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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6
이효석
1942년 6월<조광>에 발표, 동네를 떠나면서 보낸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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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書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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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님. 나는 내일이면 이 반을 즉 이 동네를 떠나려는 사람입니다. 다른 구역으로 이사를 가서 다른 반 속에 또 편입되려는 것이오나 웬일인지 애석의 정 없이는 이 반을 떠날 수가 없게 됐습니다. 반에서 해온 여러 가지 행사도 행사려니와 반장님의 가지가지의 자태가 마음속에 새겨져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나눠 온 정리보다는 무엇보다도 영감이 보여준 여러 가지의 심정이 내게는 더 인상깊게 치부되었습니다. 내가 겪어온 인생 경험과 접해 온 뭇 인물들 중에서 영감은 퍽도 인간적인 한 사람인 것입니다. 언제든지 아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를 그럴 분이었습니다. 영감이라고 부르면 반장님은 언제나 펄쩍 뛰면서 내가 벌써 무슨 영감이냐고 항의를 하셨으나 누런 국민복과 국방모자의 덕으로 몸맵시가 얼마간 후줄은 해 보이나 모자만 벗으면 해끄무레한 깨소금머리에 이마의 깊은 주름살하며, 영감이시구 말구 어디 갈 데 있나요. 반에서 제일가는 어른이기는 하나 영감님쯤은 한구석에 모셔 두든지 하지 왜 하필 반장으로 만들었는지 어떤 때는 사실 딱하게 여겨지는 적도 있었습니다. 달마다 쌀 사는 전표가 나왔다, 수건과 고무신 배급표가 나왔다 하면서 쪽지를 가지고 집집으로 부산하게 돌아다니시는 모양이라든지, 정회비를 냅시다 헌금을 합시다 하면서 조금 조금 점직하게 치부장을 뒤적거리는 자태라든지를 볼 때 우리들 젊은 측의 눈에는 웬일인지 그저 미안하게만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영감을 대신해서 그런 잡무를 거들어 드렸으면 하는 생각인들 왜 없었겠습니까. 국방모를 비스듬히 뒤로 넘겨 젖히고 관자놀이에 땀을 줄줄 흘리며 돋보기 너머로 장부를 들여다보면서 연필 끝에 침을 묻히는 그 자태가 눈물겹고도 또 한편 이상스러이도 정답게 마음을 당기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철물을 징수하러 오셨을 때 유기도 좋고 쇠붙이도 좋으니 무엇이든지 한 점씩 바치라고 권유한 후, 뒤주나 부엌에서 양푼이 나온다 주발이 나온다 숟가락이 나온다 하면 영감은 그 선선한 주부의 손덤치를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음을 띠고 값으로 약간의 보수가 나온답니다 하며 종이쪽지에 이름을 적어 그릇에 붙이던 그때의 그 자태가 웬일인지 마음속에서 좀체 사라지지 않습니다. 허리를 엉거주춤 굽히고 부대 속에 모아 놓은 그릇의 무게를 두 손으로 낚우어 보며 무얼 내라 무얼 바치라 해서 반원들에게 미안은 하나 요것두 국가의 한때 어려운 고비랍니다. 내 맡은 일이 결코 수월치는 않아요, 얼마나 마음을 바수고 애를 쓰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하고 그때에야 처음으로 직책의 어려움을 실토하는 것을 들을 때 나도 비로소 영감의 진심에 부딪친 것 같아서 어느 때보다도 다른 일종의 정이 흐름을 느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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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부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비틀비틀 문간을 걸어 나가던 뒷모양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참으로 그 수월치 않은 직책이 영감에게는 과해요. 어떻게 했으면 영감의 수고를 좀 덜어 드릴까 젊은 축들에게 그 직책을 나눌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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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부터 왜 야경돌이가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반은 반원이 적은 까닭에 한달에 거의 두번씩이나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차례된 날 저녁이면 영감의 자제님이 뛰어와서는 오늘밤 누구와 누구와 누구의 차례랍니다. 몇 시까지 합숙으로 모여 주셔요 하고 고하고 야경패를 놓고 갑니다. 나는 겨울 내내 몸이 불편해서 야기를 피하고 더운 방에서 몸을 무시로 지져야 하는 까닭에 오륙차나 되는 야경돌이에 결국 한 번도 참가하지는 못하고 대신 인부를 사서 대왔습니다만 인부의 비용으로 일 원 오십 전인가를 내면 자제님은 고맙습니다 고 그것을 받아 가지고는 뛰어가는 것입니다. 