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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農民)의 회계보고(會計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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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7
채만식
몰락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식민지 근대화와 대비하여 쓴 글
1
農民[농민]의 會計報告[회계보고]
 
 
2
병문이가 나를 찾아 서울로 온 것이 바로 지난 오월 그믐이다.
 
3
눈과 신경과 그리고 사지가 노그라지게 지친 몸으로 회사 ― 인쇄소의 옆문을 무심코 열어 동무들의 틈에 끼여 나오느라니까
 
4
“학순이!”
 
5
하고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전라도 악센트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6
누군가 하고 휘휘 둘러보는데 저편 담 밑에 섰던 웬 헙수룩한 시골사람이 나를 보고 반기며 쫓아온다.
 
7
나는 정말 병문이를 선뜻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쫓아와서 내 팔을 두 손으로 덥석 붙잡고(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8
“학순이 아닌가? 나를 모르겠어? 나 병문이여.”
 
9
이렇게 말을 하는데 자세히 보니까 딴은 병문이는 병문이다.
 
10
얼굴 바탕이 아주 변하기는 변하였으나 갸름하던 윤곽이며 눈 코 입 모습이 어렴풋이 그대로 남아 있다.
 
11
“웬일인가?”
 
12
나도 그의 팔을 마주 잡았다.
 
13
“응 저 좀 볼일이 있어서……”
 
14
“그래 언제 왔어?”
 
15
“오늘 아침에.”
 
16
“응…… 그래도 첨 길일 텐데 잘 찾아왔구만?”
 
17
“정거장에서 ✕✕인쇄소라고 물으닝께 잘 가르쳐주더만…… 그리두 한참 돌아 댕기다 제우 찾았어.”
 
18
“그래 아침부터 와서 입때 기다렸네그려?”
 
19
“응.”
 
20
아닌게아니라 어디고 공장은 다 그렇지만 ✕✕인쇄소도 작업중에는 절대로 직공에게 면회를 시켜주지 아니한다.
 
21
“거 원! 사무실에 들어와서라도 말을 해서 만나게 해달라고 하잖고……”
 
22
병문이가 그리 할 주변도 없을 터이려니와 그러한댔자 만나게 해주지 아니할 줄 알면서 나는 이렇게 위로를 하여 주었다.
 
23
“그러니까…… 주인(宿所)도 못 정했겠구만?”
 
24
“응 아직……”
 
25
하고 그는 난처한 말을 차마 끄집어내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긁적한다.
 
26
“그러면 차라리 잘 되었네. 내 집으로 가세…… 자 가세.”
 
27
하고 나는 그를 끌다시피 하였다.
 
28
그는 여전히 계면쩍어하면서도 무슨 무거운 짐을 풀어놓은 듯이 비바람과 볕에 그을려 표정이 섬세치 아니한 얼굴에 안도의 빛을 보이며 따라선다.
 
29
뒤처져 나오던 동무들이 흘끔흘끔 나의 낯선 동행을 돌아본다.
 
30
아닌게아니라 병문이는 도회지 사람의 주위를 끌 만하였다.
 
31
오월 그믐이라지만 한다는 모던보이도 맥고모자는 아직 쓸 생심을 못하였는데 귀가 덮이게 머리털이 자란 병문이의 머리에는 여러 해 묵은 맥고모자가 용감하게 올라앉았다.
 
32
이 맥고모자 밑으로 거무튀튀한 야윈 얼굴에 다만 시장기만이 완연히 보인다.
 
33
고기작고기작 새까맣게 땟국이 묻은 무명 두루마기며 헌 타래버선이나 찢어진 볼을 실로 얽어맨 고무신도 그러하려니와 곰방대를 꽂은 괴나리봇짐이 완연히 그를 시골 사람으로 레테르를 붙이었다.
 
34
“참 오랜만이네. 그새 객지서 고생이 어떤가?”
 
35
어깨를 나란히 하고 큰 거리로 걸으면서 그는 이렇게 물었다.
 
36
“고생이야 피차 일반이지만 참 오랜만이네.”
 
37
“자네가 서울로 온 지가 십 년이 넘지?”
 
38
“꼭 십 년이지…… 십 년 동안 한번도 고향이라고 간 일이 없으니까 우리가 만나기도 십 년 만이구만.”
 
39
“허! 우리가 같이 고향에서 살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 년이라니! 그렇지만 자네는 그래도 세상에 난 보람이 있네…… 혈혈단신으로 서울 와서 고학으로 학교 졸업을 하고……”
 
40
“학교 졸업?”
 
