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줄행랑의 우리 집―집이라는 것보다 단간방, 관객석으로부터 보면 장방형의 칸 반(半) 방이 비교적 환하게 들여다보인다. (그러므로 전면의 벽은 없이 한다) 방의 내부는 신문지로 도배를 한 것이 거무튀튀하게 낡았고 그 위에 빈대피로 댓잎(竹葉)을 그려놓았다. 아랫목 바른편 구석에는 값 헐한 옷궤짝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누더기 이불이 두어 채나 올려놓였다. 벽과 방구석에는 어린애기의 기저귀와 누더기옷이 늘어놓였고 책도 몇권이 있다. 바른편에는 비에 어룽진 봉창, 왼편에는 위아래로 문이 두 개. 천정에는 십촉전등이 짤막하게 달리어 있다. 좌수는 넓은 마당의 일부. 우수는 길. 오후 다섯시쯤 막이 열리며 내가 아랫목에 웅숭크리고 앉아서 우두커니 무엇을 생각한다. 그 옆에 애기가 기저귀에 싸여서 잠을 잔다. 잠시 침잠.
13
동무 (좌수로 등장. 방을 향하여)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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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일어서며) 거 누구? (문을 열고) 응 들어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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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들어오며) 혼자 있나? 엇 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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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칩지? (아랫목을 가리키며) 뜨뜻하지도 않지만 좀 저리 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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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어린애기 옆에 가 손을 기저귀 밑에 밀어넣고 앉아 굽어다보며) 자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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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데서 오나? (동무 옆으로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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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얼굴이 갑자기 긴장이 되며) 참 야단났어…… 지금 본부에서 오는데.
26
나 본부에서는 어떻게 하는 거야! 자기네만 믿고 기다리라든 게!
29
동무 오늘밤에 대책토의를 한다고 했으니까 이따가 늦더래도 무슨 소식이 있겠지.
30
나 그렇게 되면 대책 여부가 있나! 인제는 우리한테는 한가지 수단밖에는 없지.
31
동무 그렇지. 일이 이렇게 되면 그렇게 하기로 애초부터 작정하다시피 된 것이니까.
33
나 (굽어다보고 입맛을 다시며) 이게 또 울면 어떻게 하나.
36
나 (애기를 안으며) 젖유모로 들어갔다네. (애기를 안아 다독거리며 달랜다)
37
동무 젖유모라니? 이 애는 어떻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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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우는 애기를 다독거리며) 어떻게 하다니 이 지경이지 뭘. (방백) 미음 만들어놓은 것도 다 없어졌으니!
40
나 (자꾸만 우는 애기를 달래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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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저 야주개 사는 전라도 사람이라나…… 자식을 낳는데 뭐 젖꼭지가 아프다고 젖을 못 먹인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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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좌수 문 밖에서) 배가 고파서 그렇게 우나 부지.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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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이리 주구려. 내가 안고 가서 우리 집 밥물이라도 멕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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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애기를 받으며) 오 우지 마라 아이구 가엾어라. 배가 고파서 울었는가! 가서 맘마 주께…… 아이구 가엾어라, 젖은 뺏기고 배가 고파서. (물러간다.애기 울음소리는 점점 멀어가다가 마침내 들리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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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그렇다고 젊으나젊은 터에 그대로 지내갈 수야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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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마땅한 자리라는 게 없기도 하지만 있다더래도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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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기야 우리 팔자에 앞일을 생각할 나위가 있나! 그날 하로 굶은 걱정이 더 크지.
71
나 그리고 기껏해서 간대야 돈 있는 놈의 첩으로밖에 더는 못가겠으니. (입맛을 다신다)
72
동무 돈이나 멫만원 가졌다면 뭇놈이 대가리를 싸고 덤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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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코를 벌씸거리며) 어데서 밥내가 구수하게 난다.
77
나 글쎄…… 나두……(생각하다가) 멫끼나 못 먹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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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있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가 대접에 두부를 대여섯 모 담아 들고 또 한편 손에는 간장종지와 나무 저깔을 들고 들어온다) 차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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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차면 뭘 하나. 뱃속에 들어가면 더워지겠지.
89
나 그것도 기름장이나 해서 먹으면 먹을 만하지만.
91
나 그래도 밥만이야 하겠나? 뜨뜻한 국물에 얼큰한 찌개나 지져놓고 고슬고슬 한 쌀밥에 좋은 김치나 해서 먹어보게.
92
동무 우리 같은 놈들은 이대로 있다가는 고손자놈의 대가리가 희여도 그런 맛은 못보네.
93
나 (두부를 다 먹은 것을 보고) 좀 더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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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괜찮아. (대접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96
동무 (간장종지를 집어주며) 간장도 더 가지고 오고, 그리고 뭣 무쪽이라도 두져 가지고 오게.
97
나 (나갔다가 대접에 두부를 네 모쯤 담고 김치 부스러기와 간장종지를 들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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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먹으며) 우리는 이렇게라도 먹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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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래…… 배고픈 걸 참다 못해서 ‘우라기리’ 를 한들 그 사람들을 무어라고 나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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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벽에 기대어 세운 지게를 마당에 내세우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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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부엌에서 두부 목판을 들고 나오며) 두부는 다 어쨌니?
108
동무 (두부를 먹다가 그치고 무렴해서 나를 치어다본다)
109
아버지 (성이 나서 문을 버럭 열어젖히며) 글쎄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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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 늙은 애비가 그거라도 팔어서 하로 한끼나마 굶어죽잖고 살어가는 것을 너는 이놈아 군것으로 먹어 없애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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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글쎄 이 자식아 너도 나히 이십이 넘었으니 그만 철은 나야지…… 그 원수놈의 동맹인지 막걸린지를 한다고 이 늙은 애비가 발가락이 얼어빠지게 고샅 달음질을 하면서 두부장수를 하는 것을 얻어먹으면서 눈을 끄먹끄먹하고 밤이나 낮에나 이러고만 있으니 어쩌잔 말이냐! (문을 홱 닫고 쿵쿵 걸어가서 두부 지게를 지고 후면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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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무렴해서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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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위로하듯) 그나마 얻어먹은 게 체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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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자네 아버지도 무리한 말은 아닐세.
125
두 사람이 벌떡 일어서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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