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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일천구백칠십 년 전 아시아(亞細亞)의 중심이 되는 지나(支那) 땅에는 여러 왕조(王朝)를 거치어서 전한말엽(前漢末葉)─ 원시적 생활을 벗어나서 인제는 꽤 고등한 문화생활을 경영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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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토는 서편으로는 파밀고원(高原)까지 교통로가 뚫리고 동편으로는 벋고 벋어서 지금의 조선반도의 대동강 유역에 해당하는 지대에 낙랑군(樂浪郡)을 두게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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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압록강 상류 고구려현(高句麗縣)에서 고주몽(高朱蒙)이라 하는 청년이 임금으로 삼아 가지고 한 개 새로운 나라가 일어났다. 민족 계통으로는 한(韓)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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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상지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날쌔고 총민한 민족으로서 그의 영토는 차차 넓어가서 어느덧 압록강 유역 전부를 영토에 집어넣고 한(漢)나라 본토와 낙랑군의 연락을 끊은 뒤에 낙랑군까지 삼켜 버리고 남으로 벋어서는 한강 유역까지 내려가고 동으로는 지금의 북조선의 전부와 간도(間島) 지방과 동시베리아까지 강역 안에 넣고 북으로는 송화강을 넘고 지금의 신경(新京) 농안(農安) 등지가 전부 고구려 영역이요 서쪽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서까지- 사실에 있어서 동방의 대제국을 이루었었다. 지나에서는 전한(前漢)을 지나서 후한(後漢), 위(魏), 진(晋), 송(宋), 남북조(南北朝), 수(隋), 당(唐),- 무릇 왕조가 바꾸이기를 칠팔 회나 거듭할 동안, 위연히 반도의 북부와 만주에 점거하여, 동진(東進)하려는 지나의 세력에 방호벽이 되어 문화와 국위에 아우른 대제국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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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구려의 지족(支族)으로 지금의 조선반도의 서남쪽 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나라로 백제(百濟)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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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고구려가 흥기하는 것과 거진 때를 같이하여(지금의 조선반도의 동남쪽 지역에) 신라(新羅)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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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계에 종주(宗主)로 자임하고 있는 지나에서는 자기 나라에서는 그 새 여러번을 왕조(王朝)가 바꾸이었으나 동쪽에 웅거해 있는 세 나라-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 에 대하여 종주권(宗主權)을 갖고 싶은 야욕만은 어느 왕조를 무론하고 단념하여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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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체 고구려의 힘이 세기 때문에, 누차 고구려를 건드리어 보았으나 그 몇 번을 실패의 역사만 거듭할 뿐더러 도리어 고구려에게 정벌을 당하고 영토를 침식당하는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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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백제는 위치상 고구려를 거치어서야 갈 수 있느니만치, 고구려를 거꾸러뜨리지 못하고는 역시 건드릴 수가 없었다. 고구려는 지나에게 대하 여는 커다란 암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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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고구려와 지나의 쟁패전 칠백 년- 수(隨)나라는 고구려 정벌 실패가 동기가 되어서 드디어 나라까지 넘어지고 당(唐)나라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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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무력만으로 고구려를 거꾸러뜨릴 수가 도저히 없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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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먼저 신라와 접근을 하였다. 신라는 나라이 미약하기 때문에 늘 고구려며 백제에게 협위를 받던 터이라, 당나라가 악수를 청할 때에 흔연히 응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서쪽으로 육로(陸路)만 경계하고 있을 동안 몰래 해로(海路)로 대군을 신라로 옮겨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일거에 백제의 도성을 무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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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은 고구려에게 보호를 받고 있고 서와 남은 바다요, 동쪽은 약국 신라며 가락 등 밖에 없는지라 안심하고 있던 백제는 이 나당연합군의 일격에 사직은 드디어 넘어지고 국왕은 잡혀서 당나라로 가고 당나라의 굶주린 군사들의 욕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궁녀들은 벼랑(후일'낙화암’이라 일컫는) 사자수에 떨어져 죽고, 백제의 구역(舊域)에는 당나라가 도독부(都督府)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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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인적(隣敵)을 깨뜰기 위하여서는 당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들기 조차 주저하지 않았다. 인제는 당나라는 동이(東夷) 중에 신라와 백제를 호령하게 되었으매 남은 자는 고구려 하나밖에는 없었다. 당나라는 신라에 호령 하여, 일변 남쪽에서 군사와 군량을 나누어서 고구려의 남쪽을 엄습하는 동시에 북쪽으로는 이적(李勣) 등에게 대군을 인솔케 하여 고구려를 남북에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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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도 망하고 고구려도 망하고- 이 반도와 그 북부의 접속지인 요하(遼河) 이동에는 국체를 갖춘 자는 오직 신라 하나이 남아서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일본과 교제를 하며 서로는 당나라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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