의 영사재(永思齋)에 주둔하던 적병이 와서 의군을 포위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전해산은 군사를 시켜 담 벽에 기대어 총을 쏘게 하여 대장 한 놈을 죽였으나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에 선봉장을 시켜 뒤를 쫓게 하고 군사를 모두 인솔하여 돌아왔다.
 
그 뒤에 의군이 순창과 담양 쪽으로 가다가 광주(光州) 대치(大峙)에 머물렀는데 적병이 사면에서 모여들었다. 이에 전해산은 모든 군사들을 일제히 매복게 한 다음 명령이 내리면 총을 쏘게 하였다. 적은 용맹을 믿고 출동하여 의병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니 방심하고 들어왔다. 이 때에 전해산이 사격명령을 내리니 의군들이 일제히 총을 쏘아 적을 수없이 죽이고 크게 이겼으며 그 총과 탄환과 복장까지도 다수 노획하였다.
 
대치 싸움에서 대승한 의군은 군사를 돌려 대치를 넘어서 장성을 무찌르러 간다고 선언하고 길을 바꾸어 자은동에 이르렀더니 적은 의군의 뒤를 밟아 대치에서 패한 분풀이를 하려고 사방에서 포위하여 왔다. 그리하여 싸우기를 한나절 만에 적의 많은 군졸들이 죽었으나 의군은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온전하게 돌아왔다.
 
적(敵)은 더욱 분하게 여겨 그 마을에 불을 질러 민가 100여 호가 타버렸는데 이 때문에 주민들은 왜(倭)놈들을 더욱 원망하고 해산(海山)은 원망하지 않았으니 이는 해산의 의기에 감동하였기 때문이었다.
 
호남지역(湖南地域)에서도 특히, 전남(全南)의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해안(海岸)과 내륙(內陸) 모든 곳에서 활발한 의병활동을 하였던 그가 자신의 호(號)를 해산(海山)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전기홍(全基泓)은 일본군(日本軍)과의 직접적인 전투(戰鬪) 외에도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 순경(巡警), 친일부호(親日富豪), 일진회원(一進會員), 세금징수원 등 친일분자를 상대로 이들을 위협하거나 회유하여 그 직을 그만두도록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때로는 집에 불을 지르거나 잡아다가 매를 때리어 다스렸으며 심한 경우에는 총살형으로 처단하였다. 따라서 전기홍의 의병진이 크게 활동을 벌렸던 장성, 영광, 나주, 함평, 무안 등지에서는 일본군과 경찰수비대들이 그 세력을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운 형편이었으며 친일분자들도 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전기홍의 명성은 호남일대에 신화처럼 퍼져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장성하면 전해산의 의병이 되라고 할 정도였으며 세간에서는 그가 전봉준의 동생이라는 헛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상은 전해산 의군의 주요한 전투를 살펴본 것이거니와 아래에 전해산의 진중일기에 나타난 몇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 무신년(1908년) 10월 11일
 
산마루에 유진하고 즉시 서양촌 사람으로 하여금 점심을 지어 오라고 하여 먹었다. 선봉장 정원집을 시켜 2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김기순을 잡아오게 하였다. 이때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데 나도 김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을 뒤쫓아 가서 산동리에 당도하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선봉의 동향을 물은 즉 과연 김기순과 함께 있다고 하므로 즉시 군인으로 하여금 일제히 마당 가운데에 열 지어 서게 하고 영을 내려 기순을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기순이 와서 인사하고 자리를 같이 하여 주인이 술을 내서 권하여 모두 마셨다.
 
여러 군사들이 기순을 엄습하여 죽일 양으로 이미 기순의 총 17자루를 빼앗고 종사 이봉래가 일본말로 선봉을 교섭하고 있는데 김 장군의 장포가 방안으로 들어와 기순을 치려고 하니 기순은 이미 이리 될 줄을 알고 손에 든 신식 양총을 발사하려고 했다. 때마침 선봉이 기순과 더불어 앉았다가 급히 기순이 손에 든 양총을 빼앗았는데 기순은 본시 몸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서 도로 곧 빼앗는 순간 여러 군사가 한꺼번에 몰려드니 중과부적이 되었다.
 
이윽고 기순이 이미 결박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진중에 들어가서 기순이를 잡아내게 하여 제 놈의 죄상을 낱낱이 말하고 밥을 재촉해 먹고 비를 무릅쓰고 耳岩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군사들이 폭우로 인하여 의복과 무기가 모두 젖었기로 의복은 말려서 입고 총은 탄약을 다시 장전하게 하였다.
 
 
❏ 10월 12일
 
이암에서 머물러 휴식하였다. 아침에 김 장군과 함께 포고문 한 장을 지어 산동방면에 게시하여 기순의 죄상을 공포하고 기순의 군인에게 각각 전일에 가졌던 무기를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에 김 장군이 “귀(貴) 진(陣)은 군사가 많지만 나는 일단 진을 분산한 이래로 아직까지 진의 기세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해산께서 군인 20명 만 허락해 주신다면 5일 후에는 나의 군사가 4, 50은 모이게 되겠다.”고 하므로 나는 여러 장수와 상의한바 혹자의 말이 “그렇지 않다. 방금 모든 군인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는데 만약 먼 곳으로 이송한다면 군사가 응낙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김 장군과 더불어 상의하였으나 그는 끝내 수긍하지 않고 기어이 진을 갈라서 군사를 모으기로 하므로 나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석양에 군사를 모아 줄지어 세우고 선봉으로 하여금 제 3, 4초의 부대를 거느리고 김 장군과 함께 장성, 순창 두 고을로 가서 흩어진 군사를 모집해 오라고 하니 군사들이 과연 응하지 아니하므로 나는 고집하고 강권을 발동하여 떠나게 하였다. 떠난 후에 얼마 안 되어 군사가 보고 하기를 “아까 약속한 바로는 제 3, 4초만 거느리고 가라는 것이었는데 지금 김 장군의 군인을 점검해 보니 각기 자기의 장수를 따라갔으니 만약 그럴진대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서 함부로 이런 일을 경솔히 허락할 수 있습니까? 군사를 회수해서 서로 나누어 각자 의견대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김 장군이 있건 없건 우리 군사에게 손익될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며 군사들이 매우 울분하므로 나는 즉시 제1초의 십장을 시켜 빨리 그 군사들을 거느리고 돌아오라고 했는데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
 
이윽고 와서 보고하기를 “김 장군이, 말이 장령과 틀린다고 하며, 군사를 돌려보내지 않고 육혈포를 꺼내어 마구 쏘아 죽이려고 했다.” 하므로 나는 듣고서 천천히 말하기를 “결코 그럴 리가 없다.” 하고 또 도포(都砲)를 시켜 선봉장을 데리고 오라 했는데 얼마 후에 과연 김 장군이 함께 돌아왔다.
 
김 장군이 “대장의 명령이 내려 이미 나와 동행할 것을 허락했는데 어찌하여 기피하고 자의로 돌아가라 한단 말입니까? 당연히 군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며 노기가 등등하므로 나는 큰 소리로 “그렇지 않다. 이 일은 죄가 그대에게 있지 나에게 있지 않다. 이번 행군이 중지된 것은 도시 귀군(貴軍)이 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감히 자의로 흩어져 감으로 기인된 것인데 어찌하여 우리 군사에게 죄를 돌리려 하느냐. 이미 이와 같이 틈이 벌어졌으니 진을 갈라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나는 내 군사를 거느리고 그대는 그대의 군사를 거느리라.” 하니 김 장군은 “그렇게 하겠다.” 하고 제 군사를 수합한 바 겨우17명 뿐이었다.
 
