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 ◈
카탈로그   본문  
1939년 4월
백신애
열아홉 가을,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든 소녀 여행자가 되어 러시아에 밀항하며 겪는 내용.
1
나의 시베리아방랑기
 
 
2
나는 어렸을 때 ‘쟘’ 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개구쟁이 오빠는 언제나 “야 잠자리!” 하고 나를 불렀다 호리호리한 폼에 눈만 몹시 컸기 때문에 불린 별명이었다.
 
3
나는 속이 상했지만 오빠한테 싸움을 걸 수도 없어서 혼자 구석에서 홀짝홀짝 울곤 했다.
 
4
울고 있으면 어머니는 또 울보라고 놀리셔서 점점 더 옥생각하여 하루 종일 홀짝거리며 구석에 쪼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벽에다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5
내가 홀짝거리던 그 구석 벽에는 세계지도가 붙어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홀짝홀짝 울 때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 지도 위에 선을 그으며 ‘여기는 미국! 우리 집은 이런 데 있구나!‘ 하며 혼자 재미있어 했다 그럴 때 누군가가 러시아를 가리키며
 
6
“여기는 북극이라 사람이 살 수 없단다. 낮에도 어두컴컴하지. 그리고 오로라를 볼 수 있단다.”
 
7
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북극, 오로라, 낮에도 어둡다, 라는 말에 ‘어머~! 멋있는 나라겠다.‘ 라고 생각했다. 십삼 세 소녀의 꿈은 끝없이 펼쳐졌다. 그때부터 나의 홀짝홀짝 구석에 붙어 있는 세계지도는 내 생활의 전부인 듯이 생각되었다. 북극, 오로라만이 아니라 레나 강도 찾아내었고 바이칼 호도 우랄 산도 나의 아름다운 꿈속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8
“언젠가 꼭 레나 강에 조각배를 띄우고 강변에는 자작나무로 된 통나무집을 짓고 눈이 하얗게 덮인 설원을 걸으며 아름다운 오로라를 바라볼거야! 그리고 초라한 방랑시인이 되어 우랄 산을 넘을 땐 새빨간 보석 루비를 찾아 볼가의 뱃노래를 멀리서 들을 거야.”
 
9
라는 뱃노래를 멀리서 듣는다. 내 머릿속은 공상의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10
어떻게 나 같은 울보 잠자리가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이런 꿈에 젖었는지 조금 이상하다. 정말로 나는 이상한 여자애였다.
 
11
이 이상한 여자애에게도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쌓여 열아홉 살의 봄을, 아니 열아홉 살의 가을을 맞이했다.
 
12
드디어 찬스가 왔다. 감상의 오랜 꿈은 빨간 열매로 익어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든 소녀 여행자가 된 것이다.
 
13
누가 알았을까! 이 소녀가 바로 행복과 애정으로 가득한, 따뜻한 가정을 빠져나온 마음 약한 잠자리란 것을.
 
14
게다가 난,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얌전한 모습을 한 채 허용될 수 없는 모험에 가슴을 콩닥거리며 홀짝홀짝 울며 길러온 꿈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15
밤중에 고향을 나올 때, 병든 친구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난생 처음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다.
 
16
원산에서 배로 웅기까지 가는 동안 짧은 단발머리를 볼품없이 틀어올려 시골 여자애로 변장을 했다.
 
17
배가(아마 이천 톤 정도의 상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웅기항으로 들어갈 때 선객은 모두 내릴 준비로 분주했지만 나는 재빨리 폼을 감출 장소를 찾느라 분주했다. 마침내 선객들이 내리기 시작하자 나는 초조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옆에서 누가 보았다면 내 눈은 새빨갰을 것이다.
 
18
“그렇지.”
 
19
하선객 속에 섞여 있던 내 눈에 갑자기 뛰어든 것은 변소였다. 그래서 변소 안에 숨어 배가 가는 곳까지 어디라도 가자, 만약 도중에 들키면 그뿐이다, 라고 마음을 정해버렸다. 어떻게 그렇게 대담했을까!
 
