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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문제 (人間問題) ◈
◇ (101회 ~ 120회) ◇
카탈로그   목차 (총 : 6권)     이전 6권 ▶마지막
1934년 8월 ~ 12월
강경애(姜敬愛)
목   차
[숨기기]
 

1. 101

 
2
신철이가 처음 첫째를 만났을 때는 다만 순직한 노동자로밖에 그의 눈에 비치지 않던 그가…… 보다도 순직함이 도수를 지나 어찌 보면 바보 비슷하게 보이던 그가, 불과 몇 달이 지나지 못한 지금에 보면 아주 딴 사람을 대한 듯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때에 마주보면 신철이는 어떤 위압까지 느껴진다. 신철이는 묵묵히 앉은 첫째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다가,
 
3
"그런데 동무, 주의하시오. 지금 경찰서에서는 삐라를 단서로 대활동을 하는 모양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소."
 
4
첫째는 눈을 번쩍 뜨며 신철이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자기들이 가까운 시일 안에 붙잡힐 것 같았다. 그리고 붙들릴 바에는 자기와 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들만 그리 되었으면 하였다. 만일에 신철이 같은 중요한 인물이 붙들리게 되면 바야흐로 계급의식에 눈떠 오려던 인천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앞길은 암흑 천지로 변할 것 같았다. 보다도 자기들이 붙들리게 되면 어떠한 무서운 매라도 넉넉히 맞고 견디어 내겠으나 신철이같이 저렇게 부드럽고 희맑은 육체를 가진 그들이 그 매에 견디어 낼까? 그것이 무엇보다도 의문이요 걱정이다.
 
5
신철이는 첫째와 마주앉아 말할 때마다, 그리고 중요한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우리들은 이렇게 하여야 하오! 하고 언제나 우리들이라고 노동자를 가리켜 불렀다. 그러나 첫째의 귀에는 신철이만은 자기들과는 무엇으로 보든지 딴사람 같았다. 그래서 신철이가 말할 때마다 저가 우리들을 생각하여 우리들의 눈을 밝혀 주려고 애쓰거니…… 하는 일종의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치밀곤 하였던 것이다.
 
6
"이제부터는 일 개월에 한 번으로 정하였으니 오는 달 십오일에 또 오시오. 하여튼 조심해야 하오. 그리고 동무를 주의하며, 술과 계집 같은 것은 물론 삼갈 것으로 아니까 더 말하지 않으나……."
 
7
신철이는 첫째의 눈치를 살핀다. 첫째는 씩씩 하며 앉아 있다. 마치 말 잘 듣는 소 모양으로 그렇게 충심되는 반면에 움직일 수 없는 그 무엇을 은연중에 발견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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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갔다 오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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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이는 일어났다. 첫째는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신철이는 손빠르게 격문 뭉텅이를 그의 손에 힘있게 들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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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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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얼른 받아 바짓가랑이 속에 쑥 집어넣고 나서 신철의 손을 힘있게 흔들었다. 그리고 도리우치를 푹 눌러 쓴 후에 대문 밖을 나섰다.
 
12
이제 신철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그의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수없는 눈과 귀로만 된 듯하였다. 그는 이렇게 가슴을 졸이며 대동방적공장까지 왔다. 우선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어디서 사람이 숨어 엿보지나 않는가? 하여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공장에서는 발전기 소리가 우렁우렁 하고 흘러나온다. 그리고 까맣게 쳐다보이는 연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달빛에 희게 굽이친다.
 
13
그는 다시 이편 골목으로 와서 한참이나 보았다. 그러나 인기척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으며 고요하였다. 그는 이번에는 살살 기어서 동북편 담모퉁이를 향하였다. 그는 담 밑에 착 붙어 섰다. 그리고 바짓가랑이 속에서 뭉텅이를 내어 얼른 구멍 속에 쓸어 넣고 돌아섰다. 그는 숨이 가쁘게 이편 집모퉁이로 와서 한참이나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때에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낮에 본 여공들의 긴 행렬이었으며, 그 중에 섞여 있던 선비였다. 선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선비가…… 참말 그 선비였는가? 그리고 저 안에서 지금 실을 켜고 있는가? 혹은 잠을 자고 있는가? 그도 나를 확실히 본 모양인데…… 나를 알아보았을까?
 
14
선비도 자기가 넣어 주는 그 종이를 보고 똑똑한 선비가 되었으면…… 하였다. 과거와 같이 온순하고 예쁘기만 한 선비가 되지 말고 한 보 나아가서 씩씩하고도 지독한 계집이 되었으면…… 하였다. 그때에야말로 자기가 믿을 수 있고 같이 걸어갈 수가 있는 선비일 것이라…… 하였다.
 
15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걸었다. 인간이란 그가 속하여 있는 계급을 명확히 알아야 하고, 동시에 인간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위하여 투쟁하는 인간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이라는 신철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였다.
 
 

2. 102

 
17
야학을 마치고 삼호실로 돌아온 선비는 옷을 입은 채로 자리에 누웠다. 칠호실에서 간난이와 같이 있을 때는 야학만 마치고 돌아오면 이불 속에 엎디어 밤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삼호실로 옮아온 후부터는 아직도 한방에 있는 그들과 친해지지를 않아서 그런지, 마치 남의 집에 나들이로 온 것 같고, 방 안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놈의 감독놈이 무슨 짓이어? 나를 이 방에다 끌어다 두면 제가 어떻게 하겠단 말이어…… 아무래도 수상하지. 간난의 말과 같이 그놈이 간난의 눈치를 챘음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대로 그놈이 나한테 반한 셈인가? 하였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또다시 첫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기들이 월미도를 향하여 가던 그때, 그 해변 돌길에서 눈결에 본, 아니 똑똑히 바라본 첫째, 그가 참말 첫째인가.
 
18
뜻하지 않은 곳에서 첫째를 눈결에 지나친 후로 선비는 밤마다 첫째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옛날에 그가 나물하러 잿등에 올라갔다가 첫째를 만나 싱아를 빼앗기고 울면서 내려오던 그때 일을 다시금 회상하여 보곤 하였다. 동시에 그의 어머니가 가슴을 앓아 돌아가실 때, 어느 새벽에 갖다 주던 소태나무 뿌리! 지금 생각하면 그때에 자기는 너무나 첫째를 몰라본 것 같았다. 지금 같으면 그 소태 뿌리가 얼마나 귀한 것이며 얼마나 고마운 것이랴! 첫째의 결백한 순정의 전부가 그 싱싱한, 그리고 아직도 흙이 마르지 않았던 그 소태 뿌리에 은연중에 들어 있던 것을 그는 몰라보았다. 그렇게 고마운 것을…… 밤을 새워 가며 캐온 듯한 그의 정성을 대표한 소태나무 뿌리를 윗방 구석에 팽개친 자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는 자기의 그때 행동에 대하여 분하고도 부끄러웠다.
 
19
단 한 번이라도 좋아! 그를 꼭 만나 볼 수가 없을까? 선비는 돌아누우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은 그의 볼에 따끈따끈하게 부딪친다. 그때 그는 씩씩 하며 자기를 껴안아 주던 덕호가 떠오른다. 그는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자기는 첫째를 만나 볼 그 무엇을 잃은 듯하였다. 그는 안타까웠다. 분하였다. 이십 년이나 고이 싸두었던 그의 정조를 늙은 호박통같이 생긴 덕호에게 빼앗긴 생각을 하니 그는 생각할수록 분하였던 것이다. 그때에 자기는 반정신은 나가서 분한 것도 아무것도 몰랐으나 지금 이렇게 누워서 눈감고 생각하니 그때에 자기는 덕호에게 일생을 망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선비는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리고 첫째의 얼굴을 다시 그려 보았다. 자기를 보고 놀라는 듯한 첫째의 표정을 보아 그도 역시 선비 자신을 알아본 듯하였다. 따라서 잠시간이나마 첫째가 자기를 어느 구석에 잊지 않고 이때까지 생각해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20
그것은 선비 자신이 흥분이 되어 그를 바라본 까닭에 그렇게 그의 눈에 비치어졌는지 모르나 어쨌든 첫째가 자기를 얼른 알아본 것만은 사실인 듯하였다. 그때 선비의 가슴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회와 슬픔, 그리고 반가움이 교착이 되어 가지고 그의 조그만 가슴을 잡아 흔들었다. 동시에 언제까지나 그의 앞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서 밀고 앞에서 재촉하는 무서운 현실! 번개같이 만나자 번개같이 들었던 일만 가지 감회를 쓸어안은 채, 선비는 그 현실에 순응하지 아니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21
몰라보리만큼 꺽센 첫째의 몸집, 그리고 거칠고 거칠어진 그의 얼굴에 그나마 옛날 싱아를 빼앗아 먹으며 빙긋빙긋 웃던 그 눈만이 아직도 혁혁히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눈 역시 세고에 부대끼어 전과 같은 순진하고 맑은 기운은 약간 보이고, 반면에 무서우리만큼 강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 그라야만 덕호에 대한 자기의 원을 풀어 줄 것 같았다.
 
22
그때 그는 간난이가 일상 하던 말을 얼핏 깨달으며, 세상에는 덕호와 같은 우리들의 적이 많은 것이다. 그것을 대항하려면 우리들은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던 그 말을 그는 다시 생각하였다. 선비는 어떤 힘을 불쑥 느꼈다. 그리고 간난이가 가르쳐 주는 그대로 하는 데서만이 선비는 첫째의 손목을 쥐어 보리라 하였다. 흙짐을 져서 파래진 첫째의 등허리! 실을 켜기에 부르튼 자기의 손끝! 그리고 수많은 그 등허리와 그 손들이 모여서 덕호와 같은 수없는 인간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하였다. 보다도 선비의 앞에 나타나는 길은 오직 그 길뿐이다. 으흠 하는 기침소리에 그는 흠칫했다.
 
 

3. 103

 
24
선비는 놀라 숨을 죽이고 들었다. 또다시 기침소리가 들릴 때 그는 그 기침소리가 숙직실에서 나오는 감독의 기침소리인 것을 깨달았다. 벽을 새로 감독과 그가 마주 누운 것이 직각되자 불쾌하였다. 그리고 간난에게서 들은 용녀의 이야기를 다시금 되풀이하며, 이를테면 나도 용녀 모양으로 그렇게 지내자는 심중에 이 방으로 옮기게 하였으나 내가 왜 말을 듣나. 만일 용녀같이 그렇게 농락하려고 그가 덤벼들면 망신을 톡톡히 시켜 놓고 나는 나가지. 이 공장 아니면 딴 공장은 없을까. 이렇게 그는 결심은 하나 그러나 그의 앞에는 불길한 예감만 그의 머리를 자꾸 싸고돌아 어쨌든 불쾌하였다. 이런 때 간난이가 곁에 있으면 어떠한 말을 하여서든지 자기의 맘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는 간난이를 찾아가서 덤벼드는 감독을 대항할 방침을 문의하고 싶었다.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가졌으나 용이하게 기회를 타는 수가 없었다. 낮에는 바쁘고, 하루 건너서 야근을 하고, 시간이 좀 있다더라도 그 틈을 타서 옷 해 입기에 눈코 뜰 짬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밤에나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몇 달 내지 몇 해를 간다더라도, 마주앉아 말 한마디 할 틈이란 바늘 끝만치도 없었다.
 
