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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문제 (人間問題) ◈
◇ (41회 ~ 60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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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8월 ~ 12월
강경애(姜敬愛)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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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1

 
2
풍헌은 그 나무쪽을 가리키며,
 
3
"글쎄 집달리라던가? 하는 양복쟁이가 이것을 꽂아 놓으면서, 벼를 베지 못한다구 허두먼……."
 
4
풍헌은 이렇게 말하며 누릇누릇한 벼이삭을 바라본다. 첫째는 다가서며,
 
5
"누구의 빚을 얼마나 졌습니까?"
 
6
"아 덕호의 빚이지, 그것 좀 참아 달라구 하는데, 이렇게까지 할 게야 뭐 있겠나! 전날 편지 배달부가 이런 것을 갖다가 주고 가두먼. 그래 나는 그게 무엇인가? 하고 두었더니, 글쎄 글쎄 이런 일이 날 줄이야 누가 꿈밖에나 생각하였겠나."
 
7
풍헌은 거지 안에서 다 해진 편지봉투를 꺼내어 보인다. 첫째 역시 그것을 한 자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래서 편지봉투만 이리저리 만지다가 풍헌을 주었다.
 
8
"거게 뭐라고 했나?"
 
9
풍헌은 허리를 굽혀 들여다본다. 첫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10
"내니 알겠쉬까."
 
11
"저 노릇을 어찌해야 좋겠나."
 
12
"덕호한테 가봤습니까?"
 
13
"가보기를 이를까. 어젯밤에도 밤새껏 가서 졸랐네. 그래두 소용없네, 이를 어쩌면 좋겠나. 자네 좀 가서 말해 볼 수 없겠나?"
 
14
쳐다보는 풍헌의 그 눈! 첫째는 그만 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달음으로 덕호한테 와서, 하다못해 주먹 담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을 짐작하는 첫째는 애꿎은 한숨만 푹 쉬고 저 앞을 바라보았다.
 
15
불과 십여 일 이내에 베게 될 이 벼이삭! 벼알이 여물 대로 여물어서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16
"잘 됐지! 저것 좀 보게나."
 
17
풍헌은 벼이삭을 가리키고 달려가더니 벼이삭을 어루만지며 불타산을 멍하니 노려보았다. 그의 희뜩희뜩 센 수염 끝은 무섭게 흔들리고 있다. 첫째는 뭐라고 위로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를 싸고 있는 공기조차도 무거운 납덩이 같음을 느꼈다.
 
18
풍헌은 논귀에 펄썩 주저앉으며, 무심히 물에 채어 무너진 논둑을 다시 고쳐 놓는다. 첫째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19
"이 논이 읍의 사람의 논이라지유."
 
20
"그래 읍의 한치수라는 어룬의 논인데……."
 
21
그는 후 하고 숨을 쉬었다.
 
22
"그런 법두 있는가.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난 암만 생각해두 모르겠어! 내일 읍에 들어가서 한치수 어른에게 물어 보겠네."
 
23
"그렇게 합슈."
 
24
첫째도 그런 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풍헌은 벌떡 일어났다.
 
25
"난 지금 들어가 보구 오겠네."
 
26
이렇게 말을 하고 읍 가는 길로 나선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황황히 걸었다. 첫째는 물끄러미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다가 그가 산모퉁이를 지나간 후에 들어왔다.
 
27
며칠 후에 풍헌이 보이지 않으므로 누구에게 물으니 그는 벌써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에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아내와 어린것들을 데리고 바가지 몇 짝을 달고 떠났다고 하였다.
 
28
여기까지 생각한 첫째는 구루마 구르는 소리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 겸 동무이던 풍헌을 내쫓은 덕호가 또다시 개똥이를 내쫓고 자기를 내쫓으려는 것임을 절실히 느꼈다. 그때,
 
29
"여부슈, 내가 빚을 안 물겠답니까?"
 
30
개똥이 음성이 무거운 공간을 헤쳤다. 무엇보다도 일년 농사 지은 것이라고…… 그의 초가집 문전에나마 놓았다가 이렇게 빼앗기었으면 한결 맘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벼 시세도 지금은 한 섬에 오 원이라 하나 좀더 있으면 육 원을 할지 팔 원을 할지 모르는데 이렇게 빼앗기기에는 너무나 억울하였던 것이다.
 
31
첫째는 개똥이 말을 듣자 무의식간에 욱 하고 달아갔다. 그리고 유서방을 단번에 밀쳐 넘어쳤다.
 
32
"뭐야 이게? 야들아! 다 오나라."
 
33
남의 일이나 자기 일 못지않게 분하였던 그들도 욱 쓸어 나갔다. 그리고 구루마에 실은 볏섬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덕호를 찾았으나 그는 벌써 어디로 빠져 달아났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34
"이 벼만 가져 봐라!"
 
35
개똥이가 호통을 하였다. 그때 저편에서 회중전등이 번쩍 하고 이리로 왔다. 그들은 순사가 오는구나! 직각되자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36
개 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었다. 그리고 신발 소리 또 신발 소리…….
 
 

2. 42

 
38
이튿날 새벽에 개똥 어머니는 덕호네 집으로 갔다. 아직 대문은 걸린 채 그대로 있었다. 벌써 그가 어젯밤부터 이 문전에 몇 번이나 왔는지 몰랐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오다가, 또다시 무슨 생각을 하고 대문 옆으로 와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 누가 나오는가 하여 자주자주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검정개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그는 왔다갔다하면서, 이제 덕호를 만나 뭐라고 말할 것을 입 속으로 다시금 외어 보았다. 어제 밤새도록 생각해 온 이 말이건만, 이렇게 덕호네 문 앞까지 와서는 캄캄해지곤 하였다.
 
39
안에서 신발 소리가 나므로, 그는 조금 물러서서 동정을 살폈다. 덜그렁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찌꺽 열린다. 그리고 유서방이 다리를 절면서 나오다가 개똥 어머니를 보고 멈칫 섰다.
 
40
"왜 왔소?"
 
41
유서방은 어젯밤 일을 생각하며 분이 왈칵 치밀었다. 개똥 어머니는 머리를 숙여 보이며,
 
42
"그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시우. 다 철이 없어 그 모양이지유. 한때 살려 줍시우."
 
43
"철없는 게 뭐야유, 그 새끼들이 철이 없어? 흥! 이거 보우 내 다리가 병신 되었수."
 
44
코웃음을 치고 나서 도로 들어간다. 개똥 어머니는 뒤를 따랐다.
 
45
"면장님 일어나셨수?"
 
46
"면장님은 왜 찾우?"
 
47
유서방은 흘금 돌아보았다.
 
48
"그저 한때 살려 주, 예? 살려 주, 예."
 
49
개똥 어머니는 훌쩍훌쩍 울었다.
 
50
"난 몰라유. 그까짓 놈의 새끼들…… 사람의 은혜도 모르고 의리도 없는 그놈들…… 김생 같은…… 에이."
 
51
유서방은 이렇게 소리치며 들어간다. 개똥 어머니는 한참이나 머뭇머뭇하였다. 그때 안에서 덕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52
"거 누구니?"
 
53
"개똥 어미야유."
 
54
유서방이 대답한다.
 
55
"개똥 어미가 왜?"
 
56
"모루지유."
 
57
개똥 어머니는 방문 밖에 서서 머뭇머뭇하다가,
 
58
"그저 면장님, 한때 살려 주, 그놈들이 철이 없어서……."
 
59
덕호는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60
"개똥 어민가, 이리 들어오게, 늙은이가 치운데, 왜 밖에 섰는가."
 
61
뜻하지 않은 덕호의 후한 말에, 개똥 어머니는 앞이 캄캄해 왔다. 그제야 유서방은,
 
62
"어서 들어가우."
 
63
개똥 어머니가 방문을 여니, 덕호는 자리에 누워 있다. 그는 멈칫 섰다.
 
64
"어서 들어와."
 
65
개똥 어머니는 들어가서 머리를 숙이며,
 
66
"그저 한때 살려 줍시유, 네? 한때만 사정 봐줍슈."
 
67
덕호는 기침을 하며 일어나서 자리로 몸을 가리고 앉았다.
 
68
"글쎄 그놈들의 행세를 보아서는 분나는 대로 용서 없이 고생을 시키겠지만 그러나 소위 면의 어룬이라는 나로서 더구나 저런 늙은이들이 불쌍해서 그럴 수야 있는가."
 
69
개똥 어머니는 너무 감격하여 소리쳐 울고 싶었다. 그리고 저런 후한 어른의 뜻을 몰라주는 개똥이와 그의 동무들이 끝없이 원망스러웠다.
 
70
"그저 살려 줍슈, 저를 봐서……."
 
71
"응, 그런데 마침 오늘이 공일이니까 면에 출근도 안 하니 내 직접 주재소에 가보리…… 저희놈들이 암만 그래도 몇십 년을 내 덕에 산 것이 아니겠나. 배은망덕이란 말이 이런 것을 두고 이름일세그려. 허 거 정 나두 손두 없는 사람이라 저희들을 내 친자식들과 같이 사랑한단 말이어. 어제만 하더라도 내가 생각해서 벼 한 섬을 거저 주지 않았나. 그런데 그놈이 그 은공을 몰라본단 말이어. 하필 올뿐인가, 작년 재작년에도 그래 왔지."
 
72
"그까짓 죽일놈들을 생각하실 게 있습니까. 그저 후하신 맘으로 이 늙은 것을 한때 보아주셔야지우."
 
73
"응, 그럼 돌아가게, 내 이따가 가보리."
 
74
개똥 어머니는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덕호는 도로 자리에 누우며 이놈들을 더 고생시켜 세상의 법이 어떻다는 것을 알리어 정신을 들려 주렸더니 날은 점점 추워 오고 어서 눈 오기 전에 마당질은 끝내야겠으니 부득이 놓아 주랄 수밖에 별수가 있나! 하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이 가을부터 미곡통제안(米穀統制案)이 실시된다는 말이 있으니 그렇게 되면 곡가도 오를 것이다. 어서 바삐 그놈들의 빚도 현 곡가로 청산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곧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3. 43

 
76
어젯밤 주재소에서 자고 난 그들은 오늘 아침 덕호가 가서야 순사부장의 단단한 훈사를 듣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놓여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나오는 길로 아침밥도 잘 먹지 못하고 곧 타작 마당으로 왔다. 그래서 어젯밤 널어 놓은 짚단이며 나락 헤적인 것을 쓸어 모아 놓고 한편으로는 도급기를 횅횅 돌렸다. 그들은 일을 하니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팔을 놀리면 팔이 아프고 다리를 놀리면 다리가 아팠다. 그리고 허리를 굽힐 수도 없고 목을 임의대로 돌리는 수도 없었다. 하루쯤은 쉬어서 했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을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이 하였다.
 
77
그때 덕호가 나왔다. 그는 궐련을 피워 물고 단장을 짚었다. 그리고 명주 저고리 바지에 세루 조끼를 말큰말큰하게 입었다. 그들은 덕호를 보자 가슴이 울울해지며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뭐라고 나무라지나 않으려나 하는 불안에 쩔쩔매었다.
 
78
"어 자네들 어서 일들이나 잘 하여…… 밥 많이 먹고 일 많이 하는 사람이야말로 튼튼한 면민일세그리. 허허 자네들은 나를 오해하지? 아마 어제 일을 미루어 보더라도 말이어.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안 것일세. 나는 더구나 면의 어룬이란 지위에 앉아 가지고 자네들의 이로움을 위하야 애쓰는 것이 나의 의무가 아닌가."
 
79
덕호는 큰기침을 하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합수를 하고 섰다.
 
80
"어제만 하더라도 내가 곡식으로 차지한 것이 전혀 자네들을 위함에서 그렇게 한 게야…… 자네들의 형편에 그 곡식을 갖다가 팔아서 돈으로 빚을 갚는다고 하세. 돈을 제때에 갚지도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그 곡식을 제값을 못 받고 더구나 꼭 적당한 시기에 팔지를 못해. 그러니 내가 곡식으로 차지하는 게여. 나야 손해가 되지마는…… 왜 손해가 되느냐 하면 말이어, 이제 좀더 있으면 자네들이 지내 보는 바와 같이 곡가가 내리는 것만은 뻔한 사실이 아닌가 응, 왜 그런 줄을 몰라주느냐 말이어. 나는 자네들을 친자식같이 아는데 자네들은 그것을 몰라준단 말이어. 어제 일만 하더라도 내가 아니고 딴사람이라면 자네들을 그냥 두겠나. 그러나 나는 자네들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네들의 가족들을 생각하야 친히 순사부장에게 사정을 하다시피 한 것을 자네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한 번 실수는 누구나 있는 것이니 이 다음부터는 주의들 해."
 
