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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문학의 제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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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9
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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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문학의 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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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문학은 생산문학의 일부문으로 농민의 생산생활을 묘사하는 문학이다. 농민문학이니 물론 농민자신에 의하여 자기들의 생활을 표현한 것이 가장 진실하고,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농민문학일 줄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 그들은 아직 문화수준이 일반적으로 저하하여 문학적 교양과 기술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문학이라도 아직 그들의 손으로 제작하지 못하고, 혹 그들의 생활 속에서 부르는 농부가 등 같은 노래가 없는 것도 아니지마는 그것은 너무도 원시적이고, 또 그나마도 극히 빈약, 희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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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혹 농촌출신자로 농민문학을 제작하는 이가 없지 않지마는 그들이 문학을 제작하는 그때에는 벌써 농민이 아닌 하얀 얼굴빛으로 열대식물 밑에서 커피를 마실 줄 아는 명예스러운 도회의 문화인으로 되어버려 그들이 쓴 농민문학은 다만 구(舊)시절의 기억을 회상해서 쓰는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결국 농민자신에 의하여 제작되는 농민문학은 찾기가 극난(極難)한 일이며, 농민자신이 쓴 것만을 농민문학이라 함은 한 개의 이상론(理想論)에 불과한 것이다. 그보다도 오히려 어떠한 출신 어떠한 생활자이건 그들을 이해하며 또 문학적 기술을 가진 이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묘사한 그것이 우리들이 요구하는 농민문학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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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아닌 자로 그들의 문학을 창작하려면 첫째 그들의 생활과 심리를 철저히 이해하여야 하고, 또 창작하는 그 동안에는 작가자신이 농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아동문학창작자는 백발이 호호(晧晧)한 노인이라도 아동의 생활과 심리를 잘 이해하며 창작하는 그 동안에는 채의(彩衣)입고 어리광 부리는 아동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농민문학 창작가도 자신은 아무리 창백(蒼白)한 인테리이건 창작하는 그동안에는 땀 젖은 잠방이 입고 머리에 수건 두른 농민이 되어 이해와 희노애락을 그들과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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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자의 입장에서 또 방관자의 태도로서 멀리서 멀뚱하게 바라보든지 혹은 높은 곳에 앉아서 부검(腑瞰)하는 심리로 쓴다면 그것은 진정한 농민문학이 되지 못할 것이다. 전편에서 농민을 위하여 수천만언(數千萬言)의 형용사와 동사를 허비(虛費)하여 썼더라도 그것이 예를 들어 어떠한 도회인이 농민의 몽매한 생활을 조소하는 태도로 썼다든지 혹은 어느 별장에서 사는 부자가 농민의 빈곤한 생활을 연민하는 태도로 또는 어떠한 비농민적 직업을 가진 이가 그의 자신 개인의 필요로 농민들과 접촉해본 과정을 기록하는태도로 쓴 것이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농민문학이라 할 수 없다. 왜 그러냐하면 그와 같이 농민의 한가운데 들어서지 않고 외부에서 관망하는 제삼자적 방관자적 태도로는 진실한 농민생활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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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鑛主)나 혹은 채광(探鑛)하는 기사(技師)의 입장에서 진실한 광부생활을 선주(船主)나 선객(船客)의 입장에서 진실한 해원(海員)생활을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농민생활을 관찰하는 자의 직업과 신분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태도의 여하(如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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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래의 농민을 취급한 우수한 작품 가운데 그러한 태도로 그러한 제삼자적 입장으로 농민을 그린 것을 종종 보았지마는 최근 이무영씨의 가작 「흙의 노예」가 그것의 묘사기술이 능숙하며 작자의 태도가 진지(眞摯)하고 열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불만을 주는 것은 역시 그러한 점에 있다. 즉 주인공 수택이가 농민의 아들로서 또 자신이 소작농으로서 장기를 가지고 논을 갈며 지게를 지고 채신(採薪)하는 훌륭한 농민이지마는 그가 창작의 취재를 위해 일부러 농민이 되는 것 같은 태도, 그것은 진정한 농민의 입장이 아니다. 