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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6
현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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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1

 
3
벌써 사흘째다.
 
4
무슨 일로 결석을 하는지 이웃에 사는 녀석들과 물어도 모른다고 하며 집도 어느 모퉁인지 딱히 안다는 녀석이 없다.
 
5
시골 농촌과 달라 한반에 다니는 동무라도 피차 서로 주소를 모르고 지내는 것쯤은 보통사라 하겠지만 그러나 인규에게 한해서만은 그럴 리 없을 것 같다.
 
6
공부를 잘하고 동무 사이에 쌈 한 번 하는 일 없고 운동도 잘하고 게다가 급장까지가 아닌가?
 
7
누구든지 그에게 대해서만은 악의를 가지는 일 없고 서로 다투어가며 친하게 지내려 애쓰는 반 내의 인기자(人氣者)인데 어째서 그의 주소를 모를까
 
8
근방에서 사는 줄은 알지만 어느 모퉁이가 그의 골목이며 어떤 집이 그의 거주하는 집인지는 통히 모른다니 그러면 이때까지 그가 반 내의 인기자였다는것은 전부가 자기의 잘못된 추측이었던가
 
9
만약 그것이 자기의 잘못된 추측이었다면 그러면 사흘 동안의 그의 결석에서 반 내 동무들이 모두가 섭섭해 하며 자꾸 외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10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확한 단정은 얻을 수가 없다.
 
11
영식은 다시 한번 빽하니 들어찬 중대가리들의 얼굴들을 둘러본 다음 창밖을 내다보며 속으로 오늘은 방과 후 백사불고하고 인규의 가정 방문 할 것을 궁리했다.
 
12
그러는데 하학 종소리가 울려온다.
 
13
바로 마지막 시간인지라 중대가리들은 영식의 명령이 내리기가 바쁘게 도구들을 책보에다 걷어 싸며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한다.
 
14
방 내에는 이내 보오야니 먼지가 일기 시작한다.
 
15
옆방에서는 벌써 ‘기립’ ‘예’ 소리의 뒤를 이어 책상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인다.
 
16
한시 바삐 뿔뿔이 흩어져가려고 초조해 하는 녀석들을 교정에 정돈시켜놓고 매일 되풀이하는 내일의 주의를 형식대로 판에 박은 듯이 일러준 다음 해산을 시키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무의식중에 긴 한숨이 흘러 나오며 늘어진 기지개가 켜진다. 시계를 쳐다보니 10 분 전 4 시다.
 
17
제각기 서로 떠들며 몰려드는 동료들의 얼굴에도 피곤한 빛깔이 역력히 들어나 보인다.
 
18
영식은 잠시 그 모양들을 바라보다가 자기의 자리에 가서 학적부를 펼쳐 들고 인규의 주소를 조사했다.
 
19
번지까지 정확하게 적혀 있다.
 
20
수첩을 꺼내 적은 다음 그는 곧 교장에게 가서 사유를 말한 다음 총총히 책보를 싸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21
바로 방과한 뒤라 골목은 아이들의 물결로 터질 지경이다.
 
22
처처에서 번갈아 하는 인사 소리들을 대강 귓등으로 받아 흘리며 큰 거리에 나서니 비로소 우리에서 풀려난 듯 가슴속이 후련해진다.
 
23
그는 걸음거리도 가볍게 도로 위를 한참 가다가 다시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어 수첩에 적어논 ××구 인규의 주소를 찾기 시작했다.
 
24
지저분한 골목이다.
 
25
가끔 만주인 마차가 덜칵거리며 지날 뿐 꽤 한적한 음침한 골목이다.
 
26
수첩에는 번지가 적혀 있지만 집집마다 문패는 바로 달려 있질 않다.
 
27
언제나 아동들의 가정 방문 때면 반드시 느끼는 것이지만 만주는 문패가 바로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처음 방문할 때는 매우 곤란하다.
 
28
하는 수 없이 물어갈 수밖에.
 
29
그러나 몇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야 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30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서자니 그쪽은 전부가 술집 판인지라 그런 골목일 것 같지는 않고 도로 서서 망설이는데 마침 우편 배달부가 지나간다.
 
31
다짜고짜로 지나가려는 것을 붙잡고 수첩을 들이대니 이상하게도 배달부는 영식의 아래위를 수상스레 훑어보다가
 
32
“저 건너편 막다른 골목에 뵈는 저 집인데 영춘옥이라고 간판이 붙은 저 집에 가 보시오.”
 
33
하고 퉁명스레 볼멘 소리로 가르쳐준 후 제 갈 길을 가고 만다.
 
34
영식은 제 귀를 의심하며 한동안이나 선 자리에서 배달부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해본댔자 영춘옥이란 그 말은 두 귀에 또렷하니 남아 있지 않은가?
 