81
덕호는 그들을 둘러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들의 모양을 보아 자기의 말에 얼마나 감격하였는지를 그는 짐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까지 저들이 서리 맞은 풀대같이 후줄근한 것이 전혀 주재소의 힘임을 깨달으며 무식한 놈들에게는 매가 제일이다 하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82
덕호가 그들의 앞을 떠난 후에 그들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제 덕호가 한 말이 다 옳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일을 계속하였다. 도급기 다섯 채를 좌우로 갈라 놓고 한 채에 세 사람씩 맡았다. 한 사람은 가운데 서서 돌리고 그 나머지 두 사람은 도급기 곁에서 날라 오는 볏단을 풀어 놓고 도급기 돌리는 그들에게 번갈아 집어 주며 혹은 벼낟가리에 올라서서 볏단을 내리고 또는 다 훑은 짚단을 묶어서 저편으로 날랐다.
 
83
"이애 이놈아, 빨리 다우."
 
84
난장보살이 첫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리고 볏모개를 빼앗았다.
 
85
"흥! 어제는 이놈 때문에 우리들이 매를 죽도록 맞았다니."
 
86
어젯밤 매맞던 생각을 하며 싱앗대를 돌아보았다. 싱앗대는 볏모개를 빨리 돌려 대었다.
 
87
"쥐뿔도 없는 놈이 맘만 살아서 그 꼴이지, 그저 없는 놈이야 무슨 성명이 있나, 죽으라면 죽는 모양이라도 내어야지."
 
88
곁에서 그들의 말을 듣는 첫째는 버럭 화가 치받치는 것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뱃속이 꾸물꾸물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89
어제는 이 타작마당에서 그들이 일심이 되었는데 겨우 하룻밤을 지나서 그들은 첫째를 원망하였다. 첫째는 덕호에게서 욕먹은 것보다도, 순사에게 밤새워 매맞은 것보다도, 그들이 자기 하나를 둘러싸고 원망하는 데는 그만 울고 싶었다. 그리고 캄캄한 밤길을 혼자 걷는 듯한 적적함이 그를 싸고도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는 무심히 벼낟가리를 쳐다보았다. 전 같으면 저 벼낟가리들이 얼마나 귀여웠으리요마는…… 그때 저리로부터 순사가 왔다.
 
 

4. 44

 
91
첫째는 놀랐다. 가까이 오는 순사는 지금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자기만 잡으려고 오는 듯싶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푹 숙이며 볏단만 헤치고 있다가, 칼소리가 멀어지매 그는 겨우 안심하고 흘금 바라보았다. 그때 순사의 구둣발에 툭툭 채는 칼은 햇빛에 번쩍번쩍하였다. 순사는 덕호를 만나서 다시 이리로 온다. 그는 또다시 아까와 같은 생각으로 겁을 먹었으나, 그들은 가벼운 궐련내를 던지고 저편으로 지나간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고는, 하하 웃었다.
 
92
"여보게, 자네 좀 돌리게."
 
93
난장보살이 첫째를 보며 이렇게 말하고 나서, 도급기에서 물러간다. 첫째는 얼른 이편으로 왔다. 그리고 한 발로 도급기 발판을 짚어 가며, 난장보살이 집어 주는 볏모개를 훑는다. 그때 무심히 저편을 보니, 덕호와 순사가 면사무소에 앉아서 유리문을 통하여 이편을 내다본다. 그때에 그는 난장보살이 저것들을 마주보기 싫어서 도급기에서 물러났구나! 하고 직각되었다. 따라서 지금 저들이 자기를 잡아갈 의논을 하면서 자기만을 주목해 보는 듯하여 머리를 숙였다.
 
94
솨르르 탁탁 튀어나는 벼알은 그의 볼을 가볍게 후려치고 떨어진다. 그리고 돌아가는 도급기 바퀴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그를 오한이라도 나게 하려는 듯이 싫었다. 전 같으면 이 바람에 얼마나 속시원할 것이건만…… 그때 난장보살이,
 
95
"담배 먹고 싶다!"
 
96
그때 첫째도 새삼스럽게 담배 먹고 싶은 것을 느끼며 난장보살을 바라보았다. 일하던 농민들은 약조나 한 듯이 일시에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누구나 상대의 눈동자에서 담배 먹고 싶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면사무소에 앉아 이야기하는 그들의 눈에 걸리는 것이 싫어서 누구 한 사람 쉬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숨을 후 쉬고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쉴새없이 떨어져 쌓이는 벼알을 바라보았다. 담배 한 모금 맘놓고 먹지 못하고서 저렇게 애써 지은 쌀알을 덕호네 함석창고에 들여보낼 생각을 하니, 어제 구루마를 부서트리던 그 순간의 감정이 또다시 폭발되는 것을 느꼈다.
 
97
마당이 보이지 않도록 쌓이는 저 벼알! 병아리의 털같이 그렇게 노란 수염이 하늘을 가리키고 재미나게 쌓인 저 벼알! 저 벼알은 역시 자기들에게는 귀엽고 아름다운 빛만 보이고 나서 맘놓고 만져 보기도 전에 덕호의 창고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98
어린것들은 집에서,
 
99
"아빠 하얀밥 먹지, 오늘은?"
 
100
오늘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를 붙들고 이렇게 소곤거릴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뭐라고 대답하랴! 여름내 가을에는 하얀밥 준다!고 어르던 그 말! 지금 와서는 또 뭐라고 말하랴! 그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저 벼알을 보았을 때 벼알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폭을 마디마디 찌르는 살대 같아 보였다.
 
101
그들은 멍하니 어제 일을 되풀이하며 첫째를 돌아보았다. 그때 순사와 덕호는 이리로 온다. 또다시 그들은 가슴이 두근거리며 하던 생각이 끊기고 말았다. 덕호는 순사와 같이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후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멍하니 불타산을 바라보았다. 오래잖아 저 산에는 눈이 하얗게 덮일 터인데…… 우리들은 그때에 뭘 먹고 사나? 하였다.
 
102
가을을 맞은 청초한 저 불타산.
 
103
그 위로 하늘이 파랗게 달음질쳐 갔다. 첫째는 그 하늘을 묵묵히 바라볼 때, 어젯밤 순사부장이 자기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에게 법이란 것을 가르쳐야겠다" 하던 말이 그의 머리에 휙 떠오른다.
 
104
"법, 법…… 법, 법에 걸리면 죽이는 법까지 있다지?"
 
105
그가 법이란 막연하게나마 전통적으로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알았지마는…… 아니 지금도 그렇게 알지마는, 어제 일을 미루어 곰곰이 생각하니 웬일인지 그 법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엉킨 실마리가 그의 온 가슴을 꽉 채우고 말았다.
 
106
"우리들이 어제 덕호와 싸운 것이 법에 걸리는 일이라지? 그 법…… 법……."
 
107
그는 머리를 돌려 가며 몇 번이나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점점 더 답답만 할 뿐이지, 뒤엉킨 실끝을 고르는 수가 없었다. 그때 난장보살이 휙 쳐다보았다.
 
108
"이 곰 뭘 그리 중얼거리니?"
 
109
첫째는 그의 말이 입 밖에까지 나간 것에 스스로 놀라며 머리를 푹 숙였다.
 
 

5. 45

 
111
추수가 끝난 초겨울이었다. 읍에서 군수가 나와서 농민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다고 한다. 그들은 군수가 나왔다니까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가야만 되는 줄 알고 그러지 않으면 벌금이나 물리지 않을까? 하여 모두 모였다.
 
112
이십여 간이나 되는 면사무소 내에 농민들이 빽빽히 들어앉았다. 단상에는 군수와 면장이 앉았고 그 옆으로는 면서기들이 앉았다. 그들은 이번 신임 된 군수라는 뚱뚱한 양복쟁이를 눈이 둥그래서 바라보았다. 먼저 면장이 나와서 간단한 말로 군수를 농민들에게 소개하였다. 뒤미처 군수가 나와서 몇 번 기침을 한 후에,
 
113
"어…… 내가 이번에 여기 나온 목적은 여러분들도 이미 면사무소를 통하여 알았겠지마는…… 내가 신임인만큼 군내 상황도 시찰할 겸 더욱 여러분에게 절실하게 이르고 싶은 것이 있어 나온 것이오.
 
114
우리 조선으로 말하면 어…… 팔 할 이상이 농민들이오. 그러니 농민들의 성쇠는 즉 국가 흥망의 기원이 될 것만은 사실이오. 옛날부터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니라 한 말이 있지 않소."
 
115
여기까지 들은 그들은 저렇게 귀하신 어른의 입에서 자기들이 하는 농사를 찬사하는 말이 나오니 이것이 꿈인가 하였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감격에 붙들리었다.
 
116
"우리가 농사를 부지런히 하여야 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 거기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말하고자 하오. 재래의 농민들이란 그저 수굿수굿 김만 매면 되는 줄 알았으나 그것은 틀린 것이오. 어떻게 하면 밭에서 곡식이 많이 날까, 어떻게 하면 작은 밭을 가지고도 큰 밭에서 내는 곡식을 낼까, 다시 말하면 농사하는 방법을 꼭 알아 가지고 농사를 지어야 한단 말이오. 어…… 예를 들어 말하면 어…… 여기 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의 재주를 보아 그에 적당한 일을 시켜야 그 일이 잘될 것이 아니오? 그러니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밭에 곡식을 심는 것도 만일 어긋나게 심으면 좀더 곡식이 많이 날 것이로되 적게 난단 말이오. 수수나 콩을 심어 잘될 밭에다 조나 육도를 심으면 적게 날 것이오. 그러니 먼저 그 밭에 어떤 것이 적당할까를 생각하여 심어야 한단 말이우. 어…… 그리고 퇴비 말이오, 무엇보다도 이 퇴비를 많이 제작해 두었다가 봄에 가서 밭을 잘 거두어야 하우. 여러분이 좀더 부지런을 내면, 어…… 일하다가 쉬는 틈을 타서 풀을 깎아다 퇴적장에 쌓아 썩히시오. 이것이 봄에 가서는 훌륭한 거름이 될 것이오. 공연히 읍 같은 데 가서 금비를 사 나를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자작 만들어 쓰란 말이오."
 
117
그들은 자기들의 농사하는 이치를 이렇게 꼭꼭 알아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되었는지 몰랐다. 그래서 서로 돌아보며 입을 쩍쩍 벌렸다.
 
118
"어…… 그리고 색의를 입어야 하오. 우리 조선 사람은 흰옷을 입는 것이 못사는 원인의 하나요. 어서 바삐 색의를 입으시우. 흰옷을 입게 되면 자주 빨아 입어야겠으니, 첫째 그만큼 시간이 소비되고, 둘째 빠는 데 옷이 해지우. 어…… 그리고 고무신을 신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노는 시간을 이용하여 짚신을 삼아 신도록 하오. 이 외에 관혼상제비(冠婚喪祭費)도 절약하시우. 이렇게 하면 당신네들이 앞으로는 다 부자가 될 것이오. 그렇지 않우? 허허."
 
119
그들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군수의 말대로 하면, 참말 내년부터라도 풍족한 생활을 할 것 같았다.
 
120
"그리고 어…… 마지막으로 말할 것은 면이라는 기관은 당신들이 잘살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위하여 힘써 지도하는 곳이니, 조금도 면사무소를 허수히 알아서는 못쓰오. 면에서 지세나 혹은 호세나 기타 여러 가지 세금을 당신들한테서 받아 내는 것은 다 당신들을 잘살게 하기 위하여 통치하는 데 소비하는 것이우. 그러니 그런 세금들을 꼭꼭 잘 바쳐야 하오. 할 말은 많으나 훗기회로 미루고 위선 그만하니 이 면사무소의 지도를 잘 받으시오."
 
121
군수는 말을 마치고 의자에 걸어앉는다. 면장은 만족한 웃음을 띠고 나왔다.
 