들으니 그럴 때마다 매양 자제님이 대신 인부로 나서서 밤 열한 시로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의 긴 동안을 번갈아 돌았다구요. 영감과 자제님의 두 부자가 외투와 방한모와 장화로 몸을 단속하고 눈을 밟으면서 골목으로 목자를 딱딱 울리며 의좋게 나란히 서서 다녔을 광경이 보지는 못했건만 넉넉히 상상됩니다. 내가 못 나간 날 밤 담 밑에서 목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곧 귀가 번쩍 뜨이며 에이키 이게 두 부자님의 출동이시리라 느끼면서 웬일인지 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긴장은 곧 풀리면서 미소가 떠오르고 마음이 일종 설명하기 어려운 애정의 아지랑이 속에 누그러집니다. 밀레의 「안젤루스」 속에 고여 있는 그런 애정이 부자님의 광경 속에 흘러 있으려니 짐작되면서 내 스스로의 즐거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목자의 소리는 어떤 때에는 규칙적으로 딱딱딱딱딱 딱딱 딱딱딱 하고 들리다가도 별안간 불규칙하게 어지러워지면서 딱딱 딱딱딱 딱딱딱딱 하다가 빗나가기 시작하면 딱딱딱딱딱딱딱딱 하고 무한한 연속음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자제님의 장난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영감님의 앞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믿는 나머지에 마음을 놓고 해롱거리는 허물없는 자태가 눈앞에 보여 오는 듯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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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귀여운 자제를 둔 영감님의 심중이 얼마나 대견할까, 그러므로 겨울의 추위도 그 애정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려니 느껴지면서 두 분의 그 수고로운 고행의 자태가 한없이 거룩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귀여운 자제라고 해도 벌써 이십을 넘은 장대한 청년이요, 머리를 갈라 넘기고 잘 어울리는 국민복을 입은 늠름한 젊은이인 것이나 아버지의 앞에서는 역시 어리고 귀여운 아들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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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역은 좀 유축이래 그런지 개를 기르는 집이 많아서 밤낮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근처에 어른거릴 때마다 개 짖는 소리가 뒤를 이어 동네를 떠들어갈 듯이 요란한 것이나, 야경을 돌 때에는 웬일인지 목자소리가 바로 가까이 들려도 개들은 짖기는커녕 숨을 죽인 듯이 고요히 자며 몸 하나 바삭거리지 않는다지요. 대문 안 개우리 위에다 목자를 바싹 갖다 대고 일부러 딱딱 울려 보아도 개는 숨결 하나 크게 쉬지 않더라고 하면서 거 조화가 들었어 개들두 야경의 뜻을 아는 모양이야 하구 영감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 생각 같아서는 야경의 뜻을 알아서라는 것보다도 개들 역시 부자님의 그믐밤의 단란한 애정을 느껴서인 것 같습니다. 그 불규칙한 목자 울리는 소리에 속임 없이 애정이 짙게 흐르는 것이며 그것을 누군들 느끼지 않겠습니까. 느끼고 그 따스한 애정 앞에 가만히 고개 숙이고 누워 있을 것입니다. 내 경우가 역시 그러했으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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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귀여운 자제님이 언제인가 아버지에게 대어들고 발작을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허리를 꺾었습니다. 이십을 넘은 청년이니 그런 생각도 왜 없겠습니까만 사연이 사연이라 나는 며칠 동안 그 생각으로 사실 웃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얼른 장가를 들여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다며요. 내가 지금 무엇을 모르는 척하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우습게 여기거나 허물하기는커녕 한 줄기의 애정을 가지지 않고는 그 유머러스한 사건을 생각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렴 자제님 장가도 들여야 하구 말구요. 