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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승(童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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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3월
함세덕
1
동승
 
 
2
등장 인물
3
주지(住持)
4
정심(淨心) 상좌승
5
도념(道念) 사미승, 14세
6
미망인 서울, 안대가(安大家)집 딸
7
초부(樵夫)
8
인수(仁壽) 초부의 아들
9
미망인의 친정모
10
미망인의 친척들
11
과부 구경꾼
12
새댁 구경꾼
13
노인 구경꾼
14
총각 구경꾼
15
참예인(參詣人)들
16
젊은 승(僧)들
 
 
17
첫겨울
 
18
동리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 고찰(深山古刹).
19
숲을 뚫고 가는 산길이 산문(山門)에 들어간다. 원내(院內)에 종각, 그 뒤로 산신당, 칠성당의 기와지붕, 재 올리는 오색 기치가 펄펄 날린다. 후면은 비탈. 우변(右邊), 바위 틈에 샘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는 물통이 있다.
20
재 올린다는 소문을 들은 구경꾼 떼들 산문으로 들어간다.
21
청정한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이따금 북소리.
22
도념, 물지게에 걸터앉은 채, 멀거니 동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이따금 허공을 응시하다가는, 고개를 탁 떨어뜨리고 흐느낀다.
23
초부(樵夫), 나무를 한 짐 안고 들어와 지게에 얹는다.
 
 
24
도 념  인수 아버지, 정말 바른 대루 얘기해 주세요. 우리 어머니, 언제 오신다구 하셨어요.
 
25
초 부  내년 봄보리 비구 나면 오신다더라.
 
26
도 념  또 거짓말?
 
27
초 부  거짓말이 뭐니? 세상 없어두 이번엔 꼭 데리러 오실 걸.
 
28
도 념  바위 틈에 할미꽃이 피기가 무섭게, 보리 비나 하구 동네만 내려다 봤어요. 인수 아버지네 보리를 벌써 다섯 번째 비었지만 어디 오세요?
 
29
초 부  내년만은 틀림없을 게다.
 
30
도 념  동지, 섣달, 정월, 이월, 삼월, 사월 아이구 아직두 여섯 달이나 남았군요?
 
31
초 부  뭘, 세월은 유수 같다고 있지 않니?
 
32
도 념  여섯 달을 또 어떻게 기다려요?
 
33
초 부  눈 꿈쩍할 사이야.
 
34
도 념  또, 봄보리 비구 나서 안 오시면 도라지꽃이 필 때 온다구 넘어갈랴구?
 
35
초 부  이번만은 장담하마. 틀림없을 게다. (도념의 팔을 붙들고 백화목 밑으로 끌고 가며) 이리 오너라. 내가 여섯 달을 빨리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주마.
 
36
도 념  그만둬요. 또 속일려구?
 
37
초 부  한 번만, 더 속으려무나.
 
 
38
초부, 도념을 나무에 세우고 머리 위에 세 치쯤 간격을 두고 도끼를 들어 금을 긋는다.
 
 
39
도 념  (발돋움을 하며) 이거 너무 높지 않어요? 작년 봄에 그은 금은, 두 치밖에 안 됐어요.
 
40
초 부  높은 게 뭐니? 네가 이 금까지 자랄 땐, 여섯 달이 다- 가구, 뒷산엔 꾀꼬리가 울구 법당 뒤엔 목련꽃이 화안히 필 게다. 그럼 난 또 보리를 비기 시작하마.
 
41
도 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 안 빠지구, 아침이면 키를 재봤어요. 그은 금까지 키는 다- 자랐어두 어머니는 안 오시던데요 뭐?
 
 
42
도념 물지게를 지고 일어선다. 서서 걸음 걷다가 기진하여 픽 쓰러진다.
 
 
43
초 부  (달려가 붙들며) 아-니, 물은 하루 종일 길으라던?
 
44
도 념  할 수 있나요.
 
45
초 부  제-기, 마당에다 배를 띄울랴나부다.
 
46
도 념  가마솥에, 세 번이나 꼭 차게 길어 붰는데두, 모자라는 걸요.
 
47
초 부  그걸 다 어따 쓴다디?
 
48
도 념  어따 쓰는 게 뭐에요? 떡을 세 시루나 찌구, 전야 부침개를 이틀을 두구 부쳤는데, 그 설거지가 좀 해요?
 
49
초 부  거 참 누군지 굉장히 지낸다.
 
50
도 념  왜, 우리 절 도사들이 댁에는 안 갔었어요. 서울 안대갓집 재 올리니 시주하라구 갔었을 텐데?
 
51
초 부  오셨더라. 아, 요전 사십 구일 재 지냈으면 그만이지, 백일 재는 또 뭐니?
 
52
도 념  죽은 혼이, 백일 만에야 가시문을 열구, 극락엘 들어가거든요.
 
53
초 부  그 댁이 아마, 이 절에 시주 그 중 많이 했을 걸?
 
54
도 념  저- 칠성당두, 그이 할머니가 지으셨대요. 작년에 종각 기둥이 썩어서, 쓰러지게 됐을 때두, 그 댁에서 고쳐 주구요.
 
55
초 부  참, 언젠가 스님두 그러시더라. 서울 안대갓집 아니면 이 절을 버티어 나갈 수가 없다구.
 
56
도 념  못 꾸려나가구 말구요. 우리 절은 본산(本山)처럼 추수하는 게 없구, 시주(施主)받는 것두 적거든요. 그런데 그 대갓집에서는, 해마다 쌀을 열 가마씩 공양(供養)해 주구, 한번 재를 올리는 날이면 노구메를 두 솥씩 세 솥씩 지어줘요. 그래서 재가 끝나면 그 밥을 말렸다가 다음 잿날까지, 두구두구 먹는 걸요.
 
 
57
구경 오는 부인네들 한 패가 숨을 가쁘게 쉬며 올라온다.
 
 
58
과 부  극락이 이렇게 높다면, 난 지옥엘 갈망정 안 갈테유.
 
59
새 댁  숨 좀 돌려가지구 들어갑시다. (원내를 기웃거리다 안을 가리키며 초부에게) 저이가 서울서 온 분이에요?
 
60
초 부  (나가며) 난 이 절 사람이 아니요. (도념을 가리키며) 얘더러 물어보슈.
 
 
61
초부, 다시 나무를 긁으러 내려간다.
 
 
62
도 념  네, 저이가 바루 서울서 오신 안대갓집 아가씨세요.
 
63
과 부  어디?
 
64
새 댁  지금 법당 앞에서 신발 신는 이가, 바루 그 대갓집 딸이라는구료.
 
65
도 념  (자랑하는 듯이) 저 아씨는 언제든지 하아얀 두루매기에다 하아얀 털 목도리를 하구 오신답니다.
 
66
과 부  대갓집 딸이란, 아닌 게 아니라 다르군요. 인품이 절절 흐르는데.
 
67
도 념  머리에두 모두 금붙이만 꽂았어요. 참 이쁘지요?
 
68
새 댁  (웃으며) 이 녀석아, 이쁜지 미운지, 네가 아니?
 
69
도 념  왜 몰라요? 이 절에 오는 사람 중에 저 아씨같이 예쁜 이는 없어요. 목도리를 벗으면, 목이 눈같이 하아에요.
 
70
과 부  조그만 녀석이 그게 무슨 소리야?
 
71
새 댁  그럼 넌 예전부터 알았겠구나?
 
72
도 념  그럼은요. 어렸을 때부터 안 걸요. 그이가 처음 불공을 드릴 때 “난, 아이가 없어 축원까지 드리는데, 어쩌면 니 어머닌 너를 이 절에다 두구 돌보지도 않니” 하면서 울랴구 하겠지요.
 
73
과 부  에구 고것이야. 말두 얌전하겐 하네.
 
74
도 념  참, 어데서들 오셨지요?
 
75
새 댁  여기서 한 백 리 떨어진 가좌울서 왔어.
 
76
도 념  저, 그 동네에 혹시 저 대갓집 따님 같은 이 사시는 것 모르세요?
 
77
과 부  그런 인 없어. 왜?
 
78
도 념  우리 어머니두 꼭 저이같이 생기셨거든요.
 
79
새 댁  그래?
 
80
도 념  만나시거든 꼭 나한테 좀 알려주세요.
 
81
과 부  그래라.
 
