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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촌기 ◈
◇ 궁촌기 2 ◇
카탈로그   목차 (총 : 2권)     이전 2권 ▶마지막
1939년11월
이무영
1
궁촌기 2
 
 
2
1. 이 서방과 시계
 
3
이 서방이 시계를 샀다. 이런 소문이 삽시간에 온 동중에 파다하니 돌았다. 아무개집에서는 며칠째 끼니를 못 끓였고, 또 아무개 집 며느리는 부엌에 들어간 닭을 쫓다가 꽃접시를 깨고, 또 누구네 아이는 얼음판에서 팽이를 돌리다가 신발을 빠뜨렸고, 이러한 사소한 일까지가 그대로 굉장한 뉴스 밸류를 가지고 동중에 퍼지는 이 산촌에 있어서 이 서방이 시계를 샀다는것은 떠들 만한 큰 사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이 서방이 시계 한 개를 산 사건이 잠시가 아니고 며칠을 동리 부녀들뿐이 아니고 남자들 층에까지 화제를 된 데는 실로 그만한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서방은 쌍둥이 아들 형제를 위시해서 육남매에 자기네 부부까지 넣으면 여덟 명이나 되는 대가솔이나 그는 오직 두 마지기의 소작인이요, 채전으로 손바닥만한 밭한 뙈기를(그나마도 소작이다) 가졌을 뿐이다. 두 마지기의 소작인으로 여덟이나 되는 식구를 연명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설명까지를 요하지 않는 일이다.
 
4
―그 이 서방이 대금 십육원을 던지어(월부이기는 할 망정) 회중시계를 산 것이다. 그가 시계를 산 데 먼저 불평을 말한 것은 그의 아내다.
 
5
"젠장, 여편넨 살덩이를 다 내놓구 다니는데 시계만 차구 다니면 젤인가?"
 
6
그러나 이 서방의 지론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시간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관념이 없으면 매사에 지장이 있고 사람이 흘게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이 서방은 시간 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시간 관념을 가질 필요가 생기기도 했던 것이다 ―― 그는 철로 보선 인부로 취직이 된 것이다. 궁촌에서 역에까지는 이십분이나 걸렸고, '고호’의 출근시간은 일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일급 팔십전짜리의 '임고 노동자의 신분’으로서 현금으로도 아니고 월부까지 해 시계를 샀다고 조소하는 그의 아내나 동리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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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궁벽스런 산촌에 시계를 찬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일대 사건 임에 틀림이 없다. 동리 사람들은 길에서 만나기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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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몇 시나 됐소?" 하고 묻는다. 이 서방에게는 시간을 물어주는 것이 그지없이 고맙다. 동민들이 시간 관념을 갖게 되었다느니보다도 시계를 자랑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방의 취직은 임시고다. 삼 개월 만에 해고가 되자 그의 시계는 완전히 동유(洞有)가 되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하루에 열 번만 나도 시간을 묻고 또 그는 기뻐서 내보인다.
 