122
"이번 군수 영감께서 이렇게 나오시게 되어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들리어 주시니 우리 면민은 군수 영감의 말씀대로 이행하기를 서약한다는 증거로 일어나서 경례를 합시다. 자 일어나시우들."
 
123
농민들은 일시에 일어나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몇 번이나 거듭하고 헤어졌다.
 
124
첫째도 그들 틈에 섞여서 면사무소를 나왔다. 그는 어정어정 걸으며 내년부터 나는 누구네 땅을 부치나! 하고 우뚝 섰다. 그의 동무들은 그를 비웃는 듯이 흘금 돌아보고 저편으로 몰려간다.
 
 

6. 46

 
126
첫째는 드디어 밭을 떼이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 군수 영감의 말을 들으면 이 면사무소는 농민들이 잘살기 위하여 힘쓰는 곳이라는데……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자기만은 이 동네의 농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부쩍 든다. 덕호로 말하면 이 면의 어른인 면장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치던 밭을 그에게 떼이지 않았는가? 응! 나는 그때 그 구루마를 깨친 것이 법에 걸리었기 때문이라지. 법 법…… 오늘 군수 영감의 말씀한 것도 역시 내가 행하지 않으면 법에 걸리게 될 터이지. 그러나 오늘에 부칠 밭이 없는데 거름은 만들어 두면 뭘 하나? 그 법…… 그는 날이 갈수록 이 법에 대하여 점점 더 의문의 실뭉치가 되어 그의 가슴을 안타깝게 보챈다. 그는 생각지 말자 하다가도 가슴속에서 뭉치어 일어나는 이 뭉텅이! 그 스스로도 제어하는 수가 없었다. 첫째 자신은 이 신성불가침의 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나 웬일인지 날이 갈수록 자신은 이 법에 걸려 들어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발견하였던 것이다.
 
127
집까지 온 첫째는 나뭇가리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128
"어떻게 한담?"
 
129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의 앞길은 암흑으로 변하여지는 것을, 볼을 후려치는 쌀쌀한 겨울날의 감촉과 같이 확실히 느껴진다.
 
130
그때 짚 부벼치는 소리가 바삭바삭 나므로 휙근 머리를 돌리니 그가 새끼 꼬다가 놓고서 면사무소에 갔던 기억이 얼핏 생각히며 이서방이 동냥하러 가지 않고 오늘은 집에 있는가 하여 얼른 들어왔다. 방문을 여니 갑자기 누가 방 안에 앉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캄캄한 속으로 짚 부벼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131
"벌써 오니? 왜 오라던?"
 
132
방 안에 들어앉은 그는 어머니가 새끼 꼬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였다. 첫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133
"군수 연설 들으러 오라지."
 
134
첫째 어머니는 실망을 하고 꼬던 짚을 밀어 놓는다. 아까 면서기가 면사무소로 첫째를 오라고 할 때는 아마 도로 밭을 부치라고 하려나? 하는 다소의 희망과 의문을 가졌는데, 아들의 이러한 말을 들으니 아주 낙망이 되었던 것이다.
 
135
첫째 역시 어머니의 이러한 낙망을 손에 든 것처럼 꿰뚫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비애가 이 방 안으로 가득히 들어차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첫째는 어머니의 이러한 모양이 보기 싫어서 휙 돌아앉아 새끼를 꼬기 시작하였다. 전 같으면 이 새끼를 꼬아서 할 것이 많건만, 이 새끼를 꼬기는 꼬나, 무엇에다 어떻게 쓰려는 예정도 나지 않았다. 그저 심심하니 앉아 있으면 가슴이 터지게 일어나는 이 의문과 비애! 이것이 안타깝고 귀찮아서 이것을 붙여잡고 있는 것이다.
 
136
"이놈아, 글쎄 가만히 있지 왜? 그 지랄을 벌여서 그 모양을 한단 말이냐. 암만 그래두, 우리는 없는 사람이니까 있는 사람에게 붙어 살아야 하지 않니…… 오늘부터라도 굶고 앉았겠으니 좋겠다! 이놈! 날 잡아먹지 못해 그래…… 그래도 밭을 부치면 장리쌀이라도 얻어 올 수가 있었지만, 누가 쌀 한 줌 줄 듯하냐."
 
137
"이거 왜 귀찮게 구는지 모르겠다!"
 
138
첫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139
"오냐 이놈아, 어려서부터 네놈이 어미의 머리끄덩이를 함부로 뜯어 내더니, 그 버릇이 이때껏 남아서 밥 굶게 되었으니 좋겠다! 이놈!"
 
140
"흥 잘하는 것 내가 그랬겠군!"
 
141
"그랴, 그래서 너 누구 덕에 밥 먹고 큰 줄 아느냐. 이놈, 너도 지내 봐라! 누가 잘못하고 싶어 잘못하는 줄 아느냐? 나도 배고파서 헐 수할수없으니 그랬다! 너두 지내 봐라! 어디 이놈!"
 
142
첫째는 이 말에 귀가 번쩍 틔며 이상하게도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리고 나도 배가 고파서 헐수할수없으니 그랬다, 너두 지내 봐라! 하던 어머니의 말이, 살대와 같이 그의 가슴폭을 선뜻 찌르는 듯하였다. 헐수할수없으니 그랬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또다시 그 실마리가 두루뭉텅이가 져서 올라오려고 하였다. 그는 새끼 꼬던 짚을 밀어 내고 벌컥 일어났다. 그리고 벼락치듯 문을 열어 젖히고 나와 버렸다.
 
143
어느새에 싸락눈이 바슬바슬 떨어진다. 뜰 한 모퉁이에 쌓아 둔 나뭇가리에 싸락눈 쌓이는 소리가 한층더 뚜렷하다. 그는 저 싸락눈을 보니 한층더 가슴이 죄어들었다. 원 나무나 해다 팔아서 쌀말이나 마련해 올까…… 그러니 그놈의 산림감시놈들이 나무를 베게 해야지…… 법? 그는 발길을 쿵 하고 들놓았다.
 
 

7. 47

 
145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던 첫째는 어느 동무네 집에나 가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까 면사무소 앞에서 자기를 비웃는 듯이 돌아보던 동무들을 얼핏 생각하며, 그만 지게를 걸머지고 어정어정 나왔다.
 
146
싸락눈이 그의 다는 얼굴을 선듯선듯하게 하여 준다. 그는 뿌옇게 보이는 앞벌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까지 그의 온갖 희망과 포부가 이 벌 전부이었던 것을 그는 다시금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벌을 잃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그에게 무슨 희망과 포부가 있으랴! 단지 그의 앞에 가로질린 것은 캄캄한 암흑뿐이었다.
 
147
그는 일하러 나올 때마다, 괭이를 높이 둘러메고 끝없는 공상에 잠기곤 하였다.
 
148
농사를 잘 지어서 먹고, 남는 것을 팔아서 저축해 두었다가 그 돈으로 밭 사고, 그리고 선비를 아내로 맞이해서, 아들딸 낳아 가면서 재미나게 살아 보겠다고 그는 몇 번이나 생각해 보았던가! 그는 자기의 이러한 어리석었던 공상을 회상하며 픽 웃어 버렸다. 따라서 희망에 불타던 그의 씩씩한 눈망울은 비웃음과 저주로 변하는 것을 확실히 볼 수가 있었다.
 
149
어느덧 그는 원소까지 왔다. 앙상한 버드나무숲은 어찌 보면 자기의 신세와도 흡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 숲을 쳐다보았을 때, 오는 봄에 싹 돋으려는 씩씩한 기운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는 버드나무를 의지하여 원소를 내려다보았다. 그때에 생각힌 것은 원소의 전설이다.
 
150
'그들도 법에 걸려 혹은 죽고 혹은 매를 직사하게 맞았다지.' 몇천 년이나 몇백 년이 되었는지 분명하지 못한 그 옛날의 농민들도 자기와 같은 그런 궁경에 빠졌던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다시금 원소의 푸른 물을 들여다보았다.
 
151
그때 뒤에서 신발 소리가 난다. 그는 누가 물 길러 오는구나…… 하고 생각되었으나 머리를 돌려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자기를 보면 밭 떼인 것을 조소하는 듯하여 그만 얼굴이 뜨뜻해지곤 하였던 것이다.
 
152
신발 소리는 차츰 가까워진다. 그 신발 소리를 듣고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라는 것을 직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여기 섰기가 좀 열적은 듯하여 버드나무 옆을 떠났다. 그래서 그가 저편 길로 옮아 섰을 때, 원소로 가는 두 여인을 발견하였다. 그 순간 그는 전신의 피가 갑자기 활기를 띠고 숨이 가쁘도록 심장이 뛰었다. 그는 멈칫 서서 바라보았다.
 
153
빨래 함지를 무겁게 인 여인 중, 그 하나가 선비가 아니었느냐! 귀밑까지 푹 눌러 쓴 흰수건 밑으로, 껍질 벗긴 밤알처럼 윤택해 보이는 그의 얼굴! 내리는 눈에 가리어 아리송아리송하게 보였다. 그러나 전날 선비와 같이 다정한 감을 주지 않고 웬일인지 차디찬 조소를 그의 윤택한 살갗을 통하여 차츰 농후하게 던져 주었다.
 
154
빨래 함지를 내려놓은 그들은 빨래를 돌 위에 놓고 빵빵 두드린다. 그 소리는, "이 자식 너 밭 떼였지, 너 밭 떼였지" 하는 소리같이 들렸다. 그는 한참이나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선비가 방망이를 놓고 빨래를 헹구며 흘금 바라본다. 그는 얼핏 돌아서고 말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며 앞이 아뜩하였다. 그는 작대기를 꾹 짚으며, 계집은 해서 뭘 하는 게냐!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155
방망이 소리는 그가 걸을수록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그리고 선비의 그 모양까지도 차디찬 얼음덩이 같아지는 것을 그는 우뚝 서며 보았다. 그것은 자기 머리에 언제부터 들어앉았던 그 고운 선비의 환영이 이렇게 변하여지는 것이, 그가 눈을 크게 뜰 때마다 확실히 인식되었다.
 
156
그는 산등에 올라 되는 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지게를 진 채 멍하니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때에 떠오른 것은, 어려서 이 산등에 나무 하러 왔다가 선비를 만나 싱아를 빼앗아 먹던 기억이다. 따라서 그때부터 자기가 선비를 맘 한구석에 생각하였다는 것이 옛날을 회상할수록 뚜렷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사모하던 선비를 한번 만나 이야기도 못 해보고 그만 영원히 만나지 못할 생각을 하여, 무의식간에 그는 작대기를 들어 그의 발부리를 힘껏 후려쳤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157
싸락눈은 아까보다 더 내리는 듯하다. 그 속으로 멀리 보이는 동네! 벌써 집집에서 흐르는 저녁 연기가 구불구불 선을 긋고 올라간다. 그때 그는 무심히 이서방이 이젠 들어왔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8. 48

 
159
첫째는 산 옆으로 돌아가며 마른 풀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동구까지 왔을 때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밥 잦히는 솥뚜껑 소리며 청어 굽는 내가 그의 구미를 버쩍 당기게 하였다. 그 순간 그는 어젯저녁에 밥이라고 좀 먹어 보고는 오늘 아침은 국물만 되는 소죽 먹은 기억이 그의 가슴을 더 쌀쌀하게 하였다. 그러나 집에 가면 이서방이 그 시커먼 밥자루에 밥을 가득히 얻어 가지고 왔을 생각을 하니 발길이 얼른얼른 내디뎌졌다.
 
160
그가 집까지 와서 나뭇짐을 되는 대로 벗어 놓고 분주히 방으로 들어가며 이서방의 신발부터 있는가 하고 보았다. 그러나 찬바람이 실실 도는 봉당에 어머니의 짚신만이 놓여 있다. 그는 멈칫 섰다. 이서방이 안 왔나? 하는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랫목에 누웠다가 벌컥 일어나며,
 
161
"이서방이우?"
 
162
그때 첫째는 앞이 아뜩해지며 이때까지 이서방이 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의 어머니는 첫째임을 알자 곧 도로 누워 버렸다. 그리고 으흠 하고 신음하는 소리가 방 안을 그윽이 울려 주었다.
 
