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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국민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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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3. 3~6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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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국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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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개의 문학적 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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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신화에서는 제신(諸神)의 신격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지위와 매력을 숭찬하고 소중히 여긴다. 철저한 인간중심주의 사상은 드디어 신화의 신비성과 위엄성까지도 그 배하(配下)에 놓아 버리고 만 것이다. 주신(主神) 주피터는 신계(神界)의 단조로운 경영에 권태를 느껴 하루는 머큐리를 이끌고 인간계(人間界)로 산책을 떠난다. 거기에서 이 전지전능의 조물주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미와 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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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將士)의 아내의 사랑을 얻으려고 전능의 지혜와 능력을 빌어 쉽사리 청춘을 회복하고 장사의 용모로 가장하여 구애에 성공한다. 여신 주노는 부신(夫神) 주피터의 뒤를 미행해 내려와 그 소행에 분노하고 질투한다. 그 무서운 질투의 모양은 신계의 풍속이 아니라 그대로가 인간계의 모방이요, 주노의 찌그러지고 불타는 얼굴에는 한 점의 신엄성도 없고 게정꾼의 험상궂은 표정 그것일 뿐이다. 주노 앞에서 설설 기면서 고분고분 그의 말을 쫓는 주피터의 자태도 어찌 그다지 인간의 그것과 흡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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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서구의 신화이요, 동시에 소설인 것이다. 인간이 신성을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격이 도리어 인간을 모방하려 한다. 지상신(至上神)은 그가 만들어 놓은 인간의 체취에 연연한 향수를 느끼면서 스스로 하계로 내려와 그의 사랑을 갈망하는 것이다. 인간 지상의 개념과 전제를 떠나서는 신화도 민요도 없는 것이며, 우주의 일체의 상태(象態)가 부정된다. 인간의 체취와 생태의 예찬에서부터 서구의 문학은 탄생되고 발달되었다. 나는 언제인가 그것을 육체문학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었다. 희랍의 고전에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20세기까지 흘러온 서구문학의 주장은 정히 육체문학의 전통의 계승 발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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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나 호머나 단테나 초서가 괴테나 플로베르나 보들레르나 로렌스나 다 같이 차례차례로 한 계열을 이어 내려오는 적손(嫡孫)들이요, 라신도 톨스토이도 지드까지도 이 족보 속에 소속되는 외에는 없다. 인간의 형상적 심미에 지상 선(善)을 보고 그것의 충실 달성에 용의하고 부질없이 그것을 배상하고 갈망하는데서부터 예술과 문학이 지어졌다. 제2제국도 아니오 제3제국도 아닌 것이며, 참으로 이 본원적이요 구상적인 제1제국이야말로 바로 희랍시대부터의 그들의 이데아였다. 에덴 낙원의 상실은 곧 지상 낙원의 건설을 의미했다. 이 새로운 낙원에의 한층의 동경과 원망감이 사상을 냈고 문학을 배이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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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란 것은 형상을 위한 것이요, 그것의 완성을 전제로 함으로써 뜻을 가지는 것이었다. 형이하(形而下)의 안일과 유락을 변호하려고 함으로써 정신은 발동하는 것이었다. 개체와 인문의 옹호 ─ 여기에 정신의 동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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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문학에 대해서 정신문학이라는 제목을 생각해 본다. 물론 문학은 정신 활동의 소산이요, 그 내용에는 형상적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가 함께 있는 것이다. 육체 전제의 상념에서 떠나서 단순히 인간 정신의 고도의 고양(高揚)을 동기로 한 문학 ─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정신문학의 용어는 반드시 묘망(渺茫)하고 모호한 것만도 아닐 듯싶다. 정신주의 문학에서는 개체의 애정을 떠나서 정신만의 환희와 쾌락의 숭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 생활의 이 엄격한 반면 ─ 반드시 처녀지도 아닌 이 지경에 문학의 다른 커다란 여지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일례로 복종의 정신을 들어보면 여기에 놀라운 하나의 문학의 가음이 있음을 안다. 사람에게는 지배의 본능이 있는 동시에 확실히 복종의 천성이 있는 것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건없이 머리를 숙이고 어른의 말을 흔연히 쫓고 커다란 권능에 두말없이 복종하는 인간성의 일면이란 것이 참으로 있는 것이다. 지배의 의욕을 즐겨함에 반해서 이런 면의 인간 진실의 개척은 종래의 문학에서는 드물게 보아 오는 터이다. 