 

2. 2

 
36
몇 번을 주저거리며 망설이다가 결국 큰맘을 먹고 문 앞에 다가섰으나 또 다시 문제되는 건 주인을 찾을 그것이다.
 
37
술집에 와서 주인님 계십니까 하기도 쑥스럽고, 그렇다고 색시를 부를 수도 없고 저 혼자 애꿎은 , 얼굴만 붉히는데 힐끗 내다본 색시 하나가 술손님인 줄 알고 화닥닥 뛰어나오며 반긴다.
 
38
“어서 오십시오.”
 
39
영식은 당황하여 얼굴을 바로 못 쳐드는데
 
40
“얘 안방 좀 치워라. 손님 오셨다.”
 
41
하고 색시는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42
“어서 들오시오.”
 
43
“네…… 저…….”
 
44
숫색시 모양으로 얼굴이 빨개지며 어룸거리는 영식의 그 모양에 색시는 쑥인 줄 알았는지 방싯 웃어놓으며 다짜고짜로 손목을 끌어당긴다. 영식은 등뒤에서 수다한 행인의 눈들이 쏘아보는 것 같아 더 한층 얼굴을 붉히며 넋없이 방안에 들어섰다.
 
45
“아이 손님두, 얼굴을 다 붉히구.”
 
46
색시는 제법 목에라도 매달릴 듯이 바짝 코앞에 다가서며 책보를 받으려 한다.
 
47
“이리 주시오.”
 
48
“아닙니다. 난 술 먹으로 온 사람이 아니라.”
 
49
“술 안 잡수시면 뭣하러 술집에 오셨어요. 색시만 보러 오셨군. 이왕이면 뽕두 딸 겸 님두 볼 겸이라는데 색시두 보시구 술두 잡수셔야지요. 천만에 말씀 그만허시구. 술은 무슨 술을 가져올까요. 언니 안방 얼른 좀 치워줘요.”
 
50
수다스레 떠들어대는 색시의 모양에 영식은 덤덤히 서서 어쩔 바를 모르다가 겨우 옆으로 비켜서며
 
51
“여보시우. 난 술 먹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이 집에 볼일이 좀 있어서 왔는데요.”
 
52
하고 애걸하듯이 말했다.
 
53
색시는 그제야 웃음을 슬쩍 거두며 의아스레 쳐다본다.
 
54
“무슨 일인데요.”
 
55
“저 이 집에 오학년에 댕기는 인규라는 생도가 있어요?”
 
56
“네? 학생이오?”
 
57
“네 그렇습니다. 난 그 애의 반 담임인데요.”
 
58
색시는 한동안이나 영식의 아래위를 살피다가 무색한 듯이 슬그머니 물러서며
 
59
“언니 학교 선생님이 오셨어요.”
 
60
하고는 훌쩍 다음 칸으로 나가버린다.
 
61
뒤이어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들어서는 여자는 나간 여자보다도 서너 살 위인 듯 나티가 나 보인다.
 
62
그러나 활짝 핀 모란꽃과도 같이 시원스럽고도 탐스러운 얼굴이다.
 
63
영식은 얼굴이 화끈 달아가며 가슴속이 두근거려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64
여자는 조심스레 나직한 목소리로
 
65
“학교 선생님이십니까?”
 
66
하고 치마꼬리를 여미며 날씬한 허리를 살짝 굽힌다.
 
67
“네 인규의 담임인데, 요즘 인규가 사흘째나 결석하길래 무슨 까닭인지 알아보러 왔어요.”
 
68
“미안합니다.”
 
69
하고 여자는 나직히 한숨을 짓는다.
 
70
“어디 무슨 병에나 걸리지 않았는지요.”
 
71
여자는 다시 한번 나직히 한숨 지은 후 조용히 고개를 쳐들며
 
72
“네 앓지는 않아요.”
 
73
하고는 이내 눈물이 글썽하여 외면한다.
 
74
“아니 그런데 어째서 학교에 안 옵니까. 지금 있습니까?”
 
75
“없어요.”
 
76
“없다니요? 어디 갔어요?”
 
77
“네 갔어요.”
 
78
“어디루 갔어요?”
 
79
여자는 아무말도 없이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비로소 깨달은 듯
 
80
“좀 앉으시죠”
 
81
하고 다음 방으로 넘어가더니 방석을 가지고 들어와 권한다.
 
82
“괜찮아요.”
 
83
영식은 금시 뛰어나갈 상으로 문 앞에서 주춤거린다.
 
84
“잠깐만 앉으세요. 일부러 오셨는데 자세한 말씀 드리지요.”
 
85
하고 간곡히 권하는 바람에 영식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86
그러나 밖에서 누가 엿보는 것 같아 심중은 불안하기 짝 없다.
 
87
여자는 영식의 맞은 편에 사뿟 모로 비켜 앉으며
 
88
“이렇게 일부러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진작 벌써 알려드려야 할 걸.”
 