41
하고 나는 어색하여서 그의 말을 막았다.
 
42
“하늘서 별이라도 딸 듯이 뛰어나와 겨우 이태 동안 학교라고 다니는 체하다가 작파하고 그 뒤는 줄곧 이 모양인데.”
 
43
나는 이렇게 평범하게밖에는 더 지금의 나를 설명할 다른 수가 없다.
 
44
“그런디 참……”
 
45
하고 그는 문득 생각난 듯이 묻는다.
 
46
“연전에 큰 액운을 당하였다구?”
 
47
이 말 역시 나는 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설명을 한대도 그는 이해할 수도 없으려니와 또 그가 나의 그 소위 ‘액운’ 의 이유를 듣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동정하여서 하는 말이니까.
 
48
“뭘 대수롭잖은 일로…… 그렇지만 가끔 그렇게 편안한 데 가서 몸과 마음을 쉬이는 것도 그리 해롭지는 않으니까.”
 
49
이러한 대답만에도 그는 매우 이상한 세계를 굽어보는 듯이 놀란 모양이다.
 
50
모처럼 만난 손님이 피곤과 시장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나로서는 별로 예가 없는 전차삯을 지불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51
병문이는 나와 한 고향 한 동네에서 자란 어린 날의 동무다. 보통학교도 한해에 같이 들어가 한날에 같이 마쳤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인지 위니까 지금 갓서른일 것이다.
 
52
보통학교를 마치고 나서 나는 남이 서울로 공부하러 오는 것이 부러워 맨주먹을 쥐고 서울로 올라왔다. 친척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그리고 나를 길러 보통학교까지 마치게 하여 준 누님의 아들로 그때에 고학을 할 양으로 서울로 왔으나 그는 몇 달 만에 도로 내려갔다. 병문이는 그때에 그대로 처져서 농사를 지었다.
 
53
병문이가 철을 모르는 오륙 세 때만 하여도 그의 집안은 부자는 못되나 넉넉한 편은 되었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이십사오 년 전 한말(韓末)의 풍운이 급함을 고할 때다. (이하 21행 삭제⎯原註[원주])
 
 
54
나는 안해를 병문이에게 인사시켰다. 그러고 나서 저녁밥이 되기까지 대개 서울 이야기를 하고 기다렸다. 병문이가 무엇하러 서울로 왔는지 그것을 묻고도 싶었으나 저편에서 꺼내지 아니하는 말을 묻기도 무엇하고 하여 먼저 말이 나오게 두어두었다.
 
55
저녁을 마치고 나서 비로소 병문이는 그야말로 요담을 꺼내었다.
 
56
그는 곰방대에 담배를 붙여 흠씬 들이빨고 나서
 
57
“내가 실상은 자네를 찾아보고 긴히 할 청이 있어 이렇게 올라왔네.”
 
58
하고 정말로 긴히 나의 낯을 살핀다.
 
59
“긴한 청? 글쎄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마는 그래도, 내 힘이나마 써서 될 일 같으면야 들어주다뿐이겠나.”
 
60
이렇게 선선하게 나는 대답은 하였으나 이 사람 역시 시골서 농사짓는 사람의 하나로 그 근처에 토지를 가진 서울의 부재지주(不在地主)의 사음 운동이나 하러온 것이 아닌가 하여 적이 맥이 풀리었다.
 
61
“다른 게 아니라 어데 일자리 하나 얻어주게.”
 
62
병문이의 이 말의 의미를 나는 깨닫지 못하였다.
 
63
“응? 일자리라니?”
 
64
“노동하여 먹을 데 말이여.”
 
65
“자네가 서울서 노동할 일자리란 말이지?”
 
66
“응.”
 
67
나는 겨우 그 뜻을 알기는 하였으나 놀랐다.
 
68
“아아니 농사하던 것은 어찌고 서울 와서?”
 
69
농촌 사람이 도회지에 벌이가 좋다고 많이들 모여드는 그러한 단순한 이유로 병문이도 이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70
그는 한 번 고소를 하고 나서
 
71
“시골서 농사를 짓고 살 수가 있으면 이렇게 일부러 올라왔을라구!”
 
72
하고 담배 연기를 푸 내뿜는다.
 
73
“농사를 못 짓다니? 그래도 논이 두어 석지기는 남어 있잖은가?”
 
