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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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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화(長靴)
 
 

1. 1

 
3
출생 사망 따위의 허섭쓰레기나마 여남은 장을 써야만 그날 하루의 생활이 유지되는 셈인데 세시가 지나도록 개미새끼 하나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쥐꼬리만하다는 겨울 해가 세시를 지났으니 장도 파장이 다 되어갈 무렵이다.
 
4
“빌어먹을 자식들… 밥 처먹군 뭘하길래 애새끼들두 못 맨드누… 뭬 또 그리 재미가 깨 쏟아지듯 한다구 다 뒈질 생각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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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신문지쪽에다 사법 대서 김달영이란 똑같은 글자를 몇 십 몇 백으로 쓰고만 있노라니 부아가 슬며시 돋는다. 무슨 날에도 이런 일이 없었거든 황차 오늘은 장날이 아니냐. 그것도 명색이 읍으로 승격을 한 첫 장이란 게이 꼬락서니다.
 
6
“읍 ─ 경을 치래라!”
 
7
붓장난하던 연필로 신문지를 벅 그어대니 찍 찢어진다. 지금 심사 같아서는 뭣이고 눈에 뜨이는 대로 모조리 바수어대고 싶다. 책상이고 서류궤고 사진들, 꽃병 ─ 아니 그럴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서 한길에 개구리처럼 태기를 치고 싶어진다. 울화 치미는 대로 하면 문 첩첩이 닫아치우고 어디 가서 술이나 고주망태가 되게 들부어대고, 심사 틀린 놈들하고 염병을 한번 부렸으면 비위가 가라앉을 것 같으나 권세와 세도가 한꺼번에 뚝 떨어졌고 보니 어느 시러베아들놈이 자기한테 술턱을 낼 리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제 돈 들여서 술을 먹기도 싫다. 홧김에 서방질두 한다는데 뭐 번듯이 자빠져서 이런 생각을 하고 주머니 속 돈과 자기 주량을 견주어 보기도 하다가는 성난다고 돌부리를 차면 나만 앵하지 하고 고개를 흔들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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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놈의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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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질 구멍을 찾지 못한 울분은 또 딴 데로 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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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었던 것 도로 달라면 똥구멍에 종기 난다는데 그 자식 나이 사십이 다 된 자식이 한번 준 것을 도로 내래? 더러운 자식 같으니. 줄 땐 무슨 맘이구 이제 와 또 도루 달라는 건 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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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정 때 순사를 다니던 강창복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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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인심이 다 그렇다군 하지만서두 사내자식이 체통이 있어야잖아? 그놈이나 고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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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은 또 딴데로 튄다. 놈이란 강창복이지만 년이란 것도 강가와 좋아지내는 삼일병원 간호부 조경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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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길 년놈들! 년놈들끼리 또 뭬라구들 했기에 그 자식이 사람을 보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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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출생신고 한 장 못 쓰고 있는 판에 문이 드르륵 열리며 양곡조합 사환아이가 강창복이의 편지를 가지고 온 것이다. 해방 직후 순사도 그만두고 해서 쓸모도 없고 하니 가지라고 제 손으로 갖다준 가죽장화를 도로 보내라는 것이다. 그것도 제 것도 아니고 사법주임으로 있던 일인 경부보가 주고 간 것이라고 하며 자기한테는 인제 개발에 편자나 진배없다고 떠맡기 듯 한 것인데 도로 내란 것은 도시 말이 되지 않는다. 인제 언제 한번 신어볼지도 모르는 ─ 아니 어쩌면 영영 그런 것을 신고 뽐낼 계제가 다시 와볼 것 같지도 않은 가죽장화니 자기야말로 인제 정말 개발에 편자 격인지라 아까운 생각은 손톱 반푼어치도 없지마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하는 강가의 소행머리가 괘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지금 어디 처박혔는지 모른다고 퉁명스럽게 아이를 돌려보내고 나서 생각하니 그 강가놈한테 또 한번 진 것 같아서 도시 비위가 가라앉지를 않는 것이다. 그 자식이 가죽장화 하날 무슨 큰 보물인 줄 알구서 안 내놓지 ─ 이렇게 놈과 년이 주고받을 생각을 하면 더욱 역심이 난다.
 