 
이 대목은 당시 의군의 조직과 이웃 의병장과의 제휴 관계, 명령계통 등을 대강 엿 볼 수 있는 부분이기에 소개한 것이다.
 
다음은 직접 전투한 부분의 일기를 소개한다.
 
 
❏ 10월 16일
 
영사재(永思齋)에 유진하고 휴식하였다. 이날 12시에 북정마을 사람이 쌀을 싣고 왔다. 군사들이 춥고 배가 고파서 견디지 못하였으므로 아이들을 시켜서 가져온 쌀을 방아에 찧어 밥을 짓게 하였다.
 
이윽고 한 사람이 와서 보고하기를 “북창 등지에 적 90여 명이 있는데 내용을 알 수 없다.”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의아해 하므로 즉시 윤일삼(尹日三)과 함께 가서 정세를 염탐하여 오게 하고 나는 급히 산마루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니 아직 아무 일도 없었다. 이때에 파수꾼이 춥고 배고파서 견딜 수가 없어 나무를 안아다가 불을 피우니 연기가 공중에 솟아올랐다. 그래서 아무리 불을 꺼서 흔적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군사들이 응하지 않았고 나 역시 심히 책망하지 않았다.
 
윤일삼이 방금 와서 아무 일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또 높은 봉에 올라 망원경을 비추어 보니 과연 적 20여 명이 갓모를 쓰고 왕산, 내동, 원당으로 줄지어 들어가고 흰옷 입은 놈 5, 6명은 순사 2, 3명과 함께 마을 앞 주점에 서서 사방을 관망하고 있으므로 나는 즉시 선봉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때 우리 군사가 아침밥을 먹고 있다가 적이 온다는 말을 듣고 일제히 산으로 올라오고 선봉도 와서 분산된 군사를 불러 산마루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선봉은 홀로 원당 근처를 향하여 적의 동향을 살폈다.
 
이윽고 적이 영사재 뒷산 기슭 깊은 골짜기로 향한다는 보고가 있으므로 나는 일찌감치 지달치(池達峙)로 향하여 군사들을 매복시키려 했으나 산 속이 짙지 않아서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군사들은 앞을 잘 내다보았다고 탄복했다. 조금 뒤에 흰옷 입은 놈 한 명이 노랑 옷 입은 놈 세 명을 끌고 돈목동(敦木洞)으로 들어오는데 이쪽저쪽이 과히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자 군사들이 포를 터뜨리려 하므로 나는 굳이 말리며 “적이 가깝게 침범하여 올 모양이니 가까운 거리에서 발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나는 전군을 끌어오려고 하는데 아군의 총소리가 일제히 터지므로 나는 이어 한 명을 데리고 즉시 달음질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양면의 총소리가 나란히 터졌다. 이때에 종사 여러분이 아래 재실에서 옮기지 않고 있다가 비로소 내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내 뒤를 따라 샛문 방으로 나와 석문 뒷산 기슭으로 올랐다. 무를 캐서 씹으며 떡을 꺼내어 먹었다. 그런데 우리 총소리는 점점 끊어지고 적의 총소리는 골짝 안으로부터 자주 터져 나오므로 그제야 우리 군사가 패한 줄은 알았으나 승패는 알 길이 없었다.
 
황혼을 타고 행군하여 산으로 들로 허덕이며 돌에 부딪치고 가시덤불에 찔리면서 밤이 깊어서야 겨우 덕령(德嶺)에 이르러 밥을 지어먹고 양지로 가서 유숙하였다. 이 마을은 족인(族人)이 살고 있으므로 모두 기뻐하며 영접한다. 그리고 때때로 음식과 과일을 대접하며.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어 내 마음이 편안케 해 주지만, 마치 못에서 나온 고기와 같아서 마음이 항상 근심스럽고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문득 우리 군사 수십 명이 이미 약속한 땅에 왔다고 들렸으나 실상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근처 사람인 도통장 김성채(金性采)에게 책임지워서 함께 가보게 한 바 안잔골로 찾아가서 만나지 못하고 다시 박잔골로 가서 역시 만나지 못하고 용머리로 가서야 비로소 만났다. 그래서 어제 싸움의 결과를 자세히 들은 즉 불행히 우리 군사 셋이 적의 총에 맞았으나 치료를 잘하면 별로 탈은 없을 것 같고 적은 많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때에 궂은비는 그치지 않는데 또 두어 사람의 보고가 있으므로 망원경을 꺼내어 바라보고서야 비로소 헛 놀란 것을 알았다. 밥을 재촉해 먹고 일어나 행군하려 하는데 김 장군이 따라나서지 않으며 하는 말이 “내가 본 병이 있으니 조리한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자.” 하므로 작별하고 함평 山內에서 이르러 유숙했다. 마을에 소상을 지내는 집이 있어 술과 찬을 가지고 와서 우리 군사를 위로하여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마을 사람과 군인을 시켜 세 군데의 길을 파수하게 했다.
 
 
이상은 1908년 10월 16일의 전투에 대한 일기인데 이 일기에서 우리는 당시 우리의 일반 국민도 의병에 대하여서는 후하게 대접하고 인정도 베풀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다음에는 전해산 부대가 장성에서 부안 변산으로 옮겨갔을 때 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기유(1909)년 윤 2월 7일
 
낮이 되자 수상한 자 세 사람이 삼인동(三人洞 : 지금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 부근 동네)으로부터 곧장 장수강(長水江)을 향하여 수다동(水多洞 : 고창군 심원면) 입구에까지 왔다가 되돌아서서 빨리 달아나므로 파수꾼이 매우 수상하게 보았다고 하자 임정택, 윤주사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정병을 뽑아서 그자들이 가는 길에 복병하고자 하므로 허락하였다. 그래서 그 길에 복병했는데 얼마 뒤에는 전혀 행적이 없었다.
 
아침에 마을 사람을 보내어 반곡(盤谷) 등지에 적이 오고 안 온 것을 염탐하여 오게 하였는데 여러 동네를 돌아보고 와서 “적이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종사원을 신흥(新興), 응현(應峴), 선운(船雲) 방면에 보내어 술, 안주, 짚신, 등속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그 중에 한 동네 사람이 숭어 한 쌍과 곶감 한 접을 가져 왔기에 즉시 숭어회를 만들게 하여 안주를 하니 빛이 극히 아름다웠고 잇새에 끼지도 않았다.
 
석양에 군인이 뒷산에 올라가 노루, 사슴을 사냥하는데 총을 오발하여 하나도 잡지 못하고 겨우 꿩 두 마리만 잡았기에 삶아서 찬(饌)을 만들라고 했다. 종사원을 고막포(古幕浦)에 머물러 있는 박도경(朴道京)에게 보내어 오늘밤에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유숙할 것인가를 물어 오게 하였는데 이윽고 다녀와서 회보하기를 “포대(砲大)의 말이 오늘밤에 바다를 건너서 부안으로 떠날 양으로 이미 배 네 척을 대기시켰으니 저녁 식사 후에 출발하여 고막으로 와서 함께 건너가자고 합디다.” 하므로 달빛을 타고 행군하였다.
 