즉 대신문사의 기자, 소설가, 즉 조선의 고급 인테리가 농민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아무런 부득이한 또는 선명한 이유가 없이 농민이 된다는 것은 결국 소설 취재를 위해 농촌에 들어간 것밖에 될 수 없고, 또 사실 작품 내에도 그러한 장면이 가끔 나왔으니 작자의 의도가 어쨌든 주인공은 진정한 의미의 농민이 못되고, 또 작품도 참으로 농민의 입장에서 쓴 농민문학이 못된다. 이러한 점으로 씨의 쾌작(快作)인 이 작품에 그만치 불만을 느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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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업자나 매음부의 생활을 그릴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입장에 서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자가 대금업자나 매음부의 입장을 정당한 또 자신의 입장으로 하지 않고 비판적 입장에서 다만 한 제재(題材)로서 그릴 뿐이고, 그들을 위해서 쓴, 그들을 독자대상으로 한 고리대금업자 문학 매음부 문학이 아닌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문학은 그와 달라서 농민을 제재로 할 뿐 아니라, 농민을 위해서 쓴 농민을 독자 대상으로 한 농민의 문학인 때문에 이것은 농민과 촌척(寸尺)의 거리도 두지 않고, 작자 자신이 농민이 되어 쓰는 것이 필수조건이 된다. 하일수석(夏日潄石)의 「우리는 고양이다」란 작품은 고양이의 입장에서 중학교사의 생활을 썼다. 그러나 그 고양이의 입장은 가상적 입장이고, 실제적 입장은 중학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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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자가 농민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작자의 가지고 있는 비판적 주관을 전연 거세하고, 농민이 가지고 있는 비판적 주관을 전연 거세하고, 농민이 가지고 있는 결점, 예하면 우매 완고한 의식 기타 저급한 심리에 모두영합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동문학이 아동의 입장에서 쓰더라도 그들의 이기주의적 강욕적(强慾的)인 나쁜 방면까지 영합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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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농민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농민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더 한층 필수조건으로 하고 철저한 인식은 특수성과 일반성 어느 편에든지 편중하지 않음을 요한다. 즉 특수성이라 함은 첫째 같은 농촌과 농민이라도 구라파의 그것과 아시아의 그것이 다르며 같은 조선에서도 관서지방과 영남지방 기타 각지방의 그것이 다르다. 그것은 그들의 살고 있는 산수와 토지가 다르며, 생산물과 생산기구도 똑같지 않으며 풍속과 언어도 다르다. 이러한 특수성은 도회보다 농촌이 일층 농후하고 엄저(儼著)하다. 사실 도회란 고유한 전통과 특유한 지방색이 희박하지마는 농촌에는 도회에 비교하면 전통과 지방색이 농후하다. 이러한 특수성은 실로 농민문학의 극히 중요한 요소이며 생명이다. 문학에 있어 어떠한 대상이든지 그 특수성을 선명히 하여야 하지마는 특히 농민문학에 있어서는 이 특수성을 추거(抽去)한다면 그것은 다만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추상적 농민에 불과하며, 농민문학으로서 형해(形骸)도 구성하기 어렵다. 과거 경향적 농민문학의 가장 중요한 결함이 실로 농민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이 너무 부족하고 다만 농민의 일반성에만 주력한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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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농민에서 다만 그 특수성만을 추구하고 농민이면 누구든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엄연한 그 일반성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지방적 봉쇄성을 가지고 있는 지방주의 문학이나, 또 포말적 현상만 그리는 풍속문학으로 되기 쉽다. 농민은 각 지역을 따라 천태만상의 각 다른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마는 또 어느 지역의 농민이든지 다 가지고 있는 일반성을 가지고 있다. 또 농민문학에 있어서는 농민의 특수성, 즉 도회인이나 기타 비농민에 대비하여 농민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선명히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특수성의 강조를 위하여 농민, 도회인, 기타 비농민도 공통적으로 다 가지고 있는 일반 인간성을 과소 평가하여서는 안 된다. 즉 도회 출신작가는 일종 기이(奇異)와 멸시의 눈으로 또 농촌 출신의 작가는 농민의 독특성을 과장하기 위하여 인간의 공통성을 말살하기가 쉽다. 요컨대 농민문학에 있어서 농민의 지방적 특수성과 다른 비농민에 대한 독특성의 강조는 중요한 요건이면서 일반성과 인간성이 말살될만치 편중함은 역시 경계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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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지방적 특수성과 마찬가지로 강조하여야 할 것은 농민과 농촌의 시대성이다. 일반 농민문학 작가는 이 시대성 묘사를 가장 조홀(粗忽)히 한다. 