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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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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1월
지하련(池河連)
1
가을
 
2
서쪽으로 티인 창엔 두꺼운 카 ─ 텐을 내려첫는 데도 어느 틈으론지 쨍쨍한 가을 볕살이 테불 우이로 작다구니를 긋고는 바둘바둘 사물거린다.
 
3
분명 가을인 게, 손을 마조 잡고 부벼 봐도, 얼굴을 쓰담아 봐도, 어째 보스송하고 매낀한 것이 제법 상글한 기분이고, 또 남쪽 창가ㅅ으로 가서 밖앝을 내다 볼나치면, 전후좌우로 높이 고여올린 삘딩 우마다 푸르게 아삼거리는 하눌이 무척 높고 해사하다.
 
4
오후 여섯 시다.
 
5
사내에서 일 잘하기로 유명한 강군이 참다 못해 손가방을 챙긴다.
 
6
「뒤에 나오시겠서요?」
 
7
「먼저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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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이어 김군도 따라 일어셨다. 마지막으로 여사원 은히가 나간후 실내는 한층 더 호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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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는 이제 막 강군의「난 먼저 갑니다. ─」해야 할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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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나오겠오?」하고 묻든 것이 역시 속으로 우수웠으나, 이 정당하고도 남는 ─「먼저 가겠다」는 말을 항상 똑똑이 못하는 강군의 성격에도 그는 전처럼 고지식이 우서지지가 않었다.
 
11
담배를 부처 문 채 테불 우에 펠처 있는 원고들을 정돈하고 있으려니 아츰 나절 정예에게서 온 편지의 내용이 다시금 머리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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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리 유쾌치 못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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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순이 불쾌한 것이 아니라 불쾌한 감정 그 뒤에 오는 꽤 맹랑하고도 해괴한 ─ 야릇한 감정을 그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종내 망사리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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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오늘 종일 그는 이것과 싱갱이를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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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라면 물론 안해와 제일 친하든 동무다. 뿐만 아니라 안해 생전에 이상한 처신으로 안해를 골란케 한 사람이고 또 석재 자신을 두고 말해도 이 여자로 해서 대단 난처한 경우는 겪었을망정 참 한 번도 이 여자의 행동을 즐겨 받어드린 적은 없다고 생각는다. 그리고 더욱 유감된 것은 이 여자의 그 후 행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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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바에 의하면 여자는 그 후 결혼을 했으나 곧 이혼을 했다는 것이고 이혼한 후엔 그 소위 「연애 관게」가 무척 번거러워서 그의 아는 사람도 여기 관게 된 몇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리되면 이건 그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으려니와, 불쾌하다니 그 정도를 넘고도 남는다. 또 사람의 기억이란 꽤 야속하게 되어서 사랑하는 안해와의 모든 것도 삼 년이 지난 오늘엔 때로 구름을 바라보듯 묘연하거든 항차 정예란 여자와의 지난날이 지금껏 그의 머리ㅅ속에 자리를 잡고 남어 있을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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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오늘에 다시 편지를 보내고 만나자니 ─ 만나 소용없단 것을 이 편보다도 저 편이 더 잘 알면서 만나자니 ─ 이제 그에게「여자」란 대상이 다시금 알 수 없어지는 것도 또 이 여자가 가지는 바 그 풍속(風俗)이 더욱 오리무중(五里霧中)인 것도 사실은 무리가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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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든 채 손이 따거워오도록 여전이 그는 망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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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 편에 걸린 시게가 어느새 일곱 시를 가르친다. 지금 곧 일어서 간다고 해도 삼십 분은 걸릴 것……. 그는 일종 초조한 것도 같고 헛전한 것도 같은 우수운 심사를 경험하는 것이였으나 여전 쉽사리 일어서려군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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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실내가 강감우레 해오고 뿜어내는 연기가 아삼아삼 가라앉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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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끝내 일어셨다. 그러나 이렇다고 뭘 이제서야 정예를 만나려가는 것은 아니다.
 