고막에 당도한 즉 그 군사는 이미 좌대포로 옮기어 배에 올랐고 종사원 몇 사람만이 나를 기다리기 위하여 떠나지 않고 있으므로 곧 떠나서 좌대포에 당도하니 노 젓는 소리가 가깝게 들리는데 뱃사공이 이미 배를 대령하였다. 이에 배를 타고 나가는데 달빛은 새파랗고 바닷물은 아득만 하니 이른바 ‘한바다에 좁쌀 하나 격이라. 그지없이 흐르는 강물을 부러워하며 우리 인생이 잠깐임을 슬퍼한다.’고 한 저 소동파(蘇東坡)가 참으로 바다를 알았다고 하겠다.
 
군인 중에 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어 노를 저으며 배를 재촉해 가는데 노가 세 번 부러져서 배가 세 번 멈췄다. 바닷물이 불기 시작하고 또 바람은 한 점도 없으니 만약 노를 젓지 않으면 배가 가지 않는다. 나는 선 내로 들어가니 등불이 환하여 방안에 있는 듯하고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따금 배 위에 나와 멀리 바라보면 다만 산이 아슬아슬하고 사면으로 별들은 동요하여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뱃사공을 시켜 뱃노래를 부르게 하고 또 임강택으로 하여금 육자배기를 부르게 한 바 소리가 매우 맑고 슬퍼서 고향 친구 생각을 자아내게 한다. 8시에 배를 타서 11시에 한 석비 아래에 당도했는데 물과 바다로 20리 길을 지나온 셈이다. 큰 마을 하나가 있었으므로 이름을 물으니 바로 모항동(지금의 부안군 변산면)이었다. 2진이 함께 내려 유숙하였다.
 
 
❏ 윤 2월 8일
 
아침에 2진 군인이 왜놈의 배가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고 어젯밤 하륙하였던 곳으로 가서 복병했는데 그 배가 이미 의병의 종적을 보고 배를 돌려 빨리 달아나므로 천보총 몇 발과 신식 양총 몇 발을 쏘아 뱃놈 한 명이 잘못하여 부상을 입었다. 이에 마을 사람에게 “참으로 왜선이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습니다. 배는 비록 왜놈이 만든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군산항에 있는 장사꾼입니다.”고 한다. 지금 와서는 비록 왜놈이 아닐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야흐로 2진 군사를 백사장에 집합시키고 박도경이 꾸짖기를 “너희들이 싸움에 경험도 없으면서 함부로 쏘아 사람을 이와 같이 죽인단 말이냐. 만약 왜선이라면 큰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이며 삼가고 편히 지내는 것이 옳거늘 정령도 없이 포를 쏘아서 과연 왜놈을 죽였느냐. 더구나 상인이라면 비록 왜놈이라도 상관없다. 어찌 왜놈 장사꾼 한명을 죽이고 안 죽이는데 승패가 달렸겠느냐.” 하였다.
 
그리고 먼저 총을 터뜨린 자 몇 놈을 지적하여 용서 없이 죄를 주려고 하는데 포대 박도경이 나에게 이르기를 “무지한 몇 놈이 함부로 행동하여 큰일을 와해시킨 것 같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니 막설하는 것이 옳겠다.”고 하였다.
 
장차 출발하려고 하는데 촌장이 술을 권하면서 말하기를 “진작 전해산의 이름을 듣고 사모한 적이 오래였습니다. 오늘 아침 처벌은 아무리 당연하다 할지라도 특별히 용서하시고 마음 속에 묻지 마소서. 이 포구 백성으로 하여금 천지간에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시면 어떻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즉시 출발하여 절비를 어루만지며 언해를 안고 수십 리를 가서 제포(諸浦)에 이르니 바로 전일 찰방(察訪)이 살던 곳이다. 길을 멈추고 점심을 먹는데 마을 사람이 말술과 돼지 한 마리를 내어 군사들을 먹였다. 박도경이 밖에 나갔다가 와서 말하기를 “해산은 채석강(彩石江)이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가. 채석강이 여기 있고 칠산이 멀지 않으니 한 차례 구경한 뒤라야 이곳 풍경을 자상히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므로 점심을 마치고 김공삼, 원주사 두 사람과 4, 5명의 군인과 함께 한 큰 석축을 건너가니 바로 채석강이었다.
 
산 하나가 있어 높이는 천 길이 넘는 듯하고 폭도 처음에는 매우 넓었는데 수없이 덮치는 파도에 무너져 나간 모양이었다. 그 근처에는 오직 포개진 돌이 있어 층층마다 비단 무늬를 띠었고 조약돌도 다 닦일 대로 닦이여 무늬가 있으며 면면이 석대로 되어 반석이 크건 작건 각기 층계가 있는데 어떤 것은 수십 명이 앉을 만하며 간간이 석굴이 있고 또 모진 돌이 돗자리처럼 나열하여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토석이 바윗돌 같이 단단하여 좀처럼 부수어지지 않고 파도가 내리치면 소리는 큰 종이 울리듯 하며 형상은 빙산이 녹는 듯하였다.
 
나는 한 반석 위에 걸터앉아 일행들에게 이르기를 “이 반석에서 술잔을 나누며 시를 읊을 만하다.”고 하니 김공삼 씨가 눈물을 흘리며 “이번이 마지막이다. 어느 시절에 다시 좋은 세상을 만나서 이런 곳에 노닐 수 있겠느냐.”하였다. 바다를 끼고 산을 돌아보니 볼수록 더욱 기이하고 더욱 특별하므로 다시 그 상봉에 올라 한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 위에 여러 섬들이 지척에 날아 앉은 기러기와 같은데 위도(蝟島)가 七山 여러 섬 중에 가장 가까워서 만약 풍범선(風帆船)으로 건너간다면 삽시간에 저 언덕에 오를 수 있다.
 
연파를 바라보니 가장 절경인지라 군인이 “군사를 집결한다.”는 보고를 전해 왔으나 들은 척도 안했다. 석양에 다시 제포로 내려가니 2진이 방금 언덕 위로 모였기로 나는 아이 2, 3명을 데리고 강기슭을 따라 내려가니 흑백의 돌이 바둑돌로 쓸 만한 것이 많으므로 몇 10개를 주워서 주머니 속에 담으려고 했으나 행장이 무거워 그만두었다.
 
박도경 형이 나를 강기슭으로 불러내어 조용히 하는 말이 “아까 종사원 한 명이 민가에 들어가서 명주 베와 백목 각각 몇 자씩을 빼앗아 왔다는데 2진 가운데에 어느 놈이 그 따위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으니 빨리 군사를 집합하여 이 물건을 가진 자를 조사해 엄하게 다스리자.”고 하므로 “나는 그렇게 하자.” 하고 급히 점심 먹던 집으로 오니 이미 군사가 집합되었다.
 
그래서 종사원을 줄지어 세우고 그 장물을 수색하였으나 발견되지 않아서 한탄만 했을 따름이다.
 
석양에 행군하여 10리를 가서 2진은 마포(馬浦)에 머물고 나는 고사포에 머물렀다. 나는 고창, 무창, 부안 등지로 온 지가 이미 열흘이 되었으나 아직 발판이 생소한데 박도경 형이 나를 위해 호군장 손형(孫兄)을 붙여 주어 그들이 앞길을 인도해 줌으로 처음부터 타관의 맛이 없었다. 더구나 손형은 도의를 판단하고 원대한 계획을 품어 열변이 막힘없으니 참으로 강대한 남아였다.
 