그것은 농민은 도회인 보다 전통성을 많이 가지고, 또 문화적 혜택을 비교적 적게 받음으로 시대적 영향도 비교적 지완(遲緩)하게 받고, 또 농민의 환경인 자연 그것이 시대적 영향을 무엇보다도 완만하게 혹은 거진 안 받는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은 둔감(鈍感)이고, 소박한 그만치 단순하고 신앙적이어서 어떠한 시대적 유행과 변화가 생기면 거기서 받는 영향과 감수성은 도회보다 완만한 그만치 그들은 거기에 대하여 거진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또 충심적(衷心的)으로 받으며, 일차 받은 그것은 심오하고 둔중(鈍重)하여 도회의 경조천박(輕佻淺薄)한 태도와 다르다. 그래서 일단 감수된 그것은 변색, 번복되기까지도 역시 완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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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들의 환경인 자연은 시대로부터 받은 영향이 더욱 둔감적이다. 그것의 대개는 둔중한 토목공사 등 뿐임으로 도회인의 환경인 일반 문화시설에 비하면 변천이 더디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치 뇌고(牢固)하고 난변적(難變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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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농민과 농촌은 비록 전통이 깊고 시대의 감수성이 민속(敏速)하지 못하다. 그러나 금세(今世)의 무릉도원이 없는 이상 어디든지 어떠한 궁촌벽항(窮村僻巷)이라도 시대의 영향을 각각으로 받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것은 지둔(遲鈍)하고 단순하나 한번 받은 그것은 도시와 도시인보다도 심오하고 신앙적이다. 그래서 농민문학에 있어서도 도시문학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성─ 시대색을 선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라파 농민과 아세아 농민, 중국농민과 조선농민, 관서농민과 영남농민을 일률적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의 농민과 이조시대의 농민, 십년 전의 농민과 십년 후의 농민을 동일하게 말할 수 없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공존할 수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순전한 추상적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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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나타내게 하려면 당해 대상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계를 선명하게 확연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기원 기년(幾年) 경 구라파 어느 지방의 농민이라든지 소화(昭和) 기년(幾年) 경 조선의 관서, 혹은 영남 지방의 농민이라든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다만 작품 중의 연대와 지명의 설명만으로 만족하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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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많은 농민문학작품가운데서 이 시대성과 지방색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않은 작품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또 구라파의 농민도 같고, 조선농민도 같고, 고려시대의 농민도 같고, 소화 15년대의 농민도 같은 괴물을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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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또 농민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자연묘사이다. 농민의 자연에 대한 관계는 고기의 물에 대한 관계와 마찬가지로 수수(須叟)라도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을만치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연의 품속에서 살며 자연에 의존해 산다. 그들의 희노애락의 감정도 휴식활동도 거진 다 자연으로부터 영향과 지배를 받는다. 즉 우순풍조(雨順風調)하면 기뻐하고 한수재(旱水災)를 입으면 슬퍼한다. 여름이면 가장 바쁘고 겨울이면 휴식한다. 그러므로 자연을 말 않고는 농민을 말할 수 없으며, 농민의 생활을 충실하게 묘사하려면 자연의 풍부한 묘사를 필요로 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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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연묘사는 농민의 지방적 특수성을 선명하게 한다. 왜 그러냐하면 각 지방에 따라서 자연은 각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 자연은 도회의 그것보다 그 속에서 사는 사람에 대한 관계가 더, 즉 깊은 때문이다. 얕고 붉은 산, 맑고 차나 불규칙으로 흘러가는 내(川), 그 가운데 얕고 적은 초가가 놓여있는 풍경을 말하면, 우리는 곧 그것이 조선농촌의 환경인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농민문학작품은 대체로 이 자연묘사가 부족하며, 또 풍족하더라도 대개는 일반적 자연이고, 그 지방의 특수성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자연묘사가 적은 것이 역시 한 결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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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자연묘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직접 간접 농민생활과 관련 가진 그것이어야 할 것이며, 또 자연묘사 그것이 농민의 생활묘사 그것을 압도하도록 즉 주객이 전도되도록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직접 간접 농민생활과 아무런 관련 없는 자연묘사를 필요 이상으로 나열하여 대자연에 압도 도취되도록 하면 그것은 농민문학이라기보다 전원문학이 되고 말 것이다. 