22
거리에 나서도 역시 황혼이고 가을이다. 아직 낙엽이 아니건만 가로수(街路樹)는 낙엽처럼 소군대고 행인들의 그림자도 어째 어설푼 것만 같다. 문득 죽은 안해가 생각힌다. ─ 순간 그는 정말 안타가운 고독과 슬픔을 자기에게서도 안해에게서도 아닌 먼 ─ 곳에서 느끼며 총독부 앞 큰길을 그냥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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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집으로 가자면 광화문통에서 효자정으로 가는 전차를 타야 했으나 그는 어쩐지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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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되 오월의 바람처럼 변덕스럽지도 않고, 또 겨울 바람처럼 광폭하지 않어서 좋았다기보다 얼굴에 다어 조금도 차지 않으나 그러나 추억처럼 싸늘한 가을바람은 또한 추억처럼 다정하기도 해서 그는 정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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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후 그는 경복궁 끼고 올러 걷고 있었다. 물론 이 길로 작구 가노라면 오늘 정예가 약속한 장소가 나오는 것을 그는 모르는 배 아니나, 거진 한 시간 반이나 넘은 지금까지 여자가 기대리고 있으리라고는 ─ 더욱 자기로서 이것을 기대하고 이 길을 잡은 것은 결코 아니다. 거저 무료해서 지향없는 발낄이었고, 또 소란한 길보다 호젓한 길을 취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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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되도록 담 밑으로 닥아 효자정으로 넘어가는 돌칭대를 밟으면서 다시금 자기 마음을 의심해 본다. 생각하면 이제 이대도록 지향없는 마음의 소치가 기실 정예에게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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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정예가 안해와 가장 친했든 동무란 점에서 혹 정예로 인해 안해를 생각게 될 수도 있을 게고, 또 전에라도 그는 이렇게 안해를 생각게 되면 곳잘 지향 없어지는 것이 버릇이었지만 이렇다고 한대도 이제 정예로 인해 안해를 생각게 된 것이 정말이라면 어쩐지 그는 죄스럽다. 설사 이곳에 아무리 꺼림 없는 대답이 있다 친대도 그는 웬일인지 이것으로 맘이 무사해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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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이렇게 기울수록 그는 맘속으로 막연한 가책까지 느끼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이와 동시에 거이 무책임하리만큼 자꾸 어두어지려는 자기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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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는 달리듯 칭대를 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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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길이 차차 말숙한 신작노로 변해 왔을 때 역시 그의 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경무대(景武臺) 쪽 솔밭 길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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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예가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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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부터도 그러했고 또 솔밭 쪽으로 눈을 가저갈 순간에도 그곳에 정예가 있으리라고는 아여 생각지 않었으나 순간 이상하게도 일종 열없은 정이 이제 막 칭대를 급히 달린 피곤을 한꺼번에 몰아 온 것처럼 그는 끝내 제법 잡초가 욱어진 솔밭에로 가 자리를 잡고 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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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피곤과 함께 일종 자조적(自嘲的)인 허망한 심사를 겪으면서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첬다.
 
 
 
34
벌서 사 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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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는 모유(母乳)가 부족한대 돼지 발이 좋다는 말을 어떤 친구에 게서 들었는지라 사엘 나오는 길로 곧 태평통을 들러 이것을 찾어봤으나 마츰 있지 않었다. 그래서 돼지 발도 돼지고길 바에야 살뎀인들 어떨게냐고 살고기 두 근을 사서 들고는 바른 길로 집으로 왔다. 그랬는데 ─ 마츰 안방에 손님이 온 모양 같어서 고기는 신부름하는 아이에게 준 후, 자기 방으로 들어오고 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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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안해가 건너와서 그는 지금 온 손님이 바로 정예라는 여자인줄을 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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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여자와 전부터 안면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평소 안해가 입버릇처럼 뭐고 칭찬을 많이 했고 또 흔히 부부간 말다툼이라도 있든지 혹은 뭐가 맛갓지가 않어서 짜징이라도 날 땐 곳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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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정예처럼 공부나 헐 걸.」
 
39
하고 애매한 말을 해서 정말 그의 골을 올여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는 정예가 뉘집 딸인데 무슨 학교를 다니는 것까지 또 그 얼굴이 검고 힌 것까지 키가 적고 큰 것까지 적어도 안해가 전하는 바 그대로는 제법 살피살피 다 알고 있는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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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 방에서 혼자 저녁을 치른 후 신문을 들치고 있으려니 무슨 영문인지 제법 번거러운 우슴을 터놓으면서 안해가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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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들 야단이냐고 그가 무러 볼 나위도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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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오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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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안해가 들어선다. 뒤를 따라 정예도 들어셨다. 그는 하도 안해가 자랑한 끝이라 어째 좀 당황하기도 했으나 또 달리는 하도 많이 칭찬을 했기에 더 침착하게 일어 맞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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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처음 보아 안해가 말한 그대로 별로 틀림이 없었다. 살빛은 그리 힌 폭이 아니었으나 무척 결이 고았고 더욱 눈이 이상한 광채를 뿜는 것처럼 몹시 총명한 느낌까지 주었다. 단지 그가 상상한 바와 다소 어긋난 점이 있었다면 ─ 그는 막연하게 정예란 여자도 자기 안해처럼 섬약하고 천진해서 그저 귀여운 여자일 게라고 생각했든 것이 정예는 안해보다 훨씬 그늘이 있는, 뭔지 꽤 맹열한 일면이 있을 것 같은 것이 첫재 달렀고 또 조금도 천진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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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 받은 인상이 이러했고 또 이래서 그도 제법 옷깃을 염위어 정색하고 대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두 사람은 터놓고 무슨 이얘기를 난우지는 않었다. 그저 몸이 편찮어서 귀향했다는 안해 말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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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됐습니다 ─ 빨리 치료를 하셔야 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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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가 말을 받었을 정도였다.
 