20
그로부터 다섯 시간 웅기항에서 닻을 올리기까지 변소 안에 쭈그리고 앉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다리가 저려 오고, 아니 막대기가 되었다가 돌이 되고, 그리고는 어떻게 됐는지 무엇이 됐는지 알 수 없었다.
 
21
수상경찰의 선내 검사가 끝나고 배는 닻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행이 수상 경찰의 눈은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 날카로운 경찰들도 변소 안에 페르시안 고양이로 변한 잠자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이것으로 첫 난관은 무사히 통과한 셈이지만 앞으로가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22
웅기항을 출발하여 잠시 지난 후 누군가가 변소 안에 들어오는 것 같아 숨을 죽이고 귀를 나팔처럼 벌려 바짝 기울였다.
 
23
“으흠.”
 
24
들어온 사람은 크게 헛기침을 하고 문을 노크했다. 나는 눈을 감고,
 
25
“나무아미타불.”
 
26
일어서려 뭐가 되어버린 건지 모를 정도로 저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문이 확 열렸다.
 
27
문짝 뒤로부터 그 사람 가슴속으로 뛰어드는 애인처럼 쓰려져버렸다. 그 사람은 놀라서 잠시 말도 안 나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28
“부탁입니다. 살려주세요. 내 부모님은 러시아에 있습니다. 제발 러시아에 가게 해주세요.”
 
29
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눈물까지 흘렸다. 눈물은 정말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30
“안 돼요. 밀항하는 걸 들키면 죽어요!”
 
31
그 사람은 가장 먼저 이 말을 하고 무서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민첩한 내 눈에 비친 그는 젊은 남자로 아름다울 리 없는 삼등실 보이의 면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치스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다만 무작정 정말로 무작정 한시라도 빨리 구출 받고 싶다는 일심으로, 열심히 내가 어여쁜 처녀라는 것을 알리고자 안달을 했다. 여자만의 무기 ! 그것을 가지고 그 남자를 극복하고자 하는 무서운 생각이었다.
 
32
“아아, 용맹스런 세상의 젊은 남성들이여 ! 이렇게도 약한 인종인가!” 라고 탄식할 마음의 여유는 없었지만 나는 아무튼 승리를 쟁취했다.
 
33
최후의 장면이 닥친다면 그때는 또 제이의 여자의 무기가 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34
“유복한 가정의 외동딸, 게다가 청순하고 허위를 모른다. 나한테 반했으니 장래에는 이런 삼등실 보이 따위는 우습지. 당당한 사위가 되는거다!"
 
35
라고 그가 진심으로 자각하게까지 유도해가는 것……. 이건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정말로 순수한 처녀였고 아름다웠으니까 그는 무지하기 때문에 이런 나의 본질을 알아도 멍청하게 속아 넘어갈 것이다.
 
36
그래서 나는 변소 안에서 선실 아래로 철 계단을 따라 내려가 뱃짐과 함께 밀항 쥐가 되었다. 그는 나를 선녀처럼 대하며 더구나 사랑을 동경하면서 먹을 것까지 갖다 주고 위로해주었다.
 
37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쑥 내밀 정도로 닮아빠지진 않았지만 아무튼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새까만 선저 ! 귓속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심장은 기쁨으로 떨렸다.
 
38
시간은 흘러 십여 시간 뒤 드디어 배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것 같았다. 그 보이의 마지막 경고를 받게 되었다.
 
39
“난 모릅니다. 곧 게베우의 군인이 조사하러 올 겁니다. 그때 들켜도 내 말은 하지 마세요. 들켜도 정말 난 몰라요.”
 
40
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질린 듯이 느껴졌다. 물론 내 간도 콩알만 해졌다. 잠시 후 시끄러운 구두 소리와 함께 게베우 군인이 직접 배 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총살당하는 것도 그렇게 무의미한 최후라고는 할 수 없어. 푸른 하늘 아래서 몇 발의 총탄을 맞고 픽 쓰러져 죽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어쩌면 혹, 총살 오 분 전에 구출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운명을 이어받지 말리는 법도 없고, 아무튼 될 대로 되라, 라고 생각하며 화물 밑에서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41
그러나 나는 한없이 행운아였는지 게베우의 눈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42
“정말 다행이었어. 오늘밤 안에 이 배에서 도망가면 돼.”
 
