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예세닌에 관하여 ◈
카탈로그   본문  
1946. 2. 17.
오장환
목   차
[숨기기]
1
예세닌에 관하여
 
 
 

1

 
 
3
그렇다. 두 번 다시 누가 돌아가느냐
4
아름다운 고향의 산과 들이여! 이제 그러면……
5
신작로가의 포플러도,
6
내 머리 위에서 잎새를 흔들지는 아니하리라.
7
추녀 얕은 옛집은 어느 결에 기울어지고
8
내 사랑하던 개마저 벌써 옛날에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9
모스크바 이리 굽고 저리 굽은 길바닥에서
10
내가 죽는 것이
11
아무래도 전생의 인연인 게다.
 
12
…………………
13
…………………………
 
14
너무나 크게 날으려던 이 날개
15
이것이 타고난 나의 크나큰 슬픔인 게다.
16
그렇지만, 뭘 ……
17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다
18
나는 동무야! 나야말로 결단코 죽지는 않을 테니까―
 
 
19
나는 이 노래를 얼마나 사랑하여 불렀는가. 그것도 술 취한 나머지에 …… 물론 이것은 8월 15일 훨씬 이전의 일이다. 그때 일본은 초전에 승승장구하여 여송도(呂宋島)를 거침없이 점령하고 저 멀리 싱가포르까지 병마를 휘몰 때였다.
 
20
나는 그때 동경에 있었다. 그리고 불운의 극에서 헤매일 때였다. 하루 1원 8O, 90전의 사자업(寫字業)을 하여가며 살다가 혹간 내 나라 친구를 만나 값싼 술이라도 나누게 되면 나는 즐겨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21
그때의 나의 절망은 지나쳐 모든 것은 그냥 피곤하기만 하였다. 나는 예세닌의 시를 사랑한 것이 하나의 정신의 도약을 위함이 아니었고 다만 나의 병든 마음을 합리화시키려 함이었다.
 
22
시라는 그저 이름다운 것, 시라는 그저 슬픈 것, 시라는 그저 꿈속에 있는 것, 그때의 나는 이렇게 알았다. 시를 따로 떼어 고정한 세계에 두려 한 것은 나의 생활이 없기 때문이었다. 거의 인간 최하층의 생활소비를 하면서도 내가 생활이 없었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책임이란 것을 느낀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23
그때의 나는 이런 식으로 예세닌을 이해하였다. 이것은 물론 정말 예세닌과는 거리가 먼 나의 예세닌이었다.
 
 
24
말(언어)이란 오래 쓴 지전 모양 구겨지고 앓고 해어져서, 처음 그 말을 만들었을 때의 시적 위력을 잃는다. 우리들은 새로운 말을 만들 수는 없다. 말의 창조라든가, 총명한 언어는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숨어버린 말들을, 맑은 시 속에 함께 넣어 이러한 것을 살리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25
이것은 예세닌의 말이다. 예세닌이 한참 큰 발견을 한 것처럼 만약에 자기를 따라오지 않으면 이도 저도 못할 큰 난관에 봉착하리라고 그의 벗 기리로프에게 충고하던 말이다.
 
26
나는 이 말을 끄집어내어 여러 사람 앞에 혓바닥을 내밀려고 하는 것이냐, 아니다 함께 서글퍼하고자 함이다. 그도 소시민이었다. 모든 것을 안일 속에 처결하려고 하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간편하여 보이는 이 고정 개념을 휘두른 것이다.
 
27
정지한 속에 있는 것이 어느 하나이고 썩어버리거나 허물어지지 않는 것이 있느냐 아니 엄정한 의미에 있어서는 정지란 말조차 있을 수 없다. 안일을 바라는 그들이 스스로의 묘혈을 피는 것, 그것도 살아가는 동안은 하나의 노력이었다는 것은 이 얼마나 방황하는 소시민들을 위하여 슬픈 일이냐.
 
 
28
달이라도 뜨는,
29
에이 쌍, 달이라도 뜨는 어쩔 수 없는 밤이면
30
고개도 들지 않고 뒷골목을 빠져나가
31
낯익은 술집으로 달리어간다.
 