163
그는 방문을 쿡 닫고 돌아섰다. 이서방이 왜 안 와 하고, 차츰 어두워 가는 저 밖을 바라보았다. 이서방이 밥자루를 무겁게 들고 돌아올 길에는 눈만이 푹푹 쌓일 뿐이고, 검정개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읍으로 통한 신작로를 바라고 성큼성큼 걸었다.
 
164
수굿하고 걷다가는 한참씩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서방은 보이지 않았다. 저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이서방이 오는 것이 보이려나? 하고 그 산모퉁이를 돌아와도 역시 눈송이만이 벌떼같이 날 뿐이고, 이서방 비슷한 사람조차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젠 사방이 캄캄해서, 어디가 어딘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일까, 혹 길가에서 얼어 죽었나? 그렇지 않으면 몸이 아파서 어디 물방앗간 같은 곳에 누웠는가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밤이 되어 갈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65
이 밤부터는 바람까지 일어서 휙휙 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싸락눈은 이젠 솜눈으로 변하여 무섭게 뺨을 후려친다. 첫째는 우뚝 서서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오늘 밤으로는 이서방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그만 집으로 오고 말았다.
 
166
그 밤을 고스란히 새우고 난 첫째네 모자는 아침이면 이서방이 오겠지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이서방은 아무 소식 없다. 첫째 어머니는 아무래도 이서방이 무슨 일을 만난 것 같았다. 그래서 첫째를 보고,
 
167
"이애! 이서방이 무슨 일을 만난 것 같으니 네 읍에 가봐라."
 
168
어젯저녁만 해도 배고픈 것이 이렇게 견디기 어렵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어제는 걷기에도 별한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이 아침부터는 너무 배가 고파서 운신을 할 수가 없다. 그는 어머니를 쳐다보며,
 
169
"배고파서 갈 수 있어야지? 어데서 밥 좀 얻어다 주슈."
 
170
첫째 어머니는 맥없이 누워 이렇게 말하는 첫째를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는 어디서 밥술이나 얻어 보려고 바가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첫째는 어머니가 나가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수없는 그릇에 밥 담은 것이 얼씬얼씬 보여서 못 견딜 지경이다. 그는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첫눈에 띈 것은 며칠 전까지 쌀 담아 두던 항아리였다. 그는 무의식간에 벌컥 일어나서 항아리 곁으로 왔다. 그리고 항아리를 기울여 보았다. 휑하니 비었다. 간 가을만 해도 쌀이 이 항아리로 가득 찼는데 벌써 그 쌀이 다 없어졌나? 하고 그는 다시 생각을 되풀이해 보았다.
 
171
가을에 밭 떼일 때 덕호가 특별히 생각하여 주노라고 하면서 빚과 장리쌀만 제하고 그 외에 비료값이니 이따금 꾸어다 먹은 쌀은 제하지 않고 그냥 첫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 항아리로 가득 찼던 것이다. 그때에는 이 쌀이 몇 달은 가리라고 생각했더니 막상 하루 이틀 먹어 보니 불과 두 달이 못 가서 그 가득하던 쌀이 흔적도 없어졌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쌀항아리를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행여나 어디가 쌀알이 붙었는가 하여 항아리를 들고 문 편으로 와서 뱅뱅 돌려가며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쌀 한 알 발견하지 못하였을 때, 그는 한숨을 푹 쉬며 항아리 전에 머리를 기대고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술술 흘러내렸다. 마침 밖에서 신발소리가 나므로 그는 벌떡 일어났다.
 
 

9. 49

 
173
방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들어온다.
 
174
"난 이서방이라구."
 
175
"잡놈, 배는 용히 고픈 게다."
 
176
첫째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손에 든 바가지를 그의 앞으로 밀어놓는다. 첫째는 얼른 들여다보니 도토리며 밥이 들어 있었다. 그때 첫째는 식욕이 욱 하고 치밀어 그의 어머니까지 밥으로 보였다. 그래서 바가지를 빼앗듯이 받아 가지고 손으로 움켜쥐어 먹었다. 언제 술을 들고 저를 놀리고가 다 배부른 사람들의 장난이지, 이때 첫째에게 있어서는 필요하지 않았다.
 
177
"이애 작작 덤벼라!"
 
178
첫째 어머니는 자기도 몇 술 얻어먹을까 하였다가, 아들이 저렇게 집어 먹었으니 도토리 한 알 입에 대어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첫째 어머니는 야속한 생각과 같이 못 견디게 가슴이 쓰리었다.
 
179
"또 없수?"
 
180
눈이 뻘겋게 뒤집힌 첫째는, 어머니가 밥을 더 얻어 오고도 내어 놓지 않는 것만 같아서 이렇게 대든다. 첫째 어머니는 아들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181
"이애 무섭다. 흥! 혼자 다 처먹구두, 뭐가 나뻐서 그러냐."
 
182
이 말을 하지 않고는 곧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까 길에서 왜 내가 한술이라도 먹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일어난다. 첫째는 먹은 것도 없이 먹었다는 말만 들으니 기가 막혔다.
 
183
"날 뭘 주었기 그래!"
 
184
첫째는 바싹 대든다. 그의 눈에서는 불이 펄펄 날아 나오는 것 같았다. 첫째 어머니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돌아앉으며 그만 벽을 향하여 누워 버렸다. 어머니의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첫째는 어머니가 밥이라면 그저 이 배가 터지도록 먹으련만…… 하였다.
 
185
"그 밥은 어서 난 게유?"
 
186
아무래도 그 밥의 출처를 알아 가지고 좀더 먹어야지, 뱃속이 요동을 해서 못 견딜 지경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린 듯이 누워 있을 뿐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첫째는 어머니의 궁둥이를 냅다 차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누구네 집에 가서 밥을 좀 얻어먹나? 개똥이네 집에나 가볼까? 하고 벌컥 일어날 때, 생각지 않은 트림이 꺽 하고 올라온다.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방바닥을 치며,
 
187
"이놈아, 너만 트림까지 하도록 처먹을 것이 뭐냐!"
 
188
자기도 몇 술 주어서 같이 먹었다면 이렇게 가슴은 아프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첫째는 달려들어 어머니의 궁둥이를 내려 밟았다.
 
189
"날 뭘 주었어? 한 바리를 주었어, 한 대접을 주었어, 뭘 얼마나 주었어?"
 
190
그의 어머니는 악이 치받쳐서 벌떡 일어나며 첫째에게로 달려들었다.
 
191
"이애 이놈의 새끼야, 넌 트림까지 하지 않니. 처먹었기에 트림을 하지. 이놈아, 그래 너만 처먹고 살려느냐, 다른 사람은 다 죽고…… 그것을 같이 먹겠다고 가지고 오니께 저만 다 처먹어. 어데 보자 이놈아, 에미를 그렇게 하는 데가 어데 있냐, 하늘이 있니라! 응…… 응……."
 
192
목을 놓고 운다. 첫째는 우는 꼴이 보기 싫어서 밖으로 뛰어나왔다.
 
193
뜰 위에 소복이 쌓인 눈 위에는 신발 자국이 뚜렷이 났다. 그는 멍하니 그 발자국을 바라보다가 이서방이 오늘은 오려나 하고 저 앞을 바라보았다.
 
194
어머니는 여전히 뭐라고 몹시 떠들면서 운다. 첫째는 이서방이 오는가? 오는가 하여 가슴을 졸이다 못해서 그만 누구네 집에든지 가서 한 술 얻어먹으리라 하고 문밖을 나섰다. 그가 개똥이네 싸리문 안에 들어서니, 개똥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전 같으면 어서 들어오라고 할 터인데 그런 말은 없고 거칠게 눈을 뜨고,
 
195
"왜 왔는가?"
 
196
"개똥이 있수?"
 
197
"이제 면장 댁에 일하러 갔네…… 왜?"
 
198
그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199
"그저 놀러 왔댔수."
 
200
얼른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 나왔다. 이젠 누구네 집에를 좀 가볼까 하며 어정어정 걷다가 멈칫 섰다.
 
201
저리로부터 덕호와 어떤 양복쟁이가 궐련을 피워 물고 이리로 온다. 그는 머리를 푹 숙이고 이편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며 지나간다. 그때 덕호는 손에 든 단장을 휙휙 돌린다. 덕호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첫째는 전신의 피가 머리고 치밀고 온몸이 푸르르 떨리었다.
 
 

10. 50

 
203
그날 밤 밤이 퍽 깊은 후에 첫째는 밖으로부터 들어왔다.
 
204
"어머이!"
 
205
방 안으로 들어선 첫째는 목멘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첫째 어머니는 이서방인 줄 알고 일어났으나 첫째 음성임에 대답도 하지 않고 도로 누워 버렸다. 첫째는 어머니 손에 무엇을 들려 준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쌀내를 후끈 느끼며 손에 든 것이 쌀자루라는 것을 깨닫자 단숨에 일어났다. 그리고 부엌으로 나가며,
 
206
"이애, 어서 널랑 나와서 불때라!"
 
207
첫째는 어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궁에 불을 살라 넣었다. 그의 어머니는 쌀을 졸졸 일어 내리며 아궁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비추이는 아들의 하반신을 흘금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놀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무슨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곧 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그의 옷은 갈가리 찢기었던 것이다. 첫째는 오래간만에 쌀 일어 내리는 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그래서 불빛에 어림해 보이는 물 속으로 하얗게 보이는 쌀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침을 모아 넘기다가 종내 못 견디어서 물독 곁으로 가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들이마셨다.
 
208
그들이 밥을 퍼가지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대문 소리가 쿵쿵 났다. 첫째는 눈이 둥그래지며 뒷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첫째 어머니는 얼른 밥그릇을 감추어 놓고 귀를 기울였다.
 
209
"자우?…… 첫째야, 자니?"
 
210
그 음성에 첫째 어머니는 왈칵 내달았다.
 
211
"어서 문 열어 주……."
 
212
숨이 차서 헐떡헐떡하는 소리가 들린다.
 
213
첫째 어머니는 봉당까지 나오기는 하고도 손이 떨리어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누가 딴사람이 이서방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 하는 불안이 든다.
 
214
"문 열어 주, 아이구! 에…… 으흠."
 
215
"아니 정말 이서방이유?"
 
216
첫째 어머니는 문 새에다 입을 대고 이렇게 물었다. 이서방은 기가 막히는 모양인지 머리로 대문을 쿵 받는다.
 
217
"아이 참 이서방이구려! 이서방 어서어서."
 
218
그제야 첫째 어머니는 안심을 하고 문을 열었다. 이서방은 벌벌 기어들어 온다.
 
219
"아니 나무다리는 어찌 했수?"
 
220
"아이구!"
 
221
소리를 내며 그는 아무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맥없이 누워 버렸다. 그리고 앓는 소리를 무섭게 하였다. 첫째 어머니는 감추어 두었던 밥그릇을 꺼내 놓고 밥 한 그릇을 다 먹은 후에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리고 이서방의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22
"그런데 어데가 아프시유?"
 
223
이서방은 역시 아무 말이 없다. 그때에 첫째 어머니는 겁이 나서 바싹 다가앉아서 그의 머리를 짚어 볼 때 방 안이 캄캄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224
"불이나 좀 켰으면 좋겠는데…… 기름이 있어야지."
 
225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서방은 으흠 하고 돌아누웠다.
 
226
"첫째는…… 첫째는."
 
227
이서방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겁나던 것이 조금 덜리는 듯하였다.
 
228
"어디 아푸, 왜 그러우?"
 
229
"고뿔에 걸렸수."
 
230
"고뿔이요…… 그래 못 왔구려."
 
231
그때 뒷문이 부시시 열리며,
 
232
"이서방 왔수?"
 
233
첫째가 묻는다.
 
234
"그래 너……."
 
235
그 다음 말은 하지 못하고 우는 모양이다. 첫째는 적이 안심하고 들어왔다.
 
236
"어머이, 밥!"
 
237
첫째 어머니는 밥그릇을 그의 손에 들려 주었다. 이서방은,
 
238
"내 자루에 밥 있다!"
 
239
눈물을 씻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 어머니는 부엌으로 나가서 나무 한 뭇을 더 넣고 들어왔다.
 
240
그 밤을 무사히 지낸 그들은 다음날 정오쯤이나 되어 눈을 떴다. 방문에는 햇빛이 발갛게 비치었다. 첫째는 머리를 넘성하여 이서방을 보았다. 본래부터 뼈만 남았던 그가 한층 더하여 마치 해골을 대하는 듯하였다.
 
