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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오기행(丙午紀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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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
허균
1606년 원접사 유근(柳根)의 종사관이 된 허균이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 양유년(梁有年)을 맞이하던 과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기록이다. (성소부부고 18권)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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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오기행(丙午紀行)
 
 
2
을사년(1605, 선조38) 겨울 명(明) 나라 황제의 장손이 탄생하였다. 황제는 한림수찬(翰林修撰) 주지번(朱之蕃)과 형과도급사(刑科都給事) 양유년(梁有年)을 파견하여 조서를 받들고 오게 하였다. 나는 그때 요산(遼山)의 직을 그만두고 서울집에 있었는데 원접사 유공 근(柳公根)이 상께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병오년(1606) 정월

 
4
병오년(1606, 선조39) 정월 초6일 에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 직(職)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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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1일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였다. 동료(同僚) 필선(弼善) 이지완(李志完)은 어머니를 뵈러 성천(成川)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나와 전적(典籍) 조희일(趙希逸)만이 따랐다. 김남창(金南窓)은 제술(製述)로, 진사(進士) 백진남(白振南)은 서자(書字)로 함께 따르고, 통역관 표헌(表憲)ㆍ이해룡(李海龍)ㆍ박인상(朴仁祥)ㆍ진예남(秦禮男)ㆍ이운상(李雲祥)ㆍ신계도(申繼燾)와 이문학관(吏文學官) 이재영(李再榮)ㆍ양만세(楊萬世)와 사자관(寫字官) 이해룡(李海龍)ㆍ송효남(宋孝男)과 화원(畫員) 이정(李楨), 서원(書員) 이자관(李自寬)이 따랐다. 이날 뒤따라와 베푼 송별연이 번거로워 겨우 연서(延曙)까지 가서 묵었다. 나는 여인(汝仁)과 함께 묵었다.
 
6
22일 벽제에서 점심을 먹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 김흡(金洽)이 찾아와서 인사하였다. 저물녘에 파주에 도착하여 이(李)와 송(宋) 두 사람과 함께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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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개성부에 도착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홍간옹(洪艮翁 간옹은 홍가신(洪可臣)의 호)이 방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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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금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평산에 이르니 관찰사(觀察使) 심열(沈悅)이 찾아왔다.
 
9
25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안 군수(遂安郡守) 이경천(李慶千)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용천에서 묵었다. 재령 군수(載寧郡守) 유희발(柳希發)과 소강 첨사(所江僉使) 민인길(閔仁佶), 강령 현감(康翎縣監) 조호룡(曺浩龍) 등이 만호(萬戶) 심눌(沈訥)의 소개로 함께 와서 인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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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동선에서 묵었다.
 
11
27일 소선령(笑仙嶺)으로 해서 황주에 도착했다. 저녁에 심 방백(沈方伯 심열을 가리킴)과 목사 박열지(朴說之 열지는 박동열(朴東說)의 자)ㆍ이숙(怡叔 조희일(趙希逸)의 자)ㆍ여인(汝仁)과 함께 이야기했다. 정상조(鄭象祖)가 인사하러 찾아와 송(宋)ㆍ이(李) 등과 함께 묵었다. 밤중에 학랑(鶴娘)이 휘장을 걷으며 들어왔다. 나는 알아차리고 정(정상조)에게 임고(臨皐)의 밑을 지나 내게 인사하며 적벽(赤壁)에서의 노님이 즐거웠느냐고 묻더라고 하자 세 사람이 껄걸 웃어대니 달아나 버렸다.
 
12
28일 사(使)는 조카와 읍에서 만나기로 하여 중화에 머물렀다. 이숙은 나와 함께 먼저 평양에 도착하였다. 서윤(庶尹) 박엽 숙야(朴燁叔夜 숙야는 자)가 구름무늬로 장식한 선방(仙舫 놀잇배)에 춤추는 기녀들을 싣고 잔치를 베풀었다. 내가 관서(關西) 지방을 아홉 번이나 왕래하였으나, 이번 잔치가 가장 성대하였다. 기생 향란(香蘭)은 내 형님께서 돌봐주던 자이다. 노래 잘하고 우스개 소리를 잘하므로 백가관서곡(白家關西曲)을 부르게 했다. 방백 박자룡(朴子龍)이 중화에서 돌아와 함께 배타고 놀았다. 성 위에 횃불을 밝혀 놓으니 여장(女墻 성가퀴)이 대낮같이 밝았다. 이고(二鼓)에 가마를 타고 들어오니 숙야가 나를 자기 처소에 들게 하였다. 내가 예전에 돌봐주던 기생 춘랑(春娘)이 기적(妓籍)에서 빠진 지 오래되었는데 서울에서 온 지 두어달이 되었다 한다. 숙야가 굳이 밀어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에 옷매무새도 어지러워 병이 심한 듯하므로 내가 만류하였다.
 
