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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와 순사(巡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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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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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와 순사(巡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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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15를 시골서 맞았다. 전국(戰局)의 추세로 보아, 이 몇 달 안으로는 십상 일본이 항복을 하고야 말리라는 짐작이 들기는 들었으나, 그동안을 서울서 그대로 앉아 배겨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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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미워하는 문인회이라, 마지막 판에 이르러선 이 문인회에까지 징용을 내리기 시작하여 주위의 지우(知友)들이 날마다 탄광 같은 곳으로 끌리어 나가는 것을 볼 때 나라고 무슨 신수에 유독 빠져 날 것 같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을 자못 이겨낼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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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울을 떠나는 사람처럼 시골로 전거(轉車)하는 형식의 수속을 밟아, 기류계를 빼 놓았다. 그러니 그적엔 쌀 배급을 받을 수 없어, 한 말에 7, 80원이라는 고가를 주고 소위 야미로 사대어야 하게 되니, 야미 쌀을 그렇게 수월히 또 구할 수도 없었거니와, 어떻게 구한다 하더라도 4, 5식구나 거느린 내 힘으로서는 그 비용을 댈 재주가 없었다. 그런 데다가 징용을 피하는 방법으로 나와 같은 이러한 수속을 취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게 되어 이 기미를 안 노무과(勞務課)라는 데서는 정회(町會)를 통하여 징용장을 떠르는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여 그적엔 집 주소로 연락을 아니 하고 직장으로 하게 되기 때문에 빼 놓고 기류계도 소용이 없이 되었다. 쌀 배급만 밑지는 짓이었다. 결국은 직장에서까지 이들을 빼놓아야 이 노릇을 면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러지 않아도 야미 쌀은 댈 수가 없는데 월급까지 없으면 먹고 살 도리까지 없어진다. 이러고 보면 서울서는 도저히 배겨낼 장사가 없었 다. 그렇다고 우리 같은 것이 시골로 내려가면 그 존재가 더욱 두드러져서 주목이 더 심하다고 시골로 내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올라오는 판인데 좀더 기다려 보며 서울 그대로 있어 보자고 만류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래도 시골은 나를 낳아서 키워준 고향이라,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인정이 있겠지, 다만 무서운 것은 관할 주재소 순사 몇 사람뿐일 것이리라, 그것도 대부분 이 조선 사람일 테니 여간 좀 어루만지면 염려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나는 마침내 짐을 싸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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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사람 순사도 내 생각과는 달리, 우리 편이 아니고 완전히 일본 사람 편이었다. 조금도 속은 적지 아니하고 날마다 찾아와서는 시골로 내려온 이유를 이리 캐고 저리 캐고 참 무서웠다. 무슨 사상객으로 연락이나 하려 내려온 사람처럼 꼭 취급을 하고 달려붙는 데는 구재(口才) 없는 나로선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심장이 나쁘다고 병을 핑계하고 들어 배겨서 곧이곧대로 수양차이라고 해도 그건 내 소리뿐이요 그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한 일 삭쯤 왔다갔다 하더니 한다는 말이 "만일 내가 당신을 붙들어 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원망하지 마시오, 그것은 내 개인의 의사는 아닐 테니까, 그래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만일의 경우가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내 심사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시오." 하고 간다. 가슴 뜨끔하는 소리었다. 공연히 내려왔구나, 필야엔 아무래도 붙들리고 말 것 같아서, 다시 서울로 올라갈까 하다가도 그게 또 그들을 더욱이 의심케 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실로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쩔쩔 매다가 8·15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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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가 예상보다 좀 일찍 왔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무리 뽐내도 머지 않은 앞날에 손을 들리란 것은 추측이 되었으므로 나는 그 순사들의 단련을 받아 가면서도 방안에 깊숙이 들어앉아서 밤이면 원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갈 때 어떤 인쇄소를 경영하는 친구와 일본이 손만 들면 출판업을 하자고 이미 약속을 하고 그리고 항복을 하면 곧 그 이튿날로 올라오는 그 친구의 다짐까지 받고 내려왔던 차였다. 그래 나는 내 책도 낼 때에 제일 먼저 수필집을 내리란 생각으로 이날도 나는 순사가 다녀가기를 기다려 마음놓고 앉아서 수필을 정리하고 있는데 가사이란 벗이 성큼 들어서더니 전과는 달리 이상한 태도로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면서도 그대로 마음이 못 놓이는 듯이 몇 번이나 좌우를 둘러 살피며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 하면서 졸연히 입을 못 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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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슨 일인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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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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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항복을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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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귓속말이나처럼 눈을 둥글하게 뜨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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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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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항복! 어디서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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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더니 자기 아는 친구가 단파로 들었는데 오늘 오정 때 항복 방송을 일본 천황이 울면서 하는 것을 들었더라고 한다. 믿음직한 일이긴 하였으나 너무도 낭설이 떠도는 시절이라, 내 귀로 직접 듣지 못하고는 딱히 믿을 수가 없어 들은 대로 혼자만 알고 있었는데, 그날이 마침 우리 시골 장날이 라, 읍에 들어갔던 동리 사람들이 저녁때 돌아들 와서 전하는 말이 분명하게 그런 뜻을 전하였다. 징병으로 뽑혀서 차를 타러 나가던 아이들도 정거장 마당에서 모두 도로 돌려보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읍에서는 지금 만세 준비로 태극기를 만드느라고 한참 법석이더란다. 그때에야 나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단박 사랑방으로 뛰어 들어가 제일 눈꼴틀리던 ‘가미다나’를 떼어내다 발로 짓밟아 돼지우리 안에다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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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녁을 먹고 앉았는데 평소에 의사를 서로 통하고 가까이 지내던 벗 7, 8인의 연서로 일본이 항복을 했으니 치안회를 조직하자고 금융 조합으로 급히 와 달라는 편지가 떨어졌다. 곧 달리어 갔더니 장관은 그게 장관이었다. 어제까지 찾아와서 이리 캐고 저리 캐고 하면서 붙들어 가도 그게 자기 의사는 아닐 것이라고 아주 뽐내고 위협을 하며 이질거리던 순사가 둘씩이나 금융 조합 정문 어구에 섰다가 마주 달려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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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선생님 어서 빨리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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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서도 어떻게 좀 곱게 보이려는 수작으로 내 옆을 떠나지 아니하고 줄곧 따라다닐 때 나는 그 가증스럽던 꼴을 지금도 못 잊거니와, 며칠 후, 주재소 다락에서 일부 타다 남은 살인 명부가 발견 되었을 때, 아니 그 명부 속에 내 이름도 있더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짐짓 놀라는 나머지, 세상에서 그 순사처럼 불쌍해 보이는 위인이 없었다. 며칠뒤 이 순사의 행동이 또 가관이었다. 동리 청년들이 때려 주겠다고 한 50여 명의 군중이 덤벼들 때, 그 주위에도 사람이 무수하였건만 죽이려고 살인 명부에까지 올려 놓았던 나를 붙들고 살려 달라는 그 이유는 어데 있었던 것일까. 나는 지금도 못할 짓은 혼자 하고 도리어 그 사람에 아부를 하며 돌아가는 축들을 목도할 때마다 문뜩 이 순사 생각이 새로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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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지〕《산업시보(産業時報)》
【원문】8·15와 순사(巡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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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7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