25
그러나 지금 감독이 기침한 것을 보아 아직도 잠이 안 든 모양인데 문소리를 내면 필시 쫓아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에라 후일 간난이를 만나지! 오늘만 날인가? 하였다.
 
26
그때 문소리가 난다. 선비는 얼른 문 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방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숙직실 감독의 방문이 열리는 듯하였다. 뒤미처 신발 소리가 가늘게 났다. 선비는 몸이 한줌만해지며, 참말 자기의 몸에 위기가 박두한 것을 느꼈다. 그는 이불을 막 쓰고 숨을 죽이었다. 신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선비는 감독이 저 문밖에 서서 이 방 사람들이 자는가 안 자는가를 엿보는 듯싶고, 그리고 금방 감독이 들어와서 그에게 덤벼드는 듯하여 가슴이 울렁울렁 뛰놀았다. 따라서 철모르고 자는 옆의 동무를 깨울까말까 망설이었다.
 
27
한참 후에 선비는 가만히 이불을 벗으며 신발 소리와 문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그때 옆의 동무도 역시 머리를 내놓고 있다가 선비를 바라보며,
 
28
"이제 문소리 났지?"
 
29
선비는 너무 반가워서 바싹 다가 누웠다.
 
30
"너도 깨었니?"
 
31
"그래, 그 무슨 문소리어…… 감독의 방 문소리가 아니어?"
 
32
"그런 것 같애……."
 
33
옆의 동무는 선비의 귀에다 입을 대었다.
 
34
"저 요새 말이어…… 감독이 저렇게 자지를 않고 순시를 돌아. 그런데 넌 그 이상스러운 종잇조각을 보지 못하였니?"
 
35
선비는 얼른 종잇조각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떼고,
 
36
"몰라…… 무슨 종이냐?"
 
37
"딴 방에는 안 그런가 모르거니와 우리 방에는 요전에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보면 무슨 종잇조각이 떨어져 있는데 그것에는 우리 공장 안의 일을 모두 썼겠지. 네 전날 우리 월미도에 가면서 구두를 신고 가지 않았니……?"
 
38
"그래."
 
39
"그런데 그 구두도 말이어…… 이애 후일 말하자."
 
40
동무는 문 편을 바라보며 말을 끊었다. 선비는 미리 간난에게서 들었던 말이므로 더 추궁하여 묻지 않았다. 더구나 감독이 저 말을 듣지나 않나? 하는 불안에 가슴이 한층더 졸이었다가, 잘되었다 하였다. 따라서 수없는 여공들의 수수께끼인 그 종잇조각은 아무래도 간난이가 어떻게든지 해서 돌리는 것 같았다. 간난이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하는 말이며 동작이 아무래도 그 수수께끼의 주인공인 듯싶었다. 그리고 그의 이면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 듯하였다. 간난이가 자기에게는 무엇이나 숨기는 비밀이 없으나 오직 그 일만은 숨기는 듯하였다. 그것이 무슨 일이며, 누구들이 뒤에서 조종하는지 모르나 어쨌든 그 비밀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비는 처음에는 수상하게 생각되었으나 시일이 지날수록 그 일이 무슨 일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짐작은 되었다. 확실하게 자기가 짐작하는 그런 일이라고는 꼭 말할 수 없으나, 그저 막연하고 분명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41
그때 별안간 문이 바스스 열리며 회중전등이 쏴 하고 비쳤다.
 
 

4. 104

 
43
그들은 얼른 이불을 막 쓰고 잠든 체하였다. 문이 가만히 닫히며 신발 소리가 가까워진다. 선비는 두 손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머리를 베개 아래로 내리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가슴은 무섭게 뛰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자기들이 한 말을 문밖에서 다 듣고 뭐라고 나무라려고 쫓아 들어온 것만 같았던 것이다.
 
44
한참 후에 선비는 그의 이불에 감독의 손이 닿는 것을 알자 이불이 벗겨진다. 선비는 몸을 흠칫하며 머리를 숙이었다.
 
45
"왜들 이때까지 잠을 안 자?"
 
46
감독의 무거운 음성이 방 안을 울려 주었다. 선비는 가만히 있었다.
 
47
"잠을 푹 자야 내일 일하기가 힘들지 않지."
 
48
감독의 손길이 선뜩하고 선비의 볼에 부딪치므로 선비는 무의식간에 손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 덮으며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49
"이 방에는 종이가 떨어지지 않았더냐. 떨어진 것이 있으면 내놓아라."
 
50
이번에는 선비의 머리를 툭툭 쳤다. 선비는 옆에 동무가 잠든 줄을 알면 대단히 무서울 것이나, 그러나 잠들지 않은 것을 뻔히 아는 고로 한결 무섭기가 덜하였다. 그러나 그만큼 감독이 그의 얼굴을 쓸어보고 머리를 툭툭 치는 것을 옆에 동무가 알 것이 부끄럽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맘대로 하면 일떠나며 감독의 상통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맘뿐이지 손가락 하나 까딱 하는 수가 없었다. 그때 그는 덕호에게 그의 처녀를 유린받던 장면을 다시금 회상하며 부르르 떨었다.
 
51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던 감독은 이불을 끌어당겨서 푹 씌워 주었다.
 
52
"잡생각들 말고 잠자."
 
53
말을 마치며 감독은 돌아서 나간다. 선비는 그제서야 숨을 몰아쉬며 베개를 베고 제대로 누웠다. 그러나 감독의 손길이 부딪친 그의 볼에는 벌레가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불쾌한 감상이 오래 사라지지 않았다.
 
54
며칠 후에 선비는 감독에게 부름을 받아 사무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감독은 의자에 걸어앉아서 격문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흘끔 쳐다보았다.
 
55
"거기 앉아……."
 
56
책상 곁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선비는 주저주저하였다.
 
57
"이런 것 선비에게도 있지?"
 
58
감독은 선비의 속까지 뚫어보려는 듯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비는 얼굴이 빨개졌다.
 
59
"없어요."
 
60
"없는 게 뭐야. 거짓말 말어. 이 기숙사 안에는 안 간 방이 없는데, 선비에게라구 안 갔을 탁이 있나? 바루 말해."
 
61
선비는 약간 얼굴을 숙이며, 버선 갈피 속에 깊이 넣어 둔 종잇조각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감독이 혹시 그것을 미리 보고서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들었다.
 
62
"이리 가까이 와."
 
63
감독은 올백으로 넘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의자를 가지고 조금 다가왔다.
 
64
"이거 봐. 이런 종이를 만일 선비도 가졌다면 찢어 버리고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야 해. 선비만은 내가 잘 알아. 온순하고 얌전하지, 허허…… 그런데 한고향서 왔다는 간난이가 혹 밤에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가?"
 
65
선비는 놀랐다. 한방에 있는 자기도 확실하게 눈치채지 못한 것을 감독이 어떻게 짐작하였는가? 하였다. 그리고 간난이가 그 일로 인하여 불행히 쫓기어 나가게나 되지 않으려나 하는 걱정이 들며 어떻게 감독을 곯리어서라도 그러한 의심을 풀어 버리게 하여야겠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감독이 그에게만은 절대 호감을 가진 것을 아느니만큼 선비가 변호를 하면 아직 확실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은 이상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66
"그런 일 없어요."
 
67
선비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대답하였다. 감독은 입 모습에 웃음을 띠며 조금 다가앉았다.
 
68
"한고향서 왔으니 변호하는 셈인가?…… 거게 좀 앉아! 응 자."
 
69
선비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흠씬 끼쳐진다. 그리고 그가 처음 덕호에게 유린받던 그날 밤 같아서 몸이 한줌만해졌다. 그래서 그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70
감독은 선비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궐련을 피워 물었다.
 
71
"선비, 금년에 몇 살?"
 
72
감독은 궐련재를 털며 물었다. 선비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며 어서 나오고 싶었다.
 
 

5. 105

 
74
선비의 초조해하는 양을 바라보는 감독은 다소 위엄을 띠었다.
 
75
"누가 뭐라는가, 어서 거게 좀 앉았어. 뭐 물을 말이 많아. 응 거기……."
 
76
의자를 가리켰다. 선비는 당황하였다. 그리고 그의 신변에 위기가 박두한 것을 느끼며 어떡해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숨이 가빠 오며 방 안의 공기가 자기 하나를 둘러싸고 육박하는 듯하였다. 그때 선비는 덕호에게 유린받던 경험을 미루어 감독이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이 선뜻 떠오른다.
 
77
"저 난 일하던 것을 놓고 들어, 들어……왔에요."
 
78
"응 무슨 일?"
 
79
선비의 불그레한 얼굴을 곁눈질해 보는 감독은 귀여운 듯이 빙긋이 웃었다.
 
80
"저 저고리를……."
 
81
"저고리를?…… 돈 잘 벌어서 삯 주지, 허허허허. 그런데 말이어, 이런 종이에 혹해 가지고 만에 일이라도 그릇 생각을 하면 안 되어. 이 공장은 여러 여공들을 위하야 온갖 이익과 편리를 도모하는데, 그러한 은혜를 모르고 이따위 말이나 곧이들으면 되는가. 후일 선비에게도 이런 종이가 가거던 내게로 가져와…… 응, 그러겠나?"
 
82
선비는 화제를 돌린 것만 다행으로 생각하고 얼른 대답하였다.
 
83
"네."
 
84
"그런 것을 써서 돌리는 것은 벌이 없는 놈들이 남 벌어먹는 것이 심술이 나서 그러는 게야. 선비는 그런 데 떨어지지 말고 나 하라는 대로만 잘 순종하면 매일 상금을 줄 테야. 또는 이 기숙사에 있는 여공들을 맘대로 부리는 감독을 하게 할 테야. 이를테면 내 대리 격이지. 알아들었어?"
 
85
감독은 만족한 듯이 웃었다. 선비는 발끝만 굽어보았다.
 
86
"내가 선비는 아주 참하게 보았으니 내 말만 들으면 그러한 권리를 줄 테야."
 
87
선비는 어서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나 감독은 이런 부실한 말만 자꾸 늘어놓는다. 그리고 가만히 보니 별로 할 말도 없고 그를 세워 놓고 저런 말이나 언제까지나 되풀이할 모양이다. 선비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88
"저는 나가서 일 마자 하겠습니다."
 
89
"어 그런데 저……."
 
90
돌아서서 나오는 선비에게 이러한 말이 치근치근하게 뒤따른다. 선비는 못 들은 체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방으로 들어오니 간난이가 와서 그의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 문소리가 요란스레 나며 감독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구둣발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다행으로 숨을 몰아쉬며 선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하고 쳐다보았다. 선비는 그들을 대하니 반갑고도 다소 부끄러웠다. 한참 후에 간난이가,
 
91
"우리 방에 가서 일할까?"
 
92
"그래."
 
93
간난이는 주섬주섬 일감을 걷어서 선비를 준다. 선비는 받아 가지고 간난의 뒤를 따랐다.
 
94
"이애들 모두 어데 갔니?"
 
95
선비가 방 안에 들어서면서 물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좋은 기회를 만났다 하고 생각하였다.
 
96
"야근하러들 갔지…… 그런데 뭐라던?"
 
97
선비는 얼굴이 붉어지며 무슨 생각을 하였다.
 
98
"저 감독이 말이어, 너와 가까이하지 말라구 하두나. 그러구 저……."
 