 
82
여자 구경꾼들, 산문으로 들어간다. 남자 구경꾼들 또 한 패가 올라온다.
 
 
83
총 각  얘, 재 다 지냈니?
 
84
도 념  아아니요. 조금 있으면 끝나요. 어서들 들어가 보세요.
 
85
노 인  누군지 자식 한 번 똑똑하겐 났군.
 
86
총 각  그러게 말이에요.
 
87
노 인  얘가 이렇게 출중하게 생겼을 땐, 어머닌 얼마나 이뻤겠나?
 
 
88
도념, 원망스러운 듯이 구경꾼들을 쳐다본다. 고개를 푹 숙이고 물지게를 들고 비틀거리며 나간다.
 
 
89
총 각  얘, 내가 좀 들어다 주랴?
 
90
도 념  스님 보시면 꾸중하셔요.
 
91
노 인  아아니 왜 꾸중을 하시니?
 
92
도 념  아침에두 저어기서 나무하는 이가 길어 준다구 하시기에, 맽겼다가 혼난 걸요. “서방 대사(西方大師)들은 가시덤불이나 바위 위에 앉은 채 3년씩 4년씩 식음을 전폐하구 난행(難行) 고행(苦行)하시며 수업을 하시는데, 너는 요까진 물 긷는 괴롬두 못 참느냐”구 하시면서, 야단야단 하셨어요. (하고 원내로 들어간다)
 
93
총 각  쟤가, 그 처녀중이 나가지구 삼[麻]밭에다 버리구 간 애랍니다.
 
94
노 인  처녀중이?
 
95
총 각  네, 지금은 없어졌지만, 십여 년 전에 이 산 너머에 여승들만이 사는 이암(尼庵)이 있었대요.
 
96
노 인  그럼, 파계(破戒)를 한 셈이군?
 
97
총 각  그렇지요. 아주 신앙이 굳은 여자였었는데,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란 할 수 없나 봐요.
 
98
노 인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인데?
 
99
총 각  사냥꾼이라는군요. 매일 사냥하러 이 산에 드나드는 중에 둘이 눈이 맞었다나 봅니다.
 
100
노 인  그럼 지금두 살아 있긴 하겠군?
 
101
총 각  살아 있다나 봅니다.
 
102
노 인  그럼, 스님이 오늘까지 쟬 주어다가 키우셨겠군?
 
103
총 각  그렇지요. 지 어머니가 쟤가 아홉 살 때 한 번 다녀갔다는군요. 허지만 쟤는 보지두 못했지요. 스님한테만 갈 적에, 내년 봄보리 비구 나서 꼭 데리러 온다구 하더니 이내 깡감소식이라는군요.
 
104
노 인  그럼, 스님께선 즈이 부모 사는 데를 아시긴 하겠군?
 
105
총 각  아시지만, 당최 안 가르쳐 주시는 모양이에요.
 
 
106
도념, 물을 붓고 빈 물지게를 지고, 다시 나온다.
107
구경꾼들 “쉬.” 하고 말을 뚝 그친다.
 
 
108
도 념  왜들 안 들어가구 서셨어요?
 
109
총 각  지금 들어갈란다.
 
110
도 념  지금 내 얘기들 하셨지요?
 
111
총 각  아-니.
 
112
도 념  아니가 뭐에요?
 
113
노 인  우리가 네 얘기를 왜 하니?
 
114
도 념  그럼 왜 내가 나오니까, 얘기하시다가 뚝 그치세요?
 
115
총 각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지.
 
116
도 념  뭘요? 절에 오는 사람들치구 내 얘기 안 하는 사람있나요? 모두들 소군소군만 하지, 한 사람두 나한테 우리 어머니 사시는 데를 가르쳐 주는 이는 없어요.
 
117
노 인  모두 모르니까 그러겠지.
 
 
118
남자 구경꾼들 원내로 들어간다.
119
초부의 아들 인수, 새 꾸러미를 허리에 차고 느름치기를 들고 소리를 하며 들어온다.
 
 
120
인 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원내로 들어가려고 한다)
 
121
도 념  (쫓아가 앞을 막아 서며) 못 들어가.
 
122
인 수  왜? 다아들 들어가는데 왜 나만 못 들어가?
 
123
도 념  새 꾸러밀 들구 어델 들어가려구 이래? 스님 보시면 펄펄 뛰실 텐데.
 
124
인 수  꾸중 들어두 내가 듣지 네가 들어?
 
125
도 념  으응? 너를 왜 절 안에 들여보냈냐구, 날 가지구 꾸중하시니까 걱정이지.
 
126
인 수  산문으로 안 들어가면 그만이지. (비탈로 내려가며) 이 길루 돌아서 가두 꾸중하셔?
 
127
도 념  (당황하며) 너 그 길룬 못 간다.
 
128
인 수  오옳아, 너 또 덫을 쳐놨구나? 흥,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랜다구, 저는 토끼를 산 채루 막 잡으면서, 내가 새 좀 잡는다구 절에도 못 들어가게 했겠다. 어디 보자. (하고 산문과 비탈 길 사이로 나간다)
 
 
129
동리 어린이들 한 패가 산문에서 나와 인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비탈길로 나란히 내려간다. 도념, 나무에가 기대 서서 동리 아이들을 멀거니 바라본다. 무슨 설움이 복받치는지 나무에 얼굴을 파묻고 허희(虛?)한다. 상좌승(25세쯤) 정심, 산문에서 나온다.
 
 
130
정 심  도념아, 재 다 끝났다. 어서 들어가, 마님들 진지상 봐라.
 
131
도 념  (무언)
 
132
정 심  너 또 동네 내려가구 싶은 게구나?
 
133
도 념  알면서 왜 물으세요?
 
134
정 심  너는 언제나 스님의 말씀을 터득한단 말이냐?
 
135
도 념  나두 재들처럼 좀 맘놓구 놀구 싶어요.
 
136
정 심  넌, 아직두 그런 생각밖에 할 게 없니? 스님께서 밤낮 뭐라고 하시든? 우리들은 인간 속세 가운데서 그 중 유복한 사람들이라고 늘 하시지 않든?
 
137
도 념  유복이 무슨 유복이에요?
 
138
정 심  이게 무슨 소 리니?
 
139
도 념  일년에 한번두, 동네에 내려가서 놀라구 하신 적이 있어요? 남들은 단오날은 그네를 뛰구 노는데 여기서는 재만 지내지 않어요? 정월이라구 윷 한번을 놀게 한 적이 있어요?
 
140
정 심  아무래두 네가 요새 마(魔)에서 섭(攝)한 모양이다. 요새가 그 중 위험한 때야. 만일 믿음이 약해 꾀임에 넘어간다면, 이때까지 쌓은 공덕두 다 허사가 되구 만다.
 
141
도 념  좌상께서는, 어깨동무하구 노래하며 내려가는 동네 애들을 보시면서두 그러세요?
 
142
정 심  그럼 넌, 저애들이 유복하단 말이냐?
 
143
도 념  네, 어머니 아버지가 있구, 동생들 누나들두 있구, 참 재미나게 산다니, 그게 정말 유복이지 뭐에요?
 
144
정 심  스님께서 그 소릴 들으셨다면 또 펄쩍 뛰시겠다. 사람이 부모를 따르는 거나, 동네에 가서 살구 싶어하는 것은, 모두 번뇌 때문이라구 말씀하시던 것을 또 잊은 게구나? 산하구 절밖에 세상을 모르구 사는 것이니까 우리들 신세야말루 부처님께 치하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 하시지 않더냐?
 
145
도 념  그 말은 귀에 젖었으니까 그만 하시구, 저한테 우리 어머니 얘길, 몰래 좀 들려주실 수 없어요?
 
146
정 심  나이도 그만큼 먹었는데, 넌 입때 어머니 생각을 하구 있니?
 
147
도 념  요새는 참말 참말 한번 보고 싶어요. 좌상은 우리 어머닐 보셨으니까 아시지요?
 
148
정 심  본 적 없어.
 
149
도 념  뭘요? 또 속이실려구. 우리 어머니가 날 버리구 이 절을 도망하시던 해까지, 삼년이나 같이 계셨다구들 그러던데요 뭐?
 
150
정 심  그건 공연히 하는 소리들이야.
 
151
도 념  꼭 좀 가르쳐 주세요, 네. 스님 몰래 지금 계신 데를 좀 가르쳐 주세요.
 