9
"허, 벌써 이렇게 됐나? 세시 이십분 반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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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나 이 서방이 하루에 시계를 보는 횟수가 무려 백 회는 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으나, 그것은 지어낸 말이라 하더라도 그 의 아내가 하는 말에는 별로 과장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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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좀 봐요. 오늘 밭을 거두러 갔는데 점심때부터 해질 때까지 십여 번이나 시계를 꺼내 들고는, '벌써 이렇게 됐네나!’ 글쎄, 이런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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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사오 시간 동안에 십여 차라면 취침시간을 제하고도 삼십 회쯤 시계를 꺼내본다는 것은 으레히 믿을 만한 숫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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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걸핏하면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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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몇 시나 됐을 상시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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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알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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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시간가는 줄만은 알구 살아야 하는 게다. 저러니 여편네라구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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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식구가 끼니를 못 끓이고 아이들이 허기가 져서 눈이 퀭해도 그는 시계만은 처분할 생각을 않으니 자연 가족이 시계 험담을 할 밖에 없다. 자다가 말고도 (고호도 벌써 아니건마는) 벌떡 일어나서 성냥을 켜고 시계를 보는 것이 하룻밤에도 평균 이삼차 된다고 한다. 역에 까지 가는 이십분 동안에 오륙 차 시계를 꺼내 보는 것은 나도 본터라 그의 아내나 동민들의 말이 반드시 지어낸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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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방은 기운두 세우. 돼지 세 마리를 차구 어떻게 그렇게 잘 걷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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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던 김 첨지가 이렇게 치하를 하기에 돼지 세 마리의 연유를 물으니 지난 동회날 이십여 명이 모인 좌석에서 "난 돼지 세 마리를 차고 다닌다."고 자랑을 했다 한다. "돼지가 웬 게냐."고 하니 그는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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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십육원짜리니 돼지 새끼 세 마리 값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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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요새 들으니 이 서방은 할 수 없던지 그 귀중한 시계를 수원읍에 가서 이원 오십전에 잡히었다고 한다. 하루라도 빨리 이 서방이 그 시계를 찾게 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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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밀양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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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와서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소위 양반, 상놈 싸움이 아직도 흔히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였다. 분명히 삼십대의 젊은 사람인데 긴 장죽을 물고 허리골춤에 손을 집어넣고는 아랫배를 쓰윽쓰윽 문지르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육칠십의 백발 노인을 보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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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어디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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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그러나 이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런 인사를 받는 노인들도 으레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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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장에 좀 갑니다." 하고 태연히 대답하는 것이다. 이쪽에서는 아씨면 그쪽에서는 아무개 어멈이요, 서방님이면 자네가 끽이요 그렇잖으면 너다. 나으리들은 통칭해서 너다. 자네라고 부르는 젊은 애와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늙은이 사이에는 적어도 사십 년의 차이가 있다. 사십 년의 차이라면 증손뻘이요, 증조부 나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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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번 신씨라는 노인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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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공댈 듣고도 분하지 않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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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해요? 뭐가 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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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심상허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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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똥이 무서워 피하우? 제 아비 나쎄나 되는 사람보구 자네랄 제야 배우지 못한 후레 자식이라 그런 걸 어떻게 일일이 타낸단 말요? 제딴엔 내가 양반이로라 하는 것이겠지만, 난 이렇게 배워먹지 못한 후레 자식이올씨다 하구 이마빼기에 내거는 건데… 그렇지 않소? 헛헛헛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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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듣고 보면 그도 그럼직한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또 이번에는 젊은 사람을 붙들고 그 심경을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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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엔 사람이 절을 받는 세상이 아니라 흙덩이가 절을 받는 세상이지요. 어디 사람보구서 서방님을 받치나요, 땅덩이보구 서방님을 받치는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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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얼마 전이다. 어린것이 달포를 두고 체도 하고 기침도 몹시 해서 경성 모모 병원과 한약국에서 전후 다섯 번이나 약을 구해다 먹여도 낫지 않아서 부득이 상약을 써보려고 엿을 사러 장에까지 나갔다. 엿에다 두부를 달여 먹이면 기침이 낫고, 물이끼를 태워서 물에 타먹이면 육체(肉滯)가 뚫린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약을 지어준 의사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것으로 나는 특효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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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를 건지느라고 찬물에 들어갔더니 속이 내 떨린다. 주막집에 찾아가니 술을 먹던 두 친구가 얼굴에 핏대를 올리고 양반 다툼을 한다. 두루마기를 입었으니까 둘이 다 양반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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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그래 밀양 박가가 뭐 양반이란 말인가! 정말 양반이야 반남 박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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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박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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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그 모르는 소리 말게. 집안 망신은 쪽박이 시킨다구 박씨 망신은 반남 박가가 시키느니! 대보게, 자네가 뭔 벼슬을 그렇게 두드러지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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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옥신각신하다가 자네는 네가 되고 너는 놈이 되더니, 놈은 삿대질이 되고 삿대질은 다시 주먹으로 변했고 주먹은 코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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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웃어만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를 위시한 삼사인의 술꾼이 덤벼서 말리었고 (그통에 나는 한번 쥐어박혔고) 공이 이루어져서 사화술이 벌어졌다. 술꾼 중의 한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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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보게들, 밀양 박가가 양반이면 어쩌구, 반남 박가가 상놈이면 어떻단 말요? 그렇잖소? 지금 세상에 토구질두 못할께구…" 하고 웃으니까 밀양 박씨가 또 한번 결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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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렇죠. 