48
이날 정예가 돌아간 후 안해는 그의 별미 적은 곳을 나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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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 그렇게 재미가 없대요. 그 애가 남의 남자하고 인사나 하는 줄 아우, 남 기껏 소갤 해 놓으니까 이얘기 한마디 없이 옆에서 딱하다니 난 첨 봤어, 이제 걔 우리 집에 다신 안 올 테니 난 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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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거반 화를 내다싶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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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사람하고 무슨 이얘기가 그렇게 많어야 하느냐고 암만 말을 해도 안해는 영 듣지를 않었다. 이래서 ─ 결국은 별 대단치도 않은 동무 가지고 웨 야단이냐고, 짐짓 핀잔을 주게 되었고 이리되자니 안해는 뭐가 더 억울한 것처럼 더욱 자랑을 느러놓은 셈이다.
 
52
본시 여자란 이얘기를 내놓기 시작하면 나종엔 흔히 제 바람에 넘어 가기가 쉬운 것인지 안해도 처음엔 얌전하다느니 재주가 있다느니 또 몹시 다정한 사람이라는 둥, 그야말로 순전한 자랑만이든 것이 차차 왼만한 남자는 바로 보지도 않는다는 둥 가령 누구를 사랑할 경우라도 무사한 편보다는 까다로운 편을 택하는 성격이라는 둥 아무튼 본인을 위해 하지 않어도 좋을 말까지 삼갈 줄을 몰랐다. 이래서 그도 제법 코대답으로 듣긴 했으나 끝내,
 
53
「그 대단한 여자로군 ─」
 
54
하고 피식이 웃기까지 했다.
 
55
이 모양으로 기껏 안해의 자랑으로부터 새로히 얻은 지식이란 불행히 그에게 별 보람이 없어서 결국 그리 유쾌치 못한 취미를 가진 위태로운 여자로 밖엔 별로 남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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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안해는 이따금 그에게 탓을 했기에 나종엔 그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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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안 오나 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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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일종 우습게 섭섭한 것 같은 혹은 미안한 것 같은 생각을 가지기도 했으나 안해의 예상한 바와는 달리 그 후 메칠이 못 가 정예는 다시 왔든 상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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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 신록이 짙어오고 꽃이 피고 할 때쯤 해선 그도 두 사람 틈에 끼여 제법 어깨를 나란이 하고 거리를 돌아다닌 적이 한두 번은 없지도 않으나 그는 역시 무심하려 했다.
 
60
정예는 처음 받은 인상과 같이 비교적 과묵한 편이었다. 조금도 명랑하지 않을 뿐더러 몸이 성찮어 그런지는 몰라도 이따금 이상하게 허망스런 얼굴을 가지기도해서 이것이 그의 일종 퇴페적인 애착을 끌기도 했으나, 그러나 어쩐지 이러한 한까풀 밑엔 짙은 원색(原色)과도 같은 꽤 섬찍한 무엇이 꼭 있을 것만 같었다. 그가 우정 저편의 존재를 무시한 때가 정예에게서 이러한 것을 본 때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는 이 분명히 무슨 허방이 있을 것 같은 근옄엔 역부러 가까워지기를 꺼려했다고 지금도 생각는다.
 
61
어느 날 안해는 저녁을 치르자 ─
 
62
「요번 일요일엔 영화구경 갑시다 ─」
 
63
하고 그에게 말을 했다.
 
64
그는 안해의 이 말에서 안해가 또 정예와 같이 가자는 게라고 생각을 하면서,
 
65
「무슨 일로 줄창 거치 다녀야만 해.」
 
66
하고는 제법 안해 말에 퇴박을 주려니까 안해는 이 날도 뭔지 불평을 품은 채,
 
67
「그 거치 좀 다니면 무슨 지체가 떠러지우? 관두시구려 우리끼리 갈테니.」
 
68
하고 끝내 뾰르통했다. 이래서 안해는 우정 정예에게 엽서를 내는 모양이었으나 당아 온 일요일날 정예는 웬일인지 오지 않었다.
 
69
「얘가 웬일일까?」
 
70
하고 기두리는 안해 말에
 
71
「그 잘됐군.」
 
72
하고 놀려 주면서 그도 이 날은 종일 집에서 해를 보낸 셈이다.
 
73
이튼날 그가 사엘 나가니 웬 낫선 글씨의 편지 한 장이 다른 편지들과 섞여 있었다. 다시 한번 살펴봤으나 역시 잘 모를 편지었다.
 
74
그는 우정 맨 나종으로 편지를 뜯었지만 편지는 그가 처음 막연이 예감한 바 그대로 정예에게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용은 별 게 아니어서 잠간 상의할 말이 있어 만나고 싶단 것과 몸이 불편해 찾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 후 만날 장소와 시간을 알린 극히 간단한 편지였다.
 