152
정 심  벌써 그때가 십년 전 일인데, 낸들 지금 어떻게 알겠니?
 
153
도 념  스님이 가르쳐 주지 말라구 하셔서 그러시지요?
 
154
정 심  스님두 모르셔.
 
155
도 념  모르시는 게 뭐예요? 오년 전에 여기 다녀까지 가셨다는데? 어쩌면 나만 살짝 빼놓구 못 보게 하셔? 좌상은얼굴은 아시겠지요? 어떻게 생기셨지요?
 
156
정 심  하두 오래 돼서 그것두 잊어버렸다.
 
157
도 념  대강 어렴풋이라두 생각은 나시겠지요?
 
158
정 심  눈 앞에 모습이 가물가물하다가는 희미해져 버리니까 통 기억이 안난다.
 
159
도 념  생각나시는 대루만두 좋으니 좀 얘기해 주세요.
 
160
정 심  작년에두 얘기했지만, 저 서울 안대갓집 아씨같이 생기신 것만은 틀림없다.
 
161
도 념  정말 그렇게 이쁘셨어요?
 
 
162
재가 끝났나 보다.
163
원내에서 북소리 요란히 들린다.
 
 
164
정 심  아이 그만 캐라. 넌 오늘 밤에 강 받을 경문을 다 외놓기나 하구 이러니?
 
165
도 념  못 욌어요.
 
166
정 심  또 스님께 꾸중을 듣게 됐구나. (한숨을 쉬고, 혼잣말로) 나두 나이를 먹을수록, 너는 감히 상상두 못할 여러가지 번뇌가 들끓구 있단다. 그 중에두 여인에 대한 사랑과 욕정의 번뇌는, 날로 나를 괴롭혀 가기만 한다. 그러기 때문에, 매일 밤 고덕하신 스님의 강의를 받구두 여지껏 번뇌에서 해탈(解脫)치 못하는구나. 너는 아직 어리니까 나 같은 괴롬을 못 가진 것만도 행복하다구 생각해야 한다. 뭣 때문에 동네 내려갈 궁리를 하구 어머닐 그리워하며 경문 공부까지 게을리한단 말이냐?
 
167
도 념  인젠 참말 진저리가 나서 경문은 못 외겠어요.
 
168
정 심  마음이 밤낮 딴 곳에 가 있기 때문에 그러지?
 
169
도 념  한참 읽구 있으면 경전 속에 어머니 얼굴이 스스로 떠올라와요.
 
170
정 심  그것만두 아니야. 가만히 보니까, 요새 모두 너 하는 짓이 수상하더라.
 
171
도 념  수상하긴 뭣이 수상하다구 그러세요?
 
172
정 심  너, 어젯밤에 법당엔 왜 들어갔니?
 
173
도 념  (돌연 낭패해진다. 평정을 지으며) 경문을 외우다 힐끗 보니까, 촛불이 꺼졌겠지요. 그래 불을 켜노려구 들어갔어요.
 
 
174
북소리와 법당에서 나오는 참예인들의 왁자지끌한 떠드는 소리.
 
 
175
정 심  모두들 나오시는 모양이다.
 
176
도 념  으응? 아씨가 왜 이리 나오실까요?
 
 
177
장안 부자, 안대갓집 딸, 시름없이 나온다. 하아얀 소복을 입었다. 얼굴엔 수심이 가득히 끼었다.
 
 
178
정 심  (허리를 굽혀) 얼마나 가슴 아프시겠습니까?
 
179
미망인  기만 막힐 따름이지 슬프지두 않군요.
 
 
180
도념, 황홀한 눈으로 미망인을 응시한다.
 
 
181
정 심  남달리 영악하구 귀여운 도련님이었으니까, 부처님께서 몸소 가까이 두실려구 불러 가신 모양입니다.
 
182
미망인  그 애는 극락엘 갔으니 좋겠지만, 내야 그래두 살아 있는 것만 어디 합니까?
 
183
정 심  인간 번뇌 모르구 타계(他界)하는 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184
미망인  그 애 하나를 날려구 꼭 백일 기도를 했었어요. 오늘 백일재를 지낼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185
정 심  상심되시겠습니다.
 
186
미망인  (비로소 도념이 자기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쟤가 사월 파일날 내가 불탄제(佛誕祭) 올리러 왔을 때 산목련(山木蓮) 꺾어주던 애지요?
 
187
정 심  그랬던가요?
 
188
미망인  (도념에게) 아니 너 그동안 퍽 컸구나.
 
189
도 념  (수줍어 고개를 숙인다)
 
190
미망인  네가 준 그 목련꽃, 갖다가 병에 꽂아 뒀는데, 보름이나 살았더랬어.
 
191
도 념  (의아한 듯) 그래요? 여기선 방에 갖다두면, 향불내에 단박에 시들어 버려요. 역시 동넨 좋군요?
 
192
정 심  그날 아씨께서 내려가신 후, 얘는 산에서 저절루 나는 생물을 두구 보지 꺾었다구 스님께 여간 꾸중을 듣지 않었답니다.
 
193
미망인  아이, 저를 어쩌나. 나 때문에요?
 
 
194
도념 울 듯 울 듯 미망인을 바라본다.
 
 
195
미망인  그렇게 나를 자꾸 보지 마라.
 
196
정 심  도념아, 그만 들어가라.
 
197
도 념  네.
 
198
미망인  (나가려는 도념을 붙들며) 그대로 두세요 잠깐만 더 있다 가게. (도념에게) 아까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두 창 틈으로 들여다보구 있었지?
 
199
도 념  아아니요.
 
200
미망인  아니가 뭐야? 내가 두 눈으로 확실히 봤는데? 그리구 승방에 갔을 때두 벜 뒷문으로 내다보구서 뭘?
 
201
도 념  좌상께서 우리 어머니 얼굴두 꼭, 아주머니같이 이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난 아주머니만 보면 왜 그런지 괜히 좋아요.
 
202
미망인  응? 나같이 생기셨어?
 
203
도 념  (울음 섞인 소리로) 그렇지만 마음만은 야차(夜叉)같이 악독하시대요. 그래서 저를 데려 가시지 않는대요.
 
204
미망인  그러시길래 널 버리고 가셨지?
 
205
도 념  그런데 왜 목도리를 안 하구 나오셨어요.
 
206
미망인  (약간 놀라며) 목도리? 응, 방에 벗어놨어. 골치가 좀 아프길래, 바람 좀 쐬려구 나왔지.
 
207
정 심  얜 동네 애들 설날 기다리듯, 아씨댁 재 올리는 날만 기다린답니다.
 
208
미망인  나를 그렇게 보구 싶어 했어요?
 
209
정 심  그럼은요. 아주 “하이얀 털목도리 한 부인”이라구 아씰 부른답니다.
 
210
미망인  (도념의 두 손을 뺨에다 갖다 대며) 나두 왜 그런지, 너를 볼 적마다 마음이 끌렸었단다. 너 이 절 떠나서, 살구 싶지 않니?
 
211
정 심  아씨,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212
도 념  살구 싶어요. 동네 내려가서 살구 싶어요. 허지만 스님이 못 내려가게 하시는 걸요.
 
213
미망인  스님껜 내가 잘 말씀 여쭤 볼게. 오늘이 백일재 마지막 날이니까, 우리 인철이두 편안히 극락에 갔을거야. 그러니까, 너 우리집에 가서, 나를 어머니라구 부르구 살잔 말이야.
 
214
도 념  정말이세요? 거짓말 아니시지요? 절 속이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215
미망인  내가 언제 거짓말했나?
 
216
도 념  아아니요. 허지만 모두들 나한텐 거짓말만 하니까, 통 믿을 수가 없어요.
 
217
미망인  그럼, 나만은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인 줄 알면 되지 않니?
 
218
도 념  네. 저를 꼭 데려가 주세요.
 
219
정 심  도념아, 어데다 어리광을 피구 이러니? 아씨, 얘를 양자 삼으실 생각만은 아예 마십쇼. 스님께서 절대루 허락 안 하실 겁니다.
 
220
도 념  아니에요. 아주머니께서 잘 말씀 여쭈면 됩니다. 스님께서두 절더러 꼭 따라가라구 하실거예요.
 
221
미망인  염려 마라. 너 입때까지 서울 못 가봤지?
 
222
도 념  네, 여기서 멀다지요?
 