여기에 작가의 구미는 바짝 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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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利他)의 정신이라든지 희생 혹은 협력의 정신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이런 것은 물론 모두 새로운 정신은 아닌 것이나 지금까지의 문학에서는 그 취급을 등한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지상적인 행복을 버리고 개(個)를 몰각하고 오로지 정신적 연마에 살려고 한 엘리사의 정신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보는 것은 시의(時宜)를 얻은 가당한 일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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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문학의 정신과 주제의 일단을 생각해 볼 때 이런 방면에서 그 실마리를 잡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국민문학의 새삼스런 제창의 동기와 원인을 살핀다면 이런 높은 정신생활의 면에 주의를 보내 봄도 일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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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뜻으로 보면 모든 문학을 다 각기 일종의 국민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한 국민으로서의 풍토와 습속 속에 살아 있을 때 세계인으로서의 공감 속에 호흡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스스로 소속된 국민적 지역적 특질을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 문학 속에는 자연 다른 지역의 문학과는 구별되어야 할 소인(素因)이 내포되어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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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순한 지역적인 요소의 구별이라면 반드시 이것을 국민문학의 칭호로 부르지 않더라도 외에 얼마든지 구분적 명칭은 준비되어 있는 것이니, 특히 이것을 국민문학으로 부르는 곳에는 그런 단순한 구별 외에 한층 의식적이요 가치적인 내심과 , 뜻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한 국민의 다른 국민과 구별되어야 할 각오와 자랑 ─ 이것이 없이는 국민문학의 소이는 없다. 이 각오와 자랑을 선양하려는 곳에 국민문학 제창의 동기가 있는 듯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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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문학이란 당초부터 언제든지 있어 온 것이니 오늘 이것이 새삼스럽게 운위되는 데는 반드시 그것이 필요한 까닭으로의 시대적이요, 역사적인 의의가 내재되었음을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그 제기의 이유를 수긍할 수 있다. 각오와 자랑이 평소엔들 없는 바 아니나 그것을 의식시키고 국민성의 교양을 꾀하는 곳에 시대적인 적극성이 엿보인다. 국민문학의 이해는 여기에서 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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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에 국민문학의 제목을 거들어 온 것은 한 국민의 문학을 전체적 개괄적으로 고찰할 때 그 특질을 추상해 내서 자여(自餘)의 것과 구별하고 그 값을 칭송할 때였다. 러시아 문학을 말할 때 우리는 옳든 그르든 얼핏 톨스토이의 이름을 불러 그의 문학 속에서 전 러시아 문학의 특질을 보려고 하여 불란서 문학에서 발자크를, 독일 문학에서 괴테를 들어서 그들을 각각 국민문학의 대변자로 삼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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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일반의 통념인 것이니 타당한 반면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공연스레 거대한 인상을 두는 이들의 단지 그 거대성에 현혹되어 각각 그들 하나로서 국민문학의 대표적인 선수로 족하다는 착각을 주기 쉬운 까닭이다. 이렇게 국민문학이란 극히 방편적이요, 편의적인 때가 있다. 그들의 그 거대성을 엄밀히 검토해 보면 단순히 양의 기만일 때가 많다. 내용적으로는 통속적이요, 상식적이요, 계몽적이요, 교육적인 그들의 문학을 국민문학이라 할 때, 거꾸로 국민문학이란, 통속적이요, 상식적이요, 계몽적인 그런 문학을 일컬음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국민문학의 이념 속에는 그런 상식적인 성격이 다분히 섞여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지드나 헉슬리의 문학을 국민문학의 선봉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한 것은 (세계문학이라고 부르면 불렀지) 이런 통념의 소치인 것이다. 즉 고도의 지성이나 비판성보다도 상식적인 이상이나 ‘건전한’ 시민성이 더 많이 국민문학의 타당한 내용으로 생각되어 온 것이다. 국민문학의 가치의 높이로 보아 반드시 그런 속성만이 소중한 전부가 아님을 생각할 때 종래의 통념이 너무 단순하고 통속적이었음도 사실이다. 어찌 톨스토이 한 사람뿐이랴. 뿌쉬낀과 고골리로 부터 치리코프나 솔로호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나 국민문학자 아님이 있으랴 그들의 문학이 모두 . 국민문학인 것이다. 다만 용어의 방편상 손쉽게 톨스토이나 괴테를 끌어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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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국민문학의 용어는 방편적이요 기회적이어서 필요에 응해서 등장하곤 하는 것이니, 이 시기에 이것이 운위되게 된 것도 역시 시대적인 필요성의 편연(便然)임은 전술한 바와 같다. 