75
처음 그는 대뜸 그리 유쾌치 못했다. 그러나 뭘 불쾌히 생각기엔 너무 수헐하게 말한 기탄 없는 편지었기에 차라리 까다롭게 생각하려는 자기 마음이 되려 쑥스러운 것 같어서 나종엔 자기도 여게 되도록 평범하려 했다.
 
76
이 날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양,
 
77
「당신 동무헌테서 편지 왔읍디다 ─」
 
78
하고 편질 내놓으면서 마치 안해에게 온 편지나 전하듯 무심하려 했다.
 
79
안해는 자기에게 온 것이 아닌 줄 알자, 좀 의아한 듯이,
 
80
「무슨 일일까, 신병에 대한 이얘긴가?」
 
81
하고 의심쩍어 하는 것을 그가 우정,
 
82
「병에 대한 거라면 의사가 있지.」
 
83
하고 말을 받으려니까,
 
84
「아무튼 어째서 편질 했든지 그애로서 헐만해서 했을 테니까 가보시구려─」
 
85
하고 안해는 역시 동무의 편역을 드렀다.
 
86
이래서 그는 맘속으로 안해는 아직 한 사람의 여자로선 너무 어리다는 것을 느꼈고 또 이처럼 어린 안해의 순탄하고 단순한 맘씨를 이제 자기로 앉어 이대로 받어서 옳으냐 글르냐는 것은 둘째 문제로 아무튼 이날 그는 이렇게 되여서 정예를 만나려 간 것만은 사실이다.
 
87
그가 전차를 내려서 정예가 기다리고 있을 본정통 어느 차ㅅ집엘 들어섰을 땐 거진 여덜 시가 가까워서다.
 
88
정예는 들어가는 초옆 왼편에 자리를 잡고 앉어 있었기에 쉽사리 알어볼 수가 있엇으나 어쩐지 ─ 처음 그래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 편지와는 좀 달러서 정예는 약간 당황한 듯이 인사를 했다.
 
89
그도 별 말없이 인사를 받었으나 기왕 왔을 바에야 설사 저편이야 어떤 태도로 나오든 자기만은 되도록 그야말로 기탄 업시 대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먼저 몸의 형편을 물은 후 안해도 몹시 염여한다는 것과 그래서 오늘 같이 나오려다 못 왔다는 이얘기를 제법 무관하게 늘어놓은 셈이다.
 
90
이랬는데도 정예는 웬일인지 이러한 이얘기엔 별 흥미가 없다는 것처럼 그저 허트로 네 ─ 네 ─ 하고 대답할 뿐 무슨 이렇다는 이얘기를 먼저 끄내진 않었다. 이리되면 누가 만나자고 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91
그가 차차 말을 잃고 거반 싸늘히 식은 차ㅅ잔에 다시 손을 가저 갈 무렵해서 여자는
 
92
「나가실까요?」
 
93
하고 별안간 말을 건넜다.
 
94
그는 얼결에
 
95
「네 ─」
 
96
하고 대답을 했으나 본정통 입구를 돌아 나오면서 그는 다시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97
그러나 이렇다고 뭘 내색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저 지망을 잃은 채 덤덤이 여자를 따라 거렀다.
 
98
두 사람이 남대문통으로 해서 부청 앞 넓은 길을 잡고는 다시 광화문통을 바라보고 걷기 시작했을 때 그는 끝내,
 
99
「내게 무슨 얘기가 있었어요?」
 
100
하고 물어볼 수밖엔 없었다.
 
101
정예는 잠간 주저했으나 인차 ─
 
102
「얘기 없었어요 ─」
 
103
하고 비교적 똑똑하게 대답을 했다.
 
104
두 사람은 다시 잠잣코 걷기 시작했다.
 
105
그는 속으로 다시금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 이러한 때 느껴지는 이상한 여자란 분명이 존경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한 여자」는 끝내 그의 이상한 호기심을 이르켰든 것이고, 또 이 호기심은 지금까지 가저온 그 마음의 어느 까다로운 일부분을 허러 버린 것처럼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106
「허실 말슴이 있다고 편질 내시고서….」
 
107
하고 짐짓 건너다보려니까,
 
108
「거짓말이에요.」
 
109
하고 대답하면서 여자는 태연했다. 이리되면 다음으로 무를 말은「웨 거짓말을 했느냐.」는 것이겠으나 그는 어쩐지 이 말을 얼른 무를 수가 없었다.
 
110
광화문통을 지나 거진 총독부 앞까지 왔을 때 전차를 타느냐? 고, 그가 무르니까 정예는 그냥 걸어가겠다고 대답했다. 효자정에 집을 둔 그는 가회정으로 가야 할 정예를 앞에 두고 잠간 망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정예도 알었든지,
 
111
「전 산으로 해서 가겠는데 별일 없으시면 거치 산으로 해 가시지요 ─」
 
112
하고 말을 했다. 역시 전날 편지로 말할 때처럼 예사로운 투다.
 