241
"이서방!"
 
242
"왜."
 
243
감았던 눈을 번쩍 뜬다. 어젯밤 덥게 자서 그런지 오늘은 덜 아파하는 것 같았다.
 
244
"어데 가서 그렇게 안 왔수."
 
245
첫째는 원망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11. 51

 
247
"난 아파서 죽을 뻔하였다…… 네가 기다리는 것을 뻔히 알지만, 몸을 운신하는 수가 있드냐. 그러구 그 나쁜 놈의 애새끼들이 내 나무다리를 얻다가 감추고 주어야지…… 흠!"
 
248
한숨을 푹 쉬며, 첫째를 바라보는 그 눈에는 세상을 원망하는 빛이 가득하였다. 첫째는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리고 이서방이 없는 동안에 자기가 당한 일을 얼핏 생각하였다. 불과 사오 일 동안이건만, 몇십 년 동안이나 지난 것처럼 지리하고 아득해 보였다.
 
249
첫째 어머니는 불을 한 화로 담아 가지고 들어온다. 방 안이 훈훈해지는 것을 그들은 느꼈다. 이서방은 그의 동냥자루를 보았다.
 
250
"첫째 떡 구워 주."
 
251
떡이란 말에 첫째는 구미가 버쩍 당기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시커먼 자루 안에서 한 개씩 꺼내 놓는 떡을 얼른 집어 뚝뚝 무질러 먹었다.
 
252
"이애 궈먹어라."
 
253
첫째 어머니는 불 속에 떡을 집어넣는다.
 
254
이서방은 물끄러미 이것을 바라보며 가슴이 후련해졌다. 어젯밤 그가 떡자루를 목에 매달고 눈 위를 기어올 때는, 그만 머리가 떨어지는 듯하고 숨이 차서 떡자루를 몇 번이나 내버리려다가도, 집에서 첫째와 첫째 어머니가 배를 곯아 가며 이 떡덩어리를 눈이 감기도록 기다리고 앉았을 생각을 하고는, 가다가 죽더라도 이 자루는 가지고 가야 한다 하고 필사의 힘을 다하여 가져온 저 떡! 그들 모자가 그 떡을 저 화롯불에 넣고, 어서 익으면 먹겠다고 머리를 기웃하여 화로만 들여다보는 저 모양! 이서방은 이젠 이 자리에서 숨이 끊어져도 원통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지금 먹을 것을 앞에 논 저들을 보고 그만 죽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젠 더 밥을 얻으러 다니기도 괴로워서 못 견딜 지경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그는 무의식간에 다리를 만져 보다가,
 
255
"그놈의 새끼들! 글쎄, 남의 다리는 왜 가져가."
 
256
그때 다리를 빼앗기던 장면이 휙 떠오른다.
 
257
"누가 다리를 앗아 갔수?"
 
258
"애새끼들이 나 연자방앗간에 누웠는데 달려들어 오더니 글쎄 그것을 빼앗아 갔지! 흥 그놈의 새끼들."
 
259
"그놈의 새끼들을 그대로 둬요? 모두 목을 꺾어 주지!"
 
260
첫째는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 어머니는 첫째를 노려보았다.
 
261
"이애! 너두 그 버릇 좀 고쳐라! 툭하면 목을 부러친다는 말은 그 웬 수작 따위냐?"
 
262
"아 그래, 그따위 새끼들을 그만두어야 옳겠수?"
 
263
"세상에 옳은 일은 다 맘대루 하는 줄 아니? 흥 저놈의……."
 
264
그때 모자의 머리에는 어젯밤 일이 휙 지나친다. 첫째는 머리를 푹 숙였다. 그리고 한참이나 화로를 들여다보던 그는 머리를 들며,
 
265
"이서방, 법이 뭐나?"
 
266
뜻하지 않은 이 말에 이서방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267
"법?"
 
268
첫째는 이서방이 알아듣지 못한 것을 알고, 무엇이라고 설명하여 깨치어 주렸으나, 뭐라고 말을 할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았다.
 
269
"법이 무슨 말이야, 법?"
 
270
이서방은 안타까워서 또다시 채쳐 묻는다.
 
271
"아니 왜 법이라구 있지, 왜."
 
272
"아? 이애 똑똑히 말해, 법이 뭐냐?"
 
273
그의 어머니도 첫째를 바라본다. 첫째는 눈살을 찌푸렸다.
 
274
"모르겠으면 그만두!"
 
275
소리를 가만히 치고 나서 화롯불을 헤치고 떡을 꺼내 먹는다. 첫째 어머니는 그중 말큰말큰하게 익은 찰떡을 골라 이서방을 주었다. 이서방은 받아서 한 입 씹을 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첫째 어머니도 이 모양을 바라보며 목이 메어 울었다. 첫째는 휙 돌아앉았다.
 
276
"울기는 왜들 울어, 정 보기 싫어서."
 
277
이렇게 중얼거리며 빨간 문을 시름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원소에서 빨래하던 선비가 보인다. 그리고 그날 군수가 연설하던 말이며 개똥네 집에 밥 얻어먹으러 갔던 것, 길에서 덕호를 만나던 일이 휙휙 지나친다.
 
278
"법이 무슨 말이냐?"
 
279
이서방이 다시 묻는다. 첫째는 얼른 돌아보았다.
 
280
"참 답답해 죽겠수, 왜 법에 걸리면 주재소에 잡혀가지 않우."
 
281
첫째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쳐진다.
 
 

12. 52

 
283
첫째는 법을 설명하느라 이렇게 말하는 새,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역시 법에 걸린 노릇임을 가슴이 뜨끔하도록 느꼈던 것이다. 그의 가슴에는 또다시 그 실뭉치가 욱 쓸어 올라온다. 그리고 어머니가 하던 말이 얼핏 생각힌다. "배가 고파서 헐수할수없이 그랬다!" 역시 자기도 배가 고프니 헐수할수없이 그랬다. 그러나 법에는 걸려들 일이다. 그때는 배고픈 차라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 없이 그저 답답히 먹을 것만 찾기에 몰랐으나 이렇게 떡이며 밥을 먹고 나니 자신은 법에 걸릴 노릇을 또 한 가지 하였던 것이다.
 
284
이서방은 그제야 알아는 들었으나 뭐라고 설명할 아무것도 없다.
 
285
"법이 법이지 뭐냐, 본래 법이란 것이 있느니라."
 
286
"그저 본래부터 있는 게나?"
 
287
"암! 그렇지! 그저 법이니라."
 
288
이서방은 이 법이란 것이 어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나기 전부터 이 세상에는 벌써 이 법이란 있었던 것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첫째는 한층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동시에 벗어나지 못할 철칙인 이 법! 어째서 자기만이, 아니 그의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서방, 그의 어머니만이 여기에 걸려들지 않고는 못 견딜까……?
 
289
그는 이러한 생각에 그의 온 가슴은 뒤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쌀 잃어버린 집에서는 지금쯤 떠들 것이다. 물론 주재소에 가서 도적맞았다는 말을 하였을 터이지…… 순사는 조사하러 떠났는지도 모른다. 보다도 우리집 문밖에 서 있는지도 모르지? 이렇게 생각을 하며 문 편을 흘금 바라보았다.
 
290
바람이 불어도 순사가 오는 것 같고, 이서방이 뒤쳐만 누워도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듯하여 첫째는 그 큰 눈을 둥그렇게 뜨고 흘금흘금 문 편을 바라보곤 하였다.
 
291
이렇게 가슴을 졸이면서도 첫째는 또다시 이 노릇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그래서 밤마다 그는 나가곤 하였다. 이서방과 그의 어머니는 첫째를 대하여 아무 말도 못 하면서도 날이 갈수록 가슴만은 바짝바짝 타들어 왔다.
 
292
어떤 날 밤에 첫째가 들어왔을 때 이서방은 그의 곁으로 바싹 앉았다.
 
293
"첫째야! 너 그만 이 동네를 떠나라!"
 
294
첫째는 씩씩하며,
 
295
"왜?"
 
296
"왜는 왜! 떠나야 하지, 여기만 사람 사는 데냐…… 말 들으니, 서울이나 평양에는 공장이라는 것이 있어 가지고,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 돈 받고 일하며 살기 좋다더라. 너두 그런 곳에나 가보렴."
 
297
오늘 낮에 순사가 왔다 간 후로 이서방은 번쩍 더 겁이 났다. 그리고 첫째가 이 밤으로라도 잡힐 것만 같았던 것이다.
 
298
"나는 이웨…… 이렇게 병신이니까, 어데를 못 가나 너같이 다리만 성하다면 이 구석에만 박혀 있겠니."
 
299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은 듯하였다.
 
300
"이서방 꼭 알우? 뭐…… 응…… 공장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꼭 알어?"
 
301
"내니 똑똑히야 알겠니……마는 서울이나 평양에서 온 동무들이 그렁하두나! 그들도 젊었을 때는 모두 공장에 다니다가 늙으니까 그만두고 나와서 얻어먹누라고 허더라."
 
302
"그럼 나가 보겠수!"
 
303
공장에서 돈 받고 일한다는 말을 들으니 그의 캄캄하던 앞길에는 다시 서광이 환하게 비쳐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시라도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벌떡 일어났다.
 
304
"이서방, 난 그럼 이번 나가서는 평양이나 서울까지 가보겠수."
 
305
이서방은 그가 불시에 잡힐 것 같아서 이런 말을 하였으나 금방 떠나겠다는 말을 들으니 앞이 아뜩해졌다.
 
306
"뭐 그렇게 가?"
 
307
"가지! 그럼…… 몰라서 이런 곳에 있지."
 
308
그는 밖으로 나가며,
 
309
"이서방 잘 있수. 내 돈 많이 벌어 가지고 올게…… 어머이보군 잠자꾸 있수……."
 
310
이서방은 요새 첫째가 만들어 준 나무다리를 짚고 그의 뒤를 따랐다.
 
311
"이애 나두 잘 몰라, 공장이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니 내가 읍에 들어가서 잘 알아보고 떠나라. 그저 가기만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312
첫째는 아무 말 없이 달아난다. 이서방은 기가 나서 쫓아간다. 이제 떠나면 다시 볼지 말지 한 첫째! 그는 마지막으로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은 맘에 허둥지둥 동구 밖을 벗어났다. 그러나 첫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저 산등 위로 그믐달이 삐죽이 내밀었다.
 
 

13. 53

 
314
함박눈이 소리 없이 푹푹 내리는 십이월 이십오일 아침, 용연 동네는 높은 집 낮은 집 할 것 없이 함박꽃 같은 눈송이로 덮였다.
 
315
이윽고 종소리는 뎅그렁뎅그렁 울려 온다. 그 종소리는 흰눈을 뚫고 멀리멀리 사라진다.
 
316
"이애, 벌써 종을 치누나."
 
317
옥점 어머니는 말큰말큰한 명주옷을 갈아입으며 곁에서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선비를 보고 속히 입히라는 뜻을 보였다. 그는 치마를 입히고 나서 저고리를 들었다. 옥점 어머니는 입었던 저고리를 얼른 벗었다. 그의 토실토실한 어깨 위는 둥그렇게 드러났다.
 
318
"내 딸 용키는 해! 벌써 내 뜻을 알고 따땃이 해두었구나."
 
319
아랫목에 미리 놓아 두었던 것이므로 잔등이 따뜻하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덕호가 들어왔다.
 
320
"당신은 안 가려우?"
 
321
덕호는 아랫목에 와서 앉아 담배를 피워 문다.
 
322
"사무는 안 보고 갈까?"
 
323
"이렇게 기쁜 날 사무 좀 보지 않으면 못 쓰우, 뭐."
 
324
웃음을 머금고 옥점 어머니는 덕호를 쳐다보았다. 간난이를 내쫓은 후부터는 별로이 싸우지를 않았다.
 
325
"오늘 연보를 해야겠는데…… 좀 주려우."
 
326
옥점 어머니는 저고리 고름을 매고 버선을 신는다.
 
327
"무슨 연보를 또 하나?"
 