89
“천만에 말씀입니다. 사실은 첫날 찾아온다는 것이.”
 
90
하고 말끝도 맺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데 처음 들어왔을 때 수다를 떨어놓던 색시가 술상을 들고 들어와 영식의 앞에 놓고 나간다.
 
91
영식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뒤로 물러앉았다.
 
92
“노여 마시구 약주 좀 드시며 말씀 들으세요.”
 
93
“아니 전 술은 못 먹는데요.”
 
94
“그럼 비루 가져올까요?”
 
95
“아닙니다. 그것두 못 먹어요.”
 
96
“선생님 너무 그러시지 마시구. 천천히 약주 드시며 제 사정을 좀 들어주세요. 자, 한잔 드세요.”
 
97
하고 여자는 익숙한 솜씨로 술병을 들어 따른다.
 
 

3. 3

 
99
하도 설은 사정이길래 못 먹는 재간에 권하는 대로 잔을 기울인 것이 어찌나 취했던지 눈을 떴을 때엔 밤도 초저녁은 훨씬 지난 때였다.
 
100
골속이 띵하고 입 안이 바짝 말라서 한동안은 기동할 수가 없었다.
 
101
방은 확실히 자기의 방인데 어떻게 찾아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102
누운 자리에서 두 눈만 멀뚱거리며 술 먹던 일을 생각하는데 미닫이 소리가 나며 주인 아주머니가 얼굴을 들여 보낸다.
 
103
“깨셨어요?”
 
104
“물 좀 주시오.”
 
105
영식은 겨우 고개를 쳐들고 일어났다. 눈앞이 핑 돌아가는 것 같다.
 
106
주인 아주머니는 이내 냉수를 떠가지고 들어와서
 
107
“아니 어디서 그렇게 취하셨어요. 한 잔두 못 하시던 어른이.”
 
108
하고 빙긋이 웃는다.
 
109
“몹시 취했습디까?”
 
110
“몹시 취하시다니 선생님 취하신 걸 첨 봐서 그런지. 그렇게 취하시구두 집을 찾아오신 것이 용치요.”
 
111
영식은 냉수 한 그릇을 다 들이켜고나서
 
112
“도무지 찾아온 기억이 안 나요.”
 
113
“날 리가 있나요? 그렇게 취하시구야, 진지 가져오리까.”
 
114
“저녁을 안 먹었던가요?”
 
115
“저녁이 다 뭡니까? 문턱을 요행 넘어섰는데요.”
 
116
영식은 어색하게 웃었다.
 
117
주인 아주머니는 밥상 차리러 부엌으로 나갔다.
 
118
영식은 골머리가 지끈거려 다시 드러누웠다가 책보를 깜짝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 우선 책상 위부터 살핀 후 방 내를 둘러보았으나 통히 보이지 않는다.
 
119
“아주머니, 나 올 때 뭐 가진 것 없습디까?”
 
120
“없던데요.”
 
121
“뭐 책보 같은 것이 없습디까?”
 
122
“아유. 책보가 다 뭐예요. 아주 녹초가 돼 왔던데.”
 
123
영식은 하는 수 없이 도로 누워버렸다.
 
124
별로 아까울 것은 없지만 책자들과 교수안들이 들어 있고 더구나 교수안에는 자기의 이름까지 적혀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찾으면 학교로 보내주겠지만 그러나 술에 취해서 잃었다는 것은 아무리 호의로 해석한대도 불미로운 일이다.
 
125
혹시 술집에다 그냥 팽개치고 왔다면 별 문제지만, 그러나 그럴 리는 도저히 없을 것 같다.
 
126
주인 아주머니가 밥상을 보아가지고 들어왔다.
 
127
“아니 책보를 어떻게 하셨길래.”
 
128
“글쎄요. 아마두 길에서 잃은 것 같습니다.”
 
129
“아이 선생님 큰일나셨네. 책보를 다 잃어버리시구.”
 
130
주인 아주머니는 놀려대며 빙글거린다.
 
131
영식은 하는 수 없이 웃어버렸다.
 
132
그 이튿날 아침이다.
 
133
아직도 선명치 못한 머리를 억지로 쳐들고 깁떠 일어난 영식은 세수도 겨우 하고 대강 입맛 없는 밥상을 물린 다음 문 앞에 나서려는데 마침 행길 쪽에서 이쪽을 향해 가까이 오며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여자가 있다.
 
134
영식은 대번에 어저께 인규를 찾아갔다가 만난 그 여자인 줄 알고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었다.
 
135
그리고 한쪽 옆에 낀 것을 보니 틀림 없는 자기의 책보다.
 
136
“어젯저녁에 너무 취하신 듯해서 맡아뒀던 건데요.”
 