영감님이 국민학교 교장 시대에 알뜰히 모아서 불려온 그것을 밑천삼아 앞 거리에다 구멍가게나 하나 벌리고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 자제님의 원이라는데 그러하면 아무래도 아울러 장가까지를 들여서 따로 살림을 차리는 것이 편할 것이고 자제님이 그렇게 조르고 재촉하는 것도 그 까닭이라고 생각되는데 이웃집 진주와의 사이는 왜 또 파담이 되었는지 사실 나도 자제님 못지않게 그 일이 섭섭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인물이며 재주가 그만하면 규수 감으로 훌륭하지 어디가 빠지길래 영감님이 마다고 물으셨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내 생각이 이럴 제는 한동안 진주에게 혹했던 자제의 마음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지난 가을이었다던가, 어느 째링째링 볕 나는 날 영감님이 잘 익은 고추를 한 자루 따가지고 그것을 널러 지붕 위로 올라갔었다구요. 기왓장 위에 자리를 펴고 새빨간 고추를 널고 유쾌한 판에 가슴을 헤치고 뜰 아래를 굽어보고는 유유히 내려오려고 지붕 기슭에 가보니 올라갈 때 놓였던 사닥다리가 간데없이 없어진 것입니다. 두리번거리는 동안에 처마 아래에 문득 자제가 나타나더니 지붕 위 아버지를 올려다보고 하는 말이 아버지 얼른 장가 안 들여 줄 테에요. 아버지만 장가들면 그만이구 이 자식은 어느 때까지나 홀몸으로 지내란 말예요. 언제 들여 줄 테에요. 언제 언제─였다구요. 누가 안 들여 준다니, 다 연분과 때가 있는 것이지 무시로 그렇게 졸라만 대면 색시가 금시 하늘에서 떨어진단 말이야. 아버지가 타일러도 막무가내로 자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언제든지 연분이니 때니 하구 속여만 오면서 그럼 진주는 왜 물리쳤어요. 어디가 부족해서 하고 대어듭니다. 인물만 반드름하면 쓰는 줄 아니 집안도 보구 문벌두 보구 모든 것이 합당해야 되는 거지 하면 자제는 진주의 집안이 어디가 빠져요. 그만하면 됐지 누가 명문의 딸을 얻겠다나요 하고 항역을 하러 들었습니다. 너 진주의 행실머리를 아니. 네 귀에만 안 들어갔지 동네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더라.─아마도 이것은 아버지가 안하실 말을 하신 것 같습니다. 자제는 발끈 화를 내면서 진주의 행실이 어때요. 왜 괜히 애매한 사람을 헐었다가는 용서하지 않을 테요. 나는 이 손가락을 깨물어서래두 진주의 행실이 깨끗한 것을 보증할 테예요 하고는 사닥다리를 주나 봐라 어디 내려올 재주 있거든 내려와 보죠 하며 처마밑에서 사닥다리를 희롱하면서 심술을 피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저 녀석 봐라, 사닥다리를 가져오너라. 얼른 사닥다리를 갖다 놓아라. 소리를 쳐도 들을 리가 없습니다. 남의 말은 안 들어주면서 누가 사닥다리를 갖다 놓아요. 어서 오늘밤은 지붕 위에서 새봐요. 자제는 더욱 기를 뽑고 야단입니다. 그래두 냉큼 사닥다리를 못 갖다 놓겠니, 날이 저물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며 동네 사람들이 모두들 쳐다보누나─이 자리로 즉시 진주와의 사이를 바로잡아 주어야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려거든 어서 하늘 아래에서 밤을 새세요─내려가서 천천히 얘기하자꾸나. 진주구 무어구 지붕 위에서야 어쩐단 말이냐─내려왔다 또 까먹을려구요. 안돼요, 안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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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가 비슬비슬 그 자리를 물러서가니 아버지는 짜장 등이 달아서 기왓장 위에서 발을 구르며 저런 불효막심한 자식 같으니 하고 소리를 쳐야 벌써 소귀에 경입니다. 부엌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뜰 앞으로 나와 그 꼴을 보았으나 이 역 귀한 외아들의 기에 눌려 아버지를 도와주는 수가 없게 됐습니다. 도리어 꼴 좋다. 자식하나 못 휘어내는 애비의 꼴이라니 하는 조롱을 듣고는 아버지는 상을 잔뜩 찌푸렸는지 벙글벙글 웃는지 헤아리기 어려운 표정을 짓더니 홧김에 자리에 펴논 새빨간 고추 한 개를 집어 문득 깨문 것입니다. 가뜩이나 약이 오른 판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고추의 맛이 어떻겠습니까. 입안이 쩌릿하고 얼굴이 화끈 달면서 정신이 금시 능지를 당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영감님도 원 그럴 줄을 모르셨는지 황급한 판에 지붕 위에서 펄펄 뛰면서 아이구 매워 아이구 매워 하며 맴을 도는 것입니다. 물을 다우 얼른 물을 떠올려라 하고 외쳐도 어머니와 아들은 졸지에 어쩔 줄들을 모르고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물을 안떠올리니 너희들 모자가 사람을 죽이려는 작정이야. 그래두 냉큼 물을 안 떠올려. 고래고래 소리를 치니 자제는 되려 그 양을 쳐다보고 벙글벙글 웃다가 나중에는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들어 대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역시 벙글벙글 웃어대니 아버지는 요번에는 짜장 노염을 품고 오냐 내가 못 내려갈 줄 아니, 사닥다리가 없으면, 못 내려갈 줄 아니 하며 지붕 기슭을 이곳저곳 밟아 보고 살펴보는 것입니다. 