13
그믐날 이숙(怡叔)이 먼저 왔다.
 
 
 

병오년(1606)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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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사(使)가 비로소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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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동지사(冬至使)가 이상신(李尙信)ㆍ정협(鄭協)과 서장관(書狀官) 유시행(柳時行)이 평양부에 당도하였다. 저녁에 양오(養吾 이지완(李志完)의 자)가 성천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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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평양부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18
7일 서경(西京)을 출발하여 순안에 도착하였다. 숙야도 도차(都差 차사원(差使員)의 우두머리)로 따라 왔다. 밤에 숙야ㆍ여인과 함께 서상(西廂)에 묵었다. 성천 부사 이거용(李巨容)이 술자리를 성대하게 차려놓고 노래시키기를 청하여 허락하였더니 기생 넷이 들어와 인사를 하는데, 그 중 한명은 생김새가 매우 곱지 않았다. 내가,
 
19
“저 아이는 분명 노래를 잘할 것이다.”
 
20
하니, 여인이
 
21
“어떻게 아는가?”
 
22
하기에, 내가,
 
23
“재주가 없으면 어떻게 이 자리에 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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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더니,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 기녀는 과연 노래를 잘하였다. 발성이 맑고도 웅장하여 패서(浿西 평안도)에서 제일이겠는데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이날 밤 백패(白牌)는 대 감생(戴監生)과 재 등황(齋謄黃)이 온다고 보고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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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숙녕에서 묵었다.
 
26
9일 안주에서 묵었다. 영변(寧邊) 생랑(生娘)이 찾아와 인사하고 옛정을 풀었다.
 
27
10일 가산에서 묵었다. 영유(永柔)의 현령 홍영(洪榮)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28
11일 정주에 도착하였다. 문아(文娥)가 찾아와 인사하고 옛정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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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30
13일 차연에서 묵었다. 병사(兵使) 성윤문(成允文)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31
14일 양책에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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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소곶에서 점심을 먹었다. 부윤(府尹) 구의강(具義剛), 판관(判官) 최간(崔衎)이 맞으러 왔다. 저녁에 성(城)에 들어갔다. 나는 관노(官奴) 송풍(松風)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두 이(李)ㆍ양(楊)ㆍ송(宋) 등이 모두 근처에 숙소를 정하여 아침저녁으로 함께 노닐었다. 수세관(收稅官) 원외(員外) 이오(李璈)는 내 재종형인데 찾아와 매우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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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사(使 유근(柳根))는 매일 일과로 시를 짓게 할 것을 약속하였다. 나는 비로소 한유(韓愈)ㆍ왕유(王維)ㆍ이백(李白)의 시집을 읽었다.
 
34
22일 부윤이 관문에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다.
 
 
 

병오년(1606)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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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대 감생(戴監生)의 접반사(接伴使) 민인백(閔仁伯)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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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사를 모시고 구룡연(九龍淵)에서 노닐었다.
 
38
4일 연위사(延慰使) 신현옹(申玄翁 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 왔다고 들었는데, 저물녘에 부(府)에 들어가니 대 감생의 연위사(延慰使) 송기(宋圻)였다. 백패통사(白牌通事)는 양사(兩使 주지번과 양유년을 가리킴)가 2일에 산해관(山海關)을 지났는데, 대 감생은 요동에 도착하자 되돌아갔다고 보고하여, 민(閔 대 감생 접반사 민인백)ㆍ송(宋 대 감생 연위사 송기)두 분은 서울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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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도사연위사(都司延慰使) 유몽인(柳夢寅)이 왔다. 저녁에 숙야가 왔다.
 
40
7일 백패가 지나갔다.
 
41
8일 사(使)는 표헌과 이해룡 두 통역을 요동에 보내 양사(兩使)를 만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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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방백이 도착하였다.
 