43
라고 그 보이 씨는 내 옆에 와서 기뻐해주었다.
 
44
그리고 열한 시간이 경과한 한밤중이었다. 갑판에서는 인부들이 화물을 내리려고 몰려들었다. 나는 남자 모습으로 변장하고 인부 속에 섞여 들어가 그 보이 씨에게 일금 삼십 원을 답례로 건네고, 갑판에서 무려십칠팔 척 아래에 있는 선창을 향해 두 눈을 꼭 감고 펄쩍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는 순간 양 귀가 공중을 나는 것도 같고 하늘로 끌어올려지는 것도 같았는데 다음 순간에는 선창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 너무나도 비참한 포즈로 내동맹이쳐졌다.
 
45
나는 부서진 것처럼 아픈 꼬리뼈를 양손으로 누르며 달아나는 토끼처럼 물건 뒤에 숨었다.
 
46
숨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다음 순간 내 심장은 얼음처럼 싸늘해지고 말았다. 번쩍 빛나는 처참한 빛을 띤 총검이 내 옆구리에 바짝 들이대어진 것이다.
 
47
아! 한심해라! 그때 나는, 잠자리 본성을 다 드러내 부들부들 떨며 으앙, 하고 아기처럼 울부짖었다. 아름답던 꿈! 동경하던 꿈속에 빠져버린 나! 나의 꿈은 현실세계에서는 너무나도 무서운 모험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48
‘앗!’
 
49
나는 무명천을 찢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50
총검을 내 배에 들이댄 그 러시아 병사의 모습은 철제거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큰 소리로 뭐라 뭐라 외치면서 나에게 서서 걸으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51
‘아이고 살았다!’
 
52
총검에 찔려 죽는 일은 면했구나, 하고 눈물을 닦으며 일어서서 병사가 가리키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53
걷다보니 어느 사이엔지 눈물은 말라버린 듯했다. 조금씩 정신을 차려가며 약간은 대담해지기도 하여 일부러 걸음을 늦춰도 보고, 빨리도 해보고, 때로는 딴 방향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그러자 병사는 그때마다 고함을 치며 허리 부근에 딱 들이댔던 총검을 옆구리 쪽을 지나 눈앞에 번쩍하고 빛나게 했다.
 
54
‘엇!’
 
55
나도 지지 않고 그때마다 기겁을 했다는 듯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56
그렇게 얼마를 걸었는지 모르겠는데 십 리도 넘었겠다고 생각될 무렵 한 채의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57
들어가니 큰 테이블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실내에 루바시카를 입은 사람이 한 사람 있었는데 병사와 오랫동안 문답을 하더니 내 옆으로 다가와 몸을 수색한 후 한 의자에 앉게 해주었다.
 
58
그로부터 약 십 분쯤 지나자 다른 병사가 들어와 내게 말을 걸었다. 아주 무섭게 생긴 얼굴이어서 일부러 더 떠는 것처럼 행동했다.
 
59
잠시 후 그 병사가 나를 데리고 제칠천국과 똑같은 긴 계단을 걸어 마침내 칠 층까지 올라갔다.
 
60
확실히 그곳은 내 고향집보다 하늘의 별들이 가깝게 보였다.
 
61
그리고 한 문을 열고는 들어가라는 몸짓을 하기에 나는 젖가슴에서 떼놓으려 할 때의 아기처럼 병사의 가슴팍에 확 달라붙어버렸다.
 
62
“싫어요. 이건 감금이잖아.”
 
63
하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발을 동동거렸다.
 
64
“안되겠네. 이년! 왜 아우성이야.”
 
65
그런 말이겠지 ! 병사는 점점 더 화를 냈다. 그때 문득 보니 병사의 모자 가장자리에 커다란 빈대가 유유히 산보를 하고 있어, 나는 깜짝 놀라 병사에게서 떨어져 들어가라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버렸다.
 
66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건물이 바로 ‘게베우극동본부’ 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내가 들어간 제칠천국 그것은 유치장이었다.
 
67
매일 높은 창문에서 아래 길을 내려다보면 조선옷이나 기모노 모습은 한 사람도 섞여 있지 않았다. 양복을 입은 사람뿐이어서 나는 비로소 조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실감했다. 더구나 철창에 갇힌 몸이라고 하는 잠자리의 공포가 깊어갔다.
 