113
그는 조금 전부터도 그러했지만 이 여자의 어떠한 태도에든 자기도 되도록 예사로우려고 하면서,
 
114
「그래도 좋습니다 ─」
 
115
하고는 쉽사리 대답했다.
 
116
경복궁 긴 ─ 담을 끼고 삼천동을 들어 가회정으로 넘어가는 넓다란 길을 걸으면서도 두 사람은 별루 말이 없었다. 그는 이따금 우숩게 역해오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으나, 그저 하는 대로 두고 볼 작정이었다.
 
117
길이 변해서 가회정 쪽으로 기우러질 때쯤 해서,
 
118
「이젠 혼자 가도 괜찮읍니다 ─」
 
119
하고 정예가 돌아섰다.
 
120
그도 그저 그러냐 ─ 는 것처럼 따라 거름을 멈첬으나 한순간 이상하게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며 그냥 서 있으려니까,
 
121
「괘니 고집을 부려서 미안합니다 ─」
 
122
하고 정예는 그 약간 허망한 투로 말을 했다.
 
123
그는 잠잣코 있을까 하다가 이러한 경우에 「고집」이라니 생각할수록 하도 용하고 재미있는 말이어서
 
124
「웨 그런 고집을 부렸소?」
 
125
하고 우정 무러본다. 그랬드니 ─
 
126
「이상허세요?」
 
127
하고 정예가 다시 물었다.
 
128
그는 정예에게 배워서 자기도 일견 솔직한 체 ─
 
129
「네 ─」
 
130
하고 대답해 본다. 그러나 의외에도 이 말에 정예는
 
131
「나뻐요.」
 
132
하면서 거반 쏘아보듯 그를 처다봤다. 그는 이 애매한 말에서 히한하게도 지금 정예가 자기를 나뿐 사람이라고 비난한단 것을 곧 알어챘으나 얼결에 자기도 모를 말을 ─
 
133
「글세올시다 ─」
 
134
하고는 눙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35
지금 생각해도 이때 정예에게 당한 꾸지람은 참 억울한 것이다 ─.
 
136
그는 이날 밤 돌아와 자리에 누어서도 정예와 주고받은 말이 좀체 사라지지 않었다. 아무튼 이상한 여자인 게 제 말을 비처서 본다면 결국 석재로 인해서 정예 자신이 어떤 박해를 당코 화를 입고 말 것이라는 것인데 ─ 이 처럼 모든 것을 미리 잘 알 바에야 뭣허러 이런 방식으로 구지 제 손으로 함정을 팔 게 없다. 얼른 생각해서 무슨 성격이 이런 성격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또 작난이라면 이건 너무 정도를 넘어 고약하다.
 
137
(두고 보리라 ─)
 
138
그는 결국 이렇게 생각한 후 이런 형태로 내달은 여자라면 응당 머지않어 다시 말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139
그러나 그후 정예에게선 웬일인지 일체 소식이 없었다. 한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해도 전연 소식이 없었다.
 
140
그는 이상하게 궁금해지는 심사를 격지 않는 바도 않었으나 역시 두고 볼 일이었다.
 
141
일 년이 지나갔다.
 
142
그 동안 두 부부는 정예가 결혼을 하고 다시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런 일이 있은 댐부터는 그도 안해도 정예 이얘기를 꺼내진 않었다.
 
143
그랬든 것이 단 한 번 안해가 죽기 전 어느 비오는 날 밤에 안해는 별안간,
 
144
「정예 못 봤어요?」
 
145
하고 무른 적이 있다. 이 때 그는 어쩐지 맘이 몹시 언잖었다.
 
146
여지껏 한 번도 그에게 묻지 않은 것을 봐서 안해에겐 제일 묻고 싶었든 말인지도 모르고 또 그처럼 끄리는 말을 이제 하게 되는 것이 어째 불길한 증조 같기도 해서 그는 우정 안해 옆으로 가까히 가,
 
147
「보다니 어데서 봐?」
 
148
하고 됩데 무러보면서
 
149
「봤으면 내 얘기 않었을라구 ─」
 
150
하고는 우서 보였다.
 
151
「혹 길거리에서라도 못 봤나 해서 ─」
 
152
하고 안해도 따라 우섰으나, 이 때 그는 뭔지 안해에게 몹시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앞을 서서,
 
153
「그깐 이얘기를 ─ 무슨 그따위를…」
 
154
하고는 자기도 몰을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창 옆으로 가 담배를 집었다. ─ 밤은 옷칠한 듯 검고 비는 쉴새없이 나리고… 이따금 동병실로 가는 간호부들의 바뿐 거름이 더 기맥히게 싫은 밤이었다.
 