위의 진중 일기에서 우리는 그의 낭만적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유람객이 아니고 의병장으로서 언제 어디에서 적을 만나서 어떠한 변을 당할는지 한치의 앞도 예측 못할 처지에서 마치 천하를 유람하고 다니는 유람객과 같이 명승지에 다다르면 시를 읊고 또 그곳의 경치를 샅샅이 적곤 하였으니, 이것으로 그의 여유 있는 마음가짐과 낭만적인 성격 그리고 고상한 취미를 짐작할 만하다.
 
그는 부안에 들어와서 앞에서 말했듯이 모항에서 내리어 격포(格浦)에서 채석강을 관람하고 고사포(高沙浦)에서 유진하고 중계(中溪)로 들어가 그곳의 산세를 보았으며 해창(海倉)으로 나와 의복동(衣服洞)에서 1박하고 노적리(露積里)의 박진사 댁에서 유숙한 다음 실상사(實相寺)를 거쳐 내소사(來蘇寺)에서 유숙하고 곰소로 나와서 다시 배편으로 고창으로 건너가서 영광 불갑산을 지나 함평에 이르렀다. 그가 왜적들과 싸웠던 전적은 단편적이나마 앞에서 소개하였으니 그것으로 대신한다.
 
 
전해산은 전남 지방에서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격문을 써서 여러 곳으로 보냈다. 그는 비단 왜적에 한하지 않고 인륜을 어긴 친일분자와 가짜 의병의 무리, 일진회원, 순경, 세금징수원 등에게 경계하는 격문을 보낸 것이다.
 
 
❏ 영산포 헌병 분대장 대원수사랑(大原壽四郞)에게 보냄
 
오호라! 사람이 하늘과 땅에 참여하여 삼재(三才)가 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윤기(倫紀)가 없으면 분별이 없고 분별이 없으면 금수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원인(原人)에서 중국의 바깥 지역을 말하면서 오랑캐라 금수라 하였으니 그로 보면 한국이나 일본이 모두 오랑캐요 금수다. 그러나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 쪽의 사람이 되어 예악과 문물의 거룩함이 자못 중국의 기품이 있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소 중화라 일컬어 왔던 것이다.
 
태평한 세월이 유구함에 반하여 난신적자가 나와 다투어 귀국을 따라 어진 임금의 대가 섰다고 잘못 알고 있으며 이등후(伊藤侯)가 왕을 죽이고 바꾼 것은 마침내 나라를 팔고 임금을 바꾸는 변이 있었으니 이것은 보는 바와 익히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며 어찌 우리나라 사람의 본성이 이와 같겠는가?
 
무릇 오랑캐다 금수다 하고 지목받는 그들도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면서 윤기(倫紀)도 없고 분병도 없기 때문에 귀하를 오랑캐와 금수라고 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귀국과 교제한 지 몇 해가 못 되어 소 중화가 갑자기 작은 오랑캐가 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큰 오랑캐가 아니냐?
 
아! 슬프다. 천지가 생긴 이래로 치세와 난세가 잇달아서 치세에는 윤기도 있고 분별도 있거니와 난세에는 윤기도 분별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윤기도 없고 분별도 없으니 난세가 분명하다. 난세가 되면 마음도 분리되고 도덕도 분리되므로 황제는 천하를 잃게 되고 왕은 나라를 잃게 되고 제후는 그 벼슬을 잃게 되고 백성은 그 집을 잃게 된다. 이것으로 귀국이 우리나라보다 먼저 망한다는 것은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걸, 주 같은 악으로도 천하를 잃었고 황우 같은 힘으로도 천하를 얻지 못한 것은 모두가 마음이 분리되고 덕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보조원은 귀하의 월급으로 한갓 먹고만 사는 자는 또한 윤기도 없고 분별도 없다면 귀하도 윤기도 없고 분별도 없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함평의 보조원과 나산(羅山)의 수비대는 모평(牟坪), 성산(城山) 등지에 출몰하여 모두가 부녀자를 겁탈하므로 어린아이나 남녀들이 집을 잃고 길가에 방황하여 그 원한이 하늘에 사무치는 현실이다.
 
천도(天道)는 지극히 공평하여 사가 없는데 귀하만이 어찌 홀로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옛날부터 전쟁을 난리라 칭하였는데 이것을 우리 폭도들 때문이라 하여 보조 병을 시켜 드나들며 노략질하며 구타하고 겁탈하고 살해하니 만약 우리의 바탕이 본래부터 포악하다고 인정되면 인으로 제지하고 의로써 본을 보인 뒤에야 혹 포악함을 버리고 덕으로 나아갈 이치이거늘 도리어 악으로 훈련시키고 간음으로 날뛰니 어찌 바라는 바가 있겠는가.
 
귀국이 비록 우리 대한을 삼켰을 지라도 귀하가 말하는 우리 폭도를 제거하지 못하면 마침내는 반드시 토해내고 말 것이니 원컨대 귀하는 공정한 마음으로써 의리로 저울질하여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보조원을 잘 훈련시켜 그 보조원이 우리에게 돌아오게 해야 환을 면할 것이며, 그래야만 명철한 보신책이 될 것이다. 내 말을 심각하게 듣고 반드시 채택하라. 아 아! 슬프다. 오늘에 한 일이 서로 싸우는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냐, 사람의 잘못이냐? 말로는 다함이 없으나 글로써는 다함이 있다.
 
무신 10월 씀
 
 
위의 격문은 1908년 10월에 당시 영산포 일본 헌병대장에게 보낸 글로써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인용하여 인륜의 화복을 통해서 천도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당시에 인륜이 상실되고 분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현실을 지적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 헌병대에서 임시로 고용해서 쓰고 있는 헌병보조원들의 만행을 지적하여 이들을 잘 훈련시켜 의병진으로 복귀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 헌병보조원들은 일본 헌병이나 수비대의 의병 토벌에 직접 동원되기도 하고 지역 주민들을 위협하여 의병들에게 협조하지 못하게 하거나 위장해서 의병진의 구성, 전력, 이동 상황 등의 정보를 탐지케 해서 의병 토벌에 이용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한국인 중에서도 무뢰배들이었다. 또 이들은 일본군의 위력을 등지고 살인, 강도, 강간, 약탈 등을 자행한 일이 많았다. 위의 격문은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당시의 헌병보조원의 실상을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다음에는 전해산이 격해주군반당문(檄該州郡反黨文)을 보냈는데 이 격문은 각 고을에 있는 헌병 보조원이나 그 밖의 친일 단체에 들어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으로 하루 속히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라는 내용이다.
 