43
10일 문례관(問禮官) 전한(典翰) 유희분(柳希奮)이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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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도차(都差) 정주 목사(定州牧使) 최기(崔沂)가 도착했다.
 
45
12일 진하사(進賀使) 민몽룡(閔夢龍)ㆍ유사원(柳思瑗), 서장관 이척(李惕)이 도착하였다.
 
46
13일 백패통사는 양사가 14일에 요동에 도착한다고 통보해왔다고 한다.
 
47
15일 관(館)에서 이의(肄儀)를 행하였다.
 
48
16일 하개(賀价 진하사(進賀使)를 가리킴)가 강을 건넜다.
 
49
18일 표헌과 이해룡이 돌아와,
 
50
“양사는 매우 관후하게 대해 주었고 관속도 고천준(顧天俊)과 최정건(崔廷健) 때(선조 36년(1603)에 온 명 나라의 사신)보다 적어 따라 오는 요동 사람들이 모두 노하고 욕하며 쥐어 박으려 하더라.”
 
51
고 하였다.
 
52
20일 양사(兩使)가 진강(鎭江)에 도착하니 원접사는 박인상과 진예남 통역을 보내 인사하게 하였다. 양사는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해 차출되어 온 사람들의 성(姓)ㆍ자(字)ㆍ호(號)를 자세히 물었다 한다. 하인들 말로는 도중에 지은 시가 매우 많다 한다.
 
53
21일 또 표헌과 이해룡을 보내 원역(員役 수행원)을 상세하게 정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54
22일 다시 이의(肄儀)를 행하였다.
 
55
23일 양사가 강을 건넜다. 사(使) 이하와 방백 등 모든 관원이 성 밖에 나가 맞이하고 환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조금 뒤에 현관례(見官禮)를 하였고 저녁에는 연위연(延慰宴)을 베풀었는데 하인들이 으시대며 위협하고 시끄러운 것은 고(顧)ㆍ최(崔)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56
23일 소관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상사(上使)는 강상(江上)에서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시를 아홉 수나 지었고, 부사가 지은 시도 그의 절반이나 되어 화답하기 매우 군색하여 사(使)와 나, 그리고 여인은 당황하여 겨를이 없었다.
 
57
24일 차연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이날 지은 시도 5~6편이고 부사도 의례 그 반을 짓는 것이 매우 상례가 되었다.
 
58
25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정주에서 묵었다. 상사는 사에게 《천고최성(千古最盛)》이란 책자를 내놓고 발문(跋文)을 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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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가산에서 묵었다.
 
60
27일 상사는 먼저 공강정(控江亭)에 이르고 나는 뒤따라 갔더니 상사는 나를 불러들여 내 누님의 시에 대해 물었으므로 누님의 시집을 드렸더니, 상사는 이를 읽으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61
“당신의 시는 출판되지 않았는가?”
 
62
하고 물어, 나는 감히 출판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우리나라 산천 지리(山川地理)를 매우 자세하게 물어 모두 글로 써서 대답하였더니, 장선(掌扇 의장(儀仗)에 쓰는 자루가 긴 부채)을 꺼내어 자기가 지은 제산정시(齊山亭詩)를 적어 주고 화답하라고 하였다. 나는 즉석에서 구두로 지어 화답하였더니 상사는 감탄하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저물녘에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녹주(綠珠) 집에 묵었다. 연주(延州)의 옛 정인(情人)이 찾아와 인사하고 창아(昌娥)와 교섭하여 자신을 대신하였다.
 
63
28일 숙녕(肅寧)에 당도하였다. 상사는 나를 불러들여,
 
64
“귀국에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가(詩歌)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낱낱이 써서 가지고 오십시오.”
 
65
한 다음 나의 과거 시험 성적을 물었다. 중시(重試)에서 일등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66
“이것은 당송(唐宋) 때의 과거보는 식이다.”
 
67
하고는, 이어,
 
68
“무슨 관직에 있는가요?”
 
69
하고 물었다. 나는,
 
70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이니 바로 중국의 광록 소경(光祿少卿)입니다. 직책이 공궤(供饋)를 관장하기 때문에 국왕께서 저를 파견하여 음식과 여관을 마련하게 한 것입니다.”
 
71
하니, 그는 또 내 경력을 물었다.
 