16
“더러운 놈의 세상 또 한번 뒤집히지 않나!”
 
 
 

2. 2

 
18
뒤집히기 전 세상 때의 김달영이라면 A읍에서는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위대한 존재였다. 자치회 회장에, 자치회가 인민위원회로 되어서는 또 그 회의 장이었고, A읍 경제위원회 회장에 혈맹단 단장, 전위대 총사령에 적산관리위원장 또는 비농가동맹의 위원장까지 겸해서 이때까지는 일개 사법 서사요 모주꾼으로만 겨우 알려져 있던 김달영이는 그야말로 일약 A읍의 영웅적 존재가 되고 말았었다. 물론 해방 직후의 일이다.
 
19
그러면 그렇게 존재가 없던 김달영이가 어떻게 갑자기 혜성처럼 머리를 들고 일어서게 되었는가? 물론 거기에는 그의 매형이 그때 중앙에서 친일파 민족 반역자 소탕의 깃발을 들고 나와 한창 히고 젖혔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도 큰 원인은 팔월 십오일 정오에 일황 유인이가 지지궁상으로 항복문을 낭독하기보다도 만 다섯 시간 전에 이 역사적인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데 있었다. 물론 김달영이가 이 역사적인 대 사건을 그렇게 일찍 알았다는 것도 그의 매형을 통해서였지만 처음에는 미친놈 소리 같아서 기연가미연가 했던 그 이야기가 정말 정오에 방송에 나타나고 잇대어 A씨의 조선해방이 선포되자 자치위원회 조직에 김달영이를 추대하는 데 누구 하나 주저하지 않았다. 원래 술도 잘하거니와 기골도 장대하고 버레기 깨지는 소리를 내어 웃는 거라든가 일견 호걸풍이 없지도 않다. 그러고 왜정 때는 대서 관계로 경찰과도 좀 이러쿵저러쿵이 있었지만 술만 취하면 개고기로 이름도 있었고, 무식은 하나 때려부수는 데는 큰 뭐 하나 있기도 했다.
 
20
“단원은 다들 모였는가?”
 
21
흰 노타이 셔츠에 단장이라고 시뻘겋게 쓴 완장을 달고 국방모를 질끈 눌러쓰고 딱 버티고 설라치면 제법 그럴 듯싶다. 양 어깨가 일자가 진 데다가 허리가 또 부듯해서 언뜻 보면 네모가 나보인다. 탱크로 들이받아도 움쩍도 않을 것 같다. 이 네모난 체격이 누구의 명령인지 사각장군이라는 칭호를 낳았다.
 
22
“쉬, 사각장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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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이 났다가도 사각장군이 기다란 곤봉을 질질 끌고 나설라치면 인기척 들은 송사리떼처럼 풍비박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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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들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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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올시다. 술들 먹구 장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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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라니, 지금이 어느 땐데 술들이 취해서 그래. 조심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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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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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읍 사람 쳐놓고 사각장군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과거 왜정 때 기세를 올리던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제일 밥이다. 군수고 서장은 모두 일인이었으니까 들고튀었지만 그 밑의 조무래기 친일파들은 명령 일하에 군청 마당에다 무릎을 끓리어 엎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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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네 죌 알겠지!”
 
30
“예. 그저 죽을 죄를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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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죌 일일이 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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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월급푼 받구 그놈들의 종 노릇한 것밖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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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을 패라!”
 
