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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백두산기 (遊白頭山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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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년 (영조 42)
서명응(徐命膺)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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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술년(1766, 영조 42)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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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이 특교를 내려 홍문관록을 주관하라고 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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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마땅히 이 일을 주선해야 했지만, 두 번이나 부름을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님이 유지를 내려 질책하여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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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신하로서 갖추어야 할 절조가 없는 것이니 무엇을 애석히 여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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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부르는 명이 세 번째 내려왔으나, 나는 또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님이 노하여 곧바로 갑산부로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조엄을2) 대신 부제학으로 삼아 빨리 오라고 독촉하였지만, 조엄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님이 또 삼수부에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 귀양길에 오르는 날에 두 사람이 동문 밖에 나서니 전송하는 사람들이 서로 바라볼 뿐 이별을 나눌 수 없었다. 땡볕 더위에 빨리 말을 달려 누원(樓院)에서 상봉하였다. 여기서부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다가 잘 때는 반드시 이웃하여 잤다. 대략 13일 만에 유배지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진령(榛岺)의 시를 읊어3) 임금님의 덕망을 위로하였다. 여기가 나면 고금의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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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내가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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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 혼인을 이미 마쳤으니 마칠 일을 대충 한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하지 못한 일이 세 가지나 있으니, 첫째는 『주역』을 읽지 못한 것이며, 둘째는 백두산을 유람하지 못한 것이요, 셋째는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것이다. 지금 유배지가 백두산 아래에 있으니 하늘이 혹시 나로 하여금 백두산 유람을 시키려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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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조엄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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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북쪽에 온 것이 두 번이고, 그대도 북쪽에 온 것이 세 번인데 한 번도 백두산에 오르지 못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대도 유람을 못하였고 나 또한 유람을 못하였으니, 우리 둘이 같이 가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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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적소에 도착한 지 3, 4일 되는 날, 나와 조엄은 서신으로 6월 10일에 백두산으로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갑산 부사 민원(閔源 : 자는 )과 삼수 부사 조한기(趙漢紀 : 자는 ) 모두 산수 유람을 좋아하는 자들로 기꺼이 동행하기를 원하였다. 내 손님인 최우흥(催遇興)과 홍이복(洪履福), 조엄의 손님인 이민수(李民秀), 민원의 아들 민정항(閔廷恒 : 자는 )이 모두 동행하였다. 백두산 도로를 잘 아는 갑산 선비 조현규(趙顯奎), 군교 원상태(元尙泰)가 길 안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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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데 4일, 돌아오는 데 4일이 걸렸다. 빼어난 산택(山澤), 시원스럽게 멀리 바라다 보이는 조망, 궁경과 관방(關防)의 형편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었으나, 평생에 바라던 쾌거였다. 산에서 나오자마자 용서한다는 임금님의 명령이 이미 내려와 있었다. 아! 두 사람이 임금님께 죄를 얻어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이 이로써 백두산에 오랫동안 갖고 있던 묵은 빚을 갚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는가? 두 사람의 행적이 여기에 그쳤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집에 돌아와 각각 한 본(本)씩 기록하였다. 관직 생활을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삼았으면 한다. 또한 후일에도 금일의 수고로움을 잊지 않고자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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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문관록은 홍문관의 교리(校理) · 수찬(修撰)의 임용 기록이다. 7품 이하의 홍문관원이 문과 합격자 명단에 의하여 임명 후보자 명단을 작성하면, 홍문관 부제학 · 응교 · 교리· 수찬 등이 권점(圈點)을 찍어 본관록(本館錄)을 작성하였다. 이를 다시 의정 · 참찬 · 대제학 · 이조판서 · 이조참판 · 이조참의 등이 권점을 찍어 도당록(都堂錄)을 작성하여 계문하면, 한림소시(翰林召試)를 보여 차점 이상자를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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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719(숙종 45)~1777(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穰),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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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경(詩經)』「국풍(國風)」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습지에는 감초풀이 난다는 말로, 곧 각각 적합한 땅에 생겨나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저 당당한 사람은 그토록 씩씩하건만 천한 지위에 머물고 있으나, 임금은 그런 것을 몰라서인지 올바른 지위에 등용하지 않고 있다면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이다.
 
 
 

2.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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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부를 출발하여 운총진(雲寵鎭)에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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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갑산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후덕산(厚德山) · 마고정(麻姑頂) · 손전항(遜田項)을 지났다. 촌락들이 띄엄띄엄 뒤섞여 늘어서 있는데 마치 바둑판같았다. 길 주변에는 당수(棠樹: 산앵도나무)가 많았다. 열매는 대추알 같았으며 길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그 곳 사는 주민들은 산대추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대추 대신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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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새 수십 마리가 떼 지어 나무에 무리지어 있다가 사람의 행차를 보고는 놀라 푸드득 날개 치며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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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항에서 10리까지는 삼봉(杉峯)이며, 삼봉에서부터 10리 까지는 두 산이 좌우로 벌려 있는데, 가히 성보(城堡)를 쌓을 수 있다. 동인진(同仁鎭)이 있고 권관(權官)이 관리하였다. 점심을 먹고 두루 주위 형편을 살펴보니 돌무더기를 쌓아 성벽처럼 만들었는데, 높이가 가히 8, 9척 가량 되고 둘레가 가히 천여 척 가량 되었다. 토병 33인, 봉군(烽軍) 30인이 있었다. 봉수대는 삼봉 위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안간봉(安間峯)에 맞닿고 남쪽으로는 갑산부의 앞산인 응굴봉(鷹屈峯)에 닿았다. 동인진에서 동쪽으로 40리가면 대동(大同) 땅으로 파수(把守)가 있는데 권관이 멀리서 통솔하였다. 이전에 오랑캐 부락이 검천(劒川) 주변에 모여 살면서 이곳까지 약탈하러 왔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동인진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성벽은 오래 되어 군데군데 허물어져 견고하지 못했으며, 동인진의 막사 또한 낡고 기울어져 있으니, 방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20
조엄은 삼수(三水)에서 북쪽으로 광승판(廣氶坂)을 넘어오는데, 그 길이 좁고 험준하여서 말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진행하였다. 허천강(虛川江)을 건너 별사(別社)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운총에 도착하였다. 이 날 나는 80리를 갔고, 조엄은 60리를 갔다. 운총성의 통군루(統軍樓)에 올라 오랫동안 바람을 쐬고 누각에서 내려와 촌의 숙소에서 잤다. 혜산 첨사 유언진(兪彦縝), 운총 만호 윤득위(尹得偉), 진동 만호 송석손(宋錫孫), 나난 만호 김구서(金龜瑞), 인차외 만호 김홍제(金弘濟), 삼수인 으로 전에 군수를 지낸 우정하(禹正夏)가 영접하여 행로의 수고로움을 위로하고는 각기 차례대로 돌아갔다.
 