328
"오늘은 특히 없는 사람…… 저, 걸인들 말이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야 연보를 한다우. 좀 주오. 그런데 많이 하는 사람은 특히 이름을 써서 벽에 붙인다우. 하필 믿는 사람만 연보를 하는 게 아니라 구경 왔던 사람들 중에서도 연보하고 싶은 사람은 연보를 한다우. 당신도 좀 가서 한 오 원 내구려……."
 
329
덕호는 픽 웃으며,
 
330
"웬 돈이 있나?"
 
331
"글쎄 내 낯을 보아 하는 게지, 뭘 그러시우. 그러지 않어도 면장댁, 면장 댁 하는데……."
 
332
"아, 저 사람은 뻔히 보면서도 저래. 웬 돈이 있는가."
 
333
"글쎄 오늘만 줘요. 내 몫으로 한 이 원 하고 당신 몫으로 한 오 원 해서, 합해서 칠 원만 합시다."
 
334
남편의 이름과 그의 이름이 교회당 벽에 가지런히 씌어질 생각을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덕호는 담배 꼬투리를 재떨이에 팽개치며,
 
335
"그 정, 어데 살겠기, 자꼬 쓰는 데는 많고 벌지는 못하고 어쩐단 말이……."
 
336
덕호는 혼자 하는 말처럼 중얼거리며 조끼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옥점 어머니는 손을 벌리고 대들었다.
 
337
"이 사람, 글쎄 돈은 어디서 나는가."
 
338
십 원짜리 지화를 내쳐 준다. 그는 입을 실룩실룩하였다. 그가 좋아할 때마다 이런 버릇이 있었다.
 
339
"할멈, 어서 가우."
 
340
옥점 어머니는 지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소리쳤다. 뒤미처 할멈이 들어왔다.
 
341
"그럭허고 갈 테야? 남부끄럽게."
 
342
그의 시커먼 저고리를 보며 소리쳤다. 할멈은 머뭇머뭇하였다.
 
343
"어서 다른 저고리 갈아입어! 그게 뭐야. 무명저고리 있지, 왜?"
 
344
선비는 냉큼 일어나서 할멈 방에서 무명저고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할멈은 올 가을에 새로 한 이 무명저고리를 아까워서 입지 못하고 두었던 것이다. 할멈은 선비가 주는 무명저고리를 받아 입고 나서, 옥점 어머니가 깔고 앉을 방석과 책보며 신 넣을 주머니까지 들고 나섰다. 옥점 어머니는 덕호를 돌아보며,
 
345
"그럼 저녁엘랑 꼭 가우?"
 
346
대답을 듣고야 가겠다는 듯이 말똥말똥 쳐다본다. 덕호는 빙긋이 웃어 보이며,
 
347
"글쎄 형편 봐서 가지. 나 거…… 예배당에 가면 기도하는 꼴 보기 싫어서 못 가겠두먼, 그것 뭐야…… 눈을 감고…… 허허."
 
348
옥점 어머니는 또 저 소리가 나오누나 하고 돌아서 나간다. 선비는 나도 가보았으면 하며 늘어놓은 옥점 어머니의 옷을 거두어 착착 개고 있었다.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덕호는,
 
349
"너 전날 내가 말한 것은 생각해 두었느냐?"
 
350
선비는 놀라 덕호를 바라보다 머리를 숙인다. 선비는 말한 지가 오래도록 덕호가 묻지 않으므로 아마 술김에 한 말인 게다 하고 스스로 풀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351
선비는 언제까지나 잠잠하였다.
 
 

14. 54

 
353
"선비야, 내가 곧 묻고자 했으나 사무에 분주해서 그만 잊었구나, 허허. 아무래도 이 겨울이야 되겠니? 오는 봄에 가도 갈 터이니까, 그렇지? 선비야."
 
354
그의 말은 몹시도 부드러웠다. 선비는 치미는 감격에 귀밑까지 빨개졌다.
 
355
"요새 사람치고 글 몰라서는 시집도 변변한 곳에 못 간다. 내가 너를 기위 내 집안 사람으로 인정하는 이상 너 하나의 소원이야 못 들어주겠니…… 자식도 없는 놈이, 허허허허……."
 
356
덕호는 언제나 말끝마다 손 없는 것을 넣었다. 그가 넣고 싶어 넣는 것보다도 무의식간에 이렇게 넣게 되는 것이다.
 
357
"이애, 어서 말을 해."
 
358
덕호는 앉은걸음으로 선비 곁으로 와서 그의 머리를 내려 쓸었다. 선비는 조금 물러앉았다.
 
359
"그럼 공부 가고 싶지 않으냐?"
 
360
머리를 기웃하여 들여다본다. 그는 너무 어려워서 부시시 일어났다.
 
361
"왜 대답이 없어? 허허…… 나는 너를 친딸같이 아는데…… 왜 너는 그렇게 어려워하니? 응 선비야! 거게 앉아서 말을 좀 해."
 
362
선비는 얼결에 일어는 났으나 도로 주저앉기도 싫고 그렇다고 나가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선 채 우두머니 서 있었다.
 
363
덕호는 시계를 쳐다보더니 벌컥 일어났다.
 
364
"그럼 후일 또 물을 터이니…… 이번에는 똑똑히 대답해…… 어려울 것이 뭐냐, 부모 자식 새 같은 우리 새에…… 글쎄 어려울 게 뭐야, 이애!"
 
365
덕호는 선비의 다는 볼을 손으로 가볍게 후려쳤다. 선비는 주춤 물러섰다.
 
366
"허허…… 그년, 이전 제법 내우를 하랴고 든다 말이어."
 
367
덕호는 이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나간다. 그의 신발 소리가 중대문 밖을 나갔을 때, 그는 호! 한숨을 쉬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쳤다. 그때 이제 덕호의 손길이 부딪치던 것을 얼핏 느끼며, 참말 나를 공부시켜 주려는 셈인가? 하며 주저앉았다. 후일 또다시 물으면 뭐라고 할까, 나 서울 가겠소! 그럴까? 아니! 나 공부시켜 주! 그러지…… 아버지 나 공부시켜 주, 그래야지! 이렇게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나니, 참말 그가 서울로 공부를 가는 듯싶었다. 그리고 그가 철 알면서부터, 입에 올려 보지 못한 아버지를 부르고 나니, 웬일인지 어색한 맛이 있으나, 그러나 아버지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다가 만난 듯한, 그러한 감격에 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368
아버지가 왜 옥점 어머니 있을 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까? 무의식간에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옥점 어머니 역시 어머니라고 불러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옥점 어머니만은 그의 진심으로 '어머니!' 하고 선뜻 불러지지를 않았다. 어머니 하면 벌써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가 얼른 생각히며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에 잠기곤 하였다.
 
369
덕호가 옥점 어머니 없는 곳에서만 선비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은 옥점 어머니가 이 말을 들으면 으레 반대할 것이므로 이렇게 몰래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깨달았을 때 덕호에 대한 감격이 한층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결국은 옥점 어머니 몰래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나중에 나 서울 보내 놓고 말을 하려나? 그렇지 않으면 내일처럼 서울을 가게 되면 오늘 밤쯤 이야기하려나? 하고 생각하니 옥점 어머니의 놀라는 표정과 까칠하게 거슬린 눈썹이 시재 보이는 듯하였다. 제 그러면 소용이 있나? 벌써 언제부터 아버지가 나를 공부시키려고 했는데…… 하며 문 편을 흘금 바라보았다.
 
370
그가 이때까지 이 집에서 있게 된 것도 덕호가 자기를 끝까지 옹호하여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자기의 장래까지도 덕호가 돌아보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하였다. 보다도 주리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때 밤 오래도록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는 큰집 영감님이 다 알아서 해줄 터인데…… 하고, 끝막음을 이렇게 막고는 그만 돌아누워서 잠이 들곤 하였던 것이다.
 
371
어려서부터 그의 어머니가 덕호를 가리켜 큰집 영감님, 큰집 영감님 하고 불렀으므로 그도 항상 큰집 영감님 하고 불러졌다. 그러나 오늘 아침 처음으로 불러 본 아버지! 그는 앞으로 맘먹고 아버지라고 부르리라 굳게 결심하였다.
 
372
"아버지! 나 공부시켜 주."
 
373
그는 다시 한번 되풀이하였다. 그때 그는 극도의 감격에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374
중대문 소리가 찌꺽하고 났다.
 
 

15. 55

 
376
선비는 얼른 눈을 부비치고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유서방이 짚신을 삼아 가지고 들어온다. 선비는 문을 열고 나왔다.
 
377
유서방은 빙글빙글 웃으며 마루까지 와서,
 
378
"이거 신어 봐라."
 
379
선비는 가는 웃음을 눈썹 끝에 띠며 짚신을 받아 들었다. 어제 유서방이 그의 발을 재어 달라고 하므로 실을 끊어 재어 주었던 것이다.
 
380
"어서 신어 봐. 신어 봐서 안 맞으면 또 삼지."
 
381
"유서방두……."
 
382
선비는 유서방을 흘금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고는 신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383
"이애 신어 보라구……."
 
384
유서방은 자기가 정성을 다하여 삼은 것이 선비의 발에 꼭 들어맞는 것을 보고야 안심될 것 같았다. 선비는 신어 보려는 눈치를 보이고 허리를 굽혀 그의 발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385
"후일 신어 봐요."
 
386
하고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버선을 굽어보며 이게 무슨 필까? 어서 떨어진 게야…… 아이 참 망신을 하려니까…… 별일 다 있어! 하며 버선코 밑에 빨갛게 물들어진 동그란 흔적을 만져 보며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김칫물이 떨어져 말라진 자리였다. 그제야 그는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며 유서방이 이것을 피로 보았으면 어쩌나? 하며 유리알로 흘금 내다보았다. 유서방은 눈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검정이를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다. 검정이는 유서방의 웃는 눈치를 짐작함인지 혹은 눈이 오니까 좋아서 그러는지 주둥이로 눈을 헤치며 혹은 발로 긁어당기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는 딩굴딩굴 굴렀다. 그때마다 유서방은,
 
387
"잘 논다! 하하…… 잘 논다! 하하."
 
388
입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389
유서방에게 있어서는 저 검정이가 유일한 동무였다. 역시 선비도 그러하였다. 웬일인지 검정이는 유서방과 선비와 할멈을 따랐다. 그것은 막연하나마 검정이에게 밥을 주는 까닭이라고 생각되었다.
 
390
한참이나 웃던 유서방은 유리창으로 흘금 들여다보았다.
 
391
"신 맞니?"
 
392
선비는 얼른 곁에 놓인 신을 보며,
 
393
"네."
 
394
하였다. 유서방은 만족한 듯이 중대문을 향하여 나간다. 검정이는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채 그의 뒤를 따라나간다. 선비는 짚신으로 눈을 옮겼다. 그리고 신어 보니 꼭 맞는다.
 
395
"아이, 곱게두 삼았어."
 
396
그는 발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그는 유서방이 자기를 생각하여 이렇게 신까지 삼아 주는 것이 끝없이 고마웠다. 반면에 그의 장래까지 누가 이렇게 신을 삼아 줄 것인가 하며 첫째를 생각하였다. 그는 나갔다지, 나쁜 일을 하다가 나갔다지…… 참 그가 웬일이어, 어미가 그러니 그 속에서 나온 자식인들 온전할 수가 있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섭섭하였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한번 그의 얼굴이나마 보았더면 하는 아쉬움이 새로 삼은 짚신을 싸고 언제까지나 돌았다. 나는 공부할 터인데 별것을 다 생각해…….
 
397
그날 밤 덕호네 집에서는 온 집안이 다 예배당으로 갔다. 오늘 밤은 특히 애들의 재미난 유희가 있다고 해서 유서방이며 덕호까지도 모두 갔던 것이다.
 
398
크나큰 방 안에 선비 혼자 앉아서 낮에 틀던 목화를 틀며 여러 가지 생각을 되풀이하였다. 씨앗에서는 흰구름 같은 솜이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마치 선비가 지금 생각하는 여러 가지 생각과 같이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오른다.
 
399
아까 낮에만 하여도 오늘 저녁에는 나도 예배당에나 좀 가보았으면 하였더니, 뜻하지 않는 덕호의 말을 들은 담부터는 혼자 이렇게 앉아 서울 공부 갈 생각을 하는 것이 재미나고 좋았다. 그러므로 옥점 어머니가 할멈은 집이나 보고 자기를 데리고 가려는 것을 일부러 할멈을 보내었던 것이다.
 