155
안해는 그가 뭐라고하든, 정예와 커난 여러 가지 그리운 기억을 혼자 속삭이듯 도란도란 이얘기하면서,
 
156
「그래도 걔 착한 데 있다우 ─ 다음 만나건 다정이 허세요 ─」
 
157
하고 말을 해서 그는 끝내 화를 내고 말었다.
 
158
거진 땅거미가 잽힐 때쯤 해서 그는 풀밭을 일어셨다.
 
159
어떤 일본인 노인이 손자뻘이나 되는 어린애를 앞세우고 제바람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점백이 삽살개를 놀리며 저리로 가는 게 보인다.
 
160
그는 어린아이의 뒷모양에서 지금쯤 라디오 가개 앞에서나 우체통 앞에서 할머니를 따라 놀고 있을 ─ 아들 영이를 생각하면서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161
그러나 이 날 따라 영이는 라디오 가개 앞에도 우체통 앞에도 놀고 있지 않었다.
 
162
그가 새로히 아버지다운 불안을 안은 채 총총이 집엘 드러서려니 의외에도 어머니가
 
163
「얘 손님 오섰다 ─」
 
164
하고 마조 나왔다.
 
165
뒤를 따라 정예가 영이를 안은 채
 
166
「이제 오세요?」
 
167
하고 인사를 한다.
 
168
그는 한동안 어이없은 채, 그저 보구만 있었으나, 옆에 어머니 역시 어리둥절해 있는 것을 느끼자
 
169
「여길 오셨군요 ─ 언제 오셨서요?」
 
170
하고 그도 인사를 한 셈이다.
 
171
두 사람은 어머니와 영이를 사이에 두고 가치 저녁을 먹고 이슥도록 놀았으나 정예가 어머니와 안해의 이얘기를 했을 뿐 별로 말을 난우진 않었다.
 
172
마츰내 어머니가 영이를 재우겠다고 안방으로 건너가신 후 방안은 더욱 거북한 분위기에서 그는 뭐고 말을 난우고도 싶었으나 대체나 할 말이 없었다.
 
173
정예 역시 이러했든지 결국 이야긴 그가 먼저 꺼낸 셈이다.
 
174
「낮에 편질 받고 마츰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하게 됐읍니다. 이살해서 집을 모르실 텐데 어떻게 찾었읍니까?」
 
175
하고 무러봤드니 정예는 ─ 어제서야 죽은 안해의 소식을 듣고 그 전집으로 갔었다고 하면서
 
176
「걔가 어떻게 그렇게…무슨 일이 그런 일이….」
 
177
하고는 석재가 먼저 무슨 말이든 꺼내기를 기대렸다는 것처럼 정예는 제 말을 시작했다. 어데까지 띠금띠금 끝을 맺지 못하는 정예 말에서 그는 지금 정예가 안해의 주검을 대단 슬퍼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도 말을 잃은 채
 
178
「글세올시다 ─」
 
179
하고만 있으려니까,
 
180
「오늘도 관둘가 허다가….」
 
181
하면서 여자는 눈물이 글성한다.
 
182
그는 자기도 어쩐지 맘이 언잖어지려구 해서 그저 잠잣고 있었다.
 
183
조금 후 정예는 죽은 사람이 뭐고 제 말을 하지 않드냐고 물었다. 그래서 했노라고 대답했드니 뭐가 몹시 언잖은 것처럼 정예는 끗내 울고 말었다. 소리를 내여 우는 것도 느끼는 것도 아닌 그저 무릎을 세우고 앉인 채, 잠 잣고 울었다. 다행이 그는 정예의 이마를 고인 두 손이 눈을 가렸기에 맘 놓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지금껏 그는 이처럼 막우 쏘다지는 눈물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턱으로 뺨으로 함부로 쏘다지는 눈물에 비해, 손끗 하나 움직이지 않는 싸늘한 태도가 어쩐지 여자의 아지 못할 운명같기도 해서 부지중 그는 얼굴을 돌리고 말었다.
 
184
과연 여자의 울음은 단지 벗을 잃은 슬픔만은 아닌 듯 했다.
 
185
그는 뭔지 자기도 점점 어두어지는 마음을 그저 잠자코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으나 다른 한 편으론 이러고 앉어 있는 동안 그는 일즉이 가저 보지 못한 이 여자에 대한 야릇한 불만과 비난의 감정을 어떻게 수사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186
다음 순간 그는 어떻게 됐든 좌우간 안해로 인해 울기 시작한 이 여자의 우름을 이대로 두고 오래 당하기는 정말 견듸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이래서 생각한 남어지,
 
187
「너무 언잖어 마십시요…소용없는 일을 그보다도 그간 뭘 하고 계셨기에 그처럼 뵐 수가 없었읍니까?」
 
188
하고 말을 해 봤다. 그랬드니 과연 이 약간 조속적인 말의 효과는 적실해서
 
189
「시굴 가 있었어요 ─」
 
190
하고 대답하는 정예는 그처럼 몹시 울지는 않었다.
 
