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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석(木石) 부인 ◈
◇ 제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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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9~10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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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석(木石) 부인
2
제2장
 
 

1. 제1절

 
4
이 특이한 송씨 가족과의 인연은 이날 저녁으로붙터 시작이 되었거니와 이 반년에 걸친 송씨 가(家)에서의 체류기를 기록하기에 앞서서 나는 우선 송씨 가를 형성하고 있는 구성원을 개벽적으로 소개해야만 할 것 같은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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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지루하더라도 우리는 이 설명을 들어둘 필요가 있다.
 
6
물론 송씨 가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다.
 
7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물론 송필수 부부가 되겠지만 순서로 보아 그의 부친인 석경(石耕) 선생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이러한 나의 의도는 석경 선생이 이 송씨 집안의 가장이라든가 송씨 가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의 하나래서만 아니다. 석경 선생은 나이 이미 칠순을 넘은 고령이기는 하지마는 가장으로서나 송씨 가의 행장기에서의 위치로나 의연 중추적인 인물이기 때문인 것이다. 아니 석경 노인이 이 송씨가의 갖은 희비극의 연출자일지도 모른다. 송씨 집안이 구성된 모습을 한말로 표현한다면 나사 빠진 기계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석경 노인으로부터 아들부부는 물론 손자 손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피는 외줄이었다. 석경 노인한테는 나이 이십 년 가까이나 틀리는 아내가 있기는 하지만 출신이 기생이었던지라 남녀간 소생이 하나도 없다. 석경 노인이 아직 장년시대에 얻은 소실이 정부인의 뒤를 이어 안방 차지를 한 것이다. 이 소향이라는 기생 이전에도 한둘 노인의 수청을 든 기생이 있었지만 거기에서도 혈육이 없어 십여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건만 직계 아닌 사람은 단 하나도 끼여 있지가 않은 것이다. 이런 혈족끼리만으로써 구성된 송씨 가이면서도 나사못이 빠진 기계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들의 타고난 개개의 성격들이 모두가 특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특이한 개개의 개성들이면서도 끽소리 없이 제대로 같은 생활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고 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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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혈통과 관습 , 이념, 생활 방식, 그리고 이해까지도 달리하는 많은 종족들이 같은 지구상에서 생을 영위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다.
 
9
내가 그들과 헤어진 지도 이미 일년 가까이 된다. 그들과 알게 된 날짜로부터 따진다면 일년 반이나 되는 셈이다.
 
10
그렇지만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내게는 의연 한 개의 수수께끼이다. 인물들도 그렇거니와 그들의 생활 양식이란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11
내가 이 이야기를 쓰는 데 흥미를 갖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다.
 
 
 

2. 제2절

 
13
가장 되는 석경 영감은 갑선생이니까 일흔두 살이다. 나이 칠순이 넘었고 보니 누구나 꼬부랑 영감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석경 선생은 꼬부라지기는 고사하고, 참대처럼 곧던 것이다. 잔존한 키에 몸도 가냘픈 편이어서 그저 조그만 영감쟁이란 인상이지만 크만큼 다부져 보인다. 대추나무방망이란 별명으로 동리 사람들이 부른다지만 어디를 뜯어보나 빈 구석이란 손톱만큼도 없다. 양쪽 어깨가 약간 안으로 굽어 든 것 같은 느낌은 주지만 이것도 나이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체격인 것이다.
 
14
티 한 점 없이 맑은 얼굴은 보기만 해도 귀인이란 인상을 준다. 거기다가 눈이 부신 긴 수염이 얼굴을 더 한층 고귀하게 보여준다. 나는 일찍이 직업 관계로 작고한 이동 빽 영감을 자주 만날 기회를 가졌거니와 그를 대할 때 늙어서 그런 수염을 가져보았으면 하고 탐을 냈었지만 성경 노인의 수염이 그 이동백 영감을 연상시켜 주었었다.
 
15
한번은 아들인 송필수 씨한테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은 성싶다. 그의 며느님되는 송씨 부인도 그 자리에 있었던 성싶다. 나의 말에 만족한 듯이 웃음기를 입가에 띠었을 뿐이었는데 그의 아내인 인애 여사는, 이 남편의 만족해 하는 웃음에 적이 불만인 표정이다.
 