72
“처음 사관(史官)에 제수되고 직방(職方 병조를 말함)의 주객이원외(主客二員外)에 승진되었으며, 급사중(給事中 예조)으로 옮겨 무선랑중(武選郞中)으로 승진하여,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되었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승진하였으며, 서군(西郡 수안(守安)을 기리킴)의 수령으로 나갔고, 그 다음으로 현재의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73
하니, 상사는,
 
74
“아니, 이 사람이 중국에 태어났다면 당연히 승명지려(承明之廬 승정원(承政院)을 말함)나 금마지문(金馬之門 홍문관을 말함)에 오래 있을 것인데 죄를 짓지 않고서야 어째서 낭서(郞署)나 외군(外郡) 사이에서 오가겠는가?”
 
75
하고는, 《세설산보(世說刪補)》ㆍ《시준(詩雋)》 및 《고척독(古尺牘)》 등 책을 꺼내주었다.
 
76
또한 양오(養吾 이지완(李志完)의 자)와 이숙(怡叔 조희일(趙希逸)의 자)을 불러 위로하고 그들의 과거급제와 이력에 대해 물었다. 부사도 또한 이들을 불러 수고함을 위로하고 형산석각첩(衡山石刻帖)을 주었다.
 
77
29일 평양에 도착하여 이아(二衙)에서 묵었다. 춘랑(春娘)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상냥스러운 것이 지난날 병들어 보이던 모양과는 딴판이었다. 여인이 시를 지어 내게 화답하게 하여 나는 그 자리에서 이에 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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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그대로 머물렀다. 이사(二使)와 뱃놀이를 하였다. 목은 이색의
 
 
79
종일토록 읊조려도 짓지 못했네 / 終日吟咀不能作
 
 
80
라는 시를 보고는 사가 웃으면서 나에게,
 
81
“매일 이와 같은 유의 시를 찾아 올리면 우리들의 마음이 한결 편할 것이다.”
 
82
하였다. 부벽루(浮碧樓)에 이르자 양사는 나를 불러,
 
83
“연주하는 음악이 중국의 음악과 아주 비슷한데, 가사(歌詞)가 있는가?”
 
84
고 물었다. 나는 즉석에서 보당(步唐)과 자야심사(子夜深詞)를 적어 주었더니 양사는 그 가사가 《화간집(花間集)》의 것보다 못하지 않다고 칭찬하였다.
 
 
 

병오년(1606) 4월

 
86
4월 1일 생양(生陽)에서 점심을 먹고 황주(黃州)에서 묵었다. 민숙정(閔叔正 숙정은 민인길(閔仁佶)의 자)이 문 중간에 서 있으므로 나는 상사의 왕 장반(王長班)에게 귀띔하여 그의 뺨을 후려치게 하였더니 숙정은 아슬아슬하게 피하였으니 재미있다. 저녁에 상사가 나를 불러 한참 이야기하다가,
 
87
“북경(北京)에서 《황화집(皇華集)》 구본을 보았는데, 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ㆍ이이(李珥)와 같은 이들이 모두 문집이 있는가?”
 
88
하고 물었다. 나는 왜란으로 판본(板本)이 모두 불타버렸다고 하니, 상사가 탄식하고 아까워하며,
 
89
“최근에 유로(柳老 유영경(柳永慶)을 가리킴)의 작품을 보니 원전(圓轉) 완량(婉亮)한 것이 예전 사람들보다 훌륭했습니다. 귀국 사람들의 시를 빨리 베껴 보여주십시오.”
 
90
하였다. 나는,
 
91
“노상이라 바쁘고 서수(書手 글씨 쓰는 사람)도 없으니 며칠만 기다리면 모두 베껴 드리겠습니다.”
 
92
하였다. 상사가,
 
93
“길가의 관역(館驛 역사(驛舍)) 벽판(壁板)에 왜 귀국 사람의 시문이 없습니까?”
 
94
하기에, 나는,
 
95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이 지나는 곳에 변변치 않은 시를 보이게 할 수 없어 선례가 붙이지 않습니다.”
 
96
하니, 상사가 웃으며,
 
97
“나라로 보면 화이(華夷 중국과 주변국)의 구별이 있다고는 하지만, 시에 어떻게 내외(內外 내륙과 외지(外地))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천하 모든 나라가 한집안 같고 사방이 모두 형제가 되어 나와 당신이 모두 천자의 백성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뽐낼 수 있겠습니까. 요즘 귀국 사대부를 보면 예절이 한아(閑雅)하고 문장이 빼어나니 이들을 중국에 가서 벼슬하게 한다면 어떻게 우리들보다 못할 수 있겠습니까.”
 