99
간난의 귀에다 입을 대고 선비는 한참이나 수군거렸다. 간난이는 머리를 끄덕이며,
 
100
"흥, 나두 짐작은 하였다…… 선비야!"
 
101
간난이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불렀다. 선비는 무슨 일인가 하여 눈이 둥그래졌다. 간난이는 이렇게 선비를 불러 놓기는 하고도 말은 꺼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선비를 바라보는 때에 아직도 선비가 그의 확실한 친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만일 선비가 확실히 계급의식에 눈이 떴다면 감독을 그의 손 가운데 넣고 농락해 가면서 얼마든지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급한 일이 생기면 저 선비에게다 모든 중대사를 밀어 맡기고 자기는 마음놓고 이 공장을 벗어날 수가 있도록 되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간난이는 그가 오래 이 공장 안에서 일하지 못할 것을 슬프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선비에게 이러한 뜻의 말을 미리 비추려고 얼결에 불러 놓고 보니 아직도 선비는 시일을 좀더 지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간난이는 알았던 것이다. 선비는,
 
102
"뭘? 어서 말하려마."
 
103
간난이는 눈등이 불그레해졌다.
 
104
"후일, 응 후일!"
 
 

6. 106

 
106
인천의 새벽.
 
107
검푸른 회색빛을 띠고 산뜻하고도 향기로운 공기가 무언중에 봄소식을 전해 주는 그 어느 날 새벽이다.
 
108
부두에는 벌써 몇천 명의 노동자가 빽빽하니 모여들었다. 그들은 장차 새어 오려는 동편 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굳은 결심을 하였다.
 
109
백통테 안경은 붉은 끈을 가지고 머리를 휘두르며 여전히 눈알을 굴리어 노동자를 바라보았다. 전 같으면 저마다 붉은 끈을 얻으려고 대가리쌈을 하고 덤벼들 것이나 오늘은 백통테 안경이 붉은 끈을 봐란 듯이 팔에다 걸고 그들의 앞으로 왔다갔다하여도 그들은 눈 한번 깜박하지 않는 듯하였다. 백통테 안경은 이상스러운 반면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떼고 그중 친한 노동자를 불렀다.
 
110
"이리 와! 일끈을 줄 테니."
 
111
그때 전깃불이 꺼풋 하고 꺼져 버렸다.
 
112
"일 안 하겠수!"
 
113
백통테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갑판으로 갔다.
 
114
축항에는 기선이 죽 들어와서 부두에 대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손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때 노동자 몇 사람은 그들의 대표로 요구조건을 제출하려고 해륙운수조합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들의 대표 노동자들이 무슨 소식을 전하기까지 깜작하지 않고 사무실만 바라보고 정렬하여 서 있었다.
 
115
축항의 기선은 연기만 풀풀 토하고 있다. 그리고 선원들이 죽 나와서 이상한 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전 같으면 지금쯤은 짐을 푸느라고 벌떼같이 덤빌 터인데, 오늘은 이 축항이 쓸쓸하였다.
 
116
그리고 눈을 구루마 바퀴 굴리듯 잠시도 제대로 두지 못하던 백통테 안경도 오늘만은 날개 부러진 새 모양으로 머리를 푹 숙이고 한편 모퉁이에 서 있었다.
 
117
해가 벌겋게 타올랐다. 그들은 저 해를 바라보면서 단결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의 저 햇발은 그들의 이 단결함을 보기 위하여 저렇게 씩씩하게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그들은 저 햇발에 비치어 빛나는 저 바다 물결을 온 가슴에 안은 듯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치는 모든 만물은 새로움을 가지고 그들을 맞는 듯싶었다. 동시에 무력하고 성명 없던 자기들이 오늘 이 순간에는 이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권리란 권리는 다 가진 듯이 생각되었다. 자기들이 단결함으로써 이러하고 있으니 기세를 부리던 백통테 안경을 위시하여 기선의 기중기며 선원들까지 아주 동작을 잃어버리고 깜짝하지 못하였다.
 
118
경관들은 눈을 밝히고 군중 틈을 뚫으며 행여나 선동자를 발견할까 하여 주의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119
인천의 시민들은 종래에 없던 부두 노동자들의 단결을 구경하기 위하여 골목골목에 나와 섰다. 그리고 끊임없이 경관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다. 그래서 축항을 둘러싸고 무서운 대지로 공기가 팽팽히 긴장되어 있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가 있었다.
 
120
짐 실은 기선은 하나둘 자꾸 몰려들어 와서 우두커니 맹랑하게 서 있었다. 그때 요구조건을 제출하려고 해륙운수조합으로 들어갔던 노동자들은 경관들에게 호위되어 나왔다.
 
121
"우리들의 요구조건은 틀렸소!"
 
122
"카이상!"
 
123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길에 섰던 금줄 많이 두른 경관의 입에서 해산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때 욱 하는 무서운 움직임이 들려 왔다.
 
 

7. 107

 
125
군중은 분기하여 인천 시가를 시위 행렬까지 하려다가 다수한 검속자를 내었다. 첫째가 집에 돌아오니 주인 할멈이 맞받아 나왔다.
 
126
"저 누가 아까 찾아왔어!"
 
127
첫째는 아직까지도 숨이 가쁘게 뛰었다. 그래서 숨을 돌려 쉰 후에,
 
128
"누가? 어떻게 옷을 입은 사람이유?"
 
129
첫째는 얼핏 형사? 신철이를 번갈아 생각하였다. 할멈은 빙긋이 웃었다.
 
130
"글쎄, 어떻게 옷을 입었던가?…… 자세히 생각나지 않어…… 하여튼 곧 또 오겠다구, 어데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두먼……."
 
131
"기다리라고……?"
 
132
첫째는 때가 때니만큼 퍽으나 불길한 생각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할멈 보고 무슨 말을 더 물어 보려다가 그만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누가 왔댔을까? 신철이가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오지 않았나? 하며 망설일 때 문이 버썩 열린다. 첫째는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부두에서 낯익히 본 사나이였다. 더욱 신철의 집에서 몇 번 보기도 하였다.
 
133
"동무가 첫째 동무요?"
 
134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며 이렇게 물었다. 첫째는 어떤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하다가,
 
135
"예……?"
 
136
첫째가 그의 내미는 손에 악수를 건네자,
 
137
"동무 큰일났소!"
 
138
첫째는 무슨 말인가? 하여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139
"아까 새로 한시쯤 해서 신철 동무가 잡혔수!"
 
140
첫째는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141
"잡혔어유? 어데서?"
 
142
"집에서 잡혔는데, 지금 그 집 주위에는 경계가 심하오. 동무도 이 집을 곧 옮겨야겠수. 우선 내가 집 하나를 얻어 놨으니 그리 옮겼다가 다시 또 적당한 데로 옮기오. 어서 빨리 일어나시유."
 
143
방 안을 휘 둘러보며 일어났다. 첫째는 신철이가 잡혔다니 앞이 아뜩하였다. 물론 신철이 아니라도 자기들의 배후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수없는 동무들이 있을 것을 뻔히 아나, 그러나 신철의 지도를 받아 오던 첫째는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를 떨어진 듯한 그러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안타까웠다. 더구나 저 일이 끝도 나기 전에 잡혔으니…… 하며 첫째는 머리를 숙였다. 그는 첫째의 귀에다 입을 대고 뭐라고 수군수군하고 나가 버렸다. 첫째도 그 뒤를 따라 동무가 얻어놨다는 집으로 옮아오고 말았다. 낯선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첫째는 일만 가지 생각에 가슴이 뒤설레었다.
 
144
어느덧 날도 저물어진 모양이다. 첫째는 벌렁 누워 버렸다. 부두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자꾸 눈에 어른거리고, 그리고 신철이의 결박당한 모양이 떠오른다.
 
145
……(원문 탈락)……
 
146
이렇게 생각하다가 바라보니 벌써 밤이 이 방 안을 찾아왔다. 첫째는 벌떡 일어났다. 그때 문이 부시시 열리며,
 
147
"왜? 불도 안 켜시우."
 
148
"동무유……."
 
149
첫째는 딴놈이면 한대 붙이려다가 주저앉았다. 웬일인지 누구와 실컷 몸부림을 쳐가며 싸웠으면 이 안타까운 맘이 풀어질 것 같았다.
 
150
"어찌 되었수, 부두 노동자들은?"
 
151
첫째는 가만히 말하였다. 동무는 전등불을 켜놓고 나서 사온 빵을 가지고 첫째 곁으로 왔다.
 
152
"자시우! 그런데 부두노동쟁의는 딴 동무들이 맡아 보기루 했으니 가만히 앉아 있수!"
 
153
첫째는 빵을 들어 무질러 먹으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뜨거운 사랑이 무언중에 알려진다.
 
154
"어서 다 자시유."
 
155
동무는 일어난다. 첫째는 인사도 없이 동무를 보낸 뒤에 전등불을 죽이고 빵을 다 먹었다. 그리고 우두커니 앉아서 부두 노동자들의 장래 승리를 생각하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대동방적공장을 눈앞에 그리며, 그것들은 왜 가만히 있어? 답답해서 원! 선비가 정말 그 선빈가? 하였다. 그도 눈이 떠주었으면…… 할 때 신철이 잡힌 생각이 다시 떠오르며 가슴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화끈 달기 시작하였다.
 
 

8. 108

 
157
공장에서 야근 교대를 마치고 나오는 선비는 얼핏 그의 손에 무엇인가 쥐어지는 것을 느끼며 돌아보니 간난이가 시치미를 뚝 따고 옆으로 지나친다. 그는 간난이를 보고야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짐작하며 꼭 쥐었다. 그리고 함께 밀려나오는 효애의 눈치를 살폈다. 효애는 여전히 뭐라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였다. 선비는 그의 말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도,
 
158
"응, 응, 그래……."
 
159
하였다. 효애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며,
 
160
"그럼 내일 꼭 그래?"
 
161
선비는 무슨 말끝인지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다시 묻지는 못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상층으로 부리나케 달아올라가서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마침 동무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가슴을 울렁거리며 줌 안의 조그만 종이를 펴보았다.
 
162
"밤 한시쯤 해서 밖의 변소로 나와 다고."
 
163
선비는 누가 볼세라 하여 얼른 종이를 입 속에 넣어 씹었다. 그때 위층으로 올라오는 신발 소리가 요란스레 들리었다. 선비는 자리를 펴기 시작하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동무들이 들어왔다.
 
164
"선비는 참 빨라! 벌써 왔어."
 
165
동무 하나가 이렇게 말하며 웃는다.
 
166
"아이구 고마워라. 내 자리까지 펴주네!"
 
167
나중에 들어오는 동무가 선비를 쳐다보며 주저앉는다.
 
168
"이애! 오늘 너 실 얼마나 감았니?"
 
169
그들은 옷을 훌훌 벗고 자리에 누우면서 이렇게 서로 묻는다. 선비는 못 들은 체하고 이불을 막 쓰며 무슨 통지가 또 들어온 모양이군 하였다. 그리고 뒤이어서 낮에 감독놈이 마주서서 싱글벙글 웃던 것을 다시금 생각하며 그놈 참 죽겠어! 남부끄럽게 내 앞에만 와서 그 모양이야! 하였다.
 