허지만 따질 건 따져야지 말이 되오! 아닌말루 밀양 박가가 벌렁 밀어내서 반남 박가는 발랑 나자빠진 것으로만 본대두 밀양 박가가 양반이지 뭐요!" 하는데 반남 박가가 또 이렇게 대꾸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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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그래, 그런 말루 논질 할 것 같으면 자빠진 놈이 상놈인가 밀치는 놈이 상놈인가, 응? 어떤 놈이 상스러운가! 자, 여러분들, 재판 좀 해주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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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쌈에 애매한 손해를 본 것은 밀양 박씨의 코뿐이었다. 하여튼 두 박씨는 땅을 갖지 못한 양반들인 것만은 사실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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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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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 누가 듣거나 이것은 슬픈 이야기에 틀림없으리라. 며칠 전 김 서방네가 이 궁촌을 정처도 없이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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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서방은 내외에 오남매다. 달포 전까지만 해도 여덟 식구였다. 김 서방 어머니는 작년 가을부터 시름시름 앓다가-아니 하루하루 굶다가 죽었다. 진단서에는 무슨 염이라고 했으나 굶어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그들은 작년의 농사를 비어때리고 궁촌을 떠나는 날까지 거의 굶다시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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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분명 불행이다) 이 면에는 구제공사도 없었다. 면장이 부실해서라기도 하고, 브로커 노릇하기에 경황이 없어서 공사를 맡아오지 못했다고도 불평이다. 믿을 바는 못 되나 다른 면에 비해서 구제공사가 적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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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서방은 네 마지기 소작농이었다. 거기에 이채(利債)가 이백원 돈이 된다. 모두가 삼사푼의 고리다. 장릿벼는 오푼 이자. 그러니 여덟 가솔의 식량이 될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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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총 재산이란 집 한 채뿐이다. 다섯 칸 초가에 지금 시가로 육십원, 그 나마도 금융조합 돈 이십칠원에 저당이 되어 있어서 팔고 난 때는 수중에 삼십원 돈이 남았을 뿐이었다. 삼십원으로 이백여원의 빚을 정리할 방법이아 직은 발명되지 않았는지라 김 서방은 고등 숫자 연구에 전의, 전심, 연구에 성공을 했다. 삼십원을 가지고 이백여원의 빚을 갚는 ― 아니 갚고도 오히려 삼십원이 남은 숫자를 고안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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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등수학은 야간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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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계획은 미연에 발각이 되었다. 빚쟁이가 행렬을 짓고 내달아서 안마당에 진을 쳤다. 혹은 솥을 떼가는 사람에, 바가지짝을 뺏는 사람에, 김 서방의 뺨을 치는 사람에, 아이들을 인질로 하는 사람에, 밤을 새워가며 법석이 났다. 초상집처럼 울음 소리가 캄캄한 밤을 밝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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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김 서방은 죽기를 기약하고 손에 든 삼십원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지는 함경도다. 함경도까지 가자면 그야말로 남 부여대하더라도 그만 돈은 가져야 한다. 일곱 식구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통하던 시대는 간 지 오래다. 삼십원은 드디어 빚쟁이들이 덤비어 쪽쪽 찢어가고 그의 수중에는 따로 마련해 두었던 삼원 남짓한 현금이 남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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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째를 살던 고향을 떠나는 김 서방을 위해서 하늘은 무심치 않았다. 올망졸망한 오남매가 깨진 바가지쪽, 해진 보따리를 들고 이고 동구 밖을 나서자 하늘은 울어주기 시작했다. 냉이 싹이 텄느니 잔디가 파아라니 해도 음력 정월 비다. 차지 않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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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말로 폐스러운 동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삼대나 살던 고향을 떠나는 저녁때까지도 따뜻한 밥 한 그릇 안 지어주는 세정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할 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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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서방이 궁촌을 떠난 지도 벌써 십여 일, 만일 그의 계획이 순조로 웠다면 하루에 오십리씩 걸어서 오늘쯤은 함흥에 도착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의 동정이 지나쳐 그동안에 삼사 일이나 비가 왔으니 제대로 갔다고 한 대도 철원쯤에나 갔을까? 나는 하루 한 번씩 김 서방의 집을 들여다보고는 그들이 어디쯤이나 갔을까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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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어제 오늘은 눈비가 몹시 내리었다. 차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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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위에 이 눈비에 열두 살부터 네 살짜리까지의 어린 것들이 잘 걸을까, 먹기나 하나, 병들이나 안 났나, 이런 보람없는 걱정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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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박 서방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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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촌으로 왔을 때 사랑채 (기실 사랑채라고 이름질 만한 것은 못 되었지만)에는 박 서방이 살았었다. 내외에 어린 것이 둘, 오십사오세 된 어머니가 있었고 풍을 앓다가 불구자가 된 어린 동생이 있었다. 집주인의 말을 들으면 용인인지 어딘가에 살다가 왔다고 하며, 자기 말을 들으면 자기 아버지를 어떤 명당에다 암장을 한 것이 발각되어 삼 년간 피신을 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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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삼 인심이 이렇군요. 그것을 발각시킨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루 친척입니다. 그래가지고는 그것을 미끼로 돈을 울거내서 내 집을 팔아서 디어 밀고 이렇게 쫓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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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함에 그리 되바라지지도 않고 거짓말을 할 사람 같지는 않으나 용인과 이곳과의 상거는 불과 백리 미만의 노정이다. 자기 말마따나 이 밝은 세상에서 백리 쯤의 상거로 해서 죄가 숨겨질 것은 아니라고 들어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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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한집안에 살게 되니 듬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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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말했다. 그것은 내가 한 말이었다. 사람에 치여서 못살 서울서 온 내가 산중 단 두 집 뜸에서 살게 되었으니 허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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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은 하나 밀양 박가라고 양반도 내세우고 키가 헤멀거니 어딘지 어수룩해 보이어 첫인상은 좋았다. 그래서 나는 기실 마음으로 동정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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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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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믿고 동정한 덕에 나는 그에게 나무 한 짐에 일원을 주고 사 땠고 (작년 가을에는 솔가리 한 짐에 오십전이었다), 전후 수차 졸려서 이십원 가까운 현금을 물리고 말았다. 이십원이면 원고료 몇 푼으로 사는 내게도 큰 돈이다. 그러나 받을 길도 없어 그대로 두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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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한창 두역이 퍼질 무렵, 궁촌에서도 병인이 났다. 거기에 염병이 덮치어 한 가족은 거의 몰사하다시피 했고 월여간에 육칠 명이 죽어 나갔다. 그래도 소독을 하려고도 않고 치료도 않고, 단교도 않는다. 한 우물 물을 먹는 나는 실로 전전긍긍 했다. 그래서 주재소에라도 말을 해서 소독을 시킬까 했으나 그렇게만 한다면 내 집에다 불을 싸놓는다고 모두들 말린다. 겁이 덜컥 날 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사랑집 박 서방이 그대로 싸고 눕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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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증세를 물어도 괜찮다고만 할 뿐이다. 열이 심하고 헛소리를 며칠 두고 시작한다. 나는 겁이 나서 아내와 어린것들을 서울로 보내고 나도 내 방에서 농성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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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하루는 박 서방의 아내가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 병인 것 같다고 한다. 나는 눈이 캄캄했다. 그래서 그가 달라는 대로 약값도 주었고, 허해서 그런 것 같다기에 또 고기근이나 사다 먹게 했고, 굶어서 그렇대서 또 쌀도 몇 되 떠주었다. 이래서 겨우 일어났다.
 