 
 

3.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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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총진을 출발하여 심포(深浦)에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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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밥을 먹고 말을 먹였다. 위로하러 왔던 진장(鎭將)들이 모두 돌아갔다. 내가 먼저 출발하고 조엄이 그 뒤를 출발했다. 갑산 부사, 삼수 부사, 민정항, 최우흥, 이민수, 홍이복 등 여러 사람이 또 그 뒤에 출발했다. 운총진 뒤에 있는 은사문령(銀沙門령)을 경유하여 위로 올라가 약 15리를 가니 오시천(五時川)이 있다. 오시천은 덕은봉(德隱峰) 아래로부터 서쪽으로 200여 리를 흘러 은사문령을 휘감고 돌아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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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마루에 올라 동북쪽을 바라보니 산이 첩첩이 있는 것이 마치 상투를 구름 속에 꽂은 것 같았다. 이것이 보다산(寶多山)이다. 고개를 넘으니 지세가 조금 평탄해졌다. 두 산이 둥글게 합해져 마치 사람의 두 손을 포갠 것 같은 곳이 나항포(羅巷浦)이다. 파수가 그 왼쪽에 있는데 운총진에서 관할한다. 이전에 이른바 변방 오랑캐들이 침략할 때 이 길을 따라 운총과 동인(同仁)에 이르렀기 때문에 파수를 설치한 것이다. 임진년(1712, 숙종 38) 이전에는 이 길은 잡초가 무성하여 다니지 못했는데 임진년 목극등이 정계(定界)를 위해 백두산에 오르면서 비로소 뚫렸다. 이로부터 갑산에서 무산에 다니는 자는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하여 마침내 대로(大路)가 되었다.
 
25
나항(羅港)을 지나 긴 골짜기를 지났는데 그 사이 15리는 나무들이 하늘 높이 빽빽이 들어서 있어 햇볕이 들지 않았다. 또한 부러져 넘어지거나 불타 쓰러진 나무들이 길 사이에 가로놓여 어지러운 것이 마치 치초(薙草) 같았다. 뿌리들이 드러나 엉켜 무성한 것이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고 용이 서린 것 같았다. 사람을 시켜 도끼로 앞길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 길을 낸 후 몸을 숙이고 지나가는데도 말이 자빠지고 넘어졌으며, 사람의 발도 푹푹 빠졌다. 고갯마루를 넘어 산을 내려왔다. 골짜기에는 돌이 날카롭게 삐쭉삐쭉 서 있어 모두 바로 걷지 못하고 기우뚱하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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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리를 가니 시내가 있는데 오시천과 검천 사이에서 나와 검천 하류와 합해져 서쪽으로 5리를 가서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신대신천(申大新川)이다. 신대신천 안쪽은 깊고 넓어 집도 짓고 밭도 경작 할 만하였다. 북쪽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신대신동이라 하였다. 옛날에 신대신(申大新)이란 자가 있어 인삼을 캐고 고기를 잡고 담비를 잡느라 이곳을 왕래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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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 골짜기가 있는데 북쪽으로 가면 신대신동처럼 깊고 넓었다. 수년 전 날이 가물어 초목이 모두 말랐는데 행인이 불을 놓아 온 산이 불타버린 후에는 산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날아다니는 새가 보이지 않고 이따금 꾀꼬리가 관목 위에서 우는데, 울음소리가 남쪽에 있는 새처럼 조금 촉박하게 들렸다. 짐승은 호랑이와 표범은 없고 곰과 사슴들만 있는데, 여름철이 되면 더위를 피해 백두산 아래로 왔다가 가을, 겨울이 되면 다시 남쪽으로 간다. 담비와 박쥐는 사계절 모두 있다. 그래서 담비 잡는 사람이 나무에 구멍을 뚫어 물에다 띄워 놓으면, 담비가 물을 먹으러 그 나무에 오르내리다가 구멍에 빠져서 사람이 잡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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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앞쪽 당은 평탄하고 낮은데 형세가 장곡(長谷)의 검천같이 물이 소리를 내면서 흘러간다. 이곳이 바로 오랑캐 부락이 옛날 거처하던 곳이다. 또 마전봉(馬顚峰)이 가로놓여 있는데 그 서쪽은 험한 낭떠러지로 가로막혔다. 압록강이 옷 하나 사이의 짧은 거리에 있는데 명나라 승정(승禎) 갑신년(1644, 인조 22)에 변방 오랑캐들이 청나라 임금을 따라 심양에 들어간 후 모두 우리나라 땅이 되었다. 무술년(1718, 숙종 44)에 조정에서 의논하여 동인진과 동량진(東兩鎭)을 이곳에 옮겨 설치하고자 남병사(南兵使) 이삼(李森)을 파견하여 터를 살피게 하였다. 기미년(1739, 영조 15)에 또 남병사 신익하(申益夏)를 보내 터를 보게 하였는데 이삼은 진을 설치하기에는 마땅치 않다고 아뢰었으나, 신익하가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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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신동은 북쪽 변방을 왕래하는 길목입니다. 한 군졸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의 적이 뚫을 수 없는 형세이니 진을 설치해야 합니다.”
 
30
고 하여 지금까지 사람이 살면서 지키고 있다. 이는 신익하가 옳았고 이삼이 틀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골짜기가 높아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을 심지 못한다고 하나 골짜기 동남쪽은 길주, 갑산 두 읍 사이에 있고 또 감평산(甘坪山)이 감싸 길이가 20리, 너비가 5리나 되고 땅은 매우 기름졌다.
 