34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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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세도가 이럴 때다. 그러니 왜정 때 순사질을 한 강창복이가 사각장군 앞에 밥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하루는 강창복이가 김달영이의 비위를 사기 위해서 가죽장화를 갖다 진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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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님, 거 어디 됐습니까. 나도 인저 그놈의 칼을 떼어놨으니 개발에 편자지요. 이놈을 신으시고 한번 군중 앞에 썩 나서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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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대서란 이발소와 자동차 운전사와 함께 순사의 밥이었다. 걸핏하면 돈도 뺏어가고 술도 뺏아먹다가 한번 안 들어주어도 그날로 말썽을 부리던 강 순사가 이렇게 와서 굽실거리고 물건까지 진상을 하다니 세상은 정녕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된 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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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만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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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천만에. 실상은 내 돈 주구 산 것도 아닙니다. 신어 주시지요. 그리고 헌납식두 아주 해치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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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끌고 가서는 술도 실컷 사주었던 것이다.
 
41
─ 그 장화를 지금 도로 내라는 것이다. 사실 삼일병원 간호부 조경애만 해도 그런 것이 인물도 고만하면 추물은 아닌데다 중학교도 다니었다고 전같았으면 일개 사법 대서인쯤 발 새의 때꼽만큼도 안 여겼을 것인데 삼사십명씩 몽둥이 든 부하를 끌고 장화에 곤봉을 든 위풍과 세도에 눈이 어두웠을 것이다. 사실 김달영은 남들이 그럴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군수나 경찰서장은 다른 데로 갈 데가 없느니라 믿고 있었고, 자기가 하고자만 한다면 그보다 더 높은 자리도 바라볼 수도 있느니라 했던 것이다. 다만 자기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좀 무식한 것인데 이것은 하루 이틀에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되도록은 자기보다 유식한 패를 절대로 자치위원회나 치안대 같은 데 발을 못 붙이게 하는 도리밖에 없었고, 또 소위 공부깨나 했다는 축들은 친일파, 민족 반역자란 죄명에서 벗어날 사람도 몇 되지 않는다.
 
42
조 간호부가 김달영이에게 가까이하기 시작한 것은 자치회 속에 두 파가 생기어 세력을 다투다가 주먹질이 났을 때다. 이 조정에는 혈맹단 단원이 공적을 올렸었고 사실 자치회나 혈맹단이나 모두가 그의 명령 일하에 가고 오고 서고 하는 판이다. 이 김달영의 의사와 간호원 파견 명령을 거절할 사람은 A읍에는 없었던 것이다.
 
43
그날은 마침 일인 집을 습격해서 적산을 몰수하던 날이라 김달영이는 조 간호원한테 비단 이불 하나와 경대를 하나 선사했었다. 조경애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김달영이 자신도 금후에는 그까짓 이불은커녕 읍내의 땅이며 집이며 물건이며는 언제든지 자기가 필요한 때는 갖다 쓸 수도 있고 처분할 수가 있게 된다고 생각해서 정말 조자룡이가 헌 칼 쓰듯 막 썼던 것이다.
 
44
‘젠장, 이렇게 될 줄만 알았던들 모두 좀 긁어다 쌓아두지 않았나.’
 
45
생각할수록 분하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야마다와 기시모도의 집에서 갖다둔 양복장이며 의자, 비단 이불 두 채에 갖은 필목을 자치회와 혈맹단이 뒤집히면서 송두리째 도로 빼앗긴 사실을 잊기나 한 것처럼 이렇게 미련을 가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단맛을 볼 만하다가 조경애를 빼앗긴 것도 그가 경찰에 붙들려 갔던 동안이요, 지금 강창복이가 주었던 장화를 도로 내라는 것도 그때문이지만 지나간 꿈에는 언제나 사람이 어수룩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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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헐, 이눔의 세상 또 한번 안 뒤집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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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노타이에 완장을 달고 번쩍이는 장화에 곤봉을 질질 끌며 거리를 지나가던 옛날의 자태가 눈물나게 그립다. 그를 보면 누구나 경의를 표했고, 귀치않을 정도로 소매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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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없소?”
 