71
그러나 겨우 숨을 내쉬고 며칠 경과를 보려니까 이번에는 또 박 서방의 아내가 싸고 드러눕는다. 인제는 정말 면할 도리가 없었다. 염병은 완쾌되어 밥을 먹게 될 때라야 전염이 된다는 것이다.
 
72
"어떻소? 어떻게 앓습디까?"
 
73
나는 또 겁이 났다. 그래서 다시 농성을 하고 또 달라는 대로 약대도 주었고 저의 어머니가 수원읍으로 식모로 가려고 하나 차비가 없어 못 간다고 해서 (아직 그럴 처지는 아니었건만) 차비와 또 허해 그렇다 해서 고기 값과, 굶어서 기운을 못 차린대서 또 밥과 ― 이렇게 내주지 않으면 안 되도록 나는 겁을 버쩍 집어먹었다. 그래서 나는 박 서방의 병 때문에 십여 일을 초조하니 지냈고, 처자의 피난에 그럭저럭 삼십여원 돈이 무질리어 가계가 그대로 뒤틀려 나가고 말았다. 그의 아내가 일어난 시에도 약대, 쌀값 (허하면 재발 될 염려가 있다 해서―)을 내라 해서 나를 못살게 굴었으나 그도 여기서 살 수 없어 떠나고 말았다 (박 서방이 못사는 원인의 반은 그의 게으름에 있다 할 것이다. 그는 아홉시나 열시가 아니면 기동도 안했다).
 
74
이 박 서방이 떠난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어떤 동리 사람을 만나니까 나를 보고 깔깔 웃는다. 왜 웃느냐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또 깔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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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서방 꾀병에 아주 녹았다면서요?"
 
76
"꾀병에?"
 
77
"그러믄요. 앓는다고 야단할 때도 매일 저녁 아랫말 사랑에서 늦도록 화투들을 했는데요. 하하하하―"
 
 

 
78
5. 타산
 
79
B라는 지주가 있다. 자기 말을 들으면 B 장군의 후예라고 한다. 무관 집 자손인 것이 분명한 것은 아직도 그의 집에는 백여 년 전의 군인 퇴물이 있다고 하고 또 본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백 석 남짓한 추수를 받아서 굶잖고 사는, 지주라기보다는 자작농에 가깝다. 아직도 탕건을 쓰고 다니고 그 꼬부장한 낙타등에 두 살 난 증손녀를 업고는 이집 저집으로 다니며 비 안 오는 걱정, 비 너무 오는 걱정, 밭매기, 호세 재촉 (구장은 물론 아니다) 이런 것으로 소일을 하는 유한 노인이다.
 
80
그러나 이 지주도 작년의 가물로 올봄내 꽁보리밥만 먹었다. 추수를 해 쌓고 겨울을 묵혀서 보릿고개 장을 대어 벼를 내는 것이 가장 유리한 터라 작년에도 말끔히 벼를 내고 반미 몇 가마만은 남겨두었다.
 
81
그러다가 작년의 한발이었다.
 
82
B 지주의 땅은 그대로 바삭바삭 봄을 지나고 여름을 났다. 가을에도 뽀얀 먼지가 앉고 발이 쑥쑥 들어가도록 균열이 나고 말았다. 이 가뭄에서 노인은 진묘한 안을 하나 창안해냈다. 그것은 자작농을 전폐하고 전부 작인들에게 땅을 빌려주는 것이다. 흉년에는 작료가 면제되나 그래도 다소의 수입은 있고, 치비대고 품삯이고가 작인의 손이 되면 되었지 지주의 손은 아니라는데 착안한 것이다.
 
83
노인은 눈의 분량만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불행히 작년에는 눈도 오지 않았다. 노인은 아들과 손자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작인 몇을 불러다 일 년간의 작권을 주고 말았다.
 
84
노인의 눈은 역시 명안이었다. 금년도 춘경도 못한 채 논바닥에는 잡초만이 우거졌다. 육십여 두락의 광작에 쓰여지던 비료와 품삯은 벌써 득을 본 셈이었다.
 
85
노인은 자기의 혜안을 집안에서 몇 번이고 자랑을 했다.
 
86
노인은 그날 밤에도 며느리며 딸들, 손자 이렇게 모아놓고 세상이 박해질수록 처세법도 임시 방편을 연구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노인의 짧은 잠이 깬 때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지금까지도 몇번이고 속은 일이 있는 터라 또 그런 소낙비려니 했다. 그러나 이튿날도 사흗날도 제법 굵은 빗줄기가 가로지르더니 도랑이 뿌듯하게 물이 흘러간다. 일년 동안이나마 모심을 자리를 얻은 작인들은 횡재나 난 것처럼 기뻐했다.
 
87
"B 노인이 자기 꾀에 넘어갔지." 하고 모들을 내면서 떠들고 웃고 했다.
 
88
더욱이 노인 집 바로 마당에 잇대서 있는 열두 마지기는 물이 풍족했다.
 
89
일년 동안 속속들이 폭양이 내리쪼인 터라 금년에는 꽂기만 하면 대풍이라는 것은 경험해와서 잘 안다. 노인은 열두 마지기를 반씩 나누어간 윤 ○○ 과 원 서방을 밤에 집으로 불렀다.
 
90
"모들 다 냈나?"
 
91
"예, 그럭저럭 다 냈습지요."
 