223
미망인  한 사백 리 간단다.
 
224
도 념  가보진 못했지만, 스님께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225
미망인  무슨 말씀?
 
226
도 념  옛날에는 대궐이 있었다구요.
 
227
미망인  지금두 있어.
 
228
도 념  우리 본산 대웅보전(大雄寶殿)이나 약사당(藥師堂)보다 수십 배나 크다지요?
 
229
미망인  그럼. 그 뒤루 삥 돌려 성이 있구 동서남북 사대문이 있어. 옛날엔 저녁종만 치면, 대문을 닫구 댕기지를 못하게 했단다.
 
230
도 념  스님께서두 궁전은 같은 속세지만 속세 중에서두 그 중 깨끗하구 귀한 곳이라구 하 셨어요. 그리고 절더러, “사람이 십선(十善)의 왕위(王位)에 태어나, 궁중에 살게 되려면 전세에 그만한 공덕(功德)을 싸놓지 않으면 안 되니까, 너두 열심히 도를 닦아, 금생(今生)에 좋은 일을 많이 해놓아 후생에 가서 고귀한 몸이 되도록 하라”구 하셨어요.
 
231
정 심  그렇지만, 아씨 댁은 궁전이 아니라 민간의 집이야.
 
232
도 념  서울은 마찬가지지 뭐에요? 좌상, 좌상께서두, 스님께 잘 말씀해 주세요.
 
233
미망인  (도념을 조용히 바라보며) 날더러 “어머니” 하구 불러봐.
 
234
도 념  (가늘게) 어머니!
 
235
미망인  (그를 꼭 껴안으며) 일생 너를 친자식같이 생각하구 내 곁에서 안 놀 테다.
 
236
정 심  (눈물을 닦으며) 스님이 허락하시면 좋겠습니다만 원체가 완고하신 양반이구 또 얘 어머니 과거가 과거니만치, 좀처럼 승낙하실 것 같지 않군요.
 
237
미망인  너, 여기 있거라. 내가 가서 스님께 말씀 여쭙구 올게.
 
238
정 심  양자 달라구 하는 이가 어디 한 분 두 분였나요?
 
 
239
미망인 원내로 들어간다.
240
정심 뒤따른다.
241
도념, 입에다 손을 대고 “인수 아버지” 하고 부른다.
242
멀-리 “인수 아버지” 하고 산울림이 퍼져 온다.
243
초부 “왜 그러니” 하며 갈퀴를 들고 들어온다.
 
 
244
도 념  (좋아 뛰며) 난 서울 가요. 난 서울 가게 됐어요.
 
245
초 부  서울?
 
246
도 념  네.
 
247
초 부  너 또 도망가려구 하는 게 아니냐?
 
248
도 념  도망이 뭐에요? 하이얀 털목도리 한 부인이 날 데려다 수양아들을 삼는댔는데.
 
249
초 부  수양아들? 너 그게 정말이니?
 
250
도 념  그럼은요. 지금 스님께 승낙 맡으러 가셨어요.
 
251
초 부  도념인 운이 트였구나.
 
252
도 념  난 속으루 벌써부터, 언제든지 그 부인 입에서 이 말이 나올 줄 알았어요.
 
253
초 부  네가 하룻밤 새에 대갓집 수양아들이 된다니, 아주 그야말루 꿈 같구나?
 
254
도 념  그이가 불공 드리기 전에, 나한테 한 얘기가 있어요.
 
255
초 부  뭐라고 했길래?
 
256
도 념  “아이, 그 애 참, 의젓하게두 생겼다. 수양아들 삼았으면 좋겠네.” 아, 이러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군요?
 
257
초 부  나두 서울 가면 한번 찾아가마.
 
258
도 념  네, 꼭 오세요. 사랑에다 모셔 놓구 한 상 잘 차려 드릴게요. 인수 아버지 좋아하시는 술두 많이 드리구요.
 
259
초 부  그래라. (하늘을 쳐다보며) 어째 눈이 올랴나부다.
 
260
도 념  퍽퍽 쏟아져두 좋아요. 샘가에 빙판이 지면, 또 물을 어떻게 긷나 하구 걱정했지만, 인젠 괜찮어요. 서울 아씨댁엔 시종들이 많으니까 제가 안 길어두 될 거예요. (2, 3보 나가다가 돌연 생각난 듯이 발을 멈추며) 에구 깜박 잊어버렸드랬네. (하고 급히 비탈길로 달려간다)
 
261
초 부  (펄쩍 뛰며) 너 또 토끼 덫을 쳐 논 게구나?
 
262
도 념  (돌아보며) 걸쳤을 거예요. (하고 쏜살같이 내려간다)
 
 
263
초부, 부근의 낙엽을 긁는다.
264
도념의 소리 인수 아버지, 인수 아버지.
 
 
265
초 부  (내려다 보며) 걸쳤니?
 
 
266
도념의 소리 네, 여간 크지 않아요. 망 좀 잘 봐주세요.
 
 
267
초 부  그래라.
 
 
268
이때 주지, 미망인과 원내에서 나온다.
 
 
269
초 부  (절하며) 스님, 안녕하셨습니까?
 
270
주 지  음, 많이 했나?
 
271
초 부  어젯밤 바람엔 도토리가 상당히 많이 떨어졌습죠.
 
272
주 지  묵이나 잘 쑤거든 한 목판 갖다 주게.
 
273
초 부  네.
 
274
주 지  참 그리구, 어렵지만 들어가서 손님들 상 좀 날러 주게. 손이 모자라 쩔쩔매구들 있으니. (미망인에게) 말씀만은 고맙습니다마는, 절대루 속세에 안 내려 보낼 작정이니까, 오늘 이야기는 이대루 거둬 두시지요.
 
 
275
초부, 원내로 들어가며 뒤로 손을 돌려 도념에게 스님 오신 신호를 한다.
276
그러나 도념은 모르는 모양이다.
 
 
277
미망인  허지만 저 애 앞길두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이대루 절에서 늙히실 작정이시라면 모를까…….
 
278
주 지  늙히지요. 이 더러운 속세에 털끝만치나마, 서방정토(西方淨土)의 모습을 갖춘 곳이 있다면, 그것은 이 절밖엔 없으니까요.
 
279
미망인  세상에서 죄를 짓구 들어왔다면 모를까, 아직껏 동네 구경두 못한 것을 일생 여기서 보내게 하신다는 건……뭐라구 했으면 좋을까 좀 가혹하시다구……?
 
280
주 지  속세 구경 못한 게 얼마나 다행합니까?
 
281
미망인  그렇지만 벌써 부모 생각을 하구 세상에 가서 살구 싶어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나이 먹으면 여기 있는대두 세상 사람들의 번뇌는 자연히 갖게 될 거라구 생각해요.
 
282
주 지  설혹 갖게 되더래두, 단지 그리워하구 보구 싶어할 따름이지, 술을 먹구, 계집을 탐내구, 부처님이 말리시는 육계(六戒)를 태연히 범할 염려는 없거든요.
 
283
미망인  그런 것을 하게 제가 가만두나요?
 
284
주 지  아무리 말리신대두 자연 듣구 보는 게 그것밖에 더 있습니까?
 
285
미망인  왜요? 집에서 내보내지 않구 여기서처럼 경문 읽게 하구 수업시키면, 스님께 강의 받는 거나 다름없지 않어요?
 
286
주 지  이 사방이 탁 트인 산간에서, 동네 내려가구 싶어하는 녀석이, 서울 가서 행길에 안 나가려구 하겠습니까?
 
287
미망인  그럼, 저한테 몇 해만 맡겨 주세요. 데리구 있다가, 도루 돌려 보내드릴 테니.
 
288
주 지  저는 다-만 번뇌의 기반에서, 도념이를 미연에 막기 위해 이러는 겁니다. 한번 발을 내려 놓구 다시 생각하면, 그때는 버얼써 제 자신이 얼마나 깊은 구렁에서 헤매구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미처 발을 뺄 수가 없이 전신이 죄구렁으로 휩쓸려 들어가거든요. 저두 속세에서 발을 끊구 불문에 귀의할 때까지는, 이만저만한 수업과 고행을 쌓은 게 아닙니다. 제가 당해보구 하는 것이니, 자꾸 조르지 말아 주십시오.
 
289
미망인  그럼 도념이 장래니 행복이니 다 빼놓구, 다만 저를 위해 꼭 양자루 주십시오.
 