49
“왜 없습니까. 아이 원, 천만에! 돈은 무슨 돈! 어서 도로 너십시오. 우리를 위해서 밤낮 모르고 일들을 해주시는데!”
 
50
담배가 그랬고 술이 그랬고 쌀이 그랬고 기생이 그랬다. 그러니 그리울 것이 없었고 욕심날 것이 없었다. 술이 고프면 언제나 또 아무 집에나 들어갈 수 있었고 들어만 가면 칙사 대접이요, 음식은 말할 것도 없지만,
 
51
“고 명심이년 괜찮은데 ─”
 
52
운만 떼면 그 자리로 대령이었다.
 
53
“사진 하나 박어둔 것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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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가끔 하는 그의 후회다. 단장 완장을 두르고 대지가 울리게 뚜벅뚜벅 내닫던 장화의 굽소리… 그 사각장군 시대의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두었으면 심지어의 마음의 위안이 될 것만 같다. 말하자면 모든 권세도 갔고, 세력도 위엄도 비로 쓸듯 쓸어가 버리고 간 날의 영화의 상징이란 가죽장화가 유일한 것이다. 아니 또 하나 있다는 것이 먼지가 뽀얗게 앉은 저 책상 위 꽃병 속에 꽂힌 많은 꽃이 있을 뿐인 것이다. 벌써 삼 년이나 되어 빛도 낡았으나 그래도 조경애가 사랑의 표적으로 사다가 꽂아준 선물이다. 꽃이라야 가화요, 준 경애조차 가버렸고 보니 장군 시대의 유물이라고는 장화뿐인 셈이다.
 
55
그 장화를 도로 내라는 것이니 가버린 영화에 대한 정이 애틋할수록 울분이 치밀밖에는 없다.
 
56
아니 뭣보다도 절통한 노릇이 그 조경애가 다른 사람도 아닌 강창복이의 품안에 안겨서 둘이서 의논하고 찾으러 보냈다는 사실이다.
 
 
 

3. 3

 
58
밖이 어두워서 사법 대서인 김달영이는 사무실 문을 닫고 거리로 나왔다. 사무실과 살림집이 한데 붙었으니 집에라도 들어가련만 그대로 문을 닫고는 안으로 향하여 나간다고 소리만 쳤다. 한때 조경애와 단꿈을 꾸어본 후로 통 구미가 당기지 않는 늙은 아내의 상판대기가 보기 싫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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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이 지랄한다던가? 꼴에 걸핏하면 바가질 긁겠다…”
 
60
소금이 쉴 노릇이다.
 
61
거리는 벌써 어둡기 시작하고 있었다. 말이 읍이지 천 호도 못 되는 장터이다.
 
62
전기조차 오지 않아 늦은 가을 절기보다도 한결 추워 보인다. 이 거리의 찬기운이 또한 그의 마음속에 찬바람을 일으켜주었다.
 
63
“축 UN 승인…”
 
64
문득 눈에 뜨이는 것이 빨간빛 글자의 벽보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 벽보 앞에 멍청하니 서본다. 물론 잔 글씨는 보이지도 않거니와 읽어보렴도 아니다. 읽었자 그의 울분을 돋우어주는 소리밖에 안 씌어져 있을 것을 그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벽보를 노리고 보는 것은 좋이 심사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65
김달영은 그 자리를 떠나서 군청 앞길을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다. 알 만한 사람들을 몇 만났건만 경의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것은 반드시 어둡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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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더러운 자식. 저 자식이 금융조합 정가 아닌가.”
 
67
김달영은 또 옛날 시절로 돌아간다. 통행금지 시간에 한번 걸린 일이 있었다. 비가 축축히 내리던 밤이다. 치안대장 김달영은 거나하니 술이 취했으나 책임을 잊도록 취하지는 않았었다.
 
68
“누구냐!”
 