92
"거참, 고마운 일일세. 역시 하늘은 무심치는 않으시구먼."
 
93
이렇게 일기를 꺼내고는 "그런데 달리 그러는 게 아니라, 자네네 준 논 말이세. 가만히 생각하니 그것만이라 두 댁에서 좀 부쳐야겠네. 양미는 해야잖겠나."
 
94
"뭐 그러십니까. 이번 비에 모는 다들 냈을께구 댁에서야 뭔 걱정입니까."
 
95
"아니야, 그래두 그렇잖으니."
 
96
억울하지만 어쩔 도리도 없었다. 노인의 속심을 들여다보는 터라 감정을 상해 놓으면 다른 논마저 들릴 염려가 있었다. 그 대신 작년에 취해간 돈 오원씩(선푼을 준 것이었다)은 면제하고 모값, 품값은 다 쳐주기로 하고 못 나간 논과 바꾸었다. 작인들로 보면 그만 것도 다행이었고, 노인으로서는 그런 것쯤 수고로 풍년만 들면 손은 없었다.
 
97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근동에 한참 퍼진 때 이번에는 폭우로 노인 집 열두 마지기가 그대로 사천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을축년에도 터지지 않았던 윗 말 보가 터진 것이다.
 
98
"모래를 파내는 데만도 백여 명의 품은 들걸요. 백여 명 가지고도 안 될지 모르지. 허구 그걸 파내면 뭘하나. 인제야 만금을 주기로니 모가 어디 있어야 말이지."
 
99
주막에서 만난 농부는 이렇게 말하며 막걸리를 쭉 들이켜는 것이었다.
 
 

 
100
6. 건강 씨
 
101
두화(痘禍)로 해서 세상이 떠들썩하자 나는 갑자기 건강 씨가 아쉬워진다. 함남(咸南)에서만 떠들 때는 그래도 대범하니 있을 수 있었고, 종두를 생각도 하다 말다 했더니 근자에 십리도 못 되는 근동에 까지 환자가 생기고 그것이 동기로 검색을 한 결과 의외에도 장질부사까지 침입했다는 소식에,
 
102
"건강 씨는 지금 어디로 떠났노?"
 
103
혼자 궁금히 생각했다.
 
104
오 년 전 역시 낭인으로 있을 때 나는 이 궁림에 와서 일년 가까이 있은 일이 있다. 삼 동을 합해서 이십 호밖에 안 되는 산촌이기는 하나 흡도 있고 또 마침 서라는 친구도 생기고 해서 한 일월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군불 나무나마 뜯어다 때게 된 것도 그때 일년간의 여덕이요, 야산이기는 할 망정 나무 지게를 지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는 것을 배운 것도 그때 생활의 덕분이다.
 
105
건강 씨는 그때 우리집(흡 집) 바로 옆에 살았다. 사랑에서 대고 부르면 그의 구렁 같은 방에서도 곧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성이 뭐 던지는 잊었으나 역시 이가였던가 싶다. 사십여 세의 중년 남자로 머리도 깎았고, 코밑 수염도 길어서 차리고만 나서면 의젓한 신사였다. 됫박 이마에 약간 주걱턱이 진 것이 우리가 어렸을 때 고향에서 보던 '이시까와 상’ 하고 비슷하다고 흡과 이야기한 일도 있다.
 
106
내가 궁촌으로 처음 왔을 때는 그는 불행히 상처를 하고 아들 형제만 데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젖떨어진 어린 것을 들쳐업고 조석이며 절구질, 빨래, 안 하는 것이 없었고 낮에는 또 품을 판다. 흡의 말을 들으면 궁촌 삼 동 중에는 글하는 사람이 서 군과 이 건강 씨뿐이라고 했다. 역시 사오 두락의 소작인으로 생계도 터무니 없었으나 동중의 출생계, 사망신고, 무슨 계약서, 심지어 서신의 대독과 대서 일체를 그가 담당했었다. 우리한테 저녁마다 신문을 얻어다가는 광고까지 정독을 한다.
 
107
"암만해도 이탈리아와 이디오피아 문제가 무사치는 못 할 모양이지요."
 
108
이런 이야기도 했고, 당시의 내외국의 수상이니 장상, 총독부의 고관들의 성명은 우리보다도 정통했다.
 
109
아는 것이 걱정인 경우도 없잖아 있다. 무슨 법령이 생길 듯한 기사만 보아도 금방 생활체제가 일변하기나 하는 것처럼 온 동민에게 불안을 주었고, 산림 보호에 관한 무슨 주의사항만 들어도 금시에 산의 잡목에 황금덩이나 매어 달린 듯이 떠든다. 납세나 면화증식이나 면이나 군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동민에게 설명한다. 필요한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무지한 동민에게 불안을 줄 만큼 떠들어댄다.
 
110
그에게 '건강’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그 좋은 예다. 그는 강한 것도 건강, 싱싱한 것도 건강이다. 예를 들면 잘 자란 수목을 보고서도 이렇게 말 한다.
 
111
"그 나무 참 건강하다!"
 
112
원명은 따로 있었으나 원명을 대어서는 모를 원동 사람들도 건강 씨라 면알 만큼 그의 별명은 유명해지고 말았다.
 
113
그 해에도 동중에서 장질부사 환자가 발생했었다. 그러나 이해없는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이 관가에 밀고하는 자가 있으면 그 각 집에서 불을 지른다고 미리 협박을 하는 터라 우리도 방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듣자 건강 씨는 분연히 일어섰다.
 