170
숙직실 시계가 한시를 치는 것을 듣고 어렴풋이 잠들었던 선비는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 베개를 자리 속에 집어넣어서 마치 사람이 누운 것처럼 꾸미고 그는 문밖을 벗어났다. 그가 이층에서 내려와서 큰문을 소리나지 않게 잘 비틀어서 열고 나왔다.
 
171
기숙사 큰문 위에 환하게 켜놓은 전등 불빛이 그의 온몸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 그는 깜짝 놀라 어둠 속으로 얼른 몸을 피하였다. 그는 다시 사방을 둘러보며 혹시 감독이 나와 섰지나 않았는가? 하는 불안에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눈에 비치지 않으니 그는 다시 발길을 옮겼다. 그가 변소까지 오니 간난이는 벌써 와서 있었다.
 
172
"기다렸니?"
 
173
변소간으로 들어가며 선비는 소곤거렸다. 간난이는 선비 귀에다 입을 대고,
 
174
"이제 방금 감독이 이 앞을 지나갔다."
 
175
선비는 흠칫하며 감독이 그의 뒤를 따라오지나 않았나 하고 뒤를 흘금 돌아보았다. 그들은 마주앉고 한참이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간난이는,
 
176
"내 잠깐 가서 동정을 보고 올 것이니 여기 있거라."
 
177
이렇게 말하며 그는 변소 밖으로 나갔다. 선비는 우두커니 서서 귀를 기울였다. 한참 후에 간난이가 돌아왔다. 그는 숨이 차서 헐떡헐떡하면서,
 
178
"감독이 기숙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왔다…… 그런데 선비야, ××의 지령에 의하야 모든 것을 네게 인계하고 나는 오늘 밤 이 공장을 벗어나야 하겠구나!"
 
179
간난이는 선비의 손을 꼭 쥐며 희미한 변소간 전등불에 비치는 선비의 얼굴을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았다. 선비는 너무나 뜻밖의 말에 멍하니 간난이를 보며 어깨가 차츰 무거워 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180
"그렇게 가분작이, 오늘 밤으로, 뭐?"
 
181
이때 우수수 하는 소리에 그들은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바람소리다.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은 더욱 요란하다.
 
182
"아무턴 긴급한 지령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183
선비는 두 다리가 후르르 떨리며 가슴이 무섭게 둘렁거린다. 더구나 언니 겸 동무이던 간난이가 그의 앞을 떠나갈 생각을 하니 눈이 캄캄하였다.
 
184
"선비야,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싸워야 한다! 너도 맹세하였지?"
 
185
간난의 눈은 흥분으로 빛났다. 그리고 선비의 볼에 볼을 맞대었다.
 
186
"염려 마라! 나가서 몸조심해라!"
 
187
선비는 간난이를 쓸어안았다. 간난이는 선비의 눈물을 씻어 주었다.
 
188
"선비야! 어떠한 일이 있다더라도 낙심 말고 싸워야 한다. 이렇게 눈물 흘려서는 못쓴다. 대담해라. 어서 난 가야겠다……."
 
189
그들은 변소 밖을 나섰다.
 
 

9. 109

 
191
간난이와 선비는 살살 기어서 담 밑까지 왔다. 그리고 간난이는 바짓가랑이 속에서 밧줄을 꺼내 들었다.
 
192
"네 어깨에 올라설 테니 단단히 힘을 써라. 그리고 이 밧줄을 꼭 붙들어 다오."
 
193
그때 바람이 휙 몰아온다. 그들은 사람의 신발 소리인가 싶어 휙근 돌아보았다. 바람은 점점 기세를 더하여 불었다. 그들은 바람 소리로 알았을 때 겨우 안심은 하였으나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차왔다. 그리고 번번이 바람 소리인 줄은 알면서도 바람이 불 때마다 뒤에서 감독이 칵 내닫는 듯하고 그들의 몸에 어떤 손이 감기는 듯하여 등허리에서 땀이 버쩍 나곤 하였다.
 
194
선비는 담 밑에 붙어 앉았다. 간난이가 선비 어깨에 올라서자 선비는 담을 붙들고 일어나려 하였다. 선비의 양 어깨가 빠지는 듯만 했지 아무리 힘을 들이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선비는 몇 번 만에 겨우 일어났다. 간난이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일어세우며 담 위를 붙들기는 했으나 몸을 솟구는 수가 없었다. 그는 손에 든 밧줄을 입에 물고 두 팔로 담 위를 꼭 붙든 후에 다시 몸을 솟구었으나 힘만 들 뿐이고 손에는 땀이 나서 손이 미끄러워 떨어질 듯하였다.
 
195
간난이가 몸을 솟구려고 움찔하는 바람에 선비가 푹 거꾸러졌다.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고 간난이까지 떨어져 굴렀다. 선비는 얼른 간난이를 일어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바람만 지동치듯 불 뿐이었다. 이런 때에 그 바람 소리는 자기들을 위하여 부는 듯하여 다행하였다.
 
196
"내가 나간 담에 이 신을랑 넘겨 다우!"
 
197
선비는 머리를 끄덕이며 여전히 담에 손을 대고 앉았다. 간난이가 선비의 어깨에 올라서서 다시 담 위를 붙들었을 때 휙 하는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듯하므로 간난이는 놀랐다. 그러나 선비는 어깨에 힘을 쓰기 때문에 그 소리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간난이는 이 소리가 담 안에서 나는 소린지, 담 밖에서 나는 소린지, 혹은 바람 소리가 그렇게 들리는지 하여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들었다. 그 휘파람 소리는 어떻게 들으면 담 안에서 나는 것 같고, 또다시 들으면 담 밖에서 나는 듯하였다. 간난이는 몸을 솟구지도 못하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봄바람이 되어 그 기세가 무서웠다. 간난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머리까지 담에 꼭 붙이고 휘파람 소리를 분간하여 들으려 하였다.
 
198
한참 후에 그 소리는 바람 소리인 것을 짐작하며 간난이는 힘껏 몸을 솟구었다. 그러나 솟구어지지 않았다. 한참 후에 간난이는 선비의 어깨만은 벗어났으나 아직도 담 위까지는 못 올라왔다. 아래서 선비는 발돋움을 하고 손으로 간난의 밑을 받들어 주었다. 이렇게 애쓰기를 거의 한 시간이나 넘어서 간난이는 비로소 담 위에까지 올라왔다. 선비는 밧줄을 꼭 붙들었다. 밧줄이 몇 번 잡아쓰이우더니 담 위에 올라섰던 간난이는 보이지 않았다. 선비는 얼른 신을 밧줄에 동여서 올려 치쳤다. 북북 소리를 바람결에 이따금 던지며 밧줄조차 어둠 속에 감추어졌다. 선비는 이마에 땀을 씻으며 사면을 살폈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쉰 후에 불행히 간난이가 어디 상하지나 않았는지? 하는 불안에 담 밑에 붙어 서서 간난의 신발 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반면에 이편 담 안에는 누가 숨어서 이 모든 것을 보지나 않았는가 하여 역시 주의를 하여 살펴보았다. 공장의 소음을 섞은 바람만이 그의 타는 듯한 볼에 후끈거릴 뿐이고 아무 소리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까보다 무서운 생각이 한층 더하였다. 그리고 그의 방까지 갈 것이 난처하였다. 어둠 속 저편에는 감독의 그 눈알이 선비를 노려보는 듯하고, 그리고 그의 신발 소리가 뚜벅뚜벅 들리는 듯하였다. 그는 담을 붙들고 서서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발길을 옮겼다.
 
199
그는 그의 방까지 아무 변동 없이 잘 들어와서 자리에 누웠다. 베개 위에 볼이 선뜻 하고 닿을 때 뜻하지 않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는 이렇게 무사히 방까지 들어와서 누웠으나 바람결에 유리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누가 방문을 열지나 않나? 그리고 너희년네가 간난이를 내보냈지 하고 위협하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간난이가 저 무서운 바람을 안고 지금 어디로 분주히 갈 터이지! 하였다.
 
200
'간난아! 간난아!' 선비는 몇 번이나 입 속으로 간난이를 불렀다. 웬일인지 선비는 간난이를 다시는 만나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더구나 앞으로 일해 갈 것이 난처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얼마든지 많았다.
 
 

10. 110

 
202
이튿날 아침 기숙사에서는 무슨 큰일을 만난 듯하였다. 간난이와 함께 있던 여공들은 감독이 불러다가 위협을 하다하다가 나중에는 때리기까지 했단 말이 돌았다. 그래서 이 모퉁이를 가도 수군수군, 저 모퉁이를 가도 수군수군하였다.
 
203
선비는 감독이 그를 부를 터이지 하고 하루 종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일이 손에 붙지를 않고 툭하면 실이 끊어지곤 하였다. 평시에 간난이와 친하던 동무며, 간난의 방 옆에 있는 여공들까지 다 불러가나, 웬일인지 선비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니 선비는 한층더 가슴이 설레었다. 간난이와 그가 친하다는 것은 온 기숙사가 다 아는 터이고, 물론 감독까지도 잘 알 터인데,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선비를 먼저 부를 줄 알았으나 해가 지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리어 선비는 겁이 나고 이상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204
"이애 뭘 잘했지! 여기 있으면 뭘 하니."
 
205
"잘하기야 열 번 스무 번 잘했지만, 글쎄 어떻게 나갔는지, 참 귀신이 놀랄 일이 아니냐."
 
206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는지 뉘 아니? 그래서 데려나간 게지……."
 
207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드라도 하여간 그 높은 담을 넘지는 못했을 터이고 어데로 나갔겠니……?"
 
208
식당에서 밥을 먹는 여공들은 이렇게 하늘이 무너져도 못 나가는 것으로 알았던 그들에게 비상한 센세이션을 일으키었다.
 
209
"선비야, 넌 알겠지? 그러니 너보고야 말하고 나갔겠지, 그렇지?"
 
210
선비와 마주앉은 농 잘하는 여공이 선비를 보며 웃음 섞어 말하였다. 선비는 그가 미리 알고 말하는 것 같아서 다소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머리를 숙여 그를 피하였다. 그리고 밥에 돌을 고르는 체하다가 머리를 들며 빙긋이 웃었다.
 
211
"간난이가 나가면서야 나두 나가자고 하는 것을 나는 이 공장에서 일하기가 퍽 좋아서 안 나갔단다."
 
212
그들은 허허 호호 웃었다.
 
213
"사실이지 나갈 수만 있다면 나두 나가겠다. 그까짓것 여기 있어 뭘 해."
 
214
"이애 간난이가 요새 선비하고 덜 좋아했단다. 내 말을 하리?"
 
215
눈까풀 얇은 여공이 선비를 말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오물오물 놀렸다. 선비는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으면서 전 같으면 얼굴이 붉어질 것이나 지금에 있어서는 여공들이 그렇게 해석해 주는 것이 도리어 다행하였다.
 
216
"말할까? 말까?"
 
217
눈까풀 얇은 여공은 웃음을 띠고 물었다.
 
218
"이애 넌 무슨 말을 하랴면 속시원하게 얼른 하지, 고 버릇이 무슨 버릇이냐. 주리틀게 눈치만 살살 보면서 무슨 말이기에 그 모양이야? 극상해야 감독이 선비를 고와한단 말이겠구나. 그까짓 말에 그리 얌통을 부릴 게 없지 않니? 왼 기숙사가 다 아는데……."
 