32
……………………
33
…………………………
 
34
그렇지만, 뭘 ……
35
그까짓 건 맘대루 해라
36
나는 동무야! 나야말로 결단코 죽지는 않을 테니까-
 
 
37
이처럼 노래하던 예세닌은 그의 나이 서른에 겨우 귀를 닫은 채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38
아 몸부림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세상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잇기 위하여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참으로 피 흐르는 싸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40
드디어 8월 15일은 왔다.
 
41
그것이 조만간에 올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빠를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때 나는 병원에 누워 배를 가르고 대동맥을 자르느냐 안 자르느냐의 관두(關頭)에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외출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42
그러나 나는 날마다 밖으로 나갔다. 나가지 않으면 못 배길 용솟음이 가슴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나가서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새로운 것뿐이었다. 하루 사이에 세상을 보는 눈은 달라졌다. 그러나 이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에 똑바른 처결을 내릴 방도를 갖지 않은 나는 우선 당황하는 것이 제일 먼저의 일이었다.
 
43
1917년 그때 러시아에서는 인류사회에 역사가 있은 후 처음으로 근로 대중이 정치적으로 승리를 한 크나큰 해였다. 이 해 예세닌의 나이는 조선식으로 쳐도 불과 스물셋이었다.
 
44
차르의 압정과 그간의 넌더리나는 대전(大戰)의 와중에서 다만, 꿈과 아름다움과, 고향으로 향하는 자연의 찬미와, 뒤끓는 정열밖에 미처 마련하지 못한 그의 가슴은 어떠하였을까.
 
45
날이 갈수록, 그리고 날이 가면 갈수록 환멸과 비분밖에 나지 않고, 그나마 병석에 아주 눕게 된 나로서는 그의 일을 남의 일처럼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의 받아들이는 감성은 너무나 컸고 이것을 정리하는 그의 이성은 너무나 준비가 없었다.
 
 
47
나는 고향에 왔다.
48
어릴 적에 자라난 이 조그만 동리를,
49
이제 십자가를 떼어버린 교회당의 뾰족탑이
50
소방서의 망보는 곳으로 기울어진
51
이 조그만 동리를……
 
52
……………………
53
…………………………
 
54
안녕하십니까,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55
이 병들고 퇴락한 동리의 모습을 보면
56
내가 아니고 늙은 소라도
57
메 하고 울었을 것이다.
58
벽에는 레닌의 사진이 붙은 카렌다
59
여기에 있는 것은 누이들의 생활이다.
60
누이들의 생활이고 나의 생활은 아니다.
61
그래도 사랑하는 고향이여!
62
나는 네 앞에 무릎을 꿇는다.
 
 
63
이 노래 때문에 나는 얼마나 울은 것인가. 8.15 이전부터 나의 바란 것은 우리 조선의 완전한 계급혁명이었다. 이것만이 우리 민족을 완전 해방의 길로 인도할 줄로 확신하면서도 나는 한편 이 노래로 내 마음을 슬퍼하였다.
 
64
나의 본의가 슬픔만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와 같은 감정에 공명하고 이와 같은 심상에서 헤어나지를 못하였는가.
 
65
이것은 무척 어려운 문제 같아도 기실 알고 보면 간단한 것이다. 요는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정지한 형태로서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발전의 형태로서 보느냐에 있다.
 
66
누구보다도 정직한 예세닌,누구보다도 성실한 예세닌, 누구보다도 느낌이 빠르고 또 많은 예세닌, 이 예세닌의 노래 속에서 그의 진정을 볼 때 나는 저 20세기 불란서의 최고 지성인이요 최고 양심가라는 지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67
“우리 문화의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옹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사회주의 사회에만이 가능한 것이다”라고, 나치의 횡포에 분연히 일어났던 그도 방소(訪蘇) 기행으로서 자기의 한계를 들춰내고 말았다.
 
68
지드가 소비에트를 방문하였을 때 그때 소비에트는 벌써 제3차 5개년 계획의 비상한 건설 도상 있을 때이다. 이처럼 생각하면 예세닌의 살았던 그 당시 10월혁명이 승리를 한 뒤에도 가장 혼란과 투쟁 속을 거쳐 겨우 일곱 해 만에 네프정책을 쓰게 된 것이니 누구보다도 받아들이는 힘이 많고, 누구보다도 느끼는 바가 많은 예세닌만을 나무라기는 좀 억울한 대문이 있다. “만세! 지상과 천상의 혁명!" 10월 당시 이처럼 좋아서 날뛰던 예세닌에게, 천상의 혁명이라는 말까지 한 관념적인 해석이 있다 치더라도 누가 그 기쁨의 순을 죽이고, 그 기쁨의 싹을 자른 것이냐.
 