114
"불지를 테건 내 집에 불을 질러라! 타면 이십원짜리 집이 타는 것이요, 이십원 짜리 집이 타면 동민들이 구제된다!"
 
115
그날로 전동에 소독이 되었고 예방주사가 실시되었다. 다행히 건강 씨의 집도 안 탔고 미연에 병균도 박멸이 되었다.
 
116
―이 건강 씨가 지금은 어느 동리에 가서 사는지 모르되, 그 동리는 분명히 복받은 동리다. 만일 그만 아직도 이 궁촌에 살아 있다면 지금처럼 전전긍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117
종두를 '마마’보다도 두려워하는 동민을 위해서 건강 씨는 다시 이사를 안 오려는지…
 
 

 
118
7. 소금장수 이야기
 
119
"옛날에 한 소금장수가 있었더라지. 아마 이 동리처럼 이렇게 산중 이었던 모양인데… " 하고 어떤 날 서 군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홉과 나와 그리고 누구던가 서울서 친구가 놀러 와 있었다.
 
120
"이 사람, 자네 얘긴 싱겁기 짝이 없네. 그보다두 산돼지 사냥갔던 이야기나 하게."
 
121
흡이가 핀잔을 준다.
 
122
"아닐세. 이건 소금장수 이야기니까 좀 짭짜름할게니 들어주게나."
 
123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이러하다.
 
124
옛날에 소금장수 한 사람이 있었다. 몇 대를 두고 가난하기만 해서 평생소원이 부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남의 소작이나 하고 소금짐이나 지고 다녀서 부자가 될 리 없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리 만무다. 어언간 귀밑머리에 백발이 섞이고 자식들 역시 지게를 못 면하는 것을 한탄하며 어떤 산등성이를 넘으려니까 웬 무덤 앞에서 백호가 재주를 두세 번 넘더니 백발 노파가 된다. 신기해서 뒤를 따라서려니까 산너머 동리 어떤 혼인집으로 들어간다. 노파가 들어서자 온 가족들이 할머니, 아주머니 환대 막급이다. 그러더니 상좌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125
이것을 본 소금장수가 살같이 내달으며 집었던 지겟 작대기로 노파를 난타 하자 동민들이 칼, 낫을 들고 덤빈다. 그러나 죽어 넘어진 것이 구미 백호인 것을 보자, 소금 장수 앞에 굴하여 그 예가 깍듯했다.
 
126
"… 이것을 본 동리 친구 하나가 어떻게 그렇게 신묘하냐고 물었것다. 이 엉큼한 친구가 ―" "내가 그런 걸 알겠소. 이 지겟작대기가 보통 것이 아닙네다… " 이렇게 대답을 했것다.
 
127
"그 소릴 듣더니 이 궐자가 지겟작대기가 버썩 탐이 나거든. 그래 팔라구 그랬지."
 
128
"펄쩍 뛰었겠지!"
 
129
"암, 이르다뿐인가. 이게 어떤 보물이라고 팔겠소! 쓱 이래 봤것다. 그러니까 이 궐잔 몸이 달밖에. 그래 백 냥, 천 냥 하다가 오천 냥을 준다니까 못 이기는 척하고 팔아버렸지. 그래가지곤 이 궐잔 잔칫집만 찾아다닌다. 며칠을 다니려니까 참 어떤 동리서 차일을 치구 법석이거든. 들어가 보니 과연 상석에 노파 여럿이 앉았거든. 그래 그중에서 제일 늙은 노파를 그저 넉장이 되도록 팼것다. 그러구 나니까 웬걸, 구미호는커녕… "
 
130
서 군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어려서 들은 법도 한 이야기다. 맹랑한 이야기이기도 한다.
 
131
물론 방안은 웃음판이 되었다. 족히 웃을 만한 이야기고 또 웃고는 말 이야기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란 항간에는 얼마든지 있는 터이니까…
 
132
그러나 나는 가끔 이 소금장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에 한번 웃었으니 그만일 것인데 이 이야기를 회상하고는 혼자 웃고 웃고하는 동안에 웃음은 어디로 가고 그 무슨 위대한 사람에게서 경구나 들은 때처럼 일종의 경건한 마음이 생김을 근자에 와서 깨닫는다.
 
133
더욱이 요새의 국제관계라든가 지인들간의 동정, 그 무엇에 초조함인지 상상 외의 급속도로 생활태도도 표변하는 삼십대의 청년층을 볼 때 더욱 그런 감이 불무하다.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가 하면 어망을 들고 땔나무를 찾는다. 오늘의 서재인이 이튿날에는 광업소에서 소일을 하고…
 
134
만일 이 소금장수의 이야기를 우리와 연갑인 친구가 한 것이 아니고 우리 대의 청년층이 수백 수천으로 운집한 석상에서 그 어떤 선견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우리는 그날 밤처럼 그저 웃고 마는데 그치지 않고, 이 이야기에서 그 어떤 진리를 탐색할 성의를 가져보지 않았을까. 지금까지의 우리 청년층은 생활태도나 학구생활에 있어서도 우리가 그날 그리 웃고 만 것 같은 그런 경솔을 범해온 것은 아닐까?…
 
135
이런 생각을 해본다. 물론 무위의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는 현재의 나의 생활이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기는 하다. 그러나 만일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라 해도 내게는 그것으로 또 좋지 않을까.
 