31
갑인년(1674, 현종 15)에 남구만(南九萬)이 관찰사로 오면서 길주의 서북 진을 경유하여 감평에 이르러 형편을 살피고 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영파보(寧波堡)를 설치하였다. 7년 후인 경신년(1680, 숙종 6)에 백성들이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익지 않는다고 말하자 함경도 관찰사가 조정에 아뢰어 없앴다. 그러나 그 때는 수목이 울창하여 음습하고 추워서 곡식이 익지 않은 것이었지 서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수목이 점차로 성글어서 백성들이 골짜기에 들어와 오곡을 심는데 모두 잘 익어 갑산읍과 다르지 않다고 하니, 어찌 골짜기가 평지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32
대체로 백두산 한 줄기가 동남쪽에서 꺾여 보다산, 마등령(馬等嶺), 완항령(緩項嶺), 설령(雪嶺)이 되는데 설령부터는 서북진이며, 길주가 그 아래에 있다. 설령 북쪽으로 참두령(참頭嶺), 원봉(圓峰)이 있으며, 갑산이 그 아래에 있다. 두 봉우리 모두 남 · 북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 배후에 자리 잡고 있다. 갑산에서부터 남병영까지는 마덕령(馬德嶺), 후치령(厚峙嶺), 관령(關嶺)이 있는데, 겹겹이 쌓인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어 오가는 데 5, 6일은 걸린다. 만일 위급한 일이 일어나면 아무리 빨리 알리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33
이제 만약 동인진과 동량진을 파하고 감평과 신대신동에 진을 설치한 후, 갑산에다 방영(防營)을 두어 오랑캐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고, 삼수부와 연변의 절진(節鎭)을 통솔케 하여 길주와 서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형성하게 하고, 설령에서 길주에 이르는 험한 옛길을 개통하면 영(營)과 진(鎭)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으면서 성원하여 견고하게 될 것이다. 무릇 후치령 밖으로 남병사가 적의 동태를 들을 수 없는 곳은 갑산 방영에서 독자적으로 호령하여 적을 막는 방책으로 한다면, 비록 밖으로 잘 들어나지는 않지만 하나의 장성(長成)이 될 만하겠다. 검천을 따라 상류의 남쪽 언덕에 이르렀다. 혜산(惠山)의 백성들이 먼저 막사를 지어 놓고 삼나무를 베어 들보와 기둥을 세우고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을 덮고 또 삼면에 보루를 세웠다. 산에서 구한 것인데도 비바람을 막을 수 있었다. 만약 남쪽 백성들에게 이 일을 하도록 한다면 한 해가 끝날 때까지도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엌일 하는 사람이 점심밥을 내왔는데 밥상에 큰 물고기가 반찬으로 올라왔다. 물고기 이름이 여항(餘項)인데 맛이 달고 좋았다. 그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앞 냇가에서 때려잡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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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검천을 건너 서수라덕령을 넘어 또 몇 리를 가니 고개가 더욱 험해지고 산길은 구불구불하여 앞에 가는 사람은 위에 있고 뒤에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게 되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황천 같고 위를 쳐다보면 구천(九天)이다. 우박과 가랑비를 만났으나 이내 그쳤다. 고갯마루에 올라 동쪽으로 길주를 바라보니 뒤로 덕은봉, 완항령이 구름 속에서 점점이 보였다. 여기서부터 지세는 평탄하고 오래 된 삼나무가 많은데 개오동나무와 자작나무가 간간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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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리를 가니 간산봉(艮山峰)이 있는데, 왼쪽으로 압록강을 끼고 밖으로는 오랑캐 산들이 마치 푸른 장막을 친 듯 늘어서 있다. 백두산의 희미한 모습이 서북방에 드러나 있는데 마치 책상 위에 흰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하였다. 간산봉을 경유하여 5리를 가니, 곤장평(昆長坪)으로 탁 트인 광활한 숲이 화살 다발처럼 촉촉이 서 있었다. 또 15리를 가니 심포(深浦)인데, 하늘이 탁 트이고 골짜기가 광활하였다. 일행이 막사를 치고 밥을 먹은 후 잤다. 삼나무를 베어 불을 때서 따뜻한 기운을 쬐었다. 이 날 90리를 갔다.
 
 
 

4. 12일

37
심포를 출발하여 어수참(魚水站)에 도착하다
 
38
아침을 먹고 삼나무 숲을 통과하여 가는데 모기들이 좌우에서 사람을 공격하니, 손으로 휘저어도 달아나지 않았다. 5리를 가니 중심포(中深浦)가 되고, 또 5리를 가니 말심포(末深浦)가 되었다. 동남에는 연봉(輦峰)이, 동쪽에는 보다산이, 동북에는 침봉(枕峰)이 있고, 북쪽으로는 소백산이 보였다. 또 5리를 가니, 태산준령이 끊어질 듯 하고 삼나무가 얽혀 있는데, 구현(狗峴)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또 5리를 가자 자포(滋浦) 두 갈래가 있는바, 하나는 보다산 아래 서쪽 편에서 내려온 것이고, 하나는 보다산 서북쪽에서 내려온 것이다.
 
39
여기에 이르러 한 물줄기로 합쳐져 서쪽으로 10리를 흘러가면 압록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지명을 단지 자포라고만 하였다.
 
40
평평한 황무지에 천막을 치고 점심을 지어 먹은 후 자포령을 넘었다. 고개가 끝나면서 대평원이 널리 펼쳐지는데, 40리에 걸쳐 있는 것을 판막(板莫)이라고 하였다. 삼나무가 하나같이 불타 말라 있으니, 역시 예전에 사냥하는 사람들이 실화하여 이와 같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무줄기가 천 자나 되며 끝이 뾰죽뾰죽 정정하게 서있고, 줄기에는 바람구멍이 나 있었다. 이 때문에 여러 구멍에서 소리를 내어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 같기도 하고 생황을 부는 것 같기도 하여 음조가 가히 들을 만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장자(壯子)가 말한바 하늘의 퉁소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41
자포에서부터 40리를 가서 임어수(林魚水)에서 묵었다. 이 물은 보다산에서 발원하여 여기에 이르고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처음에 나와 조엄이 비록 백두산을 가기로 약속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확신이 서지는 못하였는데, 여기 운총에 도착하여 말하였다.
 
42
“옛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늘 몇 가지 일을 겸하였다.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한갓 산천의 경치나 즐긴다면 천박한 일이 될 것이다. 변경의 방비를 위한 지세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고, 북극성이 떠오르는 것을 관측하는 것도 좋겠다.”
 
43
그래서 재목과 목수를 구하여 상한의(象限儀)라는 관측기구를 제작토록 하였다. 여기에 도착하여 천구의 별 하나를 관측하니, 별은 땅에서 42도 조금 못 되는 곳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이곳은 심양(瀋陽)과 같은 위도에 있는 것이 된다. 동지에는 태양이 진시(辰時) 초2각(刻) 2분에 떠서 신시(申侍) 정1각 13분에 진다. 낮은 35각 11분이 되고, 60각 4분이 되며, 신혼(晨昏)은 6각 14분으로 나뉜다. 하지에는 태양이 인시(寅時) 정1각 13분에 떠서 술시(戌時) 초2각 2분에 진다. 낮은 60각 4분이고, 밤은 35각 11분이 되어 신혼은 9각 3분으로 나뉜다. 그 나머지 22절기는 이것으로 유추해 알 수 있다.
 