 
❏ 격해주군반당문(檄該州郡反黨文)
 
아! 슬프다. 천하에 대의가 셋이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빠지면 사람은 사람답지 않고 나라는 나라답지 않다. 무엇을 대의라고 하느냐 하면조종( 祖宗)의 땅을 한 치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으며 조종의 백성은 한 사람이라도 오랑캐가 될 수 없으며 조종의 도학(道學)은 하루라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 도학이 만약 떨어진다면 임금은 임금답지 않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으며 아비는 아비답지 않고 자식은 자식답지 않아서 인도(人道)가 끊어지므로 땅과 백성은 없을지라도 도학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무릇 조종이 돈을 좋아하여 사람을 얻지 못하고 난신적자가 세상에 접종하려 멀리 해외의 더러운 오랑캐를 끌어다가 우리의 정권을 빼앗고 우리의 재정권을 움켜쥐더니 마침내는 없애고 두는 것을 제멋대로 하고서 임금과 신하와 아비와 자식의 윤리를 남김없이 쓸어버리고 우리 동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천지에 스스로 설 수 없게 한 것은 어찌 홀로 이등박문(伊藤博文)과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때문이겠느냐? 모두 조정에서 평일에 길렀던 무리들이 조야에 널리 펴져 있어 길을 이끌어 교제하고 그들의 사냥하는 매나 개가 되어서 반드시 우리의 종사를 뒤엎은 연후에 곧바로 좋아하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냐!
 
도대체 홀로 무슨 마음으로 심지어는 여러 모임이 함께 일어나고 여러 부호가 마음을 합하여 의리를 원수와 같이 보고 왜놈의 귀와 눈이 되어 학도라는 이름으로 성인을 헐뜯고 현인을 매도하며 회원이란 이름으로 왜놈에 아첨하고 원수를 섬기어 적들의 무기를 가지고 우리의 백성을 쫓아내고 반드시 우리 인류를 남김없이 죽이려 하니 우리가 살면 저들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일이 여기에 이르면 부모나 조종을 잊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나는 비록 불민하나 일찍이 당대의 대인군자와 상종하여 목숨을 바쳐서라도 의리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지난번에 시골에서 칼을 집고 일어선 성재(省齋)기삼연(奇參衍)의 가르침을 이어받았고 일찍이 성시를 방황하던 녹천(鹿川) 고광순(高光珣)의 절의를 사모하였던 것이다.
 
비록 이 분들과 서로 제휴하여 저 오랑캐를 무찔러 우리 국가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성이 갑자기 떨어져 영웅이 눈물을 머금고 있지만 이 의리는 천지와 같이 유구하고 일월과 같이 밝아서 생사로서 있고 없고 하는 것도 아니요 성패로써 더하고 덜 할 것도 아니다.
 
요즈음 군의 형세가 자못 떨어지고 의로운 깃발이 날로 날리어 김죽봉(金竹峰), 김치재(金痴齋)는 산골에 드나들고 이순식(李淳植), 박도경(朴道京)은 바다 연변에 연락하고 신화산(愼華山), 조대촌(曺大川)은 서북(西北)에서 경영하고 심남일(沈南一), 안덕봉(安德峰)은 동남(東南)에서 치달리고 나는 정원집(鄭元執)과 함께 수십여 진을 규합하여 산과 바다를 횡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벌떼같이 일어나는 장수와 독수리같이 덮치는 군사가 별처럼 밝히고 바둑처럼 놓여가는 곳마다 용맹을 자랑하며 맹세코 이 왜적의 무리를 없애기로 한다.
 
아! 불쌍한 너희 보조원은 이제 죄를 뉘우치고 한 놈의 적이라도 그 머리를 베고 진흙땅에 머리를 박고 살려달라고 청한다면 혹시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잘못을 그대로 저지른 다면 병력을 더하여 조건 없이 죽일 것이니 이 격문을 보고 후회함이 없도록 할 지어다.
 
 
다음에 전해산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격유가’(檄諭歌)란 것을 지어서 헌병 보조원에게 돌렸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 대동의병장 전해산은 국한문으로 한 격가로 여러 희도와 각도의 보조원에게 통유하노라
 
이내 몸이 표탕(飄蕩)하여 지구열방 유람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니 장할세라, 좋을 씨고 금수강산 삼천리에 천부지국 이 아닌가. 단군기자 먼저 나고 라여(羅麗) 점점 문명하여 성조용흥(聖朝龍興) 장할 씨고 예의문물 오백 년에 삼강오륜 밝았구나. 집마다 효자요, 사람마다 충신이라, 소중화(小中華) 좋은 이름 천지간에 자랑하다.
 
인천우로휴양(仁天雨露 休養) 중에 조종(祖宗) 덕택 부모 정혈(精血), 이 한 몸이 생겼구나. 이 한 몸이 생겼으니 어찌하여 이적(夷狄)되리, 이적 중에 태서인(泰西人)은 진순지기 미산하여 점피 덕화할 것 같으면 사람 되기 쉽거니와 흉추최피 왜노국은 예의염치 전혀 없어 예의 적은 것이 사갈의 성정이라 군신부자 제 알소냐.
 
난신적자 접종하여 시부여군 제 군신 제나라나 망할 것이지 대방을 탐방하려고 우리 난적 초인하여 흉두 본받아서 오흉 칠적 천만적이 조정 사방 포열하니 재상 방백 수령들과 일진 순사 보조병이 구적병기 들어 메고 형제 붕우조차 잡아 우리 인종 다 멸한다. 우리 인종 다 멸하면 저희는 살 것구나. 파란애급 요원하여 이목 불급되거니와 당당 월남 사천년이 우리 종교 숭상하여 예의지방 되었더니 불란서의 흉계로써 제반학교 권성하고 재권 정병 다 빼앗아 저의 계책 거의 되매 이십만 명 보조병을 후료로 모집하여 장열의병 다 잡은 후에 함의제(咸宜帝)를 잡아가고 10세 소아 찬립하여 심궁 뇌수하여 놓고 보조료를 전감하고 편복 랑자 역사 중에 저의 성명이 가련하다.
 
눈도 없고 귀도 없는 제반 회원 보조원아 우리나라 어찌되며 우리 임금 어디 갔노? 너의 성명 고사하고 너의 마음 쾌하겠다. 너의 조선 황천 중에 열성조를 뫼셨구나. 사직종묘 구허되면 무슨 안면 앙대할까. 신로 귀책 답지하여 그 자손을 생각겠다. 그 후료를 받아다가 처자 먹여 무엇하랴, 번연회오 어렵지 않다. 제 총 들고 제 칼 가져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놈, 도간진멸 반장사라, 살아서는 효자충신 죽어서는 의귀로다. 너의 화복 너 알아서 오래 집미 말아서라. 무지취사 민망하여 고자문유 일번 후 병력소가 요대 없어 이급처노할지 이 격도여장 무회하라.
 
 
다음에는 당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걷고 다니는 이른바 세무 영수원이란 자들에게 보내는 글이 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 게시 세무영수자류 (揭示 稅務領收者流)
 
무릇 지세(地稅)는 세상이 생긴 이래로 국가에서도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고 백성들도 이보다 더 중요한 책임 있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 액수가 있고 바치는 것도 그 시기가 있어서 나라는 온갖 용도에 궁색함이 없고 백성은 이바지함을 거역함이 없으며 위에서는 백성을 학대하는 정사가 없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호위하는 도리를 잃지 않았다. 이는 고금을 통하여 천하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공통하는 바로서 자기 백성이 아니면 받아들이는 법도 자기 임금이 아니면 바치는 이도 없으니 바로 천지의 상도요 고금의 통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태조 고 황제께서 국가를 창건하신 이래로 토지가 비옥하고 척박한데 따라 도주도 많고 적은 구분을 두어 나라에는 도안이 있고 고을에는 양안이 있고 들에는 금기가 있음으로써 관리들은 숙자를 불리는 농간이 없고 백성들은 부당한 과세를 물지 않았다. 그래서 삼천리강토와 500년 국가 종사에서 간격 없이 시정해 갔던 것이다. 혹시 흉년과 풍년에 따라 다소 변동은 있었으나 차라리 감액은 있을지언정 더 받는 일은 없었으며 국가가 함부로 징수하지 않음으로써 창고에는 남은 양곡이 있고 백성은 남은 자력이 있어 오랫동안 요순의 덕화를 누려 왔다.
 