16
"부인께서두 이동백 노인은 뵌 일이 있으십니까?"
 
17
이렇게 묻던 내 말에는 대답도 않고서,
 
18
"이렇게 말하면 아드님은 노여우실지 모르지만 전 아버님을 뵈울 때마다 문득 대원군이 연상되어 못견디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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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것이다.
 
20
물론 그때는 나도 아직 석경 선생의 사람됨을 모르던 때라 그것이 무슨 뜻인가 했었지만 날이 갈수록 이 며느님의 시아버님 평은 정당했다고 감탄이 되었었다.
 
21
정말 무서운 고집이었다. 침실 평생을 두고, 자기가 한번 한 말을 뒤집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한번 하고자 한 일은 누가 뭐라든 중단은 고사하고, 변경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22
영감 한테는 여자 대학 , 음악과에 다니는 딸이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서 해사하게 생긴 여성이었다. 은희라는 이름이었다. 은희는 작년에 스물셋이었으니까 해방 후 십 년간은 전쟁 물결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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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인 인애만 해도 나이 이제 겨우 서른여섯이고 보니 여성으로서 성숙기에 들면서 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송필수와의 결혼생활 십오 년간에 열다섯을 위로 열둘, 여덟-이렇게 세번 아이 낳이를 했다지만 위로 형제를 뽑고, 끝으로 여덟 살 난 딸 이후로는 거의 단산을 하다시피 하고 있는 인애다. 거기다가 몸은 약해빠져도 강단이 있어 서른이란대도 곧이들을 만큼 앳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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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아버지가 완고하다고 하지만 지금 세대에 파마쯤은 용서됨직도 한 노릇이다.
 
25
그러나 조수처럼 밀려든 양품도 이 노인이 고집 앞에 와서는 딱 멈추어지고 말았었다. 젊은 시누이와 올케는 미장원에 갔다 오는 길로 골방에 감금이 되었던 것이다.
 
26
"설마 그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었답니다. 한번 생벼락이 내릴 것은 둘이 다 각오를 했었어요! 그랬더니 왠걸요. 이십사 시간 감금이었답니다. 그랬거든 언제나 해주셨으면 좋지 않아요! 다시 가서 품고 오라는 거예요! 그 덕에 머리는 이때까지 전기 고문을 당하지 않고 견딘답니다…"
 
27
"그럼 시누이 되서는 송 선생 매씨도 아직 파마를 못하고 있습니까?"
 
28
"할 겝니다. 그러니까 대여섯 시간이면 올 수 있는 집에도 통 오지를 못하죠."
 
29
"뿐이겠어요? 입술이고 뭐고, 현대 여성들이 하는 일이면 무엇 하나 아버님 비위에 맞는 게 있겠어요? 오라버니가 한 달에도 몇 번씩 서울을 오르내리니까 돈 걱정은 없겠다 그 벼락을 맞자구 집에 오구 싶겠습니까? 그두 어머님이나 계시다면 모르지만…"
 
30
지금 석경 노인을 모시고 있는 노인 여성은 소실로 있기도 하거니와 지금도 옛날 습관대로 소실 대우밖에 하지 않고 있는 터다.
 
31
"완고해서라기보다두…"
 
32
이들의 말이었다.
 
33
"당신이 완고하다는 인식을 일부러 고집하기 위해서라구 할까요! 아직두 일년에 봉제사가 열여섯 번입니다. 제물이 어디 하나 마음에 들지 않으셔도 단식이십니다. 우리는 감금을 당해도 몰래 음식을 갖다 먹는데 하루구 이틀이구 물 한 모금 안 잡수시니 사람이 죽을 일 아닙니까. 우리가 이런 불평을 하는 줄만 아신다면 최소한 열흘간 금고 처분입니다. 호호호호…"
 
34
이런 예비 지식을 갖고 있던 나였거만 영감의 고집에는 벌려진 입이 닫혀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35
송씨 집에 간 지 닷새 되던 날 아침이었을 것이다. 그날서야 나는 비로소 붓을 들었었다. 그동안은 송씨는 마치 서울 사람이 시골 사람을 끌고 다니듯 산으로 들로 호수로 내로 끌고 다니다가 그날서야 비로소 해방을 시켜주었던 것이다.
 