 
 

5. 13일

45
임어수를 출발하여 연지봉 아래까지 가다
 
46
해가 돋자 임어수를 떠나 수풀 속으로 10여 리를 가다가 허항령에 다다랐다. 허항령은 구불구불 이어져서 북방으로 길게 뻗어 절정을 이루니 바로 삼수 · 갑산의 척추가 되고, 백두산과 소백산의 출입문이 된다. 이곳은 무산으로 가는 길과 백두산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 된다. 북쪽 사람들은 여기를 천평(天坪)이라고 부른다. 동북쪽으로 수백 리가 끝없이 펼쳐져 있으나 다만 수풀에 가려져 있어 멀리 볼 수 없을 뿐이다. 길이 갈라지는 곳으로부터 북쪽으로 5리를 가면 산수가 수려하여 마음과 눈이 낭랑하게 되어 삼지연(三池淵)에 도착한다. 오른쪽 못은 둥글고 왼쪽 못은 네모지고, 가운데 못은 넓고 주위가 15리나 되며 작은 섬을 에워싸고 있다. 수목은 모두 한 아름씩 되어 낙락장송과 같고, 물은 맑아서 바닥이 보여 고기 노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물오리 수십 마리가 범범히 떠다니거나 자맥질을 하고, 사람이 가까이 가도 놀라지 않는다. 물새 한 마리가 비상하여 울며 지나가고, 노루 사슴의 자취가 모래톱에 어지러이 나 있으니, 이야말로 신선의 땅이요 사람 사는 땅이 아니다. 일행 중에 경포대와 영랑호를 본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 자신도 일찍이 태액지(太液池)를 본 적이 있지만 이보다는 훨씬 못하였다.
 
47
삼지연에서부터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천수(泉水)라는 곳이 있는데, 샘물이 지상으로 솟아나오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며, 점심을 지어 먹는 곳이다. 천수에서부터 북쪽으로 5리를 가면 낭떠러지 골짜기가 있다.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아 겉으로 보면 나무 말뚝이나 창을 세워 놓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깊은 구렁텅이로 되어 있다. 말을 세우고 내려다보니 대협곡이 한가운데 갈라져 하나의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검정색 수포석(水泡石)들이 양쪽 언덕에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푸른 삼나무가 화살촉처럼 그 위에 병풍처럼 널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로 물길이 나 있는데, 모래가 눈처럼 희다. 모두 수포석이 부서져서 된 것이다. 말이 사납게 발을 들어 올릴 때 마다 먼지가 얼굴을 때린다. 10여 칸씩 갈 때마다 흑포석이 계단처럼 쌓여 있고 매우 높아서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 양쪽 언덕으로 바위가 굴러 떨어져 흙이 끊어진 곳으로 돌아가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무릇 35리나 하였다. 이곳은 백두산 아래 산록으로서 골짜기의 물이 흘러가는 곳이다. 때마침 오래 가물었기 때문에 큰 길이 나 있었지만, 만약 비를 만나게 되면 많은 골짜기에서 물이 불어 넘쳐흐르면서 폭포가 되기도 하고, 격랑이 되기도 하고, 웅덩이가 되기도 하며 포효하면서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 강원(江原)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한다.
 
48
무지봉(膴脂峯)에 점차 가까워지면서 소백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매우 낮아져 겨우 사람의 상투만한 높이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지봉 아래 골짜기에 도착하여 산이 끝난 곳에서부터 북쪽을 바라보니, 3개의 봉우리가 둥그렇게 솟아 있는데 그 색이 모두 백자를 엎어 놓은 것처럼 희게 보였다. 이것이 바로 백두산의 동남 면이다.
 
49
나와 조엄은 그 산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을 달려 곧장 정상으로 올라가고자 하였으나 날은 이미 오후 3, 4시 가 지나 있었다. 조현규와 원상태가 말 앞에 나서서 말렸다.
 
50
“여기서부터 백두산 정상까지는 30리쯤 되는데 그 곳을 유람하면서 갔다 오자면 적어도 90리 길의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날이 이미 3, 4시를 넘었으니, 산 아래에 도착하면 반드시 어두워질 것입니다. 만약 비바람을 만나게 되면 진퇴유곡에 빠질 것이니 두 분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51
나와 조엄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앞으로 나가자, 여러 수행원들도 모두 따라왔다. 약 10여 리를 가니 날이 저물려고 하는데 앞의 봉우리는 아직도 멀었다. 나와 조엄 그리고 수행인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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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이치는 한가지이다. 우리가 조현규와 원상태의 말을 듣지 않고 길을 떠난 것이야말로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과 같은 결과가 아닌가?”
 
53
결국 우리는 무지봉 아래 휴게소로 되돌아왔다. 상태 등이 또 말하였다.
 
54
“예로부터 사람들이 여기에 도착하면 목욕재계를 하고 글을 지어 제사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정상에 올라가 유람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구름 안개 바람 비 등이 사납게 일어나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도 역시 글을 지어 제사하여야만 합니다.”
 
55
이에 그의 말을 받아들여 갑산 부사가 제수를 준비하고 갑산의 장교를 시켜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제문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56
“우뚝한 백두산이 우리 강토에 진주하니, 아래 땅에 사는 사람들이 우러러 그 전모를 보고자 합니다. 이번의 행차는 참으로 하늘이 편의를 베풀어 주신 것으로, 풍찬노숙하면서 온 것이 거의 삼천리나 되었습니다. 산에 신령이 계시면 우리의 성의를 아실 것입니다. 구름과 안개를 거두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하늘이 어찌 감추려고만 들겠습니까? 해와 별도 하늘에 밝게 걸려 있습니다. 땅의 도리로서도 하늘의 뜻을 순응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깨끗한 채식을 담아 희생을 대신합니다.”
 
57
삼수 부사가 제수를 준비하고 삼수의 장교를 시켜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 제문은 이러하였다.
 
58
“천하의 명산에는 서른여섯이 있는데, 곤륜산을 으뜸으로 칩니다. 중국 사람들은 모두 곤륜산에 오르는 것을 장관으로 생각합니다. 곤륜산도 또한 그 장엄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숨겨서 감추지 않는데, 이 때문에 성수해(星수海 : )가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중국의 곤륜산과 같은데, 만약 해동의 편협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 번 백두산에 올라 그 응대한 경관을 보지 못한다면,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이가 전하기를,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 중에는 풍우와 운무 때문에 제대로 경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곤륜산의 신령이 중국인들에게 그 모습을 숨기지 않는데, 어찌 백두산의 신령만이 그러하겠습니까? 산신은 우리를 보우하셔서 해와 달이 밝게 비추어서 만상이 밝게 드러나고 산의 풍광을 모두 다 볼 수 있게 하십시오.”
 
59
이는 모두 내가 지은 것이다. 갑산의 제사는 13일 저녁에 지내고, 삼수의 제사는 14일 새벽에 지냈다. 모두 땅을 청소하고 자리를 깔고 제사하였는데, 신당을 지어서 제사하던 잘못된 관례는 모두 폐지하였다. 두 고을의 수령이 직접 제사하지 않은 것은, 두 수령이 지방관의 책임을 가진 자이므로 임금만이 할 수 있는 산천의 제사를 지내기에 곤란한 혐의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두 고을의 장교로 하여금 제사케 한 것은, 토착인 들은 마땅히 그 지방의 풍습을 따라야하기 때문이다. 이 날 밤에 얕은 운무가 사방에 드리웠는데 그 형색이 그림과 같았다. 상한의로 천추(天樞 : 북극성)를 측정해 보니 땅과의 각도가 42도 3분이었다. 대개 위도가 북쪽으로 갈수록 점차 높아지는 것은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 이로써 측후의 정밀함을 알 수 있었다.
 