219
얼굴 긴 여공은 이렇게 말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밥만 푹푹 퍼넣는다. 선비는 왼 기숙사가 다 아는데…… 하는 그의 말에는 다소 불쾌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여러 말 하기는 선비의 가슴이 너무나 복잡하였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웃어 보이고 말았다.
 
220
선비가 식당에서 올라왔을 때,
 
221
"선비!"
 
222
하고 사무실에서 감독이 불렀다. 선비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감독이 물으면 대답하려고 어제 밤새도록 준비하였던 말이 어디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선비는 어쩔 줄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223
"죄 없으면 일없지, 무슨 걱정이야."
 
224
옆에서 바라보는 동무가 이렇게 말하였다. 선비는 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225
"방에 선비 없어!"
 
226
재차 부르는 소리를 듣고야 선비는 발길을 떼었다. 그가 문밖을 나서며 다는 얼굴을 부비쳤다. 그리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였으나 자꾸 뛰놀았다. 선비는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한 발걸음에 주저하고 두 발걸음에 망설였다. '내가 이래 가지고야 앞으로 일해 갈 수가 있나? 나는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 거짓말을 곧잘 해야 한다!' 선비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227
감독은 궐련을 피워 물고 들어오는 선비를 바라보자 빙긋이 웃었다. 선비는 마음껏 용기를 내어 가만히 서 있었다. 감독은 기침을 하고 말을 꺼냈다.
 
 

11. 111

 
229
"요새 어디 앓었는가?"
 
230
선비는 뜻밖의 물음에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머리를 조금 들고 감독을 바라보았을 때 보기 싫게 눈을 흘금거리는 호랑이 감독이 아니라, 공장 안에서 까불이라고 별명이 있는 고감독이었다. 선비는 다소 맘을 가라앉히었다. 고감독은 체가 적으니만큼 까불기는 하나 눈치가 빨라서 여공들이 가장 친하게 대하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231
"왜 얼굴이 전만 못하구먼. 몸간수 잘해야 해."
 
232
감독은 기침을 칵 하고 나서 선비의 숙인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요새 동료들 중에 암투의 초점인 이 계집! 언제도 새로운 미를 또다시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장차 저 계집은 누구의 손에 쥐어질지 모르나 어쨌든 지금 동료들끼리 맹렬한 알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각기 기숙사 당번을 즐겨 하고 집에 나가기를 싫어하였다. 그리고 서로 질시가 심하니, 누구나 적극적으로 선비에게 대들지는 못하고, 다만 선비의 호의만 사려고들 애썼던 것이다.
 
233
"여기 좀 앉아, 응 자."
 
234
까불이는 의자를 버쩍 들어 옮겨 놔주었다. 선비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그의 치마 주름을 내려쓸고 있었다. 그리고 감독의 입에서 어서 간난의 말이 나와서 얼른 대답을 한 후에 감독 앞을 벗어나고 싶었다. 선비는 감독만 대하게 되면 어쩐지 어렵고, 덕호를 대하는 듯한 불쾌감이 그를 싸고도는 듯하였던 것이다.
 
235
"선비, 이번 나간 간난이와 한고향이라지?"
 
236
"예."
 
237
"나가기 전에 선비보고 무슨 말이든지 하던 말이 없던가?"
 
238
약빠른 까불이 감독이 그의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저렇게 묻는 듯싶어 얼굴이 활짝 달아 왔다. 그리고 어떻게 대답할까 하고 두루두루 생각하다가,
 
239
"그저…… 무심히 대하였으니 지금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240
까불이는 눈을 깜박깜박하고 나서,
 
241
"별다른 말이 아니라…… 말하자면, 공장에서 일하기 힘든다든지 어느 감독이 몹시 군다든지, 그러한 불평을 말하지 않던가?"
 
242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243
"음."
 
244
까불이는 선비의 임금빛 같은 두 볼을 바라보면서, 저 계집을…… 하고 안타깝게 생각되며 몸이 달았다. 그래서 단박에 달려들어 그를 쓸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동료 중에 그 어느 누가 알든지 하면, 두말도 없이 상부에 보고되어 생명줄이 떨어질 것이 무서웠다.
 
245
"간난이가 저렇게 나간 것을 선비는 어떻게 보는가?"
 
246
까불이는 선비의 태도를 보아, 그리고 그의 의젓한 성격을 미루어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더구나 딴 방에 있었으니 선비는 모를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선비와 이렇게 마주앉고 이야기하기 위하여 일부러 불러 놓고는 이리저리 묻는 것이다. 동시에 선비가 어느 정도로 자기에게 호의를 가졌는가? 하여 눈치를 살살 보았다.
 
247
"잘못된 행실이지요."
 
248
선비는 맘에 없는 말을 겨우 빼었다. 감독은 빙그레 웃었다.
 
249
"암! 잘못된 행실이구말구. 계집이 혼자 나갈 수는 없고 어떤 놈과 짜구 나갔을 게야. 제가 혼자서야 어디로 나가?…… 이감독이 자네보고 하는 말 없던가?"
 
250
이 말을 미루어 감독 자기네끼리도 의심하는 모양이다.
 
251
"없어?"
 
252
다시 한번 채쳐 물었다. 선비는 입에 손을 대고 기침을 가볍게 하였다. 그리고 감독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 것을 짐작하며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253
"응 왜? 대답이 없어. 뭐라고 말하지 않아?"
 
254
"예!"
 
255
"덮어놓고 예, 예만 하니까 알 수가 있나? 이번 일에 대하야 선비에게 뭐라고 묻지 않아?"
 
256
치근치근한 이감독의 성질에 선비를 불러다 놓고 뭐라고 물었을 것이 틀림없는데 선비가 이감독과 벌써 무슨 약조가 있는 새가 되어서 저렇게 숨기나?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선비는 간난이가 일상 하던 말이 문득 생각히었다. "감독을 만나면 너는 뾰로통해만 있지 말고 더러 웃는 체도 해보이렴. 그래서 네 태도를 저들이 분간하지 못하도록 하여라." 선비는 간난의 말이 우스워서 빙긋이 웃었다. 그때 층계를 올라오는 구두 소리…….
 
 

12. 112

 
258
감독은 정색을 하였다.
 
259
"아주, 간난이가 나간 일에 대하여서는 모른단 말이지…… 나가!"
 
260
선비는 말이 떨어지자 곧 나왔다. 그리고 그의 방까지 왔을 때 감독의 방에서 두런두런하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 왔다. 그의 동무들은 선비가 무슨 말을 할까 하고 그의 입술만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261
"뭐라던?"
 
262
선비는 자리를 내려 폈다.
 
263
"뭐라기는 뭐래, 그저 그 말이지."
 
264
"왜 야학에 안 가련?"
 
265
"몸이 좀 아프구나."
 
266
"어데가?"
 
267
"글쎄…… 맥이 없어."
 
268
그들은 풀기 없는 선비를 보며 감독에게서 단단한 나무람을 들은 듯하였다. 그리고 자기들도 감독에게 불림을 받을까? 하는 불안에 눈에 겁을 머금고 밖으로 나갔다.
 
269
선비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맥을 놓으면 몸이 오슬오슬 추우면서도 이마에는 땀이 척척하게 흐르곤 하였다. 이런 때마다 그는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웠다. 그의 어머니와 단둘이서 살던 그 초가! 나무 반 단만 넣으면 잘잘 끓던 그 아랫목! 그 아랫목에서 이불을 막쓰고 땀을 푹 내었으면 그의 몸은 가뿐해질 것 같았다.
 
270
그가 한참 자고 어느 때인가 눈을 번쩍 뜨니 유리창에 달이 둥글하였다. 그는 이마에 척척하게 흐른 땀을 씻으며 달을 향하여 누웠다. 아까 감독이 묻던 말을 다시금 생각하니 그는 감독이 그를 의심하지 않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그 일 때문에 졸이던 맘은 좀 풀리나, 그러나 어깨가 무겁도록 짊어진 이 사명을 어떻게 하여야 잘 이행할 것이 난처하고도 답답하였다. 간난이가 가르쳐 주던 공장 내부 조직 방침, 밖의 동지들과 민활하게 연락 취할 것, 그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문서며 삐라 등을 교묘하게 배부할 것 들이 그의 머리에 번갈아 떠오른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선비는 좀더 있다가 간난이가 나갔으면 내 이렇게 답답하지 않을 것을…… 하며, 그가 무사히 나갔는가 하였다. 그리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렇게 가분작이 간난이를 불러냈는가?…… 그들이 혹 잡히지나 않았는지? 할 때, 적지 않은 불안이 일었다. 동시에 미지의 동지들이 모두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와 같은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지? 혹 첫째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인 것을 자기가 모르는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월미도 가는 길에서 첫째를 만났을 때 일을 미루어 생각하니, 첫째는 어떤 공장 내에 있지 않고 그날그날 품팔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웬걸 지도자를 만났으리…… 아직도 그는 암흑한 생활 속에서 그의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동분서주만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선비는 첫째를 꼭 만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계급의식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는 누구보다도 튼튼한, 그리고 무서운 투사가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선비가 확실하게는 모르나 그의 과거 생활이 자신의 과거에 비하여 못하지 않은 그런 쓰라린 현실에 부대끼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도적질을 하는가?…… 지금 생각하니 어째서 그가 도적질을 하게 되었으며, 매음부의 자식이었던 것을 그는 깊이 깨달았다. 그러니 선비는 어서 바삐 첫째를 만나서 그런 개인적 행동에 그치지 말고 좀더 대중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가 인천에나 있는지? 혹은 딴 곳으로 갔는지? 왜 나는 시골 있을 때 그를 무서워하였던가?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가 소태나무 뿌리를 캐어 들고 새벽에 찾아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소태나무 뿌리를 윗방 구석에 던지던 자기가 끝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느글느글한 덕호가 주던 돈을 이불 속에 넣던 자신을 굽어볼 때, 등허리에서 땀이 나도록 분하고 부끄러웠다. 그뿐이랴! 마침내는 그에게 정조까지 빼앗기고 울던 자신!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던 자기!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었는가! 그리고 그 덕호를 보고 아버지! 아버지! 하며 부르던 그때의 선비는 어쩐지 지금의 자기와 같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이때껏 의문에 붙였던 그의 아버지의 죽음이 얼핏 떠오른다. 옳다! 서분 할멈의 말이 맞았다! 그는 무의식간에 벌떡 일어났다. 그때 손끝이 몹시 아파 왔다. 그래서 손끝을 볼에 대며 덕호를 겨우 벗어난 자신은, 또 그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에게 붙들려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며, 오늘의 선비는 옛날의 선비가 아니라……고 부르짖고 싶었다.
 
 

13. 113

 
272
아버지와 면회를 하고 돌아온 신철이는 감방문 닫히는 소리를 가슴이 울리게 느끼며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가 처음으로 이 방에 들어올 때 저 문 닫히는 소리란 기가 막히게 그의 자존심을 저상시켰으며 반면에 비창한 결심까지 나도록 반발력을 돋아 주었는데, 오늘의 저 닫히는 소리는 그의 자존심이 이때까지 허위요 가장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지의 그 초라한 모양이 안타깝게 떠오른다. 아버지는 그로 인함인지 혹은 생활난으로 인함인지 이태 전과는 아주 딴 사람을 대하는 듯하였다. 아버지의 그 옷 모양이며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 얼굴! 아들을 대하자 아무 말도 못 하고 눈가가 뻘개서 바라만 보던 그 눈! 그때의 아버지의 심정이야말로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그의 가슴속에 뚜렷하였다. 일 초, 이 초 지나는 동안에 부자는 언제까지나 입을 열지 못하였다. 한참 후에 신철이는,
 
273
"영철이 잘 있나요?"
 