36
화실이 없으니 노인이 쓰는 큰사랑을 이용하기로 하고, 과수원 산장에 있는 안락의자를 가져다 앉게 한 것이 영감의 비위를 상했던 모양이다. 해방 직후에 한번 들여왔다가 내몰린 바로 그 의자다.
 
37
"이 의자 썩 치우지를 못하느냐? 내가 싫다는 노릇을 넌 기어코 시키려 드니 그게 대체로 무슨 심사냐 말이다."
 
38
"잠시두 아니구 다른 데 앉으시면 불편해 못견디십니다. 독일제가 돼서 색두 고티가 나구 대감껜 아주 어울립니다."
 
39
무마해 보려던 나의 노력도 노인의 노염을 샀을 뿐이었다.
 
40
"난 대감이 아니오. 대감은 판서부터지 난 참판 벼슬밖에는 못한 사람이오."
 
41
아들은 감히 말도 못 붙이고 서 있기만 했었다. 나도 난처는 했지만 그래도 뒷수습을 해보려고 말을 붙이려니까,
 
42
"초상이란 좋은 얼굴을 그리자는 것이지 내 심지가 이렇게 좋지 못한 때 그릴 필요가 있소? 내 그리고 싶으면 다시 말을 할 테니 가 있으시오."
 
43
노인은 이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지팡이를 짚고 뜰로 내려서더니 은행나무 앞 연못가로 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서서만 있었다.
 
44
그래도 노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연못가에 세워놓은 조그만 석등(石燈)을 짚고 이쪽을 바라보며 이런 소리를 한다.
 
45
"그렇다고 노형한테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오. 내 자식이 불미해서 한 말이지."
 
46
"우리 아버지로선 칠십 평생 최대 양보를 하신 셈입니다."
 
47
송씨가 나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한 말이었었다.
 
 
 

3. 제3절

 
49
고집쟁이 영감이니 완고할 할아버지니 하는, 한마디로 불러버리기에는 석경 노인은 너무도 주관이 세었다. 완고하다면 완고한 노인이었지만 그 완고한 노인들의 거의 전부가 걸핏하면 자기네 조상을 내세우기를 좋아하는데 석경 노인은 그렇지도 않았다. 봉제사는 조상에 대한 의리라는 것이다. 그의 조상 숭배는 그대로 무정견한 것도 아닌 것이 송우암의 자손이라는 것은 내세우면서도 우암 선생한테 좋은 감정은 갖고 이?ㅆ지 않고 있다. 우암이란다면 국민학교 아동들도 다 아는 그런 학자다. 인조로부터 효종·현종·숙종의 4대에 걸치어 좌의정까지 했고 보니 그만큼 명분도 있으려니와 특히 주자학에 있어서는 율곡보다도 치는 학자다. 「송자대전」(宋子大全)의 백이 권이며 「예경설」(禮經說)십이 권, 「절작통편」(節酌通編)의 이십오 권 같은 문헌은 그의 학자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명저겠고 역대 왕에의 그 극진한 충성과 탁월한 정견은 정치가로서도 공신에 속하는 이조의 거물이다. 도끼 정승도 내 조상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상정인데 이 우암 선생을 직계손인 석경 노인은 여지없이 내리깎는 것이었다.
 
50
우암 선생이 그 존명주의(尊明主義) 사상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51
"이렇게 말한다고 노령은 나를 완고한 쇄국주의자로 돌리지는 마오. 흥선군 같은 쇄국주의는 나도 싫어하는 사람이오. 제 국가와 제 민족이 있으면서 남을 섬긴다는, 그런 사람이 나는 도시 싫단 말이오. 명나라와 친하면 그만이지, 존명까지 할 것은 없지 않소? 그렇다고 흥선대원군처럼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그런 자존도 난 멸시하오. 한 개인이 국가 없이 살지 못하듯이 한 나라도 다른 나라와 화치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철칙 아니겠소? 내가 내 자식을 멸시하는 것도 실은 그때문입네다…"
 
52
석경 노인은 실로 뜻밖의 말을 하던 것이었다.
 