 
 

6.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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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봉 밑에서 출발하여 백두산 위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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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일찍 일어나니 하늘은 한 점 구름도 없고 솟은 해가 빛났다. 일행 여러 사람들은 혹 가마를 타기도 하고 혹 말을 타기도 하고 혹 걸어서 서서히 산에 올랐다. 산이 모두 하얗고 나무가 없었으며 왕왕 녹색 잡초가 이름 없는 풀과 꽃으로 덮여 있어 혹 붉기도 하고 혹 노랗기도 하였다. 계곡 사이에 층층의 얼음이 아직 녹지 않아서 멀리서 보면 조각 눈이 있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서 점차 위로 올라가니 깎아지른 듯 한 바위가 있고 20리를 가니 백산(白山)세 봉우리가 면전에 깎아지른 듯이 서 있다. 역시 연지봉(臙脂峯) 밑에서 본 것과 같다. 동남쪽 언덕 위에 나란히 목책을 세웠는데 길이가 십 수 보였다. 자빠지고 떨어져 나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몇 자 되는 조그만 비가 깎지도 다듬지도 않았는데, 위에 새기기를 ‘대청(大淸)’이라고 하고 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63
“오라 총관 목극등(烏라摠管穆克登)이 황지(皇旨)를 받들고 변경 조사를 위하여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로는 압록이요 동으로는 토문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康熙) 51년 5월 15일 필첩식 소이창(筆帖式蘇爾昌), 통관이가(通官二哥), 조선 군관 이의복 · 조태상(朝鮮軍官李義復趙台相) 차사관 허량 · 박도상(差使官許樑朴道常), 통관 김응헌 · 김경문(通官金應櫶金慶門) 운운”
 
64
여러 사람이 다 본 다음에 형세를 둘러보니, 비의 뒤쪽 수보쯤에 전의 장마비가 흘러 내려가 움푹 파여 골짜기가 되었는데 깊이는 약간 척에 불과하였다. 지금은 한 방울의 물도 없고 또 전에 돌아서 언덕 위의 비석 앞으로 나온 흔적도 없다.
 
65
백두산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가서 떨어져 연지봉이 되었는데, 겹겹이 막혀 있어 이른바 압록강은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개의 이름을 물이 나뉜다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 또 양국의 사신이 함께 경계를 강정할 때 한 나라의 사신은 비에 이름을 실었는데, 다른 한 나라의 사신은 그렇지 않으니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서 그런 것인가. 여러 사람이 서로 돌아보며 당혹하여서 원상태에게 물어보니, 원상태가 말하기를,
 
66
“저의 형 상필(尙弼)이 혜산 토병 김애순(金愛順), 운총진의 백성 송태선(宋太先)과 함께 길잡이로 뽑혔는데, 상필은 병이 나서 돌아오고, 태선과 애순이 따라가서 정계의 시말을 자세히 상필에게 전하였습니다. 상필이 또 저에게 전하였는데, 당시의 접반사 박권과 관찰사 이선부가 목극등과 만나 먼저 황제의 건강을 물으니 목극등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외국 사신이다. 어찌 감히 황제의 건강을 묻는가? 나를 따라 경계까지 좇아오지 말라’고 하니, 박권과 이선부가 크게 놀라서 검천, 허항령을 지나 무산으로 돌아와서 감히 나아가지를 못하였습니다. 목극등이 스스로 우리나라 통역관과 길잡이와 함께 백두산에 이르러 산골짜기가 갈라진 곳의 빗물이 지나갔던 곳을 가리키며 갑자기 말하기를 ‘이 곳이 토문강의 근원이고 이곳이 압록강의 근원이다’고 하였습니다. 태선과 애순이 다투어 말하기를, ‘토문의 상류는 토문강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압록의 상류이니 당연히 서쪽으로 가서 의주에 이릅니다. 지금 서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가니 둘 다 모두 틀렸습니다. 토문강 외에 두만강이 있는데,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또 지금 말하는 압록강의 상류 바깥에 보은수(保恩水)가 있어서 백두산의 서쪽에서 나가서 서쪽으로 흘러 서대산(西臺山)을 지나니 이른바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것이 실로 압록강 상류입니다.’라고 하니, 목극등이 꾸짖어 말하기를, ‘빨리 칼을 가져오라. 두 사람의 눈을 빼겠다.’고 하므로, 두 사람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목극등이 그 언덕을 강제로 ‘분수령’이라 하고 밑에 비를 세우고 우리나라의 두 사신의 이름은 넣지를 않았습니다.”
 
67
라고 하였다.
 
68
조엄이 말하기를,
 
69
“내가 일찍이 어사로 무산에 이르렀는데, 선비 윤명삼(尹命三)이 라는 자가 당시 향임(鄕任)의 아들로서 나이가 18세인데 그 아비를 따라 정계하는 곳에 갔는데, 그 서로 힐난하는 말은 원상태가 전하는 것과 같으나 자세한 것은 차이가 있다.
 
70
또 강막종(姜莫從)도 또한 무산인으로 나이가 80여 세인데 어려서부터 두루 북방의 산수를 돌아다녀서 익히 물의 원류를 알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토문강은 백두산 동남쪽 30리 밖 천평(天坪) 두평처(頭平處)에서 나와 북쪽으로 흑룡강에 흘러 들어가는데 그것을 토문이라고 하고, 장항해탄(獐項害灘)을 지나 유원(柔遠)에 이르러 두만강과 합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유원의 물은 회령성변(會寧城邊)의 긴장수(緊長水)에서 나온다고 한다. 대개 온성의 서남쪽 100리에 분계강(分界江)이 있어서 선춘령(先春嶺) 밑에 고려 시중 윤관의 정계비가 있는데, 강의 이름과 비로 추정한 건대 이곳이 우리나라의 경계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물며 분계강은 윤이후(尹伊厚)의 우가토강(우加土江)과 합류하여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두만강은 또 백두산의 동쪽에서 솟아나오니, 그 원류를 찾아서 한 번만 보면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700여 리의 땅을 하루아침에 두 손을 들고 잃어버렸으니, 아! 아깝다.”
 
71
고 하였다. 이에 내가 가슴을 치며 탄식하였다.
 