400
학교 공부할 생각을 할 때마다 언제나 앞서 생각히는 것은, 수놓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가 직접 본 것이란 그것뿐이니까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학생은 옥점이와 같이 분과 크림과 배니칠을 하고, 또 양복을 입어야 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남자들과도 부끄럼 없이 같이 다니고, 같이 밥 먹고, 같이 공부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괴롭고 그러고도 기쁜 감정이 서로 교착이 되어 가지고, 삐꺽삐꺽하는 씨아 소리를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바스스 열린다.
 
 

16. 56

 
402
뒤미처 찬바람이 선비의 등허리에 훌씬 끼친다. 그는 놀라 뛰어 일어났다.
 
403
"누구요?"
 
404
얼결에 소리를 지르며 돌아보니 뜻하지 않은 덕호였다. 선비는 너무 놀란 것이 무안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405
"놀랐니?"
 
406
덕호는 눈을 툭툭 털며 아랫목에 앉았다. 그리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407
"뭐 볼 것 없더라. 웬 잡것들이 그리 많이 왔는지, 구경이 아니라 큰 고생이두구나."
 
408
묻지도 않는 말을 덕호는 늘어놓는다. 선비는 씨아틀을 가지고 일어났다.
 
409
"왜…… 왜…… 일어나니?"
 
410
"건넌방에 가서 틀래요."
 
411
"왜 여기서 틀지…… 이애 이애, 나가지 말아, 나 좀 할 말이 있다."
 
412
선비는 씨아틀을 놓고 앉으며 아마 서울 공부 갈 말을 물으려는 것이구나…… 생각되었다.
 
413
"그 씨아틀은 놓고 이리 와 앉아, 응 이애."
 
414
선비는 씨아틀도 만지지 않으면 앞이 허전한 것 같아서 그냥 붙들고 있었다. 덕호는 조금 올라와 앉는다.
 
415
"너 정말 공부 가고 싶으냐?"
 
416
웬일인지 선비는 가슴이 답답해지며 얼른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417
"왜 말을 안 해 이년아, 어룬이 물으면 냉큼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허허 그년."
 
418
선비는 약간 웃음을 띠며 머리를 푹 숙인다. 그의 가슴은 부끄러움과 감격에 교착이 되어 무섭게 뛰기 시작하였다.
 
419
"그럼 안 갈 터이냐?"
 
420
덕호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선비의 앞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선비는 씨아틀을 보며,
 
421
"공부하겠어요……."
 
422
겨우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낮에부터 생각해 두었던 '아부지'가 빠졌다. 그래서 다시 말할까 하고 덕호를 흘금 쳐다보았다. 덕호는 빙긋이 웃었다.
 
423
"공부하겠어……."
 
424
씨아틀에 가리워 반만큼 보이는 선비의 타는 듯한 볼! 덕호는 참을 수 없는 정욕의 불길이 울컥 내밀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간에 바싹 다가앉았다.
 
425
"가만히 앉었어! 누가 어쩌냐."
 
426
꿈칠 놀라 일어나려는 선비의 손을 덥석 쥐었다. 덕호의 손은 불같이 뜨거웠다. 그리고 약간 술내를 섞은 강한 장년 사나이의 냄새가 선비의 얼굴에 컥 덮씌운다. 선비는 어쩔 줄을 몰라 부들부들 떨었다.
 
427
"노셔요!"
 
428
점점 다가쥐는 덕호의 손을 뿌리치며 선비는 으악 쓸어 나오는 울음을 억제하였다. 그리고 벌컥 일어나렸을 때, 누런 살이 투덕투덕 찐, 늙은 호박통 같은 덕호의 볼이 선비의 볼 위에 힘껏 부비쳤다.
 
429
"선비야! 너 내 말 들으면 공부 아니라 그 우엣것도 네가 하고 싶다는 것은 다 시켜 줄게! 응! 이년."
 
430
선비는 얼굴을 휙 돌렸다.
 
431
"아부지! 이것 노세요."
 
432
"허허허 허…… 아부지! 아부지! 이 귀여운 년아, 아부지라면 왜 그렇게 무서워하누, 응 이년 같으니……."
 
433
덕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진저리가 나도록 선비를 꽉 껴안았다. 선비는 덕호가 취했어도 너무 취한 듯하였다.
 
434
"아부지 취하셨에요."
 
435
"응 그래 이년, 나 취했다."
 
436
덕호는 씩씩하며 그의 입에 닥치는 대로 모조리 빨아 넘긴다. 선비는 덕호가 왜 이러는지? 아뜩하고 얼핏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다리팔을 함부로 놀렸다. 덕호는 생선과 같이 그렇게 매끄럽게 뛰노는 선비를 통째 훌떡 들이마셔도 비린내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씨아틀을 발길로 차서 밀어 놓고 선비를 안고 넘어졌다. 그리고 치마폭을 잡아당겼다.
 
437
"아부지, 아부지, 나 잘못했수! 잘못했수."
 
438
무의식간에 선비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흑흑 느껴 울었다. 그리고 덕호를 힘껏 밀었다.
 
439
"이년 가만히 안 있겠니? 나 하라는 대로 안 하면 이년 나가라! 당장 나가!"
 
440
덕호는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방금 죽일 듯이 위협을 한다. 전날에 믿고 또 의지했던 덕호! 그리고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같이 그의 장래를 돌보아 주리라고 생각했던 이 덕호가…… 불과 한 시간이 지나지 못해서 이렇게 무서운 덕호로 변할 줄이야 꿈밖에나 상상했으랴! 선비는 그 무서운 덕호를 보지 않으려고 머리를 돌리며 눈을 감아 버렸다.
 
 

17. 57

 
442
밤늦게 돌아온 신철이는 대문을 가만히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방문 앞까지 왔을 때 소곤소곤하는 소리에 그는 멈칫 서서 들었다.
 
443
"……저야 뭐…… 신철 씨가 요새 애인이 있는 모양이어요."
 
444
옥점의 음성이다.
 
445
"아이 그애가 애인이 뭐유."
 
446
그의 의모의 변명하는 소리다. 그는 으흠 하는 아버지의 기침소리에 안방을 흘금 바라보고 나서 구두를 벗고 방문을 열었다. 그들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순간 신철이는 옥점이가 그의 의모와 흡사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였다.
 
447
"아니, 왜 그리 신발 소리가 없이 다니냐?"
 
448
신철이는 빙긋이 웃으며 옥점이를 보았다. 그리고 외투를 벽 위에 걸었다.
 
449
"오셨수……."
 
450
"어데를 그렇게 다니세요? 아마……."
 
451
중도에 말을 끊으며 옥점이는 생긋 웃었다. 그의 의모도 따라 웃었다.
 
452
"옥점이는 초저녁에 와서 입때 너를 기다렸다."
 
453
"아 그랬수. 실례했소이다."
 
454
신철이는 선뜻한 방에 주저앉았다.
 
455
"방두 어지간히 차다."
 
456
그의 의모가 밀어 놓는 방석을 그는 깔고 앉았다. 그의 의모는 해말쑥한 얼굴에 동그란 눈을 대굴대굴 굴리며 신철이와 옥점이를 번갈아 본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덧니가 입술 새로 뾰죽 내밀었다. 옥점이는 신철의 빨개진 코끝을 보았다.
 
457
"저 집에서 편지 왔는데요."
 
458
"편지……."
 
459
신철이는 얼핏 선비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선비를 올려보내겠다고 편지를 하였나? 하는 호기심이 당기었다.
 
460
"아버지 안녕하시다고 하셨수?"
 
461
"네…… 그런데 저 선비는 말이우, 오는 봄에 보내겠다구 했구려."
 
462
신철이는 다소 섭섭함을 느끼면서,
 
463
"좋지요. 더구나 그때 가야 입학하기도 좋지요."
 
464
그의 의모는 일어난다.
 
465
"난 이전 돌아가우. 놀다가 가시우에."
 
466
옥점이는 냉큼 일어났다.
 
467
"안녕히 들어가세요."
 
468
그의 의모가 뜰 밖을 나갔을 때 옥점이는 한숨을 호 쉬었다. 그리고 멍하니 전등불을 바라보았다. 멀리 택시 소리가 우르르 난다. 그리고 뿡뿡 하는 경적 소리가 가는 철사의 울림과 같이 귓가를 스친다.
 
469
"요새 어델 그리 다니세요? 아마 애인이 있지요."
 
470
신철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신철이는 양복 바지 갈래를 툭툭 털며 입으로 후 불었다.
 
471
"글쎄요…… 제게 말입니까?"
 
472
"아이, 남의 말은 듣지 않고 딴생각만 하신다니…… 누굴 생각허세요?"
 
473
"내가요? 누굴 생각할까?"
 
474
머리를 돌려 생각해 보는 모양을 보였다.
 
475
"참 죽겠네…… 어째서 내 말은 말 같지 않아요? 왜 그러세요, 밤낮……."
 
476
유리알같이 빛나는 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신철이를 보려고 밤마다 이 집 주위를 돌아서 가던 생각이 얼핏 떠오르며, 저렇게 성의 없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가 그랬나 하는 후회가 일어난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477
"난 가겠어요!"
 
478
"가겠어요?"
 
479
신철이는 일어나는 옥점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480
"혼자 가시겠수?"
 
481
"가지, 못 갈 게 뭐야요!"
 
482
장갑을 끼며 목도리를 하였다. 그리고 목도리에 입김이 닿아 후끈하고 그의 볼을 적실 때 그는 울음이 북받치는 것을 깨달았다.
 
483
"자, 좀더 앉아 계시다가 가시유. 그러면 내가 집까지 바래다 올리지유."
 
484
그는 옥점이가 일어나니 방 안이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485
"정말?"
 
486
바래다 주겠다는 말에 그의 가슴에 엉기었던 어떤 뭉치가 절반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487
"참말이지유."
 
488
옥점이는 잠깐 무슨 생각을 하더니,
 
489
"선생님이 날 보고 나무라시겠어요."
 
490
하며 흘금 문 편을 바라보다가 다시 신철이를 보았다.
 
491
"우리집 가요. 그러면 내 뭘 사다 줄게."
 
492
머리를 갸웃하고 어린애같이 조른다.
 
493
신철이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외투를 입으며 밖으로 나왔다.
 
 

18. 58

 
495
문밖을 나선 그들은 가지런히 걸었다. 거리에는 버스도 택시도 보이지 않고 오직 골목을 지키고 섰는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빛날 뿐이다. 그들은 긴 그림자를 땅 위에 던지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겨울날 산뜻한 바람이 그들의 옷가를 싸늘하게 스친다. 한참이나 말없이 걷던 옥점이는 가로등을 흘금 쳐다보았다.
 
496
"내 이 길로 몇 번이나 다녔는지 몰라요…… 나 혼자……."
 
497
이렇게 중얼거리며 희미하게 올려다보이는 박석고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호 쉬었다. 신철이는,
 
498
"저…… 선비가 몇 살이오?"
 
499
"열여덟 살인지? 그것 왜 물으세요?"
 
500
"글쎄 알 일이 있어서……."
 
501
"알 일이 무슨 알 일이어요?"
 
502
옥점이는 신철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신철이가 선비를 잊지 못함에서 저런 말을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불시에 든다.
 
503
"아니 글쎄 그것 왜 물으세요?"
 
504
"그거요, 이제 봄에 온다면…… 학교에 입학시키려면 나이를 알아야 하지요."
 
505
신철이는 이렇게 돌라대었다.
 
506
"아이…… 참…… 나는…… 왜 호호……."
 
507
옥점이는 웃었다. 신철이도 따라 웃었다.
 
508
"나이가 많아서 소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겠구, 학원 같은 곳에다 입학시켜야겠구먼요."
 
509
"그렇게 되겠지요…… 웬걸 공부야 제대로 하게 되겠수. 그저 신철 씨 말씀대로 올라와서 내 시중이나 좀 들어 주다가 서울 구경이나 하고 그러고는 여기서 참한 곳이 있으면 시집이나 주지…… 그나마 촌구석에서는 그 인물이 아까우니."
 
510
옥점이는 눈앞에 선비를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런 시골 구석에 묻어 두기가 아까운 외모만은 가진 것이라…… 다시금 생각되었다.
 
511
"저 그때 말씀한 사촌동생이라는 이가 참말 시굴 처녀를 얻겠다나요?"
 