274
그때 아버지는 눈물이 그뜩해지며,
 
275
"응, 응."
 
276
하고 어리뻥뻥하게 대답을 하면서 머리를 돌려 버렸다. 아버지의 모호한 그때의 대답을 들을 때 신철이는 가슴이 선뜻해지며 그놈이 죽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들었던 것이다.
 
277
"미루꾸 사주!"
 
278
하던 그 음성도 다시 듣지 못할 겐가? 하며 신철이는 벽에 의지하여 눈을 꾹 감았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279
"너 박판사를 만나 보았니?…… 박판사의 말대로 하여…… 응, 공연한 고집 부리지 말고……."
 
280
말을 마치자 면회는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그 떨리는 음성! 그것은 거의 애원이었다. 그리고 이때까지 그 어느 구석에 숨어 있던 그의 그 어떤 생각을 정면으로 찔러 주는 듯하였다. 어떻게 하나? 어제 만나 본 병식의 말대로 해버릴까?
 
281
병식이는 그가 최후로 도서실에서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았던, 육법전서를 안고 외던 학생이었다. 그는 벌써 예심판사가 되었던 것이다.
 
282
병식이를 만나는 첫 순간, 신철이는 적이 놀라면서도 반면에 그의 자존심이 강하게 동하였다. 보다도 억지로 그의 자존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에는 그가 권고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않았지만 일단 그와 마주앉아 있기가 왜 그리 불쾌하였는지 몰랐다. 그러므로 신철이는 머리를 돌린 채 그의 묻는 말에 한 마디도 대답지 않았다. 그러나 병식이는 그의 직무상 옛날 동무로서의 우정을 생각해서 그랬는지 어쨌든 간곡히 말하였던 것이다.
 
283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아버지가 병식이를 찾아가서 간곡한 부탁이 있은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렇게 깨닫고 나니 병식이가 열심으로 지껄이던 말이 그의 머리에 명랑하게 떠오른다.
 
284
"우선 나부터도 이 자본주의 사회제도를 전부가 다 옳다고 긍정할 수는 없네. 따라서 이 제도를 부인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보겠다는 용감한 투사들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러나 이 제도를 없이하려면 상당히 오랜 역사를 요구하게 될 것이 아닌가. 즉 장구한 시일과 다수한 희생이 있어야 될 것은 자네가 더 잘 알 것일세. 그러나 이 같은 떳떳한 일을 위해서는 나 개인 하나는 희생한다고…… 하는 것이 남아로서 장쾌한 일이라고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게 되나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나 혼자가 더 그랬댔자 오늘낼로 곧 혁명이 될 것도 아니요, 또 안 그랬댔자 될 혁명이 안 될 것도 아니니, 이 세상에 한번 나서 어찌 나 개인을 그렇게도 무시할 수가 있는가? 더구나 자네나 나는 집안 형편이 딱하게 되지 않았는가…… 자네나 내가 없으면 집안 식구는 내일부터라도 문전걸식할 형편이니, 지금부터 이 감옥에서 십 년이 될지, 몇 해가 될지 모르는 그 세월을 희생할 생각을 해보게…… 요즘 일본에서도 ××당의 거두들이 전향한 것도 잘 알 터이지. 그들도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일세. 자네는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285
병식이는 얼굴에 비창한 빛을 띠고 신철이를 바라보았다. 신철이는 그의 타산에 밝은 개인주의적 그 이론으로 자기를 설복시키려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일종의 모욕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였다. 이 눈치를 챈 병식이는,
 
286
"그러면 돌아가서 깊이 생각해 보게. 나는 나의 직무를 떠나 옛날의 우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권하네……."
 
287
그때 옆에 섰던 간수는 호령을 하였다.
 
288
"일어서!"
 
 

14. 114

 
290
오늘 아버지의 애원을 듣던 그때, 그리고 아버지의 파리해진 얼굴을 바라보는 그 순간에 자신의 그 비창한 결심이란 얼마나 약한 것이었던가? 신철이는 한숨을 후 쉬었다. 그때 이 형무소에 같이 들어온 밤송이 동무며 그 밖에 여러 동지의 얼굴들이 번갈아 떠오른다. 특히 인천에 있는 첫째의 얼굴이 무섭게 확대되어 가지고 그의 앞에 어른거려 보인다. 신철이는 그 얼굴을 피하려고 눈을 번쩍 떴다. 어젯밤만 해도 첫째의 얼굴을 머리에 그려 보며 그리워하였는데, 이 순간에는 어쩐지 첫째의 그 얼굴이 무섭게 보였던 것이다.
 
291
창문으로 쏘아 들어오는 붉은 실타래 같은 햇발이 벽 위에 아로새겨졌다. 유리, 철창, 굵은 철망, 가는 철망의 네 겹을 뚫고 들어오는 저 햇빛! 그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동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간수가 미하리(망) 구멍으로 들여다볼 때마다 시간을 물어 가지고 그 햇빛을 따라 벽 위에 가는 금을 그어 놓았다. 그래서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던 것이다. 신철이는 저 햇발을 바라보면서 지금 열한시 반이나 되었을 것을 짐작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지금 집에 돌아가셔서 몹시 번민하시겠지…… 하였다. 아버지의 모양을 보아 말하지는 않아도 그나마 학교에서도 나온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몇 식구가 오직 아버지만 바라보고 있던 터에 아버지마저 학교에서 나왔다면 그 생활의 궁함이야말로 보지 않았어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292
어떻게 한담? 그의 집안을 돌아보아서 여기서 꼭 나가야 하겠고, 보다도 자신의 약한 육체를 보아서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그는 경찰서에서 고문받던 생각을 하고 소름이 쭉 끼쳤다. 두 번은 못 당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모르고나 당할 노릇이지 지금과 같이 그 맛을 뻔히 알고서는 넙죽 죽으면 죽었지 그 노릇은 다시 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293
확실히는 모르나 미결에서 기결로 옮아가게 될 것도 일이 년은 걸릴 듯하였다. 그리고 다시 기결에 들어서는 십 년이 될지, 십오 년이 될지? 그것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십 년 밖이지 십 년 내로는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일생을 이 감옥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앞이 아뜩해졌다. 그때 그는 병식이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의 하던 말을 곰곰이 되풀이하였다. 어제 병식의 앞에서는 그의 말에 구역증이 나고 듣기도 싫더니 불과 하루를 지난 오늘에는 그 말이 그럴듯하게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병식의 앞에서 머리를 굽혀 보이기는 그의 자존심이 아직도 강하였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무심히 발끝을 굽어보았다. 그때 발가락에 개미 한 마리가 오르고 내리는 것이 보였다. 신철이는 반가운 생각이 들어 개미를 붙잡아 손바닥에 놓았다. 개미는 어쩔 줄을 몰라 발발 기어 달아난다. 달아나면 또 붙잡아다 놓고서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294
그가 개미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신이 이 개미와 같이 헛수고를 하는 듯싶었다. 개미야말로 모르고서나 이 감방에를 찾아 들어온 것이지, 아무 먹을 것이 없는 이 쓸쓸한 감방에 들어올 까닭이 없었다. 오늘 이 개미는 먹을 것도 얻지 못하고 자기에게 붙잡혀서 고달플 것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 몸은 아무 소득도 없는 고생을 이때까지 해오다가, 또다시 여기까지 들어온 것 같을 뿐 아니라, 앞으로 몇십 년을 지나고 다행히 목숨이 붙어서 밖에 나간댔자, 벌써 자신은 그만큼 뒤떨어져서 여기도 저기도 섞이지 못하고, 결국은 일포나 기호 같은 그런 고리타분한 전락된 인텔리밖에 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295
그렇다고 이 자리를 벗어날 것인가? 신철이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강하게 흔들리지를 않고 아주 약하게 흔들리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296
마침 버들피리 소리가 끊어질 듯 질 듯하게 들리므로 그는 벌떡 일어났다.
 
 

15. 115

 
298
신철이는 얼른 미하리 구멍부터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디서 간수의 신발 소리가 나는가 하여 귀를 쫑긋 세우며 창 앞에 다가섰다. 창의 높이는 신철의 턱을 지나쳐 입술과 거의 맞닿았다. 신철이는 한숨을 푹 쉬면서 인왕산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볕을 안고 반공중에 뚜렷이 솟은 저 인왕산…… 그때 가까이서 새소리가 나므로 시선을 옮겼다.
 
299
창 밖에는 조그만 못이 있고, 그 옆에는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수양버드나무가 마치 여인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가지 가지가 척척 휘어 늘어졌다. 그리고 버들잎이 파릇파릇하였다. 신철이가 처음 여기 와서 저 버드나무를 볼 때는 앙상한 가지만이 봄바람에 휘날리더니 어느덧 벌써 잎이 저렇게 좋아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바라보는 저 버드나무! 바라볼 때마다 그는 새로운 느낌을 가지고 대하곤 하였다. 그리고 용연의 원소가 떠오르고 선비가 눈결에 지나쳤다. 그러나 그 선비는 옛날의 그 선비와는 어딘지 모르게 거리가 먼 것을 그는 느끼곤 하였다. 지금 그의 머리에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반대로 옥점이었다. 옥점이! 그는 다시 한번 옥점이를 불러 보았다. 아직까지도 그가 시집가지 않고 나를 기다릴까? 그렇지야 못하겠지? 벌써 어떤 사람의 아내가 되었겠지! 그러나 나를 아주 잊지는 못하리라…… 하고 멍하니 못을 바라보았다. 못 속에는 버들가지 그림자가 파랗게 떨어져 깔리었다. 그의 가슴속에 옥점의 얼굴이 파묻힌 것처럼…….
 
300
그때 잠깐 끊어졌던 버들피리 소리가 아우아우 하고 들려 왔다. 그가 어려서 과부의 넋두리라고 하며 버들피리 끝에 손을 대고 마디마디를 꺾어 불던 그 곡조였다. 신철이는 머리를 번쩍 들어 피리 소리 나는 곳을 찾았다. 봄을 만난 인왕산…… 어린애들이며 청춘 남녀가 가지런히 갈서서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애들의 떠드는 소리가 푸른 하늘가에서 재재거리는 종달새 소리같이 그렇게 명랑하게 들리었다. 그가 동무들과 저 산에 올라가던 그때가 엊그제 같건만……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니 발버둥을 치고 싶게 안타까웠다. 그리고 차라리 아버지의 말씀대로 하였더면 하는 후회까지 절실히 일어난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아주 비열하고 더러운 생각이라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꽃다운 청춘기를 그가 이 철창 속에서 이러한 망상과 공상에서 썩힐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그러니 나 혼자만 무의미한 희생이지…… 그는 인왕산에 오른 남자를 바라보면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맘은 보채었다. 안타깝게 보채었다. 이렇게 번민과 쓰림을 당하는 것이 자기만이 아니고 이 안에 들어 있는 수없는 인간들인 것을 그는 깨달았다.
 