136
어쨌든 기쁘다. 내게는 여가가 있나보다.
 
 

 
137
8. 살쾡이와 서 서방
 
138
궁촌에서의 나의 벗이라면 홉과 서 군, 이밖에 동중의 농군 몇 사람뿐이다. 그러나 홉은 한 보름은 서울서 지내고 서 군과 가끔 만나서 한담을 한 뿐, 아직 농군들과는 친할 정도에 자리도 못 가 있는 터라 이침부터 밤까지 나는 내 한 방 속에서 지낸다.「세기의 딸」을 쓰는 일과 약간의 독서 ― 바로 울 뒷산의 산책 ― 틈틈이 아이들을 보아주고 ― 이것이 근자의 나의 일과다.
 
139
해만 지면 모든 것이 완전한 정적으로 돌아간다. 램프의 심지 타는 소리가 갓난 것의 숨소리와 겨룬다. 달이 구름을 헤치는 소리까지도 곧 들려오는 듯 싶은 정적. 그러나 이 정적은 가끔 내가 '밤친구’라고 불러오는 늑대, 여우, 살쾡이 ― 이런 짐승들의 소리로 깨어진다. 아무리 시골이라기로니 ― 하고 듣는 사람들은 말했다. 시골이라지마는 경성서 오륙십리, 철도에서 이삼십분밖에 안 걸리는 시골인지라 내가 이런 짐승들을 벗삼아 겨울 밤을 새운다고 해도 곧이 듣지들을 않는다.
 
140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촌가는 모두 합쳐야 이 십호다. 이 이십 호도 뚝 떨어진 산밑 외딴집 두 채 중의 한 채가 내 집이다. 가끔 호(虎)군도 산책을 온다는 오봉산 부리다.
 
141
이 험산 부리와 접한 궁촌에 산짐승들이 닭서리를 나오는 것은 우리가 내에 가서 고기를 잡는 것과 같으리라.
 
142
"이놈의 살쾡이란 놈을 어떻게든지 잡아야겠는데… " 바로 옆집 서 서방은 나를 볼 때마다 벼른다. 초가을에 한 마리, 바로 최근에는 꼴꼴 알을 저는 흰 암탉을 또 한 마리 살쾡이한테 제물로 바친 것이다. 서 서방은 이 동리에서는 가장 부지런한 농군이다. 나는 일찍이 그가 해뜨기까지 자는 것을 본 일도 없고, 잠시라도 손을 쉬는 것도 본 일이 없다. 거름을 치는가 하면 나무를 하고, 나무를 하는가 하면 여물을 썬다. 정 한가할 때면 하다못해 소 덕석을 벗기어 비질도 해주고 외양의 짚을 갈아 넣고 있다. 소작농이기는 하나 비교적 광작인데다가 남의 '묏갓’(산)을 관리 하는 터라 끼니를 거르거나 하는 일은 없는 모양이나 전실 자식 둘과 어린 것 삼남매의 일곱 식구를 혼자서 벌어먹이지 않으면 안 되는 고달픈 몸이다.
 
143
이 서 서방에게 두 마리의 닭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시세로 닭 한 마리에 일원 오륙십전, 두 마리면 쌀이 말서 되 값이다. 쌀 말서 되에 잡곡을 섞는다면 오륙 일의 양식이다. 그렇기에 그는 흰 암탉을 잃어버리던 날 밤은 한밤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쾡이를 쫓아서 깊은 산속에까지 추격을 했다는 것이다.
 
144
"그래, 쫓아가면 붙잡힐 것 같습디까?" 하고 웃으려니까,
 
145
"그때에 뭐 그런 생각이나 할 새가 있나요! 그냥 치가 떨려서 쫓아갔지요."
 
146
"그놈 일년내 공을 들여 길러논 닭을 두 마리나 뺏긴 생각을 하면 그냥 치가 떨려서!"
 
147
"치가 떨려서… "
 
148
나는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려본다. 닭 두 마리에 이렇게 치가 떨려 하는 사람들이 일년 동안 지어논 곡식을 지주한테 눈 버언히 뜨고 뺏길 때의 그 치떨려 할 심정을 생각하고 나는 우울했다.
 
149
며칠 후 나는 온종일 서 서방을 못 보았다. 나무를 하나 하고 산을 쳐다보았으나 산에도 없다. 내 집을 둘러싼 조그만 산이 그가 관리하는 '묏갓’ 인지라 낙엽 긁는 소리가 방에 앉아서도 들린다.
 
150
"서 서방이 오늘은 노는 모양이군." 하고 내가 혼잣말처럼 하니까 아내가 있다가 수원에 갔다고 한다.
 
151
"수원에?"
 
152
"그렇대요. 왜 요전에 닭 두 마리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늘 분해 죽겠다고 하더니만 여우창애를 사다논다고 일부로 갔대요."
 
153
"어지간하군!"
 
154
나는 이렇게 가벼이 받아주고 내 방으로 들어왔지만 실상 그때의 내 마음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은 못 되었다. 나는 밤이 늦도록 생각했다.
 
155
"내 것이란 이렇게 소중한 것일까. 이 소중한 내 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 찾으려고도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156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 아니냐.
 