53
나는 내 귀를 의심했었다. 그때까지의 나는 석경 노인이 완고해서 그렇지 자기 아들을 존경하느니라고만 믿어왔던 것이었다.
 
54
"… 내가 내 자식을 멸시하는 까닭인즉 줏대가 없기 때문이오. 그야 공부도 많이 했소. 대학도 나왔고, 외국 바람도 쏘였지요. 상재가 있어 돈도 잘 버는 모양이오. 그렇다고 사람이 다 된 것은 아니거든. 사람은 줏대가 있어야 하오, 왜놈이 들어오면 왜놈한테 달라붙고, 양인이 들어오면 또 양대인과 섭쓸려서 제 주관을 잃어버리면 결국은 또 제이세 이완용이밖에 될 수 없지 않소? 나두 왜놈 물건이 좋은 줄 아오, 왜놈 물건보다 서양 물건이 더 좋은 것도 알구. 요전의 걸상만 해도 그렇지, 가죽으로 만들어 푹신하니 편한 줄 어째서 모르겠소? 노형은 날 완고한 고집투이 영감쟁이라구 속으로 욕했으리다만 그 걸상을 어떻게 산 줄 아오? 영어, 외국말 마디나 한다구 해방통에 쫓아다니면서 긁어모은 게라오."
 
55
노인은 또 이런 소리도 하던 것이었다.
 
56
"인제 두고 보오, 내 자식이지만 아라사 놈들이 들어오면 또 아라사 놈들하구 부동이 돼서 돌아다니지 않나? 내 자식이 아라사 말도 좀은 합네다요… 우리 나라가 왜 당했던지 아오? 왜놈들이 먹었다구들 하지만 후손들한테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야. 먹긴 누가 먹었어? 혹여 가시가 있을까, 질겨서 씹지를 못할까 갖은 정성을 들여서 갖다바쳤지, 그 사람넨 먹이주느라구 애쓴 사람들입네다요. 먹어 주느라구… 집안 쌈질은 하지, 벼슬은 팔아먹지, 끝판엔 참봉 하나에 얼마나 한지 아시오? 천 냥 하던 것이 이삼백 냥에 들구 났소그려. 병정 면제해주는 데 얼마 썼는지 아오? 쌀 한 섬이면 너끈했었다오! 관가에 청원서 한 장 내는 데도, 돈 재촉하는 데도, 돈 받으러 갈 때도, 돈 받고 나서도, 돈… 팔아먹다 팔아먹을 게 없으니까 나라 팔아서 나누어 먹은 나누어 먹은 거요. 그러구서 뺏긴 뉘가 뺐었나? 이 때는 아라사보구 먹어달라구 뗄 지어 다니구, 저 패는 청국한테 추팔 보내구, 또 한패는 흑여 딴 패한테 체일까봐 눈이 벌개서 법국 사신 될곱이 끼어 쫓아다니었지. 그러는 통에 이완용이가 냉큼 팔아먹구서 나자빠졌지? 내 자식? 가만 두면 이완용이와 뭬 다를 데가 있을 상싶소?"
 
57
그것은 사양도 겸허도 아니었다. 무서운 증오다. 아니 증오라면 그래도 애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멸시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58
한번은 또 이런 소리도 한다. 그날은 아들도 뜰 아래 있을 때였다.
 
59
"… 인저 내가 죽기라두 하면 얼씨구나 하구서 저희들 맘대루 하겠지, 자동차에다 싣구 법석을 할 겝니다. 죽었으니까 뭘 알랴 싶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지. 상여애 굴건 제복을 않으면 내 일곱 매끼를 끊구서 벌떡 일어날걸! 대가릴 지져가지구 제청에 엎드려? 어디라구! 어림도 없지. 혼이라도 와서 대강일 묵사발을 만들어놀 겐데…"
 
60
"명령이셔요."
 
61
이들은 또 이렇게 나의 귀에 속삭여주고 있었다.
 