301
피리 소리는 차츰 가늘어진다. 그의 안타까운 이 가슴의 굽이굽이를 바늘끝으로 꼭꼭 찌른다고 할지? 예리한 칼끝으로 심장의 일부를 살짝살짝 저민다고나 할지? ……저 푸른 하늘 아래 가는 연기와 같이 떠도는 저 피리 소리! 신철이는 어느덧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시커멓게 가로질러 나간 철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물 먹고 싶듯이 저 세상이 그립다. 저 세상의 푸른 공기를 맘껏 들이마시고 싶다.
 
302
그때 절그럭 하는 소리에 신철이는 깜짝 놀라 펄썩 주저앉았다.
 
303
"이놈아!"
 
304
간수의 호통소리에 그의 가슴은 푸르르 떨렸다.
 
305
"이리 와 앉아!"
 
306
신철이는 하는 수 없이 이편으로 와서 주저앉았다.
 
307
"내다보면 못써. 이 담엔 벌이 있을 테야!"
 
308
신철이는 울분이 목구멍까지 치받치는 것을 꾹 참았다. 그는 기가 막혀서 묵묵히 앉았을 뿐이다. 간수는 한참이나 서서 신철이를 노려보다가 절그럭 하고 미하리 구멍을 닫는다. 그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펴보니 개미는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개미 동무를 잃어버린 그는 곁에 놓인 법화경(法華經)을 끌어당기어 펴들었다.
 
 

16. 116

 
310
입맛이 당기지를 않아서 저녁도 먹지 않은 선비는 여러 동무와 같이 공장으로 들어왔다. 이날 선비는 야근할 차례였던 것이다. 여공들은 누구나 다 밤일은 싫어하였다. 그래서 제각기 야근 차례만 돌아오면 얼굴을 찡그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남직공과 친해진 여공들은 야근하기를 좋아했다. 물론 밤에도 감독이 감독을 하지마는, 감독들은 하룻밤에도 몇 번씩이나 교대를 하였다. 그러므로 교대하는 그 틈마다 고치통을 들고 들어오는 남직공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밤이니 감독들은 낮과 같이 그렇게 심하게 보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밤에 남직공을 틈틈이 만나 보려고 애를 쓰곤 하였던 것이다.
 
311
요새는 남직공과 여직공들이 배가 맞아서 나간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러니 감독들이 눈을 밝히고 감독은 한다면서도 어쩐지 그런 일이 자꾸 일어났다.
 
312
선비는 육백삼호인 가마 곁으로 와서 동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313
"이전 나가세요. 제 시간이어요."
 
314
동무는 가마 소제를 하다가 휙근 돌아본다.
 
315
"내 소지하지요."
 
316
"아슴찮아라…… 참, 아픈 것 낫소?"
 
317
동무는 손빠르게 와꾸를 뽑아서 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서 간다.
 
318
선비는 솔을 들고 가마를 얼핏 가신 후에 낡은 물을 내뿜고 새 물이 들어오게 하였다. 이렇게 기계를 소제하는 동안에도 기계의 운전은 쉬지 않았다. 그래서 선비는…… 아니 이 공장 안의 여공들은, 이 기계란 쉴 줄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기계에 머리카락이나 혹은 옷이 끼일까 봐 무서워서 머리에 수건을 막 쓰고 검은 통옷을 만들어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시커멓게 내려 입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나 간봄에 여공 하나가 머리카락이 와꾸에 끼어서 마침내는 기계에 말려들어 무참하게도 죽었던 것이다. 공장에서는 이것을 극비밀에 붙이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도 못 하게 하나, 곁에서 이 참경을 본 몇몇의 여공들이 있으므로, 아는 듯 모르는 듯 그 말이 전 공장 안에 좍 퍼졌던 것이다. 그 후로 이 공장에서는 여공들에게 이런 작업복과 수건을 쓰라고 엄명하였다. 물론 공장에서 내준 것이 아니고 여공들 스스로 해입게 하였던 것이다.
 
319
선비는 남직공이 갖다 주는 삶은 고치를 가마에 들어부었다. 끓는 물 소리가 와스스 하고 나며 고치는 가마 물 속에서 핑핑 돌아간다. 그때 어깨 위가 오싹해지며 오슬오슬 추워 왔다. 그리고 기침이 연달아 칵칵 일어난다. 그는 기침을 안 하려고 입을 꼭 다문 후에 숨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기침은 안타깝게 목구멍에서 간지럼을 태우며 올라오려고 애를 썼다. 선비는 이렇게 기침을 참아 가면서, 조그만 비를 들고 끓어오르는 고치를 꾹꾹 눌러 가며 비 끝에 묻어나는 실끝을 왼손에 감아 쥐었다. 가마에서 끓어오르는 물김에 그의 얼굴이 화끈화끈 달며 벌써 손끝이 짜르르해 왔다. 그러나 반대로 등허리는 오싹오싹 오한이 난다. 선비는 간봄부터 확실하게 이러한 것을 느끼면서도 그저 일시 일어나는 몸살이거니…… 하였다. 그러나 여름철이 닥친 지금까지도 이 추운 증세는 떨어지지 않고 기침까지 곁들였다. 그래서 그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으나, 그러나 의사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320
선비는 비를 놓고 왼손에 쥔 실끝을 한 오라기씩 돌아가며 사기바늘에 번개치듯 붙인다. 그러나 바늘 하나에 여러 번 붙이면 실오라기가 너무 굵어지니, 사기바늘 하나에 다섯 번 이상은 못 붙이는 것이다. 사기바늘을 통하여 뽑히는 실끝은, 마치 재봉침 실끝이 용쇠를 통하여 올라가는 것처럼, 비틀비틀 꼬여져서, 와꾸를 향하여 쭉쭉 올라가서 감긴다. 와꾸 옆에는 유리 갈고리가 공중에 매어달려서 와꾸에 실이 고루 감기도록 실끝을 물고 왔다갔다한다.
 
321
전등불이 낮같이 밝은데 그 위에 유리창문과 유리천장에 반사가 되어 눈이 부시게 휘황하였다. 그리고 발전기 소음 때문에 귀가 막막하게 메어지는 것 같았다. 선비는 기침을 칵칵 해가면서 자리를 붙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다. 그것은 이십 개나 되는 와꾸를 혼자서 조종하려니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오슬오슬 춥던 것은 이젠 반대로 뜨거운 열이 되어 옷이 감기도록 땀이 흘렀다.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사뭇 빗방울같이 흘러서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숨이 차와서 흑흑 느끼었다. 손끝은 뜨거움이 진해서 차츰 무신경 상태에 들어간다. 그래서 남의 손인지 내 손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17. 117

 
323
마침 실이 여기저기서 끊겼다. 선비는 발판을 꾹 눌렀다 놓아 기계를 정지시킨 후에 손빠르게 실끝을 쥐었다. 그때 옆에서 감독이 소리쳤다.
 
324
"얼른 이어! 요새 선비가 웬일이어?"
 
325
감독은 들었던 채찍으로 와꾸를 툭 치어 기계를 돌리었다. 그러니 실끝은 채 이어지지 못한 채 와꾸는 핑글핑글 돌았다. 선비는 울고 싶었다. 오늘 밤새도록 일한 것이 헛수고였던 것이다. 감독이 이렇게 와꾸를 돌리게 되면 으레 이십 전 벌금을 물게 되는 것이다. 선비는 어쩔 줄을 몰라서 돌아가는 와꾸를 바라보며 실끝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앞이 아뜩아뜩해지며 기침이 자꾸 기어나오려고 하였다.
 
326
"무슨 딴생각을 하는 게야! 이렇게 일에 성의가 없이 할 때에는, 응 그러하지?"
 
327
선비는 가슴이 뜨끔해지며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리고 이 자들이 눈치를 채지나 않았는가? 하였다. 따라서 요새는 거의 날마다 선비를 나무라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하였다. 그래서 선비는 한층더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허둥거렸다.
 
328
한참 후에 선비는 겨우 실끝을 이었다. 벌써 감독은 수첩에 무엇인가 쓰고 있다. 그리고 선비를 흘금흘금 곁눈질해 보며 수첩을 포켓에 집어넣고 그의 앞을 떠났다. 선비는 비로소 한숨을 후 쉬었다. 기침이 야무지게 칵 나왔다. 그는 감독이 그의 기침소리를 들었을까 하여 얼른 감독의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감독은 요새 갓 들어온 여공 앞에 서서 무어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의 실팍한 궁둥이를 툭 쳤다.
 
329
"일 잘해! 그래야 상금을 타지."
 
330
여공은 몸을 꼬며 애교를 피웠다. 그리고 감독의 눈을 슬쩍 맞추고 눈을 스르르 감으며 웃었다. 이 여공의 특색은 웃으면 저렇게 눈이 되곤 하는 것이다. 선비는 요새 감독이 그의 앞을 떠나 신입 여공에게 저렇게 구는 것이 잘되었다고 생각은 되면서도 그것으로 인하여 그의 맡은 사업이 속히 드러날 위험을 느끼었다. 그리고 전에는 이따금 상금을 주었을망정 이렇게 와꾸를 돌리며 나무라지는 않았는데, 신입 여공이 감독의 비위를 맞추어 주면서부터는 감독의 태도가 아주 냉랭해졌다. 그리고 오늘까지 하면 벌금 문 것이 세 번째나 되었다. 선비는 여전히 바쁘게 손을 놀리면서도 한숨을 폭 쉬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몸이 더 괴롭고 기침만 나오려고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나마 아까는 다만 몇십 전의 벌이라도 되거니…… 했다가 그 희망조차 아주 끊어지고 나니 복받치는 것은 아픔과 설움뿐이었다. 그때 그는 간난이가 하던 말을 다시금 생각하고 어느 정도까지 감독의 비위를 맞추어 둘 것을…… 하는 후회도 다소 일었다.
 
331
선비는 안타깝게 올라오려는 기침을 막기 위해서 얼른 비 끝으로 번데기를 건지려 하였다. 전등불에 비치어 금빛같이 빛나는 가마 물속에서 끊임없이 뽑히어 올라가는 저 실끝! 하루에도 저 실을 수만 와꾸나 감아 놓는 것이다.
 
332
선비는 번데기를 건져 입에 물며 머리를 들어 와꾸를 바라보았다. 번개치듯 돌아가는 와꾸에 흰 무지개같이 서기를 뻗치며 감기는 저 실! 처음에 그가 저 와꾸를 바라볼 때는 뭐라고 형용 못 할 애착을 느끼었으며, 그리고 저것들을 뽑아서 하꼬(상자)에 담아 가지고 감정실로 들어갈 때의 만족이란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저것을 바라볼 때는 그것들이 그의 생명을 좀먹어 들어가는 어떤 커다란 벌레같이 생각되었다.
 
333
감독이 이리로 오는 눈치를 채고 선비는 얼른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실끝을 골라 바짝 쥐고 사기바늘에 붙였다. 이번에는 감독이 눈도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간다. 선비는 감독이 지나친 것만 다행으로, 하던 생각을 다시 계속하였다.
 
334
감독의 소리가 크게 나므로 흘금 바라보니, 곁의 동무의 와꾸를 툭 쳐서 돌린다. 동무는 얼굴이 빨개서 실끝을 이으려고 허둥거린다…… 그 팔! 그 손끝! 차마 눈 가지고는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선비는 이마의 땀을 씻으며, 그의 손가락을 다시 보았다. 빨갛게 익은 손등! 물에 부풀어서 허옇게 된 다섯 손가락! 산 손등에 죽은 손가락이 달린 것 같았다. 그는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며, 이 공장 안에 죽은 손가락이 얼마든지 쌓인 것을 그는 깨달았다.
 