137
하고 여자는 먼저 변명하듯 말하고나서야
 
138
“괜히 약주를 많이 권해드려 죄송합니다.”
 
139
하고 인사를 한다.
 
140
“천만예요. 너무 실례해서 대할 낯이 없습니다.”
 
141
영식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진정으로 부끄러워했다.
 
142
“아니예요. 지가 되려 실례했어요.”
 
143
여자의 얼굴도 이상하게 붉어진다.
 
144
둘은 잠시 말없이 서서 어쩔 줄을 몰라 망설이다가 여자 편에서 먼저
 
145
“그럼 시간이 바쁘실 텐데, 전 실례하겠습니다.”
 
146
하고 사뿟 허리를 굽힌다.
 
147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 댕겨가십시오.”
 
148
하고 여자의 뒤에 따라 나서는데 부엌 문을 열고 주인 아주머니가 씽긋 뜻 있는 듯한 웃음을 웃어 보인다.
 
149
영식은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4. 4

 
151
진종일 흐리터분한 기분으로 어지럽게 지낸 후, 시간이 끝나자 영식은 이내 하숙으로 돌아왔다.
 
152
주인 아주머니가 연방 놀려주는 것도 구미에 당기지 않아 그는 도구를 갖추어 들고 목욕탕으로 갔다.
 
153
뜨거운 물 속에 몸을 잠그니 비로소 전신이 풀리는 것 같고 동시에 두 눈이 조용히 감겨진다.
 
154
곁에서 철렁거리는 물소리가 어쩐지 먼 곳에서 철렁거리는 애들의 물장구 소리로 정겨웁게 들려오며 고향 시절의 어렸을 때가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155
복동이, 수동이, 남길이…….
 
156
모두들 장난꾸러기 동무들이며, 쌈도 잘 한 그리운 녀석들이다.
 
157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는지
 
158
모두들 어른들이 되어 장가들고 아버지까지 되었을 테지.
 
159
그리고 배나뭇집 금순이는 어디로 시집갔을까
 
160
멸구알같이 까만 눈으로 할끔 쳐다볼 땐 어째서 그다지도 부끄러웠는지
 
161
그 밖에도 옥매며 문옥이며 계월이, 마을 처녀들은 모두들 탐스럽게도 생겼더니만, 지금은 뉘집 안해며 며느리며 어머니들이 되어버렸는지.
 
162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
 
163
고향을 떠난 지 근 10 년이나 되는 동안 이렇게끔 간절하게 생각나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164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장덕령 꼭대기에서 동사를 하고 이듬해 봄 바람쟁이 어머니가 치도관 건달패와 도망하여버린 후 남몰래 고향을 떠나던 그때 일이 다시금 눈앞에 선하다.
 
165
그 후 서울 있는 외숙 신세에 사범학교를 마치고 특별 파견으로 이런 외지 학교에 와서 교편을 잡은 지도 벌써 수년이 경과했건만 그는 단 한 번 고향에 간 일도, 고향 생각을 한 일도 없었다.
 
166
그렇던 것이 오늘 이 목욕탕에서 뜻하지 않게 고향을 애틋이 그리게 됨은 무슨 까닭일까?
 
167
목욕탕은 소란하다.
 
168
그러나 두 눈을 꼭 감은 영식의 머릿속은 말할 수도 없이 조용하다.
 
169
그 조용한 머릿속에 이번에는 그 여자의 자태가, 책보를 가져다주던 인규의 누이, 그 술집 여자의 활짝 핀 모란꽃 같은 용모가 사뭇 떠오른다.
 
170
그리고 그가 눈물을 흘려가며 들려주던 인규와 그의 기구한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슬프게 가슴속에 되살아난다.
 
171
고향은 생각하기도 아득한 충청도 어느 조그마한 도시.
 
172
두 남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다.
 
173
누이는 수양모의 손에서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바야흐로 꽃필 무렵이 되자 화류항에 나서게 되고 어린 동생은 그도 남의 손에서 전전유리하며 고달픈 날마다를 보내게 되었다.
 
174
그러다가 누이는 결국 본의에 없는 방랑을 이 만주 땅에까지 계속하여왔고 어린 동생은 곡마단에 유인되어 오늘은 동으로 내일은 서로 표랑하다가 우연한 기회로 타향에서 그립던 남매가 서로 상봉하여 비로소 맑은 날을 바라게 되었다.
 
175
그러나 그도 만난 처음이었지, 동생은 누이의 천업을 달가워하지를 않고 항상 우울하게 지냈다.
 
176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이 행복스러웠다.
 
177
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어두운 뒷골목은 그의 좁은 가슴속을 괴롭혔다.
 
178
언제 한번 동무들을 버젓이 데리고 자기의 집에 찾아 들지를 못하고 그늘로만 헤매었다.
 