98
하였다.
 
99
2일 동선(洞仙)에서 묵었다. 상사가 사와 우리 세 사람[三人 허균ㆍ이지완ㆍ조희일]을 초대하여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부사가 나타나 세 사람이 피하지 못하고 처마에서 절하였는데 부사는 매우 공손하게 답례하였다. 다시 차를 마시고 서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나갔다.
 
100
3일 검수(劍水)에서 점심을 먹고 용천(龍泉)에서 묵었다.
 
101
4일 상사는 먼저 총수산(蔥秀山)에 도착하여 나를 불러 함께 동월(董越)ㆍ공용경(龔用卿)의 두 비석을 보았다. 옥류천(玉溜泉)의 물을 떠 마시고는 서호(西湖 중국 항주에 있는 호수)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하였다. 한참 만에 부사가 와서 사와 우리 세 사람을 불러 즐겁게 대작하였다. 저물녘에 평산(平山)에 당도하였다.
 
102
5일 회란석(回瀾石) 위에서 잠깐 쉬고 금교(金郊)에서 점심을 먹고 송경(松京)에 들어갔다. 저녁에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최고운(崔孤雲) 이하 1백 24명의 시 8백 30편을 써서 4권으로 만들고 노란 표지로 꾸며 두 본을 만들어 양사에게 올렸다. 상사는 녹화단(綠花緞 꽃무늬가 놓인 푸른 비단) 한 필과 안식향(安息香) 1천 매를 주고 부사는 남화사(藍花紗) 한 끝과 《태평광기(太平廣記)》 한 부를 줬다.
 
103
6일 개성에 머물렀다. 잔치가 파한 후 상사는 나를 불러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평하기를,
 
104
“최고운의 시는 거칠고 힘이 약한 것 같고 이인로(李仁老)와 홍간(洪侃)이 매우 좋습니다. 이숭인(李崇仁)의 오호도(嗚呼島), 김종직(金宗直)의 금강일출(金剛日出), 어무적(魚無迹)의 유민탄(流民歎)이 아주 좋고, 이달(李達)의 시의 여러 형태는 대복(大復 명(明) 나라 하경명(何景明)의 호)과 아주 비슷하나 가수(家數)가 크지 않습니다. 노수신(盧守愼)은 힘차고 깊어 감주(弇州 명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호)에 비해 조금 고집스러우나 오율(五律 오언 율시)은 두법(杜法 두보의 시법)을 깊이 터득하고 있습니다. 이색(李穡)의 시들은 모두 부벽루에서 지은 것만 못합니다. 나는 밤새 불을 켜놓고 보았는데 귀국의 시는 대체로 음향이 밝아 매우 좋습니다.”
 
105
하고는 이달의 만랑가(漫浪歌)를 소리 높여 읊조리면서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
 
106
7일 오목(梧木)에서 점심을 먹고 마산(馬山)에서 묵었다.
 
107
8일 벽제(碧蹄)에 당도하였다.
 
108
9일 그대로 머무르면서 연회를 받았다. 나를 불러들여 한참 이야기하다가 내가 감주를 만난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상사는,
 
109
“계사년(1593, 선조26) 봄에 태창(太倉)에 가서 감주에게 한 번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은 그때 남대사구(南大司寇)로 치사(致仕)하고 있었는데 인물은 잘 생기지 않았으나 눈빛이 형형하였습니다. 화원(花園)에 고고당(考古堂)ㆍ박고당(博古堂) 등의 집을 짓고 시사우(詩社友 시 짓는 모임의 친구)와 문도(門徒)를 모아 온종일 시도 짓고 술을 마시는데 하루에 5~6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시문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비(侍婢)에게 피리 불고 거문고 뜯으며 노래하게 하고는 종이를 펴고 바로 완성하였습니다.”
 
110
하였다.
 