69
하고 회중전등을 지우산 밑으로 버쩍 들이미니까,
 
70
“접니다.”
 
71
“성명도 없이 접니다가 누구냔 말야.”
 
72
“금융조합 정진수입니다.”
 
73
“정진수? 통행시간이 몇 시까진지 몰라? 뭐? 약? 의살 부르지 못해? 인저 시간 외에 다니지 말아. 이번은 용서해줄 테니까!”
 
74
병도 통행시간 전에만 나라는 억설에도 그저 “네” 하더니만 그후에는 벌써 저만큼에서 허리를 꾸부리던 것이다.
 
75
“그렇던 자식이! 못 봐? 뭐 전 닭의 눈이구 난 올빼미 눈이란 말인가? 더러운 개자식!”
 
76
욕만으로는 암만해도 울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원래 공술만 먹어온 김달영이다 더욱이 이렇게 . 혼자서 촐촐히 술을 먹어본 적이 없건만 한 잔 하지 않고는 견디어 낼 것 같지가 않았다.
 
77
군청을 지나면 명월관이다. 벌써부터 계집들의 노랫소리가 새어나온다. 김달영이가 일찍이 치안대장이요, 혈맹단 단장이던 시절에는 내 집삼아 드나들던 집이건만 이미 대장도 단장도 아니요 돈조차도 없는 오늘의 김달영이는 왕위를 쫓겨난 황제가 일찍이 호화로운 옥좌와 아름다운 궁녀들에 둘러 싸이어 살던 궁전 앞을 지나듯 싶은 슬픈 감회로 그 앞을 지나치는 것이었다. 그러니 더욱 울분할밖에는 없는 노릇이다. 명월관을 지나면 중국 요릿집 동해루가 있다. 전기도 안 왔건만 낮처럼 집안이 밝다. 유리창으로 계집들의 그림자도 보인다. 노랫소리도 흘러나오고 ─ 마치 그를 유혹하는 듯이 아니 조롱이나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동해루도 그가 들를 집이 못 된다.
 
78
동해루도 지나치고 천일관 간판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김달영이가 찾아간 곳은 화산옥이다. 술청 앞에는 벌써 십여 명이 둘러섰다. 주거니 받거니 권하고 사양하고 제법 술자리가 어울렸다.
 
79
‘저 자식들이 날 몰라볼 리가 없는데…’
 
80
사실 그럴 것이 장날이라 촌사람두 있겠지만 이 근동 사람이면 일찍이 A읍을 쥐었다 폈다 하던 치안대장 김달영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건만 한 녀석 고개를 끄덕이는 놈도 없다. 죽일 놈들이다.
 
81
‘이전 같았으면 저놈들을 그저…’
 
82
생각지 않자 해도 끓어오르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다.
 
83
“죽일 놈들! 년두 년이지, 저 곰보년이 날 몰라봐?”
 
84
“술 한 잔 주우.”
 
85
“네, 어서 오십시오. 아, 난 누구시라구. 김 주사 어른, 참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요. 왜 혼자서? 저런! 그럼 방으로 들어가셔요. 원, 김 주사 어른이 다 이런 집엘 오시다니. 서울서 요새 색시두 둘이나 왔답니다. 들어가셔!”
 
86
주머니 돈보다는 터무니없이 많은 엉너리다. 들어앉았다간 바가지다!
 
87
“아이, 왜 그러구 섰을까. 얘 경애야, 손님 모셔라.”
 
88
“뭐 경애?”
 
89
귀가 번쩍 뜨인다. 반가움보다는 주머니 돈이 너무 적다.
 
90
“어서 이리 들어오십쇼! 군자야, 얼른 삼호 방 치워라!”
 
91
달덩이처럼 생긴 계집이 뛰어나와서 팔을 끄니 버틸 수도 없다. 설마 이 바닥에 좀 모자라기로니 인질야 하랴 싶어 끄는 대로 끌리어 들어가서 주는 대로 떠끔 받다보니 어느덧 폭 취해온다.
 