68
만 한 달!
 
69
그 후 어느 날 두 사람의 병사에 호송되어 배에 태워진 채 세 시간을 갔다.
 
70
끌려 내린 후 보니 산에 둘러싸인 목가적 정서가 넘치는 시베리아 풍의 작은 항구였다.
 
71
무성한 풀숲 속에 빨간 깃발이 세워진 하얀 건물 안에 다시 갇혀버렸다.
 
72
거기서 칠 일간! 철창은 부러지거나 굽어 있어 밤에 달이 뜨면 철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에 가슴이 어는 것 같았다.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검은 빵을 한 근씩 나누어주고 대소변을 보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73
나는 밖에 나가는 것이 좋아서 그때마다 밖으로 나갔다. 넓은 들판에 제각각 자리를 잡고 마음대로 용변을 보는 광경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맛볼 수 없는 유머이다.
 
74
정해진 변소가 없다. 변소를 정해서 냄새를 참아가며 용변을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넓은 들판이다. 설령 한 이름의 변을 떨어뜨린다 해도 이렇게 거대한 풍경에 무슨 흠이 되랴. 더구나 달밤에 달을 바라보며 총검을 든 보초병을 세워놓고 천천히 용변을 보고 있노라면 들똥 맛, 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일종의 상쾌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75
어느 날 새벽 ! 아마도 영하 이삼십 도는 되는 이른 아침에 나는 끌려나왔다.
 
76
밖에 나와 보니 중국인 네 명이 나란히 서 있고 말을 탄 두 사람의 병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77
“걸어!”
 
78
러시아어 호령 한마디에 네 사람의 중국인 뒤에 줄을 서 나도 걷기 시작했다.
 
79
‘어디로 가는 거지!’
 
80
나는 묵묵히 그저 걸었다.
 
81
넓고 넓은 시베리아의……라는 노랫말 그대로인 넓고 넓은 설원을 지나 황량한 언덕과 산을 걸어서 넘었다.
 
82
말을 탄 두 병사는 목소리를 맞춰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황량한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려 나도 모르게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닦지 않아도 거센 찬바람이 가지고 가버렸다.
 
83
삼사십 리나 걸었으리라 생각될 무렵 나는 한 언덕 아래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두 병사가 뛰어내려 뭐라고 서로 외치더니 그중 젊은 쪽이 나를 가볍게 들어 안고 말을 탔다.
 
84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안기어 말을 타본 적은 있지만, 시베리아의 넓은 설원을 러시아 병사에게 안기어, 말을 타고 지나는 느낌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85
한 손에는 말고삐를 한 손에는 나를! 그리고 네 명의 중국인은 병든 노예처럼 뒤를 따른다. 마치 서부활극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86
말만 통했다면 그때 병사와 나는 아주 멋진 말들을 속삭였을지 모른다.
 
87
하지만 그는 때때로 나를 꽉 안으며 빙긋 웃어 보였고, 나는 그에 답하여 살짝 흘기는 눈짓을 보일 뿐이었다.
 
88
그것은 달콤한 시간이었다. 아! 십수 년간 혼자 홀짝거리며 깊어간 꿈! 그 꿈이 이뤄진 아름다운 현실이기도 했다.
 
89
환락은 짧고 애상은 길다…….
 
90
그 말 그대로 짧은 겨울날은 저물어갔다.
 
91
“이별할 때가 왔소!”
 
92
라고 말하는 듯 병사의 눈은 어두워져 갔다.
 
93
넓은 들도, 언덕도, 산도 모두 지났고 지금은 무성한 싸리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94
그곳은 소련과 만주의 국경에 가까운 곳으로 나는 그 국경에서 이 병사의 손에 의해 추방되는 거라는 걸 알았다.
 
95
얼마 동안 그 싸리나무 숲길을 가더니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96
“이 숲 동쪽에 강이 흐르고 있소, 그 강을 따라 내려가면 한 채의 조선 농가가 있소, 거기서 도움을 받으시오. 나도 뒤에 가겠소.”
 