우리는 이 시대성의 의의와 성격을 바로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이나 여기에서도 국민문학의 권주(圈疇)의 이해를 지나치게 조급하고 협착하게 규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넓고 유구한 금도(襟度)로서 그 이해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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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문학의 단 하나의 표본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현재 각 작가가 힘쓰고 있는 문학이라면 그 모두가 일종의 국민문학이어야 한다. 시국의 움직임을 그리고 국책을 논한 문학도 좋은 것이요, 그 외 광범한 인간생활을 깊이 밝히고 옳게 파악한 문학이라면 두말없이 국민문학의 칭호에 값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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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각각 자기 자신의 문학적 품질(稟質)과 소양에 사력을 다해서 의거하는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문학의 우열은 단지 그가 진지하게 생을 탐구 파악했나 못했나에 준해서 결정될 뿐이다. 요행 작품의 규모가 웅대하고 생을 강렬히 파악해서 훌륭한 걸품을 낳는다면 그것은 그 작가의 행복일 뿐이지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여의 작가의 작품이 국민문학으로서 말살되어야 하는 법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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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옳게 파악하려면 진실을 보는 눈이 맑아야 할 것이다. 인생의 진실 외에는 작가의 임본(臨本)이 없으며 진실을 그리는 외에 작가의 길은 없다. 눈이 맑을수록 진실을 옳게 잡을 것이며 흐린 눈 앞에는 진실도 그 자태를 감출 것이다. 맑은 눈을 가지고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언제나 귀중하고 필요한 일이다. 어느것이 진실이고 어느것이 허위인가를 가려냄은 곧은 직관과 이성의 작가의 품질이다. 이 품질은 작가적 양심의 인도로 바르게 발동한다. 맑은 눈이란 이 양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양심을 내놓고는 작가의 나침반과 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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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것은 인생적 진실이나 그것이 작가의 주관을 거쳐서 문학으로 나타날 때 문학적 진실로 변한다. 문학적 진실은 인생적 진실의 복사는 아니다. 흡사 표현이 모사가 아닌 듯이 인생적 진실이란 반드시 유일적의 것이 아니오, 같은 인생적 진실도 작가에 따라서 그 번역되는 자태가 달라진다. 슬플 때의 우는 것도 진실이려니와 웃는 것도 진실이다. 웃는다고 표현했다고 진실을 잃었다고 생각함은 도리어 진실을 모르는 소치이다. 우는 줄만을 알고 웃는 줄을 모름은 진실의 일면밖에를 모르는 좌증이다. 문학적 진실에는 참으로 허다한 버라이어티와 변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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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인생적 진실에 처해서도 어떤 작가는 사건의 진실을 보고 어떤 작가는 분위기의 진실을 보고 , 또 어떤 작가는 향기의 진실을 보아서 각자의 소질을 따라 보는 진실의 면이 다르다. 도스토예프스키적 진실도 진실이려니와 플로베르적 진실도 진실인 것이도 모파상의 진실과 체홉의 진실 헉슬리의 진실과 로렌스의 진실이다. 일점 객탁(客啄)할 여지가 없는 문학적인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진실을 찾아냄에 다 같이 엄격하고 냉정했지 조금도 소홀한 태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진실의 면이 각각 다른 것이며 다르면서도 다 같이 진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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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진실이란 실 인생 속에 있는 것이며 동시에 없는 것이다. 있는 듯이 짐작되면서 실상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임의의 싸움의 장면을 취해 보면 그런 장면은 ─ 그런 인물들과 그런 동작과 그런 회화는 실상은 아무데에도 없는 것이다. 작가의 주관 속에서 창조되어서 다만 실 인생을 이럴 법도 하다고 그것을 방불시킬 따름이다. 그 방불의 긴밀한 태도에 따라서 문학의 진실성도 측량되고 결정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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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진실에 다양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인생적 진실에도 변화가 있다. 객관적 형태와 사정이 관념의 형태를 결정하므로 새로운 현상과 사태는 관념의 습관에 스스로 개혁을 가져오게 한다. 객관의 사실이 변할 때 그것을 규정하는 신념의 기능도 자연 변해야 하며 진리에도 변동이 생긴다. 사실의 증명이 있을 때 코페르니쿠스적 신념의 변동은 어쩌는 수 없이 엄연히 생기고야 만다. 인생적 진실은 위대한 사실과 함께 변하는 것이며 그것을 반영하는 작가의 주관도 부동의 총세(總勢)로 정지(靜止)되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환경과 경험이 변해 올 때 작가의 눈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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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문학은 대체로 리얼리즘을 기조로 삼아 온 것이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리얼리티는 제 숨에 막혀서 허덕이다가 급기야 찾아낸 안식처가 이상이었다. 이상주의 문학의 출현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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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동향이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 조선 작가에게 주어진 과제는 별수없이 자기 앞의 현실을 그리는 그것 뿐이다. 지방의 특수성도 생각하며 아울러 움직여 가는 조선의 현실을 그리는 외에 길이 없는 것이다. 