179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누이는 온갖 애를 다 태우며 위로했으나 그러나 어린 것의 마음은 조금도 가시어지지를 않았다. 누이는 생각다 못해 담임 선생이나 찾아보고 호소하려고 몇 번이나 두고 별러오다가 결국은 동생을 잃고 말았다.
 
180
동생은 출타한 지 이틀만에 누이에게로 간단한 엽서를 보냈다.
 
181
그저 뜻한 바가 있어 목단강 방면으로 간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손으로 성공하여 보겠다는 것, 누이의 일은 언제든지 잊지 않고 있겠다는 것 ── 이런 것이 간단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182
거나하게 취하여가는 머릿속에서 인규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 영식은 울며 하는 여자의 이야기에 몇 번이나 눈물지었는지 모른다.
 
183
그것은 그 여자의 이야기가 어쩐지 자기의 사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184
그러한 누이가 자기에게도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스러웠스랴
 
185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심정이다.
 
186
만약에 자기의 힘으로 할 수만 있다면 두 남매를 위해 무엇을 아낄까보냐 그러나 동생은 이미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187
“마음에 없는 웃음을 파는 것도 인젠 뜻없이 됐어요. 지나간 땐 남에게 매인 몸이라 할 수 없이 청춘을 팔아왔지만 인제부턴 진정으로 동생을 위해 이 몸을 바치려 했어요. 그렇던 것이 이렇게 되구 보니 선생님 전 이 몸을 이바지할 때가 없습니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지만 너무도 야속치 않아요?”
 
188
목욕탕 안은 더 한층 소란해진다.
 
189
바로 저녁 전이라 벌의 떼같이 몰려들었다간 밀려 나가고 밀려 나갔다간 몰려든다.
 
190
영식은 전등이 켜져서야 목욕탕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191
사지가 나릿하며 저녁 먹을 생각도 안 난다.
 
192
그러나 막상 상을 받고나니 식욕은 무럭 치민다.
 
193
밥 한 그릇을 오래간만에 다 먹고나서 마루에 나와 저녁 바람을 쏘이노라니 이상스레도 마음이 설렌다.
 
194
누구든지 찾아와서 밤이 새도록 이야기라도 들려주었으면 좋을 것 같다.
 
195
그는 부엌 쪽에서 설거지를 하느라고 딸깍거리는 주인 아주머니의 생각을 해본다. 그 늙은 아주머니라도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면 안타까운 심사가 풀릴 것 같다.
 
196
바로 그런 때에 일학년 담임 H 가 찾아왔다. 말할 수 없이 반갑다.
 
197
“이거 어쩌다가 왔는가?”
 
198
“저녁 먹구 산보나왔던 걸일세.”
 
199
H는 뚱뚱한 몸집을 의젓이 영식의 앞에 가까이 들이대면서 수건을 꺼내 이마에 땀을 씻는다.
 
200
“저녁 반주 바람인가?”
 
201
“응 한잔 했드니, 어찌두 밥맛이 나는지 한 그릇을 다 먹구나니 배가 불러 견딜 수가 있어야지.”
 
202
“아주머니께서 요새 평안하신가?”
 
203
“응 별탈 없이 바가지만 잘 긁네.”
 
204
“그냥 남봉을 부리는 모양이지.”
 
205
“안 부리문 어쩌는 수가 있나? 늙은 예편네를 둔 놈이라 그두 숙명이지.”
 
206
“교육자가 너무 그러면 못 쓴다네.”
 
207
“흥, 교육자? 여보게 객담 좀 그만두게. 교육자가 다 뭔가? 듣기 좋게 월급쟁이라지.”
 
208
언제보든지 쾌활한 H 의 그 모양에 영식은 다정스런 미소를 소리 없이 짓는다.
 
209
둘은 한동안 한담을 주고받다가 H 의 편에서 먼저 우쭐 일어서며
 
210
“어디 거리라두 한바퀴 돌아볼까?”
 
211
하고 영식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선다.
 
212
“글쎄.”
 
213
영식은 잠시 주저거리다가 아무 반대도 없이 H 의 뒤를 따라 나섰다.
 
 

5. 5

 
215
H의 뒤를 따라 거리에 나섰다가 까닭 모를 심사에 이끌려 다시금 그 영춘옥 인규의 누이를 찾은 뒤로부터 영식은 낮이나 밤이나 걷잡을 수 없는 술렁거리는 제 마음에 오뇌의 일과를 잇게 되었다.
 
216
상학 시간이 되어 아이들에게 교수하다가도 인규의 빈 자리만 보면 이내 어지러운 그림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리게 되고 더구나 밤이면 진기 반복으로 야릇한 충동과 싸우게 되는 것이었다.
 
217
생후 처음으로 사귀어본 이성이 되어서 그럴까
 
218
세상에서는 거리의 계집이니 창녀니 하며 천하게 여기고 멸시하여오는 그 여자가 영식에게 있어서는 세상에 다시 없는 신성하고도 아름다운 존재 ─다시 말하면 그에게는 태양의 존재와도 같았던 것이다.
 