290
주 지  글쎄 자꾸 이러시면, 제가 여간 난처하지 않습니다.
 
291
미망인  남편을 잃은 지 삼년이 못 되어, 외아들마저 이렇게 잃구 보니, 눈 앞에 땅이 다 꺼질 듯하군요. 마음이 서운하던 참에, 그 애가 자꾸 나를 따르는 것을 보니까, 불현듯 정이 솟아 오릅니다. 지금부터는 그 애한테라두 마음을 붙이구 살아야지, 외로워서 단 한 시간을 못 살 것 같군요.
 
292
주 지  아씨의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293
미망인  아신다면서 이렇게 애원하다시피 하는데두, 승낙 못하시겠단 말씀이세요?
 
294
주 지  아씨, 노엽게 생각 말어 주십쇼.
 
295
미망인  그럼, 한 일년만 데리구 있다가 다시 올려 보내드리지요.
 
296
주 지  …….
 
297
미망인  그것두 안 되시겠단 말씀이세요?
 
298
주 지  …….
 
299
미망인  그럼, 반 년두 안 되겠어요?
 
300
주 지  아씨께서 양해해 주시기를 저는 바랄 따름입니다.
 
301
미망인  그럼 도념일 불러다 제 생각을 한번 들어 보시지요? 지가 날 따라가겠다면, 저에게 맡겨 주시고, 또 싫다면 저두 억지는 안 하겠어요.
 
302
주 지  물어보시나마나, 그 녀석은 지금 당장 따라가겠다구 날뛸 겁니다.
 
303
미망인  그럼, 승낙하시지 뭘 그러세요?
 
304
주 지  아무튼, 저에게 생각할 여유를 좀 주십쇼. 오늘루 꼭 데리구 가셔야만 할 것두 아니시니까, 좌우간 일간 댁으로 기별해 드리지요.
 
305
미망인  그럼 전 승낙하신 걸루 믿구 있겠어요. 그리구 어머니께두 그렇게 여쭙겠어요. (하고 원내로 들어간다)
 
306
주 지  이 녀석이, 일하다 말구 또 어델 갔을까? 에이 걱정덩어리 같으니.
 
 
307
초부, 원내에서 나오며 스님이 나오셨다고, 초조히 신호를 한다. 그러나 도념은 전연 열중하여 알아채지 못한다.
 
 
308
초 부  다, 날러 드렸습니다.
 
309
주 지  에구 수고했네.
 
 
310
도념의 소리 토끼똥 많은 데다 쳐놓으면, 영락 없어요.
 
 
311
초 부  (황급히 도념의 소리를 막으려고 고함을 지른다) 인수야, 인수야, 저눔이 겁두 없이 또 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갔군! 선뜩 내려오지 못하겠니? 에이구, 저눔의 나무 위에 새 집 지어 논 것만 보면 맥이 풀려요.
 
 
312
도념의 소리 인수 아버지, 스님 아직 안 나오셨지요?
 
 
313
초 부  나, 나무 쓰러질 적마다, 새 새끼가 죽거든입쇼. 이 인제부터는 도끼질을 하기 전에 미리 둥어리를 옮겨 놓구 패야겠어요.
 
314
주 지  (냉철히) 지금 그게 도념이 소리지?
 
315
초 부  아닙니다. 모, 모르겠습니다.
 
 
316
도념의 소리 인수 아버지, 잠깐만 와 보세요. 아주 댓자예요.
 
 
317
주 지  저 소리가 아니야? (비탈을 향하여) 도념아, 도념아, 너 거기서 뭘 하구 있니?
 
 
318
도념의 떨리는 소리 아무 것도 안 합니다.
 
 
319
주 지  아무것두 안 하는데 거긴 왜 웅크리구 앉었니? (돌연 경악하여 일보 뒤로 물러서며) 너 또 토끼를 잡았구나? 이리 올라오너라. 냉큼 못 올라오겠니?
 
 
320
도념의 소리 스님, 토끼를 놔줄 테니 용서해 주십시오.
 
 
321
주 지  그대루 가지고 빨리 올라오너라.
 
 
322
도념, 토끼를 들고 올라온다.
 
 
323
주 지  누가 잡으라구 하든?
 
324
도 념  …….
 
325
주 지  누가 잡으라구 하든? 어서 대답 못하겠니?
 
326
도 념  스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327
주 지  꽃두 두구 보라구 했거늘, 하물며 네 발 달린 산 짐승을 잡아? 너 오계를 외 봐라.
 
328
도 념  불살생(不殺生) 불육식(不肉食) 불간음(不姦淫) 불유도(不偸盜) 불음주(不飮酒).
 
329
주 지  (말이 끝나기 전에 추상같이) 계율 중에두 살생이 그 중 큰 죄라는 것은 경문을 들려 줄 적마다 타일렀지?
 
330
도 념  네.
 
331
주 지  모르고 했다면 모르되, 알면서 왜 했니? 응? 알면서 왜 했어? (원내를 향하여) 정심아, 정심아.
 
332
도 념  스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333
정심, 원내에서 급히 나온다.
 
 
334
정 심  부르셨습니까?
 
335
주 지  빨리 이 녀석을 갖다 산신당(山神堂)에 가둬 둬라. 한 사흘 갇혀서 굶구 나면 덫에 걸친 토끼가 얼마나 불쌍하다는 것을 알 테니.
 
336
도 념  스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337
주 지  안돼. (정심에게) 그리구 참나무 회초리를 둘만 해오너라.
 
338
정 심  다시는 안 그러겠다구 비는데 이번만 용서해 주시지요.
 
339
주 지  아-니 너는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지, 무슨 대꾸니? 냉큼 끌구 가지 못하겠니?
 
 
340
정심, 도념에게 동행을 최촉(催促)한다.
 
 
341
초 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돌연 도념의 손에서 토끼를 빼앗으며) 스님, 사실은 덫은 제가 쳤지 도념이가 친 게 아닙니다.
 
342
주 지  자네가 쳐 논 데서 저 녀석이 토끼를 잡아 들구 나올 리가 없어.
 
343
초 부  제가 나무하는 동안, 덫을 잠깐 봐달라구 했었습지요.
 
 
344
인수, 원내에서 소리를 하며 나오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345
인 수  (부의 말을 막으며) 아니에요, 스님.
 
346
초 부  (아들을 쥐어 박으며) 닥디려 이 자식아. (주지에게) 덫은 정말이지 제가 쳤지, 도념이가 친 게 아닙니다.
 
347
주 지  정말 자네가 쳤나?
 
348
초 부  네.
 
349
주 지  도념아 그렀니?
 
350
도 념  (정심의 뒤에가 가려 선 채 무언)
 
351
주 지  누가 쳤어? 바른대루 선뜩 대답해라.
 
352
초 부  제가 쳤어읍쇼.
 
353
주 지  도념아, 그렀니?
 
354
도 념  (자기도 의식치 않고) 네.
 
355
주 지  (초부를 보고) 아-니, 나무나 해다 때지, 자네더러 누가 토끼 잡아달라던가?
 
356
초 부  뵈올 낯 없습니다.
 
357
주 지  (인수의 허리에서 새 꾸러미를 발견하고 또 한번 대경한다) 에구 이 녀석, 넌 또 웬 새 새끼를 이렇게 많이 잡았니? 응? 당장 내려가거라. 자네두 내려가구. 그리구 다시는 이 절에 발 들여놓지 말게. 자네 부자 때문에 우리 도념이까지 죄짓겠네.
 
 
358
인수, 성이 나가지고 대꾸하려고 비쭉비쭉하는 것을 부가 눈을 부릅뜨며 말린다.
 
 
359
초 부  긁은 거나 마저 뫄 가지고 내려 가겠습니다.
 
360
주 지  가더래두 그 토끼는 내 눈 앞에서 놔주구 가게.
 
361
초 부  네.
 
 
362
초부 토끼를 놓아 준다.
363
토끼 펄펄 나르듯이 질주한다.
364
초부 지게를 지고 안 가려는 아들을 떠다밀며 나간다.
 
 
365
주 지  저렇게 펄펄 나르는 걸 백죄 잡으려구 한담? (도념에게) 외(外)에 사람들을 함부루 들이지 말라구 했는데 왜 들였니? (정심에게) 넌 들어가 보던 일 봐라.
 