69
나는 만 번이라도 이 점에 대하여는 긍정하는 사람이다.―새로운 이념의 사회에 묵은 해석을 가지고는 보조를 맞추어갈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 움트려는 옳은 싹을 자른 것은 누구이냐. 그것은 오히려 처음부터 반동하는 사람들의 힘이 아니고 되레 공식적이요 기계적이며 공리적인 관념론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70
이것은 현재 조선에도 구더기처럼 득시글득시글 끓는 무리들이다. 물론 그까짓 구더기 같은 것들에게 밀려난 예세닌을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타까운 편이다. 그리고 예세닌이나 나를 위하여, 아니 조그만치라도 성실을 지니고 이 성실을 어데다가 꽃피울까 하는 마음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공분을 참지 못한다는 것이다.
 
71
이것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온 구라파의 한 개의 전율이라고 하던 예세닌이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을 칠 때에, 부하린조차 기겁을 하여 그의 시를 금지하고 그의 몸까지도 구속하자고 서두를 때, 그는 씁쓸한 코웃음으로 이것을 맞았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자유롭고, 또 그 자유를 위하여 누구의 손으로 죽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손으로 자기의 목숨을 조른 것이다.
 
72
“아 우리는 한 사람의 셀요샤(예세닌의 애칭)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청년들을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루나차르스키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였다.
 
 
 

3

 
 
74
나는 농사꾼의 자식이다. 1895년 9월 21일, 랴잔스크 현 가쯔민 주 랴잔스크군에서 났다.
 
75
집이 가난한 위에 식구들이 많아서 나는 세 살 적부터 외가 편으로 돈 있는 집에 얹혀 가 길리우게 되었다.
 
76
이렇게 하여 나의 어릴 적은 지났다. 내가 커지면 나를 동네 선생님으로 앉히려고 열심히 권했으나, 그 뒤 특수한 목사 양성학교엘 들여보내고 이곳을 열여섯에 졸업한 나는 또 모스크바의 사범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일이 없이 난 것은 다행이었다.
 
77
나는 여남은 살 적부터 시를 썼는데, 참말로 옳은 시를 쓴 것은 열여섯이나 열일곱 때부터이다. 이때의 어드런 작품은 나의 첫번 시집에도 넣었다.
 
78
열여섯 살 때 나는 여러 잡지에다 내 시를 보내었는데 그게 도무지 발표되지 않아 초조하여 부랴부랴 서울(당시는 페테르스부르크)로 올라갔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나를 환대하였다. 맨 먼저 만난 이가 블로크, 그를 만나서 눈앞에 자세자세히 뜯어볼 때 나는 처음으로 산 시인을 본 것같이 땀이 났다.
 
79
전쟁과 혁명과의 기간 중 운명은 나를 예제로 몰아보냈다. 나는 우리나라를 가로세로 북빙양(北永洋)에서 흑해와 이해(裏海)에, 서유럽에서 중국, 이란, 또 인도까지도 나돌아다녔다. 나의 생애 중에 가장 좋은 시기는 1919년이라고 생각한다……
 
 
80
위에 인용한 것이 그의 자전의 일부이다. 그의 작품 속에도 쉴 새 없이 자기 이야기나 나오니까 이것만 가져도 대강은 짐작될 것이다.
 
81
그러나 애쎄닌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건은 1921년 세계적인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과의 관계이다. 그해 가을 소비에트 정부의 초청으로 온 덩컨과, 예세닌은 만나자마자 서로 좋아하고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82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뜬구름과 같이 지날 수 있는 염문이었다면 별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생을 같이하고 싶다는 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83
전형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미국의 인기화형(人氣花形)과, 새로운 이념인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체득하려고 참다운 노력을 하는 성실한 시인과의 정신적인 공동 생활이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남는 것이란 애욕밖에 무엇인가. 그리고 또 이 애욕을 연장시키기 위하여서도 두 이념 중에서 하나는 완전히 버려야 한다.
 