335
와꾸 와꾸 잘 돌아라
336
핑핑 잘 돌아라
 
337
발전기 소음을 타고 이런 노래가 꺼졌다…… 살았다…… 하였다.
 
 

18. 118

 
339
선비도 어느덧 그 노래에 맞추어,
 
340
와꾸 와꾸 잘 돌아라
341
핑핑 잘 돌아라
342
네가 잘 돌면 상금
343
네가 못 돌면 벌금
 
344
겨우 이렇게 입 속으로 부른 선비는 눈등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괴롬을 잊기 위한 이 노래! 일에 재미를 붙이기 위한 이 노래도 선비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 활활 다는 가마 속에 그의 몸뚱이를 넣고 달달 볶는 것 같았다. 목이 타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코 안이 달고 눈알이 뜨거웠다. 그는 맘대로 하면 이 자리에 칵 엎어져서 몇 분 동안이나마 쉬었으면 이 아픈 것이 좀 나을 것 같았다. 선비는 지나는 감독의 구두 소리를 들으며 몸이 아파서 오늘은 일을 못 하겠어요 하고 몇 번이나 말을 하렸으나 입이 꽉 붙고 떨어지지 않았다. 어딘지 전날에도 선비는 감독들만 대하면 이렇게 입이 굳어졌는데 더구나 몸이 아프니 말할 것도 없었다.
 
345
선비는 이제야 자기의 병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기침할 때마다 침에 섞여 나오는 붉은 실 같은 피도 더욱 더욱 관심되었다. 내일은 병원에를 가야지! 꼭 가야지! 하였다. 그리고 예금통장에 적혀 있는 돈 액수를 회계하여 보았다. 선비가 이 공장에 들어온 지가 벌써 거의 일년이 되어 온다. 그 동안 식비 제하고 그리고 구두 값으로, 일용품값으로 제하고 겨우 삼 원 오십 전 가량 남아 있다. 이제 그것으로 병원에까지 가면 도리어 빚을 지게 될 것이다. 무슨 병이기에 삼 원씩이나 들까? 그저 극상해야 한 일 원 어치 약 먹었으면 낫겠지? 하였다.
 
346
그는 저편 벽에 걸린 커단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로 두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다. 선비는 그의 다는 가슴에나마 한줄기의 희망과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347
실이 끊어져 너풀거리므로 선비는 얼른 실끝을 이으며 감독의 눈에 띄지 않았는가 하여 머리를 들 때 앞이 아뜩해지며 쓰러지려 하였다. 그 바람에 그의 바른손이 가마 물 속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348
그는,
 
349
"아!"
 
350
비명을 내며 얼핏 손을 챘다. 그때 손은 이미 뜨거운 물에 담기었었으니 아픈지 어떤지 분명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손과 팔이 저리고 쓰리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351
"어데 몹시 다았수?"
 
352
선비는 머리를 들고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 자기에게 말을 던진 것이 고치통을 들고 온 남직공이라는 것을 알자 첫째의 그 얼굴이 휙 떠오른다. 선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돌렸다. 남직공은 멍하니 섰다가 돌아간다. 전 같으면 부끄럼이 앞을 가리었을 터이나 오늘은 온몸이 아프고 팔목까지 데었으니 그런지 부끄럼도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저 남직공에게 무엇인가 호소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었다. 그리고 그가 첫째라면 선비는 서슴지 않고 그의 몸에 피로해진 자신의 몸뚱이를 맡기고 싶었다. 선비는 못 견디게 쓰린 팔목을 혀끝으로 핥으며, 돌아가는 남직공을 흘금 바라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리어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선비는 아무래도 이 밤을 새워 일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시계를 바라보면서 감독이 이리로 오면 말하겠다 하고 생각하였다.
 
353
멀리 서 있는 감독이 그림자같이 눈앞에 희미하게 어른거리므로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때 감독이 그의 앞을 지나치는 듯하여 그는 입을 떼려 하였다. 그 순간 기침이 칵 나오며 가슴에서 가래가 끓어 올라오므로 그는 얼핏 입에 손을 대었다. 기침이 뒤를 이어 자꾸 나오려 하는 것을 참으려고 애를 쓸 때 마침내 그의 입에 댄 다섯 손가락 새로 붉은 피가 주르르 흐르며 선비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19. 119

 
355
어떤 토굴 속 같은 방 안에 첫째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매일같이 노동하던 그가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이 이상 더 안타까운 괴롬은 또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숨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므로 동무들이 전전 푼푼 갖다 주는 것을 가지고 요새 이렇게 들어앉고만 있었던 것이다.
 
356
잡생각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도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없으니 별의별 생각이 다 일어나곤 하였다. 그는 요새 신철이를 몹시 생각하였다. 철수를 통하여 신철의 소식을 가끔 들으나 언제나 시원치 않은 소식이었다. 어서 빨리 나가서 다시 손에 손을 마주잡고 전날과 같이 일을 했으면 좋을 터인데…… 여기까지 생각한 첫째는 월미도를 향하여 가던 긴 행렬을 다시금 눈앞에 그려 보았다. 그리고 선비의 놀라던 모양이 문득 생각난다. 참말 선비였던가? 그가 참말 선비라면 어느 때든지 만나 볼 것 같았다. 그때 그는 어젯밤 철수에게로 나왔을 대동방적공장의 보고를 듣고 싶은 생각이 부쩍 났다. 그리고 속이 달아 못 견디겠으므로 밖으로 나왔다.
 
357
그가 철수의 집까지 오니, 마침 철수는 집에 있었다. 철수는 소리를 낮추어,
 
358
"서울서 어떤 동무 편에 신철의 소식을 알았소……."
 
359
첫째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커다란 눈을 둥그렇게 떴다.
 
360
"불기소가 되어서 나왔대우…… 이유는 사상 전환이라우."
 
361
"전환……?"
 
362
첫째도 무의식간에 그의 말을 받고 나서 이 말을 믿어야 할까? 믿지 않아야 옳을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힘이 그의 가슴을 짝 채우고 말았다. 철수는 첫째의 낙심하는 모양을 살피고,
 
363
"동무! 신철이가 전향했다는 것이 그리 놀랄 것이 아닙니다. 소위 지식계급이란 그렇지요. 신철이는 나오자 M국에 취직하고 더욱 돈 많은 계집을 얻고 했다우."
 
364
취직하고…… 돈 많은 계집을 얻구……? 이 새로운 말에 첫째는 무엇인가 번개같이 그의 머리를 찔러 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꼭 집어대어 철수와 같이 술술 지껄일 수는 없었다.
 
365
그때 밖에서 신발 소리가 벼락치듯 나더니 문이 홱 열리었다. 그들은 벌떡 일어났다.
 
 

20. 120

 
367
그들은 뒷문 편으로 다가서며 바라보았다.
 
368
간난이였다. 철수는 나무라듯이 간난이를 보았다. 간난이는 숨이 차서 한참이나 머뭇머뭇하다가,
 
369
"지금…… 곧 와주셔야 하겠수, 네? 빨리……."
 
370
간난이는 겨우 이렇게 말하고 홱 돌아서 나가 버렸다. 그들의 놀란 가슴은 아직도 벌렁거린다. 첫째는 간난이를 바라볼 때, 몹시 낯이 익어 보이는데도 얼핏 누구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철수는 첫째를 돌아보았다.
 
371
"같이 갑시다…… 아마 죽어 가는 모양이오!"
 
372
첫째는 철수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철수는 급하게 걸으며 앞뒤를 흘금흘금 돌아본 후에 가만히 말을 꺼냈다.
 
373
"어젯밤 대동방적공장에서 여성 동무 하나가 병으로 인하야 해고되었는데……."
 
374
그때 자전거가 휙 지나치자, 물고기 비린내가 훅 끼친다. 첫째는 물고기 장수를 눈결에 보고 철수의 말을 다시 한번 속으로 되풀이하여 보았다. 그때 그는 가슴이 묵직함을 느꼈다.
 
375
"병인즉은 폐병인데…… 후!"
 
376
철수는 그 조그만 눈을 쭉 찢어지게 뜨며 입술을 꾹 다물어 보인다. 그때 첫째는 멀리 수림 위로 보이는 대동방적공장의 연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시커먼 연기를 풀풀 토한다. 첫째는 선비도 그러한 병에나 걸리지 않았는지? 하였다.
 
377
그들이 간난이 집까지 왔을 때 간난이는 맞받아 나왔다. 그리고 입을 실룩거리며 무슨 말을 하기는 하나 음성이 탁 갈리어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벌써 눈치를 채고 나는 듯이 방으로 뛰어들었다. 철수는 병자의 곁으로 와서 들여다보며 흔들었다.
 
378
"동무! 정신 좀 차리우, 동무!"
 
379
병자의 몸은 벌써 싸늘하게 식었으며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 철수는 후 하고 한숨을 쉬고 첫째를 돌아보았다. 가슴을 졸이고 섰던 첫째가 한 걸음 다가서며 들여다보는 순간,
 
380
"선비!"
 
381
그도 모르게 그는 소리를 지르고 나서 우뚝 섰다. 그의 앞은 아득해지며 어떤 암흑한 낭 아래로 채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어려서부터 그리워하던 이 선비! 한번 만나 보려니…… 하던 이 선비, 이 선비가 이젠 저렇게 죽지 않았는가! 찰나에 그의 머리에는 아까 철수에게서 들었던 말이 번개같이 떠오른다.
 
382
"돈 많은 계집을 얻구, 취직을 하구……."
 
383
그렇다! 신철이는 그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가 그로 하여금 전향을 하게 한 게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가? 과거와 같이, 그리고 눈앞에 나타나는 현재와 같이 아무러한 여유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신철이는 길이 많다. 신철이와 나와 다른 것이란 여기 있었구나!
 
384
이렇게 생각한 첫째는 눈을 부릅뜨고 선비를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사모하던 저 선비! 아내로 맞아 아들딸 낳고 살아 보려던 선비! 한번 만나 이야기도 못 해본 그가 결국은 시체가 되어 바로 눈앞에 놓이지 않았는가!
 
385
이제야 죽은 선비를 옜다 받아라! 하고 던져 주지 않는가.
 
386
여기까지 생각한 첫째의 눈에서는 불덩이가 펄펄 나는 듯하였다.
 
387
그리고 불불 떨었다. 이렇게 무섭게 첫째 앞에 나타나 보이는 선비의 시체는 차츰 시커먼 뭉치가 되어 그의 앞에 칵 가로질리는 것을 그는 눈이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았다.
 
388
이 시커먼 뭉치! 이 뭉치는 점점 크게 확대되어 가지고 그의 앞을 캄캄하게 하였다. 아니, 인간이 걸어가는 앞길에 가로질리는 이 뭉치…… 시커먼 뭉치, 이 뭉치야말로 인간 문제가 아니고 무엇일까?
 
389
이 인간 문제!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를 위하여 몇천만 년을 두고 싸워 왔다. 그러나 아직 이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앞으로 이 당면한 큰 문제를 풀어 나갈 인간이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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