 
366
정심 “네” 하고 원내로 다시 들어간다.
 
 
367
도 념  못 들어가게 했는데, 비탈길루 돌아서 들어갔어요.
 
368
주 지  (도념을 나무등걸 위에 앉힌 후) 난 그런 줄 모르구 공연히 너만 가지구 나무랬구나. 내가 잘못했다. 참 그리구 서울 안대갓집 아씨께서, 널 데려다가 한 반 년 동안 수양아들 삼구 싶다구 하시더라. 내가 다른 사람 같으면 절대루 승낙하지 않을 거지만, 그 아씨 말씀이라 생각해서 이삼일 내루 기별해 드린다구 했다.
 
369
도 념  스님 감사합니다.
 
370
주 지  서울 가서두 내가 이른 말 하나라두 거스른다면, 당장 도루 불러올테야.
 
371
도 념  네.
 
372
주 지  그리구 갈 때는 내가 경전을 줄 테니, 가지구 가서 열심히 읽구, 올라올 땐 내 앞에서 다 외야 한다.
 
373
도 념  네, 갈 땐 저 혼자 가게 됩니까?
 
374
주 지  아씨는 오늘 내려가시구, 너는 내가 대갓댁에 가서, 너한테 관한 여러 가지 말씀두 여쭐 겸 사날 후에 데리구 갈 테다. 그런 줄 알구, 그동안 세수두 말갛게 하구, 손톱 발톱두 깨끗이 깎구 가서 웃음거리 안 되도록 해라.
 
375
도 념  네.
 
376
주 지  사람이란 첫째 예의범절을 단정히 해야 하는 법이니라.
 
 
377
인수, 암상이 잔뜩 나가지고 나갔던 길에서 다시 뛰어 올라온다.
378
초부, 낙엽덤을 안은 채 “인수야 인수야”하고 규성을 치며 쫓아 올라온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379
주 지  너 이 녀석, 다시 오지 말라니까 왜 또 올라왔니?
 
380
인 수  왜 남더러 이녀석 저녀석 하세요? 진짜 큰 것은 누가 잡았는데요?
 
381
주 지  뭐 어째?
 
382
인 수  우리 아버지가 너무 순하니까, 만만해서 그러시는군요?
 
383
도 념  너, 버릇없이 어디다 대들구 이러니?
 
384
인 수  이눔아, 넌 국으루 있어. 스님, 덫은 누가 쳤는데요? 법당에 가셔서 관세음보살 뒤를 뒤져 보세요. 뭐가 나오나? 그것 보시면 누가 토끼를 잡았나 아실 걸요? (도념을 훑어보며) 나쁜 자식 같으니. 죄다, 우리 아버지한테 죄를 씌우구 있지.
 
385
주 지  (도념에게) 너 여기 꼼짝말구 섰거라.
 
 
386
급히 원내로 들어간다.
 
 
387
초 부  (지게 작대기로 인수의 등을 내려갈기며) 선뜩 내려가지 못하겠니?
 
388
인 수  아버진 가만히 계셔요. (도념을 놀리며) 꼴 좋-다.
 
389
도 념  너 까불면 나한테 죽는다.
 
390
인 수  흥, 염소뿔 시이다. 오-라, 그 토끼 껍질 벳기던 칼루 날 죽일려구? 애비 없는 후레자식은 사람두 막 죽이나? 날 죽이면 넌 지옥에 가서 아흔아홉 번 죽어.
 
 
391
도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달겨들어 난타한다. 양인, 멱살을 붙들고 뒹굴며 싸운다.
392
안대갓집 딸 산문에서 나오다 달려가 뜯어 말린다. 초부도 말린다.
 
 
393
미망인  놔라, 놔, 도념아, 이 손 놔, 어서.
 
 
394
도념, 인수의 멱살 잡았던 손을 놓고 제 분에 못 이겨 울어버린다.
 
 
395
인 수  중, 중, 까까중, 덤불 밑에 할타중, 물 건너 팽가중. (놀리며 내려간다)
 
396
미망인  (옷의 흙을 털어 주며) 고만 울어라. 눈물 닦구. 쌈은 왜 하니?
 
397
도 념  ……. (운다)
 
398
미망인  내일 모레 우리집에 가면, 저런 녀석 꼴 안 볼 텐데 뭘 그러니? 어서 울지 마라. 뚝 그치구.
 
399
도 념  댁에 가두……모두들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구 놀려 먹으면 어떡해요?
 
400
미망인  어따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해? 내가 가만두나? 아까처럼 한번 웃어봐, 응 어서.
 
401
도 념  (금시에 풀리며 벙끗 웃는다)
 
402
미망인  (꼭 껴 안으며) 아이구, 이뻐라.
 
403
도 념  우리 어머닌, 살아 계신지 돌아 가셨는지두 모르는데, 나만 댁에 가서 호강할 걸 생각하니까 자꾸 미안한 생각이 나요.
 
404
미망인  (서글퍼지며) 아무래도 나보담은 어머니가 좋지?
 
405
도 념  네.
 
406
미망인  어머니두 나처럼 생기셨다니까, 지금 나처럼 부잣집에서 사실 거야.
 
407
도 념  아니에요 고생하실 거예요.
 
408
미망인  어떻게 알어?
 
409
도 념  지난 정월 보름날 잣불을 켜 봤드랬어요. 스님께서, 도념 어머니가 잘 사나 못 사나 보자구 하셔서 모두들 돌아앉어 켰드랬는데, 어머니 불이 그냥 피시시 죽겠지요.
 
 
410
이때 원내에서 스님의 “도념아 도념아” 부르는 노성.
 
 
411
미망인  얘, 어서 대답해라.
 
412
도 념  싫어요.
 
413
미망인  또 뭘 잘못한 게구나?
 
 
414
주지의 소리 도념아, 도념아.
 
 
415
미망인  어서 대답하구 빨리 가봐라. 역정이 잔뜩 나신 모양이다.
 
416
도 념  안 가겠어요. 가두실려거든 가두시라지요 겁나지 않어요.
 
417
미망인  이게 무슨 소리니?
 
 
418
돌연 원내가 소요해지며 참예인들의 비명, 규환, 쾅쾅거리고 마루를 뛰어내리는 발소리 등등.
 
 
419
미망인  별안간 이게 웬일들이야?
 
 
420
구경꾼 여자들 지껄이며 나온다.
 
 
421
미망인  왜들 어느새 나오시우?
 
422
과 부  재 헛 지냈소.
 
423
새 댁  에구, 끔찍끔찍 해라.
 
424
미망인  아아니 왜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425
과 부  토끼 죽은 걸 존상 뒤에 놓구 재를 올렸으니, 헛 지낸 거지 뭐예요?
 
426
미망인  토끼 죽은 거라니요?
 
427
새 댁  하나두 아니구, 자그만치 여섯 마리씩을.
 
 
428
미망인, 급히 원내로 들어가려고 한다.
429
이때 남바구를 쓴 미망인의 친정모 공포에 부들부들 떨며 원내에서 나온다.
 
 
430
친정모  (딸을 붙들며) 들어가지 마라. 부처님 역정나셨다. 이 일을 어떡허면 좋단 말이냐? 입때 축원한 게 아니라 부처님 욕하구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431
미망인  아-니 누가 그런 짓을 했어요?
 
432
친정모  나두 모르겠다. 저기, 스님이 들고 나오시는구먼.
 
 
433
주지, 토끼 목도리 한 뭉탱이를 손끝에 들고 노기 심두에 달하여 나온다. 뒤따라 정심과 승들, 참예인들, 구경꾼 남자들.
 
 
434
주 지  도념아, 너 이게 웬 거니? 살생을 하구 거짓말을 하구, 네가 점점 가시덤불 속으루 들어가구 있구나?
 
435
미망인  얘가 토끼를 이렇게 잡았을 리가 없습니다. 누가 주었나 보지요.
 
436
젊은승  팔아두 두 냥씩은 받을 텐데, 하나두 아니구 여섯씩 그걸 누가 줍니까?
 
437
친정모  누가 주었더래두 어따 둘 데가 없어, 성스러운 보살님 존상 뒤에다 감춰 둔단 말이냐?
 