219
그 눈치를 알고 H는 처음엔 놀려주다가 나중에는 진정으로 충고를 했다.
 
220
“여보게 자넨 아직 너무 쑥이 돼서 큰일이네.”
 
221
H의 이 말에 영식은 긴 한숨을 뽑고나서 탄식조로
 
222
“그야 내 자신인들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닐세. 자네 말마따나 나는 아무 것두 모르는 쑥일세. 쑥이기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무라는 천한 계집을 두구 이렇게 상심하구 있는 것이 아닌가?”
 
223
“여보게 낸들 군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닐세. 하지만 여보게,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것은 결국 내 몸을 전부 그 여자에게 바친다는 것이 아닌가?”
 
224
“그야 물론이겠지.”
 
225
“그렇다면 말일세. 자네가 그 여자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자네의 모든 것을 그 여자에게 바쳐야 하지 않는가?”
 
226
“그렇지. 모든 것을 바쳐야 하지.”
 
227
“그러기에 말이 아닌가? 자네가 모든 것을 그 여자에게 맡긴다지만, 그 여자는 결국 자네의 아무 것두 용납할 수 없는 여자가 아닌가”
 
228
“왜? 무슨 까닭으루?”
 
229
“묻지 말구 냉정하게 생각해보게. 사랑이란 것두 결국은 이기적 합리적인 것이지 절대 지상적이구 신성한 것은 아니니까.”
 
230
“아닐세. 그건 자네의 억설일세. 난 지상이니 신성이니 또는 그와 반대루 이기적이니 합리적이니 그런 것을 염두에 두구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세. 한 이성이 이성을 사랑한다는 것 ── 그것은 말로나 그 어떤 관념으론 절대 해석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두 결국은 인간 자신이 지어낸 말이지. 이러한 말부터가 벌써 해당치 않는 것일세. 그것은 우주의 본능이며 창의라구 난 생각하네.”
 
231
“허…… 이거 또 자네 신비론이 나오네그려.”
 
232
“아닐세 신비론두 아무 것두 아닐세. 그저 자연이라구 난 생각하네. 그렇잖은가? 내가 세상 사람들이 천대하고 멸시하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이것처럼 자연스럽고 순리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네.”
 
233
“어째서 그런가?”
 
234
“그것은 사회의 인습으로도 법칙으로도 막을 길이 없고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일세. 자연이란 사회의 인습이나 법칙으론 꺾을 것이 못되니까.”
 
235
“불가하네. 자네가 언제인가 들려주던 그 서양 시인의 시보담 더 난해할세.”
 
236
H는 어이없는 웃음을 웃으며 담배를 꺼내 붙여 문다.
 
237
사실 영식은 자기 자신으로도 난해라고 ── 아니 수수께끼와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238
자기가 그 여자를 사모하게 되는 거기에는 진정코 그 어떤 복잡스런 야망이라든지 또는 방종한 기분은 조금도 없다.
 
239
자기의 말마따나 거기에는 아무런 이기적이니 합리적이니 하는 그런 것은 털끝만큼도 없다.
 
240
그저 그리운 마음, 존경하는 마음, 동정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 조금도 거짓 없는 진정이었다.
 
241
그 여자의 앞에 있어서는 교육자란 것도 인습이란 것도 사회란 것도 모두 소용 없는 헛껍데기들이었다.
 
242
이러한 것을 알고 그 여자의 편에서도 영식에게 대한 마음이 날로 뜨거워 올랐다.
 
243
만은 그는 그와 동시에 영식이처럼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244
그는 자기가 그 어떤 처지에 놓여 있고 영식이와는 모든 것이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45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어떤 강한 인력으로 말미암아 점점 끌려짐을 그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6. 6

 
247
“선생님, 오늘밤뿐이에요. 내일부턴 오시면 안 돼요. 이렇게 만나는 것두 오늘밤이 마지막이에요.”
 
248
“그럼 춘옥인 내가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 성가시구 미운가요?”
 
249
“선생님.”
 
250
불러놓고는 한동안이나 안타까운 표정으로 원망스레 빤히 쳐다보다가 여자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어버린다.
 
251
“선생님은 귀하신 몸, 나는 천한 계집, 술 파는 더러운 몸입니다.”
 
252
목메어 느끼며 가까스로 외는 이 말에 영식은 그만 여자의 팔을 와락 끌어낚으며
 
253
“춘옥이 왜 그런 어리석은 소리만 하구 있소? 세상 사람이 다 더렇다구해두 내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존재가 당신이란 것을 어째서 몰라주오? 나는 당신 때문이라면 더없는 욕을 본대두 조금두 피하지 않을 테오. 난 세상에 난 후로 누구에게든지 사랑을 느껴본 일이 없구, 또 누구든지 사랑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오. 당신이 나를 뿌리친다면 난 역시 외롭게 쓸쓸하게 속절없이 지낼 사람이오. 춘옥이 나를…… 나를 불쌍타구 생각하거든…… 아아, 나는 춘옥이가 없으면 못살 사람이오. 이때까지 지내온 과거는 생각만 해두 암담하오.”
 