전원 문학은 농민생산 생활보다도 자연 그 물건을 위하여 그것은 찬미하며 그것을 묘사하는 문학이다. 그러나 농민문학에 있어서는 농민생활을 위하여 그것을 생생하게 한 그것의 공기와 혈육으로서 그리는 것이다. 거기서 농민문학과 전원문학과의 차이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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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농민문학에서 작품대상으로나 독자대상으로나 가장 중심적 대상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작농이다. 물론 지주 자작농 머슴 등도 다같이 농민의 범주 속에 들 수 있으며, 그들도 가치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지주는 직접 생산생활에 관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그들의 대개는 농촌을 떠나 자본가화 하여가고 있으며, 자작농은 비교적 소수일 뿐 아니라 대개는 고용인을 사용하여 완전히 자기 손으로 생산하는 부대(部隊)가 못되며, 머슴은 완전한 농민이라기보다 반노동자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서 가장 다대수이고 생산을 완전히 자기 손으로 시작하고 마치며, 어느 농촌에서든지 가장 전형적 농민인 것은 소작농일 것이다. 그렇다고 농민문학의 대상이 반드시 소작농에 국한할 것도 아니며, 또 왕년의 계급문학과 같이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관계만에 주력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소작농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농민의 건전한 근로생활을, 그들의 가장 전형적 얼굴을 진실하게 묘사할 것이다. 그들 생활의 소극적 방면과 적극적 방면을 다같이 철저히 인식하고 진실하게 표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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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농민문학과 독자대상으로서의 농민과의 관계는 어떠한 예술이든지 그것의 향수자 대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연극과 영화까지도 관객없이 상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혀 가정적, 혹은 특수적 경우에만 허(許)하는 존재이고, 엄정한 의미의 존재, 또는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농민문학도 역시 그것의 향수자 대상을 생각지 않고는 그것의 존재와 그것의 가치를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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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농민문학의 독자 대상은 물론 농민이다. 일반 인테리 상공인 기타 어느 비농민이든지 다 읽을 수 있는 것이지마는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독자대상은 농민이다. 그러나 농민문학에 있어 이 농민문학과 독자로서의 농민문제가 언제든지 커다란 중요한 과제로 되어 많은 농민문학자들이 토구(討究)하여 왔으나 아직까지도 커다란 과제로 그냥 남아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농민, 특히 조선농민은 문화수준이 너무도 낮아서 그들의 예술을 향수(享受)할만한 능력이 부족한 것, 둘째는 농민문학 창작가들이 아직까지도 독자대상으로서의 농민을 깊이 인식 못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농민들의 예술 향수능력의 앙양, 그것은 농민 문학하는 이들의 능력으로만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문학하는 이의 수행할 임무는 오직 농민이 좋아하고 농민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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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문학의 평이화를 오래 전부터 부르짖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평이화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 춘향전이나 심청전이 농민에게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평이하다는 것보다는 그 안에 포재(包在)된 봉건의식이 그들에게 영합된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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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같은 것은 언문으로 쓰인 것이라도 『고향』이나 기타 현대의 농민 소설보다 훨씬 난삽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고향』등 보다 오히려 농민의 독자가 많은 것은 역시 그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또 그들은 많이 읽기 위하여 그들의 진부저급(陳腐低級)한 의식에 영합한다면 그것을 고약에다 당의(糖衣)를 입히는 것이 아니고, 아이스케이크에다 사카린을 