111
학문과 문장을 공부하는 과정을 물었더니,
 
112
“우리들이 젊었을 적에는 왕(王 왕수인(王守仁)을 가리킴)ㆍ육(陸 육구연(陸九淵)을 가리킴)의 새로운 학설을 부질없이 좋아하였는데 늙어서 보니 주자 주(註)의 사서(四書)가 제일이었습니다. 학문의 뜻은 여기에서 찾는 것이 좋을 듯하였습니다. 문장은 사람마다 이우린(李于鱗 명(明) 나라 이반룡(李攀龍)의 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선진(先秦)ㆍ서경(西京)의 문(文)과 한(漢)ㆍ위(魏)의 고시(古詩), 성당(盛唐)의 근체시(近體詩) 등도 반드시 읽어야 하나 소 장공(蘇長公 송(宋) 소식(蘇軾)을 말함)의 시문은 가장 가깝고 배우기 쉽습니다. 나도 백부(白傅 백거이(白居易))와 소 장공의 시를 본보기로 하였습니다.”
 
113
하였다. 또 내가 현재 한각(翰閣)에서 시를 잘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114
“남사중(南師仲)ㆍ구대상(區大相)ㆍ고기원(顧起元) 등이 잘합니다. 병부랑(兵部郞) 사조제(謝肇淛)란 사람이 있는데 그의 시는 하대복(何大復)과 아주 비슷한 경지입니다.”
 
115
하였다.
 
116
10일 먼저 서울에 와서 복명하였다. 주상께서 교외까지 나와 일행을 마중하였다. 이사(二使)는 서울에 10일 간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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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돌아갔다. 일행이 다 따랐는데 김남창(金南窓)과 백진남(白振南)은 뒤처져 가지 않고 역관 남윤함(南胤咸) 전대이(全大頤)가 추가 되었다. 벽제에서 묵었다. 저녁에 우리 세 사람을 불러 만난 자리에서 《양천세고(陽川世藁)》의 서문과 돌아가신 누님의 시인(詩引)을 지어 주었다. 이정(李楨)이 그린 불첩(佛帖)을 보고 좋아하며, 이런 그림은 중국에서도 드물다고 하고는 끝에 몇 마디 제(題)를 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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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마산ㆍ오목을 지나 송경에서 묵었다.
 
119
22일 금교에서 묵었다. 저녁에 상사가 나를 불러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고시본(古詩本)을 찾았다. 보따리 속에서 마침 외할아버지께서 주신 후산시(后山詩) 6권이 있어 드렸더니 상사는 공사(拱謝 손을 마주 모으고 사례함)하였다.
 
120
23일 오조천(吾助川)에서 점심을 먹고 어두워서야 평산(平山)에 당도하였다.
 
121
24일 옥류천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벌였는데 분위기가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저물녁에 어두워서야 용천에 도착하여 인초(軔初)와 함께 묵는데 못생긴 계집종을 잠자리에 들여보내려 하니 우스운 일이다.
 
122
25일 검수(劍水)ㆍ동선(洞仙)을 지나 황주에 당도하였다.
 
123
26일 생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평양에 닿아 배 안에서 연회를 받았다. 숙야는 어사(御史)가 장계(狀啓)를 올린 일 때문에 나오지 못하여 내가 가서 억지로 끌어내어 비로소 배 위에 올랐으니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사는 내게 회문시(回文詩)에 화답하라고 하여 숙소에 돌아와 고생고생하여 겨우 맞추어서 명에 응하였다. 저물녘에 이사는 쾌재정(快哉亭)에 올라서는 나를 불러 한참 동안 이야기하였다. 나는 부사에게 《세고(世稿 허씨 세고)》의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더니 부사는 허락하였다. 상사는,
 
124
“동방의 시는 유춘호(柳春湖 춘호는 유영경(柳永慶)의 호)를 제일로 치는 것이 마땅하다.”
 
125
하니, 부사는,
 
126
“의기는 높고 말은 강직하나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이다.”
 
127
하니 상사는,
 
128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기는 하나 그 문장은 매우 신중하니 이야말로 최고의 작가이다.”
 
129
하였다. 그것은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작품이 오로지 최동고(崔東皐 동고는 최립(崔岦)의 호)의 작품을 본떴기 때문에 이사(二使)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저녁에 이아(二衙)에서 묵었다. 숙야가 새벽이 되도록 번거롭게 굴어 견딜 수 없었다.
 
130
27일 안정(安定)에서 점심을 먹고 숙녕(肅寧)에 당도하였다. 저녁에 부사가 나를 불러 직접 세고서(世稿序)를 내주므로 두 번 절하여 사례하고 물러나왔다.
 