191
「그래 시굴서 뭘 허셨기에…서울엔 언제 오셨오?」
 
192
하고 그가 다시 무러봤드니 여자는 그저 시무룩이 우슬 뿐 잠잣고 있었다. 순간 그는 자기의 이러한 무름에 능히 우서 대답할 수 있는 그맘의 상태가 좌우간 싫었다. 그는 끗내 이상한 미움을 느끼며
 
193
「그간 이야기나 좀 들읍시다.」
 
194
하고 짐짓 건너다봤다. 그랬드니 여자는,
 
195
「다 아시면서….」
 
196
하고 여전 같은 태도다. 이래서 그는 끗내 몹시 타락한 여자라고 생각을 했고 또 이렇게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이 여자에게 너그러우려고도 했으나 그러나 어쩐지 이보다는 뭔지 불쾌한 감정이 앞을서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197
「하도 호사스런 얘기가 돼서 원….」
 
198
하고는 제법 피식이 웃고 말었다.
 
199
과연 정예는 많이 변했었다. 첫재 빛갈이 핼숙한 정도로 히여졌고 성격도 훨신 달러진 것 같아서, 전처럼 과묵한 인상을 주지도 않았다. 그대신 전보다는 사뭇 품위가 없고 무게가 없어 보였다.
 
200
한동안 말을 잃은 채 앉어 있었으나 다음 순간 그는 우연이도 눈이 정예와 마조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01
여자는 두 손을 무릎 우에 올려놓은 채 그냥 눈이 뀅해서 마진편 벽을 보고 앉어 있었으나 여자의 이 버릇 같은 허망한 얼굴이 만일 전날의 것이 일종 건방저서 사치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것은 이것과는 훨신 달러서 어쩐지 처참했든 것이다.
 
202
인차 정예는
 
203
「가겠어요 ─」
 
204
하고 일어섰으나 그는 역시 말을 잃은 채 덤덤이 앉어 있었다. 그러나 조금 후 안방으로 건너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잠이든 영이를 듸려다보고 할 때의 정예 얼굴은 그가 의아하리만큼 조금 전과는 사뭇 달러서 일견 명랑해 보이기까지 했다.
 
205
그는 다시금 불쾌했다. 조금도 성실치 못한 그저 경박하고 방종한 성격의 표현같기만 해서 일종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없지 않었으나 역시 좀체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조금 전 그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뭘 후회하는 얼굴이라면 좀더 치사해야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훨신 더 분별이 없어야 한다.
 
206
(후회하지 않는 얼굴 ─ 싸늘한 밝은 눈으로 행위했고, 그 눈으로 내 일을 피하지 않는 얼굴)
 
207
그러나 이렇기엔 좀더 순뙤게 절망해야 할 것 같았다.
 
208
그는 여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정유장까지 정예를 따라나온 셈이다.
 
209
그러나 전날처럼 여자가 굳이 이끈 것도 아닌 ─ 오히려 정예는 멫번 사양까지 했으나 그역 뭘 그렇게 모지게 굴 흥미도 없어서 그저 먼 곳에 와 준 손님을 대접하듯 ─ 만일 여자가 전일처럼 산으로 해서 가겠다면 태반 바래다라도 줄 셈으로 그대로 경무대 앞길을 들어 걷기 시작했다.
 
210
차차 길이 호젔해 올스록 정예는 방안에서보다 훨신 말이 많어젔다. 이따금 기탄 없는 태도로 지내온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제법 가벼운 기분으로 제가 생각하는 바를 토로하기도 해서 흡사히 그것이 죽은 안해가 생전에 자기를 대하든 그 솔직하고도 단순한 태도 같기도 해서 그는 오히려 싫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211
그러나 나종 정예는 점점 꽤 못 할 말까지 삼갈 줄을 몰랐다.
 
212
「연앨 많이 하는 여자는 사실 한 번도 연앨 못해 본 여자일지도 몰라요─」
 
213
하고 말을 하는가 하면 또
 
214
「단 한 사람의 자기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건 큰 약점이에요 ─」
 
215
하고는 얼른 들어 상구 몰을 말을 그대로 소군거리기도 해서 꼭 딴 사람 같었다.
 
216
그가 듣다가 못해서
 
217
「그렇다고 숫한 연애를 헐 건 뭐요?」
 
218
하고 무러봤드니 여자는 더 뭔지 하염없는 태도로
 
219
「쓸쓸하니 말이지…사랑허기만 하면 백 년 천 년 보지 않어도 된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220
하고 잠간 말을 끊었다가는 다시
 
221
「참는단 건 자랑이 있는 사람의 일일 께고, 또 자랑이 없는 사람은 외로워서 쓸쓸할 게고 그 쓸쓸한 걸 이겨 나갈 힘도 없을 게고…그러니까 결국 아까 말한 그런 약점이란 어리석은 여자에겐 운명처럼 두려운 것이에요.」
 
222
하고는 혼자ㅅ말처럼 사분거리기도 했다.
 