넣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그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그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누구든지 자기자신의 생활이 여실히 재현될 것을 볼 때에는 가장 많은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또 그들의 생활을 진실히 그리는 그것만으로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즉 『고향』같은 문학이 심청전 등보다 진실성이 부족해서 보다 적게 읽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예술적 기술이 부족해서 그들의 독자가 보다 적은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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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천학태랑(窯川鶴太郞)씨는 독자를 말(馬)로 문학작품을 물(水)로 비유하여 말을 수변(水邊)까지 끌고 갈 수 있지마는 그렇다고 반드시 말을 물 먹일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을 수변까지 끌고 오는 것은 정치(정치)라면, 먹게 할 수 있는 것은 문학 그것이라 하였다. 즉 문학의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것이 독자를 읽힐 힘이라 하였다. 그렇다. 독자를 보다 많이 읽히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조건은 독자를 만족케 하는 문학작품 그것이고, 창작가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사업과 임무는 독자를 만족케 할 수 있는 문학작품의 창작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서 전술한 바와 같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고 반드시 그들이 많이 읽을 줄 알지는 못한다. 우리 평론가들의 대개는 농민문학의 독자 소수의 책(責)을 작품에만 지우지마는 사실은 작품에만 그 책(責)이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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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농민이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그들에게 많이 읽힐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이 농민문학에 있어 금후(今後) 연구 토의하여야 할 중요한 과제의 하나인 줄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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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구의 팔 할 이상이 농민이라기보다 조선사람의 가장 전형적 타입을 이 농민이 가지고 있다. 조선 사람의 전통성, 인습, 풍속, 기타 모든 전형적 생활을 알려면 농민을 두고는 알 길이 없을 줄 안다. 조선사람의 가장 진실한 얼굴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려면 농민의 주역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마치 인도(印度)의 풍경을 그릴 때에는 상(象 ─ 코끼리, 편자 주)들어야 하고, 몽고(蒙古)의 풍경을 나타내려면 천막을 그려야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아무런 회고(回顧)도 아니고, 회구(懷舊)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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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반성시기라 한다. 자기 자신의 전통을 자성(自省)하며, 자기 자신의 진실한 성격과 진실한 얼굴을 알려는 경향이 농후한 듯하다. 이러한 시기가 어느 한 동안에는 있음직한 또 있어야할 시기이며 당연한 경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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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로서는 이 시기엔 농민문학이 한층 더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되며, 또 일반의 농민문학에 대한 관심이 차차 더 높아간다. 그래서 작품으로는 이기영씨는 물론이고 이무영, 이근영, 김동리, 박노갑씨 등의 우수한 창작이 나오고, 평론으로서는 경향문학 시대에도 일찍 보지 못하던 임화, 인정식(印貞植, ─ 설정식의 착오인 듯, 편자 주), 박승극 제씨의 진지(眞摯)한 논문이 배출하고 있다. 사실 최근 일반독자층의 부화(浮華)한 시(市), 이 경향정(傾向井)문학에 대한 염기적(厭忌的) 경향이 현저해 가는 듯한 데는 일반 생산문학 그 중에도 더욱 농민문학의 발전에 대하여 한 커다란 박차가 될 줄 안다. 농민문학은 결코 누구의 말과 같이 중농주의 문학은 아니다. 또 소재주의문학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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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 이 논문 시작할 때의 계획은 「조선농민문학」과 또 「농민문학과 독자로서의 농민」에 대한 구체적 논토(論討)를 시(試)하려 하였으나 시일(時日) 관계로 그만두고 후일로 미루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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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194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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