72
“목극등은 오랑캐 사람으로 오히려 그 나라를 위하여 그 땅을 더 했는데, 박권과 이선부는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단 말인가! 목극등이 그 나라에 아뢰는 글에 ‘백두산에 올라 지수(池水)를 보니 동으로는 토문이요 서로는 압록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산 위의 못 물이 동서로 흘러가 두 강이 되었는데, 비를 세우면서 명확히 못 물을 말하지 않고 범연히 두 강이라고 칭하였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이곳에 와서 상고하여 무너뜨릴 수 있으니 그 말이 근거가 없음을 알겠다. 박권과 이선부로 하여금 따라서 산에 이르러 한 번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었다면 목극등이 장차 어떻게 했겠는가? 두 사람은 오로지 자기 몸만 돌보고, 국토를 가볍게 보고 그 국토가 크게 줄어듦을 아깝게 여기지 않아, 백 년 사이에 땔나무를 하고 삼을 캐는 백성이 국경을 범하여 죽은 사람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 아! 일을 한 번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이렇게 되는 것이다. 남의 신하된 자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73
일행 여러 사람들은 비의 우측을 돌아서 언덕 위에 가서 굽어 돌아 우러르며 약 10리를 올랐다.
 
74
그 위에 오르니 사방의 여러 산이 모두 자리 밑에 있어 눈이 하늘 끝까지 가서 한 번에 다 들어왔다. 다만 멀리 볼 수 없는 시력을 한탄할 뿐이다. 그러나 추측컨대 북쪽은 영고탑 · 오라 · 길림의 땅이다. 서쪽은 요양 · 심양의 땅이다. 서남은 혜산 · 인차 · 가파 · 폐사군의 땅이다. 동은 무산 · 회령 · 종성 · 온성의 땅이다. 동남쪽 한 줄기가 소백산 · 침봉 · 허항령을 지나서 보다산이 되고 마등령이 되고 덕은봉이 되며 완항령 · 설령 · 참두령 · 원봉 · 황토령(黃土嶺) · 후치령 · 통파령(通坡嶺) · 부전령(赴戰嶺) · 죽령(竹嶺) · 상하검산(上下黔山)이 되니 모두 한양(漢陽) 산의 정맥(正脈)이다.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니 혹은 높고 혹은 낮으며 혹은 뾰족하고 혹은 둥근 것이 마치 파도가 치는 것과 같은데 구름이 넓고 푸르러 만 리에 걸쳐 서로 이끌며 받드는 것 같다. 몸을 돌려두 봉우리의 사이에 서니 봉우리 밑에 5, 600장(장) 정도 거리에 텅 비고 평평한 곳에 큰 못이 있다. 둘레가 40리인데 물이 매우 푸르러서 하늘빛과 위아래가 한색이다. 못의 동남 언덕에 정황석산(正黃石山) 세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는 같고 그 바깥 봉우리 셋이 있어 사람의 혀가 입 속에 있는 것 같다. 뒤의 사면은 열두 봉우리가 둘러 있는데 못을 성처럼 둘러쌌다. 선인(仙人)이 쟁반을 이고 있는 것, 큰 붕새가 부리를 들고 있는 것, 기둥으로 떠받드는 것, 솟아서 빼어난 놈 같은 것들인데 안쪽은 모두 깎아지른 절벽에 붉고 누런 분을 발라 찬란하게 빛나서 잘 짜진 포목으로 둘러친 것 같았다. 바깥쪽은 비스듬히 창백하여 혼연히 하나의 큰 수포석이 응결하여 있다.
 
75
발걸음을 여러 봉우리로 옮기니, 큰 못이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지게 각각 그 보이는 모양이 다르다. 사방이 조금 평평한 봉우리에 앉으니 봉우리에 오석(烏石)이 많았는데, 작은 것은 주먹만 하고 큰 것은 말[]만 하였다. 뒷면에 검푸른 모래 같은 점이 박혀 있어, 갑 산인들이 이를 갈아서 갓끈 장식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아래로 큰 못을 내려다보니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만 열려 있는데 그쪽으로 물이 넘쳐흘러 흑룡강이 되고 곧바로 영고탑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압록강과 토문강이 큰 못으로부터 발원한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76
사슴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물을 마시거나 걸어 다니거나 누워있거나 느릿느릿 달리기도 한다. 검은 곰 두세 마리가 벽을 따라 오르내리고, 신기한 새 한 쌍이 물에 점을 찍듯 오락가락 날아다니니, 마치 그림 가운데 장관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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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일행은 약 백여 명이었는데 봉우리에 둘러서서 경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비록 산수의 정취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잠깐 사이에 다리가 앞으로 나가며 몸이 기울어지고 하였다. 나와 조엄은 밑으로 떨어질까 걱정되어 이를 금지시켰으나 어쩔 수 없었다.
 
78
조현규를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그 경치를 그리게 하고 지남침을 이용하여 그 봉우리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대개 반나절을 자유롭게 유람했으나 아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갑산 사람 중 여러 번 산행 길에 동행한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79
“예부터 이 산에 들어오는 자는 여러 날 목욕재계하고 수행원들을 부리는 것도 금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운무가 갑자기 일어나고 바람과 우레가 번갈아 일어나서, 기쁘게 모든 것을 볼 수 없는데 이번 행차처럼 마음대로 방랑하며 구경을 흔쾌히 한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
 
80
고 하였다.
 
81
내가 조엄에게 말하기를
 
82
“우리들이 이때에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기이한 일이오. 이곳에 이르러 병든 몸으로 노숙을 꺼리지 않고 작심하여 이 행차를 하게 된 것도 또한 기이한 일일세. 이 행차 중에 춥지도 덥지도 아니하고 적당한 기후로 풍우가 일어나지 않아 백두산 원근을 다 볼 수 있었던 것이 신통한 일이네. 대개 자연이 그렇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일세. 하늘이 아마도 산과 못에 이름이 없는 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83
조엄이 대답하기를,
 
84
“이름이 없는 것이 이름을 가지게 되면 진실로 좋은 일이오. 다만 우리들이 작명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겠는가?”
 
85
내가 말하기를
 
86
“그렇지 않다네. 무릇 산을 연지, 소백, 침봉이라고 한 것은 모두 토착인 들이 이름을 붙여 후대에 전해져서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은 것일세. 이제 백두산은 우리나라에 속하지도 아니하고 저들의 나라에 속하지도 아니하니, 우리와 같은 세상의 호사가들이 여기에 발길이 미치는 것은 천백 년이 지나도록 한두 명일 뿐이오. 만약 우리들이 지금 이 산들의 이름을 짓지 아니하면 이 산들의 이름이 끝내 없을 터일세. 하물며 지금 백두산 아래에 사는 토착인 들이 사사로이 지은 이름이 후세에 전해져서 결국 이 산들의 이름으로 정해지게 되면 이 산들에게 불행이 아니겠는가?”
 