223
그는「쓸쓸하니 말이지…」하고 말하는 여자의 음성에서 이상하게 일종 칙은한 정을 느끼며 그냥 잠자코 있으려니까
 
224
「사람은 진정 좋아하는 마음이란 그리 수헐치가 않어서 무작정 보구 싶으니 말이지…여게 거역하자면 저를 상칠 밖에 도리가 없으니 말이지.」
 
225
하고 정예는 여전 같은 태도로 이야기를 게속했다.
 
226
그는 여자의 이러한 대담한 이야기가 일종 징하게 늣껴졌다거나 반대로 무슨 감동을 주었다기보다도 흔히 서양여자들에게 많다는 무도병(舞蹈病)이란 병처럼 이 여자에게도 무슨 고백병(告白病)이라는 게 있지나 않나 싶어서 차라리 의아할 정도였으나 역시 한편으론 언젠가 ─ 걔는 제가 남을 사랑할 때라도 무사한 편보다는 까다로운 편을 취하는 성격이래요 ─ 하든 안해의 말이 생각나서 어쩐지 한 소녀의 당돌한 욕망이 이보다는 훨신 사나운 현실에 패한 그 폐허를 보는 듯 해서 싫었다.
 
227
얼마를 왔는지 길이 삼가람으로 된 곳에 이르자
 
228
「이리로 해서 전차를 타겠어요.」
 
229
하는 정예 말에 그는 비로소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이외에도 눈물에 마구 저진 여자의 얼굴에 그는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30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다. 그는 처음부터 여자가 울면서 이얘기를 했다고는 암만해도 믿어지지가 않었다. 그는 여자가 새로히 알 수 없어지는 한편 이상하게도 맘이 무거워짐을 늣꼈다.
 
231
두 사람이 피차 말을 잃은 채 경복궁 긴 담을 끼고 거진 반이나 내려왔을 때다.
 
232
정예는 다시 말을 이었다.
 
233
「인생이란 어떤 고약한 사람에게도 역시 소중하고 고귀한 것인가봐요 ─아무리 가혹한 운명이라도 이것을 완전이 뺏지는 못하나 봐요 ─ 죽기 전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뵙고는 젤 고약하고 숭없는 나의 이얘기를 단 한 분 앞에서만 하고 싶었어요 ─」
 
234
하면서 역시 아까와 같은 어조로 도란도란 이얘기했다.
 
235
그는 머리를 숙인 채 맘속으로 지금도 정예가 울면서 이얘기를 할게라고 생각했다. 뭔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손이라도 쥐고 숫한 이얘기를 하고도 싶은 이상한 충동을 순간 느끼는 것이었으나 역시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었다.
 
236
그는 끗내
 
237
「얘기 관둡시다…내가 고약한 사람일 거요. 그리고 당신은 숭없지도 아무렇지도 않소.」
 
238
하고는 뭔지 자기도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비로소 처음으로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239
그러나 여자는 그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었다. 믿지 않는 것을 그는 여자의 얼굴에서 보았다.
 
240
길이 거반 끝날 때쯤 해서 두 사람은 꼭 같은 말로 ─
 
241
「또 뵙시다.」
 
242
「또 뵙겠어요.」
 
243
하고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었으나 전차가 떠날 때쯤 해서 어쩐지 그는 다시 정예를 못 볼 것만 같었다.
 
244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초조한 거름으로 몇 발자국 앞으로 내다르며 제법 크다랗게 여자를 불러봤다. 그러나 이미 정예가 알택이 없었다.
 
245
마츰내 그는 오든 길을 향하고 발길을 도르켰다. 정말로 지루한 거름이었다. 이날 들어 발서 세 번째 오르나리게 된 꼭 같은 길은, 그 나가자뻐진 꼴하고 천상 엄흉하기 짝이 없었다.
 
246
그가 여전 참끼 어려운 역정을 품은 채 돌칭대를 반이나 올라왔을 때다.
 
247
드디어 그는 맘속으로 ─
 
248
(정예는 제 말대로 흉악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지는 아니다. 허다한 여자가 한껏 비굴함으로 겨우 흉악한 것을 면하는 거라면 여자란 영원이 아름답지 말란 법일까?)
 
249
하고 중얼거렸다.
 
250
그러나 다음 순간 눈앞엔 어느 거지 같은 여자보다도 더 거지 같은 딴 것이 싸늘한 가을 바람과 함께 그의 얼굴에 부디첬다.
 
251
(《朝光[조광]》, 194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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