74
“그게 벌써 떠내려간 지가 언제라고……”
 
75
“어떻게 해서?”
 
76
이 말에 병문이는 담배를 두 대나 털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그동안 지내오던 이야기를 하였다.
 
 
77
병문이가 보통학교를 마치고 농사일을 손에 댄 그 이듬해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갔다. 삼 년 후에는 그의 어머니마저 돌아갔다. 집안의 살림은 그때 이십이 갓 넘은 병문이와 그의 아내의 손에 맡기어졌다.
 
78
병문이는 철없는 짓을 아니하고 영악스럽게 살림을 하였다. 물론 한 튼튼한 농군으로……
 
79
병문의 아버지가 지고 간 빚이 천 원 가량 되었다.
 
80
병문이가 그것을 모르고 삼사 년 지내는 동안에 빚은 많은 새끼를 쳐서 이천 원이 넘었다. 할 수 없이 병문이는 논을 팔아서 그 빚과 또 그 수중에 돈 한푼 없이 당한 그 어머니의 장례 비용을 치르었다.
 
81
이러고 나니까 병문이 앞으로 남는 것은 천 평 가량 되는 조그마한 선산(先山)과 집 한 채와 논 열 마지기며 밭 한 자리― 이것밖에는 더 없었다.
 
82
열 마지기 농사를 지어야 열닷 섬밖에 나지 아니하는데 그것으로 그때에는 벌써 새로 생겨난 어린애 둘과 머슴까지 오륙 명 식구의 일 년 양식이 될까말까 하였다. 그러노라니까 비료값과 농사 밑천 같은 것이며 의복이니 무어니 하는 비용은 해마다 부채로 편입이 되었다. (5행 삭제)
 
83
병문이는 송곳 꽂을 땅도 없는 말간 소작노동자가 되고 말았다.
 
84
이렇게 된 뒤로부터의 병문이의 생활은 말을 아니하여도 알 것이다. 소작하는 논에 비료를 뜻대로 하지 못하니 수확이 적어진다.
 
85
그나마 오 할의 소작료를 물고 나면 남는 것은 빚과 배고픈 것밖에는 없었다. 그러노라니까 소작료도 잘 물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소작권은 이동이 되고……
 
 
86
말을 마치고 난 병문이는 새로이 담배를 붙여 물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역시 할 말이 별로 없다.
 
87
“그래 논은 금년에 떼웠나?”
 
88
한참 만에 나는 이렇게 물었다.
 
89
“응……”
 
90
“조합 같은 것도 없어?”
 
91
“조합? 금융조합?”
 
92
“아아니 농민조합.”
 
93
“조합이라고는 금융조합밖에는 없어.”
 
94
“달리 논을 얻어볼 도리도 없고?”
 
95
“지금 시골서 논 한 자리 얻기가 옛날 전라감사 하나 하기보담도 더 어렵다네.”
 
96
“그러면 대관절 시골 사람들은 무얼 해먹고 사나?”
 
97
“사람이 있나! 그렇게 못 살 지경이 되니까 일본으로 간도로 그렇잖으면 항구로 모두 떠나고 없지…… 읍내만 하여도 그전에는 오백 호나 되던 것이 작년 올에 바짝 더하여 삼백 호도 못되는데……”
 
98
그 뒤 며칠이 지나 병문이는 염천교 세관에 가서 지겟벌이를 하였다. 그런데 병문이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시골 남아 있는 가족들이다.
 
99
아내, 열한 살과 아홉 살짜리 두 딸, 그 아래로 젖먹이 어린것 ― 이들은 굶기 아니면 풀을 뜯어다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있을 것이다.
 
100
이틀이나 밤을 새워가며 생각다 못하여 병문이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 아내에게 부치었다.
 
101
“차비를 부칠 생각은 없지 아니하나 돈을 벌지 못하였으니 앉어서 죽기보담 하루 단 십리씩이라도 걸어서 얻어먹어가며 올라오소. 어린 자식들이 불쌍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
 
102
걸어오자면 짐이 가벼워야 할 테니 누더기 같은 것도 단 한푼이라도 받고 팔아서 가지고 오다가 한때 요기라도 하도록 하소.
 
103
서울 당하여서는 이 편지봉투를 순사한테 보이고 찾아달라고 하소.”
 
104
(1932년)
 
105
<東方評論[동방평론] 1932. 7~8월호>
【원문】농민(農民)의 회계보고(會計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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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민의 회계보고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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