87
하니, 조엄이 좋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산과 못의 이름을 궁리하여 정하였다. 연못의 이름은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연못의 중심이 동북 산수의 한 가운데에 있어서 동북의 산천이 모두 이 연못에서 근본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극(太極)의 태자와 천일(天一)의 일자를 따다가 그 연못의 이름을 정한 것이다. 연못가의 솟아 있는 봉우리를 황중봉이라고 하였다. 이 봉우리는 12봉우리의 가운데에 있으므로 그 색이 황색이다. 그러므로 주역의 곤(坤)괘 중 둘째 효(爻)의 설명인 “황색 가운데서 이치를 통한다”는 말을 따라서 그 봉우리 이름을 정하였다. 그 봉우리의 인(寅 : 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옛적부터 대각봉(大角峯)이라고 하였는데, 하늘에는 대각이라는 별이 있는데 섭제성과 천정성의 가운데 위치하여 청룡좌의 머리를 직향해 있다. 청룡의 머리는 인 방향이므로 대각이라고 칭하는데 아마도 여기에서 뜻을 취한 듯 하여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다. 묘(卯:정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청양봉(靑陽峰)이라고 하였다. 오행(五行) 중 목덕(木德)은 동쪽에 있으면 그 색이 푸르고 그 기운이 밝다. 명당성(明堂星) 동쪽의 태묘성(太廟星)이 청양이 되므로 청양봉이라고 하였다. 진(辰 : 동남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포덕봉(布德峯)이라고 하였다. 목덕이 진방향에 있으면 임금님이 덕을 베풀고 은혜를 행하며 명사를 초빙하고 어진 이를 예로써 대하는 것인데, ‘은혜를 행한다.’는 등등은 모두 덕을 베푸는 데서 근본 하므로 이름을 포덕 봉이라 하였다. 사(巳 : 동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예악봉(禮樂峰)이라 하였다. 사(巳)의 화기(火氣)가 일어나면 곧 임금이 악사에게 명하여 예악을 조화시킨다. 우리나라가 사봉(巳峰) 아래 있으며 예악 문물로써 정치를 빛내고 있으니 예악 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오(午 : 정남) 방향이 봉우리는 주명봉(朱明峰)이라고 하였다. 오(午)의 화기는 붉고 그 하는 일은 문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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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未 : 남서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황종봉(黃鐘峰)이라고 하였다. 황종은 오행의 토(土)에 속하고 흙의 기운은 3월, 6월, 9월, 12월에 왕성하게 되는데 6월에는 더욱 성하기 때문이다. 신(申 : 서남서) 방향의 봉우리는 실침봉(實沈峰)인데 하늘의 12차(次)가 실침이며 신 방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봉우리 중 유(酉:정서) 방향에 있는 것은 총장봉(總章峰)이라고 하였다. 명당(明堂) 자리의 여덟 별 중에 총장은 서쪽의 한 가운데 있는데 12진법(辰法)으로 치면 유(酉)에 해당한다. 술(戌:서북서)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신창봉(神倉峰)이라고 하거나 지경봉(祗敬峰)이라고 하였다. 금덕(金德)이 술 방향에 있으면 임금이 그 백성의 호적을 거두어 신창(神倉)에 보관하며,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하게 된다. 그래서 신창봉이라고도 하고 혹은 지경봉이라고도 하였다. 봉우리가 해(亥:북북서) 방향에 있는 것은 일성봉(日星峰)이라고 명명하였다. 백두산은 해 방향을 등지고 사 방향으로 향하고 앉아서 우리나라 팔도의 여러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12봉 가운데 해 방향에 있는 것은 해의 해(亥) 방향에 해당한다. 마치 해월(음력 10월)에 태양이 차성(次星)을 돌아 천장(天將:견우성)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동지가 오는 것과 같다. 봉우리가 자(子:정북) 방향에 있는 것을 현명봉(玄冥峰)이라고 하였다. 북방의 신을 현명이라고 하는데 산의 북쪽은 바로 궁색하고 아득한 곳이어서 현현명명(玄玄冥冥)하기 때문이다. 봉우리가 축(丑:북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오갈봉(烏碣峰)이라고 하였는데, 오갈이라는 것도 예전부터 부르던 이름이다. 중국의 동북 지방에는 갈석(碣石)이 있기 때문에 서경에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백두산은 우리 동방의 동북쪽이고 오갈봉은 또 백두산의 동북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옛 이름을 그대로 쓰고 고치지 않았다. 대저 허항령 이북에서부터 백두산에 이르기까지는 사람의 자취가 없고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천은 높고 낮은 것이나, 평평하고 비탈진 것이나, 모두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있는 북극성이 한결같이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움직이는 별들의 몸체가 되는 것과 같다.
 
89
그러나 땅의 12봉에 반드시 4계절의 방위를 활용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용』에 “아득하고 끝이 없지만 만 가지 형체가 울창하게 갖추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직 그 사용하지 않는 중에도 사용하는 바탕이 있으니, 무궁하게 활용하더라도 고갈되지 않는다. 12봉 외에 또 하나의 산맥이 동남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소백산이 된다. 소백산에서부터 백두산까지는 작은 봉우리 둘이 있는데, 위쪽은 보라색이고 아래쪽은 흰색이다. 흰 봉우리는 둥글고 보라색 봉우리는 뽀죽하여 마치 두 산에 각도(閣道 : 아방궁에서 남산으로 통하는 대로)를 놓은 것 같다. 갑산 사람들이 억지로 이름을 붙여 연지봉이라고 하였으나, 연지는 그 뜻이 탐탁지 않으니 지금 고쳐서 자각봉(紫閣峯)이라고 하였다. 날이 정오가 되자 우리들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모두 내려왔다. 몇 사람이 아직도 뒤처져 있다가 검은 안개가 천지의 중심에서 일어나 뭉게뭉게 위로 솟아오르니 두려워서 내려왔다. 모두 자각봉 앞 야영하던 곳에 모여서 조금 쉬었다. 곧 40리를 가서 천수에 도착하여 잤다. 산은 공허하고 밤은 서늘하니 월색은 물빛과 같았다. 피리를 불고 해금을 타게 하였다. 해금을 3, 4곡 연주하자 노래하는 사람들이 화답하니 온전히 속세를 떠난 듯하였다. 천수는 우리가 갈 때 점심을 해 먹은 곳인데, 그 때는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할 수 없었으나 이날 밤에 측정하니 땅에서의 고도가 42도가 조금 더 되었다.
 
 
 

7. 15일

91
천수를 출발하여 자포에 이르다
 
92
처음에 나와 조엄은 삼지를 지나면서 그 경치가 맑고 운치가 있어 매우 기뻐하였다. 다만 백두산을 아직 보지 못하여 그 곳에 마냥 머무르면서 마음껏 구경할 수 없었다. 이 날 여러 사람과 더불어 삼지도(三池島)를 같이 유람하기로 약속하였다. 앞에서 해금과 피리를 불게 하고 천천히 나아가 중지(中池)에 이르렀다. 왼쪽 언덕에서 그 주위를 돌아 오른쪽에 이르러 모래사장에 앉았다. 물을 건너섬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종자들이 물의 깊이를 알지 못하여 두려워 감히 건너지 못하고 잇자, 조엄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93
“어찌 이곳에까지 이르러 이 섬을 보지 못하겠는가?”
 