어쩌자는 요량인고 하고 모자가 쳐다보고 있을 때 아버지는 한편 기슭에 이르더니 두 눈을 꾹 감고 전신에 힘과 용기를 다하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자제가 그제서야 겨우 기맥을 알고 아버지 가만 계세요. 조금만 참으셔요. 외치면서 달려 갔으나 그때에는 벌써 아버지는 지붕에서 뜰로 뛰어 내려온 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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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하는 소리와 풀썩 주저앉는 소리가 한꺼번에 났습니다. 모자가 기급을 할 듯이 놀라서 달려가니 아버지는 꿍꿍 소리를 내면서 한참이나 웅크리고 있습니다. 다리를 꺾지 않고 허리를 삐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지요. 팔과 흰 다리에 약간의 상처를 받았을 뿐이라는 것이 그날 운수가 얼마나 좋았다는 증좌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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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가 비로소 겁을 먹고 아버지 용서하세요. 차후에는 다시 그럴 법 있겠습니까 하고 절하며 빌 때 영감님의 마음은 저윽이 누그러졌더라구요. 이웃 사람들이 몰려와서 반장님 대체 이게 무슨 사연이냐고 물을 때 쯤에는 영감님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서면서 다시 벙글벙글 웃음을 머금고 젊은 때 생각만 하고 뜀을 뛰어 봤지요. 그땐 오죽이나 깨끗했어야죠. 이만한 지붕쯤은 여반장으로 펄펄 뛰어 내렸거든요 하며 절름절름 다리를 끌면서 방으로 들어가셨다지요. 그래도 흰 다리의 상처가 풀릴 때까지는 근 보름 동안이나 누워 계셨고 그 동안의 자제의 효성과 간호가 극진했다는 소식까지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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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절할 부자님의 에피소드는 깊이 내 마음속에 새겨져서 영감님이나 자제를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떠오르면 금시 웃음이 새로 터져 나오면서 허리가 휘어집니다. 커다란 애정의 감동이 없이는 나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할 때 마다 걸어도 걸어도 진하는 법 없는 애정의 샘이 솟군 합니다. 참으로 내게 좋은 기억을 선사해 주신 셈이 됐습니다. 세상에 무슨 이야기인들 이 이상으로 나를 감동시켰겠습니까. 이 반을 떠난 후라도 오래오래 마음속에서 잊혀질리는 없습니다. 영감님들의 자태를 선하게 눈앞에 떠올리며 나는 언제든지 이이야기를 생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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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방공연습이 있었을 때의 영감님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아울러 생각하면 두 부자님 사이의 애정이라는 것을 나는 세상에서도 진귀하고 야릇한 것으로 여기게 됐습니다. 영감님은 소방 반장이고 자제는 전령으로 뽑혔습니다.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는 연습에 그날은 마침 우리 반의 개별 연습의 날이었습니다. 적국 비행기가 북쪽으로부터 이십 기 편대, 이천 미터의 높이로 내습해 와서 동네 복판 골목에다 소이탄을 떨어뜨려 그것이 집 있는 편으로 연소될 염려가 있다는 가상 아래에서 연습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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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을 지난 때이라 각각 집에서는 부녀들이 복색을 달리하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나와 기다리고들 있었습니다. 가상한 시간이 오자 드디어 소이탄이 떨어졌습니다. 카바이트로 소이탄을 대신해 골목길에는 아닌 때 조그만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소방 반장인 영감님이 메가폰으로 호령하고 지휘하며 휘돌아치는 속으로 부녀들은 각각 한 대야씩의 모래와 물을 준비해 들고 혹은 멱서리를 펴들고 수선거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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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인 자제는 불이 꺼진 후의 전말을 본부에 보고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역시 한몫 불 끄는 일을 거들어야 합니다. 