438
주 지  나는 설마하니, 내 눈을 속이구 네가 이런 악착한 짓을 하는 줄이야 꿈에두 몰랐었다. 믿는 나무에 곰이 핀다더니 똑 맞았어. 에구 끔찍끔찍해라. 내야 속았지만 억만중생의 민심을, 환하게 들여다 보구 계시는, 부처님두 속으실 줄 알았느냐? (돌연 몸을 떨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439
참예인들 승들 각기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따라 외운다.
 
 
440
친정모  에구 무서라. 어쩌면 애가 눈두 깜짝 안 하구 섰네. 적으나면 “잘못했습니다”하고 빌 게 아니냐?
 
441
주 지  (조용히 그러나 엄숙히 문답조로) 내가 언젠가 이 산의 옛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지.
 
442
도 념  (한 마디 한 마디 똑똑히) 네.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를 쳐들어와 을지문덕이란 장군이 나아가 막던 때였습니다.
 
443
주 지  그때 이 산에 성을 쌓구 적군을 막던 병사들이 몇 살들이라구 했지?
 
444
도 념  열네 살 열다섯 살들이라구 하셨습니다.
 
445
주 지  그 소리가 부끄러 어떻게 아가리루 나오니? 네 나이 지금 몇 살이냐?
 
446
도 념  열네 살입니다.
 
447
주 지  어따 열넷을 처먹었니? 살살 거짓말이나 하구, 쨀금거리구 다니며 요런 못된 짓만 하니. 그때 화살을 맞구 쓰러져 가면서 종을 치던 병사두 이 절 사미승이었구 이름도 도념이었느니라. 하룻밤 갇히구 종아리를 맞을 것이 무서워 죄를 나무꾼에게 씌우고, 너는 빠지려고 했단 말이냐?
 
448
도 념  그게 무서워 그런 건 아닙니다.
 
449
주 지  그럼 왜 그랬니?
 
450
도 념  오늘 갇히면 아씨 따라가지 못하게 되겠기에, 눈 꾹 감구 거짓말을 했습니다.
 
 
451
일동,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452
미망인 감정의 격동을 진정하려고 애를 쓴다.
 
 
453
주 지  (약간 측은하지만) 당장 죽더래두 비겁한 짓은 말라구 했거늘 오늘 못 갈까봐 거짓말을 했어?
 
454
도 념  스님, 제 잘못은 제가 잘 압니다.
 
455
주 지  이 토끼를 잡은 잘못두 안단 말이냐?
 
456
도 념  네.
 
457
주 지  알면서 왜 했니?
 
458
도 념  아씨 목도리 두르신 게 어떻게 이쁜지, 나두 어머니가 데리러 오신다면 드리려구 맨들었습니다.
 
 
459
미망인 격하여 돌아서서 운다.
 
 
460
주 지  (연민한 마음이 들어) 그 에미 소리 좀 작작해라. 그 죗덩어리를 생각하구 네가 또 죄를 짓는단 말이냐? (한숨을 쉬며) 이게 다 인과 때문이다.
 
461
젊은승  하필 영혼 축원하는 불전에 살생한 제물을 바쳤으니, 부처님께서 얼마나 노하셨을까!
 
462
친정모  아주 백정(白丁) 행세를 하는구먼? (지팡이로 땅을 치며) 엥, 우리 인철이가 극락문을 들어가다 말구, 가시문으로 내쫓겼겠다. (주지를 보고) 무얼 정신없이 생각쿠 있소?
 
463
주 지  마님, 뵈올 낯 없습니다. (정심에게) 빨리 가서 법당을 말갛게 소세(掃洗)해라. 마당 쓸구, 물 뿌리구.
 
 
464
정심과 승들, 원내로 들어간다.
 
 
465
노 인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건 정녕 반대였군?
 
466
총 각  그러게 말입니다. 허우정정 산 넘어왔다 허탕방만 쳤군요. 내려가시지요.
 
 
467
참예인들, 서로 지껄이며 불평에 찬 소리를 던지고 하나씩 둘씩 내려간다.
 
 
468
미망인  (달려가 막으며) 왜들 가세요? 들어들 가세요.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왜들 이러세요?
 
469
주 지  (참예인들을 보고) 어서들 도로 들어가시지요.
 
 
470
미망인의 친척들, 참예인들, 도로 원내로 들어간다.
471
무대에는 주지와 미망인과 도념 삼인만 남는다.
 
 
472
주 지  이 애를 세상에 내려 보냈다가는, 정말 야차(夜叉)를 맨들겠습니다. 아주 단념하십쇼.
 
 
473
정심, 창황히 다시 나온다.
 
 
474
정 심  아씨께서 먼점 들어오셔야만 좌석이 진정되겠습니다.
 
475
주 지  어서 들어가 보십쇼.
 
 
476
정심을 따라 미망인, 원내로 들어간다.
 
 
477
도 념  (홀연히) 스님, 전 세상에 가서 살구 싶어요.
 
478
주 지  닥디려. 무얼 잘했다구 또 그런 소리를 하구 있니?
 
479
도 념  절더러 거짓말 한다구만 마시구, 저한테 어머니 계신 데를 가르쳐 주십쇼.
 
480
주 지  네 어미란 대죄를 지은 자야. 너에겐 에미라기보다 대천지 원수라는 게 마땅하겠다. 파계를 한 네 에미 죄의 피가 그 피를 받은 네 심줄에 가뜩 차 있으니까, 너는 남이 한 번 헤일 염주면 두 번 헤어야 한다.
 
481
도 념  왜 밤낮 어머니 욕만 하십니까? 아름다운 관세음보살님은 그 얼굴처럼 마음두 인자하시다구 하시지 않으셨어요? 절에 오는 사람마다 모두들 우리 엄마는 이뻤을 것이 라구 허는 걸 보면 스님 말씀 같은 그런 무서운 죄를 지으셨을 리가 없어요.
 
482
주 지  그건 부처님에게만 여쭙는 소리야. 너 유식론(唯識論)에 쓰인 경문을 알지?
 
483
도 념  네.
 
484
주 지  외면사보살 내면여야차(外面似菩薩, 內面如夜叉)라 하셨느니라. 네 에미는 바루 이 경문과 같이, 얼굴은 보살님같이 아름답지만, 마음은 야차같이 무서운 독물이야.
 
485
도 념  스님, 그렇게 악마 같을 리가 없습니다.
 
486
주 지  네 아비의 죄가 네 어미에게두 옮아서 그러니라.
 
487
도 념  옮다니요?
 
488
주 지  네 아비는 사냥꾼이거든, 하루에두 산 짐승을 수십 마리씩 잡어, 부처님의 가슴을 서늘하시게 한 대악무도한 자야. 빨리 법당으루 들어가자. 냉수에 목욕하구, 내가 부처님께 네가 저지른 죄를 모다 깨끗이 씻어 주시두록 기도해 주마.
 
489
도 념  싫어요, 싫어요. 하루종일 향불 냄새를 쐬면 골치가 어찔어찔해요.
 
490
주 지  이게 무슨 죄 받을 소리니? (조용히 달래며) 도념아, 너, 저 연못을 봐라. 오월이 되면 꽃이 피고, 잎사귀엔 구슬 같은 이슬이 구르구 있지 않니? 저렇게 잔잔한 연못두 한 겹 물만 퍼내구 보면 시꺼먼 개흙투성이야. 그것뿐인 줄 아니? 십년 묵은 이무기가 용이 돼서 하늘루 올라갈랴구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비 오기만 기다리구 있단다. 동네두 꼭 저 연못과 마찬가지야. 겉으루 보면 모두 즐겁구 평화한 듯하지만 속에는 모든 죄악과 진애(塵埃)가 들끓는 그야말루 경문에 아로새겨 있는 글자 그대루 오탁(五濁)의 사바(娑婆)니라.
 
491
도 념  아니에요. 모두들 그렇지 않대요. 연못 속에는 연근이라는 뿌럭지가 있지 이무기는 없대요.
 
492
주 지  누가 그러던? 누가 그래?
 
493
도 념  동네 사람들 올라올 적마다 물어봤어요.
 
494
주 지  그럼, 동네 녀석들 하는 소리는 정말이구 내 말은 거짓말이란 말이지? 경전이, 부처님 말씀이 모두 거짓말이란 말이지? 오! 이런 불가사리 같은 녀석 봤나? (하고 펄펄 뛴다.)
 
495
도 념  스님, 바른 대루 말이지, 저는 이 절에 있기가 싫습니다.
 