천도가 무상한지라 나라의 운수가 비색하여 황위를 펼치지 못하고 왜적은 악독을 적신들은 외국과 결탁하여 국가에 화를 끼치는 것이 하도 많으니 낱낱이 들어 설명할 수 없다. 더욱이 왜놈들이 우리 강토를 억지로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 우리 정부에는 대신의 직책을 가진 자들이 왜놈에게 붙어서 나라를 좀먹고 있으니 더러운 자들이라 기대할 것조차 없거니와 소위 세무 영수하는 면장의 무리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민간인들로서 어찌 저 옛날 변장사가 한꺼번에 두 마리 호랑이를 잡듯이 못하며 어찌 저 월남의 지난 역사를 생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왜놈의 역군이 되어 낮이나 밤이나 풍우한서를 가리지 않고 동으로 서로 쉴새없이 쫓아다니며 그래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우리 대한국민의 한도 있는 재물을 가져다 원수인 왜적의 주머니에 넣어 주고 요순 같은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친히 구중궁궐에 계시어 신민의 봉양을 누리시지 못하고 요순의 세상에 사는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벼슬도 못하게 하고 농사도 못 짓게 하여 백성 된 직책을 못 지키게 한단 말인가.
 
아! 네놈들은 어찌 금수가 되려 하는가. 무릇 왜놈을 받드는 일이라면 조금도 기탄없이 달갑게 노예가 되고 왜놈의 명령이라면 엄하게 지키기를 우리 임금의 명령보다 더하여 민생의 재물을 빼앗기를 성화보다도 빨리하여 제 임금을 배반하고 왜놈에게 충성하여 제 아비를 버리고 왜놈을 공경하여 충성과 효도의 명예를 왜놈에게 얻으려는 것이 네놈들이 아니고 누구란 말이냐?
 
아! 이제 제 살을 베어서 굶주린 호랑이 배를 채워 주면 호랑이의 요구는 한도가 없고 제 살은 다 없어지게 될 것이니 살이 없어지고서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무릇 만물이 이제 목숨을 아끼는 것이거늘 어째서 제 목숨을 끊으려 드는가. 원컨대 이 말을 두세 번 되풀이해 보고서 빨리 그 직무에서 떠나 우리 군사의 칼날에 피를 바르게 하지 말라.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니 이민하여 종자를 바꾸는 날에는 어디로 갈 것이냐!
 
아! 애석한 일이다.
 
 
위의 글은 전해산이 우리 국민으로 왜적에게 붙어서 우리 백성을 괴롭힌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였으며 그들이 회개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가를 짐작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까지 막연하게 일본의 침략을 알고 있었는데 이 글로써 일본이 정치적으로 주권을 빼앗은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백성의 생존권까지 빼앗으려 무거운 세금을 부과시켜 그것을 빼앗아 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을 그들의 손이 아니고 우리 동포를 매수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예견하면서까지 그러한 악독한 짓을 하였다는 것은 천인공노할 만행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당시 의병을 일으킨 애국심의 발로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충분히 이해시키는 내용의 글이다.
 
그리고 당시 소위 세무영수원이라는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에만 팔리어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하고 있으니 하루 속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직을 버리라고 권고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의병들의 칼날에 목숨이 끊어진다는 경고를 하였으니 그들도 사람인지라 간담이 서늘하였을 것이다.
 
이 글은 당시의 의병장으로서 한낱 허장성세가 아니고 진실로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구구절절이 나타나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옷깃을 새롭게 여미게 하는 준열한 글이기도 하다.
 
 
다음은 조세 청부업자인 집강(執綱)이란 직에 있던 부호 오양중(吳良仲)의 집에 방화하고 해당 면장에게 보내는 격문이다.
 
 
❏ 영 삼가면장 및 해동동수(令 三加面長 및 該洞洞首)
 
오양중의 죽음과 집강가의 충화에서 그들의 죄는 이미 노출되었기에 마을에서는 반드시 요란스럽게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들이 필경에 악독을 부려 면장과 동장을 잡아가서 왜놈들에게 붙여 가난한 마을에다 수천 금을 배정해서 거두어 갔으니. 아, 하늘도 무심하여 아직도 그 무리들에게 벌을 내리지 아니하고 살려 두어 의병에게나 민가에게 이처럼 앙화를 끼치게 하니 애잔한 백성들이 갖은 모욕을 받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있겠느냐. 비록 그러하나 천도란 원래 올바른 것이니 어찌 끝내 이 무리들만 영구히 잘 지내게 하고 의병과 민간에게는 종시 원수 갚을 날이 없게 하겠느냐. 가을바람이 한 번 불자 의병의 북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으니 머지않아서 파죽의 형세를 얻게 될 것이다.
 
본 면은 지대도 요지요 곡식도 풍부하니 의당 머물러 있는 의진에게 임시 군량을 수용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민간의 곡식이 많이 나오기 마련일 것이다. 유독 집강 놈의 전답은 반역자의 물건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전답에서 산출되는 농작물은 금년이 풍년이라 의당 많을 것이다. 때도 이미 8월이 다 되었으니 수확할 시기가 차츰 다가오므로 본 동민에게 역사를 잡혀서 실어내게 할 터인데 만약 임박해서 수확하기로 한다면 자연 시기를 잃게 되고 또 백성을 괴롭힐 염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당부하는 것이니 그 전답에서 산출되는 여러 가지 곡식을 미리 수확하여 정확히 계산해 두고 지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만약 면장이나 동장이 양다리를 걸치고 번번이 보아 넘기어 시기를 잃어버리는 폐단이 있게 된다면 이는 바로 왜놈에게 충성하는 것이요, 우리 임금에게는 반역이다.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우리나라에서 죽는 것이 저들에게는 손해도 이익도 될 것이 없다. 사람이란 한 번 죽으면 그 뿐인데 왜놈에게 붙어서 일을 하다가 죽는 것보다 의로운 일에 가담하여 죽는다면 죽어도 아름다운 이름을 잃지 않을 것이니 어찌 그것과 같겠느냐. 마땅히 일하는 것을 헤아리어 법으로 반드시 다스림을 당하는 데까지 이르지 말지어다.
 
 
이 격문은 친일 부호인 오양중을 죽이고 집강의 집에 불을 지른 뒤에 그 면의 면장과 그 마을의 동장에게 보낸 글인데 자신의 의진에게 군량을 수송하라는 일종의 명령서이다.
 
매국노의 토지에서 산출되는 곡식을 몰수하되 그 지역의 주민에게 일을 시키고 거기에 든 비용만을 제외하고는 가져갈 것이니 정확히 계산해서 지령을 기다리라는 지시와 아울러 면장이나 동장도 왜놈에게 충성을 할 것이 아니라 대의를 위하여 일을 하도록 권유까지 한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당시의 의병의 기세와 또한 우리 국민 중에 의외에도 왜놈에게 충성을 다하는 무리가 많았다는 것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그 군의 대소 백성에게 보내는 글이다.
 