소이탄의 불은 불을 뿌리는 까닭에 그 불꽃을 끄려면 먼저 모래를 끼얹고 그 뒤에 멱서리를 푹 씌워야 하는 것임을 아직도 그런 지식이 철저하지 못해서 그날 기어이 그 희극이 일어났습니다만 한 분의 여인이 타오르는 불 위에다 모래 대신에 한 대야의 물을 끼얹은 것입니다. 영감님이 기급을 하면서 메가폰으로 소리를 치며 그 앞으로 달리다가 무엇에 미끄러졌는지 바로 타오르는 불 위에 보기 좋게 쓰러졌던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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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양이 우스워 모두들 연습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모르는 결에 깔깔들 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영감은 불에서 몸을 쉽사리 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조히들 보고 있는 속으로 불쑥 나타난 것이 전령의 임무를 띠인 자제가 아니겠습니까. 부리나케 영감의 팔을 잡아 밖으로 낚아 끌려다가 어찌된 서슬엔지 자제마저 그 자리에 쓰러진 것입니다. 바로 영감을 안고 그 위에 쓰러진 두 분의 꼴이 어찌도 그리 우스웠는지 연습이구 무어구 골목 안이 온통 깔깔깔깔 앙천대소하며 떠들썩했었습니다. 그 장면을 한층 더 우습게 한 것은 등대하고 섰던 부녀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황겁지겁 들고 섰던 모래와 물을 불 위에 끼얹는다는 것이 결국 두 부자의 위에 끼얹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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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물을 뒤집어쓰고 나둥그러진 두 분의 꼴이 민망하다느니 보다도 얼마나 우스웠는지는 나도 그날 목격을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영감이 지붕에서 떨어졌을 때의 이야기는 말로만 들었던 것이나 이번 일은 두 눈으로 어김없이 보았던 까닭에 나 역시 그 자리에서 얼마나 껄껄댔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분의 모양이 단지 우습다느니 보다는 웬일인지 눈물겨워서 가슴을 조이는 것이었습니다. 두 분 사이에 각별한 애정을 볼 수 있던 까닭입니다. 유다른 애정을 볼 수 있던 까닭입니다. 그날의 소이탄 연습은 그 한 토막의 희극이 있었던 까닭에 한층의 효과와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만 동네 사람들도 아마 모두 같은 정답고 좋은 인상을 받아 가지고들 돌아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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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님의 그런 관계와 이런 모든 장면과 일들을 생각할수록에 나는 영감님과 이 반에 대한 애착을 금할 수가 없으며 이곳을 떠나려는 이제 한줄기의 애틋한 정리가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것을 어쩌는 수 없습니다. 내 인생 속에 들어온 반장님과의 교섭은 확실히 내 반생의 경험 내용을 풍부히 해주었으며,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서 또한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이 반에서의 얼마 안 되는 짧은 생활에 있어서 좋은 것을 많이 얻어 가지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모두 반장님의 덕입니다. 다른 반에를 들어간들 그 이상의 그만한 재미가 지천으로 굴러 있을 성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반장님의 경우는 이야기해서 사람들에게 그 무엇을 끼쳐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반장님. 내내 안녕하십시오. 반을 위해서 수고를 다하시는 양을 때때로 생각하며 반장님의 앞날이 길기를 축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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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5월 1일
19
이효석 배
 
20
✕ ✕ 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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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 1942. 6
【원문】서한(書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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