512
"네! 그애는 저 역시 공부한 것이 변변치 못하니까…… 배우자도 아주 시굴뜨기를 얻겠답니다."
 
513
"그렇지요, 뭐. 상대가 짝이 기울면 길래 살게 되나요. 어찌나 그애를 올려다가 학원에나 몇 달 보내어 국문이나 배운 후에 그이를 주게 하지요."
 
514
"네 글쎄…… 그것은 추후 문제구…… 하여간 서루 만나 봐야 알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맘에 서루 들면 되는 것이니까요, 허허."
 
515
"암! 그게야 그렇지요, 호호. 당자끼리 맘에 들어야 허지우."
 
516
옥점이는 이렇게 말하며 신철의 곁으로 바싹 다가서서 걸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도 빨리 성립이 되었으면…… 그만 오늘 밤에 내가 물어 볼까? 하고 생각하였다.
 
517
어느새 그들은 박석고개를 넘어섰다. 대학병원을 싸고 돈 컴컴한 수림 속으로 불어오는 약간 약내를 섞은 바람이 그들의 코끝을 흔들었다. 그리고 별 밑에 희미하게 보이는 창경원의 앙상한 나뭇가지며 그 주위를 싸고 구불구불 달아 내려온 담은 그나마 이조 오백년의 역사를 회상케 하였다.
 
518
"이거 보세요, 난 여기 혼자 다니기가 제일 싫어요."
 
519
"싫어요?…… 싫으면 다니지 마시죠."
 
520
"아이 참 죽겠네."
 
521
옥점이는 신철의 외투 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런 으슥한 곳에서는 손이라도 따뜻이 쥐어 주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신철이는 어찌 보면 감정을 가진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대체 이 사나이가 불구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새 벌써 옥점의 하숙까지 왔다. 신철이는 우뚝 섰다.
 
522
"자 들어가십시오, 여기가 댁이지요."
 
523
"같이 들어가요."
 
524
옥점이는 길을 막아 섰다. 신철이는 이 계집애가 단단히 몸이 단 모양인데…… 하며,
 
525
"밤이 오랬는데…… 가서 자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학교에도 가지요……."
 
526
"글쎄 잠깐만……."
 
527
옥점이는 신철에게 거의 매어달리다시피 하였다. 신철이는 계집이 달려드는 것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리 좋을 것은 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오늘 독서회에서 여자 교제에 관한 것을 토의하던 것이 얼핏 떠올랐다.
 
528
"자 내일 또 오지우."
 
529
"오기는 뭘 와요. 그짓말만 하시면서…… 들어가세요."
 
530
옥점이는 신철의 손을 잡아끌었다. 신철이는 들어갈까? 말까…… 주저하였다.
 
 

19. 59

 
532
망설이던 신철이는 자기도 모르게 대문 안에 들어섰다. 그때 신철이는 과오만 범하지 않았으면…… 된다! 하는 결심을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책들이 되는 대로 쌓여 있으며 방바닥에는 사과껍질이 벌여 있었다. 그리고 이불도 둥글둥글 말아 구석에 밀어 둔 것을 보아 누웠다가 그의 집에 왔던 것 같았다. 옥점이는 돌아가며 사과껍질을 모아 놓으며 방석을 찾아 밀어 놓았다.
 
533
"뒤숭숭허지요…… 호호."
 
534
이렇게 신철이가 올 줄 알았더라면 깨끗이 소제를 해둘 것을…… 하는 후회가 일며 동시에 신철이가 자기를 게으른 여자라고 볼 것이 곧 두려웠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이런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았다.
 
535
신철이는 방석을 깔고 앉으며 돌아가며 치우는 옥점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전등갓에 뿌옇게 들어앉은 먼지며 되는 대로 벌여 있는 화장품들이며 구석구석에 밀어 놓은 양말을 보았다.
 
536
"편지 보시겠어요."
 
537
옥점이는 이 모든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신철의 눈을 돌리기 위하여 책상 위 편지함에서 푸른 봉투를 꺼내 그를 주었다. 신철이는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내 거듭 읽은 후에 도로 돌렸다. 옥점이는 벌써 그의 앞에 마주앉아서 배를 깎는다. 첫눈에 그 배 한 개에 사오 전은 주었으리라고 직각되었다. 옥점의 뾰족한 손끝이 깎인 배에 발가우리하게 보였다. 그때 그는 문득 바자 밖으로 넘어오던 그 미운 손! 그리고 호박을 든 그 손이 얼핏 떠오른다. 그게 누구의 손일까? 다시 한번 그는 생각하였다. 옥점이는 배를 쪼개 그 중 한쪽을 칼끝에 찍어 주었다. 신철이는 받아 들었다. 옥점이는 책상 서랍에서 초콜릿곽을 내놓았다.
 
538
"이것도 벗기셔요…… 뭐? 잡수시고 싶어요…… 주인 깨워서 사오게 할 테니?"
 
539
갸웃하여 들여다보는 옥점의 눈은 정이 뚝뚝 듣는 듯하였다.
 
540
"아 이게면 좋지유, 여기서 더 좋을 것이 어데 있어요."
 
541
"그래두…… 뜨뜻한 것으로 뭘 좀……."
 
542
"그만두셔요. 저는 이것이면 만족합니다."
 
543
"숯불이라도 피워 오랄까요, 방이 춥지?"
 
544
"괜찮아유, 좋습니다."
 
545
신철이는 배를 먹고 나서, 이번에는 초콜릿을 벗기었다. 옥점이는 어석어석 배를 씹으며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546
"집의 어머님 퍽두 좋은 어룬야요."
 
547
"예…… 그렇습니다."
 
548
옥점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생끗 웃는다.
 
549
"신철 씨 어데 애인 있지요?"
 
550
"글쎄요."
 
551
"어머니가 있다고 그러시던데요."
 
552
"어머니가? 글쎄 모르겠습니다."
 
553
옥점이는 호호 웃으며,
 
554
"신철 씨는 왜 늘 저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555
"옥점 씨를 싫어한다…… 그 못 알아들을 말씀인데요…… 허허."
 
556
신철이는 웃음이 나왔다. 옥점이가 자기의 맘을 알아보려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리고 공연히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어서 가서 푹 잠을 자야겠다…… 하였다. 신철이는 수건을 내어 입을 씻으며 일어났다.
 
557
"잘 먹고 가겠습니다."
 
558
"아이 왜 일어나세요."
 
559
옥점이는 놀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외투 자락을 힘껏 잡고 늘어진다. 오늘은 좌우간 끝을 내리라고 결심하는 빛을 신철이도 짐작하였다.
 
560
"내일 또 와요. 가서 자야 내일 학교에 가겠습니다."
 
561
"조금만 더…… 삼십 분…… 아니 이십 분만."
 
562
"글쎄, 내일 또 온다니까요."
 
563
"싫어요, 내일은 내일이구요."
 
564
신철이는 난처하여 조금 망설였다. 옥점이는 외투 자락을 잡고 일어나며 신철이를 아랫목으로 밀었다.
 
565
"오늘 못 가요!"
 
566
옥점의 숨결은 색색하였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졌다. 신철이는 이것이 우스워서 픽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제는 대담하게 달려붙기 시작하누나…… 하고 생각하였다.
 
567
"왜 웃어요? 흥! 내가 우습지요. 다 알아요! 왜 나를 놀립니까?"
 
568
시골집에서 그의 허리를 힘껏 껴안아 주던 때를 회상하며 옥점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신철이는 멍하니 옥점이를 바라보았다.
 
 

20. 60

 
570
며칠 후에 신철이가 학교로부터 집에 돌아왔을 때 저녁상을 받은 그의 아버지는 얼굴에 희색을 띠며,
 
571
"요새도 도서실에서 그렇게 늦게 돌아오냐?"
 
572
전부터 신철에게 고문 시험 준비를 하라고 말하였으므로 신철이가 시험 준비를 열심으로 하거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신철이는 그의 동생인 영철이를 안으며,
 
573
"네."
 
574
"나 미루꾸 주."
 
575
영철이가 그의 턱밑에서 말끄러미 쳐다본다. 신철이는 포켓을 뒤져 보았다.
 
576
"오늘은 잊고 못 사왔구나. 내일 사다 줄게…… 응."
 
577
"또 형두 거짓말하나? 아까아까 사온다구 했지."
 
578
"아이 저애는 하루 종일 그것만 외구 앉았어…… 내 원……."
 
579
그의 어머니는 귀여운 듯이 영철이를 바라본다. 신철이는 영철이를 들여다보았다.
 
580
"내일은 꼭 사다 주마 응……."
 
581
영철이는 그의 까만 눈을 똑바로 떴다. 그때 어멈이 들고 들어오는 화로를 신철의 의모는 받아서 신철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신철이는 양볼 위에 솜털이 까칠하게 일어났다.
 
582
"이애 밥 마자 먹어……."
 
583
영철이는 그의 어머니 곁으로 와서 안긴다. 그의 아버지는 손을 내밀었다.
 
584
"영철아, 이리 와."
 
585
"그만두…… 어서 이 국에 밥 멕이게……."
 
586
그의 어머니는 영철이를 굽어보았다. 그리고 새물새물 웃어 보인다, 그의 뾰족한 덧니를 내놓고. 신철이는 아버지가 술을 들지 않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만 밥상 곁으로 다가앉았다. 강한 양념내가 훅 끼친다.
 
587
"어서 미루꾸 사다 줘야지……."
 
588
영철이가 볼이 퉁퉁 부어서 신철이를 바라보았다.
 
589
"그래 오늘은 잊었지만 내일은 꼭 사와, 응. 어서 밥 머……."
 
590
"아이 넌 밤낮 미루꾸냐? 어서 밥 먹어. 호호 참 내……."
 
591
그들은 영철의 부은 볼을 바라보며 웃었다. 신철이가 밥을 다 먹고 일어섰다.
 
592
"이애 거기 좀 앉았거라."
 
593
아버지는 숭늉을 마시며 이렇게 말하였다. 신철이는 무슨 말을 하려누? 하는 생각을 하며 그의 의모의 얼굴부터 살펴보았다. 의모도 신철이를 바라보며 웃음을 띠었다. 그의 아버지는 밥상을 물리며,
 
594
"너 이전 장가도 가야지……."
 
595
신철이를 똑바로 쳐다본다. 신철이는 가슴이 선뜻하며 가벼운 부끄러움이 눈가를 사르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머리를 푹 숙였다.
 
596
"이전 네 나이 스물다섯…… 또 며칠이 안 가서 학업도 마칠 터이니…… 그만하면 장가도 가야 허지…… 혹시 네 맘에 드는 여자가 있느냐?"
 
597
신철이는 어디서 혼인 자처가 있어났는가? 하였다.
 
598
"아직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599
그 순간 신철의 머리에는 국사발을 든 선비의 모양이 휙 떠오른다. 따라서 용연 동네가 시재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600
그의 아버지는 얼굴에 만족한 빛을 띠었다. 그리고 전날 아내에게서 들었던 말이 얼핏 생각힌다. "옥점이가 우리 신철에게 짝사랑을 하나 봐! 호호." 그때 그는 자기 아들이 공부에만 열중한다는 것을 가슴이 뜨거워지도록 느꼈던 것이다.
 
601
"그럼……."
 
602
그의 아버지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603
"여기 늘 오는 옥점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604
그 순간 신철이는 전날 밤에 악을 쓰고 매어달리는 옥점이를 사정없이 물리치고 나오던 때를 다시금 되풀이하며 양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그의 아버지는 궐련을 피워 물었다.
 
605
"뭐, 그애가 외딸로 자라서 좀 와가마마 갓데 (제멋대로 굴다)한 곳이 있니라……마는 내 보기에는 그애의 인간됨인즉은 괜찮다고 보았다, 어떠냐?"
 
606
신철이는 아버지가 이렇게 옥점이를 변호하는 이면을, 곁에 놓인 화로의 불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때까지 결백하게 믿었던 아버지에 대한 신념이 화롯가에 수북이 쌓인 시커먼 숯덩이와 같이 변해 감을, 그는 슬픈 듯이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는 이 자리에 더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607
"아버지…… 아직 저는 장가가고 싶지 않습니다."
【원문】(41회 ~ 6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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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애(姜敬愛) [저자]
 
  1934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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