62
"당신께서 완고하시다는 것을 일부러 보이시기 위한 완고요, 고집이시지요. 해방 훕니다. 사법 관계로 외국 사람들을 정해서 저 연못가에서 파티를 연일이 있었어요. 물론 아버지께서 시욍레 가시구 안 계신 틈을 타시였지요. 그랬더니 내일 오실 어른이 무엇이 못마땅하셨던지 그날루 돌아오셔가지군 쏘실 줄도 모르시면서 제 엽총을 들구 나오셨습니다그려! 그래, 그만 혼비백산을 해서 그런 분이시랍니다."
 
63
"그럼 엽총 잘 간수하십시오."
 
64
농담처럼 했지만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노인 앞에 나가는 것이 어쩐지 겁이 났다. 놓아먹인 말처럼 살아온 나인지라 어느 때 어떤 실수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4. 제4절

 
66
이윽고 의자로 해서 중지가 되었던 초상화 문제가 해제가 되었다. 만 일주일 만이 었을 것이다.
 
67
그러나 막상 시작을 하려 들고 나니 실로 딱한 사정에 부딪치고 말았다. 노인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가 없던 것이다.
 
68
그까짓 그리는 동안이 얼마나 되겠기에 그동안만 참으면 되지 않으냐 하면 그만이 되겠지만 나의 못된 버릇이라는 것이 그것을 허락지 않는 것이다. 술 많이 하는 사람이 대게 담배를 즐기지 않는 법이건만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기는 하다. 입에서 술기가 가시어야 비로소 담배 생각이 난다. 그런 나면서도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 깊은 생각을 한다든지 작품 제작을 할 때는 담배를 줄창 입에 다는 버릇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마도로스다. 물론 해방 후부터 골통대로 변한 것이지만 '스트리트' 타는 향기가 코를 콕콕 짤러주어야만 일종의 영감이랄까의 창작적인 감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스트리트만 담배 속에 그 무슨 자극제가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흐리터분하던 머릿속도 이 담배 향기가 코 속을 자극하면 아편과 같은 효과를 내어주던 것이다. 해방 직후 우연히 사서 피운 후로 몸에 배다시피 되어 있어 지금은 거의 생리적이다.
 
69
이 당돌한 이야기를 석경 노인한테 이해시킨다는 것은 거의 절망에 가까운 노릇이었다.
 
70
"어떨까요? 방법이 없을까요?"
 
71
송씨는 난처해하는 눈치더니,
 
72
"어떨까요? 도리가 없겠습니까?"
 
73
하고 내게다 되레 묻는 것이다.
 
74
담배를 피우지 않고 제작을 할 도리가 없겠느냐는 소리다. 이 반문에 나는 송씨보다도 더 난처했다. 그렇다고 골통대를 몰고 석정 노인 앞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엽총을 들이대지 말란 법도 없다 싶었다.
 
75
"어디 해보십시다. 작품이 좀 덜 되는 것이 낫지 엽총에 맞아 쓰러져야 쓰겠습니까."
 
76
하고 나는 웃었는데도 송씨는 이 앓는 사람 표정이다.
 
77
송씨도 교양이 있고, 또 예술가에게 예술적인 감흥이 얼마나 중대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술집에서 한 이야기로도 짐작이 되거니와 그 뒤의 나를 정해준 그 편지에서도 충분히 확인되고 있다. 송씨 집에 와서도 그는 예술가인 나의 자존심을 혹시 상할까 해서 일상 회화에서도 몹시 신경을 쓰는 것으로 미루어보아도 짐작이 되었다.
 
78
"어쨌든 해보겠습니다. 선천적인 것도 아니고, 불과 십 년간의 습성이니까요…"
 
79
이렇게 그날 나는 처음으로 석경 노인 앞에 화필을 들고 섰던 것이다.
 
80
그러나 나는 그 어쨌든이란 나의 생각이 실로 무모한 생각이었음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딧물이 켜켜 앉은 나의 머릿속에서는, 감흥은커녕 찬바람만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머릿속은 녹슨 기계처럼 돌아가지를 않았다. 석경 노인의 얼굴의 특징은 수북한 눈등과 한줌 덥석 집어다 붙인 것 같은 겉눈썹에 있었다. 이 두 줌의 곁눈썹 사이를 산둥성이처럼 미끄러져 내려간 코의 인상이 그대로 이 노인의 고집 이었다. 눈도 사암했다. 그러면서도 전체의 균형으로 보아 약간 평면적인 감이 있는 광대뼈와 두툼한 입술 밑으로 차차분하게 빗겨내린 것 같은 하이얀 수염이 상부의 사암기를 덥어주고 있다. 옆으로 볼 때에 목뼈가 유난히 나온 것이 퍽 인상적이었는데 정면으로 앉고 나니 수염이 가리어 유감이었다.
 