94
하였다.
 
95
증연이 그 관노를 큰 소리로 불러
 
96
“빨리 가서 물의 깊이를 알아 오라”
 
97
하였다.
 
98
“만약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장차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99
하고 내가 만류하였으나, 증연이 듣지 않고 빨리 들어가라고 재촉하여 물속에 들어가게 하였다. 언덕의 동쪽에서부터 섬의 서쪽에 이르기까지 물은 겨우 무릎을 스칠 정도였다. 나는 크게 기뻐하고 즉시 견여에 올라탔다. 조엄이 그 뒤를 따르고 증연이 또 그 뒤를 따랐으며, 사진 등 여러 사람이 또 그 뒤를 따라왔다.
 
100
섬에 이르자 수목이 대오리로 엮은 자리처럼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겨우 사람이 몸을 돌려야 지나갈 정도인데, 갈대가 밑에 엉겨 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었다. 이에 종자들로 하여금 앞서서 풀을 헤치게 하고 철쭉나무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고, 옷을 걷어 올리고 발길 닿는 대로 그 주위를 둘러보았다. 못의 둘레는 거의 10여 리 정도이고, 섬의 둘레는 거의 수백 보정도 되었다. 서북쪽을 돌아보니 백두산, 소백산, 침봉이 차례로 보이는데, 흰 매와 푸른 매가 서로 좆아 좌우로 날아든 것 같았다. 동남쪽을 바라보니, 천평, 허항령이 앞에서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는데 삼나무가 뾰족뾰족 솟아 있는 것이 상 위에 죽순 껍질을 벌여 놓은 것 같았다. 봉래산, 영주산과 비교하여 이 경치가 어떠한지 잘 모르겠다.
 
101
조엄은 못가에서 갓을 씻고 나는 그 옆에 앉아 물장난을 하였다.
 
102
해금과 피리 소리가 숲 속에서 은은하게 서로 화답하니 그 소리와 산수의 정취가 같이 어우러졌다. 원상태가 앞에서 말하기를,
 
103
“예로부터 이곳을 지나는 자는 이 섬에 신령이 있다고 여기고 두려워하여 감히 발걸음을 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두 공께서 이곳까지 들어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104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105
“섬과 못에 정해진 이름이 있는가?”
 
106
하니, 원상태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우리들이 상의하여 그 이름을 정하였다. 삼지 중에 가운데 것을 상원(上元), 오른쪽 것을 중원(中元), 왼쪽 것을 하원(下元)이라 하고, 섬은 지추(地樞)라고 하였다.
 
107
대개 침봉에서부터 백두산에 이르는 60여 리가 동북 산하의 중심이 되는데, 마치 북극성의 6도가 하늘이 중심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지추도라 이름한 것이다. 내가 붓을 찾아 삼나무 껍질에다 큰 글씨로
 
108
“지추도이다. 서명응과 조엄이 이곳을 지나다”
 
109
라고 이름을 새겨 넣었다. 사진과 무숙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110
“어찌 이 이름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11
하고는 곧바로 칼을 꺼내 새기는데 나무가 단단하여 깊이 파서 돌에 새긴 것처럼 오래 가도록 하였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112
“우리가 떠난 후에 다시 어떤 사람들이 이 섬에 이르러 새겨 놓은 것을 보겠는가?”
 
113
하자, 조엄이 말하기를,
 
114
“나무가 돌로 변하는 수도 있지 않겠는가?”
 
115
하였다. 드디어 반나절 동안 시를 읊조리며 즐기다가 해가 설핏 기울기에 자포참 막사로 돌아왔다. 20리쯤 가서 돌아보니 서북쪽에서 우레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더니 빗발이 온 산에 가득 찼다가 한두 시간 후에 그쳤다. 이곳은 대개 백두산과 소백산의 중간이다. 이 날 밤 달빛이 온 산에 가득하고 흐르는 물소리가 맑게 삼나무 사이로 들려오는데, 귀에는 마치 패옥이 굴러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조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116
“오늘은 유두일(流頭日)이 아닌가? 소동파4)가 황강(黃岡)에 유배 되어 갔을 때에도 오히려 헛되이 보내지 않고자 그의 생일인 7월 16일에 배를 적벽(赤壁) 아래에 띄우고 유람하였네. 우리들 또한 어찌 동행인들로 하여금 이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해서야 되겠는가?”
 
117
하였다. 그리하여 종자를 시켜 막사 앞에 솥을 걸어 놓고 나무를 베어다가 콩을 볶아 일행에게 나누어 먹게 하였다. 피리 소리와 해금 가락에 노래를 불러 화답하며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꿈속에서도 정신이 맑았다.
 
 
118
4) 소식(蘇軾) :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東坡).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鐵)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신종(神宗) 때 왕안석과 뜻이 맞지 않아 황주(黃州)로 좌천되어 동파라는 호를 지었음. 철종(哲宗) 때 소환되지 한림학사 · 병부상서 등을 지냄.
 
 
 

8. 16일

120
자포를 출발하여 운총에 이르다
 
121
자포에서 자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서수라덕령에 이르렀다. 순찰사가 기발을 보내어 나와 조엄이 유배에 풀렸다는 관문을 보냈는데, 그 공문과 집에서 보낸 편지가 같이 이르렀다.
 
122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수풀 사이에 앉아 먼저 공문을 보니 임금님의 기체가 편안하며 건강이 평상시와 같으며 6월 8일에 진전(眞殿)과 원묘(原廟)를 배알하였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돌아보면서 기뻐하였다. 다음으로 관문을 보니 임금님의 말씀이 간절하고 선조에 대해서까지 언급하고는 특명으로 두 사람의 유배를 풀어 준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또 서로를 돌아보며 눈물을 머금고 임금님의 은혜에 감격해 하면서 집에 돌아갈 기약에 있게 되었음을 은근히 기뻐하였다. 그 다음으로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은 연후에 길을 출발하여 검천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었다. 또 5리를 가니 혜산 첨사 유언신, 운총 만호 윤득위가 길에 나와서 맞이하였다. 길 옆 풀섶에 앉아 천천히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또 출발하여 운총에 도착하여 잤다. 다음 날 나와 갑산 부사는 갑산으로 돌아가고 조엄과 삼수 부사는 삼수로 돌아갔다. 6월 22일에 서울로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대개 유배지에 도착하여 서울로 돌아 갈 때까지 모두 19일이었는데, 백두산에 갔다 온 것이 8일이었다.
 
123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124
“서명응과 조엄이 죄를 지어 이곳으로 유배된 것은 하늘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백두산을 보게 하고자 함이었다.”
 
125
고 하였다.
【원문】유백두산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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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