92
“너 어째서 하필 이름이 경애냐.”
 
93
“선생님 마음 괴로우시라구요!”
 
94
“허, 이눔 봐라.”
 
95
또 따른다. 따르는 대로 마실밖에. 계집도 수월찮은 주량인지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떠끔떠끔 잔을 낸다. 이렇게 먹기를 두어 시간, 그러고 보니 정신이 홱 돈다. 주머니 돈이 반도 모자란다.
 
96
“아주머니 불러, 어서!”
 
97
아주머니가 들어올 리 없다. 사정을 하다, 큰소리를 하다, 별소리를 해보았자 지난날의 치안대장은 아닐 게 분명하고 보니 그대로 시부저기 내어보낼리도 만무다. 할 수 없이 돈과 시계를 끌러주고 거리에 나온 때는 열시가 지났다.
 
98
인적 없는 거리를 걷노라니 불현듯 대장 시대가 연상된다. 취하기도 했지마는 고요한 거리가 그때의 거리를 연상케 한 것이다. 그는 발을 높이 들어 떼어놓는다. 일찍이 대장 시대의 그 땅이 울리던 가죽장화 뒷굽 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이 들어봐도 바닥이 고무니 실감이 날리가 만무다.
 
99
“오냐, 가서 장활 신고서 한번!”
 
100
달콤한 동경이 샘솟듯 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걸음을 재치었다. 한시바삐 가서 장화를 신고 뚜벅뚜벅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
 
101
“뚜벅뚜벅 ─ 이렇게 ─”
 
102
사각장군 시대의 몸가짐을 해가며 농군들이 처음 체조하듯 발을 높이 사십오도 각을 그으며 내뻗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걷고 있노라니 정말 옛날 호화롭던 시대로 돌아간 듯싶은 착각이 이는데 마침 웬 사람이 어청어청 걸어온다.
 
103
“누구냐!”
 
104
“접니다.”
 
105
“저가 누구냐. 어디 갔다 와?”
 
106
“네, 초상집에 갔다 갑니다.”
 
107
뭘루 보았는지 행인은 설설 기며 대답을 하고는 달아나버린다.
 
108
“흐흐흐흐.”
 
109
속으로 흐뭇해서 콧노래가 다 나온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불러서는 안 될 노래다. 그러다가 다시 몇 걸음 걷던 김달영은 뭣에 놀란 듯 딱 선다. 무엇인지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아까의 그 벽보가 ─
 
110
취중에도 그는 정신이 버쩍 들어 오래오래 몸이 달아서 찾아다니던 원수를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딱 만난 것만 같은 마음의 동요였다.
 
111
“뭣이 빛내라? UN? 당당한 대한민국? 흐흐흐흐, 이것 좀 봐라! 뭐가 UN야. 김달영 씨의 가죽장화가 다락에서 누룩머리를 앓는데 뭐가 어쩌구 어째? 유엔? 아, 이 친구야, 자네 때문에 내 장화가 다락에서 썩네. 이 사람녀석아.”
 
112
침을 퉤퉤 뱉더니만 또다시 뭬라고 중얼거리며 벽 쪽으로 가까이 간다. 그러더니,
 
113
“이 놈아, 내 장화가 엉엉 운다!”
 
114
하기가 무섭게 달려들어서 벽보를 벅벅 뜯어젖히는 것이다.
 
115
그때다. 바로 등뒤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116
“누구냐!”
 
117
돌아다볼 새도 없이 덜미가 억센 손아귀에 꽉 잡혀져 있었다.
 
118
“이눔아, 너 지금 뭬랬지? 그러구 이건 왜 뜯는 게냐! 가자!”
 
119
“가자면 가지요, 모두가 장화 때문이올시다. 그눔의 장화 때문이예요, 비까번쩍하는 가죽장화요!”
 
 
120
〈1949년〉
【원문】장화(長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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