254
“그렇지만 선생님은 안 됩니다.”
 
255
“어째서…… 어째서 안 돼요.”
 
256
“안돼요. 난…… 난”
 
257
하며 몸부림치는 여자의 몸은 영식의 두 팔 안에 으스러져라고 힘껏 안겨진다.
 
258
밤은 벌써 3시도 지나서 거리는 고달픈 꿈속에 깊이 잠들었다.
 
259
이러한 일과가 날마다 계속됨을 따라 둘의 사이는 점점 끊지 못하게 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둘의 고민은 더욱 깊어갔다.
 
260
더구나 영식의 고민을 한층 더 하게 하여준 것은 직책상 문제였다.
 
261
그렇지 않아도 이때까지 몇 해를 내려오는 동안 그는 교육가와 자기의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회의를 품어왔고, 때로는 환멸을 느껴왔지만, 춘옥이와 관계를 맺은 뒤로부터는 완연 사상이 달라졌다. 모든 것이 모방이고 인습적이고 고정적이고, 창의가 없고 부자유한 고루한 비진실적인 것 같은 교육자들의 생활에 염증이 생기게 되었다. 그들의 생활에는 진실이란 것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262
수신 시간에 윤리를 논하고 도덕을 논하는 그들의 등뒤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그 얼마나 어지러운 것들인가
 
263
서로서로 아랫사람을 흘겨보고 웃사람에게 아첨하는 추잡물들이고 허위와 기만으로 충만한 속물들이었다.
 
264
그러한 것들과 몇 해를 내리 사귀어왔다는 것이 참말 신기스러웠다.
 
265
하루 속히 결별하여버리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데 가장 빠른 길일 것 같았다.
 
266
그러나 동시에 양심적으로 돌이켜 따져볼 때 자기는 일찍이 교단에 나설 때 그 천진난만한 어린 생명들을 위해 하늘에 태양은 못 될지언정 별쯤은 돼보리라고 맹서한 일이 있었다.
 
267
그리고 그 때문에 자기는 될 수 있는 한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의 훈육에 애써왔다.
 
268
그렇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한 계집으로 말미암아 그도 세상에서 가장 천한 계집이라고 나무라는 창녀 때문에 자기의 직분을 망각하여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269
계집을 따른다면 결국은 아이들을 버려야 한다.
 
270
그러면 자기는 이때까지 멸시하여온 그 속물들과 무엇이 다를까
 
271
더구나 아이들은 자기를 따르기를 부모나 형제보다도 더 따르어오는 처지다.
 
272
그러한 어린것들을 매몰하게도 버리고 계집을 따른다는 것은 정말로 양심에 저린 일이다.
 
273
그는 오랜 악몽에서 깨어난 듯 비로소 제 자신을 스스로 꾸짖고 오래간만에 아이들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274
만은 그것은 그 순간뿐이었지 다시금 치미는 춘옥의 생각에는 모든 것이 허위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7. 7

 
276
날이 가면 갈수록 둘의 마음은 더욱더 괴로워갔다.
 
277
필경 둘 사이는 그 어떤 결과를 짓지 않고는 못 견디게끔 되었다.
 
278
그러한 어느날이었다.
 
279
영식은 학교에서 뜻하지 않은 인규의 엽서를 받게 되었다.
 
280
근심하던 주소까지 똑똑하니 씌어져 있다. 내용에는 간단하게 하직도 없이 떠난 데 대한 사죄가 있고, 다음에는 어떤 음식점에서 밤이면 일을 보고 낮이면 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미안하지만 재학 증명서와 성적표를 보내달라는 것이었고, 자세한 내용은 학교에 다니게 된 후에 쓰겠다는 것이었다.
 
281
그리고 표면 주소는 목단강이었다.
 
282
영식은 방과 후 하숙에 돌아와서 밤이 되기만 고대하다가 시간이 되자 부리나케 춘옥이를 찾아갔다.
 
283
가보니 춘옥이게도 엽서는 와 있었다.
 
284
그러나 거기에는 주소는 없었다.
 
285
영식이가 사실을 이야기하자 춘옥은 영식의 가슴에 팍 매달리며 주소를 가르쳐달라고 조른다.
 
286
하는 수 없이 영식은 엽서를 꺼내주었다.
 
287
춘옥은 엽서를 껴안고 마치 동생을 만나보기나 한 듯이 눈물을 흘려가며 반가워한다.
 