84
그러나 덩컨이, 그 당시 아직도 혼란기에 있고 또 피 흐르는 건설기에 있는 소비에트에 머물러 이와 보조를 맞출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요, 더더구나 누구보다도 성실하려는 예세닌이 위대한 혁명 완수에 두 팔 걷고 나선 자기의 조국을 팽개치고 미국인으로까지 귀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85
“결국 그것은 사랑할 만한 그리고 신실한 인물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었다. 여기에는 곡절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언제인가 ‘흥, 알 수 없는 일이로군. 현대는 결단코 한 사람의 천재를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야, 면목없는 일은, 특히 화려하게 면목 없는 일은 항상 천재를 도웁는 것이니까’ 하고 숨겨진 조소의 모멸을 던지던 때 그리 한 때의 그의 태도 같은 게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일 것이다”
 
86
하는 의미의 기리로프의 말이 일리 있다.
 
87
그만한 것쯤은 알았어야 할 예세닌, 또 응당 그만한 것은 알았을 예세닌이 주책을 떨고 1921년에서 1922년에 걸쳐 남로(南露)와 이란, 이태리, 불란서, 아메리카로 두루 덩컨의 뒤를 쫓은 것은 대체로 각처에서 볼 수 있는 천재병 문학 청년의 비굴한 심사에서 오는 오만과 무책임의 소행이다.
 
88
그러나 우리의 현명한 예세닌은 이것을 박차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역시 그에게는 적으나마 그의 성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실이라는 것도 마음과 노래로만 읊는 것이 성실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실은 일찍이 그 말년까지, 더욱이 말년에는 일상 있을 곳이 없어지면 시료(施療) 병원엘 찾아가는 참담하고 무능한 베를렌에게도 있다. 새 시대의 요구는 자기와는 따로 떨어진 아름다움이 아니라 완전한 한 개의 인간이다.
 
89
예세닌이 여기에 낙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때 물론, 러시아는 내려 밀려오던 차르의 압정과 대전의 막대한 거비(據費)와 혁명 전취(戰取)의 피 흐르는 투쟁과에 피곤할 대로 피곤하였고, 거기에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 세계의 국가라는 국가는 전부 자본주의 국가로 소비에트 사회의 건설을 될 수 있으면 누르려고 하여 여기에 대비하려면 1924년에야 겨우 처음으로 시작한 1차 5개년계획도 생활 필수품보다는 중공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90
예세닌의 옳은 마음이 조국으로 오기는 왔다. 그러나, 그의 마련 없는 정신으로는 그 어려운 시대를 지내기 어렵다. 더욱이 덩컨을 버린 것은 그의 이념이고 감정이 아니었다. 생애를 통하여 보면, 또 성격적으로도 전체로 감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의 마음이 이로 인하여 편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도 그의 음주와 난행은 심하여졌다. 그가 이 같은 생활에 그쳤다면 이야깃거리는 안 된다. 그러나 예세닌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 줄도 알았으며, 또 무력한 그의 의지를 어떻게 하면 살릴까 하고도 애를 쓴 사람이다.
 
91
“그가 각처로 떠돌아다닌 것은, 이것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흡사 무엇을 잃은 사람이 그 잃은 것을 찾으려고 나선 것처럼 여러나라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가 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때는 이미 옛날의 예세닌은 아니었다”고, 그의 추도회의 강연석에서 셀시에네비치가한 말은 옳다.
 
92
이리하여 그는 마지막의 구원을 고향에 걸고 고향 랴잔으로도 가보았다. 그러나 끝까지 자력으로 버티려는 기색이 적고 외부 환경의 힘에 기대려 하는 그에게 구원이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도 참담한 패배를 한 것은 물론이다.
 
93
어떻게 하면 살까,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던 예세닌은 그의 가장 떳떳한 삶이란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이라는 데에 결론이 왔다.
 
94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믿고 바랐던 고향에서 짐도 꾸리지 않고 레닌그라드, 그 전날 덩컨과 처음으로 백 년의 헛되인 약속을 맺은 호텔 바로 그 방을 찾아가 그 방에서 죽었다. 이때가 1925년 12월 30일이었다.
 
 
 

4

 
 
96
예세닌이란 성은 러시아 고유의 성으로, 이 말뜻엔 가을의 즐거운 명절, 땅에서 주는 것, 과일의 풍년, 이런 것이 들어 있다.
 