131
28일 안주(安州)에 당도하였다. 저녁에 이사가 사(使)와 우리 세 사람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여 위로하였다. 사와 나는 술을 잘 못해 단술을 대접 받았는데 맛은 술과 같았으나 취하지 않았다.
 
132
29일 가산(嘉山)을 지나 정주(定州)에 당도하였다. 저녁에 양사가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를 구했다. 나에게 마침 옥루문(玉樓文) 두 벌이 있어 나누어 주었다. 상사는,
 
133
“해법(楷法 해서를 쓰는 법)이 아주 묘하다. 안진경(顔眞卿)의 위이며, 자경(子敬 진(晉) 왕헌지(王獻之)의 자)의 아래요, 송설(松雪 원(元) 조맹부(趙孟頫)의 호)과 형산(衡山 명(明) 문징명(文徵明)의 호)은 여기에 미치지 못할 것 같다.”
 
134
하였다. 또 진본(眞本)을 얻고자 하여 어쩔 수 없이 장문부(長門賦)를 주었다.
 
135
30일 운흥(雲興)ㆍ임반(林畔)을 지나 거련(車輦)에 당도하였다. 저녁에 상사는 황규양(黃葵陽)의 증망형시(贈亡兄詩) 운을 사용하여 장율(長律) 두 수를 지어 써서 큰 족자를 만들어 우리에게 주었다.
 
 
 

병오년(1606) 5월

 
137
5월 1일 양책(良策)을 지나 의주에 당도하였다. 상사가 이별시를 독촉하므로 소매 속에서 20 운(韻) 7율(律)을 꺼내어 드리고 부사의 시와 나란히 펴 놓으니 상사는,
 
138
“완욕(婉縟 아름답고 섬세함)하고 전려(典麗 바르고 전아함)하여 참으로 관각체(館閣體)를 터득하고 있다.”
 
139
하였다.
 
140
2일 이사가 강을 건넜다. 상사는 아침부터 복통이 일어나 연청(宴廳 연회하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고 강 위에서 바로 헤어지고 부사는 연청에 들어가 나를 불러서 감호영(鑑湖咏)을 직접 주고는 정중하게 이별하였다. 저녁에 동상(東廂)에 돌아와 묵었다.
 
141
3일 표헌과 이해룡을 보내어 문후하였더니 상사는 병이 심하여 볼 수 없었다.
 
142
4일 상마연(上馬宴 고별 잔치)을 관문(館門)에서 행하였는데 사는 중건(仲健)의 상복(喪服)을 입는 중이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143
5일 박인상ㆍ진예남이 가서 문후하니 상사는 좀 나았다고 하나 만나보지는 못하였다.
 
144
6일 이숙(怡叔)은 병이 심해 고생하였다.
 
145
7일 표ㆍ이가 다시 이사를 문후하니 상사는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했다.
 
146
8일 이숙의 열이 좀 가시었다.
 
147
9일 박ㆍ진이 다시 문후하니, 상사가 불러서 만나 보았으나 매우 초췌하였으며, 13일에는 길을 떠나려 한다고 말하였다고 했다.
 
148
10일 부윤이 세관(稅官)의 숙소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노랫소리와 피릿소리가 뒤섞였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149
11일 양오가 먼저 떠났다.
 
150
12일 영(令)과 이숙이 먼저 떠났다. 부윤이 남산(南山)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영은 내가 돌아본 일이 있는 창기(娼妓)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끌어내어 앉히니 3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는 진짜가 아닌 사람이 여섯 명이 끼어 있으니 더욱 우스웠다. 이숙의 연아(蓮娥)는 이별이 서러워 흐느끼며 쳐다 보지도 못하였다. 나는,
 
151
“내 정인은 이렇게 많아도 슬퍼 우는 사람이 없는데 이숙은 단 하나이면서 이렇게 연연하니 이야말로 많아봤자 소용없다는 거지 뭔가.”
 
152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저녁에 양책에서 묵었다. 연아가 나의 봉량(鳳娘)을 끼고서 이숙을 뒤따라 왔다. 나는,
 
153
“30명 중 너 만 왜 왔는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용리(龍吏)를 이별하는 게 더 나을걸.”
 
154
하였더니, 이숙은,
 
155
“형은 어찌 그리 박정한 말을 하시오.”
 
156
하였다.
 
157
13일 아침에 연아는 이숙을 붙들고 슬피 울며 데굴데굴 굴렀다. 봉랑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158
“그 울음을 참았다가 용리를 이별할 때에는 울어라.”
 