288
그 이튿날 영식은 손수 인규의 퇴학 원서를 써서 교장에게 바친 후 재학증명서며 성적표를 작성하여 인규에게 붙였다.
 
289
그러고는 책보를 걷어 싸는데 배달부가 뜻하지 않은 전보를 전하고 간다.
 
290
서울 외사촌형께서 온 것인데 외숙께서 사망했다는 전보다.
 
291
영식은 눈앞이 아찔함을 느끼고 한동안 책상 위에 마구 엎드렸다.
 
292
친부모보다도 더 보살펴주던 외숙이다.
 
293
지금만치라도 신세가 된 것은 오로지 외숙의 덕택이 아닌가
 
294
그러한 외숙을 생전시에 다시 뵙지 못하고 말았다니 새삼스레 자신이 서럽고 원망스러웠다.
 
295
그날 밤 그는 간단하게 행장을 수습하여가지고 춘옥이를 찾아가서 사유를 말한 후 서울로 떠났다.
 
296
수일 후 외숙의 장례도 끝난 후 영식은 학교 일도 일이려니와 춘옥의 일로 하여 외사촌네가 굳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돌아왔다.
 
297
마침 점심 차라 그는 역에서 내리자 곧 학교로 왔다.
 
298
간단한 보고를 인사에 겸해서 교장에게 한 후 잠시 망설이다가 그만 큰맘으로 춘옥이를 찾아가니 뜻밖에도 춘옥이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299
같이 있던 여자에게서 목단강행 차를 탔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일러주지 않아 통히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영식은 이내 인규의 환영을 머리에 그리게 되었다.
 
300
그러나 그가 하숙에 돌아와서 주인 아주머니가 꺼내주는 편지를 펼쳐보았을 때 그는 졸지에 하늘이 콱 무너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301
선생님, 이렇게 떠나는 죄를 용서하시기 바란다기보담, 지나간 날의 거짓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을 놀리고 속였다는 거기에 대해서 관대하게 용서하시기를 비옵니다. 그야 선생님께서도 저 같은 계집을 진정으로 사랑하시지 않고 일시의 심심풀이로 사랑하였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하지만 제 편에서 선생님보다 더 거짓이었다는 데는 선생님께선 좀 노여우실 것입니다만, 그러나 때가 흐르면 모든 것은 잊혀지는 법입니다. 저는 뜻한 바 있어 좀더 경기가 좋은 곳을 찾아갑니다. 사랑이니 무에니 하는 것보다도 돈을 벌어야지요. 선생님은 수많은 어린것들의 교육에 내 몸을 바치시지만, 저는 저 한 몸의 안일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겠어요. 행방은 가목사 방면으로 정했습니다. 그럼 이만하고 그칩니다. 내내 안녕히 계십시오. 춘옥 올림
 
302
밤이 새도록 생각해보아야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고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303
모든 것이 춘옥의 가정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생각되었다.
 
304
결국은 자기를 위함에서 빚어진 한 비극이다.
 
305
그렇다. 사랑함으로써 춘옥은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
 
306
그는 날이 밝기를 고대해서 시간이 되자 조금도 주저치 않고 교장 관사를 방문한 다음 사정에 의하여 사직하겠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307
그러고는 학교에 나와서 이내 사직원을 써서 제출했다.
 
308
동료들은 여러 가지로 궁금한 듯 캐어물었지만 H만은 벌써 모든 것을 죄다 알아채고 슬픈 빛을 띠고 바라볼 뿐이었다.
 
309
그날 밤 목단강행 야행차로 영식은 몇 해 동안 정을 들여온 모든 것에게 하직을 고했다. 전송 나온 사람은 주인 아주머니와 H뿐이다.
 
310
H는 연방 담배만 태우며 떠나는 벗을 위해 위로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311
“뒷일은 걱정 말구 그리 가면 위선 내가 일러주던 그 사람을 찾아라. 유력한 사람이다. 나와는 젖을 나누어 먹은 처지니까, 더 말할 필요두 없는 벗이다. 성(省)이나 관청 방면에두 유력하구 유수한 실업가루서 사회 방면에두 절대 권리가 있는 호인이다. 그에 간 날루 찾어가서 내 말을 하구 일자리를 말해라. 나도 곧 편지하겠지만. 그러구 취직만 하면 곧 결혼을 해야 한다. 그때면 나두 가겠지만.”
 
312
하고 씽긋 웃는 바람에 영식이도 웃고, 눈물이 글썽하여 어둠 쪽만 바라보
 
313
던 주인 아주머니도 웃는다.
 
314
영식은 진정으로 H의 손을 꽉 쥐었다.
 
315
“잘 있게.”
 
316
“잘 가게.”
 
317
“아주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318
이 말에 주인 아주머니는 끝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어버린다.
 
319
영식은 조용히 돌아서서 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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