유기체의 변화와도 같아서 고정된 총세라는 것이 없는 것이니 움직이는 동(動)의 총태(總態)에 이어서 파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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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적 소재라고 해도 그 면은 광범해서 다취다양(多趣多樣)한 전 범위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족히 담당 지파(指破)할 바가 아니다. 현재의 모든 작가를 요구하고도 오히려 부족하다. 다시 말하면 현역의 뭇 작가는 다 각각 있어야 함으로써 있는 것이요, 그 존재 이유는 스스로 당연하다. 작가가 많아서 걱정되는 것은 없는 것이요, 그들은 소질에 의거해서 각기의 면을 개척하되 그것은 전부 조선의 면인 것이다. 농촌과 민속을 그리는 기영(箕永)과 동리(東里)들이 있으면 도회와 세태들을 그리는 진오(鎭午)와 만식(萬植)들이 있는 것이요, 다시 시대의 유동을 그리는 석훈(石薰)과 인택(人澤)들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외 뭇 작가가 다 질과 색채를 조금씩 달리하면서 각자의 소재에 면려하되 그것은 그대로 한 커다란 종합적인 유기체 속에 연계된다. 기영에게 조선문학을 전부 걸머지우고 유일의 대변자라고 내세우는 것도 가엾은 일이요, 진오를 꼭 한 사람으로 후들겨 보내는 것도 즐기는 바 아닐 것이다. 싱그 한 사람만이 애란문학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예이츠도 있어야 하고 오케이시도 섞여야 되고, 아니 던서니까지도 한몫을 넣어야 비로소 그 문학의 전모가 솟아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싱그만을 추려내라고 하고, 혹은 예이츠만을 내세우려고 함은 다만 비평가적 명목주의요, 편집자적 방편주의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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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려는 것은 작가는 각각 좌고우면(左顧右眄) 부질없이 한눈을 팔 것이 없이 자기의 발견한 길에 안심하고 신뢰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색을 탐구해서 지방적인 대표작을 써야겠다는 성의의 나머지 누구나가 일률로 향토적인 것, 지방적인 것 하고 눈알을 붉히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꽃신을 신고 긴 치마를 끄는 여인을 그리는 것, 물론 무관한 일이나 그가 치마 대신에 양장을 해도 역시 여인(麗人)이요, 지방적 현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고, 아니 장차 같은 그가 몬뻬를 입고, 게 다를 신고 나서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조선적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그 표현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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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적인 것을 찾을 때, 작가들은 흔히 향토로 눈을 보내 즐겨서 원시적인 것, 토속적인 것, 미속적(迷俗的)인 것을 숭상하고 샅샅이 들쳐 내왔다. 애란을 그리려는 싱그가 아란도 주민의 원시생활을 들쳐 낸 것과 같은 태도였다. 물론 그런 방면도 한번은 응당 표현을 힘입어야 할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능사로 삼음은 도리어 협착한 아량이다. 고도기(古陶器)와 무기(舞妓)와 담뱃대를 문 상투쟁이의 모양을 색판으로 박은 그림엽서가 순전히 외지에서 온 관광객의 호기심에 영합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면 부질없는 토속적 문학의 숭상은 외지의 편집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심산의 소치로 추단받아도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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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향토면이라고 해도 한층 우아하고 목가적인 면도 많은 것이요, 또 향토면과 맞서서 도회면의 커다란 부문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구의 대다할(大多割)이 지방의 주민이라는 이유로 향토를 그린다는 것도 이부당(理不當)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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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움직임은 오히려 도회에 있다. 이 면의 숭상이 없이는 주체적인 파악은 드디어 불능한 것이다. 개화면이라고 해도 좋고 세계면이라고 해도 좋다. 세계적인 생활요소가 거기에서는 지방적인 것과 합류 융합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 세계면의 표현이 없이는 언제까지나 향토를 원시의 미간지(未墾地) 속에 버려두고 박아두는 점밖에는 안 된다. 문화를 높이고 생활을 향상시킴이 문학의 공리적인 목적의 하나라면, 작가의 노력은 차라리 이곳에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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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면을 그리거나 향토면을 그리거나 간에 문학의 우열은 순전히 작품의 됨됨에 따라서 결정될 것은 물론이다. 국민문학의 입장으로 보아도 이 두 면의 문학이 다 그 소성(素性)을 갖추어 있는 것도 물론이다. 더욱 한걸음 뛰어서 우수한 문학이라면 그대로 바로 세계문학으로도 편입되는 것이다. 문학 속에 세계적인 요소가 있어야만 세계문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에 깊이 뿌리박은 국민성의 우수한 창조라면 그대로 세계문학에 놀라운 플러스를 용이하게 되는 것이다. 폴란드 문학이나 핀란드 문학이 세계문학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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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42. 3. 3~6
【원문】문학과 국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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