159
하였다. 이는 옥당(玉堂)의 관리 용우린(龍友鱗)과 좋아하였으나 나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해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160
14일 선천에 도착하여 천추사(千秋使) 홍녹문(洪鹿門 녹문은 홍경신(洪慶臣)의 호) 공과 함께 묵었다.
 
161
15일 점심 때 곽산(郭山)에서 쉬며 성절사(聖節使) 이각(李覺), 서장관 유경종(柳慶宗)과 만났다. 저녁에 정주에 당도하였다.
 
162
16일 가산을 지나 대정강(大定江)에 도달하였다. 연주(延州)의 창기가 사의 방기(房妓)와 함께 있는 것을 배 위에서 만나자 서로 정을 품고 바라보았다. 이숙은 그를 끼고 안주로 갈 계획을 세웠으나 사(使)의 기(妓)가 혼자 갈 수 없다고 굳이 말리니 그는 슬퍼하며 가버렸다. 저녁에 안주에 당도하니 양오와 점마(點馬) 조여익(曹汝益)이 배에서 맞이하였다.
 
163
17일 나는 먼저 영유(永柔)로 가서 자인(子仁)의 아내를 만났다.
 
164
18일 그대로 머물렀다.
 
165
19일 순안을 지나 평양에 도착하였다. 사은사 한술(韓述)ㆍ황정철(黃廷喆)과 서장관 송인급(宋仁及)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이아에서 묵었다. 서장관이 방기 옥일(玉一)을 빼앗아 가버렸다.
 
166
20일 사(使) 일행이 떠났다.
 
167
21일 사가 비로소 도착하였다.
 
168
23일 나는 먼저 중화(中和)를 돌아가고 우리 세 사람은 숙야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송인수(宋仁叟 송영구(宋英耈)의 자)와 함께 뱃놀이를 매우 즐겁게 하였다.
 
169
25일 중화를 지나 사를 모시고 황주에서 묵었다.
 
170
26일 동선에서 묵었다. 《황화집(黃華集)》이 비로소 완성되니 모두 6권이었다.
 
171
27일 평산에서 묵었다.
 
172
28일 개성부에서 묵었다. 저보(邸報)를 보니 형님이 총재(冢宰 이조 판서의 별칭)로 제수 되었다. 사는 나를 불러 매우 근심하였다. 때가 그럴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173
29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송도로 부임하는 경력(經歷) 심집(沈諿)을 만났다. 관벽(館壁)에 방(榜)을 쓴 사건에 대해 말하며 서로 탄식했다. 저녁에 마산에서 묵었다.
 
 
 

병오년(1606) 6월

 
175
6월 2일 서울에 들어가 복명하고 형님을 뵈니 세 번을 사양하였는데 말미를 더 주므로 방금 사직소를 써놓고 앉아 있었다.
 

 
176
[주D-001]《화간집(花間集)》 : 중국 오대(五代) 때 사(詞)의 선집(選集). 후촉(後蜀) 사람 조숭조(趙崇祚)가 엮었음. 18인의 작품 5백 수를 모은 것으로 전 10권임.
177
[주D-002]《황화집(皇華集)》 : 명 나라 사신이 조선에 올 때 접대관(接待官)과 주고 받은 시집. 1450년(世宗 32) 명 경종(明景宗)의 등극조서(登極詔書)를 가지고 온 사신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그때 원접사인 정인지ㆍ신숙주ㆍ성삼문과 서로 창화(唱和)한 시를 세종의 명으로 편찬하여 《황화집》이라 하였다. 이 《황화집》은 사신이 오고간 때마다 간행하여 명 나라 사신에게 보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문신에게도 널리 반포하였음.
178
[주D-003] 관벽(館壁)에 방(榜)을 쓴 사건 : 1606년(선조 39) 5월에 성균관 문묘(文廟)의 벽에 조정 대신과 내관(內官)의 이름을 열서(列書)하여 비방하고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의 비행을 규탄한 사실이 발생하자, 선조가 노하여 성균관 직숙관(直宿官)과 유생(儒生)을 하옥시켰으며, 학유(學諭) 고경오(高敬吾)와 관노(館奴) 등이 장살(杖殺)된 사건. 《朝鮮王朝實錄 卷200 宣祖 39年 6月條》
【원문】병오기행(丙午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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