81
어쨌든 특징이 많은 얼굴이었다.
 
82
그렇거만 삼 년 동안 침이 마른다. 머리도 상기가 되면서 짜증만이 나는 것이 있다. '이러구야 작품이 될 수가 있나, 초상화라는 계약이 없다면' 이런 잡념이 거미줄처럼 엉킨다. 오직 스트리트의 그 코 속을 뚫ㅇ고 묻어오는 니코틴 냄새만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콘 속이 싸아 하면서도 브라질 커피 볶는 내가 나는, 그 독특한 담뱃내를 한 모금 풍긴대로 머릿속의 모든 잡념이고, 감금이고, 거미줄이고가 싹 걷힐 것만 같다. 그러나 이 고충을 노인한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 이야기한댔자 이혜될 리도 만무한 일이었었다.
 
83
삼십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 내게는 하루처럼 길었다. 나는 땀만 흘렸었다. 아무리 괴롭다가도 붓만 들면 오직 즐거울 수 있던 나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로 고역이었다.
 
84
화구를 챙기어 큰사랑 받침에다 넣어놓고 송씨를 따라 시내로 나왔다. 신록은 어느새 녹음으로 변해 있었다. '동아뱀'이라는, 그로틱한 이름의 다방에서 냉커피를 나누고, 나는 회사로 가는 송씨와 헤어져서 며칠 전부터 나의 숙소로 되어 있는 호숫가의 과수원 산장으로 돌아왔다. 주택지로부터 3마장 가량의 길이 오늘따라 멀게 생각이 든다. 오늘의 실패를 나는 오로지 담배에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논둑길을 걸으며 생각하니 그것은 담배의 탓만이 아닌 것 같다. 창작력의 고갈이었었다. 사고와 지식의 축적을 생명으로 하는 예술가의 머릿속에서 먼지만 풀싹풀싹 나고 보니 생명의 약동이 생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서운 절망이었다.
 
85
나는 태양이 무서워졌다. 태양이 발하는 광선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공포다. 현기증이 안다.
 
86
나는 어떻게 나의 숙소로 돌아왔던지도 모른다. 열시 반 가량 해서 송씨네 집을 나온 것이 분명했건만 산장에 돌아오니 한시경이나 되었던 것이다. 송씨 집에서 시내까지를 이십분 잡고 다방에서 삼십분을 잡는데도 3마장 길에 한 시간 이상이 소비되었던 모양이었다.
 
87
이렇듯 장지에서 돌아오는 상주 그대로의 처량한 나를,
 
88
"이제 돌아오십니까?"
 
89
하고 맞아주는 사람이 있다. 과목밭지기 김 성방네 식구의 음성치고는 너무도 고운 음성에 고개를 번쩍 든 나의 눈 속으로 응접실 초록 커튼 사이를 헤치고 여인의 하이얀 얼굴이 달려든다. 뜻도 못한 손님이었다.
 
90
"아, 와서 계셨군요! 오래 되셨습니까?"
 
91
"아뇨, 한 시간쯤밖에…"
 
92
여름 한낮의 햇살에 애여서인지 핼쑥한 웃음이다.
 
93
"오분만 오분만 하다가 초춥병이 들고 말았답니다. 집양반은 회사루 가실게구 벌써 돌아오셨음직해서 왔더니만… 어디 들르셨었군요?"
 
94
"네, 잠깐."
 
95
송씨 집에 내려오던 날 저녁에 한 번, 스치는 정도로 또 한 번─ 이렇게 단 두 번밖에 본 일이 없거만 친정 오라비처럼 손이라도 잡아줄 듯이 맞아들어 주는 송씨 부인 앞에서 나는 몸을 어떻게 가졌으면 좋을지 몰랐었다.
【원문】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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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목석 부인 [제목]
 
  이무영(李無影) [저자]
 
  1962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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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