97
라고……. 러시아어를 몇 마디밖에 모르는 내가 이것을 이해하기까지는 십 분 이상이 걸렸다.
 
98
거기서 나는 말에서 내려져 혼자 오도카니 싸리 숲에 남겨지고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전진하여 가버렸다.
 
99
나는 기아와 추위에 떨며 잰걸음으로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손과 얼굴은 싸리나무 가지에 긁혀 벗겨지고 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100
얼마 안 가 날은 완전히 저물고 공포는 점점 커져갔다.
 
101
공포!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단지 동사에 대한공포! 그것뿐이었다
 
102
그때 어둠 사이로 하얗게 언 강이 보였다. 나는 그 언 강 위를 마구 달려 갔다. 칠전팔기 정도가 아니라 수십 번을 넘어졌다.
 
103
갑자기 한 등불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러나 밤의 등불! 그것은 요물처럼 가까이 가면 저만큼 멀어지며 “이리 와 이리 와” 하고 손짓을 했다.
 
104
무서운 것은 인간이다. 이 세상에 도대체 무엇이 인간보다 더 무섭다고 할 수 있을까!
 
105
나는 드디어 병사가 가르쳐준 농가에 당도할 수 있었다.
 
106
누가 이런 나를 잠자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107
그 농가에서는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어 그제야 겨우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08
몸과 얼굴은 꽁꽁 언데다 긁혀서 까지고 부딪혀 멍이 들어 꼭 문둥이 같았다.
 
109
밤은 무시무시한 북풍 소리와 함께 깊어갔다.
 
110
나는 온몸이 아파 이리저리 뒤척이며 끙끙댈 뿐 자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111
“또각또각.”
 
112
바람 소리 속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113
“그 병사다!”
 
114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일어나 다리를 끌며 밖으로 나왔다.
 
115
“야!”
 
116
틀림없는 그 병사였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몹시 기뻐해주었다.
 
117
그는 밀항자를 국외로 추방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어긴 것이다.
 
118
그날 밤 병사는 농가주인과 보드카를 마시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를 꼭 잘 부탁한다고 당부를 하고는 새벽에 떠나가버렸다.
 
119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감시를 전하고 작별했다.
 
120
숲 저편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받으며 우물물을 걷고 달을 바라보며 들똥을 누고……그러는 사이 한 달이 지나가버렸다.
 
121
농가 주인의 호의로 여권을 얻을 수가 있었다. 나는 ‘쿠세레야 김’ 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갈 수 있었다.
 
122
배에서 내려 사람 물결에 휩쓸리며 도시 입구에 서자 양두마차 이것이 (포장마차이리라.) 가 달려가는 것이 정말로 러시아다운 느낌이었다. 금야부지하처숙 평사만리절인연今夜不知何處宿 平沙萬里絶人烟이라는 한시의 심경으로 하염없이 도시 입구에 서 있었다. 내지였다면 몇 번이나 불심검문을 받았을 텐데 이곳의 순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123
초라한 한 여자가 길가에 우두커니 슬픈 얼굴로 서 있어도 그들 눈에는 다만, 심각한 사상의 ‘정적’ 속에 빠져 있는 것이겠지,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124
계속 서 있던 내 쪽이 오히려 견딜 수 없어서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걸어봐도 갈 곳은 없다.
 
125
“아! 방랑!”
 
126
내 눈은 감상적인 눈물에 젖어 이 감상을 한 수의 시에라도 담고 싶었다. 정말로 나라는 여자애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서운 여자였다.
 
127
도대체 어찌할 셈이었던가? 지금 돌이켜보면 몸서리가 처진다.
 
128
말도 모르고, 아는 이라곤 강아지 한 마리도 없는 타국의 거리에서 돈이라곤 종이에 싸서 가지고 있는 십삼 원 육십일 전뿐인데. 아아! 도대체 어찌할 셈이었을까!
 
 
129
《국민신보》, 1939년 4월 23일/30일
【원문】나의 시베리아 방랑기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수필〕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1
- 전체 순위 : 7438 위 (5 등급)
- 분류 순위 : 1780 위 / 1794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남방
• (1) 병든 서울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백신애(白信愛) [저자]
 
  # 국민신보 [출처]
 
  1939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