97
그를 3백 년 전에 살게 하였다면 그는 3백의 아름다운 시를 쓰고, 봄에 물오르는 순 모양 즐겁고 감격된 넋의 눈물을 흘리어 울면서 아들 딸을 낳고, 그리고 지상의 날의 문지방 옆에서 밤의 불을 지피었을 것이고-숲 속에 가리어진 초당의 어데선가 잠잠히 짧고 빛나는 비애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로 하여금 우리들의 날에 낳게 하였고, 지구전화(地球電化)와 타드린의 주전탑(週轉搭)과 유리투성이와 콘크리트투성이의 도회에 관한 열병적 탐닉 속에, 다 썩은 양배추와 이 구덩이에, 또는 네거리에서 저주하듯 외치는 축음기 소리 가운데, 길거리에 내버린 시체와 핏기조차 얼어가는 동무들 사이에, 사탄의 교사(敎唆)와 형이상학의 기술(奇術)에 의해 그는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다.
 
 
98
이 말은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예세닌을 격려하던 문중(文中)에 그의 모습을 그린 부분이다.
 
99
세상에서는 그를 모두 농민 시인, 또는 러시아 최후의 농민 시인이라고 한다. 과연, 그의 노래한 자연의 묘사와 전원의 풍경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졌다. 그리고 초년과 말년에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았으며 자기도 「농촌 최후의 시인」이란 시까지 썼다.
 
100
그러나 그는 끝까지 전원 시인은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농촌 최후(자타가 이 최후라는 말을 쓸 때에는 다 의식적으로 스러져가는 전 사회의 환경과 이념을 이야기한 것이겠지만)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는 끝까지 도회의 시인이었으며, 도회의 말초적인 신경을 가진 데카당이었으며, 도회 생활의 패배자로서 그의 어렸을 적 고향을 그리는 것이, 한편으론 허물어져 가는 전 사회의 외모와 그곳에조차 나타나는 새 사회의 악착 같은 침투력에 소스라쳐 놀란 것에 부합되었고, 또 이러한 것이 그의 불타기 시작하는 절망감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101
이 당시 러시아에 종이조차 없었을 때 그는 구시코프와 마리엔코프와 함께 자기의 시를 수도원의 벽에다 쓰기도 하고, 카페나 다방에 써 붙이기도 하고, 이것을 각처로 다니며 읽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이 눈으로 보면 좀 길고 지루하나 소리를 내어 읽고 듣자면 대단히 큰 효과가 난다.
 
102
1915년에서 1925년, 이 십 년간에 그는 장단(長短)의 시를 합하여 무려 열 권의 시집을 내었다. 이 나어린 시인에게 눈부시는 세상은 얼마나 많은 자극을 주었는지 가히 알 수 있다.
 
103
더욱이 말년, 그의 스스로 초래한 방탕과 몸부림엔 심신이 모두 상하여, 모스크바에서 굶어 죽다시피 괴혈병으로 죽은 블로크, 또 시리야웨츠의 죽음, 이것은 반동파의 시인이나 정부에게 총살을 당한 그리미요프의 회상, 이런 것은 그를 더욱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104
“아마 나도 시골로 가면 건강이 회복되겠지, 약이나 좀 먹구 하면…… 그러면 이번엔 얌전한 시악시에게 장가두 들구" 이렇게 만나는 친구마다 이야기하던 예세닌의 귀향은 뜻하지 않은 그의 목숨을 줄이는 귀향이 되고 말았다.
 
105
그의 죽음을 섭섭히 여기는 모든 시붕(詩朋)들은 그를 애도하는 밤을 가졌고, 살아서 끝까지 보조를 맞추기는커녕 자꾸 탈선을 한 그에게 소비에트 정부는 국장(國葬)으로 그를 후히 대접하였다.
 
106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한 사람의 셀요샤조차 구하지를 못하였다. 앞으로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청년들을 위하여는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부르짖은 루나차르스키의 말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107
1946. 2. 17.
 
108
끝으로 나의 허튼 생각을 정리할 자료를 모아준 인천 신예술가협회 여러 동무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원문】예세닌에 관하여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평론〕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3
- 전체 순위 : 2933 위 (3 등급)
- 분류 순위 : 391 위 / 1170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예세닌에 관하여 [제목]
 
  오장환(吳章煥) [저자]
 
  1946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예세닌에 관하여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2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