 

 
157
9. 할트란 놈
 
158
할트란 내가 기르는 개의 이름이다. 원주인인 S씨의 말을 들으면 굉장히긴 이름을 가진 영국 개의 명견의 자손이라고 한다.
 
159
처음 이 궁촌에 온 것은 작년 구월 초였다. 그때 내 아내는 해산을 하러 친정에 가 있어서 서울로 이사를 온 내 누이가 약 달포나 와서 밥을 끓여주고 있었다.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동리에서도 이마정 폭이나 떨어져 있을뿐더러 병풍처럼 산이 빽 둘러 있어서 민심을 모르는 우리 남매는 마치 마적 구혈에나 가서 사는 것처럼 불안했다. 그러던 터에 마침 이웃에서 좀 도적이 사흘을 두고 연거푸 나서 S씨가 권하는 대로 이 할트란 놈을 기르기로 했던 것이다.
 
160
"이놈만 갖다 기르면 어림없소. 이 근동에서는 이 개가 얼마나 사납다는것을 잘 아니까 우리 개를 갖다 기른다는 소문만 퍼뜨리시오."
 
161
이렇게 말했다.
 
162
과연 길러보니 몹시 사납다. 산중인데다가 사나운 할트를 갖다 놓았다는 소문이 퍼져서 온종일 가도 사람 구경을 하나 할 수가 없다. 사람 구경이래야 앞집 서 서방의 가족이 아니면 삼사 일에 한 번씩 어쩌다 들르는 엿 장수에 불과하건만 그 엿장수조차서 저 멀리서 엿가위만 철썩거리고 통 근접도 않는다.
 
163
신문을 보는 관계로 매일 한 번씩은 꼭 와야 할 우편배달까지도 그림자를 안 보이고 신문이고 편지를 흡의 집에다 두고 간다. 까닭을 물으니 개 때문이라 한다.
 
164
이러다가는 사람 구경도 못하고 살까보다 싶어 개를 잡아 매두었다. 그러고는 보는 사람마다 개를 잡아맸노라 선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65
그런데 이 할트란 놈이 몹시도 귀족적이다. '스와레’ '빠가’ '다베’ 하지 않으면 들은 척도 않는다는 것은 이미 쓴 바 있지마는 나는 보리밥도 먹고 조밥도 먹는데 이놈만은 죽어라 하고 먹지를 않는다. 가끔 기름기 생각이 나면 밤새도록 앓는 통에 시골 온 후로 기름기 구경을 별반 못하는 우리 가족은 할트란 놈의'소우징’ 때문에 가끔 고기맛을 본다.
 
166
남들은 전에 없는 한재로 해서 죽도 변변히 못 끓이는 판에 늘 그럴 수도 없어서 차츰차츰 보리도 섞어주고 기름기도 덜었다. 그러고 나니까 한동안 살이 부쩍 오르던 놈이 눈에 보이게 야위어간다. 그럴수록에 점점 사나워지기만 한다.
 
167
언젠가 친구들과 잡담을 하다가 히틀러의 채식주의 얘기가 났을 때 만일 히틀러가 육식을 했더라면 세계 인종은 더 큰 화를 입었을지 모른다는 말을 누군가 해서 웃은 일이 있지마는 정말 이 농담은 할트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놈에게 고기나 실컷 먹이고 하면 기운이 복받쳐서 사람 하나 안 남겨 둘 것이다.
 
168
며칠이 한두 시간씩은 철강으로 뜬 망을 주둥이에 씌워서 끌러놓기도 한다. 그랬더니 이놈이 어떻게 산 위 - 로 돌아다니며 바위고 나무에 비비었던지 망을 벗겨 내던지고 기어코 어쩌다 찾아온 가난한 손 늙은 거지의 등받이를 물어 제키었다.
 
169
과히 상치는 않았으나 그때 만일 내가 소리를 치고 나가지만 않았더면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
 
170
망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집 한 모퉁이에 매두어 버렸다.
 
171
"네 이놈, 인제는 바깥 구경 다했다."
 
172
나는 안심을 하고 있었더니 하루는 '컹’ 물어박지르는 소리가 나서 뛰어나가니 그 긴 참나무 말뚝을 쑥 뽑아가지고 엿장수를 해낸다. 하는 수 없이 기둥에다 대못을 박고 끊을래도 끊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매어버리었다.
 
173
저는 갑갑한 모양이다. 온종일 끙끙댄다. 나만 보면 좀 끌러달라고 애원하는 셈이다. 엉겨붙고 야단이다.
 
174
"어림없는 소리 말아라. 네 놈을 끌러놓고 어떻게 맘을 놓자구."
 
175
그러나 지금도 우편배달은 집 근방에도 안 온다. 산고개에서,
 
176
"편지 왔습니다… " 하고 소리를 친다. 개를 잡아매었대도 짓는 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 그래서 편지가 올 때마다 받으러 나가야만 한다. 일전 몇몇 친구들이 놀러 왔다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A 군이 심각한 표정으로,
 
177
"개란 놈은 저렇게 붙들어 매두면 되지만, 히틀러 같은 위인은 어떻게 해야만 사람을 상하지 못하게 만든단 말인가." 하고 탄식을 해서 모두들 웃었다.
 
178
그런 의미로 본다면 히틀러의 채식주의에는 분명히 우리가 감사를 해야 할 모양이다. 그러고 또 웃었다.
 
 
179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0년 1월31일~7월 12일 〉
【원문】궁촌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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