 
❏ 게시 해군대소민인(揭示 該郡大小民人)
 
현재 좀도둑들이 의병이라 자칭하고 낮에는 숨어있다가 밤이면 나타나서 의거를 빙자하여 민간에게 침해하는 폐단이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부녀자를 강간하며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구타하니 궁촌 백성의 원통한 현상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날마다 본진에 들려온다.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이냐.
 
대개 이런 자들은 의병이 아니라 역적이니 본소로부터 만약 엄금하지 않으면 백성이 어떻게 살겠느냐. 더구나 군법을 어디에 쓰자는 것이냐? 그러나 이들이 워낙 도둑질에 능하여 출몰이 비상하므로 아직 잡히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또 지금 왜적을 미처 무찌르지 못했는데 어느 겨를에 이 지방 도적을 없앨 수 있겠느냐. 그렇지만 이미 의병의 이름을 띠고 있는 이상 그저 버려둘 수가 없는 일이므로 이와 같이 특별히 당부하는 것이다.
 
이 절도 놈들에 대해서는 소관 지방에서 본소의 장령이 있고 없는 것을 탐지해서 만약 장령이 없이 사사로이 토색하는 자는 즉시 놈들이 휴대한 무기를 압수하고 잡아 묶어서 본소로 압송하면 단연 용서 없이 죽일 것이다. 혹시 그 지방 면장이나 동장이 약속을 준수하지 않고 사정에 얽매어 본소로 하여금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폐단이 있게 한다면 모든 일이 숨길수록 더욱 나타나게 마련이니 이후 사정이 탄로되는 마당에 중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격문에서는 현재 좀도둑들이 의병을 빙자하여 민간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지대하고 심지어는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을 구타하여 원성이 높으므로 이들이 나타나면 의진에 연락하거나 잡아서 보내면 군율로써 처단하겠으니 협조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위의 몇 개의 격문에서 본 바와 같이 친일 분자인 헌병 보조원, 일진회원, 경찰, 세금 징수원, 친일 부호 등을 토왜(土倭)로 규정하고 회유하기도하고 위협하기도 하여 그 직을 그만두라고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그들의 집을 방화하거나 체포해서 태형으로 다스리기도 하고 심한 자는 총살로써 징계하였다.
 
또한 해산 군인을 자칭하는 부랑자들이 무기를 얻어서 한 명 또는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주민들을 불안하게 할 뿐 아니라 의병을 가칭하고 도둑질을 일삼는 무리들과 의병이라 칭하고 무리를 모아 의병진의 정보를 헌병 보조원들에게 누설하여 일본군을 끌어 들이기도 하고 의병장을 밀고하여 체포당하게 하거나 의병장 사이를 이간시키며 의병장과 의병들 사이를 이간해서 의병진의 불화를 조성하며 약탈, 방화, 살인, 강간 등을 자행하던 가짜 의병장이나 의병의 무리 등도 의진의 토벌 대상이었다. 따라서 전해산의 의진이 세력을 유지했던 장성, 영광, 나주, 함평, 무안 등지에서는 일본군이나 경찰 수비대들이 활동하기 어려웠고 토왜의 무리들인 친일 부호 일진회원, 세금 징수원, 해산 군인을 빙자한 부랑자, 가짜 의병 등은 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각지에서 용맹을 떨치고 다녔던 전해산 軍은 1909년 3월 20일에 영광의 오동촌(梧棟村)에 유진하였는데 적병이 이를 알고 사방을 포위하므로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의군측은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는데 그는 각 초장과 함께 군졸을 거느리고 사면에 매복하여 기회를 보아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왜적에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때에 사방에 구름과 안개가 가득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어서 의군은 빠져나올 수가 있었으며 한 사람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한 개의 병기도 잃지 않았다.
 
아무튼 해산 의병장은 3년간 총 71회의 전투를 벌였으며 따라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이후로 그는 생각하기를 적의 세력은 날로 더하고 의병은 날로 고립되어가니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 때에 다시 군진을 정비하기로 하고 그 사이는 각자 해산하여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 믿고 그의 막료들과 상의하였다. “더운 여름철에 이르고 왜적이 신무기로 대항하니 어찌할 수 없다. 싸우기가 힘들고 아군의 희생만 있을 뿐이니 억울하고 분하지만 잠시 쉬었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거사함이 옳다고 생각이 들어 일시 군사를 해산할 것이니 경거망동 말고 기회를 기다리자.” 하며 비통한 어조로 훈시를 하자 일부 장졸들은 “나라가 위급하니 최후의 일인까지 나가 싸웁시다.” 하고 외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장군은 “우리는 중과부적이다. 개죽음을 당해서는 안 된다. 참는 것도 나라를 위한 것이니 다시 기회를 노리도록 하자.” 하며 조용히 타일렀다.
 
전해산은 적을 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서며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먹은 마음 다 틀어지니 한숨만 나오네
조정에서 날뛰는 놈의 꼴 통곡만 내고
해외에서 밀려온 적 말도 다 못 하겠네.
 
 
하며 당시의 망국의 현상과 실의에 빠진 비통한 심정을 토하였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머물겠으니 그대들도 고향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박영근은 바로 남은 군사를 이끌고 영광의 건두산(乾頭山)으로 올라갔는데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많은 의군이 부상을 입었으므로 밤을 타서 함평으로 빠져 나와서 전해산과 함께 북도(北道)로 가서 때를 기다리려고 하였다. 전해산은 고향에 돌아오는 길에 광주에 들려 기동준이 마련하여 준 말을 타고 장산을 받쳐 들고 백주대로에 유유히 광주 시가지를 돌아보고 적정을 살피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은신처인 장수군 번암면 월촌에 들려 아버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고 바로 왜경의 눈을 피해 번암면 동화리 고래산에 잠적, 후일을 위하여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전술연구에 몰두하였다.
 
해산은 고래산에 머무르는 동안 계속하여 거사를 못한 안타까운 심정을 달래며 갑옷을 벗는 시를 읊기를
 
 
호남삼월에 오얏 꽃이 지는데
보국한 서생이 갑옷을 푸니
산새도 또한 시사를 아는지
밤새도록 나를 불러 돌아가라 하노라.
 
 
라고 읊기도 하였다.
 
그 때에 왜적은 소위 토벌대 만여 명을 동원하여 남도 전역에 산에나 들에나 그들로 가득하였고 백성을 함부로 죽여 지나는 곳마다 살기가 등등하였다. 해산을 쫓던 왜적들은 행방을 잃어버리자 백방으로 수탐하였으며 ‘전해산의 거처를 알리거나 잡는 사람은 돈 천냥과 높은 벼슬자리를 준다.’라는 막대한 현상금까지 내걸고 장군 체포에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이때 전일에 의진에 출입하여 해산과 안면이 두터웠던 조두환(曺斗煥)과 김현규(金顯圭)가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 배신을 하고 은신처를 탐지하여 영산포 일본 헌병대에 밀고한 바 10월 16일에 그만 광주군 임곡(林谷) 주재소의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해산은 체포되자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오늘이 있을 것을 미리 각오하였다. 죽는 것도 기의하던 날부터 이미 정해져있다.”, “막가는 길에 걸어갈 수 없으니 가마를 대령하여라.” 하고 왜병에게 호통을 치니 그 위풍에 질려 가마로 모시었다고 한다.
 