496
주 지  듣자 듣자 하니까 나중엔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오 그 눈으로 날 보지 마라. 살생을 하더니, 전신에 살이 뻗친 모양이다.
 
 
497
미망인, 원내에서 나온다. 뒤따라 그의 모.
 
 
498
도 념  (미망인에게 매달리며) 어머니, 저를 데려가 주세요.
 
499
미망인  응, 염려 마라.
 
500
주 지  염려 마라니요? 아씨는 그저 애를 데려가실 작정이십니까?
 
501
미망인  그럼은요.
 
502
친정모  못한다. 넌 얘 하는 짓을 지금껏 두 눈으로 똑똑히 보구두 이러니?
 
503
미망인  어머니, 봤기에 더 한층 데려가구 싶은 생각이 솟았어요. 얼마나 어머니를 그리워했으면 그런 짓을 다 했겠어요? 지금 이 애를 바른 길루 이끌어 가려면, 내 사랑 속에서 키우는 것밖에 딴 도리가 없어요.
 
504
친정모  얘는 전생에 제 부모의 죄를 받구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구하려구 해두 구할 수가 없단다. 홍역 마마하듯 이렇게 피하지 못할 죄가 하나씩 둘씩 발생하지 않니? 얘보담, 우리 인철이 영혼 축원할 도리나 걱정해라.
 
505
미망인  인철인 기왕 죽은 애니까 재를 다시 지내면 그만 아니에요?
 
506
친정모  얘가 토끼 목도리를 존상 뒤에다 감춰만 뒀다면 모를까, 젊은 별좌(別坐) 얘길 들으니까 어젯밤에 떡 그 더러운 것을 관세음보살님 목에다 걸어 놓구 물끄러미 바라다 보구 있었다는구나.
 
507
미망인  (울며 미칠 듯이) 어머니, 난 얘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애당초에 생각이나 안 먹었더면 모를까, 한번 먹어 논 것이라 잃구는 살 수가 없어요.
 
508
주 지  아씨께서 진정으로 얘를 사랑하신다면, 눈 앞에 두구 노리개를 삼으실랴구 하시지 말구 얘 매디매디에 사무쳐 있는 전생의 죄 속에서 영혼을 구하게 이 절에 둬 주십시오. 자기 한 몸의 죄만 아니라 제 아비 제 어미 죄도 씻어야 할 테니까 얘는 여간한 공덕을 쌓기 전에는 저승에 가서 무서운 지옥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509
도 념  스님, 죽어서 지옥에 가더래두 난 내려 가겠어요. 찾아오는 사람을 막지 않구 떠나는 사람을 붙들지 않는 것이 우리 절 주의라구 늘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510
주 지  (열화같이 노하며) 수다스러. 한번 못 간다면 못 가는 줄 알어라. (미망인을 보고 선언하듯)아씨께서 서방님을 잃으시고 외아들마저 잃으신 것두 다 전생에 죄가 많으셨던 탓 입니다. 아씨 죄두 미처 벗지 못하시구 이 죄덩이를 데려다가 어떻게 하실려구 이러십니까? 두번 다시 이 이야기를 끌어내시려거든 다신 이 절에 오시지 마십시오.
 
 
511
주지, 뒤도 안 돌아보고 원내로 들어간다. 친정모도 뒤따른다.
512
미망인, 주지의 말에 찔리어 전신을 부르르 떤다. 염하다 놓친 사람 모양으로 털벅 나무 등걸에 주저앉아 운다.
 
 
513
도 념  어머니, 이대루 그냥 도망이라두 가시지요.
 
514
미망인  그렇게는 못한다. 넌 이 절에 남어서 스님의 말씀 잘 듣구 있어야 한다.
 
515
도 념  촛불만 깜박깜박하는 법당을 또 어떻게 혼자 지켜요? 궂은 비가 줄줄 내리는 밤이나 부엉이가 우는 새벽엔 무서워 죽겠어요.
 
516
미망인  너한테는 그게 숙명이니까 내 힘으루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구나.
 
 
517
미망인, 도념을 누구에게 빼앗길 듯이 세차게 안고 운다.
518
정심, 산문에서 나온다.
 
 
519
정 심  도념아, 빨리 종쳐라.
 
520
도 념  (눈물을 닦고) 네.
 
 
521
정심, 산문 앞의 등잔에 불을 켜고 다시 원내로 들어간다.
 
 
522
미망인  내가 원체 죄가 많은 년이니까 너를 데리고 갔다가 너한테까지 또 무슨 화를 끼칠지, 난 그게 무서워졌다. 어서 들어가자 그 대신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보름날 달 밝은 밤엔 꼭 널 보러 오마.
 
 
523
미망인, 우는 도념을 달래 가지고 원내로 들어간다.
524
주위는 차츰차츰 어두워진다.
525
이윽고 범종소리 들려온다. 멀리 산울림.
526
초부, 나무를 안고 나와 지게에 얹고, 담배를 한 대 피운다. 흩날리는 초설을 머리에 받은 채 슬픈 듯한 표정으로 종소리를 듣는다.
 
527
사이.
 
528
이윽고 종소리 그친다.
529
도념, 고깔을 쓰고 바랑을 걸머지고, 깽매기를 들고 나온다.
 
 
530
초 부  (지게를 지고 일어서며) 지금 그 종 네가 쳤니?
 
531
도 념  그럼은요. 언제 내가 안 치구 다른 이가 쳤나요?
 
532
초 부  밤낮 나무해 가지구 비탈 내려가면서 듣는 소리지만 오늘은 왜 그런지 유난히 슬프구나. (일어서다가 도념의 옷차림을 발견하고) 아니, 너 갑자기 바랑은 왜 걸머지구 나오니?
 
533
도 념  이번 가면 다시 안 올지 몰라요.
 
534
초 부  왜? 스님이 동냥 나가라구 하시든?
 
535
도 념  아아니요. 몰래 나가려구 해요.
 
536
초 부  이렇게 눈이 오는데 잘 데두 없을 텐데, 어딜 간다구 이러니? 응, 갈 곳이나 있니?
 
537
도 념  조선 팔도 다 돌아다닐 걸요 뭐.
 
538
초 부  하 얘, 그런 생각말구, 어서 가서 스님 말씀 잘 듣구 있거라.
 
539
도 념  벌써 언제부터 나가려구 별렀는데요? 그렇지만 스님을 속이고 몰래 도망가기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어서 못 갔어요.
 
540
초 부  어머니 아버질 찾기나 했으면 좋겠지만 찾지두 못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없구, 거지밖에 될 게 없을 텐데 잘 생각해서 해라.
 
541
도 념  꼭 찾을 거예요. 내가 동냥 달라구 하니까 방문 열구 웬 부인이 쌀을 퍼주며 나를한참 바라보구 있더니 별안간 “도념아, 내 아들아, 이게 웬일이냐” 하구 맨발바닥으로 뛰어내려 오던 꿈을 여러 번 꾸었어요.
 
542
초 부  가려거든 빨리 가자. 퍽퍽 쏟아지기 전에. 이 길루 갈 테니?
 
543
도 념  비탈길루 가겠어요.
 
544
초 부  그럼 잘-가라. 난 이 길루 가겠다.
 
545
도 념  네, 안녕히 가세요.
 
 
546
초부, 나무를 지고 내려간다.
547
도념, 두어 걸음 나갈 때 법당에서의 주지의 독경 소리. 발을 멈추고, 생각난 듯이 바랑에서 표주박을 꺼내 잣을 한 웅큼 담아서 산문 앞에 놓는다.
 
 
548
도 념  (무릎을 꿇고) 스님, 이 잣은 다람쥐가 겨울에 먹으려구 등걸 구멍에다 뫄둔 것을 제가 아침이면 몰래 꺼내 뒀었어요. 어머니 오시면 드리려구요. 동지 섣달 긴긴 밤 잠이 안 오시어 심심하실 때 깨무십시오. (산문에 절을한 후) 스님, 안녕히 계십시오.
 
 
549
멀리 동리를 내려다보고 길-게 한숨을 쉰다.
550
정숙.
551
원내에서는 목탁과 주지의 염불소리만 청청히 들릴 뿐.
552
눈은 점점 퍽퍽 내리기 시작한다.
553
도념, 산문을 돌아다보며 돌아다보며 비탈길을 내려간다.
 
554
―막
 
 
555
1939년 3월 극단 극연좌에서 공연
【원문】동승(童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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