해산은 왕년의 동지에게 밀고 당하는 것이 하도 억울하여 대동의병장 이름으로 희도와 보조병에게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나라와 동족을 팔면 만고역적이 되고 죽어서도 조상에 대하여 면목이 없게 될 터이니 하루속히 각성하고 회계하여 대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라는 통유문을 만들어 온 나라에 발표하였다.
 
가는 도중 원촌 본가 근처에 이르자 “아버님이 바로 이곳에 계시니 마지막 하직인사를 하고 떠나겠다.” 하자 왜병이 반대하는 것을 기어이 고집하여 집에 들려 아버님께 절하고 “이런 자식을 두신 것은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하십니다. 원컨대 너무 상심 마옵소서.”라고 하직인사를 하며 아버님을 위로하고 아내에게는 “너무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오. 지금 내가 떠나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고생스럽지만 아버님을 잘 봉양토록 부탁하오.” 하고 당부하자 부인 역시 간장이 찢어지는 슬픔을 억누르며 “뒷 일은 아무걱정 마시고 옥체보존하소서.” 하고 대답을 하자 이 비통하고 눈물겨운 이별의 정경을 보고 누구 하나 눈물을 안 흘리는 사람이 없었다. 압송되어 영산포로 가는 길목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민중들은 전 장군을 보내며 모두가 슬퍼하고 탄식하며 ‘전 장군이 잡혔으니 이제 누가 우리들을 보호하여 줄 것인가. 우리는 어찌하랴!’ 하며 수없이 뒤따르며 눈물로써 애통해하였다고 한다.
 
해산이 영산포 헌병대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헌병대장은 험한 말씨로 “그대는 왜 의병을 일으켰는가.”의 심문에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너희 일본 놈들 때문이다.” 하고 대답하니 “무엇이! 우리들 때문이라고?”, “그렇다. 원통하고 분하기 짝이 없다. 너희 놈들이 천인공노할 우리의 국모를 살해하고 하늘 같은 부모에게 받은 머리를 자르게 하고 또한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도장을 찍게 하고 끝내는 군대마저 해산시켜 우리의 목을 자르고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으려 하는데 그 누가 어찌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 죽음을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이게 모두 너희 놈들 때문이지 무엇이겠는가?”하며 크게 꾸짖으니 헌병대장도 말문이 막혀 버렸다고 한다.
 
해산은 체포된 뒤에 도림(道林)을 거쳐 다음날 나주 경찰서, 그리고 나주 수비대로 옮겼는데 그때마다 심한 매질을 당하고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게 고문을 당하여도 그는 시종일관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영산포의 헌병 분대장은 그를 상빈으로 모시고 잔치를 베풀어서 그를 위로하며 회유하려 하였고 재판을 받을 때에 판, 검사도 그를 존경하여 별도로 한 칸을 마련하여 상빈으로 대접하고 옥중의 기거동작은 옥중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게 하였다.
 
 
재판정에서 공술한 기록은 남은 것이 없으나 당시 신문에 나온 요지는
 
 
‘나는 일찍이 성현의 글을 조금 읽었기에 군신의 의리를 알며 적을 쳐서 나라의 원수를 갚는 것은 하늘의 명이며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침은 춘추의 대의 이므로 재주를 헤아리지 않고 강한 적을 상대로 의병을 일으켰는데 여러 해가 되었어도 조그마한 공이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고 하였다.
 
장군은 왜적과 타협만 하였으면 일신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나 끝내 애국의 절의를 지키다 지독한 심문과 고문을 수없이 당하고 광주교도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인 1910년 5월에 박영근, 심남일, 강무경, 오성술과 함께 대구로 옮기면서 장군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옥중 시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대낮에 흐르는 강물 슬픈 소리 울먹이고
푸른 하늘 실버들에 젖는 비 흐느껴
이제는 영산길 다시 못 가리니
죽어 두견새 되어 피울음을 울으리.
 
 
하고 이제 죽음을 앞두고 이 세상 하직의 슬픔을 탄식하고 죽어서의 혼이 항일의 원한을 끝내 두견새가 되어 피울음을 울면서 외칠 것이라고 애국충정을 비통하게 읊기도 하였다. 장군께서는 그해 7월 18일(高氏家門과 그 姻親의 충의와 효열 자료에 의하면 8월 22일로 기록되어 있음)에 박영근과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왜놈들에 의하여 교수형을 받고 사형장으로 오르면서 왜놈들을 호통하며 “오늘 내가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으나 네놈들의 나라가 망한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철천지 한이다. 내가 죽은 뒤 머지않아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라고 북쪽을 바라보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세 번 외치고 풀지 못한 조국 독립 한을 품은 채 호국의 신으로 산화하였다.
 
그리고 9월 9일에 그의 영구를 남원의 원촌(지금의 장수군 번암면) 앞산으로 모시어 장사를 지냈다. 그의 부인 김씨는 그가 잡혀간 후에도 슬픈 얼굴을 하지 않고 시부모를 잘 섬겼는데 얼마 안 되어 시부모마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어 별세하니 정성으로 상기를 마쳤다.
 
남편의 흉보를 듣고도 그렇게 심히 슬퍼하지 않고 영구가 돌아오자 그 앞에서 한 번 곡을 하더니 그날 밤 침실로 들어가서 약을 마시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아마도 부인의 하종은 이미 그가 잡혀간 날부터 마음으로 정한 바였던 것이다. 그의 초취 김해 김씨는 아들 없이 일찍 죽었고, 재취인 김씨 부인 또한 아들이 없이 그를 따라 죽은 것이다. 지금은 그의 당질을 양자로 삼아 가계를 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32세를 일기로 오로지 나라를 되찾아 보려는 애국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이 무렵에 그처럼 순국한 사람이 어찌 그 한 사람뿐이리오만 그런 중에서도 그는 학문과 지혜가 뛰어났으며 의기가 늠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심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1912년에 이석용과 임철규는 그의 행장을 지었으며, 1915년에 오동수, 오준선과 기동준, 그리고 1916년에 기우만이 각각 그의 전기를 지었으므로 오늘날 여섯 개의 전기와 한 개의 행장이 그의 창의록(倡義錄)에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그에 관한 문헌으로는 해산진중일기(海山陣中日記) 등이 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 문헌들을 상고하여 그 대강만을 적었다.
 
끝으로 이와 같은 위대한 애국자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도 무관심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의 묘는 지금의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앞산의 벼랑에 초라하게 세워졌으니 그 묘만이라도 그의 고향인 임실군에서 관심을 가지고 애국자 묘역을 조성하든지, 아니면 현 소충사에 같이 모시든지, 연구와 검토로 이전 계획이 필요하며, 그의 생가 또한 사학자들로 하여금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지금의 오수면 국평 마을에 부지를 확보하여 조성한다면 후손(後孫)들로서 본분과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장수군민들은 의병장의 거룩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1972년에 번암중학교 입구에 추모비각을 세워 그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建國勳章 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綠》(國家報勳處) 1券 896~899面,《全北義兵史》 下券 265~290面,《장수군 번암면지》 849면
# 전기홍 # 창의동맹단
【저작】 임실독립운동사 (2005)
• 제4장 任實地域 自生 義兵
• 제3장 海山 全基弘 義兵將
• 제2장 靜齋 李錫庸 義兵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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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